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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랑길 제2차
영터버스정류장(3코스)~산소버스정류장(4코스)~원문버스정류장까지 걷기
○ 일시 : 2026. 5. 24.(일) 토요무박
○ 구간 거리(두루누비 자료) : 29.3km
- 3코스 : 영터버스정류장~명성입도~고천암자연생태공원~산소버스정류장(14.8km)
- 4코스 : 산소버스정류장~외입제~옥동제~옥동리마을회관~원문버스정류장(14.5km)
○ 실거리 : 29.71km(오룩스맵 기록)
○ 행정구역 : 전라남도 해남군 화산면, 황산면, 문내면
○ 인원 : 송주봉님, 최학주님, 유주열님, 산동네님, 사르리(신사산악회 43명)
○ 소요시간 : 7시간 26분(04시 52분~12시 18분)
○ 난이도 : ★★
○ 감상평 : ★★(옥매산, 화원지맥)
○ 추천시기 : 봄, 가을
○ 날씨 : 맑음, 기온 18.0℃~24.4℃, 풍속 4.3m/s(전라남도 해남날씨 기준 기상청)
○ 교통편 : 신사산악회 버스(죽전에서 탑승)
○ 개념도
▶ 3코스 : 영터버스정류장~명성입도~고천암자연생태공원~산소버스정류장
▶ 4코스 : 산소버스정류장~외입제~옥동제~옥동리마을회관~원문버스정류장
○ 오룩스맵 기록
▶ 걸은 통계
▶ 걸은 궤적
▶ 걸은 고도
○ 길 위의 풍경 및 이야기
玉은 구슬 옥이라는 한자로, '구슬', '진귀한 것', '아름다운 것, 등을 뜻한다. 중국에서는 '황금은 값을 매기지만 옥은 값을 매길 수없다'는 말처럼 물질적 가치보다 상징적·정신적 가치를 더 중시하는 맥락이 두드러집니다. 그리고 동서양 고분에서 부장물로 옥이 발견되었는데 무덤에 함께 배치됨으로써 사후 세계에 대한 준비나 신분·지위의 표시로 해석될 수 있다고 합니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옥은 사람들에게 귀한 대접을 받는 것 같다.
모든 사람들이 가슴에 인생의 玉을 품고 살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사람들이 품는 玉은 각자의 가치관과 삶을 살아온 환경 그리고 시대에 따라 다를 것이다. 그것이 물질적인 것이 될 수도 있을 것이고 아니면 정신적인 것이 될 수도 있을 것이고 다양하게 가슴에 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玉이라는 내재는 즐거움만 있는 것이 아니라 괴로움도 함께 포함 되어 있다고 생각을 한다. 자연에서 채취하는 玉은 원석을 캐서 가공을 하지만 사람들이 만드는 玉은 시간과 열정 그리고 노력 등 모든 것을 쏟아 부어서 좁쌀만한 크기에서 세월의 밭에서 굴러 눈사람 몸통처럼 커지는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 어쩌면 그것은 완성되지 못하는 미완의 완성으로 자신의 삶과 함께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늘 걷는 길에 옥매산 앞을 지나가게 될 것이다. 옥매산은 회원지맥 선상 해남군 황산면 옥동리 소재에 있는 산이다. 조선시대에 玉을 생산 하고 일제강점기였던 1910년부터 장식용 석재가 채취되었고 1924년부터는 명반석을 집중적으로 채굴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옥매산 광산에 얽힌 이야기는 앞을 지나갈 때에 자세히 설명을 하고 그당시에 광산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가슴에는 어떤 玉을 품고 살아갔을까 생각이 들고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삶의 玉은 무엇일까 생각을 해본다. 소년시절과 청년시절 그리고 중년을 지나고 장년의 막바지에서 노년을 바라보고 있는 지금 내 가슴에 쌓여 있는 玉은 어떤 형태일까 뒤돌아 본다. 어쩌면 아름다운 것 보다는 恨으로 남아있는 것이 더욱 많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래서 광물의 玉이 아닌 마음의 玉에 대하여 뒤돌아 보는 시간을 갖으려고 한다.
서해랑길 2호차까지 장대하게 많은 회원들이 출발하였으나 2호차 출발 적정인원이 모집이 않되 1호차만 출발하게 된다. 아마도 앞으로도 2호차 출발은 힘들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오늘도 수원에서 전철을 타고 죽전으로 이동을 해서 서울 신사역에서 출발한 버스에 탑승을 하고 신갈정류소에서 잠시 회원을 태우고 익산미륵사지휴게소와 함평천지휴게소 두 곳에 잠시 머물다 밤새 달려와 해남군 화산면 관동리 서해랑길 3코스 영터버스정류장에 도착을 한다.
밤보다 낮이 긴 계절은 자연에 대한 보너스를 받는 기분이다. 받는 만큼 주변 풍경을 더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날은 밝았지만 어둠의 흔적은 아직도 남아 있듯이 멀리 전기불빛들이 보이고 있다.
낯선 꽃을 보면 꽃이름이 궁금해지는데 전에는 식물도감에서 찾아 보려고해도 비슷비슷해서 찾기가 힘들었는데 AI발달로 사진을 촬영하면 즉시 꽃이름을 알려주는데 맞을 확률이 높다. 말발도리 꽃이라고 하며 조팝나무와 유사하다고 알려 준다.
명성임도를 걷는데 거리는 약 3.5km정도 된다.
도로를 걷다 임도를 걷는 것은 발바닥에 휴식을 주는 시간처럼 느껴진다.
나무잎은 여름을 맞이하기 위하여 점점 짙녹색으로 변신을 하고 있다.
활짝핀 이름모를 풀꽃으로 마음이 가벼워지게 만들고 하늘을 날고 싶은 마음에 팔을 벌려 본다.
봐도봐도 지겹지 않은 바다는 은은한 구름 잔재들이 내려 앉아 몽환적인 풍경이 연출된다.
주변 풍경이 마치 운문에 살포시 가리워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임도옆으로 삼형제바위 가는 이정표가 세워져 있는데 가지 않고 임도를 따라 직진 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곳 논에는 모들이 자리를 잡고 서 있을 것이다.
비닐하우스에서 자라던 고추 모종은 어느새 자라서 고추가 달리고 세상 밖으로 탈출을 하고 있다. 고추밭 지지대 숫자 만큼이나 농부의 고단 손길이 느껴진다.
바다 수면위로 그려진 산아래 가옥들이 수중도시처럼 보인다.
양식장 자재들을 운반하기 위한 부선들이 늘어서 있다.
아름다움은 애정을 만들고 수줍음은 연민의 정을 만든다. 분홍낮달맞이꽃이 수줍게 피어 있다.
임도 설치 목적은 산불진화용이라고 한다.
금계국 그리고 샤스타데이지 꽃이 활짝 피여 있다.
단독택지가 조성된 상부에 가옥이 있는데 주변에 금계국과 샤스타데이지를 식재하여 꽃이 활짝피여 있는 모습이 주인 모습을 보는 것 같다.
나홀로 여행객의 세상에 가장 좋은 풍경이 좋은 곳에 잠자리를 마련해서 잠을 자고 있다. 바이크 넘버가 세종에서 발급을 했으니 먼길을 달려서 왔다.
납골당 주변에도 조상들의 영혼에게 화사함을 선사하는 꽃들이 활짝 피여 있다.
고천암방조제길이 바다만큼이나 시원스럽게 뻗어 있다.
| 고천암방조제는 전라남도 해남군 황산면 한자리와 화산면 율동리를 연결하는 방조제로, 해남 간척사업의 핵심 시설입니다. 0 조성 시기(완공 시기): 간척사업은 농경지 확대와 농업용수 확보를 목적으로 추진되었으며, 1988년 10월 방조제가 완공되었습니다. 0 길이: 방조제의 길이는 **약 1,874m(1.87km)**입니다. 이 방조제 축조로 고천암호가 형성되었습니다. 0 면적: - 고천암 간척사업의 총 개발면적은 약 3,711ha(37.11㎢)입니다. - 이 가운데 간척지 면적은 약 2,383ha(23.83㎢), 담수호(고천암호) 면적은 약 803ha(8.03㎢)입니다. - 참고로 고천암호 자체의 수면 면적은 약 **6.65㎢**로 알려져 있습니다. [출처 : ChatGPT] |
배는 주인을 기다리고 해수관은 물을 빨아 올리느냐 열일을 하고 있다.
방조제를 걸을 때마다 느끼는 것은 사람의 힘이 얼마나 대단하다는 것을 발로 걸을면서 알 수가 있다.
고천암방조제에서 고천암호에 있는 담수호를 흘려 보내는 해남배수갑문 모습이다.
금요무박에 이어서 토요무박을 위해 달려온 버스는 주차장에서 주인을 모시고 잠을 자고 있다. 지금 시간은 버스 출입금지이다.
고천암자연생태공원을 한바퀴 돌아서 나온다.ㆍ
| 고천암 자연생태공원은 전남 해남군 고천암호 일원에 조성된 생태공원으로, 철새도래지와 습지 생태계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0. 기본 정보 ㆍ위치: 전라남도 해남군 황산면 고천암로 752-14 ㆍ개장: 2019년 4월 5일 ㆍ입장료: 무료 ㆍ운영: 연중무휴, 상시 개방 [출처 : ChatGPT] |
보리 수확시기가 가까워진 것을 알 수가 있다.
무명의 방조를 건너서 진행을 한다, 앞에 보이는 벗섬과 비각섬인데 지금은 육지와 연결되어 있다.
민물이 시원하게 바다로 흘러 들어가고 있다.
순백의 찔레꽃 가지가 손가락을 찌른다.
묘지 울타리를 측백나무로 조성하고 주변을 잘가꾸어 보기드문 묘지이다. 두 개의 봉문이 합장을 하지 않은 각각의 묘인지 아니면 합장을 한 두개의 묘인지 모르겠다.
서해랑길 3코스가 끝나는 해남군 황산면 한자리 소재 산소마을 풍경이다. 산소마을은 어촌·갯벌·김 양식 중심 전통 어촌마을이라고 한다.
[산소버스정류장 : 08시 35분]
서해랑길 3코스가 끝나는 산소버스정류장에 도착을 한다.
'산소마을은 한자리의 여러 자연부락 가운데 하나로, 평야와 갯벌이 넓게 펼쳐진 지역입니다. 해남에서 비교적 이른 시기에 어업조합이 설립된 마을로 알려져 있으며, 주민들은 김 양식과 어업에 종사해 왔다'고 한다.
서해랑길 4코스가 다시 시작되고 원문버스정류장까지는 약 14.5km를 걸어야 한다.
산소마을 주변 풍경이다.
서해랑길 3코스와 4코스 QR코드 인증을 남기고 있는 모습이다.
산소마을은 365일 태극기를 게양하는 태극기 마을이다. 집집마다 태극기가 게양되어 있다.
마을은 태극기만 불어오는 바람에 간간히 흔들릴뿐 인기척이 없이 조용하다.
산소리회관과 산소리경로당 모습이다.
담장을 넘어온 장미는 마을 전체를 붉게 만들고 있다.
처마밑에 말발굽버섯이 메달려 있다.
호동저수지에서 내려오 수량을 조절하는 호동배수장 앞을 지나간다.
야산 옆 걷기 좋은 비포장 농로길을 따라 걷는다.
우측 논에는 모내기가 끝나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습지 옆을 지나간다. 습지에는 부들이 자라고 있다.
우리나라 농어촌마을 정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는 초월마을 모습이다.
'초월리는 고천암 간척사업 이전에는 바다와 갯벌의 영향을 받던 지역이었으나, 고천암방조제가 완공되면서 대규모 농경지가 조성되어 현재의 농업 생산기반이 마련되었습니다' [출처 : ChatGPT]
아직도 남아 있는 스레트지붕 건물이다.
'이곳은 고천암 간척사업 이전에는 바다와 갯벌의 영향을 받던 지역 이었으나 고천암방조제가 완공되면서 대규모 농경지가 조성되어 현재의 농업 생산 기반이 마련 되었다'고 한다.
여름 배추가 무럭무럭 자라 수확철이 다가오고 있다. 해남하면 배추 아니겠는가 배추의 고장답게 양배추도 넓은 면적에서 재배되고 있다.
외입제 저수지 모습이다. 외입제(外入堤)는 전라남도 해남군 황산면 초월리 일대에 있는 농업용 저수지(둠벙·소류지 계열)이다.
외입제저수지옆 정자에서 간식을 먹으며 쉬었다 간다.
논에서는 트랙터가 모내기를 위한 사전 정지작업으로 써래질을 하고 있다.
황산면 외입리 소재 충신터마을을 지나간다.
성옥 이훈동선생 공적비이다.
학교처럼 보이는데 지도는 대우조선 행양직원숙소라고 한다.
교가에 "황산서교 서교 어린이" 가사말로는 초등학교였던 것 같은데 자세한 기록을 찾을 수가 없다.
도로위에서 올라오는 열기를 서서히 느끼는 계절이 시작되고 있다.
옥동제저수지 제방 아래에서 좌측 농로를 따라 발걸음을 옮긴다.
농부의 마음은 풍요보다는 고된 하루하루가 연속되는 것 같다. 모내기가 점점 끝이 나고 있다.
멀리 오른쪽으로 사면이 조금 벗겨져 보이는 산이 옥매산이다.
연근을 재배하는 논처럼 보인다.
산 하나가 채굴되어 없어지기 일보 직전이다.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과 소리가 장관이다. 일행은 보리 피리를 만들어 불고 있다.
대량 양식장에서 수차가 열심히 공기를 주입하고 있다.
옥을 채굴했던 노천광산 흔적이 보이는 옥매산이 보인다.
| 옥동마을은 인근의 옥매산에서 생산된 곱돌(활석)을 이용한 옥공예 산업이 발달하면서 성장했습니다. 1960~70년대에는 옥공예품 생산지로 이름을 알렸으나, 산업 쇠퇴 이후 장인 몇 명만 전통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출처 : ChatGPT] |
옥매산은 회원지맥 선상 해남군 황산면 옥동리와 문내면 용담리 경계에 있는 산이다.
| 옥매산은 지질학적으로 진도의 해양판과 화원반도의 등줄맥이 갈라지는 분기점에 해당한다고 한다. 옥매산은 조선시대에 옥(玉)을 생산하고, 전라우수영의 관아나 군함를 만드는 데 필요한 목재를 공급하는 국가 봉산(封山)이었다. 또 명량대첩의 승전지로 잘 알려진 울돌목의 입구에 있어 왜적의 동태를 감시하고, 강강술래를 하였다는 설화가 전하는 곳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였던 1910년부터 장식용 석재가 채취되었고, 1924년부터는 명반석을 집중적으로 채굴하기 시작하였다. 명반석은 알루미늄의 원료로 태평양전쟁 당시 전투기 등 군수품 제작에 이용되었다. 당시 정확한 생산량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1936년까지 기록된 자료에 따르면 한 해 10만 톤이 넘는 명반석이 채굴되어 일본으로 넘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강점기에는 일제가 군용비행기 제작에 필요한 알루미늄의 원료를 채석하기 위하여 대규모 광산으로 개발하자 실제로 옥매광산 인근 마을 주민들로 구성된 근로자가 1,200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실제로 옥매산 정상은 해발 173.9m였지만 채굴이 진행되면서 깎여 나갔고, 지금은 168m의 다른 봉우리가 정상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
| 옥매산 광산노동자 해몰 사건 [정의] 일제강점기 해남 옥매산의 광산노동자들이 1945년 8월 21일 제주에서 귀환하던 중 바다에 빠져 사망한 사건. [역사적 배경] 해남군 황산면 옥동리와 문내면 용암리 사이에 있는 옥매산(玉埋山)은 조선시대부터 옥으로 이름난 산이었다. 1910년 니시자키 쓰루타로[西崎鶴太郞]를 시작으로 일본인들이 옥매산 광산을 본격 경영하기 시작했으며, 1937년 7월부터는 아사다화학공업주식회사[淺田化學工業株式會社]가 경영을 이어갔다. 한편 패색이 짙어진 일제는 제주도를 일본 본토 사수의 보루로 삼아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였다. 이를 위해 수많은 조선인들인 투입되어 진지 동굴 등 군사 시설물을 집중적으로 구축하였다. [경과] 1945년 4월, 두 차례에 거쳐 약 220여 명의 옥매산 광산 노동자들이 제주도로 이송되었다. 가족들에게 알리지도 못한 채 경찰과 헌병의 포위 속에 진행된 강제징용이었다. 작업장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집합명령이 떨어져 영문도 모른 채 강제로 선창으로 끌려갔다고 한다. 일제는 제주도에 진지 동굴, 해안 동굴을 구축하고자 하였으며, 이를 위해 숙련된 옥매산 광산 노동자들의 발파 기술과 굴착 경험이 필요하였다. 옥매산 광산 노동자들이 파견된 곳은 제주도 모슬포 인근 지역과 구좌읍 해안 동굴, 산방산 등이었으며, 12시간의 고된 노동에 돌아온 것은 주먹밥 하나에 소금뿐이었다. 숙소 또한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었고 옥매산 노동자들은 고향으로 갈 수 있게 되었다. 해방의 혼란 속에서 어렵사리 배를 구하였고, 8월 20일 새벽 1시경 조선인 222명과 일본인 관리자 3명을 태운 35톤급 목선은 해남으로 출발하였다. 추자도와 보길도의 중간 지점에 이르던 아침 8시경 기관실에서 원인 모를 화재가 발생하였다. 불은 진화되지 못하였고 그렇게 4시간 동안 표류하였다. 노동자들은 침몰하는 배를 피해 바다로 뛰어들어야만 하였다. 화재 8시간 정도가 지날 무렵 목포에서 진해로 가던 군함이 이들을 발견하고 구조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구조된 일본인 한 명이 대부분이 조선인이라 하자 지금껏 구조한 사람들만을 태운 채 떠나 버렸다. 전원 구조가 아니었으며, 구조된 사람들도 청산도에 내려 주고 가 버렸다. 그렇게 구조되지 못한 118명은 고향을 밟지 못한 채 바다 속으로 사라졌다. [결과] 118명이 한꺼번에 사망하였기에 인근 마을들은 모두 비통할 수밖에 없었다. 마을에서는 그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한두 달 동안 굿을 하였다. 자손들은 음력 7월 16일을 제삿날로 정하고 매년 한날한시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산 사람 또한 화재로 인한 화상이나 정신적 충격 등 병으로 숨진 사람이 많았다. 옥매산 광산노동자 해몰 사건의 유가족들은 공론화를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역부족이었고, 2005년 한 일간지에 2면에 걸쳐 기사가 실린 이후 공론화되기 시작하였다. 해남에서는 지역신문인 『해남신문』에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정부 차원에서는 2005년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피해 조사가 이루어졌다. 2012년 8월 15일 옥매산에 박힌 쇠말뚝을 제거하는 행사가 치러졌으며, 쇠말뚝 제거 행사를 계기로 옥매광산유족회가 결성되었다. 옥매광산유족회 회장은 2012년부터 박철희가 맡고 있으며, 2018년 현재 회원은 60명이다. 1945년 사고 이후 해남을 떠나 연로하거나 수소문이 안 되는 유가족이 많았다. 2015년에는 지역극단 미암이 옥매산 광산노동자 해몰 사건을 모티브로 「그들의 귀향」이라는 연극을 제작하여 공연하였다. 2017년에는 국제적 네트워크를 갖춘 자연·문화유산 보전단체 내셔널트러스트가 옥매광산 건축물을 ‘올해의 꼭 지켜야 할 자연 문화유산’으로 선정했으며, 옥매광산유족회는 옥매광산 건축물을 근대 문화유산으로 지정하기 위해 노력하기로 하였다. 이 또한 옥매산 광산노동자 해몰 사건을 잊지 않고 추모하기 위한 하나의 일환이다. 2017년 『해남우리신문』을 비롯하여 해남 군민 100인의 제안으로 해남옥매광산 희생광부 추모조형물 건립추진위원회가 결성되었으며, 추모비 조성을 위해 해남 군민 1인이 1만 원씩 내는 성금모금행사가 진행되었다. 총 1,200여 명의 군민과 각 기관단체에서 1400여만 원의 건립 기금을 모금, 조형물 조성 비용을 충당하였다. 2018년 8월 26일에 추모제가 열리는 황산면 선착장 앞에 만들어진 추모 조형물은 배 모양 조각물 위에 희생된 118명의 광부를 상징하는 118개의 원 모양으로 되어 있다. 이외에도 해남에서는 옥매산 광산노동자 해몰 사건을 기리고 기억하기 위해 다양한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일제강점기 수많은 조선인들이 일제에 의해 전쟁터로 끌려가 총알받이가 되거나 전쟁기지를 건설하기 위한 고된 노동에 시달렸다. 2018년 10월 30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일본 기업이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고 판결하였다. 옥매광산유족회 또한 억울하게 돌아가신 분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으나 어려움을 겪고 있다. 유족들은 뿔뿔이 흩어졌으며, 현재 다들 고령의 나이이다. 해남 지역은 물론 광주 전남 지역의 사회단체를 중심으로 공론화와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
해남군 황산면 옥동리에 있는 옥동리 마을에 도착을 한다.
'옥동마을은 인근의 옥매산에서 생산된 곱돌(활석)을 이용한 옥공예 산업이 발달하면서 성장했습니다. 1960~70년대에는 옥공예품 생산지로 이름을 알렸으나, 산업 쇠퇴 이후 장인 몇 명만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고한다.
역사의 슬픔을 간직한 마을이지만 오늘은 하늘이 쾌청해 과거의 아픔을 치유해 주는 것 같다.
역시 배추의 고장을 알려 주려고 하는 듯이 드넓은 배추밭이 펼쳐지고 있다.
하늘색 벽돌 담장이 나그네의 마음을 밝게 만들어 준다.
후손들이 잘보살피고 있는 묘지가 보기 좋다.
옥매산에 대한 안내문이다.
죽은자는 말이 없다고 한다. 이들을 위한 제사를 지내고 추모비를 조성한다고 해서 이들의 한이 깨끗히 씻기지 않을 것이다. 이들의 가슴에는 맺지 못한 미완의 玉을 가슴에 안고 세상과 이별을 했을 것이다. 완성형 인간으로 생을 마치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을 한다. 그렇지만 누군가에 의해 자신의 삶을 빼앗긴다면 한이 가득한 미완의 삶으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
화원지맥 종주시에는 옥매산을 지나가기 바뻐 이런 내용을 알지 못하고 돌탑을 보면서 단순히 누군가 돌탑을 쌓느냐 고생했다는 생각만 했다.
멀리 산정상에 있는 구조물을 땡겨 보았는데 무엇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양배추 알이 여물어 가고 있다.
옥매산을 지나오면서 쾌청한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 보이는 것 같이 무겁게 느껴진다.
공덕비롤 비롯한 각종 비석이 모여 있다.
서해랑길 4코스가 끝나는 원문버스정류장에 도착을 한다.
오늘 걸은 길은 역사적으로 슬픔이 있는 길 이었다. 관동방조제앞 영터버스정류장에서 시작한 서해랑 3코스는 관두산 아래 명성임도길을 걷고 성좌동마을앞을 지나고 대월산을 돌아가는 도로를 걷고 입암마을을 지나 고천방조제를 걷고 산소마을, 초월마을, 외압제저수지, 충신터마을을 지나 옛 황산서교 앞을 지나고 옥동제 제방아래를 걷고 옥매산 광산노동자 해몰 사건으로 슬픔을 간직하고 있는 옥동마을을 지나 삼호마을을 걸어 원문마을에 도착을 하면서 4코스가 끝이 난다.
원문마을에는 식당이 없어 각자 준비한 음식으로 점심식사를 하는데 우리 일행은 오리훈제와 메밀콩국수, 옥수수전 등 푸짐하게 준비한 음식으로 점심식사를 하고 일행 모두 합류 후 수박을 먹고나서 서울로 출발하면서 일정을 모두 마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