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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여명을 맞이하는 공간 원문보기 글쓴이: 이준용
第2章 全 谷 邑
연천군 2읍 8개 면의 하나이다.
이 읍은 본래 양주군 영근면(嶺斤面)의 지역으로, 은대(隱垈)·명천(明川)·사랑(沙浪)·고탄(高灘)·릉동(陵洞)·고산(高山)·하원(下遠)·상원(上遠)·마포(馬浦)·간파(干坡) 등 10개 동리를 관할하였는데,
조선 광무 10년(1906) "칙령 제49호"인 지방 구역정리에 의하여 양주군 청송면의 금촌리(金村里)를 신답리(薪畓里)로 개칭하여 새로 편입하고, 전곡리(全谷里)를 하나의 법정리로 승격하여 12개 리가 되었으나,
1914년 4월 1일 일제의 군면 폐합에 따라 영근면이 연천군에 편입되면서 12개 리를 은대·전곡·신답·고릉·양원·마포·간파의 7개 리로 축소 개편하였고, 1914년 10월 1일 "조선총독부 경기도령 제26호"에 의해 영근면이 전곡면으로 개칭되었으나,
1945년 8·15 광복으로 3·8선 남쪽 지역인 양원리, 간파리는 동년 11월 3일 "군정법령 제22호"에 의해 파주군 적성면에 편입되었고, 그 외 5개 리는 공산 치하에 놓이게 되었다.
그 후, 6·25가 끝난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 임시 행정조치법"으로 3·8선 북한 지역이 수복된 후, 1963년 1월 1일 법률 제1178호인 "수복지구와 동 인접지구의 행정구역에 관한 임시조치법"에 의하여 적성면의 눌목리(訥木里)를 새로 편입하여 현재 범위의 8개 리가 되었으며, 1985년 10월 1일 "대통령령 제11772호"로 전곡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오늘에 이른다.
읍의 동쪽은 청산면과 동두천시, 남쪽은 양주군 남면과 은현면, 서쪽은 미산면·군남면과 파주군 적성면, 북쪽은 연천읍과 경계가 된다.
□일반현황
·읍사무소 소재지 : 전곡읍 은대3리 541
(1994년도 통계연보 기준)
+------+---------+-------------------------+----------+------------------------------+
|면 적| | 인 구 수 (명)| 인 구 | 리 수 |
| | 가 구 수+--------+--------+-------+ 밀 도 +-----+------+------+----------+
|(km ) | | 계 | 남 | 여 |(1인/1km )| 법정| 행정 | 반 | 자연마을 |
+------+---------+--------+--------+-------+----------+-----+------+------+----------+
| | | | | | | | | | |
|55,42 | 5,818 | 20,114 | 10,209 | 9,905 | 362,0 | 8 | 16 | 148 | 28 |
| | | | | | | | | | |
+------+---------+--------+--------+-------+----------+-----+------+------+----------+
1. 전곡리(全谷里)
본래 양주군 영근면(嶺斤面)의 지역으로, 땅이 적갈색 점토질 성분이 되어 봄철 해빙기나 여름 우기 때가 되면 사람의 통행이 어려울 정도로 몹시 질다 하여 '진골'이라 불리웠는데,
조선 광무 10년(1906) "칙령 제49호"인 지방구역정리에 의하여 하나의 법정리로 승격되면서 '진골'을 지금의 '전곡리'로 한자이름화 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기존의 사랑리(沙浪里)와 고탄리(高灘里)를 병합하여 지금의 범위를 갖추었으나,
1945년 8·15 광복 직후에 3·8선 북쪽에 위치하여 공산 치하에 놓이게 되었고 6·25가 끝난 후인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 임시 행정조치법"에 의거 행정권이 수복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6개의 행정리와 108개 반, 6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고 연천군 내 최고의 인구 밀집 지역이며 교통의 중심지이다.
1 높은여울(高灘洞) : 전곡시내 동북쪽, 한탄강 언덕에 있는 마을. 예전 이 곳에 턱이 높고 긴 여울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고탄교 가설과 보를 막아 여울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2 점터(店垈) : 높은여울에 있었던 마을. 8·15 광복 전까지도 옹기를 굽던 요업이 번창했던 마을이다.
당시에는 서해, 강화 등지에서 임진강을 통하여 한탄강까지 올라온 새우젓, 소금배들이 이 곳의 옹기·곡물 등과 물물교환을 통한 거래가 이루어져 장이 형성되었던 곳으로, 6·25 전에는 전곡 내에서 가장 큰 마을이었다 한다.
3 딴덩굴 : 높은여울 남쪽, 경원선 굴다리 부근의 이름이다.
4 서덜말 : 현 전곡역 서북쪽에 있던 마을. 6·25 전까지만 하여도 현무암으로 된 많은 양의 큰 돌들이 주변에 널려 있었다 하여 돌이 많이 있는 곳을 뜻하는 말인 '서덜'에서 뜻을 따와 지어진 이름이다. 지금은 이곳이 전곡시내의 중심가가 되어있다.
5 전곡역(全谷驛) : 높은여울 남쪽, 경원선에 있는 기차역.
6 성주개 : 전곡역 동남쪽, 한탄강 벼랑 위에 있는 마을.
7 밤나무골 : 성주개 남쪽에 있는 골짜기 이름. 예전에 밤나무가 많았던 곳이다.
8 말무덤자리 : 전곡 남쪽에 있던 고분. 예전에 말을 묻었다 하나, 최근에 이 부근을 밭으로 개간하여 멸실된 상태이다.
9 원모퉁이 : 말무덤 남쪽에 있는 모퉁이.
10 한여울 : 한탄강역 동쪽에 있는 한탄강의 큰 여울.("산천"편 참고)
11 낡은터 : 원모퉁이 서쪽에 있는 터.
12 마귀할미각담(全谷里 百濟初期積石塚) : 한탄강역 동쪽, 강변 충적대지 위에 있던 백제초기 대형 돌무지무덤. 전설에 의하면 마귀할미가 치마폭에 돌을 날라와 쌓았다고 하나, 일제 강점기 때 이 부근을 개간하면서 인멸되어 지금은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문화유적·유물편 "고분" 참고)
13 사무랭이 : 낡은터 남쪽, 한탄강변에 있던 넓은 모래사장. 한탄강이 범람하면서 쌓인 모래와 자갈이 넓은 퇴적층을 형성하였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나, 지금은 골재채취로 인한 하상변경으로 형태가 변해 있어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14 한여울다리(大灘橋, 漢灘橋) : 한탄강 국민관광지에서 청산면 초성리로 건너는 한탄강 다리. 현재 이 곳에는 경원선 철교와 2개의 콘크리트교량이 있다.
15 한탄강국민관광지 : 사랑이 남쪽, 한탄강변에 있는 관광지. 1977년 3월 31일 국민관광지로 지정되었으며, 위락 및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어 관광, 피서인파가 끊이지 않는 연천군의 명소이다.
16 사랑동(沙浪洞. 사랑이) : 한여울다리 북쪽에 있는 마을. 토질이 모래로 되어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며, 6·25 전에는 영양 천씨가 30호 살았던 곳이다.
17 부처낭(佛崖) : 사랑동 북쪽에 펼쳐진 현무암 석벽. 전설에 의하면 예전에 이 곳에 절이 있어 부처를 이 석벽 중간에 모셨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18 큰솔밭산(진솔밭산) : 부처낭 위에 있는 둔덕. 6·25 전까지도 이 곳에는 큰소나무가 우거진 넓은 군락이 있었다 한다.
19 성안이 : 전곡리 구석기유적관 북쪽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원형의 토성이 있었다 하여 '성안이'라 불리웠던 곳이라 전해 오나, 현재 지표에는 토성으로 확증되는 아무런 유구도 남아 있지 않다.
20 전곡리 선사유적지(全谷里 先史遺蹟址) : 지정문화재편 참고.
21 동섬 : 사랑이 서쪽, 한탄강 가운데에 있던 섬. 지금은 하상이 변하여 없어져 버린 상태이다.
22 새포촌(新浦村) : 동섬 북쪽, 한탄강에 있는 마을. 일제 초기에 새로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지금은 한탄강 국민관광지 내에 있어 많은 위락시설이 들어서 있다. 6·25 전에는 15호가 거주했다 한다.
23 고로지 : 전곡시가지 동쪽에 있는 길다랗고 협곡처럼 생긴 개울. 은대리와 경계가 된다. (은대리편 참고)
※ 제보자 : 천 응 규(81) 전곡읍 전곡6리 조흥아파트
김 득 규(78) 전곡리 445번지
이 동 우(78) 전곡리 305번지
2. 은대리(隱垈里)
본래 양주근 영근면의 지역으로, 고려가 멸망한 뒤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개로 음터(隱垈)에 은거한 일노정(逸老亭) 김양남(金揚南)의 사적에 의하여 은대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명천리(明川里)를 병합하여 은대리라 하여 연천군에 편입되었으나, 1945년 8·15 광복과 동시에 3·8선 북쪽에 위치하여 공산 치하에 놓였다가,
6·25가 끝난 후인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 임시 행정조치법"에 의거 행정권이 수복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4개의 행정리, 26개 반, 7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1 고로지 : 은대리 남쪽, 전곡리와 경계가 되는 긴 개울로, 지형이 깊고 우묵하여 예전에 문둥이가 많이 살았다 한다. 현재 위생처리장이 있다.
2 은대리 지석묘군(隱垈里 支石墓群) : 문화유적·유물편 "선사유적과 유물" 참고.
3 은대리 토성(隱垈里 土城) : 문화유적·유물편 "성지" 참고.
4 삼형제바위(三兄弟岩, 땡땡바위, 용바위) : 은대리 성지 서쪽, 한탄강과 장진천이 합류되는 곳에 있는 바위.
옛날에 일찍이 남편을 여의고 아들 삼형제와 함께 궁핍한 살림을 하던 한 어머니가 있었는데 얼마 안 되는 농토를 일구면서도 돈독한 우애로 성장해 가는 자식들을 대견해 하며 열심히 살림을 꾸려 가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무덥던 여름날, 밭에서 김을 매던 삼형제는 더위를 식히러 가까운 한탄강으로 나가 물장난을 치며 즐겁게 목욕을 하고 있었는데 당시 13살이던 막내가 깊은 물속에 실족을 하여 강물에 떠내려 가기 시작했다.
이 광경을 목격한 두 형(15·17세)은 동생을 구하기 위해 급히 물속으로 뛰어 들었으나 수심이 깊고 물살이 빠르기로 이름난 한탄강이라 삼형제가 기진맥진하여 안타깝게도 모두 물에 빠져 죽었는데, 이 소식을 들은 어머니는 울면서 황급히 강가로 달려 왔으나 시퍼런 강물만 무심히 흐를 뿐 아이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아 땅을 치고 통곡을 하며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그 후 3개월이 지난 어느날, 수척해진 몸으로 강가를 찾던 어머니는 눈앞에 신기한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다름 아닌 물에 빠져죽은 삼형제의 모습이 강 가운데 나타나더니 갑자기 세 개의 큰 바위로 변하여 강물에 솟아 있는 기적같은 현상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 광경을 목격한 어머니는 삼형제 모두가 살아 돌아온 것 같이 기뻐 이 사실을 마을에 알리게 되었고 그 후 동네 사람들은 세 개의 바위 중 제일 큰 바위에 정성으로 제단을 만들고 이 곳에 빠져죽은 삼형제의 넋을 위로하고 동네 아이들의 안전을 위하여 매년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한다.
지금도 이 바위는 완연히 남아 있고 그 때의 전설에 따라 이 세 개의 바위를 '삼형제바위'라 이름지었다 한다.
5 음터(隱垈, 盤谷) : 은대리 성지 북쪽, 우묵한 지형 안에 있는 마을. 조선 개국초 태종(李芳遠)과는 동학동방(同學同榜)이며 오랜 교유를 했던 고려진사(進士) 일노정(逸老亭) 김양남(金揚南)이 고려가 망하자 망국의 한을 달래며 불사이군의 절개로 은거한 곳이라 하여 '은터'라 했던 곳이 지금의 '음터'로 음이 변하였다 한다.
지금도 이 곳에는 김양남의 사적이 서려 있는 학소정(鶴巢亭), 국사봉(國思峰) 등의 지명이 남아 있으며, 6·25 전에는 안동 권씨가 80여호 세거했던 마을이라 한다. (일노정 김양남은 "명묘" 참고)
6 학수쟁이(鶴巢亭) : 음터 북쪽, 현무암 절벽 위에 있던 정자. 일노정이 고려의 신하로써 절개를 지키기 위하여 은거한 후 지은 조그만 초정(草亭)으로 이 정자를 지은 뒤부터 주변에 학이 날아 들어 둥지를 틀고 일노공과 벗하며 놀았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며, 그가 죽은 뒤 학들로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한다. ≪참고문헌 : 강릉김 씨가승≫
7 새점고개 : 선바위 남쪽에 있는 고개. 장진천 건너에 있던 군남면 황지리의 새점으로 가는 고개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8 새점나루 : 선바위 서쪽, 장진천에 있던 나루. 예전에는 물이 많아 배로 통행을 했으나, 지금은 수량이 적어 돌징검다리가 놓여져 있다.
9 선바위(立岩. 88m) : 현 은대2리 장진천변에 있는 바위산. 정상부 바위의 둘레는 약 50m, 높이 15m 크기로, 재질은 연천계 변성암으로 이루어져 있고 용암대지상에 솟아 있는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다.
오랜 옛날부터 전해 오는 바에 의하면 송화가루 날리는 어느 봄날 옥색저고리와 다홍치마로 곱게 단장한 선녀가 이 바위 꼭대기에 앉아 바느질그릇을 옆에 놓고 고운손으로 바느질을 하다가 손을 멈추고 사면에 펼쳐진 기암절벽의 아름다운 경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다.
마침 그 때, 이 마을에 사는 힘이 세고 인물이 뛰어난 이사랑(李四郞)이란 젊은이가 이 곳을 지나가다 바위 위에서 바느질을 하고 있는 선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올라가 만나보고 싶은 마음에 지나던 발길을 멈추었다. 그러나, 아무리 힘이 센 장사라 할지라도 십여미터나 되는 높은 바위꼭대기를 오를 수가 없었다.
뛰어 올라가면 미끄러지고, 또 뛰어오르다가 미끄러지며 갖은 애를 썼으나 여러번 실패한 이사랑은 올라가기 위한 한가지 묘안을 생각해 냈다. 그는 비록 죽는 한이 있더라도 선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가까이서 보고 싶은 마음에 도끼로 바위를 찍고 올라가기로 작정하고 도끼를 가지고 와서 바위를 찍기 시작하였다.
바위가 반쯤 깎아졌을 때 위 에서 바느질을 하던 선녀가 이 모습을 보고 위기감을 느낀 나머지 황급히 바느질그릇도 내버린 채 하늘을 향하여 급히 올라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혼신의 힘을 다하여 도끼로 바위를 찍던 장사가 바위 위를 올려다 보니 이미 때는 늦어 선녀는 바위를 떠나 하늘 높이 날아가고 있었다.
이사랑은 온몸이 맥이 풀리고 마음이 상해 들고 있던 도끼를 내던지고 미친듯이 날뛰며 하늘을 향해 발버둥쳤으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 후 그는 마침내 실성을 하여 사방을 헤매다가 바위 아래로 흐르는 차탄천(장진천) 푸른 물에 몸을 던져 세상을 뜨고 말았다.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도 은대리 벌판 한편에 우뚝 서 있는 이 바위는 이사랑 장사가 도끼를 찍은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으며, 아랫부분이 거의 반이나 깎여 넘어질듯 서 있다 하여 후세 사람들이 이 바위를 '선바위'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10 개와막(瓦幕) : 선바위 부근에 있는 마을. 일제 강점기 때 기와를 구웠던 곳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며, 현재 은대2리의 중심 마을이다.
11 명천동(明川洞) : 선바위 북쪽에 있던 마을. 옛 양주군 영근면의 명천리 마을이 있던 곳이다.
12 네즈뫼 : 명천동 북쪽에 있었던 마을. 옛날에 네가구가 모여 살았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13 용모소 : 서나드리 남쪽, 장진천에 있는 소(沼). 장진천 중앙에 위치한 이 소는 물속에 용이 살고 있다는 용굴이 있고, 그 굴 위에는 큰 용의 모양을 닮은 바위 2개가 있어 운치를 더해 주는 곳이다. 현재 이 부근에는 풍천관광농원이 위치한다.
14 서나드리(西山渡) : 은대리에서 군남면 왕림리의 지루개와 서산으로 건너 다니던 나루터. 현재 콘크리트다리가 나 있다. (나드리는 나루의 방언임)
15 물푸레쟁이 : 네즈뫼 북쪽에 있던 물푸레나무 정자. 6·25 전까지 큰 물푸레나무고목이 각담 위에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6 벌말(坪村) : 은대리 서쪽, 벌판 끝에 새로 생긴 마을. 현재 은대1리 지역이 된다.
17 어수물(御水井) : 3번 국도변에 있는 은대4리에서 가장 큰 마을. 조선 개국 초 태종 이방원이 고려 신하로써 절조를 지키며 연천읍 현가리 도당골에 은거하고 있던 금은(琴隱) 이양소(李陽昭)를 만나기 위해 연천으로 친행(親幸)하던 중, 이 곳에 있는 우물에서 물을 마셨다 하여 이 우물을 '어수물'로 명명했다 한다. 이 우물은 지금도 남아 있다. (연천읍 수레울·도당골, 군남면 왕림리의 정자터 참고)
18 샛통재(間通峴) : 어수물 동쪽, 한탄강변에 있는 마을. 전곡과 연천읍 통재의 사이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6·25 전에는 이천 서씨(利川徐氏)의 집성촌이었다 한다.
19 뫼안(山內) : 어수물 남쪽에 있는 마을. 확 트인 가사평에 자리잡은 은대리의 여러 마을 중에서 우묵한 골짜기 안에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20 발애(渤 ) : 뫼안 남쪽에 있는 마을. 유래는 자세하지 않다.
21 가사평(袈裟坪) : 전곡읍 은대리와 전곡리, 연천읍 통현리에 걸쳐 있는 연천군 제일의 평야이며 곡창지대. 점토질 성분으로 된 이 곳의 토질이 이른 봄 해빙기나 여름철 우기 때가 되면 인마의 통행이 어려울 정도로 질고 미끄러워 예전에 한탄강을 건너서 통현리까지의 20리 벌판 길을 통과하자면 기운이 다 빠지고 탈진상태가 되었다는 사연을 간직한 곳이다.
조선 영조조에 편찬된 ≪輿地圖書. 1757≫에는 이곳의 유래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예전에 어떤 중이 이 벌판을 지나가다 진흙속에 넘어지고 자빠지고 하여 온몸이 진흙투성이가 되어 걸음을 옮길 수 없게 되자 입고 있던 가사를 벗어 버리고 갔다 하여 '가사평'으로 명명되었다
' (원문 : 袈裟坪在縣南十里春夏泥滑 不能着足古有一僧過此氣乏棄其袈裟而去仍名)라고 이 곳을 기술하고 있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 연천현 제영(題詠)조에 실린 서거정(徐居正)의 시에는 '봄 진흙 미끄러워 말도 가기 어렵구나, 양주서 오는 길 높았다 낮았다 하네......'- 滑滑春泥怯馬蹄 楊州行路互鼓低 - 라고 이 곳의 인상을 시로 남기기도 하였다.
6·25가 끝나고 이곳이 수복지구가 되면서 사람들이 차츰 입주하고부터는 진 땅 때문인지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사는 곳'이란 별칭도 붙게 되었으나, 농지정리가 되고 도로가 포장되면서부터 잡초가 무성하던 이 곳 황무지가 연천 제일의 곡창지대로 변하여 가을이면 누런 황금벌판이 장관을 이루는 곳이 되었다.
22 주주물 : 현 전곡고등학교 북쪽에 있던 유명한 우물. 현재는 매몰되어 없어 졌다.
23 흙구덩이 : 주주물 동쪽에 있던 큰 구덩이. 일제 강점기 때 전곡리 높은여울에 있던 점터에서 이 곳의 흙을 채취하여 옹기를 구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24 안말(안전곡) : 전곡읍사무소 북쪽에 있는 마을. 우묵하게 생긴 지형의 안에 있는 마을이라 지어진 이름이다.
25 구호주택(救護住宅) : 현 전곡읍사무소 북쪽에 있는 마을. 6·25 직후 피난민을 구호하기 위하여 만들어 놓은 주택이 있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26 모퉁이 : 현 전곡시가지 북쪽, 주유소 앞에 있는 사거리의 옛 지명.
27 비석거리 : 구호주택 서쪽에 있던 예전의 통행로. 이 곳에 일제 강점기 때 까지도 무쇠비석 1기가 있었다 하나, 6·25 이후 행방을 알 수 없다 한다.
28 구전곡 : 예전에 전곡의 중심지가 되었던 곳으로, 지금의 농지개량조합 청사의 부근이 된다.
29 한양골고개 : 현 전곡시내에서 음터로 통하는 고개.
30 공동묘지 : 한양골고개 남쪽에 있는 일제 때 만들어진 공동묘지.
※ 제 보 자 : 김 태 선(81) 전곡읍 은대2리
김 득 규(78) 전곡2리
김 봉 길(75) 전곡1리
이 종 근(53) 은대3리
3. 신답리(薪畓里)
본래 양주군 청송면(靑松面)의 금촌리(金村里) 지역인데, 조선 광무 10년(1906) "칙령 제49호"인 지방구역정리에 의하여 양주군 영근면에 편입되면서 지금의 신답리로 개칭되었고,
1914년 영근면이 연천군에 편입되면서 연천군에 속하게 되었으나, 1945년 8·15 광복과 동시에 3·8선 북쪽에 위치하여 공산 치하에 놓였다가, 6·25가 끝난 후인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 임시 행정조치법"에 의거 행정권이 수복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1개의 행정 리, 6개 반, 2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 신답리(薪畓里)의 어원에 대하여 ......: 신답리의 유래는 연천읍 고문리의 삼거리 남쪽에 있는 '섶논'으로 인하여 붙여진 땅이름이다.
이 논이름의 앞음절 '섶'은 우리 고유의 방언으로 '큰 강이나 개울의 옆'을 뜻하는 말로 씌어 왔는데 이 곳의 '섶'역시 한탄강과 바로 인접해 있어 그 원뜻을 더욱 명확히 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이 곳 신답리는 '큰 강 옆에 있는 논'이라는 뜻의 '섶논'일 뿐, 소리 그대로 음차한 전혀 다른 의미의 '섶 신(薪)'자와는 거리가 먼 지명이다.
1 아우라지 : 신답리 남쪽, 한탄강과 포천군 백운산에서 발원하는 영평천(永平川)이 합류하며 어우러지는 곳의 강이름으로, '어우르다','어우러지다','여럿이 한데 합하다'라는 뜻의 우리 고어인 '아울'에 매개모음인 '아'와 단순히 땅이름에 붙는 접미사인 '지'가 붙어 이루어진 땅이름이다.
아울 +(아) 지 = 아울아지 > 아우라지
2 연천댐 : 아우라지 아래에 있는 댐으로, 1984년 10월 31일 준공되어 전기발전 및 상수원확보 등 다목적으로 건설된 소수력발전소(최대 발전용량 : 6.000Kw). 이 댐이 건설되기 전에는 아우라지에 신답리와 청산면 궁평리를 이어주는 뱃나루가, 6·25 후에는 잠수교가 있었으나, 지금은 물속에 잠겨 있는 상태이다.
3 우무소 : 연천댐 서쪽, 장탄리의 풀무산 밑에 있는 큰 소(沼).
4 새말(新村) : 아우라지 북쪽에 있던 마을. 지금은 군부대 사격장이 되어 있다.
5 공동묘지 : 풀무산 북쪽에 있는 공동묘지. 일제 강점기 때 만들어 졌다.
6 선봉나드리(仙峰 -) : 신답리에서 청산면 장탄2리 선봉(=풀무산)으로 건너다니던 나루. (나드리는 나루의 방언) 예전에는 여울이 얕아 무릎만 걷어 올려도 건널 수 있던 곳이었으나, 댐을 막은 뒤부터 수량이 줄었고 부근에 유원지가 형성되어 있다.
7 박쥐굴 : 긴등 남쪽, 한탄강 현무암 절벽에 있는 자연굴. 깊이는 약 10m 정도이고 박쥐들이 많이 서식하는 곳이다.
8 낭너머 : 개안 서쪽에 있는 한탄강 절벽으로, 일제 강점기 때 이 곳에서 많은 양의 금을 캐 갔던 곳이라 한다.
9 강신터(降神-) : 낭너머 동쪽, 큰 잣나무가 있던 곳으로, 6·25 전까지도 무인(巫人)들이 이 나무를 부군당(府君堂)으로 받들며 매년 정월대보름날에 큰굿을 벌였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10 개안 : 강신터 남쪽에 있는 움푹 들어간 골짜기. 여름에 한탄강이 범람하면 큰 물이 이 곳까지 들어온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11 물방아골 : 개안 동쪽, 예전에 물레방아가 있었던 골짜기.
12 긴등 : 박쥐굴 북쪽에 있는 붉은 등성이. 연천읍 고문리 토토봉의 서쪽 끝이 된다.
13 섶논(薪畓) : 긴등 동쪽에 있는 논. 한탄강의 옆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신답리의 유래가 되는 곳이다.
14 세청뒤 : 쇠촌 북쪽에 있는 들판.
15 마내 : 쇠촌 북쪽에 있는 골짜기. 강릉 김씨의 묘가 있다.
16 마내고개 : 쇠촌에서 마내로 넘어가는 고개.
17 마내배턱 : 마내에서 포천군 창수면 신흥리로 건너 다니던 한탄강 나루.
18 쇠촌이(金村.쇠춘이) : 마내고개 남쪽에 있는 신답리에서 가장 큰 마을. 옛 청송면 금촌리의 유래가 되는 곳이다. 풍수지리설로는 이 마을이 청산면 장탄2리에 있다는 도가니혈(穴) 명국(名局)의 한 형세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청산면 장탄리 "풀무산" 참고)
19 빨래터 : 쇠촌이 동쪽, 한탄강에 있는 빨래터.
20 사모바위(紗帽岩) : 빨래터 옆에 있는 사모처럼 생긴 바위.
21 성황당 : 쇠촌이 남쪽에 있는 부군당으로, 6·25 전까지도 매년 정월 14일 돼지를 제물로 고사를 올렸으나, 수복 후 이 곳에 있던 큰 참나무와 소나무 고목을 베어 버려 지금은 농경지가 되어 버렸다.
22 약물터 : 빨래터 남쪽에 있는 약수.
23 개틀 : 새말 동쪽에 있던 마을.
24 신답리 고구려석실분 I·II·III(薪畓里 高句麗石室墳 I·II·III = 말무덤) : 문화유적·유물편 "고분" 참고.
25 신답리 선사유물 산포지(薪畓里 先史遺物 散布地) : 문화유적·유물편 "선사유적과 유물" 참고.
※ 제 보 자 : 차 재 순(79) 연천읍 통현2리 2반
박 운 서(76) 청산면 궁평2리
임 영 진(70) 연천읍 옥산3리 (태양주택)
김 수 남(67) 전곡읍 전곡6리 (조흥아파트)
4. 양원리(兩遠里)
본래 양주군 영근면의 지역으로, 옛 양주 관아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멀원리'라 불 리워오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기존의 윗멀원리(上遠里)와 아랫멀원리(下遠里)를 병합하여 상원과 하원의 두 '원'자를 따서 양원리하 하여 연천군에 편입되었으나,
1945년 8·15 광복과 동시에 3·8선 남쪽이 되어 파주군 적성면에 편입되었다가, 6·25가 끝난 후인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 임시 행정조치법"에 의거 행정권이 수복되었고, 1960년 11월 18일 "구역확장규칙 개정"에 따라 다시 연천군 전곡면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1개의 행정리, 6개 반, 4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1 좁은모탱이 : 무쇠봉 서쪽에 있는 모퉁이. 지형이 매우 협소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현재 이 곳으로 368번 지방도가 지나가며 부근에 레미콘공장이 있다.
2 독점말 : 좁은모탱이 북쪽에 있던 마을. 예전에 독을 굽던 요지(窯址)가 있던 곳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요지터는 적성면 적암리에 위치한다.)
3 장구봉 : 독점말 동쪽에 있는 두 봉우리. 모양이 장고와 같은 형상이다.
4 지르르미고개(지르르미번댕이) : 장구봉 사이에 있는 고개. 아랫양원리에서 독점말로 질러서 넘어다니는 지름길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5 좌승지 방 강 묘(左承旨 方綱 墓) : 문화유적·유물편 "명묘" 참고.
6 아마니고개 : 양원리와 파주군 적성면 적암리 경계에 있는 고개. 예전에 어떤 과부가 바람이 나서 이 고개를 넘어 고릉리 쪽으로 있는 서방고개를 지나 밤이슬을 맞고 야행을 다녔는데, 그 과부의 아들이 이 사실을 알고 어머니를 말리기 위해 기와말뒤에 있는 부릉(부른)고개에서 어머니를 불렀다 하여 그 고개를 '부릉고개'라 하였 고, 그 어머니가 넘어 다니던 이 고개를 '아마니고개'라 하였다 한다.
7 윗작대산 : 아마니고개 북쪽에 있는 산. 이 산 중턱에 차돌로 된 자갈이 많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8 무학골고개(舞鶴谷峴) : 무학골에서 마포리에 있는 같은 이름의 무학골로 넘어 가는 고개.
9 무학골(= 무악골, 무안골) : 마포리 참고.
10 아랫작대산 : 윗작대산 북쪽에 있는 자갈이 많은 산.
11 벼루봉 : 아랫작대산 서쪽에 있는 봉우리.(마포리편 참고)
12 안개골 : 아랫작대산 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한탄강과 임진강이 합류하는 도감포와 가까워 늘 안개가 많이 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3 둔쳇밭 : 안개골 입구에 있는 밭.
14 뽕나무뙈기밭 : 둔쳇밭 옆에 있는 밭. 예전에 뽕나무가 많았다 한다.
15 큰굴다리 : 꽃봉 북쪽에 있는 골짜기.
16 진사래밭 : 꽃봉 남쪽에 있는 토질이 습하고 진 밭. 전설에 의하면 예전에 이 곳까지 강물이 들어왔다 한다.
17 꽃봉(花峰) : 꽃봉말 북쪽에 있는 봉우리.
18 성균관대사성 조지빈 묘(成均館大司成 趙趾彬 墓) : 문화유적·유물편 "명묘" 참고.
19 서낭당고개 : 아랫양원리에서 고릉리의 능말로 통하는 고개. 예전에 서낭당이 있던 곳이다.
20 공동묘지 : 37번 국도 옆에 있는 공동묘지.
21 서방고개 : 양원리와 고릉리 사이에 있는 고개.(아마니고개 참고)
22 안인동 : 서방고개 남쪽에 있는 골짜기.
23 양원리 지석묘(兩遠里 支石墓) : 지정문화재편 참고.
24 마산(馬山) : 양원리 지석묘 서쪽에 있는 긴 산. 지형이 말과 닮았다 한다.
25 안골 : 동막동 입구에 있는 작은 골짜기.
26 호랭이윗방 : 안골 옆에 있는 골짜기. 6·25 전까지도 호랑이가 많이 나타났던 곳이라 한다.
27 뒷골 : 동막동 동쪽에 있는 골짜기. 예전 뒷간(화장실)에서 쓰였던 돌과 같이 생긴 큰 바위가 나란히 있어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28 동막동(東幕洞 = 퉁맥이) : 양원리 지석묘 동남쪽, 골짜기 안에 있는 마을. 다른 곳에 비하여 유난히 돌이 많은 이 곳은 돌(石)이 고어인 '독'과 '막'이 합하여 '독막'이 되었던 것이 ㅁ앞에 ㄱ이 ㅇ으로 변하는 자음동화현상으로 '동막'으로 발음이 굳어지게 되었는데, 한자로 지명을 옮겨 쓰면서 '東幕'이 된 곳이다. 6·25 전에는 경주 김씨가 60여호 살았다.
29 마당지골 : 동막동 동쪽에 있는 골짜기.
30 돌무골 : 마당지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 그 안에 박쥐굴, 평풍바위가 있다.
31 둔지봉 : 낟가리바위 위에 있는 봉우리. '둥글다'의 뜻으로 쓰인 고어의 '둠'과 산(山)의 옛말 '재'가 합하여 '둥근산'이란 뜻의 '둠재'가 되었던 것이 뒤에 같은 뜻의 '봉(峰)'이 합하며 아래와 같은 변화를 거쳐 '둔지봉'이 된 땅이름이다.
둠 + 재 + 봉 = 둠재봉 > 둠지봉 > 둔지봉
32 낟가리바위(露積岩) : 둔지봉 아래에 있는 큰 바위. 모양이 곡식을 쌓아 놓은 것 같아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33 수박덩어리 : 동막동 남쪽에 있는 봉우리. 지형이 수박덩쿨과 같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34 동막고개(東幕峴) : 동막동에서 윗양원리로 넘어 다니는 고개.
35 가는골(細谷) : 동막골 남쪽에 있는 작은 골짜기.
36 속가는골 : 가는골 안쪽에 있는 작은 골짜기.
37 배나무골 : 가는골 북쪽에 있는 작은 골짜기로, 예전에 배나무가 많았다 한다.
38 골띠기 : 동막동 서쪽에 있는 골짜기.
39 작은능안 : 양원리 지석묘 남쪽에 있는 골짜기. 안능안에 비하여 작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40 옥녀봉(玉女峰) : 양원리 지석묘 남쪽에 있는 바위 봉우리.
41 부릉고개 : 응달말에서 기와말로 넘어 다니는 고개.(아마니고개 참고)
42 응달말 : 조지빈 묘 남쪽에 있는 마을. 음지에 위치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43 꽃봉말(花峰村) : 아랫작대산 동쪽에 있던 마을. 이 곳은 마을 뒤편에 있는 꽃봉의 산자락 아래에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는 유래를 담고 있으나, 이 곳 꽃봉(花峰)의 원래 뜻은 '꽃'과는 거리가 먼, 땅의 어느 한 부분이 새의 주둥이처럼 길게 뻗어 나온 지형을 뜻하는 말인 '곶(串)'처럼 되어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옥녀봉에서 흘러내려온 산자락이 이 곳에 와서 작은 봉우리를 이루어 '곶봉(串峰)'으로 불리워지던 것이 엉뚱하게도 발음이 변하면서 한자 이름인 '꽃봉(花峰)'이 된 곳이다.
전설에 따르면 아주 옛날 양주군의 관아가 이 곳에 위치했다고 하나, 문헌에 상세하지 않아 고증이 어려운 상태이다.
44 창자리 : 꽃봉말 남쪽에 있던 창고 터. 예전에 큰 기지창고(무기창)가 있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으로, 지금은 이 곳이 농경지가 되어 있다.
45 오리나무백이논 : 창자리 옆에 있는 논. 예전에 큰 오리나무가 있었다 하여 지어 진 이름이지만, 지금은 경지정리가 되어 형태를 알 수 없게 변해 있다.
46 왼개비들논 : 기와말 옆에 있는 논. 예전에 큰 장이 섰던 곳이라 한다.
47 부릉논 : 부릉고개 밑에 있는 고래실 논.
48 기와말(瓦村) : 예전에 참봉(參奉)벼슬을 지낸 사람의 90칸 규모가 되는 큰 기와집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 아랫양원리의 중심이 되는 곳이며, 6·25 전에는 남원 양씨가 많이 살았던 곳이다.
49 함박골 : 기와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
50 안능안 : 옥녀봉 남쪽에 있는 큰 골짜기. 조판서의 묘가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51 수리봉(289m) : 옥녀봉 남쪽에 있는 봉우리. 지형이 높고 험준한 곳이 되어 수리들이 많이 서식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52 갈가지골 : 안능안 남쪽에 있는 작은 골짜기. 예전에 호랑이 새끼인 갈가지(= 개호주)가 자주 나타났다 하여 붙여진 골짜기 이름이라 한다.
53 무당바위 : 갈가지골 아래에 있는 큰 바위. 6·25 전까지도 이 바위 위에서 무당들이 큰 굿을 벌였던 곳이었으나, 지금은 이 바위가 무너져 있고 무인들의 발길도 끊어졌다 한다.
54 쇠목 : 아랫양원리와 윗양원리 사이에 있는 좁은 목으로, 경기 북부지방에서 '사이'의 뜻으로 쓰이는 '새'가 '쇠'로 발음되는 현상이 그대로 나타나는 곳이다.
55 동편말 : 수리봉 남쪽에 있는 윗양원리 3개 마을 중 하나. 동쪽에 위치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56 뒷골모탱이 : 동편말 동쪽에 있는 뒤골로 가는 산 모퉁이.
57 뒤골 : 수리봉에 딸린 작은 골짜기. 동막고개의 밑이 되며, 동편말의 뒤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58 풀무골(冶谷) : 낟가리바위 남쪽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대장간이 있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59 윗양원리(上遠里) : 수리봉 남쪽에 있는 동편말·중간말·서편말 전체를 합쳐 부르는 이름이다. 이 곳은 지금부터 300년 전에 경주 정씨·공주 이씨가, 그 후 단양우씨·개성 왕씨들이 차례로 정착하여 마을을 이루었다 한다.
60 중간말(=도란말) : 동편말 남쪽에 있는 마을. 동편말과 서편말의 중간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61 산소골 : 중간말 동쪽에 있는 작은 골짜기. 현재 공주 이씨의 산소가 있다.
62 중앉은골 : 산소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63 절네미고개(寺踰峴, 下鳳岩峴) : 윗양원리에서 동두천시 하봉암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예전에 하봉암동에 절이 있어 양원리에서 이 고개를 넘어 그 절에 다녔다 하여 지어진 고개 이름이다. 정상에 돌서낭당이 있었다 한다. ('네미'는 넘는다는 뜻의 우리 고어이다)
64 상봉암고개(上鳳岩峴) : 윗양원리 작은깊은골에서 동두천시 상봉암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65 꾀꼬리봉 : 양원리 가장 남쪽에 있는 마차산에 딸린 봉우리. 간파리와 동두천시, 양원리의 경계가 되는 꼭지점이다.
66 작은깊은골 : 중앉은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 큰깊은골에 상대되는 이름이다.
67 큰깊은골 : 작은깊은골 서쪽에 있는 깊은 골짜기.
68 뫼약골 : 깊은골 옆에 있는 골짜기.
69 앞산너머 : 산소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
70 앞산 : 중간말 남쪽에 있는 산.
71 개안논 : 중간말 남쪽에 있는 논. 무쇠봉에서 내려오는 물과 깊은골에서 내려오는 두 물이 합쳐지는 개울의 안에 있는 논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72 가마소 : 앞산 서쪽에 있는 소(沼).
73 늑박골 : 앞산 남쪽에 있는 골짜기.
74 막태골 : 늑박골 옆에 있는 골짜기.
75 매봉 : 막태골과 제비작골 사이에 있는 봉우리. 예전에 꿩사냥을 할 때 이 봉우리에서 매를 날렸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76 쇠길재등 : 매봉으로 뻗어 내려온 산 등.
77 제비작골 : 매봉 옆에 딸린 골짜기. '고비작골'이라고도 불리워지는 곳이다.
78 배나무골 : 매봉 서쪽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큰 배나무가 있었던 곳이다.
79 대락골 : 무쇠봉 남쪽에 있는 골짜기.
80 사시나미고개 : 양원리 대락골에서 간파리로 넘어가는 고개. 이 곳은 '사이(間)'의 조어(祖語) '삿'이 연철된 '사시'와, 넘는다는 뜻의 고어인 '네미'가 음이 변한 '나미'에, '고개'가 합쳐서 이루어진 복합지명으로, 양원리와 간파리 '사이를 넘어다니는 고개'라는 뜻의 '사시나미고개(間踰峴)'이다.
81 모래기 : 사시나미고개 북쪽, 무쇠봉에 딸린 골짜기.
82 무쇠봉(水鐵峰. 水鐵城. 398m) : 문화유적·유물편 "성지" 참고.
83 수리바위 : 무쇠봉 동쪽에 있는 수리처럼 생긴 바위.
84 가는골 : 수리바위 옆에 있는 가는 골짜기.
85 윗골 : 매봉 북쪽에 있는 골짜기.
86 불당골 : 앞산 서쪽에 있는 골짜기. 이 곳은 예전에 절이 있었던 곳으로 전해 내려오나, 현재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87 산제터 : 윗양원리 서편말에서 산제(山祭)를 올리던 터.
88 서편말 : 윗양원리의 중간말에서 서편에 있는 마을.
89 성황당(城隍堂) : 개안논 옆에 있었던 성황당. 6·25 전까지 큰 성황당 나무와 장승이 있었으나, 지금은 논으로 변해 버렸다.
90 도당골 : 서편말 뒤에 있는 골짜기로, 예전에 이 지역의 수호신을 모시던 도당(都 堂)이 있었다 한다.
91 약물바위 : 태봉 동쪽에 있는 큰 바위. 이 바위 밑에 있는 좁은굴에서 약수가 나오는데, 전설에 의하면 이 물을 마시고 앉은뱅이가 일어났다 하며 피부병에도 효험이 있다 한다.
92 태봉(胎峰) : 약물바위 위에 있는 봉우리. 예전에 이 봉우리 정상에 태를 묻었다하나 자세한 내용은 전해오지 않는다.
93 절골 : 무쇠봉 북쪽에 있는 큰 골짜기. 예전에 절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현재 이 절터에는 소량의 와편이 출토되고 있다.
※ 제 보 자 : 이 태 형(80) 전곡읍 양원리 2반
이 원 규(71) 2반
박 상 림(70)
우 창 제(55) 1반
5. 간파리(干坡里)
본래 양주군 영근면의 지역으로, '간파' 또는 '간패'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페합에 따라 연천군에 편입되었고, 1945년 8·15 광복과 동시에 3·8선 남쪽이 되어 파주군 적성면에 편입되었다가, 6·25가 끝난 후인 1960년 11월 18일 "구역확장규칙"개정에 따라 다시 연천군 전곡면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1개의 행정리와 3개 반, 4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1 간패고개(干坡峴) : 간파리에서 양주군 남면의 황방리로 통하는 고개. 현재 368번 지방도가 나 있다.
2 간파리 봉수지(烽隧址) : 문화유적·유물편 "봉수지" 참고.
3 쇠마지골(金馬地谷) : 간패 남쪽에 있는 골짜기.
4 안흥고개(安興峴) : 간파리 쇠마지골에서 동두천시 안흥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5 마차산(馬車山. 摩嵯山. 烽火山. 588,4m) : 간파리 동쪽, 동두천시와 경계에 있는 높은 산. 이 산에 대한 고기록 가운데 김정호의 ≪大東地志≫ 양주편 산수조에는'마차산(摩嵯山)은 양주군에서 북으로 60리에 위치한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기타 고지도 및 읍지에는 모두 '摩嵯'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일제 강점 이후 행정구역 폐 합 및 국토 전역의 세부측량 당시 현재 표기의 '馬車'로 오기한 것으로 추측된다.
실제로 산의 외형은 높이 솟아 있는 정상부로 올라가면서 암석으로 이루어진 뾰족한 삼각형에 높고 험준한 모양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으뜸이 되는 봉우리'의
뜻인 옛말 '맏자(맛재)'가 여러가지 한자이름을 낳게 된 '마차'로 음차된 것으로 보여진다.
산의 정상에는 삼국시대 쓰였던 봉수지가 있었는데, 동쪽의 포천방향과 서쪽에 위치한 눌목리 봉수지와 서로 연결되었다 하나, 지금은 흔적이 남아 있지 않고 편평한 대지를 이루고 있다.
6 형제바위(兄弟岩) : 마차산 서쪽, 8부 능선에 있는 모양이 같은 두 개의 바위. 수복 후 한쪽 바위가 쓰러져 지금은 한 개만 남아 있다.
7 간파리 일명사지(干坡里 逸名寺址) : 간패 마을 동쪽, 마차산 골짜기에 있는 절터. 예전에 이 절이 번창했을 때 무관(武官)들의 기도처로 유명했다는 전설이 전해오나, 연혁 및 절이름은 자세하지 않다.
현재 200여평 정도의 절터에는 축대가 남아 있다.
8 석성골(石城谷) : 간패 남쪽, 마차산에 딸린 골짜기.
9 남순하 효자문(南舜夏 孝子門) : 지정문화재편 참고.
10 간패(干坡) : 효자정문이 있는 마을. 의령 남씨(宜寧南氏)가 집성촌을 이루는 곳이다.
11 간파리 은행나무 : 효자정문 옆에 있는 큰 은행나무. 수령은 약 310년, 높이 27m, 둘레 4,5m 크기로, 현재 군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12 동구밖느티나무 : 효자정문 앞에 있는 큰 느티나무. 수령은 460년, 높이 26m, 둘레 5,3m 크기로, 봄철에 이 나무의 잎이 위로부터 밑으로 피면 그 해는 풍년이 들고, 나무 밖으로 구렁이가 나오면 큰 장마가 온다는 전설을 간직한 나무로, 간패마을에서는 신성시하여 보호하며 한발이 극심할 때에는 이 나무에 기우제를 지내기도 한다. 현재 군보호수(郡保護樹)로 지정되어 있다.
13 매봉재 : 간패마을 동북쪽에 있는 산. 이 산은 산(山)의 뜻인 '뫼'가 음이 변한 '매'와 봉(峰)이 합쳐져 단순히 산봉우리라는 뜻을 담고 있던 것이 뒤에 다시 산의 다른 말인 '재'가 합하여 이루어진 복합지명이다.
매(山) + 봉(峰) + 재(山) = 매봉재
14 개누운골 : 매봉재 북쪽에 있는 골짜기. 산의 형상이 개가 누워 있는 모습과 같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하며, 6·25 전에는 정씨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았던 곳이다. 지도상에는 '가는골'로 표기되어 있다.
15 한가지골 : 송산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일제 때 사이비종교로 악명높았던 백백교(白白敎)의 양민 시해장소였던 곳이다. 지금도 주변 마을에서는 당시 만행의 현장을 목격한 이 마을 원로들의 증언을 들을 수 있다.
16 꾀꼬리봉 : 마차산 북쪽, 양원리와 동두천시 경계에 있는 산.
17 송산골(松山洞) : 개누운골 북쪽에 있는 마을. 6·25 전에는 배천 조씨와 밀양박씨들이 집성촌을 이루었던 곳이다.
18 새말 : 송산골 위에 있는 새로 생긴 마을.
19 사시나미고개 : 간파리에서 윗양원리로 넘어가는 고개.(양원리편 참고)
20 무쇠봉(水鐵峰. 398m) : 간파리와 양원리 경계에 있는 봉우리.정상에 산성이 남아 있다.(양원리편 참고)
21 좁은모탱이 : 간파리 북쪽, 368번 지방도에 있는 모퉁이. 지형이 좁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제 보 자 : 홍 성 진(78) 전곡읍 눌목1리
남 상 린(65) 간파리
이 현 구(59) 눌목2리
6. 눌목리(訥木里)
본래 적성현(積城縣) 동면(東面)의 일목리( 木里)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놀목동'에서 이름을 따 '눌목리'라 하여 연천군 적성면에 편입되었고, 1945년 11월 3일 "군정법령 제22호"인 행정구역 조정에 의하여 3·8선 남쪽 지역이 되어 파주군 적성면으로 편입되었다가,
1963년 1월 1일 법률 제1178호인 "수복지구와 동 인접지구의 행정구역에 관한 임시조치법"에 의거 파주군 적성면에서 연천군 전곡면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2개의 행정리, 4개 반, 2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1 천내개울 : 눌목동에서 발원하여 파주군 적성면 적암리로 내려가는 개울.
2 산막골 : 문바위 동쪽에 있는 작은 골짜기.
3 양지짝 : 천내개울 왼쪽에 있는 산비탈. 하루종일 해가 잘 비치는 양지바른 곳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4 봉화터(烽隧址) : 문화유적·유물편 "눌목리 봉수지" 참고.
5 독매기 : 앞자리 앞에 있는 개울.
6 앞자리 : 청룡뿌리 북쪽에 있는 논. 눌목동 마을의 앞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7 눌목동(訥木洞) : 앞자리 부근에 있는 마을. 고려시대에 호(號)의 첫글자가 눌(訥)로 시작되는 처사(處士)가 살았다 하여 '눌목리'라 불리워지게 되었다는 유래를 가지고 있으나, 본래의 뜻은 눌처사와는 전혀 무관한 이 곳의 지형과 관련되어 생긴 지명이다.
우리말에 '넓다'는 말의 어근은 '널'에 두고 있는데 이 '널'은 지방 방언의 특색에 따라 '눌','늘','널','놀','날','납' 등의 여러 형태로 음이 변하여 전국 땅이름에 무척 많이 분포하며, 이 곳 눌목리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어서 이 마을 남쪽에 있는 '새우고개'나, 서쪽의 '설렁고개' 모두가 '넓게 늘어져 있는 고개의 목' 형태를 하고 있으므로, 처음에 이와 같은 뜻의 '눌목'으로 불리워지던 것이 한자로 음차되면서 전혀 다른 의미의 '訥木'으로 표기되어 엉뚱하게도 '눌처사'라는 가상인물을 연상시켜 풀이되면서 본래 담겨져 있는 뜻이 잘못 정착되어 씌어지게 된 곳이다.
이 곳은 조선시대에는 원흥태(元興太)와 장(張)씨, 명(明)씨 성을 가진 세 사람이 살았는데, 지금부터 200년 전에 채광덕(蔡光德)이란 선비가 이 곳에 터를 잡은 뒤부터 지금까지 평강 채씨(平康蔡氏)의 집성촌이 형성되어 있다. (6·25 전에는 평강채씨가 25가구 모여 살았다 한다)
또한 이 마을은 감악산 정상부의 분지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하늘아래 첫동네'라고도 불리워지고 있다.
8 설렁고개 : 눌목동에서 설렁골로 넘어 다니는 고개. 이 고개를 넘어 가면 파주군 적성면 장현리로 통한다.
9 설렁골 : 설렁고개 너머에 있는 골짜기. 감악산 북쪽에 있는 깊은 산골짜기인데, 대낮에도 호랑이가 '설렁설렁' 나다녔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10 흠헌개울 : 설렁골에서 적성면 장현리로 흐르는 개울. 계곡물이 감악산의 험한 산세 사이를 심한 경사를 이루며 흘러 내려간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11 수리봉(470m) : 놀목동 서쪽에 솟은 높은 바위봉우리. 하늘을 날아 다니는 '수리' 와는 거리가 먼 단순히 '높음','으뜸'의 뜻으로 쓰인 고어의 '술'이 연철된 땅이름이다.(신서면 대광리 "수리봉" 참고)
12 곰채골 : 눌목동 서쪽에 있는 큰 골짜기. 해마다 2·3월이 되면 눌목동 마을에서 감악산에 산제를 올리는 곳인데, 약수가 유명하다.
13 산꾸지(山串) : 설렁고개 옆에 있는 수리봉에서 내려온 산부리. 새의 주둥이처럼 길게 뻗어 나온 곶(串)의 형태가 되어 '산곶'으로 불리워지던 것이 '곶'이 '꾸지' 로 연철되면서 발음이 굳어져 버린 땅이름이다.('곶'은 중면 삼곶리편 참고)
14 숯굽밭 : 산꾸지 옆에 있는 밭. 예전에 숯을 굽던 곳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15 청룡끝(靑龍-) : 앞자리 옆에 있는 산부리. 채씨 묘의 좌청룡 끝이 된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16 새산수개 : 곰채골 옆에 있는 산. 새로 산소(=묘)를 쓴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7 사태골 : 곰채골 남쪽에 있는 산사태가 잘나는 골짜기.
18 달암절터 : 수리봉 남쪽에 있는 절터. 험준하게 솟아오른 큰 바위 밑에 절을 매달아 지었다 하여 유래된 절 이름으로, 절터에 있는 우물이 유명하다.
19 새우고개 : 승배골에서 눌목동으로 넘어다니던 고개. 길이 새우의 등처럼 굽었다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20 됫면 : 새우고개에 있는 경사가 심한 산비탈. 고갯마루에 이르러 지형이 가파르고 몹시 되어 이 곳을 지나가자면 매우 힘들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21 방죽이(방죽골) : 사태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방죽이 있다.
22 잣나무떼기 : 사태골 동쪽에 있는 밭. 예전에 큰 잣나무가 많았다 한다.
23 진사래밭 : 눌목동 남쪽에 있는 길게 생긴 밭.
24 물퉁이자리 : 앞자리 동쪽에 있는 논. 어떠한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는 곳이 되어 지어진 이름이다.
25 음지짝 : 양지짝 동쪽에 있는 밭. 산이 높아 해가 늦게 드는 음지가 되어 지어진 이름이다.
26 석문골(石門谷, 문바위) : 할미성 남쪽에 있는 골짜기. 큰 바위가 문처럼 서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27 눌목리 노고성(訥木里 老姑城. 할미성·아미성) : 문화유적·유물편 "성지" 참고.
28 노두골(老大洞, 露臺洞) : 할미성 남쪽에 있는 마을. '노대암(露臺巖)'이라는 큰 바위가 있어 '노대동'으로 불리워오다 차츰 '노두'로 어휘가 변했다 하며, 전주 이씨 효령대군파 후손들이 모여사는 곳으로 눌목2리가 된다.
29 삭정고개 : 노두골에서 눌목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30 망두개 : 노두골 남쪽에 있는 산.
31 작은노두골 : 망두개 남쪽에 있는 골짜기. 노두골에 상대되는 이름이다.
32 평풍바위 : 작은노두골 서쪽에 있는 병풍같이 넓은 바위.
33 뾰족바위 : 작은노두골 서쪽, 병풍바위 위에 있는 뾰족한 바위.
34 노대바위(露臺巖) : 뾰족바위 아래에 있는 바위.
35 상가마골 ; 작은노두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 상가마골·작은상가마골로 나뉜다.
36 능안말 : 망두개 남쪽에 있는 마을.
37 눌목리고개 : 능안말에서 눌목동으로 넘어다니던 고개.
38 절골 : 능안말에 있는 골짜기로, 절터의 경내에 있던 우물이 매우 유명했다 한다. 현재 사지(寺址)에서는 기와편이 출토되며 '고려당골'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39 구광터 : 능안말 동쪽에 있는 터.
40 주막거리 : 368번 지방도 옆에 있는 마을. 예전에 주막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41 행자마골 : 능안말 남쪽에 있는 좁은 골짜기.
42 비석거리 : 승배골 입구에 있는 마을. 예전에 비석이 서 있었다 하나, 지금은 확인 할 수 없다.
43 간패고개 : 비석거리 남쪽에 있는 고개. 양주군 남면의 황방리로 넘어간다.
44 눌목리 은행나무 : 승배골에 있는 큰 은행나무. 수령 약 160년, 높이 27m, 둘레 4,3m 크기이며 군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45 고두절고개 : 승배골에서 눌목동으로 넘어 다니던 고개. 고려 말에 불교가 번창했을 당시 이 골짜기 곳곳에 크고 작은 절들이 자리하고 있어 이 고개를 오르자면 '고기도 절, 요기도 절'이란 말이 유행하여 고두절고개로 이름이 지어졌다 한다.
46 승배골(僧配谷, 신배골, 酸梨洞, 순박골) : 감악산 동쪽에 있는 큰 골짜기. 조선이 건국된 후 불교탄압이 심해지자 감악산 내에서도 산세가 좋고 절이 많던 이 곳에 자연적으로 승려들이 모여 들었다 하여 '승배골'이라 명명했다는 설과, 예전에 이 골짜기 안에 신맛이 나는 큰 배나무가 있었다 하여 '신배골(酸梨洞)'로 불리워지게 되었다는 두가지 설이 전해 내려 온다.
47 고진사모이등 : 승배골 안에 있는 산 등. 고진사(高進士)의 묘가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48 부도선골 : 고진사모이등 옆에 있는 작은 골짜기. 예전에 부도(浮屠)가 있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었으나, 지금은 이 부도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49 사지목고개 : 고진사모이등 남쪽에 있는 고개. 승배골에서 양주군 남면의 황방리로 넘어가며, 감악산에서 내려온 네개의 큰 산자락의 목에 있는 고개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 제 보 자 : 채 천 석(83) 전곡읍 눌목1리
홍 성 진(78)
남 건 희(64) 눌목2리
채 수 건(60) 눌목1리
이 현 구(59) 눌목2리
7. 고릉리(高陵里)
본래 양구준 영근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기존의 릉동리(陵洞里)와 고산리(高山里)를 병합하여 고산과 릉동의 이름에서 한자씩 따 고릉리라 하여 연천군에 편입되었고, 1945년 8·15 광복과 동시에 3·8선 북쪽 지역이 되어 공산 치하에 놓이게 되었으며, 6·25가 끝난 후인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 임시 행정조치법"에 의거 행정권이 수복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1개의 행정리, 3개 반, 1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1 벙바위 : 도감포 동쪽, 한탄강 옆에 있는 바위. 예전에 부엉이들이 서식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2 작은굴타리 : 범바위 동쪽에 있는 골짜기. 양원리의 큰굴타리에 상대되는 이름이다.
3 빨래나드리 : 고릉리에서 군남면 남계리로 건너 다니던 나루터.
4 물깨골 : 빨래나드리 남쪽에 있는 골짜기. 한탄강의 옆에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5 능안 :빨래나드리 남쪽에 있는 골짜기. 조선초에 고려 신하로써 절개를 지킨 일노정 김양남의 묘가 있어 지어진 이름이다.
6 일노정 김양남 묘(逸老亭 金揚南 墓) : 문화유적·유물편 "명묘" 참고.
7 삼신골 : 서낭당고개 북쪽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이 골짜기에 좋은 약수가 있었는데, 이 물을 마시고 앉은뱅이가 일어났다는 전설을 담고 있는 곳이다.
8 연못골 : 삼신골 옆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큰 연못이 있었으나, 지금은 매몰되어 농경지가 되어 있다.
9 서낭당고개 : 고릉리에서 아랫양원리로 넘어 다니던 서낭당이 있던 고개 이름이다.
10 개미산삐뚜리 : 서낭당고개 북쪽에 있는 개미가 많은 산 삐뚜리.
11 고릉리 백자요지 I(高陵里 白磁窯址 I = 沙器店) : 문화유적·유물편 "도요지" 참고.
12 산제당골 : 고릉리 사기점 동쪽에 있는 골짜기. 6·25 전까지도 4년에 한 번씩 산제를 올렸는데, 검은색 돼지를 제물로 하여 무인(巫人)이 주관했다 한다.
13 능말(陵洞, 粉土洞) : 사기점 부근에 있는 마을로, 최초에는 주(朱)씨가 개척을 했으나, 6·25 전에는 고성 이씨가 30호 모여 살았던 곳이다.
14 박쥐골 : 능안 동쪽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사기점이 성업을 이룰 때에 이 곳에서 고령토를 채취하였는데, 폐광이 된 후 그 굴 속에 박쥐들이 많이 서식한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15 성가마골 : 국사봉 남쪽에 있는 큰 골짜기. 현재 도자기의 원료가 되는 고령토를 생산하는 도석광산이 있다.
16 고장골 : 국사봉 남쪽에 있는 골짜기.
17 넘점고개 : 고장골에서 황촌말에 있는 사기점으로 넘어 다니던 고개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18 국사봉(國思峰, 面鏡山, 案山, 177m) : 넘점고개 북쪽에 있는 높은 봉우리 이름. 고려 멸망후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개로 전곡읍 음터(隱垈)에 은거한 일노정 김양남이 고려 멸망의 한을 달래기 위해 매일 이 산에 올라 송도(개성)를 향하여 망궐례(望闕禮)를 올린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6·25 전까지만 하여도 이 봉우리 정상에는 두 그루의 큰 소나무와 함께 그 옆에는 조그만 당집이 있었는데 내부에는 말을 타고 군장을 갗춘 무관소상(武官塑像)이 여러 위(位)있었으나, 6·25 로 인하여 모두 파괴되고 소실되어 지금은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또한 주변에서 묘자리를 잡을 때 이 산을 안산으로 많이 잡는다 하여 '안산'으로도 불리워지고 있다.(면경산의 유래는 군남면 황지리의 "빗접산" 참고)
19 황촌말(黃村) : 국사봉 동쪽에 있는 마을. 예전 영근면의 고산리(高山里) 지역이 되며 6·25 전에는 황씨 8가구가 집성촌을 이루었던 곳이다.
20 고릉리 백자요지 II(高陵里 白磁窯址 II) : 문화유적·유물편 "도요지" 참고.
21 고새기낭절벽 : 황촌말 남쪽, 한탄강변에 있는 높고 큰 절벽.
22 갓모산 : 논낭골 서쪽에 있는 산. 모양이 갓모양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23 잔방골 : 갓모산 남쪽에 있는 골짜기. 이 곳은 '작다(小)'는 뜻의 옛말인 '잔'과 '산'의 고어 '받'이 음이 변한 '방'에 골이 합쳐져 이루어진 땅이름으로 '작은 산골짜기'라는 뜻을 가진 곳이다.
잔(小) + 방(山) + 골(谷) = 잔방골
24 서방고개 : 고릉리와 양원리로 통하는 고개. 현재 37번 국도가 지나간다. (양원리편 참고)
25 구리나무골 : 서방고개 동쪽에 있는 큰 골짜기.
26 논낭골 : 갓모산 동쪽에 있는 골짜기.
27 죽골 : 논낭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28 작은죽골 : 죽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29 평바위 : 한탄교 서쪽, 강변에 있는 넓고 편평한 바위.
※ 제 보 자 : 천 응 규(81) 전곡읍 전곡6리 조흥아파트 7동
김 성 준(70)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석수2동 272 - 25
(전 재경 연천군민회장)
이 윤 찬(57) 전곡읍 고릉리
8. 마포리(馬浦里)
본래 양주군 영근면의 지역으로, 임진강에 마개(馬浦)나루가 있어 마포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연천군에 편입되었고 1945년 8·15 광복 직후 3·8선에 의해 남북으로 분리되었다가 6·25 후인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 임시 행정조치법"에 의거 행정권이 수복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1개의 행정리로 되어 있고 전지역이 민간인 미입주 상태이다.
1 서낭당고개 : 마포리에서 적성면 어유지리로 넘어가는 고개. 이 고갯마루에 서낭당이 있었다 한다.
2 용못(龍淵) : 꽃답벌 서쪽에 있는 못. 옛날에 이무기가 살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명주실 한 꾸러미가 가 들어가고도 모자라는 깊이라 한다.
3 꽃답벌 : 임진강 남쪽, 마포리에 펼쳐져 있는 넓은 벌판.
4 마포교(馬浦橋, 마개) : 마포리에서 미산면 동이리로 건너다니는 콘크리트 다리. 예전에 나루가 있던 곳이다.
5 된번지 : 도감포 남쪽, 현무암 절벽 위에 있는 둔덕 이름.
6 벼루산골 ; 된번지 남쪽에 있는 골짜기. 벼루산의 밑에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7 벼루봉(硯峰) : 된번지 남쪽에 있는 봉우리. 예전에 천지가 개벽하여 이 곳이 물바다가 되었을 때 이 봉우리 정상이 벼루만큼 남았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전한다.
8 무학골고개 : 마포리 무학골에서 양원리의 무학골로 넘어가는 고개.
9 무학골(舞鶴谷) : 벼루봉 서쪽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어떤 사람이 이 곳에 있던 선대 묘소를 천묘(遷墓)할 때, 관 안에서 나온 흰 학이 마전리의 하오고개 쪽으로 날아 갔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10 차력산( 礫山. 257m) : 마포리와 파주군 적성면 적암리 경계에 있는 산. 차돌질 로 이루어진 큰 바위가 오랜 세월 풍화되면서 자갈처럼 흘러 내려 쌓인 것이 산기슭 곳곳에 많이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양원리의 작대산도 같은 의미의 땅이름이다.
11 긴골 : 무학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
12 낡은터골 : 긴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
13 문필봉(文筆峰) : 벼루산골 서쪽에 있는 봉우리. 산의 형상이 글월 '문(文)'자와 같이 생겼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는 설과, 붓끝같이 봉우리가 뾰족하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는 두가지 유래를 담고 있는 곳이다.
14 다래산골 : 문필봉 남쪽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다래나무 덩쿨이 많았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15 좌의정 조태억 묘(左議政 趙泰億 墓) : 문화유적·유물편 "명묘" 참고.
※ 제 보 자 : 이 창 윤(80) 파주군 적성면 어유지리 2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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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해라 뭐시 그리 많대요![?](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59.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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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공 아주 논문이네요![?](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59.gif)
아는 지명은 거의 없군요 몇개밖에요![?](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59.gif)
준용씨 이거 다 쓰시다가는 머리가 백발이 ![ㅋ](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5.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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