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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봉림 | |
1839년 사진의 발명이 일반에 공표된 후 사진은 일반 역사와 함께 하면서 자신의 역사를 구축해 왔다. 공적인 역사와 개인의 삶과도 함께 하면서, 기술의 한계를 끊임없이 갱신하면서 사진의 ‘기록’과 ‘표현’은 끊임없이 영역을 확대해 왔다. 사진영역의 증식은 인류사에 있어서 중대한 변화양상을 동반했다. 문자 텍스트 중심으로 이루어진 지식과 정보, 욕망의 교환체계를 사진은 이미지 중심의 체계로 빠르게 변환시켰다. 이미지 사회를 도래케 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하면서 사진의 역사를 만든 대표적 사진들을 추려본다. 1. 니세포르 니엡스 Nicéphore Niépce, <셍-루-드-바렌느에 위치한 니엡스의 영지, 르 그라의 창문에서 본 조망>, 1826년경, ⓒ Gernsheim Collection, Harry Ransom Humanities Research Center, University of Texas (Austin). 니엡스는 렌즈가 달린 암상자를 이용하여 감광판에 현실의 이미지를 기록한 후 요오드 기체를 쏘여 음과 양이 현실 그대로 나타나는 양화상을 얻었고, 그는 이를 조망 point de vue 이라 명명했다. 후에 사진이라 명명될 재현 중 가장 오래된 이 사진을 촬영하기 위한 노출시간은 8시간 이상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이 시간 동안 해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건물의 양편 모두를 비추었기 때문에 명암의 대비가 없어졌다. 따라서 오리지널은 장시간 노출로 인해 건물의 입체감이 사라졌고 표면은 번들거려 상을 제대로 보기가 힘든 상태다. 우리가 보는 사진은 코닥연구소가 콘트라스트를 강화한 복제 사진이다. 2. 루이 작크 망데 다게르 Louis-Jacques-Mandé Daguerre, <탕플 대로의 광경>, 1838경, 다게레오타입, 뮌헨 시립미술관.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대낮에 찍었음에도 불구하고, 탕플 대로에는 구두를 닦고 있는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텅 비어 있다. 소설가 미셸 투르니에 Michel Tournier의 표현을 빌면, “파리가 중성자탄의 공격을 받은 듯”, 건물과 도로는 그대로 인데, 움직이는 생명체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던 것이다. 1839년 프랑스 정부가 다게르로부터 발명특허권을 매입한 후 그 프로세스를 일반에게 공개한 초기의 다게레오타입은 촬영 속도가 너무 느려서, 다시 말해 너무 긴 노출시간 때문에, 움직이는 물체는 포착하지 못했던 것이다.
3. 헨리 폭스 탈보트 William Henry Fox Talbot, <건초더미> in The Pencil of Nature, 칼로타입 네거티브로부터 은염 종이 프린트, 15.1 x 20cm, 1844, The National Museum of Photography, Film and Television. 최초의 사진 도판집,「자연의 연필」에 수록된 총 24점의 은염 프린트는 탈보트가 1841년 2월 8일, 특허를 출원한 ‘칼로타입 사진공정 Calotype Photographic Process’의 폭넓은 사용범위와 무엇보다도 다게레오타입이 갖지 못한 네거티브 원판의 무한 복제성을 알리는 것이었다. 풍경 10점, 정물 4점, 일상 정경 3점, 식물과 레이스의 포토그램 2점, 판화와 인쇄물의 사진복사 3점, 석고조상 촬영 2점 등 칼로타입이 유용하게 적용될 수 있는 영역을 망라했고, 각 책은 원판 네거티브, 즉 칼로타입에 의거해 뽑은 양화 프린트를 붙임으로써 칼로타입의 기술복제성을 입증해 보였다. 4. 로저 펜튼 Roger Fenton, <죽음의 계곡>, 알부민 인화지, 27.2cm x 36.4cm, 1855, The Art Institute of Chicago, Photography Gallery. 영국, 프랑스, 터어키 연합군이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맞서 벌인 크리미아 전쟁의 종군을 위해, 빅토리아 왕가의 초상사진 촬영을 수 차례 담당했고, 대영 박물관의 사진가로 일하고 있던 로저 펜튼은 1855년 2월 20일, 사진 종군을 위해 크리미아 반도로 떠났다. 인용한 사진이 보여주듯이 사진사는 해외원정 전쟁에 대해 국민들이 품는 극도의 불안감을 불식시키고자 한 권력의 목적에 부응하기 위해 고통 없는 전쟁, 주검 없는 전장, 정적인 전투를 재현했다.
5. 앙드레 아돌프 디스데리 André-Adolphe Disdéri , <카바네>, 알부민 인화지, 1858, 프랑스 국립도서관 (Paris). 명함판 초상 사진을 발명한 디스데리는 수백만 프랑의 돈을 벌기 시작한다. 결정적 요인은 “훨씬 싼값에 훨씬 더 많이 주는” 명함판 사진의 대중적 특성이었다. 약 6 x 9 cm 크기의 명함판 사진은 4개의 렌즈가 달린 카메라로 찍었는데, 고정식 홀더를 사용할 경우 동일한 장면 4장이 한꺼번에 한 원판 위에 기록되었고, 이동식 홀더를 사용할 경우 4, 6, 혹은 8 종류의 상이한 포즈의 장면이 원판 위에 기록되었다. 디스데리가 발명한 명함판 사진과 더불어 초상은 아틀리에의 산물이 아니라 어떠한 예술적 취향에도 반하는, ‘공장’이 찍어낸 상품이 되었다. 전신상 모델의 포즈나 배경 장식 커튼, 모델의 의상이나 액세서리, 무대 소도구에 있어서 지겨우리 만치 유사하기 때문이다. 6. 티모시 오설리번 Timothy O`Sullivan <스팀보츠의 균열 증기>, 알부민 인화지, 1867, 21.6 X 27.9 cm, 국립자료보관소 (cat. 394) 오설리번은 1867년에서 1869년, 또 1872년에 위도 40도선을 미국 지질탐사대의 사진사로 횡단했고, 1871년 그리고 1873년에서 1874년까지는 경도 80도선을 미 서부 지형탐사대의 일원으로 종단했다. 그의 웅대한 지질학적, 지형학적 탐사 자료사진들은 이후 미국 풍경사진의 전범으로 자리잡게 돼 현대 풍경사진작가들에게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7. 이드위어드 머이브릿지 Eadweard J. Muybridge, <말달리기>, 1878. 영국 출신으로 캘리포니아에서 활동한 머이브릿지는 1877년 말의 움직임을 찍은 사진으로 유명해진다. 12대의 사진기를 정렬해 놓고 말이 렌즈의 중심축을 지날 때 줄로 연결된 셔터가 끊어지도록 함으로써 연속사진의 촬영에 성공한다. 그것은 말의 동작에 대한 육안 관찰의 한계를 폭로함으로써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설계한 영사기로 동작사진을 돌림으로써 동영상의 탄생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8. 알퐁스 베르티옹 Alphonse Bertillon, <인체측정사진>, 1880년대, 파리경시청. 1871년 노동자가 파리를 장악하는 파리 코뮌 이후 범죄인의 신원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사진부가 파리 경시청에 1874년 창립되었고, 베르티옹은 1888년 그곳의 책임자가 된다. 그는 이곳에서 인종학이 유형학적 분류를 위해 이미 사용하고 있던 정면과 측면의 얼굴사진의 동시 배치법과 있을 수 있는 변장 등을 통해 신원을 감추려는 범죄인의 시도를 좌절시키기 위해 여러 신체 세부의 촬영과 측정의 엄정함을 덧붙이는 사진파일 작성과 분류법을 완성한다. 정면과 측면의 동시 촬영법은 지문이 각 개인의 변별성을 드러내는데 효율적이라는 사실이 1910년경부터 공인된 이후에도 범죄인 파일 작성에 기본사항으로 자리잡는다.
9. 프레드릭 파고 처치 Frederick Fargo Church, < ‘S.S. 갈리아’선의 갑판에서 코닥 카메라를 들고 있는 조지 이스트먼>, 알부민 인화지, 1890, George Eastman House, Rochester. 코닥 휴대용 카메라는 1888년에 처음 시장에 나왔고, 전세계 어느 언어권 사람이 읽어도 ‘코닥’이라고 발음할 수 있는 상품명은 이스트먼이 직접 붙인 것이다. 이 코닥카메라의 초점거리는 72mm, 밝기는 f/9였고 기발한 원통형의 셔터를 갖고 있었다. 여타의 경쟁 상품과 달리 백장의 음화가 장정되는 긴 롤 필름을 사용했다. 그런데 이스트먼의 성공은 이러한 카메라의 디자인에 기인한다기보다는 오히려 마무리 작업에 대한 서비스를 제공한 데 있었다. 카메라는 필름이 내장되어 판매되었고, 25달러의 가격에 현상, 인화 비용이 포함되었다. “버튼만 누르세요. 나머지는 우리가 합니다.” 이것이 코닥의 선전 문구였다. 10. 빌헬름 뢴트겐 Wilhelm Rontgen, <뢴트겐 부인의 손>, 1895, 12월 22일, 독일 뢴트겐 박물관, 뮌헨. 빌헬름 뢴트겐은 1895년 사진원판을 감광시키는 ‘미지의 빛’이라는 의미의 X-레이를 발견, 과학계를 뒤흔들었다. 뢴트겐은 연구실의 문을 X-레이로 찍었는데 금속 손잡이와 납 페인트의 흔적은 감광판에 나타났지만 문의 나무는 투명하게 나타났다. 그리고 그는 아내의 손을 찍었는데 뼈마디는 불투명하게 나타났고, 살은 투명하게 나타났다. 즉 X-레이가 통과하지 못하는 물체를 빛이 지나는 자리에 놓으면 그림자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발견 당시의 노출시간은 15분에서 1시간까지 걸렸지만, 코닥, 일포드 등에서 특수 감광유제를 생산함에 따라 곧 몇 분에도 찍히게 되었다.
11. 에드워드 슈타이켄 Edward Steichen , <알프레드 스티글리츠>, Coated gum bichromate over platinum print , 1915, 뉴욕시립미술관. 칼라사진에 대한 열망은 사진 발명 초기부터 표명되었고, 가장 손쉬운 방법은 인위적 채색이었다. 광화학적 작용에 의한 최초의 칼라사진은 1891년 리프만 Lippman에 의해 고품위로 성취되지만 지나치게 복잡한 칼라의 ‘직접’ 복제 공정 탓으로 실용화의 가능성이 없었다. 미래의 해결은 뒤코 뒤 오롱 Ducos du Hauron과 샤를르 크로 Charles Cros가 직접적 교류 없이 1869년에 거의 동시에 발표한 삼원색의 결합을 통한 감색법을 개발하면서였다. 이를 기점으로 영사기를 발명해 영화을 탄생시킨 뤼미에르 Lumière 형제는 1904년에 오토크롬 방식을 개발해 칼라사진의 상용화에 전기를 만든다. 12. 알프레드 스티글리츠 Alfred Stieglitz, <사진분리파의 리틀 갤러리즈>, Camera Work, 1906년 4월호. 1902년 스티글리츠는 뉴욕에서 사진분리파 Photo-Secession를 조직하여 사진도 회화의 예술적 지위에 오르려는 회화주의 운동을 미국에서 본격화한다. 이를 위해 그는 1903년 계간지 『카메라 워크』를 창간했고, 1905년에는 뉴욕 5번가 291번지에 리틀 갤러리즈 Littles Galleries를 개관했다. 1917년 화랑이 문을 닫고, 통권 49-50호를 마지막으로『카메라 워크』가 종간될 때까지 스티글리츠는 미국의 사진과 미술이 유럽의 주변성에서 벗어나 점차적으로 독자성을 확보하는데 크나큰 기여를 한다.
13. 폴 아우터브리지 Paul Outerbridge, 아이디 칼라 Ide Collar, 1922, Museum of Fine Arts, Houston 1920년대 들어서면서 인쇄술의 발달, 이에 따른 화보잡지들의 융성, 사진 기자재의 발전, 대량생산과 소비사회로 변모하는 서구사회 등 광고사진이 빠른 속도로 대중사회의 일상d로 자리잡는 여건이 조성된다. 광고는 현실효과가 약한 전통적 소묘 이미지를 멀리하면서 사진을 자신의 시각언어로 받아들인다. 아이디 칼라 사진은 서양장기판의 기하학적 엄정함과 추상성을 이용, 남성의 칼라 깃이 풍기는 냉정한 주지성을 결합시켜 20년대 당시 호의적인 반응을 얻어냈다. 14. “영화와 사진 Film und Foto" 전시회 포스터, 1929. 독일의 혁신적인 예술가와 건축가 조직인 독일 노동연맹 Deutsche Werkbund이 주최한 이 전시회는 슈투트가르트 시립 전시관에서 열린 진보적인 국제 사진전이었다. 매체로서의 사진 전반을 커버하는 이 전시회는 뮌헨, 비엔나, 베를린, 쥐리히 등을 순회했고, 축소판은 1931년 도쿄와 오사카에서도 전시되었다. 천여 점에 달하는 대규모 구성과 실험적이고 반 전통적인 성향의 사진들은 가는 곳마다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15. 존 하트필드 John Heartfield, <제네바 회담의 의미/자본가 계급이 살고 있는 곳/평화가 살아남지 못한다> 『노동자 화보잡지 A.I.Z』, 1932년 11월 27일자 표지. 1930년부터 존 하트필드는 1925년에 창간된 공산주의 잡지 『노동자 화보잡지』에 나치즘과 자본주의 체제를 공격하는 신랄한 문구와 충격적인 포토 몽타쥬를 매월 싣는다. 미국으로 망명한 그는 1967년 이렇게 회고했다. “제네바 국제연맹 앞에서 파시즘에 반대하는 시위노동자들이 기관총에 쓰러졌다. (...) 국제연맹 건물 전면에 파시스트의 총검에 꿰 뚫린 평화의 비둘기를 배치했고, 백십자기 대신에 나치표장을 새겨 넣었다.” 16. 알렉산더 로드첸코 Alexandre Rodtchenko, <라이카를 매고있는 처녀>, 1934. 예술 대신 기술을, 예술을 위한 예술 대신 삶에 봉사하는 예술을 주창한 러시아 구성주의 Russian Constructivism의 핵심멤버인 로드첸코는 혁명의 이념을 구현하는 소련의 역동적 삶을 극단적 앙각과 부감 촬영, 그리고 힘찬 대각선 구도를 통해 선전했다. 이러한 파격적 구도는 무엇보다도 조작과 휴대가 간편한 소형 카메라의 역동성에 힘입은 것이었다. 독일의 에른스트 라이츠 Leitz사와 카메라의 합성어인 라이카 사진기는 1924년에 출시되어 영화용 필름 사이즈 (24 x 35mm)를 사용하는 최고 품질의 소형 카메라로 자리 잡는다.
17. 도로시어 랭 Dorothea Lange, 니포모, 캘리포니아, 1936. 1929년 검은 목요일 이후 경제공황에 빠진 미국을 재건하기 위해 수정자본주의 정책을 펴고 있던 루스벨트 행정부는 사회보장제도의 확대와 시장경제에 정부의 개입을 정당화하기 위해 농업 안정국 Farm Security Administration 산하에 1935년 사진부를 창설한다. 여기에 소속된 사진가들은 미국 농촌의 비참한 현실을 사진에 담고, 사진부의 책임자 로이 스트라이커는 이를 언론에 배포하여 루스벨트의 경제정책의 정당성을 홍보했다. 갓난아이를 안고 두 어린아이에 둘러싸인 과부의 망연자실한 표정은 루스벨트 행정부의 정책이 휴머니즘을 지향하고 있음을 통보하는 것이었다. 18. 유진 스미스 Eugene Smith, <포토 에세이 시골 의사>, 『라이프 Life』1948년 9월 20일. 1936년 11월 23일 창간한 『라이프 Life』는 사진통신사가 제공하는 뉴스사진과 기획에 의거한 사진 에세이를 동시에 게재했다. 후자의 경우, 편집진은 주제를 결정하고 사진가에게 촬영을 위한 각본을 부여했고, 사진가는 편집진의 의도에 따라 수많은 사진을 촬영했다. 편집진은 주제의 효과적인 전달과 시각적 효과를 고려해 임의적으로 사진을 선정하고 재단했다. 따라서 종종 사진가와 불화는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1946년부터 1952년까지 『라이프』을 위해 발군의 사진 에세이를 남긴 유진 스미스도 그 갈등을 견디지 못하고 로버트 카파 Robert Capa의 주도하에 1947년에 창설된 길드적 사진 통신사 매그넘 Magnum에 들어가 독자적인 사진 에세이작업을 계속했다. 『라이프』의 전성기는 60년대 텔레비전의 대중화와 더불어 쇠퇴, 1972년 종간한다.
19. 에즈라 스톨러 Ezra Stoller, <인간가족 전시 장면>, 1955. 1940년 세계 최초로 뉴욕 현대 미술관에 창설된 사진부의 초대 부장이 된 에드워드 슈타이켄은 1955년「인간가족 The Family of Man」전을 개최한다. 그는 파격적인 전시장 구성과 생로병사의 인간 드라마를 273명의 사진가의 503점의 사진으로 극적으로 연출한다. 소련, 한국, 유럽 등 전세계 순회전에 들어가 900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 전시회 역사상 가장 큰 성공으로 기록된다. 20. 로버트 프랭크 Robert frank, <Ranch Market-Hollywood> in The Americans, Paris, Delpire, 1958, reedion. New York, Aperture, 1959. 스위스 출신 사진가, 로버트 프랭크는 구겐하임 재단의 작업 지원금을 받아 미국 전역을 순회한다. 그는 자신의 직관과 인간의 무의식적 행위를 포착하는 사진기의 우연성에 기대어, 소외된 미국인, 음울하고 공격적인 미국인의 풍경을 기록했다. 미국과 미국인에 대한 통념적 관념을 깨트리는 그의 작업은 우선 파리에서 1958년에 출간되었고, 이듬해 미국에서 출판된다. 완벽한 사진적 기예보다는 사진가의 개성과 감성에 기대는, 정밀한 구도보다는 카메라의 우발적 포착에 의존하는 그의 작업은 현대 사진의 제 경향을 육화한 작품집으로 받아들여졌다.
21. 윌리암 이글스톤 William Eagleston, <Memphis>, 1975 뉴욕 현대 미술관은 1976년 공공 미술관으로서는 처음으로 칼라사진 전시회를 허용한다. 이글스톤에 바쳐진 이 칼라사진 개인전은 흑백사진만이 예술성을 담보하고 있다는 사진계의 해묵은 편견을 불식시키는 중요한 계기로 작용했고, 이후 많은 젊은 사진작가들이 칼라사진을 자신의 예술매체로 삼는 전기가 되었다. 22. 로버트 메이플소프 Robert Mapplethorpe, <Ken Moody and Robert Sherman>, 1984. 메이플소프의 사진은 세 가지 강박관념적 주제로 분류된다. 첫째는 빛과 구성, 인화에 있어서 완벽함과 이상화된 미를 추구하는 고전주의적 조형주의이며, 둘째는 스스로 악마라 규정하는 자의식으로 사회의 기존 윤리체계를 거부하고, 전복하려는 퇴폐적 낭만주의이다. 셋째는 남녀 영성적 존재에 대한 욕망의 집요한 시각화이다. 이 세가지 테마는 개별적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맞물리는 것이 예사다. 고전주의적 조형주의는 남녀양성성에 대한 욕망과 결합하기도 하고(꽃 정물시리즈, 리자 라이언의 초상들), 양성에 대한 욕망은 퇴폐적 낭만주의와 결합하기도 한다. (Sado-masochism)
23. 신디 셔면 Cindy Sherman, <Untitled>, 1985. 셔면은 사회가 교육을 통해, 대중매체를 통해, 직업적 상황을 통해 주입한 여성의 이미지를 연기한다. 셔먼은 영화속의 이미지를 묘사하기도 했고, 교육과 대중매체가 전형적인 것으로 규정한 이미지를 연기하기도 했다. 1985년 이후 그녀의 변장과 위장은 괴기물, 공포물 혹은 포르노 영상이 서구사회에 주입한 이미지를 재현했다. 또한 예술가라는 직업적 환경이 그녀에게 부과한 서구미술사에 나타나는 인물을 스스로 풍자적으로 개작하기도 했다. 신디 셔먼의 사진작업의 테마는 실체 없는 자아, 단일하게 규정할 수 없는 자아의 시각화이다. 그녀의 개체적 개성, 그녀만의 고유한 인격은 존재하지 않는다. 기성의 이미지를 모방하고, 그 모방 속에서 끊임없이 변모하는 신디 셔먼만이 존재한다. 그녀의 성공은 예술가를 독특한 개성의 실체로 파악한 모더니즘의 미학을 그녀의 끊임없는 모방과 위장을 통해 부정한 데 있다. 24. 케이스 콧팅햄 Keith Cottingham, 시리즈 <허구의 초상> 중에서, 디지털사진, 1992, 121.9 X 101.6 cm, ⓒ Ronald Feldman Fine Arts, New York. 사진의 특성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한다는 사실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진의 본질은 사진 찍혀진 대상이 현실에 실제로 존재했다는 것을 증거하는데 있다. 그러나 디지털 이미지의 출현과 더불어 사진은 사진에 나타난 대상이 현실에 실재로 존재했음을 항상 증거하지못하게 되었다. 가상의 현실이, 허구적 존재가 실재의 양상을 띠고 사진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디지털 사진은 현실의 존재가 발산하는 반사광에 의해 감광소자에 기록된 이미지이기도 하지만, 프로그램을 통해 ‘만든’ 이미지이기도 하다. 디지털 프로그램이 개입한 사진은 새로운 이미지의 무한 발명의 권리는 얻었지만, 광화학적 사진이 갖는 증거의 가치를 적지 않게 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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