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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역의 위기
중년기를 보내면서 나의 사역에는 세 번의 정도의 위기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 위기는 꿈을 갖고 시작했던 상담사역의 위기입니다. 생활대책도 없이 직업으로서의 상담사역이 어떤 지도, 목사로서 일반 목회자의 정체성을 내려놓고 사역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도 몰랐습니다. 충분히 기도하고 내적고통을 겪는 사람들을 도와야겠다는 간절한 사명감으로 대전의 거처에서 치유사역과 상담사역을 시작했습니다.
초창기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이제 사역이 어느 정도 뿌리를 내려가고 있지만 경제적으로 불안정한 사역에 대한 실망이 커서 교회사역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분란으로 인해서 기존교회를 나온 일부 성도들과 함께 협력해서 임시목회를 했지만 내부적인 갈등을 해결하지 못하고 교회사역을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그 때 대전 둔산동을 떠나 과수원동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나의 심정은 심란했습니다. 큰 아들 민섭이 말했지요, “아빠, 우리가 자꾸 시골로 가는 것 같아요!” 나는 말했지요, “민섭아, 그곳에 가면서 네가 좋아하는 축구를 할 수 있는 축구장이 있단다.”
어려움 중에도 감사한 것은 함께 교회를 섬겼던 집사님 부부가 전세금을 제공해주셔서 어려움없이 전셋집에 살 수 있었어요. 과수원동 아파트에 살면서도 월간쪽지를 발행했고 아무런 연고는 없었지만 과수원동 아파트에 월간쪽지를 넣으면서 가정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했습니다. 이 시기에 대전과 서울에 있는 몇몇 신학교에 강의도 하고 교회집회도 인도하면서 사역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감사했습니다.
두 번째 위기는 일상적인 목양생활의 불만족에서 생겼습니다. 부산에서 1998년 3월에 시작한 교회가 아픔이 있었지만 교인들과 협력해서 진해의 안골포 해변가에 아름다운 새예배당을 지으면서 안정된 목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여러 해를 지나면서 원하는 만큼 부흥되지 못했습니다. 이때에 예배당에서 더욱 무릎 꿇고 주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면서 목양에 전념해야 하는데 다른 임지를 기웃거리게 되었습니다. 그 교회의 목양을 시작할 때는 평생을 섬긴다는 각오로 목회를 시작했고 교회를 떠난다는 것을 생각해보지 못했는데 잘 부흥하는 교회를 바라보면서 다른 마음을 품게 됩니다. 목회는 경쟁이 아닌데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요. 요즈음에 마음속에 새기는 주제는 일상도의 행복입니다. 행복은 매력적인 파랑새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집안에 있는 멧새에게 있다는 사실의 발견입니다. 화려한 외형이 아니라 소소한 일상의 평범 속에 참된 행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목회자들은 섬기는 교회가 부흥하지 못할 때에 성도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게 됩니다. 그래서 새로운 변화를 추구합니다. 저에게는 그 돌파구가 장신대 목회상담학 초빙교수였습니다. 처음에 얼마 동안은 교수라는 직함에 만족하면서 보냈습니다. 그 당시 다른 학교의 부름도 있었지만 그 학교를 포기하고 장신대를 선택했습니다.
세 번째 위기는 임시직사역의 위기였습니다. 장신대 초빙교수사의 임기는 2년간 임시직이어서 이 세 번째 위기는 장신대 교수생활을 1년을 마치자 곧 시작이 되었습니다. 교수사역을 연장하는 계획도 세워보았고 기존교회의 담임목회사역을 시작하는 일도 고려했지만 어느 하나도 성취되지 못했습니다. 주님이 허락하지 않으셨지요.
세 번째 위기를 맞으면서 시행했던 것이 48일 국토순례여행이었습니다. 세 번째 위기를 맞이하면서 사무실을 열고 가족치유상담사역을 본격적으로 시작해야 하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가족치유상담사역을 새롭게 시작하기 전에 조국의 여러 지역을 순례하면서 그 지역과 그 지역에 있는 가정들을 중보기도하기로 했습니다. 순례여행을 마치고 했던 한 가지 실수는 어느 신학교의 책임자를 하겠다고 섣부르게 지원했습니다. 저를 잘 아는 사람들의 생각에 저는 그 직함에 준비된 그릇은 못되었습니다. 주변의 만류에도 그 일을 진행했던 나는 우스운 꼴이 되었습니다. 세 번째 위기를 겪으면서 가족치유상담연구원의 사무실을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 개설했습니다.
돌아보면 중년기 20년을 보내면서 3번의 사역의 위기를 겪었습니다. 이제 나의 20년을 돌아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40년을 회상합니다. 참으로 어려운 일들이 많았고 이로 인해서 가족들을 힘들게도 했지만 한 가지는 주변에 많은 도움의 손길들을 만났고 그들과 도움을 서로 주고받았습니다. 이 시절을 보내면서 불면의 시간들을 보내기도 했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 항상 감사의 마음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아쉬움은 충분히 기도하지 못했고 그 결과는 기다림의 부족이었습니다.
이 시기를 지내면서 다섯 권의 책을 집필할 수 있었는데 <상처받은 영혼들에게 띄우는 편지>, <마음치유 가족치유>, <쓴뿌리 치유>, <전인치유>, <홀로 걷는 길 함께 걷는 길> 등입니다. 이 책들은 중년기 사역의 위기를 겪으면서 얻은 소중한 선물입니다. 또한 위기를 겪으면서 얻은 경험들은 어려움과 아픔을 겪는 사람들의 고통을 체득케 했습니다. 이 땅에 사는 수많은 <을들>의 서러움도 체험했습니다. 그러나 나의 경제적인 형편은 <을>이었지만 내면의 영성은 <갑>을 뛰어넘는 감사와 마음의 평안을 가졌습니다. 어려움 가운데도 늘 렘29장 11절 말씀을 암송했는데 하나님의 계획은 재앙이 아닌 평안이며 미래와 희망을 준다는 말씀은 힘이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예수님은 형님 같으시고 친구 같으신 참 좋으신 분이셨습니다.
목양생활을 하면서 기도하는 신실한 성도들을 만날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몇몇 작은 규모의 교회에서 가졌던 부흥집회와 치유집회에서 치유와 회복을 통한 사람들의 변화를 목격하는 것은 늘 감격이었습니다. 인도했던 여러 모임 중에서 성남교회에서 가졌던 성남지역목회자 부부치유모임과 경남 산청기도원에서 가졌던 지리산지역 목회자 부부 치유모임은 늘 기억에 남는 아름다운 시간이었습니다.
내가 받은 달란트
제가 협동목사로 섬기는 대학로에 있는 동숭교회에서는 교인들을 위한 은사테스트를 합니다. 은사테스트를 한 뒤에 교인들이 적재적소에 섬기도록 기회를 부여합니다. 사역자들은 나는 어떤 영역에 달란트가 있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달란트의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어떤 종류의 달란트(유능한 영역)를 받았는가? 어느 정도의 달란트(사역의 크기)를 받았는가? 이 질문에 답하면서 사역을 합니다.
신학교에서 만난 대부분의 신학생들은 일반적으로 교회성장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막연하지만 자신들은 설교의 능력, 교인들을 관리할 수 있는 행정력, 영적지도자로서 필요한 영성, 신학을 공부할 수 있는 학자적 소양 등을 일정 부분 갖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4영역을 모두 갖지는 못합니다.
드물기는 하지만 4가지 영역 모두를 갖추고 있는 분들이 종종 있는데 그들은 부러움의 대상입니다. 이러한 목회자들과 가까이 교제할 기회를 가졌는데 이들의 목양지는 교회성장이 어려운 지역인데도 섬기는 교회가 부흥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네 가지 다 할 수 있지만 목양에 필요한 부분에 철저하게 집중합니다. 이들은 인간관계를 다루는 행정능력에서도 인정에 끌리지 않는 냉철함과 동시에 따뜻함도 가지고 있습니다. 종종 성도들은 이들 목회자에게 냉철함만을 보고 따뜻함을 보지 못해서 이들을 찬 인격의 사람으로 오해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나는 이 네 가지 영역을 모두 갖고 있지 못한데 갖고 있다고 과신하는 실수를 범했습니다.
장신대에서 교수사역을 하고 있는 가까운 친구 목회자는 일찍부터 교수사역에 은사를 발견했고 그 길을 꾸준하게 걸어왔습니다. 존경받는 선교학교수로서 그 사역을 해오고 있습니다. 이 친구 목회자는 일찍부터 학자의 길에 집중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목양의 능력과 학문의 능력, 두 가지 모두를 갖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두 마리의 토끼를 쫓으면서 오랜 사역을 해왔습니다. 결국 이런 자세는 하나님도 힘들게 합니다. 한 가지에 집중해야지 가속도가 붙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물론 우리 주위에는 드물지만 이 두 영역에서 모두 능력을 발휘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모두가 그렇지 않습니다. 남이 떡이 좋아 보여서 사역자들은 종종 실수합니다.
이것을 하면 저게 좋아 보이고 저것을 하면 이게 좋아 보입니다. 이것 저것 하다보니까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닙니다. 이런 종류의 사람은 자신의 삶에 절망하게 되고 본인도 정체성에 혼란에 빠집니다. 당신은 신학교 교수입니까? 목회자입니까? 나의 대답은 교수이면서 목회자이고 동시에 상담자입니다.
지리산 지역의 농촌교회에 처음 부임해서 그 지역을 품고 기도하며 섬기면서 신실하게 목양을 감당해 온 몇몇의 목사님들은 자신의 달란트에 가장 충실한 사람들입니다. 한 때 왜 저렇게 갑갑한 목회를 하고 있나 하고 생각도 들었지만 돌아보면 가장 멋진 인생을 살아온 주님의 신실한 종들입니다.
천상병의 시인의 고백처럼 나의 소풍을 끝내고 아버지 집에 돌아왔을 때 내 인생의 여정이 아름다웠다고 말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중년기를 돌아보면 조금 더 인내했더라면 좋은 길(?)도, 편한 길도 있었을 텐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조급했던 결정들이 나의 사역을 힘들게 한 적이 많았고 주변 사람들도 힘들게 했지요.
신앙은 결국 기다림이라는 말이 가슴에 깊이 새겨집니다. 주님의 시간에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려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주님께서 나의 달란트를 최선을 다해 발휘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실 텐데 무엇이 그렇게 조급한지 서둘렀던 적이 참 많았습니다. 중년기를 돌아보면서 후회하는 영역은 신중하지 못한 조급함입니다.
신학대학원에 입학해서 처음 가졌던 나의 소박한 꿈은 신학 3년 동안 최선을 다해서 신학공부에 집중이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사람관계의 갈등으로 인해서 그 좋은 시간을 방황하면서 보냈습니다. 신학공부에 최선을 다하지 못하고 신대원 1학년 때부터 시작한 교회사역으로 과부하에 걸렸고 여러 가지 인간관계에 함몰되면서 힘든 시간을 보냈고 그 결과로 신학공부에 집중하는 자세를 상실했습니다.
이제 장신대 신학대학원에 입학하려고 준비하는 둘째 아들 은섭이에게 미리 권면했습니다. “신학대학원 1학년 때에는 신학공부에 집중하면 좋겠다.”
지난 국토순례여행에서 진도를 여행하면서 운림삼방을 방문할 때에 한국 남화의 뿌리를 이어가는 소치 허련 화백의 5대가 한 우물을 파는 모습을 보면서 감동했습니다. 소치 허련만 그렇게 살았는가요? 저희 부친은 평생 농부로 살았는데 흙을 사랑하면서 최선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아버님이 생존할 때에 고향마을의 멧골 논과 밭은 아름다운 정원이자 보고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잡초가 우거진 황량한 곳이 되었습니다. 아버님의 생이 아름답습니다. 주변에서 여러 가지가 아닌 한두 가지 일이라도 그 일에 최선을 다한 민초들의 삶이 아름답습니다.
그래도 돌아보면서 감사한 일은 주어진 이것 저것을 하면서 집중하지는 못했지만 맡겨진 일에는 최선을 다했다는 점은 자랑스럽습니다. 물론 나의 일이 남에게 인정받지 못했던 적도 많았지만 저에게 있어서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던 성실한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성실한 삶의 자세를 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맡은 일에 충성하기
저희 가족치유상담연구원에서 격월간으로 쪽지 <예수사랑, 가족사랑>을 발간합니다. 이 쪽지의 제목은 여러 번 바뀌었습니다. 발행일자는 매월 1일이기에 그 시간에 맞게 쪽지를 받아보도록 인쇄하고 발송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발행일자인 그 달의 1일을 넘길 때가 많습니다. 저를 잘 아는 한 자매님은 <낮해밤달>을 편집해서 발행하는 최용덕간사는 정확한 날자에 발행해서 새 달이 되기 전에 독자들이 받아보는데 저희들의 월간쪽지 <예수사랑 가족사랑>의 늦은 발행에 대해 충고해주셨지요. 이 자매님의 권면은 저에게는 소중한 고언이었습니다. 일을 시작했으면 그 일이 힘들고 어렵고 재미없는 일처럼 보일지라도 최선을 다해서 완수하는 일이 소중합니다. 우리들은 내가 누구인데 하면서 자기에게 맡겨진 작은 일들을 하찮게 여기면서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노년기를 보내고 있던 바르실래는 다윗왕 일행이 아들 압살롬의 난을 피해 도망하고 있을 때에 자기가 살던 지역으로 오자 다윗왕의 잠자리와 먹거리 해결에 최선을 다합니다. 아들의 반역을 피해 도망했던 다윗왕의 만신창이가 된 마음과 영혼은 바르실래의 순수한 섬김으로 치유를 받습니다. 압살롬의 죽음으로 반역이 평정되었을 때에 예루살렘으로 떠나는 다윗왕은 바르실래에게 감사해서 왕국에서 편하게 모시겠다고 했을 때에, 자신은 고향에 머물면서 남은 생을 보내겠다고 하면서 다윗의 청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바르실래의 일상도의 삶이 너무나 귀합니다.
강원도 고성군 지역의 군인교회에서 민간인 군선교사역자로 군인교회를 섬기는 젊은 목사님이 계십니다. 이 분은 군장교로 근무하다가 군선교의 사명을 받고 전역 후 신학공부해서 목사안수를 받고 군선교에 헌신한 분입니다. 여러 군인교회를 섬기면서 철책선에서 경계근무하는 병사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따뜻한 차를 나누면서 손을 잡아줍니다. 손을 잡을 때에 그들의 마음도 보듬어주는 신실한 주님의 종입니다. 이 분의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너무나 귀합니다.
부산에서 사역하면서 만났던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연합모임을 할 때 최용덕간사가 발행한 <찬미 500>찬양집이 너무 마음에 들어 그 찬양집을 한 권 가져도 되느냐고 말했는데 그 목사님은 저의 청을 거절했습니다. 그 때에는 기분이 나빴지만 교회소유의 책자 하나도 소중하게 관리하려는 그 분의 애씀이 참 좋았어요.
내가 진해에서 교회를 섬겼을 때에 교회학교 어린이부에 설교를 할 때였습니다. 말씀을 전할 시간인데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지 않아 교회학교 교사가 나를 찾으려 사무실로 찾아온 적도 있었습니다. 나의 책임이 장년예배인도와 설교였다면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겠지만 그 일이 교회학교 설교이기에 자리를 떠나 있었습니다.
20년 정도를 신학대학원과 상담대학원에서 상담학 과목을 강의했습니다. 돌아보면 강의내용을 최선을 다해서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늘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저의 집사람은 종종 두 가지를 충고했습니다. “여러 가지 일을 하려고 하지 말고 한 가지 일에만 집중했으면 좋겠어요.” “주변 사람들이 부탁할 때에 할 수 있는 것만을 받아들이세요. 하겠다고 대답하고서 일들이 많아서 부실하게 되면 좋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내의 충고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지요. 저는 사역 가운데 끝까지 올인 하고 롱런을 하지 못했습니다.
사역에는 집중이 필요합니다. 너무 많은 일을 한꺼번에 맡으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적절하게 노(No)를 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에 사람들은 규모가 있는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노를 말하면 그 사람이 싫어할까봐 그렇게 하지 못하고 예수라고 했을 때 맡은 일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는 불성실한 사람이 됩니다.
이것 저것을 하는 사역자들에게는 합당한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목회자들 중에도 교회사역만으로 경제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반론적으로 보면, 한 가지 일에 집중해서 그 일에 성과를 내면 경제적인 문제도 해결됩니다. 그런데 현실의 어떤 경우에는 한 가지 일에 집중을 해도 경제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교회전도와 목양사역에 집중해서 그 교회의 성도수가 많아져 교회재정적인 여유가 되어 교역자들이 사례비 걱정없이 사역할 수 있으면 좋습니다. 그러나 목회사역에 최선을 다한다고 해도 교회가 부흥되는 법은 없습니다. 교회성장은 결국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목회 외에 또 다른 경제적인 대안도 필요합니다.
저의 경우에는 신학교를 비롯한 외부강의와 지역교회의 초청강연 및 설교 등의 사역이 종종 있었지요. 이러한 일들이 저의 경제생활에 도움이 되었지만 여전히 질문은 남아있습니다. 목회에 더 집중했더라면 교회성장에 도움이 되었을텐데.
돌아보면 그 일 모두가 꼭 필요한 일들이었지요. 때로 나의 사역에 시련의 골짜기를 지나갈 때도 있었지만 그 시간도 저의 사역과 인생경륜에 소중한 시간들과 경험이었지요. 지난 나의 중년기 20년 동안 꾸준하게 진행해온 일은 가족치유상담사역입니다. 이 일은 개인상담, 집단상담, 상담교육, 문서사역, 강연사역, 집회사역 등인데 이 일은 때로는 전업이었고 때로는 부업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