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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의 셈과 계산기 ]
인간이 셈을 하기 시작한 것은 이미 선사시대부터 였다고 한다. 뼈 조각이나 조약돌을 사용한,
지금의 유치원생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선사시대 사람들은 계산과 내용을 기록할 목적으로
점토로 구운 석판과 파피루스(papyrus)를 고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기원전 1800년경 바빌로니아에서는
복리계산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 지역에서 발굴된 점토판 위에 곰보자국으로 쓰여진 설형문자는
연리 20%일 때 곡식을 두 배로 늘리려면 몇 년과 몇 달이 걸리는가를 분명히 말해 주고 있다고 한다.
그러면 인류 최초의 계산기는 바로 손이다.
손을 사용하는 그 첫번째 방법은 물건과 손가락을 일대일로 대응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계산법은 10을 넘어 가면 계산이 불가능해 지역마다 다른 방법으로 이의 해결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다.
인도와 중국남부에서는 손가락 마디를 이용하여, 28까지 헤아릴 수 있었다. 뉴기니의 파푸스족은 열손가락,
손목, 팔꿈치, 눈, 코, 귀, 발가락, 엉덩이를 이용하여 41까지 계산하였다고 한다. 이와는 달리 몇 사람의 손가락을
모아서 보다 큰 숫자를 표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대일 대응에는 한계가 있었다.
두 번째 방법으로 두 손을 부호화하기 위한 노력들이 더해졌다. 예를 들어 주먹을 쥐면 50을 의미한다든지,
손바닥을 아래로 향하면 100을 의미한다고 하는 등 여러 가지 방법이 모색되었다.
이미 수메르인들은 60진법을 사용했는데 신체를 어떻게 이용하여 왔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었다.
현대에서 셈을 한다면 손가락만을 가지고도 0에서 210(1024)-1까지 계산이 가능하지만, 잉카지역에서는 손가락을
쓰지 않고 기푸(guipu) 라는 도구를 사용하여, 인구, 통계자료, 세금, 노동자들의 급료 등을 계산하였다고 한다.
이외에도 현대의 credit card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는 새김눈에 의한 계산방법이 있다. 즉 무른 나무막대기나,
동물의 뼈에 눈금을 새겨 수를 표시하는 방법이다. 이는 아직도 우리 일상 생활에서 여전히 쓰이고 있다.
중세시대 각지를 떠돌며 장사를 하던 상인은 부목이라는 것을 사용하였다. 부목은 두개의 나무 작대기를
나란히 두고 사고 판 만큼의 양을 두개의 막대기에 그어 이를 당사자가 나누어 가지고 있다가 후에 외상값을
계산할 때 사용하였다. 현재의 사인하다(sign) 라는 표현이 눈금을 긋다라는 라틴어 signare에서 유래한
것을 보면 이의 사용을 짐작케 한다.
그런데 한가지 놀라운 사실은 현대 컴퓨터의 원리와 완전히 일치하는 기계식 계산기가 뉴기니의 북서부
해안에서 출토되었다. 기원후 850년경으로 보이는 이 계산기는 노끈과 도르레만으로 구성된 훌륭한
멀티플렉서(multiplex)이다. 결국 이 기본 게이트들을 엮어서 현대의 전자식 컴퓨터와 같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두수의 아날로그적 합도 구할 수 있다. 그 복잡한 정도라든지 어떻게 이용했는지는 아직 알려진 것이 없다
가. 고대의 계산기
기원후 1세기경 개발된 로마의 휴대용 계산기는 이전의 계산패나 부목과는 달리 제법 형식적인 틀을 갖게 되었다.
기원후 3세기경 중국식 주판이 발명. 주판은 컴퓨터가 개발되기까지 십수세기를 계산기의 왕자자리를 지켰고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주판은 2차 대전후 일본에서 개량된 것이다
나. 초기의 계산기
17세기 스코틀랜드의 수학자인 존 네이피어(John Napier, 1550-1617)는 복잡한 수의 간단한 계산을 위해
대수표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의 노력은 오트레드의 도움으로 계산자(slide rule)로 발전하였다.
1617년 네이피어는 곱셈용 계산도구를 개발했다. 네이피어의 계산봉(Napier's Bones)으로 불리는 이 계산봉은,
1652년 파스칼이 만든 수동식 계산기의 등장으로 인기를 잃고 퇴장하게 되었다.
1642년 19세의 파스칼은 계산기구를 만들었다. 파스칼린(pascalin)으로 불린 이 계산기구는
덧셈만을 수행할 수 있었다. 즉 톱니바퀴를 이용하여 기계적으로 덧셈을 하도록 만든 것이다. (나중에 여러
종류가 개발되었지만) 일을 매우 능률적으로 처리할 수 있었지만, 덧셈과 뺄셈이외의 연산은 할 수가 없었다.
이를 해결한 사람은 바로 독일의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tz, 1646-1716)이다.
라이프니츠는 1672년 파리에 머물고 있는 동안 호이겐스와 같은 수학자와 연구를 시작했다.
1786년 독일인인 뮬러(J.H. Muller)가 미분기(Difference Engine)라는 계산기를 발명.
뮬러 자신이 이 기계를 직접 제작하지는 않았고, 이와 유사한 기계들이 30년 동안에 걸쳐
찰스 배비지(Charlse Babbage, 1792-1871)에 의해 설계되었다.
1812년에 배비지는 미분기(Difference Engine)가 로그(logarithm)와 같은 수학적 테이블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그러나 20년 동안의 노고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이 계산기를 만드는 작업을 중단했다.
1888년 1월 아들인 헨리 배비지가 아버지의 설계도에 의한 미분기를 만든다.
1.발전하는 계산기
가. 배비지의 해석기관
1833년 배비지는 해석기관(Analytic Engine)을 그의 일생동안 사재를 들여 고안하였다.
배비지는 자신이 만든 기계의 작동을 제어하기 위하여 두 종류의 천공카드를 사용하려고 했다.
산술연산장치는 덧셈이나 뺄셈을 1초동안에 수행할 수 있어 약1분에 걸쳐 50자리의 숫자를 곱하거나
나눌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기계였다.
1871년 배비지가 죽을 때 그는 세상 사람들에게 단순한 괴짜로 보였지만, 그의 수학적 정밀 기계에
대한 개념은 오늘날에 와서 그 시대 과학의 업적들보다 휠씬 앞서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나. 상업적인 계산기
실제로 상업적으로 성공한 최초의 기계는 1884년 버러프(William Seward Burroughs,1857-1898)에
의해 발명된 가산기(adding/listing machine)이다.
1885년 펠트(Door Felt)는 실험적으로 여러 순서에 의한 키 구동 방식의 계산기를 설계했다.
1887년 프랑스인 볼레(Leon Bollee)는 곱셈을 함에 있어서 덧셈을 반복적으로 수행하지 않고
직접연산이 가능한 새로운 기계(BOLEE MACHINE)를 고안해 냈다.
2. 컴퓨터 시대의 출발
가. 천공카드
1725년에 구멍이 뚫린 종이로 직물기를 조종하는 방법이 보촌(Basile Bouchon)에 의해 디자인되었다.
1801년에 잭쿼드(Joseph Marie Jacquard, 1752-1834)는 직조산업에 혁명을 불러 일으킨 자동직물 직조기를 발명했다.
1890년 미국은 전체 국민에 대한 통계자료의 처리를 위해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이를 해결한 사람은 홀러리스(Herman Hollerith, 1860-1929)라는 역무원이었고, 방법은
천공카드(punch card system)를 이용한 방법이었다.
1894년에 홀러리스는Tabulating Machine이라는 회사를 세웠는데 1914년에 C-T-R Co.로
이름을 바꾸고 나중에 IBM으로 발전하게 된다.
1907년에 인구조사국의 기계기술자였던 파워(James Power)가 천공카드 시스템을 개발하였다.
나. 컴퓨터 시대의 출발
1938년에 설립된 벨 텔레폰(Bell Telephone) 연구소에서 초기의 다수의 전자식 기계가 만들어졌다.
제1세대 컴퓨터 (진공관)
1.진공관 컴퓨터
가. ABC
★1939년에아타나소프(JohnV.Atanasoff, 1903-1995))가 만든 진공관을 이용한 최초의 컴퓨터는
ABC(Atanasoff Berry Computer)이다. 혹자는 아타나소프의 ABC가 최초의 전자식 계산기라고 주장한다.★
1934년 아이오아 주립대학의 물리학교수인 아타나소프는 IBM의 천공카드를 개조하여 계산을 기계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5년 뒤에 그는 컴퓨터의 원시 형태인 ABC를 제작했는데 베리(Clifford Berry)가 일을 도왔다.
나. Mark I
1944년 에이켄은 IBM내에서는 ASCC(Automatic Sequence Controlled Calculator)로 불리운 Mark I을 개발한다.
마크1(MarkⅠ)은 계산을 하기 위하여 긴 연속의 프로그램을 사용했는데 4칙연산과 삼각법에 의한 함수계산과
다른 복잡한 계산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 기계는 15년 동안이나 사용되었다.
그러나 마크1은 가로가 15m, 높이가 2.5m, 76만개의 부품과 900km의 전선을 사용하는 엄청난 것이었다.
Mark I의 후속으로 1948년 1월 24일 ASCC의 후속 모델인 SSEC (Selective Sequence Electronic Calculator)이
발표되었다. 1948년 1월 28일에 공개시험을 통해 태음천체력 문제를 수월하게 풀어냈다.
1952년부터 1971년까지의 달의 위치를 12시간 간격으로 정확히 계산하였다.
이후 IBM은 MODEL 701을 생산하였다.
MODEL 701은 범용컴퓨터 이면서 다량으로 생산되어 상업적인 성공을 거둔 최초의 컴퓨터이다.
SSEC는 모든 과학기술자에게 무료 사용이 허용되어 과학기술발전에 이바지 하였다.
이로서 IBM은 컴퓨터계의 거인으로 성장할 수 있는 첫발을 내딛었다.
1943년 2차대전 막바지에 영국의 보급선은 독일의 잠수함인 U보트의 공격에 속수 무책이었다.
더욱이 독일은 모든 명령문을 에니그마(enigma, 수수께끼)라는 자동암호문 작성기로 작성된 암호문으로 만들어
보냈기 때문에 영국은 똑같은 기계를 입수하던지 이 기계를 만든 과학자를 납치해야만 했다.
영국의 천재 수학자였던 알랜 튜링(Alan Turing, 1912-1954)은 컬로서스(Colossus, 거인)라는
암호문 해독 전용의 디지털 컴퓨터를 개발하여 독일의 암호를 쉽게 해독할 수 있게 되었다.
첫번째 프로토타입은 1944년 2월에 개발되었고, 6월에 본격 가동에 들어갔다.
이때 개발된 기술과 사용된 지식은 1970년대까지 부분적으로 사용되었다.
다. 프로그래밍 언어의 탄생
현대적 의미의 프로그래밍 언어의 기초는 독일의 공학자인 콘라드 추제(Konrad Zuse)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그 발상은 획기적인 것이었지만 무려 30여년이 지난 1972년에 가서야 빛을 보게 된다. 추제는 이미 1935년에서
1938년 사이에 Z-1, Z-2라는 Computer를 개발하면서, 프로그래밍 언어에 대한 개념을 사용하였던 것이다.
1949년 호퍼에 의해 최초의 원시적인 인터프리터인 쇼트코드(Short Code)가 개발됐다.
쇼트코드는 이후 윌크스에 의해서 확장, 정리되어 어셈블러(Assembler)로 나타난다.
어셈블러는 간단한 표현의 기호를 하나씩 기계 명령으로 바꾸어 주는 번역기였다.
1952년 영국 출신의 애릭 글레니에 의해서 오토코드(Auto Code)라는 고급 언어 번역기가 발표됐다.
2. ENIAC
가. 전기계산기 - ENIAC의 탄생
초기의 다수의 전자식 기계는 1938년에 설립된 벨 텔레폰(Bell Telephone) 연구소에서 만들어졌는데,
1940년에 최초로 가동되었다.
계산기의 새 시대는 1925년 쯤에 매사츄세츠 공과대학에서 부쉬(Vannevar Bush, 1890-1974년)가
그의 교수들과 함께 전력 모터를 사용한 아날로그형 전자계산기를 제작할 때 그 막이 열렸다고 할 수 있다.
그 후, 1939년에 IBM사가 배비지의 구상에 따라 완전 자동의 전기기계장치의 계산기 제작을 시작하였으나,
그것이 1944년에 완성되기 이전에 ENIAC (electronic Numerical Integrator and Calculator) 계획으로 밀려버렸다.
★ENIAC의 실제 개발은 에커트(J. Presper Eckert)와 모클리(John Mauchly)가 펜실베니아 대학에서 1946년
개발 공개하였지만, 이미 두사람은 이 성능에 만족하지 않고 1945년에 EDVAC개발을 위한 계약서에 서명을 한 상태였다.
진공관 속의 전자의 흐름을 이용한 최초의 전자계산기인 ENIAC은 군부의 강한 요청에 따라 제작이 개시되었는데,
이 계획의 고문 중에는 아인슈타인과 함께 1933년 프린스턴 고급 연구소의 최초의 종신연구원이 된
폰 노이만(J. von Neumann)이 있었다. 전자계산기의 성능에 관한 노이만의 보고(1944-1946년)에 이어,
1946년에 최초의 프로그램 내장방식의 전자계산기가 가동하기 시작하였다.
현대의 의미에서 볼 때 전자계산기의 시초는 1946년 펜실베니아대학에서 모클리(John W. Mauchly; 1908-1980)와
에커트(John Presper Eckert;1919-)가 만든 에니악(ENIAC : Electronic Numerical Integrater And Calculator)이었다.
에니악은 미군 탄도연구소의 의뢰로 만들어졌다. 1943년4월 펜실베니아대학의 학장인John Brainerd에 의해 제안되었다.
2차대전중에 사용하려던 에니악은 1년의 개발 기간중에 이미 전쟁은 끝나 버렸다. 에니악의 덩치는 30톤, 진공관이 무려
1만7천4백68개나 사용되었다. 사용된 전선의 길이는 1백30km이다. 앞서 만들어진 MarkⅠ에 비하면 많이 줄어든 셈이다.
ENIAC의 설명
예전의 286 AT 성능에 불과하지만 당시에는 대단한 계산능력을 자랑하였다. 사람이 7시간 정도 걸리던 탄도계산을
전기식계산기는 1시간이 소요되며 에니악은 단 3초 만에 해치워 버려 총알보다 더 빠른 계산기로 불리게 되었다.
에니악은 펜실베니아주의 무어(Moor) 학교의 전기공학과에서 가동된 이후 9년간 사용되다가 1955년 다른 종류의
다양한 컴퓨터가 개발됨에 따라 사라지게 되었다.
에커트와 모클리는 ENIAC 뿐 아니라 후에 EDVAC, BINAC, UNIVAC 등의 많은 컴퓨터 제작에 협력한다.
나. ENIAC의 뒤를 잇는 컴퓨터
에니악이 발명된 이래 많은 연구소들이 컴퓨터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에커트와 머클리는 에드백(EDVAC : Electronic Discrete Variable Automatic Calculator)을 제작했는데,
이 기계는 에니악에 비해서 두 가지 면, 즉 명령어의 내부 기억장치가 디지탈 형태라는 점과 2진수를 사용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에드백의 완성은 1952년에야 이루어졌으며 이 사이에 영국의 캠브리지 대학에서
에드삭(EDSAC : Electronic Delay Storage Automatic Computer)을 제작했는데,
이 컴퓨터가 최초의 프로그램을 저장할 수 있는 컴퓨터였으며 1949년에 완성되었다.
다. UNIVAC
1950년 에케트와 머클리는 최초의 상업용 컴퓨터인 유니백을 만들었는데, 이 기계는 미국의 인구조사국에서 사용되었다.
한편 1986년 버로우즈사와 합병해 유니시스가 된 스페리사는 유니백 1 (UNIVACⅠ : UNIversal Automatic ComputerⅠ)
을 개발 시판하는등 IBM이 부상하기전인 1950년대 초까지 세계 최대컴퓨터업체로 군림했던 관록있는 기업이었다.
UNIVAC Ⅰ이 작동된 지 얼마되지 않아 자동 프로그래밍 기법이 개발되어 더 좋은 기계들이 개발되었다.
즉, 초보적인 컴퓨터 언어의 개발과 함께 생산성 향상을 위한 최초의 시도가 1950년대 초에 이루어졌다. 이 컴퓨터언어는
프로그래머가 명령어를 작성하기 위해 짧고 기억하기 쉬운 문자들을 결합시켜 만든 간략한 의사기호(mnemonics)인데,
기존의 0과 1로 이루어진 기계 코드를 대신하였다. 그리고 자주 사용하는 명령절차에 쓰도록 별도로 작성해 놓은
프로그램 명령어들의 집단인 서브루틴(subroutine) 덕택에 프로그래머의 일손이 줄어들게 되었다. 이렇게 작성된
프로그램은 어셈블러라고 불리 우는 별도의 프로그램이 컴퓨터가 이해할 수 있는 2진 코드로 변환시켜 준다.
1953년에 등장한 IBM의 컴퓨터 시리즈는 모두 자체 개발한 어셈블러를 갖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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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제2세대 컴퓨터 (트랜지스터 사용)
1.최초의 컴퓨터 통신망과 트랜지스터의 출현
가. 최초의 컴퓨터 통신망
1950년대 최초의 대규모 컴퓨터 네트웍인 SAGE시스팀이 대공방어장치로서 개발되면서 시작되었다. 전체를 통제하는
컴퓨터는 MIT의 실시간컴퓨터가 채택됐다. SAGE는 1,500만마일이나 되는 거대한 통신 선로를 포함하고 있었다.
그리고 대공 방어에 있어서 자료처리속도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한다고 할만큼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에 관측된 자료를
중앙의 컴퓨터에 빨리 보낼 수 있도록 하는 고속 모뎀의 개발은 필수적이었다.
모뎀의 출현을 통해 집안에서 주식시세, 각종 문화행사, 백과사전류의 정보를 손쉽게 접할 수 있게 됐다. 미국의
컴퓨서브와 더소스(The source)등이 그것이다. 이런 정보통신의 이용에서는 프랑스가 한발 앞섰다고 할 수 있다.
나. 트랜지스터의 발명
1947년에 벨 연구소에서 트랜지스터(transistor)가 발명되었다. 여기에는 존 바딘(John Barden, 1908-1991),
월터 브래튼(Walter H Brattain) 및 윌리엄 쇼클레이(William Shockley)로서 이들은 그 탁월한 업적으로 1957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다. 그러나 이는 조금 더 빨리 발전할 수 있었다. 1940년대 초 진공관과의 결별이 멀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던 그 시기에 2차대전으로 말미암아 벨연구소의 대부분의 연구원은 전쟁과 관련된 분야에서 일할 수
밖에 없었고 결국은 전쟁이 끝난 1945년에 가서야 연구가 재개되었다.
이것은 실용화되기까지 긴 세월을 거친 발명품이다. 트랜지스터는 진공관에 비해 크기를 1/200로 축소시켰다.
트랜지스터는 크기가 작고, 속도가 빨랐으며 여러 개를 합쳐 하나의 패키지로 만들 수 있으며 정보를 전송하는데
전력소모가 훨씬 적었다. 또한 고체 물질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신뢰도가 증가하였으며, 진공관을 사용할 때보다
열이 훨씬 적었다.
한편 1954년에 TI로 옮긴 골든 틸을 중심으로 최초의 상업용 실리콘 트랜지스터를 생산한다.
1959년에는 좀 더 복잡한 컴퓨터가 탄생했는데 이 컴퓨터는 산술 연산용으로 트랜지스터를 사용했으며
기억장치로 자기코어를 사용하였고, 외부 기억장치로 자기테이프나 디스크를 사용하였다.
이렇게 됨에 따라 10자리수 2개를 곱하는데 10만분의 1초 밖에 걸리지 않게 되었다.
다. 트랜지스터 컴퓨터
이 시대의 컴퓨터로는 IBM 계열로는 IBM 7030(STRETCH라고도 불림), IBM 7190 등이 있었고, 다른 계열로는
RCA 301, CDC 3600, IBM 1401, Burroughs B200, Honeywell 400, GE 200, NCR 300, CDC 160 등이 있다.
1958년 가을 트랜지스터를 갖춘 IBM 7000시리즈의 출현은 상업용 데이타처리부문에 신기원을 이룩하였다.
진공관보다 훨씬 축소된 7000시리즈는 전력을 적게 소모해 열을 적게 발생시킬 뿐만 아니라, 신뢰도도 높았다.
또 1959년에는 1401을 발표했다. 이는 아직까지도 기계식 천공기를 가지고 있는 중소기업가들에게 적합하도록
목표를 맞춘 것이다. 1401은 초기에 엄청난 인기를 끌어 1950년 말에 미국전역에 설치된 컴퓨터의 대수가 6천대에
불과했으나, 1960년대 초에는 1만5초대까지 끌어 올리는 데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또한 예기치 못한 공헌도 했는데 7000시리즈중의 하나의 개량인 7074를 설치한 조세국의 활약상은 너무 명성인
높아진 나머지 지겹도록 끈질긴 세금 체납자들이 70만달러 이상의 체납액을 자진 신고하고, 컴퓨터 없이는 도저히
적발할 수 없는 탈세부정이나 오류를 적발해 남부지역에서만 추가로 850만 달러의 세수입을 올리기도 하였다.
라. 다른나라의 컴퓨터
한편 소련에서도 에니악이 탄생한지 5년 뒤인 1950년에 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에서 진공관을 사용해 만든
에니악형 컴퓨터 MESM을 만든다. 성능은 빈약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많은 테스트 데이터와 기술자의 육성 등에
크게 기여한다. 이어 52년에 중형컴퓨터인 M-2 가, 53년에는 본격적인 컴퓨터 스트레러가 각각 제조되었다.
이와는 별도로 MESM의 제조를 지도했던 레베제프는 모스크바 수학연구소로 자리를 옮겨 52년 당시
유럽에서 최고속도의 컴퓨터 BESM 을 만든다.
그런데 소련에서는 이후 사이버네틱스에 대한 논쟁이 이데올로기적으로 가열되어 컴퓨터의 발전을 가로막는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컴퓨터와 같은 분야보다는 수학과 물리학 등의 기초과학을 지나치게 중시하는 정책으로
말미암아 그 발전이 더디게 된다.
소련에서의 제2세대 컴퓨터의 대량생산이 가능하게 된 시기는 62년 무렵이다. 이중 유명한 것은
범용 대형기종인 BESM6 (66년 양산 개시), 중형시스템 민스트 32 , 소형기종 나이리 , 미르 등이 있다.
제3세대 컴퓨터는 72-74년 무렵에 동구 6개국과 공동으로 개발한 ES(라드) 시리즈이다. 72년에 ESⅠ 시리즈가
발표돼, 75년에 개발이 완료되었다. 이 컴퓨터는 사실 64년에 발표된 IBM360의 호환기종으로 제3세계 수출에
촛점을 맞춘 것이지만 출하가 상당히 늦어진다. 이어 70년에 선보인 ESⅡ도 IBM370과 호환기종이다.
소련에서는 군사산업위원회에서 서방기술의 습득을 위해 합법, 비합법적인 방법을 모두 동원하지만
치열한 경쟁을 통해 기술을 축적하는 서방에 비하면 그 발전은 더딜 수 밖에 없다.
일본이 오늘날과 같은 발전을 하게 된 데에는 국가적인 정책적 육성에 큰 원인이 있다.
1957년에 전자산업육성법 을 제정하여, 마이크로 전자 산업을 국가전략산업으로 육성하였다. 이 법에 따라
일본 통상성은 전자분야의 연구개발을 총지휘하고 생산업체들에 보조금과 은행융자를 제공하며 유망한
신상품을 선정하고, 생산목표를 선정하는 일부터 시작하여 심지어는 카르텔을 조직하며, 나아가 일본의 전자산업이
미국을 앞서 나갈 수 있는 방법이라면 어떠한 일도 할 수 있는 일종의 비상대권을 부여 받게 되었다.
2. SW의 등장
가. 최초의 OS
50년에 선보인 UNIVAC-1이 최초의 상용 컴퓨터이며, 제너럴 모터스 연구소에서는 자사에 보유하고 있던
IBM 701을 위한 운영체제를 만들기에 이르렀는데 이때가 50년대초였다.
이전까지 사람의 손이 개입되는 비능률을 배제하고자 컴퓨터에 처리시키는 일을 어느 정도 모아서 그것을
오퍼레이터의 작업 없이 컴퓨터가 자동으로 처리하는 방식인 배치처리를 실현하게 된 것이다.
50년대 시스팀은 일반적으로 한 번에 하나의 작업만을 수행했으며, 컴퓨터시스템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작업간의 변환을 원활하게 하도록 설계됐다. 이것은 프로그램과 데이터가 집산적으로 또는 일괄적으로
받아 들여지므로 단일 흐름 일괄처리(single-stream batch processing) 시스템이라고 부른다.
또한 작업 제어 언어가 등장하게 된 것도 이 무렵이다.
50년대 말부터 60년대 전기에 거쳐 영국의 맨체스터 대학에서 아틀라스 운영체제가 설계됐는데,
이는 근대 운영체제의 표준이 될 만한 특징들을 보유하게 된다. 이를테면 디바이스 드라이버가 시스팀의
주요 부분으로 자리잡게 되고, 엑스트라 코드라 불리는 특별한 명령 단위에 의한 시스팀 콜이 등장한다.
나. 최초의 컴퓨터 언어
1951년 보브 패트릭은 우연한 기회에 컴퓨터 프로그래머 양성교육에 참석함으로써 프로그래머가 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프로그램의 낭만적이지 못할 뿐만 아니라, 골치 아픈 것이었다. 어셈블리 코드의 길이는 점점
길어만 지고, 그에 따라 에러와 버그도 늘어만 가고, 결국은 이를 디버깅하기 위한 시간도 길어지기 때문이다.
이문제로 고민하던 패트릭은 스피드코딩(speed coding)이라는 선구적인 컴퓨터 언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 언어는 IBM의 젊은 설계사 존 배커스가 701에 쓰기 위해 개발하여 무료로 준 것이다. 스피드코딩은 일종의
언어번역기로 단순화된 명령어로 작성된 프로그램을 직접 실행할 수 있는 기계어로 번역해 주는 소프트웨어였다.
두수를 더하는 네 개의 명령어가 필요하던 어셈블리어와는 달리 하나의 의사명령으로 똑같은 일을 해낼 수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다른 프로그래머들은 이 소프트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스피드코딩이 주기억장치의 절반을
차지할 뿐 아니라, 실행시간이 최고 15배까지 늦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패트릭은 이 소프트웨어를 사용하는 것이
디버깅 시간 등을 감안하면 더욱 효율적이라는 판단을 내리게 되고 그는 결국 가장 유능한 프로그래머로 통하게 되었다.
1955년 11월 IBM사용자 모임인 SHARE에서 새로운 운영체제에 대한 그의 아이디어를 제시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던 노스아메리카항공사에 근무하는 오웬 모크라는 엔지니어를 알게 되었다.
그들은 계획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IBM이 704을 발표하자 그는 GM에서 704를 연구하는 팀에 참여했다.
그는 704를 다루는 방법을 연구하는 동시에 그 동안의 경험과 이론을 바탕으로 최초의 운영체제(OS)에 대한
청사진을 펼쳐 보였다. SHARE에서의 모임이 있은뒤 14개월뒤 3단계 오퍼레이팅 시스템이라고 이름 붙인
프로그램을 만들어 냈다. GM-NAA I/O로 알려진 이 작품은 하나로 통합된 프로그램패키지로서,
모니터라고 부르는 일단의 감시 명령군의 통제아래 3부분-입력, 실행, 출력으로 나누어져 있다.
이 프로그램덕분에 일괄처리라는 말에 적합한 컴퓨터가 등장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프로그램의 활약은 놀라운 것이었다. IBM은 704의 성능을 그 이전의 701보다 2배 정도 빠르다고 선전을 했지만
3단계 오퍼레이팅시스템을 갖춘 GM의 704는 701보다 무렵 20배의 성능을 나타낸 것이다. 당시에는 소프트웨어를
상품으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이는 배포된 지 몇 달 만에 704의 대부분의 시스템에 사용하게 되었다.
1956년 704 후속타에 쓰일 운영체제를 설계할 SHARE위원회가 소집되었다.
그러나 57년 1월 IBM은 공식적으로 후속타인 709를 발표하면서, SHARE위원회로부터 SHARE 운영체제(SOS)의
개발을 위임받게 되었다. 그리고 SOS는 스피드코딩을 개발한 존 배커스가 이끄는 소프트웨어 설계팀에도
큰 힘이 되었다. 배커스는 과학기술계를 겨냥한 FORTRAN을 설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IBM이 컴퓨터 업계에서 여전히 능력을 발휘하고 있을 때에 7난장이로 불리운 회사중의 하나인 버로즈사가
1961년 5000시리즈에 쓰기 시작한 다중프로그래밍기술이 등장한다. 이전의 컴퓨터가 속도는 매우 빨라졌다고 하지만,
기본적으로 한시간에 하나의 작업을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5000은 MCP(Master Control Program)로 알려진
운영체제의 감시하에서 같은 시간에 하나의 주기억장치를 여러 작업 프로그램들이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
효율을 급속히 높일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실용화하기에는 주변의 여건이 성숙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다. 컴퓨터 그래픽의 탄생
컴퓨터는 본래 계산을 목적으로 하는 도구이다. 그러므로 창작 활동에는 부적합하고 초기의 컴퓨터 예술이라고
불리우는 대부분의 작품은 컴퓨터의 연산속도를 이용하여 기호나 문자를 프린터로 찍어낸 그림이나 패턴들이다.
그후 컴퓨터를 통하여 직접 도형을 그릴 수 있는 X-Y플로터나 레이다의 브라운관을 개량하여 개발된 CRT라고 불리우는
그래픽 디스플레이 장치에 도형이나 화상을 비추는 출력장치가 개발됨으로써 컴퓨터 그래픽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컴퓨터 예술은 입출력장치의 성능에 의존하는 까다로운 예술이며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의 개발에 따라
표현의 다양성과 시각의 다양성을 넓힐 수 있는 특이한 성질을 가진다. 제1기를 1946년 에니악(ENIAC) 컴퓨터가
완성된 후부터 1950년대 말까지 본다면 이 시기는 주로 라인 프린터를 사용하여 사진을 인쇄로 표현한 경우와 같이
망점을 프린터의 문자나 기호의 농도에 따라 여러 단계로 분류하여 바꿔 놓아 표현한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1950년경 영국에서 춤추는 댄서의 영상을 오실로스코프에 옮겨 보았다. 물론 앙상한 뼈로만 구성된 댄서였지만,
이는 최초의 영상이었다. 그래픽이 대중화한 계기는 MIT의 포리스티가 만든 휘르윈드(Whirwid)라는 작품에서
비롯된다. 이 디스플레이 장치는 TV 세트와 비슷한 CRT(Cathode Ray Tube)를 사용하여 만들어 졌다.
휘르윈드는 바이킹로켓이 비행하는 동안 연료와 비행 속도를 수치가 아닌 그래프로 보여 주었다.
이 시범은 2차 대전중 방공망의 개선에 골몰하는 군인들에게는 희소식이었다. 새로운 미사일등 공격용 무기의 성능은
매우 발전해 갔지만 이를 막아낼수 있는 방공방은 원시적이었기 때문이다. 휘르윈드 컴퓨터가 여기에 뛰어들었다.
휘르위드는 레이더에 잡힌 각 물체를 점이 아닌 약정된 기호로 나타내었고, 오퍼레이터가 정보를 알고 싶으면
광선총을 컴퓨터 스크린에 갖다 대고 있으면, 원하는 정보를 알수 있었다. 1951년의 시범은 성공이었다.
그래서 이를 기초로 미국 전역의 22개 지역과 캐나다까지 통합한 세이지(SAGE, semi automatic ground environment)
방공망이 완성되었다. 1958년부터 구축되어 1983년까지 별 무리없이 사용되었다.
1958년 캘컴프사로부터 565 드럼 플로터가 개발되어 설계시스템에 위력을 발휘함으로써 큰 변혁을 주었다. 그러므로써
2차 곡선, 곡면, 복잡한 도형, 좌표 교환에 의한 메타몰포오제 등의 도형을 종이 위에 정확히 그리는 것이 쉬워졌다.
이와 같이 50년대 말까지의 컴퓨터 그래픽은 탄생기였으며, 이 시대를 출력장치의 이름을 빌어 프린터 플로터의
시대라고 불리운다. 50년대에는 컴퓨터가 대화식으로 사용하는 데에는 부적합하여 대화식 컴퓨터 그래픽은
많은 발전을 하지 못하였다. 이들 컴퓨터는 물리학자나 미사일 도안자들을 위한 거리 계산 정도에 불과했다.
단지 50년대 말에 MIT의 TX-0과 TX-2 등과 같은 기계의 개발로 대화식 컴퓨터가 가능하게 되었고,
컴퓨터 그래픽에 대한 관심이 급속도로 증가하게 되었다.
3 .인공지능과 최초의 Super Computer
가 .스페리랜드와 IBM
2차대전중 COMPUTER는 주로 암호해독과 무기개발에 이용되었다. 특히 2차대전이 끝날 무렵부터 핵무기
개발경쟁은 매우 치열해졌다. 그중에서도 버클리대학부설 로렌스방사능연구소는 당시 가장 빠른 COMPUTER로도
1백시간 넘게 걸리는 계산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1954년 마침내 로렌스 연구소는 현재 개발된 COMPUTER보다
1백배 빠른 COMPUTER를 찾는다는 광고를 냈다. 여기에 뛰어든 회사는 IBM과 스페리랜드라는 회사였다.
결국 스페리랜드의 신청이 받아들여졌고, 1956년 3월 본격적인 개발에 뛰어들었다.
다행히 그 무렵 진공관 기술이 새로운 트랜지스터로 대체되는 시기였기 때문에 비교적 수월해 보였다.
개발작업은 루코프라는 공학자가 주도하였고 새로운 기계의 이름은 LARC라고 명명되었다.
순수하게 계산을 담당하는 부분과 외부로부터 입출력을 담당하는 부분으로 전체 구조를 나누었다.
우여곡절속에 LARC는 완성되었는데, 문제는 제작비가 너무 비싸 기꺼이 사줄 것이라던 고객들이 고개를 내젓는
것이었다. 게다가 잦은 부품 고장으로 애당초 인도하기로 계약한 성능의 90%에 그쳤다. 그뿐 아니라
원래 인도계약시간보다 2배 정도는 더 끌었기 때문에 스페리랜드는 할 말이 없었다. 한대는 로렌스연구소에
다른 한대는 미해군에 팔았을 뿐 이었다. 결국 상처뿐인 영광을 얻고 회사는 문을 닫고 말았다.
한편 스페리랜드에 패해 와신상담중이던 IBM은 1957년 원폭연구에 선구적인 역활을 했던 로스알라모스연구소와
IBM704보다 일백배 빠른 COMPUTER개발에 합의했다. 새로운 COMPUTER에는 Stretch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IBM은 LARC의 문제점을 분석하며 새로운 방법들을 도입하였다. 수동식 배선의 부정확성과 느린 속도의 개선을 위해
새로운 배선 PROGRAM을 개발했다. 특히 이 배선 PROGRAM은 IBM-704로 처리되는 CAD(computer aided design,
COMPUTER 이용설계) PROGRAM을 도입하였다. 그러나 인도기한을 1년 가까이 넘기고서야 인도할 수 있었고
이나마 애당초 요구한 속도의 25%밖에 내지를 못했다. 낮은 신뢰도로 인해 원래 가격 1천3백만달러의 절반정도인
7백만달러에 판매하였다. 그뒤로 8대 정도를 다시 주문 받았지만 그동안 손해액은 2천만달러에 달했다.
나. 크레이의 등장
유니백(나중에 유니백은 스페리랜드와 병합됨)과 IBM의 실패로 한동안 대형 COMPUTER의 개발에 참여하는 업체가
없었다. 이 와중에 뒤를 이어 1957년 창립된 CDC가 대형 COMPUTER 사업에 참여하였다. 1958(1957 ?)년 CDC의
첫 작품은 1604였는데 당대 최고의 속도로 알려진 IBM704보다 빠른 속도로 주목을 받았다.
특히 1604는 진공관 대신 트랜지스터를 사용해 만든 최초의 상용 컴퓨터 중의 하나이다.
CDC의 목적은 사무용이 아니라 대형 COMPUTER였다. 1964년에는 더 빠른 MODEL 6600을 개발하였다.
1064는 MODEL 6600에 추월당하기까지 최고 속도의 COMPUTER 자리를 지켰다.
MODEL 1604의 설계를 담당한 사람중에는 크레이라는 뛰어난 엔지니어가 있었다.
미네소타대학을 졸업한 25세에 유니백 1103의 개발책임을 맡았다. 그후 CDC로 옮겨 MODEL-6600 개발에
참여하였다. MODEL-6600은 초당 3백만번의 계산으로 CDC-1604보다는 20배나 빠른 속도였으며 IBM의
스트레치보다는 3배의 빠른 속도였다. MODEL-6600에 힘입어 MODEL-7600도 개발하였다.
COMPUTER의 전통적인 구조는 1950년 폰 노이만이 제시했던 MODEL이다. PROGRAM 내장 방식과
순차처리방식이 그것이라 할 수 있었다. SUPER COMPUTER를 꿈꾸는 사람은 누구든지 다음 세가지 개선책중의
하나를 택해야 한다. 더 빠른 부품, 짧은 배선에 의한 고집적화, 근본적인 구조개선이 바로 그것이다.
CDC-7600이 상업적으로 성공할 무렵 벌써 SUPER COMPUTER 개발경쟁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TI(텍사스 인스트루먼트)사는 일찍이 ASC(Advanced Scientific Computer)라는 과학기술 게산용 고속 COMPUTER를
개발했었다. 그리고 CDC에서도 SUPER COMPUTER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해체됐던 팀을 재정비해
고속 COMPUTER개발을 재개하였다. 그 결과 STAR-100이라는 제품을 만들어 내었다.
초창기 COMPUTER개발의 선두 주자였던 일리노이 대학은 할아버지인 일리악(ILLIAC)에 이어
일리악-Ⅳ이라는 고속COMPUTER를 생산했다. STAR-100, ASC, ILLIAC-Ⅳ 등은 모두 전통적인 방법을 버리고
병렬계산구조라는 혁신적인 방법을 선택했다. 혁신적인 방법은 파이프라인 방식과 벡터처리기라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이를 선구자로 도입했던 ILLIAC-Ⅳ은 상업적으로는 참패했다.
파이프라인 방식을 주된 처리방식으로 했던 ASC 역시 상업적으로는 실패를 맛보았다.
다. 인공지능
1769년 바론 볼프강 폰 켐펠렌(Baron Wolfgang Von Koempelen)의 자동 체스 게임을 하는 기계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는 기계 속에 교묘히 사람이 숨어 게임을 하는 것이었다.
19세기 초에 찰스배비지(Charlse Babbage)는 그의 해석 기관(analytical engine)의 제작비를 구하기 위해
틱-택-토(Tic-Tac-Toe) 기계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재정을 인하여 틱-택-토 기계를 온 나라에 전파하였다.
1914년에 스페인의 발명가인 큐베도(Quevedo)는 정직한 게임놀이 기계를 만들었다.
1930년경에 콘돈(Condon)은 님(nim)이란 게임을 하기 위하여 특별목적 컴퓨터를 고안하였다.
UIT의 클라우드 샤논(Claud Shannon)은 카이삭(caissac)이라는 체스놀이 기계를 만들었고,
체스놀이를 하기 위해서 특별 목적 컴퓨터가 어떻게 사용되는가를 알게 되었다.
본격적인 자동기계는 찰스베비지의 미분기계에서 시작된다.
인공지능 (AI, Artifitial Intelligence)이라는 용어는 1956년 미국 다트머스대학에서 열린 한 세미나에서 탄생한 용어이다.
전자공학이 발달하여 초창기 디지탈 컴퓨터가 개발되자, 인공지능을 구현해 보려는 대담한 연구들이 진행되었다.
1950년 벨전화연구소는 컴퓨터를 이용한 자동응답전화기를 개발하려 하였다. 그보다 1년 앞서 스웨덴의 과학자
웨렌 위버는 전세계의 언어를 모두 번역할 수 있는 기계의 개발을 선언했다. 그 시대 분위기라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시도들이었다. 도한 같은해 새뮤엘은 IBM701에 체스프로그램을 입력하여 당대의 체스 챔피언들을
굴복시키겠노라고 장담했다. 그러나 그것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같은 기계에 이론적 배경를 제공한 사람은 세기의 천재인 위너 박사이다.
그는 사이버네틱스라는 학문분야를 만들었다. 사이버네틱스의 어원은 그리이스어로 배의 방향을 잡는
키잡이라는 뜻이다. 사이버네틱스는 보통 인공두뇌학이라 불리우며, 이는 모든 생물체의 일반적인 적응과정을
수리적으로 정형화하는 것으로 이후에 인공지능의 이론적 기초가 되었다.
위너가 발견한 적응과정의 핵심은 피드백(feed back)이다. 즉 주위의 환경에 일정한 작용을 한뒤
그 결과를 받아들여, 다음 작용에 적용하는 것이다. 피드백 이론은 레이더를 이용한 대공포 이론에 응용되어
명중률을 획기적으로 높이게 된다. 워렌 매컬리라는 신경생리학자는 뇌의 신경과정과 뇌의 동작과정은
근본적로 같아야 한다는 이론을 발표하기에 이르른다.
이러한 초창기의 인공지능 접근방식을 신경모델링(neutral modeling)접근 또는, 상향식(bottom up)방식이라 부른다.
즉 신경세포와 같은 컴퓨터 소자를 개발하여, 그것을 엮어서 두뇌와 같은 기계를 만들자는 것이다. 그러나 수백억개의
뉴런을 가진 두뇌를 철심(기억소자)과 전기줄로 엮어낸다는 것은 마치 바닷가의 모래알을 맞추어 바윗돌을
만든다는 것과 같은 이론이다. 신경생리학과 컴퓨터과학 모두가 아직도 그리 발전을 하지 못했던 시기의 시도였다.
라. 기계 번역
기계번역은 지난 46년 최초의 컴퓨터인 에니악(ENIAC)이 등장하면서 컴퓨터에 의한 기초연구가 시도되었으며,
괄목할 만한 기계번역기술은 8년뒤인 54년 미국 조지타운대학과 IBM이 러시아어를 영어로 번역하는 시제품을
개발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선보인 이 러시아-영어 기계번역시스템은 컴퓨터의 하드웨어 기술부족 등으로
구문규칙(문법)이 6개에 불과했으며, 등록된 단어도 250여개 밖에 되질 않아 기대에는 크게 미치지 못했지만
기계번역에 대한 가능성을 타진했다는데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특히 이 시스템은 후에 개량되어 시스트랜(SYSTRAN)이란 상용번역시스템으로 발전, 미 공군에서 활용되는 성과를 올렸다.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기계번역에 대한 연구는 미국과 유럽, 일본을 중심으로 지난 70년까지 15개 국가의 45개
연구기관이 각종 논문을 발표했으며, 기업과 연계한 상용제품개발로 이어졌다.
이때부터 각종 번역처리알고리즘이 개발됐는데, 영어-프랑스어, 한국어-일본어 등과 같이 문법구조가 유사한 언어는
원문을 명사와 동사, 형용사 등으로 분할하고, 전자사전을 참조해 변환하는 직접방식과 문장 전체를 해석해 의미를
사전에서 참조하는 간접방식 , 나아가 다국어 처리를 가능하도록 중간표현을 생성한 후 이를 목표 언어로 번역하는
피봇방식 등이 서서히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중 대표적인 연구는 프랑스 그루노블대학의 CETA , 미국 텍사스대학의 METAL , 독일 자브매킨대학의 SUSY,
캐나다 몬트리올대학의 TAUM-METEO , 미국방성의 LOGOS, 그리고 일본 규슈대학 및 전자기술종합연구소의
YAMATO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기계번역에 대한 각국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당시에는 하드웨어의 기술 부족으로 부정적인 면이 압도적이다.
이와 관련해 기계번역은 인간의 번역에 비해 질적이나 가격면에서 떨어져 실용가치가 없다는 미국ALPAC(Automatic
Language Processing Advisory Committee)의 보고서가 발표, 많은 개발과제들이 중단되는 현상을 보이기도 했다.
4. 실리콘밸리의 탄생
가. 스탠포드대학과 HP
1906년 AT&T의 드 포레스토와 그의 동료는 진공관 증폭회로를 발견했다. 그런데 이 사건이 일어난 곳은,
후에 실리콘밸리(Sillicon Valley)라고 이름 붙여진 지역이었다. 실리콘밸리가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외에도 몇가지가 더 있었다. 전자공학의 전도사라 할 수 있는 쇼클레이가 있었고, 세계 최고의 대학이라
할 수 있는 스탠포드대학이 있었다. 실리콘밸리라는 이름은 1971년 반도체산업전문정보지인
마이크로 일렉트로닉스의 편집자인 돈 C. 호플러가 실리콘밸리라는 이름을 붙여 부르게 되었다.
실리콘밸리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먼저 스탠포드에 대해 알아 보아야 할 것이다. 1891년 창립된 스탠포드는
1920년대까지 서부의 별 볼일 없는 학교였다. 스탠포드를 창립한 사람은 스탠포드 상원의원이었다.
1885년 스탠포드의원은 전재산을 학교에 기증했다. 그 재산중에는 캠퍼스부지로 기증된 팔로알토 지역의
8천8백 에이커 목장이 있었다. 스탠포드를 세계의 대학으로 키운 사람은 프레드릭 터먼이라는 그 대학교수였다.
터먼은 1946년 스탠포드대학의 공학부장이 되었다. 터먼이 실리콘밸리에 뿌린 첫 씨앗은 휴렛팩커드이다.
HP의 창립자인 휴렛과 팩커드를 스탠포드로 불러들여 휴렛의 석사학위논문을 완성시켰다.
휴렛과 팩커드는 자신들의 차고에서 자신들의 아이디어를 이용해 발진기를 제작했고 운도 따라
1942년 벌써 연간 매상고 1백만 달러의 회사로 성장했다.
1940년대에 스탠포드는 경영위기에 봉착했다. 학교발전을 기대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설립자인
스탠포드의원이 기증한 토지를 팔수도 없었다. 기증 조건중에 매각이 불가능한 조건이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 터먼이 아이디어를 내었다. 땅을 빌려 주고 그 임대료를 받아 첨단기술공업단지를 건설하자는 것이었다.
드디어 스탠포드 연구단지 (Stanford Research Park)가 완성됐다. 연구실에서 만든 기술을 근처 기업에 팔고
기술 이전을 하면서 땅장사와 기술장사를 동시에 하자는 것이었다.
싼 땅값과 기술이전이라는 호조건때문에 많은 기업들이 몰려 들었다. 1호 진출기업은 배이언 소시에이트사였고,
이어 HP가 들어왔다. HP사로 하여금 입주를 망설이는 기업을 설득하도록 하게 하였다.
결국 1970년가지 70년까지 리서치 파크에는 70여개사가 입주하게 되어 토지임대에 따른 안정적인 수입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얼마 전부터 MIT는 캠퍼스부지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으나, 스탠포드는 오히려 확대일로에 있다.
나. 반도체와 쇼클레이
실리콘밸리의 발전에 기여한 또 다른 사람이 있었다. 그는 당대 최고의 물리학자인 쇼클레이이다.
쇼클레이는 1952년 당시 무게로는 금보다 비싼 상업용 트랜지스터를 만들었다.
벨연구소의 터줏대감이었던 쇼클레이는 쇼클레이반도체회사를 실리콘밸리에 세운다.
1956년 봄, 쇼클레이가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하는 것을 계기로 쇼클레이반도체회사는 절정에 다다른 듯이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은 오래가지 못했다. 쇼클레이 밑에서 기술을 익힌 8명의 제자들은 상업적인 성공을 위해,
그리고 쇼클레이의 불같은 성격을 참지 못해 회사를 새로 차리거나 다른 회사로 옮겨 가기 시작했다.
수제자라 할 수 있는 봅 노이스는 페어차일드반도체회사를 설립했고, 고든 무어는 노이스를 따라 갔으며,
진 호니는 아넬코사를 설립하는등 각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쇼클레이의 반도체회사에서 갈라져 나온
이러한 회사들은 또 다시 여러 회사로 나눠어지면서 실리콘밸리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쇼클레이는 지나친 금전욕과 가혹한 훈련 방식으로 결국은 파산하고 말았다.
진 호니에 의한 프레이너형 생산공정은 트랜지스터 생산확대에 전기를 마련했다.
이 기술은 이후 LSI(대규모 직접회로)의 기본의 되는 MOS 전계효과 트랜지스터개발로 이어지게 된다.
봅 노이스의 페어차일드는 텍사스 인스트루먼트(TI)의 킬비와 우연의 일치로 집적회로 제조에 대한
특허분쟁을 일으켰고 영광은 킬비에게 돌아갔다.
봅 노이스는 페어차일드를 나와 두번재 회사인 인텔사를 설립했다. 모험자본가인 아서 록이 자본을 모았고,
마이크로 프로세서를 개발한 E. 호프 쥬니어박사, 페어차일드사에서 옮겨온 피데리코 파진등이 어울려 1971년
인텔4004라는 세계 최초의 마이크로 프로세서를 개발했다. 연이어 출하된 인텔8080은 몇년 동안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특히 당시로는 혁신적인 가격인 2달러 50센트는 인기를 더하게 되었고, 이는 컴퓨터와 다른
기기들의 결합을 촉진했다. 그러나 경쟁사의 도전도 만만치 않았고, 호프는 게임 프로그램으로 유명한
아타리(Atari)사로 옮겨 갔다. 쇼클레이로 부터 시작된 실리콘밸리의 신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실리콘밸리의 성공을 이끈 또 하나의 요인은 막대한 군사자금의 유입에 있었다.
1965년 록히드 항공회사의 주력부문이 이곳으로 이사를 왔다. 한때 국방부 구입 반도체의 40%를 이곳에서 차지했다.
특히 1960년대 아폴로계획에 의한 미항공우주국(NASA : national aeronautics and space administration)로부터
막대한 자금이 실리콘밸리로 흘러 들어왔다. 또 미소간의 냉전체제는 엄청난 양의 국방관련 자금의 유입을 가져왔다.
또한 자유로운 이직(30%)과 탄탄한 경쟁체제는 많은 기업을 도산시켰지만 도리어 자체 시스템을 안정시켜 주었다.
새로운 생태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리콘밸리에도 갈등구조가 있었다. 국제적인 스파이조직, 뿌리뽑히지 않는 암시장, 미소간의 소비체제,
항상 매스컴을 타는 10% 미만의 기술자를 제외한 첨단의 가난을 달리는 제3세계 출신 노동자들이 그것이다.
그리고 실리콘밸리의 사장들은 일본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보다 더 두려워하고 있는 노동조합이 있었다.
다. 최초의 해커
해커(hacker)라는 말이 엉터리 프로그래머, 컴퓨터광 등의 조소적인 의미로 심지어는 컴퓨터 범죄자로까지
인식되고 있지만 컴퓨터의 발전과정을 들추어 보면, 이들 해커야말로 오늘날의 컴퓨터 혁명을 실질적으로
가능하게 한 숨겨진 영웅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컴퓨터에 대한 광적인 몰두, 일반인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행적과 무수한 일화가 이들에 대한 오해를 불러 일으킨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의 괴퍅한 외관의 이면을
들추어 보면 모험가이자 공상가이며, 행동주의자이자 예술가인 그들의 숨겨진 본성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들은 왜 컴퓨터가 진정 가히 혁명적인가 를 그 누구보다 분명하게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또한 IBM과 같은
거대 기업이나 관료주의에 대항해 컴퓨터를 모든 사람들의 손에 들어갈 수 있도록 만들어 준 혁명가들이기도 했다.
미국의 유명한 해커 사학자 스티븐 레비(Steven Levy)는 그의 저서 해커스 (Hackers)에서 컴퓨터 혁명을
가능하게 만든 실질적인 원동력인 해커의 역사를 세시기로 나누고 있다. 제 1세대 해커는 해커의 원조라 할 수 있으며,
1950년대 MIT의 철도모형클럽 인공지능연구소가 이들 해커의 발상지였다. 이들은 당시 일괄처리방식을 채택하고
있던 IBM 704 등의 괴물 컴퓨터에 대항해 TX-0 PDP-1 등의 대화식 컴퓨터로 우주전쟁 게임을 비롯한
전설적인 프로그램들을 만들어내었고 해커의 윤리라는 새로운 컴퓨터 문화를 창출했다.
해크 (hack)라는 용어는 아주 오래전부터 MIT에서 흘러 다니는 은어였다. 이말은 MIT 학생들이 무슨 법칙이라도
되듯이 주기적으로 만들어 내던 대학 내의 고약한 농담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용어가 MIT의 철도모형클럽
(TMRC) 회원들에 의해 사용되었을때 거기에는 새로운 의미가 함축됐다. 그들은 작업과정 그 자체에서 느껴지는
순수한 즐거움 이외에 어떠한 목표도 갖지 않는 프로젝트나 그에 따른 결과물을 해크라고 불렀다.
이들이 벌인 해킹 중에서 가장 전설적인 것이 바로 우주전쟁 (Spacewar)이라는 최초의 본격적인 컴퓨터 게임이다.
달팽이라는 별명을 가진 스티브 러셀은 당시 인공지능을 연구하던 매커시 교수의 조수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항상 화면을 통한 디스플레이 해커야말로 모든 사람을 놀라게 만들 해킹이라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비디오 게임이야말로 컴퓨터가 가진 마술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그러던 차에 마빈 민스키 교수가 멋진 디스플레이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이것은 몇개의 원과 나선 알고리즘을
사용해 화면에 환상적이고 소용들이치는 듯한 여러가지 무늬를 만들어내는 프로그램이었다.
러셀은 이 프로그램에 심취했으나 불만이 생기기 시작했다. 너무 수학적이고 추상적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동료 해커들과 토론을 벌인 끝에 동료들도 심취해 있던 한 공상과학 소설에 등장하는 우주 활극을 모델로 하는
게임을 만들기로 합의했다. 1961년 12월초에 시작한 작업은 1962년 2얼에 기본 게임을 공개했다. 미사일을 적재한
두대의 우주선이 마련되었고, 반짝이는 별들이 스크린 상에 몇개의 점으로 묘사되어 있었다. 러셀은 완성되지 않은
버전을 공개했다. 프로그램이 담긴 종이테이프를 상자에 담아두고 누구든 이 프로그램을 개선시키도록 하였다.
제일 먼저 피터 샘슨이 프로그램을 개선하기 시작했다. 임의로 배열된 별대신 그는 자세한 성도를 구해 실제와
똑같이 별의 위치를 입력했다. 아울러 게임의 진행에 따라 하늘이 장엄하게 이동하도록 만들었다. 또 댄 에드워드는
이 프로그램에 중력요인을 첨가했다. 즉 태양을 그려 넣고, 태양의 중력을 이용해 속도를 가속시킬 수도, 반대로
태양속에 빨려 들어갈 수도 있었다. 샤그가레츠는 초공간 튜브를 사용해서 새로운 은하계로의 이동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우주전쟁을 담은 종이테이프는 누구에게나 자유롭게 돌아다녔고, 이는 동일한 프로그램을 위해
반복작업을 막는 역활도 할 수 있었다. 이를 개방성의 원칙이라고 할 때, 이외에 또다른 해커들의 윤리는 해드온
명령(hands on imperative) 이었다. 해커들은 컴퓨터에 대한 접근은 여하한 이유로도 방해받아서는 안되며 완전히
보장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해커들의 접근을 금했던 IBM컴퓨터와 그 직원들은 그들에게는 용납될 수 없는
적이었고, 컴퓨터에 대한 접근을 가로막는 모든 관료 체제와 그 관리자들은 해커들의 도전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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