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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줄거리(네이버 검색자료)
평소에 책을 많이 읽던 박지원은 우연히 청나라에서 들어 온 책을 읽고 청나라에 가서 서양 문물을 배우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러던 중 팔촌 형 박명원이 청나라로 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형님을 졸랐다. " 형님, 저를 데려가 주십시오. 저는 아무런 벼슬이 없으니 무슨 일이든 시켜주신다면 고맙겠습니다. 마부로라도 청나라에 따라가고 싶습니다. " 간곡한 부탁에 형은 박지원을 졸개 군사로 삼아 청나라에 데려 가기로 하였다. 이 때 박지원의 나이가 44세, 청나라에 가는 사람들 중에 가장 낮은 지위로 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박지원은 낮은 지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청나라에서 많은 것을 보고 배울 수 있다는 기쁨에 들떠 있었다.
청나라에 도착한 박지원은 그 곳에서 보고 느낀 것을 자세히 기록하였는데 이 스물여섯 편의 일기가 바로 <열하일기>이다. 박지원은 열하일기 속에 청나라에서 배운 농부들의 새로운 농사법, 세계 여러 나라의 소식과 편리한 기계들에 대해서도 썼다. 이 일기의 이름이 '열하'인 것은 열하라는 곳에서 있었던 일이기 때문이다. 열하에서 박지원은 중국의 이름난 학자 왕민호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는 박지원이 쓴 글을 보고 크게 놀라, 박지원을 중국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렸다. 그로 인해 박지원의 이름은 청나라에 널리 퍼지 게 되었다. 다시 조선으로 돌아온 박지원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가 놀랐다. 조선에서 박지원은 이름 없는 한 선비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도 그럴 것이 박지원은 장가를 가고 나서도 글을 읽을 줄 모를 정도로 무식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박지원은 이름 있는 양반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가 몸이 약해 일찍 죽자, 할아버지 밑에서 자라며 노는 것밖에 몰랐다. 열여섯 살이나 되었지만 글자도 몰랐다.
그러다가 장가를 간 박지원은 아내가 자꾸 이것저것 물어보자 자신이 무식하다는 것을 깨닫고 공부를 하려고 마음을 먹었다. 3년이 지나자 그는 그 마을에서 글을 가장 잘 하는 사람이 되었다. 이처럼 처음에는 무식한 사람이었지만 학문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은 박지원은 늙어서까지 항상 공부하는 자세를 가졌다.
요약
조선 정조 때의 실학자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중국 기행문집(紀行文集).
구분 기행문집 저자 박지원(朴趾源) 시대 조선시대
소장 규장각도서, 충남대학교 도서관(수택본)
본문
26권 10책. 규장각도서. 1780년(정조 4) 그의 종형인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을 따라 청(淸)나라 고종(高宗)의 칠순연(七旬宴)에 가는 도중 열하(熱河)의 문인들과 사귀고, 연경(燕京)의 명사들과 교유하며 그곳 문물제도를 목격하고 견문한 바를 각 분야로 나누어 기록하였다. 이해 6월24일 압록강 국경을 건너는 데에서부터 시작하여 요동(遼東) ·성경(盛京) ·산하이관[山海關]을 거쳐 베이징[北京]에 도착하고, 열하로 가서, 8월20일 다시 베이징에 돌아오기까지 약 2개월 동안 겪은 일을 날짜 순서에 따라 항목별로 적었다.
연암의 대표작인 이 《열하일기》는 발표 당시 보수파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하였으나, 중국의 신문물(新文物)을 망라한 서술, 그곳 실학사상의 소개로 수많은 조선시대 연경 기행문학의 정수(精髓)로 꼽힌다. 이 책은 당초부터 명확한 정본(正本)이나 판본(版本)도 없었고, 여러 전사본(轉寫本)이 유행되어 이본(異本)에 따라 그 편제(編制)의 이동이 심하다. 이 책에는 중국의 역사 ·지리 ·풍속 ·습상(習尙) ·고거(攷據) ·토목 ·건축 ·선박 ·의학 ·인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문학 ·예술 ·고동(古董) ·지리 ·천문 ·병사 등에 걸쳐 수록되지 않은 분야가 없을 만큼 광범위하고 상세히 기술되었는데, 경치나 풍물 등을 단순히 묘사한 데 그치지 않고 이용후생(利用厚生) 면에 중점을 두어 수많은 《연행록(燕行錄)》 중에서도 백미(白眉)로 꼽힌다.
충남대학교 도서관 소장 연암 수택본(手澤本) 26권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권1 <열하일기서(熱河日記序)> <도강록(渡江錄)>: 서문은 필자 미상이나, 풍습 및 관습이 치란(治亂)에 관계되고, 성곽 ·건물 ·경목(耕牧) ·도야(陶冶) 등 이용후생에 관계되는 일체의 방법을 거짓 없이 기술하였다고 설명하였다. 또 <도강록>은 압록강에서 랴오양[遼陽]까지 15일간(1780.6.24∼7.9)의 기행문으로 중국인이 이용후생적인 건설에 심취하고 있음을 서술하였다.
권2 <성경잡지(盛京雜識)>: 십리하(十里河)에서 소흑산(小黑山)까지 5일간의 기록으로, 특히 <속재필담(粟齋筆譚)> <상루필담(商樓筆譚)> <고동록(古董錄)>은 흥미 있는 내용이다.
권3 <일신수필(馹汛隨筆)>: 신광녕(新廣寧)에서 산하이관까지 9일간의 기록으로, 그 서문 중의 이용후생학에 대한 논술이 독특하다.
권4 <관내정사(關內程史)>: 산하이관에서 연경까지 11일간의 기록으로, 여기 수록된 한문 고대소설 <호질(虎叱)>은 연암의 소설 중에서도 가장 독특한 작품의 하나이다.
권5 <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 연경에서 열하까지 5일간의 기록으로, 열하에 대하여 소상히 기록하였고, 그곳을 떠날 때의 아쉬운 심경을 그렸다.
권6 <태학유관록(太學留館錄)>: 열하에 있는 태학(太學)에서 6일간 지낸 기록으로 당시 중국의 명망 있는 학자들과 더불어 나눈 한 ·중 두 나라 문물제도에 관한 논평 및 지동설(地動說) ·달세계 등에 관한 토론이다.
권7 <구외이문(口外異聞)>: 구베이커우[古北口] 밖의 기문이담(奇聞異談)을 적은 것으로, 반양(盤羊)에서 천불사(千佛寺)에 이르는 60여 종의 이야기이다.
권8 <환연도중록(還燕道中錄)>: 열하에서 다시 연경으로 돌아오는 도중 6일간의 기록으로, 대개 교량 ·도로 ·방호(防湖) ·방하(防河) ·탁타(橐駝:庭園師) ·선제(船制) 등에 관한 논평이다.
권9 <금료소초(金蓼小鈔)>: 주로 의술(醫術)에 관한 기록으로 《연암집(燕巖集)》에서는 이를 <보유(補遺)>라 한다.
권10 <옥갑야화(玉匣夜話)>: 이본(異本)에 따라서는 <진덕재야화(進德齋夜話)>로 된 것도 있다. 여기 수록된 <허생전(許生傳)>은 연암 소설뿐만 아니라 한국 소설문학사에서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작품이다.
권11 <황도기략(黃圖紀略)>: 황성(皇城)의 구문(九門)에서 화조포(花鳥鋪)까지 38종의 문관(門館) ·전각(殿閣) ·도지(島池) ·점포(店鋪) ·기물(器物) 등에 관한 기록이다.
권12 <알성퇴술(謁聖退述)>: 순천부학(順天府學)으로부터 조선관(朝鮮館)에 이르기까지 역람한 기록이다.
권13 <앙엽기(盎葉記)>: 홍인사(弘仁寺)에서 이마두총(利瑪竇塚)에 이르는 20개의 명소(名所)를 두루 구경한 기록이다.
권14 <경개록(傾蓋錄)>: 열하의 태학(太學)에서 6일간 머물며, 그곳 학자들과 응수한 기록이다.
권15 <황교문답(黃敎問答)>: 황교와 서학자(西學者)의 지옥(地獄)에 관한 논평이다. 끝에는 세계의 이민종(異民種)을 열거하는 가운데 특히 몽골과 아라사 종족의 강맹(强猛)함에 주의를 환기시킨다.
권16 <행재잡록(行在雜錄)>: 청나라 황제의 행재소(行在所)에서의 자세한 견문록이다. 여기서 특히 청나라의 친선정책(親鮮政策)의 연유를 밝혔다.
권17 <반선시말(班禪始末)>: 청 황제의 반선(班禪)에 대한 정책을 논하고, 또 황교(黃敎)와 불교가 근본적으로 같지 않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권18 <희본명목(戱本名目)>.
권19 <찰습륜포(札什倫布)>: 찰습륜포란 티베트어(語)로 ‘대승(大僧)이 살고 있는 곳’이라는 뜻으로, 열하에 있을 때의 반선에 대한 기록이다.
권20 <망양록(忘羊錄)>: 음악에 관하여 중국 학자들과 서로의 견해를 피력한 기록이다.
권21 <심세편(審勢編)>: 당시 조선 사람의 오망(五妄)과 중국 사람의 삼난(三難)을 역설한 기록이다. 북학(北學)에 대한 예리한 이론을 펼쳤다.
권22 <곡정필담(鵠汀筆譚)>: 중국 학자 윤가전(尹嘉銓)과 더불어 전날 태학(太學)에서 미진하였던 토론을 계속한 기록이다. 즉, <태학유관록> 중에서 미흡하였던 이야기인 월세계 ·지전(地轉) ·역법(曆法) ·천주(天主) 등에 대한 논술이다.
권23 <동란섭필(銅蘭涉筆)>: 동란재(銅蘭齋)에 머물 때 쓴 수필이다. 주로 가사 ·향시(鄕試) ·서적 ·언해(諺解) ·양금(洋琴) 등에 대하여 쓴 것이다.
권24 <산장잡기(山莊雜記)>: 열하산장에서의 여러 가지 견문기이다. 특히 <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 <상기(象記)> 등은 가장 비장하고 기괴하게 묘사되었다.
권25 <환희기(幻戱記)>: 광피사표패루(光被四表牌樓) 아래서 중국 요술쟁이의 여러 가지 연기를 구경한 소감을 적은 이야기이다.
권26 <피서록(避暑錄)>: 열하의 피서 산장에서 지낸 기록이다. 주로 조선과 중국 두 나라의 시문(詩文)에 대한 논평이다.
한편 연암의 후손에 의하여 최근 <양매시화(楊梅詩話)>가 새로 발견되었는데, 이는 양매서가(楊梅書街)에서 중국의 학자들과 주고받은 한시화(漢詩話)로서, 당시 옮겨 쓰려다가 우연히 누락된 것으로 짐작된다. 1911년 광문회(光文會)에서 국판 286면 활자본으로, 1932년 박영철(朴榮喆)이 6책 활자본으로, 1948년 김성칠(金聖七) 국역본이 정음사(正音社)에서 각각 나왔으며, 1956년 타이완[臺灣]대학 도서관에 소장된 사본(寫本)을 영인(影印) 출판하였다. 또 최근 민족문화추진회의 《고전국역총서(古典國譯叢書)》 18∼19책으로 간행된 26권 2책의 이가원(李家源) 국역본이 있다.
《열하일기》(熱河日記)
조선 정조 때의 북학파인 박지원이44세 때인1780년(정조5년)에 삼종형(8촌 형) 박명원(朴明源)이 청나라 건륭제의 만수절(萬壽節, 칠순 잔치) 사절로 북경(당시의 연경)에 갈 때 따라가서 보고 들은 것을 남긴 견문기입니다 . 현재 단국대학교 연민문고에 친필본이 소장되어 있음
구성
《열하일기》는26권10책으로 되어 있으며. 정본 없이 필사본으로만 전해져오다가1901년 김택영이 처음 간행하였는데 연암 박지원의'열하일기(熱河日記)' 친필본이 단국대학교 〈연민문고〉에서 발견되었다.
내용
연암은 이 글에서 조선이 빈곤한 주요 원인을 수레를 사용하지 않은 데에서 찾고 있다. 정확히는 수레나 배로 대표되는 유통수단의 미흡함, 도로망 건설의 소홀이 조선이 가난한 원인이라고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연암은 조선의 수레가 바퀴가 거의 둥글지도 못하고 자국은 궤도에 들지도 못한다는 지적과 함께, "수레를 만들지 않으니 길을 닦지 않는 것"이라며 직접 수레는 만들어보지도 않고 무조건 반대, 비판부터 하고 보는 정신 자세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또한 연암은 당시 조선에서 수입하는 청의 털모자 수입에 대해서 조선의 은을 낭비하는 행위라며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기도 한다
평가
현재 남아있는 《열하일기》의 필사본은 아홉 종. 당시 이 책이 얼마나 대단한 인기를 끌었는지를 보여준다. 연암은 조선의 토속적인 속담을 섞어 쓰거나 하층 사람들과 주고받은 농담까지도 아무렇지 않게 기록했다.
당대에'점잖은 글'이랍시고 일상에서 상투적으로 쓰던 판에 박힌 것 같은 글과는 전혀 다른 문체, 한문 문장에 중국어나 소설의 문체를 쓰기도 하고 거기다 특유의 해학과 풍자를 가미해 독자들의 흥미를 유발시켰다는 분석이 있다. 무엇보다도 당대의 현실에 대한 철저한 고민이 《열하일기》에는 절실히 녹아 있었던 점이 지식인들에게 어필되었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줄거리
熱河日記. 연암 박지원이 건륭제의 70세 생일을 축하하는 사절로 청나라에 다녀온 일을 적은 여행기. 목적지는 연경(燕京)(오늘날의 베이징)이었으나 건륭제가 열하의 피서산장에 있었기 때문에 결국 열하까지 여정이 계속되었으며, 이 때문에 〈열하일기〉란 제목이 붙여졌다. 조선 사신단은 건륭제가 연경에 없다는 소식을 듣자 그냥 연경에서 구색만 맞추다 돌아가려 했지만 결국 열하까지 가야 했고, 일정이 촉박해 상당히 하드코어한 여행을 하게 된다. 이 때의 고생은 박지원의 산문인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나 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2] 생생하게 실려 있다.
사실 당시 박지원은 공식적인 벼슬이 없는 평범한 선비였다. 그럼에도 박지원이 사절단으로 갈 수 있던 것은 당시 사절단의 수장인 정사가 삼종형(8촌 지간)인 박명원이었기 때문이다. 이 때 박지원은 박명원의 자제군관(일종의 개인수행원) 자격으로 사절단에 합류할 수 있었다.
내용을 보면 현대 기준으로 봐도 상당히 해학적이고 재미있는 묘사가 많다. 야간에 숙소에서 나가는 게 금지된 상황에서 하인에게"나 찾으면 뒷간 갔다고 말해라!!"고 시킨 뒤에 밤새도록 놀다 새벽에야 돌아오는 장면, 비 때문에 강을 건너지 못하자 벌어진 도박판을 싹 쓸어버린 일, 사신단이 접견 문제로 고심하고 있을 때 옆에서 '일이 꼬이면 귀양 가겠는데... 잘 됐다! 귀양 가면 중국 여기저기 구경하겠네!' 같은 생각을 하는 등, 여러모로 웃기는 구절이 많다. 말을 타고 가는 도중에 졸다 깨고는 그 사이 하인이 낙타를 보았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다음번에 신기한 게 보이면 주저하지 말고 자신을 깨우라고 채근이라고 쓰고 징징이라고 읽는다대는 장면이 있는가 하면, 심지어는 박지원이 어느 주점에 들어갔다가, 현대로 치면 조폭들이 자주 드나드는 엄한 곳이라는 걸 뒤늦게 눈치 채고, 처음 나온 작은 술잔을 치워 버리곤 큰 잔에 술을 원 샷 하는 호기를 부려 주점에 있던 남자들이 어이쿠 어르신하며 술을 대접하고 설설 기는 장면도 있다. 물론 박지원도 속으론 꽤 겁을 냈다고 솔직하게 토로한다.
또한 박지원의 실학사상이 잘 드러나 있는 명작이다. 대부분 청나라의 좋은 점을 들면서 아직도 상공업적으로 낙후된 조선의 모습을 비판하는 장면이 있다. 고대의 우수한 기술도 이어받지 못하여 결함투성이로 전락한 조선후기 온돌의 현실을 지적하고, 이로 인한 낭비와 비합리성을 대차게 비판하기도 한다. 물론 이는 실용적 학문과 기술의 연구에 소홀했던 당시 시대상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관련 링크 또한 아직도 자신들을 명의 후계로 자처하며 실학을 멸시하고 북벌론이라는 허상에 빠져 있는 당시 조선 사대부를 비판하는 부분이 많다. 특히 관내정사나 이제묘기(夷齊廟記: 충절의 상징이라 일컬어 지는 백이와 숙제의 사당 관람기)등에서 이러한 비판을 엿볼 수 있다.
조선 뿐만 아니라 한족 여성들의 전족 같은 불합리한 풍습과, 청나라에 대한 아부로 점철된 한족 지식인들의 현실 역시 풍자적으로 그리고 있다. 이런 모습은 〈호질〉에서 범(짐승으로서 중국과 조선 지식인 입장에서의 청나라를 은유함)과 그에 아첨하는 선비 북곽의 모습으로 나타내고 있다. 즉, 조선의 소중화만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전반적인 중화주의의 허상에 대한 비판이 담겨있는 것이다. 사실(고전적인 의미의) '중국'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배우고자 하는 것은 오랑캐이며 되려 중화에 비판적인 내용인 것. 또한 전체적으로 한족보다 만주족에 호의적인 시선이 깔려 있다(...). 예를들면 사기나 뒤통수를 치는건 대부분 한족이라든가... 그 외에 청나라인들조차도 되놈이란 단어를 알고 있었다는 장면도 있다. 청나라 사람이 스스로를"'도이노음'이요(擣伊鹵音爾么)"라고 소개하는데, 이건"되놈이요"이란 문장을 한자로 음차한 것.
박지원의 코끼리 구경이나 마술 관람 등도 재미있는 부분. 20개가 소개되어 있다. 심지어는 티베트의 법황을 만난 이야기까지 실려 있다. 당시 건륭제는 불교에 대한 관심이 높았는데, 조선 사신단을 기쁘게 맞이한 건륭제는 조선 사신단에게 법황을 소개해 주었다. 법황은 달라이 라마 바로 아래 지위인 판첸 라마로 이름은'액이덕니'이며, 작중에서는 주로'활불(活佛살아있는 부처)'이라고 표현된다.
여기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활불은 조선 사신단을 만나보고 불상 등 여러 선물을 주었는데, 사신(문관)들은 더럽다고(...) 역관에게 준다. 그러나 역관들도 역시 이것을 쓸 수 없다며, 팔아서 은70냥을 만들어 마부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마부들조차도'이것으론 술 한잔 사 먹을 수 없다'(...)면서 받지 않으려 했다. 조선의 오래된 숭유억불 정책이 어떤 식으로 고착화되었는지 알 수 있는 부분. 처음엔 활불과의 면담 자체도 어떻게 천한 중놈과 만날 수 있냐며 고집을 피우다가" 그러다가 황상께서 열 받으시면 큰 일 난다"는 판단에 형식적으로 만난 것.
또한 황제 및 법황에게 절을 해야 할 순서가 오자, 조선 사신단은 숭유억불에 대해 말하면서 법황에게 절을 못하겠다고 버틴다. 여기에 빡친 건륭제는 수도로 다시 돌아가는 길에 조선 사신단에게 아무런 혜택도 주지 않는다.
박지원조차도 여기엔" 우리나라에선 원래 선비로서 불교와 한번 인연이 있고 보면 평생 비웃음을 사기 십상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행동이 장하긴 하지. 그런데 너 활불이 황제한테 이르면 어쩔래?"라고까지 할 정도로 숭유억불 사상은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심했다. 법황이 선물한 불상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자세히 나와 있지 않다. 조선에 그대로 가져가면 유생들에게 비난 받을 것이 뻔하고, 그렇다고 청나라 황제가 존대하는 자가 준 선물을 함부로 다루면 황제가 어떻게 화를 낼지 모르니 사신단이 알아서 몰래 처리한 모양이다. 열하일기에 직접 묘사되어 있지는 않지만 이런 경우 전통적(...)으로 쓰던 방법은, 조선 땅도 아니요 청나라 땅도 아닌 압록강에다가 몰래몰래 띄워서 버렸다고.
박지원은 여기서 중국 인사들과 만나 며칠에 걸쳐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필담으로. 음악, 예절, 역사, 문헌고증, 시문, 과학[5]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방대한 양의 필담을 교환한다.
박지원과 일행이 만주 벌판을 바라보며 읊은 단상은'한 번 울어볼만한 대지' (호곡장론(好哭場論) 이라는 제목)는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에 실려 있기도 하다.
박지원의 작품 중 호질 이나 허생전은 원래 열하일기에 실려 있는 작품이다. 각각 관내정사(關內程史)와 옥갑야화(玉匣夜話)에 실려 있다. 박지원은 필화(그러니까 검열)를 피하기 위해 호질의 경우는'이거 내가 쓴 거 아니고 중국 여관 벽에 있던 거 퍼옴 베껴옴'이라고 둘러대고, 허생전 같은 경우는 윤영이라는 가상의 이야기꾼[6]이 해주었던 변승업 이야기의 딸림 이야기 식으로 말한다. 하지만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박지원의 창작물임에 틀림없다는 것이 정설.
그 당시 사람들의(현대와 많이 다른)가치관을 알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가만히 지나가던 몽골 사신단 하인을 조선 마부가 갑자기 급습(...)해서 파운딩을 하고 흙을 먹인다거나.(이유는'심심해서(!)')그래 놓고 조선측이나 몽골측이나 서로 웃으며(...) 잘만 제 갈 길 간다. 우리나라 대외관계가 의외로 개방적인 면이 있었던 듯. 중국인들이 길거리에 잔뜩 늘어서서 '조선에서 왔다구요? 청심환 하나만 주셈'이라고 하도 졸라대서 조선 사신단은 가짜 청심환을 잔뜩 준비해 갔다는 장면이 있다.
다른 일화도 있다. 박지원은 중국에서 중국인들과 골동품에 관해 필담을 하면서 나중에 덧붙인 말에, '대개 중국 골동품은 그 연대와 시기를 아주 교묘하게 속이는 것들이 많아, 어수룩한 사람은 물론이고 좀 안다 하는 사람도 사기를 당해 비싼 값을 주고 사기 십상이다'라고 하며 리스트를 적어 주었다. 물론 이 리스트도 열하일기에 그대로 수록되어 있다. 과연 메이드 인 차이나의 위용은 200년의 세월을 뛰어넘는다.
열하일기의 구성
《도강록(渡江錄)》: 압록강으로부터 랴오양(遼陽)에 이르는15일간의 기록.
《성경잡지(盛京雜識)》: 십리하(十里河)에서 소흑산(小黑山)에 이르는5일간에 겪은일에대한 필담 중심의 기록.
《일신수필(馹迅隨筆》: 신광녕(新廣寧)으로부터 산해관(山海關)에 이르는9일간의 일을 쓴 기록.
《관내정사(關內程史)》: 산해관(山海關)에서 북경에 이르는11일간의 기록. 여기서 호질(虎叱)이 나온다.
《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 북경에서 열하(熱河)에 이르는5일간의 기록.
《태학유관록(太學留館錄)》: 열하에 도착해서 그곳 태학관에 머무는15일간의 기록.
《환연도중록(還燕道中錄)》: 열하를 출발하여 다시 북경으로 돌아오는6일간의 기록.
《경개록(傾蓋錄)》: 중국에서 만난 지식인들의 이력과 면면을 묘사한 일종의 스케치.
《황교문답(黃敎問答)》: 중국에서 만난 지식인들과 더불어 나눈 라마교에 대한 대화를 쓴 기록.
《반선시말(班禪始末)》: 반선과 청나라에 전파된 라마교에 대한 내력을 적은 기록.
《찰십륜포(札什倫布)》: 라마승과 반선의 모습, 조선사신들이 판첸라마를 만난 일 등을 적은 기록.
《행재잡록(行在雜錄)》: 조선과청나라 황실 사이에주고 받던 외교문서와 외교문서를 쓴 내력를 옮겨적은 기록.
《망양록(亡羊錄)》: 중국 지식인들과 필담형식으로 주고 받은 음악이야기.
《심세편(審勢編)》: 박지원 스스로가 본 당시 중국의 형세와 이를 면밀히 보는 법을 적은 기록.
《곡정필담(鵠汀筆談)》: 중국 지식인들 중 하나인 곡정과 장장16시간 동안 벌인 과학, 역사, 철학, 시문 등의 필담을 정리한 기록.
《산장잡기(山莊雜記)》: 열하(熱河)의 피서산장에서 쓴 아홉 편의 기행록을 엮은 기록. 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나,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 코끼리 이야기(상기:象記)가 여기서 나온다.
《환희기(幻戱記)》: 중국에서 본 마술에 대해 묘사한 기록.
《피서록(避暑錄)》: 중국에서 본 시들에 대해 기록하고 평한 시화(詩話)의 기록.
《구외이문(口外異聞)》: 열하에서 들은 이야기나, 박지원이 직접 겪은 이야기들을 짧은 잡기 형식으로 모아놓은 기록.
《옥갑야화(玉匣夜話)》: 사신들과 조선으로 돌아오는 길에 옥갑[8]에서 밤을 지새우며 사람들과 나눈 이야기를 모은 기록. 여기에서 그 유명한 허생전이 나온다.
《황도기략(黃圖紀略)》: 북경의 명승지와 건물들에 대한 내력과 묘사를 엮은 기록. 성당과 서양화에 대한 내용도 나온다.
《알성퇴술(謁聖退述)》: 북경의 유교명승지를 둘러보고 쓴 기록.
《앙엽기(央葉記)》: 북경 안의 기타 종교 유적들을 둘러 보고 쓴 기록.
《동란섭필(銅蘭涉筆)》: 주로 중국과 조선의 역사적 인물에 대한 연암의 의견이나, 중국의 견해를 짧은 글 형식으로 쓴 기록.
《금료소초(金蓼小抄)》: 중국 의서에서 본 치료요법이나, 자신이 가장 효험을 본 민간요법을 적은 기록.
열하일기
1780년(정조 4) 연암 박지원은 종형인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을 따라 청(淸)나라 건륭제(고종)의 칠순연(七旬宴)에 참석하는 사신의 일원으로 동행하게 되었다. 중국 연경(燕京)을 지나 청나라 황제의 여름별장지인 열하(熱河)까지 기행한 기록을 담았는데 중국의 문인들과 사귀고, 연경(燕京)의 명사들과 교유하며 중국의 문물제도를 목격하고 견문한 내용을 각 분야로 나누어 기록하였다.
1780년 6월 24일 압록강 국경을 건너는데 부터 시작하여 요동(遼東) ·성경(盛京) ·산하이관[山海關]을 거쳐 베이징[北京]에 도착하고, 다시 열하로 가서, 8월 20일 다시 베이징에 돌아오기까지 약 2개월 동안 겪은 일을 날짜 순서에 따라 항목별로 적었다. 조선의 사신일행이 열하까지 가게된 이유는 연경에 도착해보니 청나라 황제는 열하에 가고 연경에 없었기 때문에 그의 여름 별궁이 있는 열하까지 가게된 것이다.
연암이 남긴 《열하일기》는 당시 보수파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하였으나, 중국의 신문물(新文物)을 망라한 서술, 그곳 실학사상의 소개로 수많은 조선시대 연경 기행문학의 정수(精髓)로 꼽힌다. 이 책은 당초부터 명확한 정본(正本)이나 판본(版本)도 없었고, 여러 전사본(轉寫本)이 유행되어 이본(異本)에 따라 그 편제(編制)의 이동이 심하다.
이 책에는 중국의 역사 ·지리 ·풍속 ·습상(習尙) ·고거(攷據) ·토목 ·건축 ·선박 ·의학 ·인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문학 ·예술 ·고동(古董) ·지리 ·천문 ·병사 등에 걸쳐 수록되지 않은 분야가 없을 만큼 광범위하고 상세히 기술되었는데, 경치나 풍물 등을 단순히 묘사한 데 그치지 않고 이용후생(利用厚生) 면에 중점을 두어 수많은 《연행록(燕行錄)》 중에서도 백미(白眉)로 꼽힌다.
충남대학교 도서관 소장 연암 수택본(手澤本) 26권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권1 <열하일기서(熱河日記序)> <도강록(渡江錄)>:서문은 필자 미상이나, 풍습 및 관습이 치란(治亂)에 관계되고, 성곽 ·건물 ·경목(耕牧) ·도야(陶冶) 등 이용후생에 관계되는 일체의 방법을 거짓없이 기술하였다고 설명하였다. 또 <도강록>은 압록강에서 랴오양[遼陽]까지 15일간(1780.6.24∼7.9)의 기행문으로 중국인이 이용후생적인 건설에 심취하고 있음을 서술하였다.
권2 <성경잡지(盛京雜識)>:십리하(十里河)에서 소흑산(小黑山)까지 5일간의 기록으로, 특히 <속재필담(粟齋筆譚)> <상루필담(商樓筆譚)> <고동록(古董錄)>은 흥미 있는 내용이다.
권3 <일신수필(馹汛隨筆)>:신광녕(新廣寧)에서 산하이관까지 9일간의 기록으로, 그 서문 중의 이용후생학에 대한 논술이 독특하다.
권4 <관내정사(關內程史)>:산하이관에서 연경까지 11일간의 기록으로, 여기 수록된 한문 고대소설 <호질(虎叱)>은 연암의 소설 중에서도 가장 독특한 작품의 하나이다.
권5 <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연경에서 열하까지 5일간의 기록으로, 열하에 대하여 소상히 기록하였고, 그곳을 떠날 때의 아쉬운 심경을 그렸다.
권6 <태학유관록(太學留館錄)>:열하에 있는 태학(太學)에서 6일간 지낸 기록으로 당시 중국의 명망 있는 학자들과 더불어 나눈 한 ·중 두 나라 문물제도에 관한 논평 및 지동설(地動說) ·달세계 등에 관한 토론이다.
권7 <구외이문(口外異聞)>:구베이커우[古北口] 밖의 기문이담(奇聞異談)을 적은 것으로, 반양(盤羊)에서 천불사(千佛寺)에 이르는 60여 종의 이야기이다.
권8 <환연도중록(還燕道中錄)>:열하에서 다시 연경으로 돌아오는 도중 6일간의 기록으로, 대개 교량 ·도로 ·방호(防湖) ·방하(防河) ·탁타(橐駝:庭園師) ·선제(船制) 등에 관한 논평이다.
권9 <금료소초(金蓼小鈔)>:주로 의술(醫術)에 관한 기록으로 《연암집(燕巖集)》에서는 이를 <보유(補遺)>라 한다.
권10 <옥갑야화(玉匣夜話)>:이본(異本)에 따라서는 <진덕재야화(進德齋夜話)>로 된 것도 있다. 여기 수록된 <허생전(許生傳)>은 연암 소설뿐만 아니라 한국 소설문학사에서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작품이다.
권11 <황도기략(黃圖紀略)>:황성(皇城)의 구문(九門)에서 화조포(花鳥鋪)까지 38종의 문관(門館) ·전각(殿閣) ·도지(島池) ·점포(店鋪) ·기물(器物) 등에 관한 기록이다.
권12 <알성퇴술(謁聖退述)>:순천부학(順天府學)으로부터 조선관(朝鮮館)에 이르기까지 역람한 기록이다.
권13 <앙엽기(盎葉記)>:홍인사(弘仁寺)에서 이마두총(利瑪竇塚)에 이르는 20개의 명소(名所)를 두루 구경한 기록이다.
권14 <경개록(傾蓋錄)>:열하의 태학(太學)에서 6일간 머물며, 그곳 학자들과 응수한 기록이다.
권15 <황교문답(黃敎問答)>:황교와 서학자(西學者)의 지옥(地獄)에 관한 논평이다. 끝에는 세계의 이민종(異民種)을 열거하는 가운데 특히 몽골과 아라사 종족의 강맹(强猛)함에 주의를 환기시킨다.
권16 <행재잡록(行在雜錄)>:청나라 황제의 행재소(行在所)에서의 자세한 견문록이다. 여기서 특히 청나라의 친선정책(親鮮政策)의 연유를 밝혔다.
권17 <반선시말(班禪始末)>:청 황제의 반선(班禪)에 대한 정책을 논하고, 또 황교(黃敎)와 불교가 근본적으로 같지 않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권18 <희본명목(戱本名目)>.
권19 <찰습륜포(札什倫布)>:찰습륜포란 티베트어(語)로 ‘대승(大僧)이 살고 있는 곳’이라는 뜻으로, 열하에 있을 때의 반선에 대한 기록이다.
권20 <망양록(忘羊錄)>:음악에 관하여 중국 학자들과 서로의 견해를 피력한 기록이다.
권21 <심세편(審勢編)>:당시 조선 사람의 오망(五妄)과 중국 사람의 삼난(三難)을 역설한 기록이다. 북학(北學)에 대한 예리한 이론을 펼쳤다.
권22 <곡정필담(鵠汀筆譚)>:중국 학자 윤가전(尹嘉銓)과 더불어 전날 태학(太學)에서 미진하였던 토론을 계속한 기록이다. 즉, <태학유관록> 중에서 미흡하였던 이야기인 월세계 ·지전(地轉) ·역법(曆法) ·천주(天主) 등에 대한 논술이다.
권23 <동란섭필(銅蘭涉筆)>:동란재(銅蘭齋)에 머물 때 쓴 수필이다. 주로 가사 ·향시(鄕試) ·서적 ·언해(諺解) ·양금(洋琴) 등에 대하여 쓴 것이다.
권24 <산장잡기(山莊雜記)>:열하산장에서의 여러 가지 견문기이다. 특히 <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 <상기(象記)> 등은 가장 비장하고 기괴하게 묘사되었다.
권25 <환희기(幻戱記)>:광피사표패루(光被四表牌樓) 아래서 중국 요술쟁이의 여러 가지 연기를 구경한 소감을 적은 이야기이다.
권26 <피서록(避暑錄)>:열하의 피서 산장에서 지낸 기록이다. 주로 조선과 중국 두 나라의 시문(詩文)에 대한 논평이다.
한편 연암의 후손에 의하여 최근 <양매시화(楊梅詩話)>가 새로 발견되었는데, 이는 양매서가(楊梅書街)에서 중국의 학자들과 주고받은 한시화(漢詩話)로서, 당시 옮겨 쓰려다가 우연히 누락된 것으로 짐작된다. 1911년 광문회(光文會)에서 국판 286면 활자본으로, 1932년 박영철(朴榮喆)이 6책 활자본으로, 1948년 김성칠(金聖七) 국역본이 정음사(正音社)에서 각각 나왔으며, 1956년 타이완[臺灣]대학 도서관에 소장된 사본(寫本)을 영인(影印) 출판하였다. 또 최근 민족문화추진회의 《고전국역총서(古典國譯叢書)》 18∼19책으로 간행된 26권 2책의 이가원(李家源) 국역본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열하일기 [熱河日記]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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