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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글마루문학회 원문보기 글쓴이: solo
1. 서론 2. 태양이 부르는 연가 1) ‘그늘진 광선’과 암울한 현실의 시 2) 너와 나의 기하학 3) 경계자로서의 자기인식 3. ‘불’의 상상력과 결정結晶의 이미지 1) ‘불의 꽃’과 우주적 모체 2) ‘타는 별’과 결정結晶의 이미지 4. ‘물’의 상상력과 향수의 서정 1) ‘물’과 인식의 변화 2) 기다림의 응축과 선적禪的 세계 5. 결론 |
1. 서론
지난 겨울, 고원 선생님 댁에서 부고를 받았다. 미국으로 한번 찾아 뵙겠다는 약속을 미룬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였다. 고원 시인과 필자가 만난 건 ������한국 전후 문제 시인연구������에 실을 원고 때문이었다. 이 논문집은 주요 전후시인에 관한 연구서인데 후미에 각 시인의 생애 및 작품 연보가 실려 있다. 필자는 고원 시인의 전기를 조사하기 위해 그의 고향인 충북 영동을 다녀왔고 그 과정에서 e-mail로 고원 시인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사진에 담긴 고향의 모습에 감읍해 했다. 그 후 강원도 백담사에서 열린 <세계시인대회> 참석차 고원 시인이 고국을 방문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고국을 떠난 지 20여 년만의 방문이었다. 우리는 여러 차례 그의 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고원 시인이 필자에게 보낸 여러 통의 이메일과 그 안의 시들에는 한결 같이 고국에 대한 그리움이 묻어 있었다. 그는 아직도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많은 갈등을 내재하고 있는 한국의 현실을 안타까워했고, 자주 안부를 묻기도 했다. 나이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그의 눈빛은 청명했고 소년다운 열정에 넘쳐 있었다. 언젠가는 고국에 돌아와 시를 가르치고 싶어 했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고원 시인의 이와 같은 바람은 단지 그만의 것이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다행히도 그가 손수 엮은 <고원 문학 전집>2)이 남아 있어 기쁘다. 시인은 육체적 생명이 다한 후에도 영원히 산다. <시간표 없는 정거장>, <이율의 항변>, <태양의 연가>이후의 많은 시편들을 통해 우리는 젊은 고원, 투사로서의, 아버지로서의, 고향을 그리워하는 이민자로서의 고원을 만난다. 그는 때로 시대를 슬퍼하기도 하고, 사랑에 빠져 있기도 하며, 모든 것을 잃은 듯 실의에 차 있기도 한다. 시를 통해 시인은 영원히 우리 곁에 머물러 있다.
고원은 한국 문단에서 많이 주목받은 시인은 아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1960년 초반에 미국으로 건너가 줄곧 미국에서 작품 활동을 했다는 이력 때문일 것이다. 시인 고원은 1925년 충북 영동에서 출생하여 동국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했고 1952년 이민영, 장호 등과 함께 출간한 공동시집, ������시간표 없는 정거장������ 이후 개인시집 12권과 시조집 2권, 수필집 3권 등 총 20여 권에 이르는 작품집과 산문들을 집필했다. 필자가 시인 고원에 주목하는 것은 고원의 시가 작품의 양만큼이나 질적으로도 성과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은 1950년 중반 이후 전후시의 전형을 보여 줬으며 작가적 현실 속에서 갈등하고 화해해 가는 시적 서정을 드러낸다.
고원은 우리에게 흔히 재미저항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1952년 ������시간표 없는 정거장������ 이후 고원은 끊임없는 작품활동을 했다. 미국으로 건너 간 후에도 시를 쓰는 일은 고원에게 모국어를 실현하는 값진 일이었다. 또한 유신이나 5.18 광주항쟁 등 한국의 현실에 대하여 비판적인 글을 서슴없이 싣곤 하였다. 고은의 말대로 “미국에는 고원, 한국에는 고은… 이 두 고가(高哥)가 골치 아프게 하고 있다”(<물너울>의 발문)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의 시를 통시적으로 일별해 볼 때 그의 시를 참여적인 경향으로만 한정할 수 없다. 그보다는 시적 대상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시적 대상은 때로는 ‘너’라는 연인으로, ‘시대’와 같은 상황적인 것으로, ‘고향’이나 ‘자연물’과 같은 대상으로 변화하였다. 총 20 권 남짓한 책들에서, 시인 고원은 시적 대상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다. 그런 측면에서 그의 시는 ‘대상지향적인 시’로 규정할 수 있겠다. 반세기를 끌어온 그의 시적 성과를 이제 평가하고 자리매김할 때라 생각한다.
2. 태양이 부르는 연가
1) ‘그늘진 광선’과 암울한 현실의 시
고원의 등단시집 ������시간표 없는 정거장������과 첫 번째 개인시집 ������이율의 항변������에 실린 시들은 ������시간표 없는 정거장������의 소제목 <연착된 막차>에서 느껴지듯 암울한 시대 현실을 그리고 있다. 이들은 전후시라는 테두리 안에서 논의될 수 있을 텐데 시인은 거제도를 비롯한 직접체험과 간접체험을 우울하고 차분한 어조로 증언한다. 시적 화자는 자신을 “따비데는 더구나 아닌/ 층층다리를 오르며 비틀거리는” 자로 묘사했고3) 전쟁의 상처를 극복하지 못하는 소극적인 ‘소시민’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전쟁고아, 홀어머니, 폐허의 공간묘사를 통해 전쟁의 상처를 증언하는 관찰적 시선을 유지했다.
호박담 너머로
젊음이 아뜰히 속임 받던 날
밤나무배기에 네가 울었다
찢어진 기폭 몸소 피를 탈색하려 할 때
빙 빙 도려 또 네가 울었다.
총창 끝에서 비둘기가
사치한 臺詞로 만화를 그리는 시간
너는 잿더미 터전에서
눈 빠진 해골을 쪼아먹었다.
―<까마귀>에서
이 시에는 폐허의 상황을 보여주는 시어들이 많이 사용되고 있다. ‘찢어진 기폭’이나 ‘총창’, ‘잿더미 터전’ 등의 시구가 그렇다. 시적 화자가 보는 대상은 ‘눈 빠진 해골’을 쪼아 먹는 ‘까마귀’이다. 이 시에서 까마귀는 속임, 탈색, 총창과 잿더미, 해골 등의 시어로 환유되며 죽음과 폐허를 상징한다. 이 까마귀는 누군가의 ‘젊음이 속임받’고 ‘피를 탈색하’고 ‘해골’이 될 때까지 그 누군가의 시체 옆에서 울어대고 있다. ‘총창’ 끝에서 ‘잿더미’와 ‘해골’ 속에서, 까마귀의 존재는 죽음을 먹고 그 죽음을 말하는 존재이다. 시적 화자의 시선은 까마귀인 ‘너’를 따라가며 너와 함께 그 죽음을 목격한다.
이러한 관찰적 시선은 이 시기의 다른 시편들에도 종종 나타난다. 이 시들에서 시적 화자는 시적 대상의 죽음과 폐허를 목격하고 그를 증언한다. 그는 그 폐허의 상황을 ‘습기찬 광선’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에게 폐허의 한계상황은 습지고 우울하고 어두운 그늘로 묘사된다.
‘가로수 아래’나 ‘습기찬 광선’은 이 시기 고원의 시에 나타나는 주된 공간인식이다. 그것은 ‘자색의 태양’이나 ‘경사진 그늘’ 등과 함께 전쟁 직후의 한계상황을 보여준다. 이들 이미지들의 공통점은 바로 ‘어둠’과 관련되는데 ‘아래’, ‘습기찬’, ‘자색의’ ‘경사진’, ‘그늘’ 등은 바로 이러한 어둠과 등가적인 시어들이다. 이들은 모두 배면背面의 공간인식을 보여준다. 표면으로 드러나는 전형적이고 적극적인 공간 대신, 눅지고 어두운 이면 공간을 선택함으로써 한계 상황 속의 소시민의식이나 침울한 정서들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고원은 이 시기를 ‘난처한 시간’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모든 긍정적인 의미들이 어두운 현실의 이면으로 감추어지는 시간인 것이다. 어두운 현실은 거대하게 인간의 희망과 존재의식을 누른다. 그것은 ‘민망한 피해망상증’의 ‘죄지은 시간’(������이율의 항변������의 <서문을 대신하여>에서)이다. 폐허와 일시적인 평화가 공존하는 어색한 공간에 대한 인식은 자아로 하여금 어디에도 속할 수 없게 한다. 그가 있는 곳은 어두운 현실이 인간의 삶과 희망을 교묘하게 억압하는 “후방도시”인 것이다.
2) 너와 나의 기하학
제 2시집 ������태양의 연가������는 ������이율의 항변������과는 매우 다른 시세계를 보여준다. 고원은 ������태양의 연가������가 전 시집 ������이율의 항변������에 대한 또 다른 항변이라고 말한다. ������이율의 항변������의 시세계가 전후라는 상황에서 초라하고 어두운 내면과 현실의식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태양의 연가������는 이러한 모순을 극복하고 긍정적이고 총체적인 자아인식을 획득해 간다고 볼 수 있다. 이 시편들에는 너로 인해 달라져 가는 나의 모습과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감격적이고 확신에 찬 어조를 따라 드러나 있다. ������이율의 항변������의 시적 대상이 2인칭 내지는 3인칭으로 호명되며 시인의 상황을 드러내는 객관적인 것이었던 반면 ������태양의 연가������의 ‘너’는 구체적이고 주관화된 시적 대상이다.
그때 네가 왔다
너는 봄을 봄이라고 부르게 한다
저항에 탄력을 주는 열도熱度
이제는 오히려 더
내 육신을 깎아 붙이기 위해서
겨울이 와도
좋은 것이다
너와 곧 같이 걸으면
이렇게 여유로운 길이 열리는
태양을 향한 풍경이 있다.
―<너와 곧 같이 걸으면>에서
������태양의 연가������로부터 ������눈으로 약속한 시간에������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너’라는 대상에 대한 찬양과 사랑의 노래는 이어진다. 너는 ‘찬란한 등불’이나 ‘생명’의 ‘무한한 영토’로 묘사된다.4) 이전의 시가 어둠, 습지의 배면적 공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과 비교한다면 그 변화가 뚜렷하다.
시적 화자는 특히 ‘너’와 ‘나’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구상하려 애썼다. 이것은 그만큼 시적 화자가 ‘너’라는 대상에 대해 다각도로 생각하고 고민했음을 증명한다. 다양한 기하학적인 구도들은 이렇게 해서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가 왜 기하학이라는 수학 원리를 시 안으로 끌어왔는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태양의 연가������에 실려 있는 많은 시들이 너와 나의 관계를 기하학적인 선과 점, 원들을 통해 형상화하고 있고 그의 시에 드러나는 이와 같은 수학적 발상은 그의 시가 당시의 모더니즘적 영향 하에서 이루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내접內接>과 같은 시에서 개인은 원圓을 통해 존재하고 만난다. 그것은 ‘고독의 영상’이지만 그렇다고 폐쇄적으로 한 개인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 자아는 ‘무한을 여행하는’ 자이다. 이와 같은 세계로의 여행은 ‘애정에 예민한 점들의 연속’에 의해 다른 원(타자)을 만나게 되고 그와 같은 만남은 다른 원들과 겹쳐지면서 수많은 관계망들을 갖게 된다. 그가 인식하는 세계란 개개인의 세계를 이와 같이 연속적으로 묶어놓은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의 자아는 ‘세계내 존재’로서 수많은 존재들과 함께 살아가는 자이다. 이와 같이 ‘원’에 관한 상상력은 무한한 확장적 사유를 열어놓는다. 그 속에서 나는 ‘내 소녀’를 만나게 된다. 내 소녀는 나와 함께 이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로서 하나의 점으로 표현된다. ������속삭이는 불의 꽃������에도 이러한 기하학적 상상력이 자리하고 있다.
이와 같은 시에서 시상의 중심은 ‘나’가 아니라 ‘너’라는 대상이다. ‘너’라는 대상은 나에게 존재적 깨달음을 주는 존재로서 나와 같이 이 세계에서 존재하는 또 다른 ‘공현존재’이다. 그러한 존재는 ‘나’라는 원을 중심으로 끊임없는 교차점을 형성해 간다. 이러한 인식은 전쟁직후의 폐허의식을 극복하는 방식으로 작용했다. 시적 화자가 부르는 ‘너’에 대한 연가는 ‘나’와 ‘너’라는 관계를 시각적으로 제시하면서 서로의 존재방식을 도상화한다.
3) 경계자로서의 자기인식
1963년에 상재된 ������오늘은 멀고������는 시인이 도미 직전에 쓴 시들로 1950년대 말의 세기말적 증후와 폐허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전후시의 시적 화자들은 종종 ‘오늘’이라는 실존적 문제를 거론한다. 그것은 폐허와 상처만이 초연처럼 남아 있는 한계적 상황을 드러내기도 하고 딛고 일어서야 할 무거운 짐이기도 했다. 고원의 ‘오늘’은 하나의 ‘부재’로서 드러난다. 그만큼 그의 ‘오늘’은 유보적이며 관념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오늘은 멀고
오늘보다 먼저
내일이 오는 지점에
꽃냄새를 맡듯이
마음이 멎는다.
꽃냄새는 없는데,
자리는 비었는데―.
거기엔 분명히 와야 할
아무도 아무것도 오지 않았다.
그래서 마음은 다만 마음으로써
한결 충만해짐을 느끼는 것일까?
풍부한게 아니라 꽉 차버리는
포말의 포화상태!
―<오늘은 멀고>의 전문
이 시에서 시적 화자는 ‘오늘은 멀고’ ‘아무것도 오지 않았다’고 느낀다. 이러한 공백의식은 ‘멀다’, ‘없다’, ‘비다’와 같은 서술어들을 통해 드러난다. 반면에 시적 화자는 자신의 현실이 ‘꽉차버리다’, ‘숨이 막히다’, ‘우둔하다’라고 표현한다. 세계의 공백과 시적 화자의 거북한 ‘포화’상태는 모순되는 것 같지만 동전의 양면과 같다. 그의 포화상태는 반복되는 부재와 공백 때문이기 때문이다. 즉, 이러한 부재와 공백이 자신의 내면 속에서 끊임없이 확장되면서 나를 거북한 ‘포만’과 ‘포화’의 상태로 미뤄놓았다. 이러한 시적 화자의 상태는 결국 ‘분명히 와야 할/ 아무것도 오지 않았’기 때문에 형성된 것이다.
시적 화자는 ‘부재와 포화’라는 이중적 상태에 놓여 있다. 양쪽 상태를 갈팡질팡하면서 어디에도 안주하지 못한 채 하나의 ‘포말’처럼 밀려다니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이러한 자신의 상태를 ‘운동하는 실존’이라며 실소失笑하였다. 어디로부터 어디로 움직이는지 출발과 목적을 정하지 못한 채 그는 세계 속에서 표류하는 자이다. 그의 삶은 끊임없는 부재와 포화의 부조화만을 반복하면서 ‘경계자’로서의 떠돈다. 이러한 경계의식은 다음과 같은 시구를 통해 더운 구체화된다.
벽과 창문 사이를 흐르는 것이 있다.
창문과 하늘 사이를 흐르는 것이 있다.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내 눈과 눈 사이를 막는 것이 있다.
만날 수 없는 것끼리
같이 가는 길.
그 중간거리를 따라가며 나는
내일을 향하는 피난을 생각한다.
선 하나가 없었으면 한다.
그러나 레일은 어제와 내일,
너와 나에 걸쳐서만 존재하는 선이다.
―<레일 구도>에서
이 시는 단절과 경계의식을 시상의 기반으로 하여 전개되었다. 세게는 벽과 창문 사이나 창문과 하늘 사이라는 ‘경계의 공간’으로 구조화되며 그러한 경계는 어떤 자유로운 확장과 같은 사유와 단절된다. 그것은 ‘막다’, ‘만날 수 없다’는 단절감이 그것이다. 시적 화자는 이를 영원이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인 ‘레일’의 구도를 통해 드러내고 있다. ‘만날 수 없는 것끼리/ 같이 가는 길’은 어제와 내일, 너와 나 사이에 놓여 끊임없이 경계와 단절을 보여주며 지속된다. 이와 같은 존재의식은 자신을 ‘자유를 찾아 파리한 촉각을 날름거리는’ 나비(<나비의 노래>)로 비유되면서 비극적인 인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3. ‘불’의 상상력과 結晶의 이미지
1) ‘불의 꽃’과 우주적 모체
������속삭이는 불의 꽃������을 중심으로 한 중기의 시작품엔 작가적 현실을 드러내는 현실적인 소재가 사용되고 사회비판적인 시선이 드러난다. 그것은 ‘불’의 이미지를 통해서 보다 구체화된다. 이는 초기시의 ‘태양’ 이미지와 관련되어 있다. 둘 다 불의 질료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이미지들을 굳이 분류한 것은 초기시의 ‘태양’이 사랑, 연가적인 시풍과 관계를 맺고 있는 반면 중기시의 ‘불’ 이미지는 이러한 사랑을 보다 구체화하거나 또는 저항적이고 사회 비판적인 면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시집들에서 불은 강렬한 생명성으로 드러난다.
새로 내리는 나무
불시에 불이 난
뿌리의 아픔 때문에
깊은 땅 가슴이
찢어질까.
아픈 부리의 진동에
땅도 아리게 벌어지면
불기둥이 튀어날 줄을
알아채고 몸부림치나,
햇살을 찢는
새 한 마리.
―<불>의 전문
이 시는 1연과 2연 각각 하강과 상승의 움직임이 나타난다. 새로 ‘땅’에 뿌리를 내리는 나무, 그리고 그 아픔 때문에 “깊은 땅 가슴”이 찢어진다는 것이다. 그러한 고통을 시적 화자는 “불시에 불이 난” 아픔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반면 2연은 ‘튀어나다’, ‘몸부림치다’라는 서술어와 함께 “햇살을 찢는/ 새 한 마리”를 통해 상승의 국면을 마무리한다. 이와 같은 하강과 상승이 어떻게 ‘불’이라는 시제목과 관련되는지는 모호하다. 다만 이 시는 ‘햇살을’ 찢고 올라가는 새 한 마리를 통해 역동성인 느낌을 갖게 되고 격음과 경음이 이러한 느낌을 강화한다. 결국 깊은 땅과 찢고 오르는 상승의 움직임은 서로 반대가 되면서 상승과 하강의 반대방향으로 팽팽한 긴장감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역동적 움직임은 다음과 같은 시로 전개되면서 생명의 역동성으로 구체화된다.
비가 멎은 저녁이었다.
메마른 나무에 물이 오르는 소리가
사방, 낭랑하게 울리고 있었다.
그 소리가 바위에 스며든 새벽,
인젠 바위 속에서 꽃망울이
불쑥불쑥 부풀어 터지는 노래가
초록색으로 퍼져나왔다.
소리없이 피어서
실상 이렇게 소리를 배는
영롱한 웃음.
네 그 아담한 호수로
줄곧 새 하늘이 들어간다.
―<잉태하는 미소>에서
이 시의 모든 시어들은 풍만한 생성력을 노래하는 데 기여한다. ‘물이 오르는 소리’, ‘바위 속에서’ 터지는 ‘꽃망울’, 그리고 ‘영롱한 웃음’에 이르기까지 ‘울리다’, ‘터지다’, ‘퍼지다’와 같은 서술어들 모두가 이 시를 역동적인 것으로 만든다. 시적 화자는 ‘영롱한 웃음’을 ‘네 그 아담한 호수’로 연결하면서 모든 생명의 근원이 바로 ‘너’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모성적 상상력이 바로 불과 물의 이미지를 중심으로 한 중기와 후기 시작의 연결점이 된다. 이 시에서 드러나는 이미지들은 ‘터짐’과 ‘깃듬’을 동시에 갖는다. 꽃망울이 터지고 초록색으로 퍼져나오는 확산의 모습은 불의 이미지의 강렬함을 갖고 있다. 반면 ‘네 그 아담한 호수’로 ‘새 하늘이 들어간다’와 같은 발산은 ‘깃듬’, 잉태하는 생명성을 보여주면서 물의 모체이미지를 환기한다. 중요한 것은 시적 화자가 불 이미지와 관련되는 생명의 확장과 만개, 그리고 ‘물’ 이미지로 보이는 생명의 내재와 잉태의 과정을 연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생명성이라는 시적 서정을 이 두 이미지가 등가적으로 보여주고 있음을 의미한다.
2) ‘타는 별’과 결정結晶의 이미지
������속삭이는 불의 꽃������에는 장시 <씨와 꽃>이 실려 있는데 이 시편들은 ‘불’의 이미지를 통해 ‘씨’과 ‘꽃’의 생명성을 추구하고 있다. 이들 시에서 불과 씨와 꽃이 모두 생명성을 드러내는 등가적 이미지라 할 수 있다. 씨와 꽃, 별과 같은 일련의 이미지들은 생명의 결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눈동자 내부에 씨가 산다.
그래서 눈은 얘기를 한다.
또 그래서 씨는 입술을 내밀고,
입술 뒤에서 갈망의 혀가 나오고,
혀는 손과 함께 운동한다.
잠재한 씨에 불이 붙으면
씨는 곧 분열하고 충돌하며
폭발과 동시에 독립하면서
생명의 질량이 늘어간다.
핵 근처에 핵의 원리가 있다.
―<씨와 꽃>의 1장 <회전하는 씨>에서
이 시는 생명 탄생을 과정의 원리에 따라 서술하고 있다. 눈동자 내부의 씨가 입술을 내밀고, 갈망의 혀가 나오고 혀는 운동하고 불에 의해 분열, 충돌하고 폭발하는 과정까지 생명탄생의 과정이 연쇄법에 의해 전개되는 것이다. 시적 화자는 이와 같은 과정적 진술을 통해 생명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가 인식하는 생명은 눈동자로부터 시작되어 ‘불’에 ㅡ이해 완성된다. 눈동자는 ‘씨’를 비유하는 것이고 ‘불’은 꽃이 되며 생명의 ‘핵’은 다시 ‘씨’이다. 이것은 소제목대로 ‘회전하는 씨’, ‘재생산되는 씨’이다. 여기에서 불은 곧 씨를 ‘분열하고 충돌’하는 촉발제이다. 여기에서의 씨는 불에 의해 촉발될 수 있는 잠재태이다. 이 시는 생명의 분열, 충돌, 폭발이 생명의 잠재성을 이끌어내고 생명으로 하여금 또 다른 생명을 만들어내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불’로 비유된 ‘꽃’의 이미지이다. 꽃은 ‘잉태하는’ 모체로서 그 안에 수많은 생명운동이 일어나는 생명의 장소가 된다. 모체에 대한 인식은 이후의 시에서도 다른 이미지들로 변용되면서 드러난다.
당장 무엇이 와서 터질까봐
내내 짜증을 내는 별들아,
오늘밤은 저 불룩한 항아리
뱃속으로 줄기차게 뛰어들어라.
미칠 것 같은 항아리를
별이 잉태시켜라.
―<항아리>에서
이 시에서 항아리는 ‘신문’, ‘달력’, ‘회오리바람’ 등을 먹는 존재로 제시된다. 이들 시어들의 선택에서 공통성을 유추하기란 어렵지만 모두 시간이나 삶의 변화들을 보여준다는 것은 합의할 수 있을 듯하다. 항아리는 이와 같은 시간과 삶의 모든 변화들을 녹여낸다. 그것은 요술항아리처럼 한없이 모든 것을 먹고 승화시키고 연금술사처럼 새롭게 주물한다. ‘잉태하는 사물’로서의 항아리는 생명과 모성으로 충만해진 육체이다. 그것은 앞 시에 나타나는 ‘꽃’의 이미지와 유사하다. 그러기에 그곳에는 ‘고향 하늘 끝 바다’도 보이고 ‘남미의 어느 구석’도 담겨 있다. 생명성이 단순히 관념에 머물지 않고 현실과 지향, 그리움이나 정서까지 잉태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달리 말해 생명의 순환-‘회전하는 씨’-인 것이다.
우리는 ‘꽃’이나 ‘항아리’로 비유되는 모성적 육체 이외에도 ‘별’이나 ‘씨’의 이미지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씨도 생명의 역동성이 잠재되어 있는 이미지였고 위의 시에서 보듯 별도 ‘당장 무엇이 와서 터질까봐’ 두려워하는 존재, 즉 금방이라도 터질 수 있는 이미지이다. 문제는 무엇이 촉발제가 되느냐이다. 이들 별과 씨는 단단한 결정의 이미지들로 생명의 결정을 보여준다. 그것은 부풀고 터지고 분열하여 새로운 생명들로 끊임없이 복제된다. 생명의 이미지를 이와 같은 단단한 사물, 결정의 이미지에 빗대는 것은 부드럽고 풍만한 모체의 이미지와 상반되면서 시에 생명의 역동성과 강인한 의미를 부여하는 이유가 된다.
고원 시인은 이 시기에 참여적 경향의 시를 많이 썼는데 이들은 합동시집 ������빛의 바다������, ������빛이 타는 5월������,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등을 비롯하여 ������미루나무������등에 주로 실려 있다. 이들 시는 19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에 걸쳐 발간된 것으로 생명의식을 드러내는 ‘불’의 이미지와 깊은 관련을 갖는다. 시인은 생명의 핵으로서의 ‘불’을 민주의 불꽃, 민주화에 대한 열망으로 승화시켰다. 전태일의 분신 등에서 그는 불과 열정, 생명과 현실을 하나로 연결할 수 있는 민주의 불꽃을 깨닫게 된다. 이것은 강렬한 생명에의 열정과 연결되면서 ‘물’의 생명성과 관련되는 이후의 시작을 열고 있다.
4. ‘물’의 상상력과 향수의 서정
1) ‘물’과 인식의 변화
������물너울������로부터 시작된 고원의 후기시는 단형의 서정시 또는 시조 형식을 주로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앞에서 서술한 바대로 자신의 서정을 함축적이고 상징적으로 드러내려는 시인의식의 소산이다. 이러한 형식에 따라 시의 의미나 느낌도 많이 달라지는데 ‘물’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명상적인 세계를 드러내는 반면 향수와 같은 서정성이 보다 짙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후기시에서 사용되는 ‘물’의 이미지는 3장의 ‘불’의 이미지와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 고원의 ‘물’ 이미지는 여러 의미로 변용되는데 대체로 명상적인 세계를 이끌어내고 있다.
서 있는 자리가
바람이 되게 하고
물도 되고 달빛도
되게 하는 목
소
리.
물마루 달무리가 합쳐서
너울너울하다가
속삭이는 빛깔로
아무리 멀어도 안
에
서
목소리가 산다.
―<물너울>에서
이 시에서 ‘물결이 지는 모양’을 일컫는 ‘물너울’은 시각적임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목소리’로 표현되어 있다. 그래서 그것은 ‘속삭이는 빛깔’이라는 공감각의 심상을 드러낸다. 여기에서 목소리는 모든 사물을 변하게 하는 근원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것은 사물을 다양한 것으로 변화시키는, ‘안’에서 살고 있는 내적인 사물이다. 이러한 내재성은 물너울이 내 마음 속에 있는 것임을 짐작케 한다. 이 모든 것이 하나의 내적인 목소리로 자신을 변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이 물너울은 ‘바람’으로, ‘달빛’으로 ‘속삭이는 빛깔’로 변화하는 사물이다. 이러한 변화는 ‘서 있는 자리’에 대한 인식으로 인해 공간인식과도 관련이 된다. 시적 화자가 서 있는 자리가 고정된 공간이 아니라 여러 사물로 변화하는 자리인 것이다. 고정된 자리에 서 있다는 압박감이 아니라 자유롭게 스스로를 변화하는 존재, 이것은 시적 화자에게 큰 의미가 된다. 그 이유는 고정된 실체에 대한 거부란 얼마든지 자신의 위치를 변화할 수 있다는 자유감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물은 멈추지 않고 고정되지 않은 사물이다.
이러한 자유에 대한 추구는 고국으로 돌아오고 싶어 하는 시인의 욕망의 투사投射이기도 하다. 자신의 몸을 자유롭게 변화시키고 고정된 공간을 부정함으로써 시인은 고향으로, 어머니에게로 돌아갈 수 있다. 그것은 ‘물’이 보여주는 순환성과도 관련된다. 시인에게 물은 고국과 이어질 수 있는 매개가 되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눈물로 구체화됨으로써 어머니와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향수는 모국어에 대한 사랑과도 관련되어 있다. 그는 “사람보다 더 간절하게, 직접, 30년간 타국에서 사랑해온 것이 한국말이다.”라고 말한다. 그것은 ‘움직이면서 불타면서 변화하는 말’이라는 것이다.5)
가물가물한 고향과
번쩍거리는 타향을 우리 앞에
이어놓은 바다는 하나,
이때 저때 물빛이 다른 대로
빛깔의 바다가 퍼진다.
날마다 빛깔의 바다에는
밤이 새로 빠져서 색이 된다.
―<말의 바다>에서
이 시에서도 시적 화자는 ‘고향’과 ‘타향’을 물을 통해 이어놓는다. 그 둘의 관계를 이분법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물 하나로 이어질 수 있는 동질적인 것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차이의 속성은 바다로 들어가 새로운 ‘빛깔의 바다’가 되고 있다.
2) 기다림의 응축과 선적禪的 세계
그가 1990년에 발간한 시조집 2권은 후기 시세계를 지배하는 독특한 시세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시조’라는 형식을 통해 고향에 대한 향수와 그리움 등의 시적 서정을 응축하고 명상적이고 선적인 세계를 열어가고 있다. 이와 같은 특성은 ������무화과나무의 고백������이나 ������정������과 같은 서정시집에서도 공통된다. 본격적으로 고향을 노래하고 있는 이들 시조에는 특히 고향의 풍경을 보여주는 많은 토속적인 자연물이 형상화된다. ‘수국’이나 ‘달꽃’ 등의 토속적인 이미지들은 고원의 시를 현실지향적인 것으로부터 서정적인 것으로 만들고 독특한 미감을 느끼게 한다.
밤.
밤은 또
기다림을 포개준다.
이제는 기다림하고 정이 들어
눈부시게 속삭이는 그리움이
품어둔 눈물에 푸근한 밤,
나, 그런 밤하고 같이 산다.
―<밤>에서
우선 이 시에서 밤은 ‘기다림’이다. 이 모두는 추상적인 것인데 밤이 깊어가는 과정을 ‘기다림을 포개준다’고 표현함으로써 이러한 관념들을 물질화한다. 그것은 하나의 질량으로 내 앞에서 포개어 쌓아지고 있다. 기다림과 밤과 눈물은 서로 이질적인 사물이지만 이 시에서는 동질적인 의미를 드러낸다. 이 시에서 ‘밤’에 대한 시적 화자의 태도는 긍정적이다. 그것은 그리움이나 내 눈물과 같은 감정의 선들을 담아낸다. 그래서 시적 화자는 ‘밤’을 ‘푸근한’ 밤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그런 밤’과 같이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일까? ‘밤’에 ‘기다림’이나 ‘눈물’을 포개놓고 시적 화자는 무엇을 상념하고 있는 것일까?
죽은 얼굴이 아니라
죽음의 얼굴이 거기 있다.
죽음의 얼굴이 살아서 돈다.
처음 보는 죽음의 얼굴이
살결도
색깔도
너무나 너무나 아름답다.
죽어서 살면
저렇게까지
고운가부지.
―<마른잎 3>에서
그 해답은 바로 이 시에서 얻어질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시적 화자는 이 시에서 ‘마른잎’을 통해 ‘죽음’을 인식한다. 그것은 그저 ‘죽은 얼굴’이 아니다. ‘죽은 얼굴’은 죽은 상태, 즉 물질적이며 결과적인 상태를 보여준다. 시적 화자는 ‘죽음’ 그 자체의 얼굴을 보고 있다. ‘죽음의 얼굴’은 아직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은 상태, 즉 ‘죽은 얼굴’에 이르지 않은 상태이다. 다시 말해 누군가의 얼굴처럼 그것은 진행 중이고 미결정적인 상태에 있다. 예를 들면 ‘삶의 얼굴’, ‘아무개의 얼굴’ 등은 그 실체를 그저 언급하고 지시할 뿐이다. 시적 화자는 마른잎에서 이와 같이 의미부여되지 않은 ‘죽음’ 그 자체의 얼굴을 본다. 그리고 그 죽음의 얼굴이 ‘살아서’ 돌고 있다고 말한다. 죽음과 삶이 동시에 나타나는, 그리고 세상을 동시에 부유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나뭇잎이 펄럭이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삶과 죽음의 고정관념을 거부하고 삶과 죽음이 공존함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시적 화자는 이어 그 죽음의 얼굴이 ‘너무나 너무나 아름답다’고 고백한다. 죽음에 대한 이와 같은 긍정적인 인식은 그것이 죽었으면서도 동시에 살아 있기 때문이다. 죽음으로써 소멸되지 않는 것, 창백한 얼굴일지언정 삶의 언저리에 놓여 있는 것, 시적 화자가 원하는 죽음의 모습이다.
고원은 <밤하늘>에서 “커지는 밤하늘은 지도 없이 떠나는 여행길을 열어 줍니다.”라고 고백한다. 이러한 대목에서도 시인의 죽음에 대한 긍정적 인식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무한히 확대되는 밤하늘을 통해 시적 화자는 ‘지도 없이 떠나는 여행길’, 죽음의 여행을 생각하고 그를 또 다른 미지의 세계로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바람’의 이미지를 빌어 그의 시작품을 좀 더 명상적인 세계로 이끌어 간다.
시적 화자는 이러한 인식의 변화, 개안開眼의 경지에 대해 설득적인 어조로 권유한다. 사람들에게 ‘겉눈’을 감고 ‘속눈’을 뜨라(<바람4>)는 것이다. 그러면 바람도 소리가 아니라 다른 감각으로 보일 수 있고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바람의 소리를 보는 경지, 바람의 소리를 느끼는 경지가 시적 화자가 권유하는 개안의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것은 청각, 시각, 촉각 등의 주요감각들을 자극하면서 분명한 실체로서 존재한다. 이러한 개안과 깨달음의 과정을 통해 시적 화자는 대상을 인식하는 참된 과정을 제안하고 있다. 대상과의 합일을 이루려는 시적 화자는 자신을 하나의 ‘무화과나무’에 비유하기도 한다. 이 시에 이르러 고원은 모든 수식을 벗어던지고 쉽고 지시적이고 객관적인 자연의 세계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또 다른 변화가 시작된 것이다. 대상 그 자체에 침잠하면서 대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온 몸과 마음으로 느끼려 애썼다.
시조라는 시형을 선택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시조의 고정된 형식과 정형의 율격은 시인의 정서를 보다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데 기여하고 있다. 그래서 현실 소재의 시마저도 서정적으로 승화, 압축하는 효과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는 1980년대의 열정적이고 직설적인 시세계와 차이를 보인다. 시조라는 단형의 선택은 그의 일상을 보다 서정의 영역으로 끌어들이고 있으며 이러한 서정성의 심화는 그의 전 시작詩作에 걸쳐 한걸음씩 진행되어 온 결과이다. 그의 시조에는 타국에서의 일상만이 아니라 조국에 대한 그리움, 현실에 대한 비판, 역사적이고 현실적인 소재, 반면에 자연적인 소재나 선적인 시어 등이 다양하게 섞여 있다. 이 모든 다양한 소재에 하나의 통일성을 부여하는 것이 정형시로서의 시조라는 것이다.
2권의 시조집을 비롯하여 후기시의 대부분에 이와 같은 시조가 대량 수록되어 있다. 이들의 수준이나 느낌도 모두 유사하다. 대표적인 시 <달 둘이 떴다>는 우선 시조라는 정제된 시형의 시용과 더불어 ‘하늘’, ‘달’, ‘물’의 대상, 그리고 시적 주제까지 매우 서정적이고 명상적인 특징을 드러낸다. 달이 물에 비취인 모습을 묘사한 이 시는 ‘하나’와 ‘둘’ 사이를 유희하고 그를 변증법적으로 사유한다. 그 둘은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선적禪的인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유희는 ‘마음은 하나’를 통해 마무리된다. 인식하는 주체는 흔들림과 갈등이 없는 상태를 보여준다. 이와 같이 확고하고 안정된 인식은 모든 것을 깨달은 자의 경지가 아닐 수 없다.
후기시작으로 들어와서 시적 화자는 ‘물’을 통해 자신의 인식이 변화하고 있음을 고백하고 ‘밤’이나 ‘바람’을 통해 인간의 존재를 상념한다. 그러나 그것은 비극적인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 않다. 그가 확인하는 ‘죽음’의 얼굴은 아름다고 그가 만지는 ‘바람’의 소리는 생동감 있다. 그것은 ‘태양’이나 ‘불’의 이전 시의 이미지들에서 촉발된 ‘생명성’에 대한 추구와 긴밀하게 관련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태도는 이분법적인 세계를 하나로 통합하는 여유와 깨달음으로 이어지고 있다.
5. 결론
시인 고원의 시집 및 저서는 반세기에 걸쳐 20여 권에 달한다. 여러 변화가 있었지만 그래도 그 이면에는 단순히 고백의 서정시가 아닌 시적 대상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을 드러낸다는 특징을 갖는다. 그 대상은 때로는 ‘너’라는 사랑하는 이로, 민주화 등의 조국의 현실로, 또는 선적인 자연물로 변화되었다. 그는 그 속에서 한결같이 대상과의 합일을 추구했다. 즉 시적 대상과 자아 간의 끊임없는 만남을 노래했던 것이다.
초기시는 도미 이전의 시들로 ‘태양’으로 형상화된 ‘너’에 대한 사랑을 드러낸다. 그와의 인식론적이고 존재적인 지형을 ‘기하학’적 상상력을 통해 구상하고자 했다. 이러한 시편을 이름 붙여 ‘나와 너의 대화’로 볼 수 있는데 시적 화자는 ‘너’를 통해 현실의 갈등과 모순을 극복했다. 그러나 이 시편들에는 강하게 시적 화자의 개인적인 고독과 절망이 묻어나는데 시적 화자는 그대가 주는 희망과 절망감 속에서 부유浮遊하고 있었다. 여기서의 자아는 ‘표류하는 자아’로서의 모습을 보여준다.
중기시는 이미지 면에서 초기시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데 그것은 태양과 불 이미지의 유사성 때문이다. 굳이 이를 분류한 것은 초기에는 연가풍의 시가 수적으로 많고 중기에는 격정적이고 강렬한 생명의 이미지가 주로 형상화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속삭이는 불의 꽃������으로 출발한 중기 시세계는 불의 이미지를 중심으로 ‘촛불, 별’ 등의 이미지, 그와 관련하여 ‘씨’나 ‘꽃’과 같은 결정의 이미지들도 나타난다. 이들은 당대 현실에 대한 시인의 비판적인 면모과 더불어 생명성으로 갈등의 세계를 극복하려는 열망을 보여준다.
������물너울������로부터 시작된 후기시는 ‘물’의 이미지를 중심으로 고찰될 수 있었다. ‘물’은 어머니와 고향을 불러 오며 한편으로는 죽음에 대한 시선을 형상화하고 있었다. ‘물’은 고원의 시에서 다양하게 변용되면서 선적이고 명상적인 세계에 이르기까지 후기시의 주요한 이미지가 되고 있다. 특히 이 시기에는 시조라는 형식을 사용하고 있는데 압축적인 시형식이 응축되는 세계인식을 보여주는 데 효과적이다. 이들은 단아하고 서경적인 시들을 형성하며 대상에 대한 응축된 시선을 보여주고 있다.
<생애연보>
1925(1세) 12월 8일 충북 영동군 학산면 박계리 587번지에서 아버지 고명철(高明哲)(본 관; 제주)과 어머니 권영순(호적명은 權於仁禮이다. 본관은 안동) 사이 무매독자로 태어났다. 본명은 고성원(高性遠)이다.
1932(8세) 양산보통학교(양산면 가곡리)에 입학했다.
1938(13세) 전주 북중학교(현재 전주중고등학교)에 입학했다.
1943(18세) 전주 북중학교를 졸업했다.
1945(20세) 10월, 혜화전문 문학과에 입학했다. 학적부엔 당시 주소가 경성부 종로 삼정목(현 종로 3가) 13번지로 기록되어 있다.
1948(24세) 6월 20일, 동국대학교 전문부 문학과를 졸업했다. 이어 동대 문학부 영문과 2 학년에 편입학했으나 6.25 동란으로 흐지부지되었다. 이의 학업은 1958년에 이르 러 마무리되었다.
1952(28세) 12월, 장호, 이민영과 함께 3인 공동시집 ������시간표 없는 정거장������을 협동문화사 에서 간행했다.
1954(30세) 1년간 경기대학에서 전임강사로 강의를 했다.
시지 ������詩作������(1956년까지 통권 6집)의 창간을 주재했으며 첫 번째 개인시집 ������이율 의 항변������을 12월 시작사에서 간행했다.
1956(32세) 5월 두 번째 시집 ������태양의 연가������를 이문당에서 간행했다.
유네스코 본부 장학생으로 영국에 가서 케임브리지대 여름학기, 옥스포대 문학강습 회, 런던대학의 퀸․매리대학에서 영문과 특강생으로 2학기 수학했다. 그밖에 G. S. Fraser의 영시 개인지도를 받았다.
1957(33세) 11월, 김혜순과 결혼했다. 그 사이에 아들 유봉과 유진이 있다.
1958(34세) 3월, 동국대 문리대 영문학과를 졸업했다.
아들 유봉(有鳳)이 10월 용산구 후암동 247번지에서 태어났다.
1959(35세) 번역시집 ������영미 여류시인선������(여원사), D. H. 로렌스의 ������사랑의 시집������(정신사) 를 간행했다.
1960(36세) 6월 세 번째 시집 ������눈으로 약속한 시간에������를 정신사에서 간행했다.
이 해부터 1964년 1월까지 건국대학과 수도여자사범대학에서 가르쳤다.
1961(37세) 2년간 국제 펜 한국본부 사무국장을 지냈다.
딸 유진이 5월 용산구 후암동 247-11에서 태어났다.
1963(39세) 2월 네 번째 시집 ������오늘은 멀고������를 동민문화사에서 간행했다.
필리핀 씰리만 대학 문예창작 강습회를 수료했다. 강사로 온 아이오와 대학의 Paul Engle 시인을 알게 됐다.
1964(40세) 1월 다섯 번째 시집 ������속삭이는 불의 꽃������을 신흥출판사에서 간행했다.
같은 해 1월에 미국 아이오와 대학으로 유학길을 떠났다.
1965(41세) 미국 아이오와 대학에서 영문학 석사(M.F.A)를 받고 1966년까지 더 공부했다.
1966(42세) 아이오와 시인협회 현상 대학부 1위에 당선됐다. Kansan City Star 신문 현상 시에 당선됐다.
1970(46세) 영역 한국시선 (������Contemporary Korean Poetry������)을 아이오와 대학 출판사에서 간행했다. 뉴욕시립대학의 브룩클린대학에서 교수생활을 시작했다. 비교문학을 강 의했으며 1977년까지 재직했다.
1972(48세) 미국 네바다주에서 7월 이혼했다.
1974(50세) 뉴욕대학(NYU)에서 비교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영시집 The Turn of Zero(뉴욕: Cross-Cultural Communication)을 간행했다.
6월, 이영아와 뉴욕에서 재혼했다. 그 사이에 아들 형진, 딸 윤주가 있다.
1975(51세) 6월, 아들 형진이 미국 뉴욕에서 태어났다.
1976(52세) 시집 ������미루나무������를 해외한민보사에서 간행했다.
1977(53세) Buddhist Elements in Dada를 뉴욕대학출판사에서 간행했다.
1979(55세) 시집 ������북소리에 타는 별������을 해외한민보사에서 간행했다. 산문집 ������갈매기������가 됴 쿄한양사에서 간행된다.
1980(56세) 시집 South Korean poets of Resistance가 뉴욕 Cross-Cultural Communication에서 발행됐다.
1984(60세) L.A와 Northridge의 캘리포니아주립대학에서 강의했다.
1985(61세) 한국일보 나성판에 「문화산책」을 연재했다.
10월, 시집 ������물너울������을 창작과 비평사에서 간행했다.
1986(62세) L.A에 글마루 문학원을 창립하여 문학 및 문예창작을 지도했다.
4월 재미작가 6인선 ������객지문학������을 융성출판사에서 간행했다.
1987(63세) UC Riverside에서 1992년까지 강의했다.
1988(64세) 미국에서 종합문예지 ������울림 THE ECHO������를 발행했다.
문예종합지 ������문학세계������를 창간하고 발행 편집을 맡았다.
산문집 ������노피곰 마리곰������을 전예원에서 간행했다.
1989(65세) 7월 시선 ������나그네 젖은 눈������을 혜원출판사에서 간행했다.
1990(66세) 영시집 ������Some Other Time������을 L.A. Bombshelter press에서 간행했다.
1992(68세) 3월 박남수, 마종기와 함께 3인 시선 ������새소리������를 삼성출판사에서 간행했다.
La Verne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조교수로 재직했다.
1993(69세) 8월 시집 ������다시 만날 때������를 범우사에서 간행했다.
미주한국문인협회의 미주문학상을 수상했다.
1994(70세) 5월 시집 ������정������을 둥지출판사에서 간행했다.
1995(71세) 서울시 명예시민으로 선정됐다.
첫 번째 시조집 ������달 둘이 떠서������를 10월 마을출판사에서 간행했다.
1997(73세) 한글학회 국어운동 공로상을 표창했다.
1999(75세) 3월 시집 ������무화과나무의 고백」을 창작춘추사에서 간행했다.
2000(76세) 영역 해방후 한국 시인선 Voices in Diversity: Poets from postwar Korea를 뉴욕 Cross-Cultural Communication에서 발행했다.
2001(77세) 1월, 두 번째 시조집, ������새벽 별������을 태학사에서 간행했다.
2003(79세) 2월, ������춤추는 노을������을 신지성사에서 간행했다.
2004(80세) 평론집 ������알라가 아니면 칼을 받아라������를 동서문화사에서 출간하다.
2005(81세) 라번(La Verne)대학의 Senior Adjunct Professor(석좌교수)역임.
부인과 캘리포니아주 노스브릿지에서 살았다.
2008(84세) 1월 20일 새벽 6시(미국시간)에 세상을 떠났다.
1) 이 글은 졸고, ������한국전후 문제시인 연구������(vol.5, 예림출판, 2005)에 이미 게재된 논문을 본지의 편집방향에 맞추어 수정한 것이다.
2) 고원 저, ������고원 문학 전집������(고요아침, 2006)
3) ������이율의 항변������의 서시
4) <눈이 내리듯>에서
5) ������다시 만날 때������, 서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