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계는 안동 향내(鄕內)에 사는 임자년과 계축년에 출생한 60세 이상의 기덕인(耆德人) 11인이 도의(道義)의 교(交)를 맺고 우의(友誼)를 다지기 위해 만든 유계(儒稧)로 동갑계(同甲稧)에 해당된다. 계원들은 1613년(광해군 5) 가을에 안동의 광흥사(廣興寺)에서 첫 모임을 가진 뒤 8년 후에는 풍산읍 소산리에 있는 삼구정(三龜亭)에서 다시 계회를 가졌다.1) 삼구정 모임 이후에도 광흥사에서 몇 차례의 모임을 가졌으나 년도가 확인이 된 것은 1695년(숙종 21) 모임이다. 이 해 가을에 그 후손들이 선세(先世)의 유풍을 따르고자 광흥사에 다시 모여 계사(稧事)를 이었는데 그 감회를 글과 시(詩)로 남기고 있다. 그 후의 계사 관련기록은 문헌에 보이지 않다가 1907년(순종 원년) 봄에 후손 49인이 다시 광흥사에 모여 계를 추수(追修)하였다. 근래에 들어서는 1968년 청성서원의 모임을 시작으로 해서 금년까지 각 후손들이 매년 돌아가면서 계회를 주최하여 열고 있다.
2. 구성과 운영
1) 구성
임계계회는 약 400년 간 계승되어 오면서 많은 후손들이 선대의 유풍을 따라 계를 승계하였다. 그러나 전하는 좌목(座目)은 처음 수계시의 것과 1907년(순종 원년) 이후부터의 것만 남아 있다. 다만 수계 82년 후인 1695년(숙종 21)에는 그 후손들이 옛일을 따르려고 광흥사에 모여 계사를 이었으나 당시의 좌목은 전하지 않고, 「추계록(追稧錄)」에 5인의 시(詩)가 전한다.
수계시 계원의 나이는 임자생이 62세, 계축생 61세로 안동 향중의 환갑을 넘은 기덕인이 계원으로 가입하였다. 그래서 당시의 모임을 묘사한 임계계회지도(壬癸契會之圖:순흥안씨 집안 소장본)를 보면 계원들은 광흥사의 전각 마루에 좌정해 있고, 연소(年少)하여 계원에 들지 못한 3인은 전각 아래에 별좌(別座)로 앉아 있는 모습이 보인다. 당시의 별좌 3인은 김윤사(金允思)공을 모시고 간 8년 아래 동생인 동리(東籬) 김윤안(金允安, 大邱府使)과 권위(權暐)의 사위로 계회도의 글씨를 쓴 개호(開湖) 김시주(金是柱; 兵曹佐郞), 추애(秋厓) 신홍립(辛弘立, 成均館學諭) 등이다.
계축(稧軸)에 등재된 계원은 모두 11인으로 성씨별로 보면 안동 권씨가 2인이며, 영해 박씨, 경주 최씨, 순천 김씨, 순흥 안씨, 진주 하씨, 일직 손씨, 예안 이씨, 한양 조씨, 김해 허씨가 각기 1인이다. 이들 가운데 임자생이 7인이며 계축생이 4인인데 좌목의 기술(記述)은 연치(年齒) 순으로 하였으며, 각 인물의 직역․성명․자호(字號)․본관․거주지․생년월일을 기록하였다.
임계계회가 지금까지 전승되면서 많은 인물들의 이름이 좌목에 올랐는데 그 수가 너무 많아 여기에서는 창립계원 11인에 대한 내력만 간략히 살펴보기로 한다.
계축에 등재된 11인은 아래와 같다.
◦ 壬癸會稧軸〔萬曆 四十一年 癸丑(1613)年 九月 廣興寺〕
前禮曹佐郞 權 暐 叔晦 玉峯 本安東 居道村 壬子 正月 二十二日生
參 奉 朴 洽 希源 石林 本寧海 居棄仕里 壬子 正月 二十二日生
幼 學 崔 挺夫 南川 本慶州 居浦項 壬子 四月 初二日生
前察訪 金允思 而得 松陰 本順天 居九潭 壬子 六月 十八日生
前縣監 安聃壽 君邵 定峰 本順興 居池洞 壬子 七月 初七日生
幼 學 河遇聖 會千 松灘 本晋州 居松坡 壬子 八月 十八日生
判 事 孫慶弘 榮祖 猿谷 本一直 居申石 壬子 八月 二十九日生
幼 學 李 瑚 汝器 曲江 本禮安 居豊縣 癸丑 正月 三十日生
忠義衛 趙承先 彦述 松軒 本漢陽 居羅川 癸丑 二月 十二日生
前縣監 許應吉 吉元 河巖 本金海 居河回 癸丑 二月 二十九日生
前順陵參奉 權行可 士遇 梅湖 本安東 居松夜 癸丑 十一月 初九日生
◦ 권위(權暐, 1552~1630)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자(字)는 숙회(叔晦)이고 호는 옥봉(玉峰)이다. 성균생원(成均生員) 심행(審行)의 아들로 도촌에서 태어나 학봉 김성일․유일재 김언기․월천 조목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약관에 동당시 별시에 합격하였으며, 1601년(선조 34) 문과에 급제하여 전적․공조좌랑을 역임하였다. 뒤에 형조․예조정랑을 제수 받았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616년(광해군 8) 동도(경주) 교수에 부임하여 후진을 길렀으며, 그 때에 쓴 「동경일록(東京日錄)」이 있다.
저서로 『옥봉집(玉峰集)』이 전하며 안동시 북후면 도촌리에 있는 도계서원(道溪書院)에 배향되었다.
◦ 박흡(朴洽, 1552~1615)
본관은 영해(寧海)이며 자(字)는 희원(希源)이고 호는 석림(石林)이다. 참봉(參奉)으로 예안의 기사리(棄仕里)에 살았다.
◦ 최첩(崔, 1552~?)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자(字)는 정부(挺夫)이고 호는 남천(南川)이다. 유학(幼學)으로 포항(浦項)에 살았다.
◦ 김윤사(金允思, 1552~1622)
본관은 순천(順天)이며 자(字)는 이득(而得)이고 호는 송음(松陰)이다. 박(博)의 아들로 구담(九潭)에서 태어나 1588년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김천도찰방(金泉道察訪)을 역임하였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공은 겸암 류운룡과 서애 류성룡 형제분의 문하에서 동생인 동리 김윤안과 함께 수학을 하였는데 임진왜란 때에는 근시재 김해 의병장의 막하(幕下)에서 문서작성 등의 일을 도왔다고 한다.
◦ 안담수(安聃壽, 1552~1628)
본관은 순흥(順興)이며 자(字)는 군소(君邵)이고 호는 정봉(定峯)이다. 경로(景老)의 아들로 지동(池洞)에서 태어났으며 서애 류성룡의 문인으로 1582년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603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성현찰방․예빈시직장․사헌부감찰․성균관사예․예안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1608년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병산서원 창건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원장(院長)을 역임하고 스승의 문집을 교정하였다. 공은 세마(洗馬)로 제수되었을 때 광해군이 폐모(廢母)를 강행하자 상소하여 자전(慈殿)의 위호(位號) 복구를 청하였다가 삭탈관직이 되었으며 그 후 인조반정(1623)으로 대사간에 제수되었으나 병환으로 사양하였다.
◦ 하우성(河遇聖, 1552~?)
조선 단종(端宗) 때 사육신(死六臣) 가운데 한분인 단계(丹溪) 하위지(河緯地)의 5대손으로 본관은 진주(晋州)이며 자(字)는 회천(會千)이고 호는 송탄(松灘)이다. 공은 유학(幼學)으로 글〔文章〕이 훌륭하였으나 세조(世祖) 병자(丙子) 참화(慘禍) 후 은둔(隱遁) 시기여서 출사(出仕)를 못하고 송파(松坡:지금의 안동시 서후면 교리)에 살았다.
◦ 손경홍(孫慶弘, 1552~?)
본관은 일직(一直)이며 자(字)는 영조(榮祖)이고 호는 원곡(猿谷)이다. 판사(判事)를 역임하였으며 신석(申石)에 살았다.
◦ 이호(李瑚, 1553~?)
자(字)는 여기(汝器)이고 호는 곡강(曲江)이며 본관은 예안(禮安)이다. 예안 이씨 안동입향조 명경서부참봉(明經西部參奉) 근제공(近齊公) 전(荃)의 손자이고 현감 유인(惟仁)의 장자로 풍현(豊縣:안동시 풍산읍)에서 살았는데 벼슬은 종사랑(從仕郞)을 지냈다.
공은 서애 류성룡의 문인으로 필법(筆法)이 힘차고 뛰어나 병산서원을 창건할 때 당실문(堂室門) 의 편액을 모두 공이 썼다. 또 재종형제인 율원(栗園) 공(珙)․시은당(市隱堂) 진(珎)과 상의하여 풍산읍 만운리의 호암(虎岩) 선산아래 모선루(慕先樓:중요민속자료 제180호)를 건립하여 선조고 근재공의 유덕을 기렸으며, 마을 앞에 곡강정(曲江亭)을 지어 풍류를 읊고 후진을 양성하였다.
◦ 조승선(趙承先, 1553~?)
자(字)는 언술(彦述)이고 호는 송헌(松軒)이며 본관은 한양(漢陽)이다. 충의위(忠義衛)로 나천(羅川)에서 살았다.
◦ 허응길(許應吉, 1553~?)
자(字)는 길원(吉元)이고 호는 하암(河巖)이며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현감(縣監)을 역임하였으며 하회(河回)에서 살았다.
◦ 권행가(權行可, 1553~1623)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자(字)는 사우(士遇)이고 호는 매호(梅湖)로 송야(松夜: 지금의 안동시 서후면 교리)에 살았다. 선문(善文)의 아들로 태어나 숙부 송암(松巖) 호문(好文)에게 출계하였다.
학봉 김성일의 문인으로 1613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임진왜란 당시에는 의병장 김해(金垓)의 휘하에서 관향유사(管餉有司) 및 서기(書記)로 활약하였다. 공은 용만(龍巒) 권기(權紀)가 안동의 지방지를 편찬하려고 이름을 정할 때 ‘영가지(永嘉誌)’란 이름이 ‘화산지(花山誌)’란 이름보다 안동의 지세(地勢)에 합당하다고 밝힐 만큼 식견이 뛰어났다. 뒤에 순릉참봉을 역임하였으며 문집으로『매호집(梅湖集)』이 있다.
○ 임계계회 기적비
안동시 북후면 도촌리 권위 선생을 모신 도계서원에서 제막식이 있었으며 전면 글씨는 석호 김동영선생(순천김씨) 비의 고유문은 용전 김철희선생(순천김씨)이 쓰셨다.
2) 운영
임계계회는 창계년인 1613년부터 1695년 광흥사 모임 때까지는 국화와 단풍이 한창인 9월에 모임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근세에 들어서는 봄철인 3, 4월에 모임을 가졌으며 1968년 청성서원(靑城書院) 취회(聚會)부터는 음력 4월 10일을 정일(定日)로 하여 모임을 갖고 있다.
근래에 들어서 11개의 문중 가운데 김해 허씨가 참석하지 못한 가운데 10개 문중이 매년 활발한 모임을 가지고 있다. 김해 허씨는 창립계원인 허응길이 하회(河回)에 살았을 당시에는 모임에 참여하였으나 뒤이어 정착한 풍산류씨들에게 세(勢)에서 밀려 타지로 이향한 이후에는 모임에 참석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계의 재정은 자세한 자료가 전하질 않아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제보자 김동성씨의 말에 따르면 “1970년대 까지만 해도 계의 재정이 튼튼하여 계원들이 해마다 전국의 명승고적을 유람하며 친목을 도모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계금이 고갈되어 20년 전부터는 남은 계금 약 300만원을 쓰지 않고 저축해두고 있다.
현재 임계회의 계원 수는 약 100인으로 이 중에서 정회원은 40인 정도이다. 이 가운데 회장 1인과 재정을 관리하는 총무 1인을 선정하여 회를 운영하는데 임기는 3~4년으로 연임한다.
계회는 좌목에 등재된 순서로 문중별로 돌아가면서 주최를 하며 장소는 주최 문중의 재실이나 서원․정자 혹은 조용한 음식점 등을 이용한다. 보통 한 문중에서 2~3인이 참석하여 30여명 쯤 모이며 또 주최문중에서 많은 인원이 참석하여 총 100인을 넘기기도 한다. 행사 경비는 한 해에 150만원 정도가 지출되는데 당해 행사를 주최하는 문중에서 부담해 오고 있다. 다만 계회에서는 임원들에게 10만원 정도를 통신료로 지원하고 있다.
근래에 있었던 계회를 보면 2003년과 2004년에는 영해 박씨가 모임을 주도하였으며, 2005년에는 순천 김씨 구담문중의 주도로 안동시 풍천면 구담 2리의 국담정사(菊潭精舍)에서 정기총회를 가졌다.
올해로 창립 제 393주년이 되는 2005년 임계계회는 주최 문중에서 100여인이 참석한 가운데 10개 문중에서 총130인이 참여하는 성대한 모임이었다. 행사는 아래와 같은 절차로 진행되었다.
◦ 제393주년 임계계회 행사순서
․시도기(時到記) : 행사 참석자의 시도기를 작성한다.
․좌목(座目) : 계원의 좌목을 작성한다.
․상읍례(相揖禮) : 계원들이 서로 마주보며 읍(揖)하고 예를 올린다.
․선현묵념(先賢黙念) : 임계회 창립 선조 11인에게 묵념을 올린다.
․향리약속(鄕里約束) : 계원 가운데 한 분인 권영근씨가 향약조문을 독약(讀約)하면 다른 한사람이 한글로 풀어 낭독한다. 덕업상권장(德業相勸章), 과실상규장(過失相規章), 예속상교장(禮俗相交章), 환난상휼장(患難相恤章) 등을 읽는 동안 나머지 계원은 경청하며 약조를 지킬 것을 마음속으로 다짐한다.
․시암송(詩暗誦) : 시(詩) 암송은 선조들이 계회에서 읊은 시(詩)나 선조의 시에 경차(敬次)하여 지은 시를 낭송하는 순서이다. 금년에는 북후면의 권영팔씨가 선조의 시를 낭송하였고, 구담에 사는 김오현(金五鉉)씨가 ‘敬次壬癸稧帖韻’이란 시제(詩題)로 지은 시를 낭송하였다. 이어서 김동성씨가 자신의 12대 선조인 동리(東籬) 김윤안(金允安)공의 문집에서 찾아낸 ‘三龜亭奉呈壬癸稧會座下’라는 임계회 관련자료를 발표하였다.
․결산보고(決算報告) : 임원인 총무가 작년 모임 때의 결산보고를 한다.
․토의사항(討議事項) : 토의 사항은 그 해의 안건에 대해 계원이 서로 논의 한다.
3. 기타
1) 임계회지(壬癸會誌)
1999년에 발행된 143쪽 분량의 책자로 임계계회 계축․계안․좌목 등의 옛 문건과 현 계원들의 글을 한데 모아 연대순으로 수록하고 국역하였다.
2) 임계계회지도(壬癸契會之圖)
임계계회지도는 1613년(광해군 5) 광흥사에서 가진 임계계회를 기념하기 위해 화공이 그린 그림으로 그때 참석한 11인이 나누어 가진 것으로 현재 남은 것은 안동의 순흥 안씨․진주 하씨․영주의 영해 박씨집안 등에서 3점의 계회도가 전해지고 있다.
임계계회도의 구성은 3점 모두 상단에 전서체로 ‘壬癸契會之圖’라고 표제를 적고 중단에 계회모임을 위해 광흥사로 계원들이 도착하는 모습의 그림을 그린 후, 하단에는 권위․권행가․김윤사․하우성․이호의 칠언절구와 별좌로 참여한 신홍립․김윤안․김시주의
경차(敬次)와 시(詩)를 싣고, 하단에 옥봉 권위에서 매호 권행가에 이르는 창립계원 11인의 좌목을 기록하였다.
계회도 가운데 순흥 안씨 집안의 것과 영해 박씨 집안의 것은 그림의 명암과 나무 등의 묘사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똑같이 그린 그림으로 조선시대 계회도의 전형적인 모습2)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진주 하씨집안의 것에 비해 당시의 모임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어 흥미롭다. 그림을 보면 회합 장소인 광흥사에 도착하여 전각의 마루에 좌정하고 있는 10인과 뒤늦게 나귀를 타고 오는 1인, 연소(年少)하여 계원에 들지 못해 전각 아래에서 별좌로 자리를 마련한 3인의 모습이 보인다.
진주 하씨 집안의 계회도는 광흥사 모임 후 이듬해 봄에 그린 것으로 순흥 안씨집안의 것과 표제․좌목․시(詩) 등의 내용은 같으나 그림의 구도와 소재 등은 상이하다. 그림의 구도를 보면 산이 중첩되게 그려져 있으며 그림에 등장하는 소재 등의 묘사에서 중국풍의 느낌이 든다. 이 계회도는 소장자가 그 진위여부가 궁금하여 KBS-TV 진품명품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감정을 의뢰하였는데 높은 감정가격이 나왔다.
3) 임자계축생회시(壬子癸丑生會詩)
1613년 임계회원들이 모임에서 읊은 시(詩)
年過六十各成翁 나이 六十이 지나니 각각 翁이 되었다.
尋到叢林鶴駕東 고요한 숲속 학가산 동쪽으로 찾아왔네.
一座蒼顔兼白髮 한 자리에 푸른 얼굴과 흰머리가 서로 만나
九秋黃菊共丹楓 구월 가을 누런 국화는 단풍과 같구나.
淸遊偶合香山會 맑게 노는 것은 우연히 향산모임에 부합되었고,
眞率宜追洛社風 솔직한 것은 마땅히 낙사 풍류를 따라야겠다.
借與龍眠傳妙手 그림 그리는 화공에게 좋은 솜씨 빌린다면,
衰容長對畫圖中 늙은 얼굴을 길이 그림 속에서 대할 수 있네.
-玉峯 權 暐
白髮花山壬癸翁 백발이 된 화산 임자 계축생 노인들이
各嫌居巷在西東 각각 촌에 살아 동서에 있는게 한스럽구나.
禪窓會話三秋日 절간 창가에 모여 이야기하니 가을날인데
匹馬來尋萬樹楓 말타고 찾아오니 온 나무가 단풍이로다.
舞袖共傾殘月影 춤추는 소맷자락 새벽달 그림자에 기울었고,
歌聲久替曉鍾風 노랫소리는 새벽종소리와 함께 오래도록 불렀네.
當今勝事憑誰問 이제와서 좋은 일을 누구에게 물을손가.
他日依然繪畫中 뒷날에 그림 가운데 의연할 것을.
- 松陰 金允思
六十餘年一稧翁 六十이 넘어 함께 계를 모은 늙은이들이
騎驢咸集鶴山東 나귀타고 학가산 동쪽에 모두 모였네.
幽情暢叙悲頭雪 그윽한 정을 시원하게 펴니 머리가 흰 것이 슬프고,
酒斝飛傳喜面楓 술잔을 서로 주고받으니 얼굴이 단풍되어 즐겁네.
彩舞翩翩留夜月 채색 춤을 추면서 달에 머무르고,
淸歌蓼亮送秋風 맑은 노래 부르면서 가을바람을 보내네.
同歡此會難忘事 함께 즐기는 이 모임 잊기가 어려워
長對圖形半壁中 그림에 모습 그려 벽에 걸어 길이길이 보리라.
- 松灘 河遇聖
樽酒笙歌尉老翁 단지술과 젓노래로 늙은이를 위로하니
仙山來會自西東 서쪽과 동쪽에서 신선산으로 모였구나.
欣逢談笑情如海 즐겁게 만나 웃으며 이야기하니 정은 바다같고,
大醉顚狂面似楓 크게 취하여 엎어지고 미친 듯 얼굴은 단풍같구나.
霜鬢不羞淸鏡影 서리같은 빰은 맑은 거울 그림자가 부끄럽지 않고,
菊花高揷暮秋風 국화꽃은 저물어가는 가을바람에 높이 곶았네.
他年欲識同庚意 다른 해에 동갑의 뜻을 알고자 한다면,
看取明牕一幅中 밝은 창가 한 폭의 그림 속에서 보아야겠지.
- 曲江 李 瑚
同志同庚十一翁 뜻도 같고 나이도 같은 열하나 늙은이가
論交猶恨隔西東 사귐을 의논하니 동서로 막힘이 한이로다.
朱顔剩借斟新醁 붉은 얼굴은 새로 거른 술잔에 취하였고,
白髮何妨映晩楓 흰 머리에 늦단풍 비치는게 무엇이 해로운가.
彩舞更憐爭落日 채색 춤은 저믄 날과 다투는게 가엽기만 한데
浩歌休惜弄長風 호탕한 노래 바람을 희롱하니 쉬기가 아깝구려.
今朝象外淸遊興 오늘 아침 세속을 떠나 맑게 노는 흥을
花發重期洛社中 꽃이 필 때 다시 낙사에서 만나기를 기약하네.
- 梅湖 權行可
※ 敬次此下三詩雖會中之作特晩年從遊故追附(아래의 세편의 시는 비록 회중에서 지은 것은 아니나 만년에 종유한 까닭에 추부하였다.)
옛날 나의 선조이신 곡강선생께서 같은 향내의 여러 선생들과 함께 도의의 교를 맺고 또 동갑 나이의 우의를 다지며 서로 돕고 경계하며 늙어가면서 더욱 돈목을 두텁게 하고자 만력 1613(광해군 5년․계축)년에 광흥사에서 임계회를 만들어 시를 짓고 화상을 그렸는데 그때의 나이가 모두 70이었다.
아! 훌륭하였도다. 내가 소시적에 계첩이 안재준형의 집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지난해 용궁에 갔다가 오는 길에 지당에 이르러 안형집에서 손을 씻고 경건한 마음으로 계첩을 살펴보니 여러 선생의 이름과 시가 한 폭의 계첩에 실려 있었는데 지금부터 삼백년 전의 모습이 완연히 이어 내려온 참 모습에 감모의 정을 이기지 못하였다. 안형과 함께 약간의 돈을 거두어 옛 일을 다시 닦아보려 하였는데 각 안문의 후손들이 있는 집도 있고, 혹은 각처에 흩어져 없는 집도 있으니 부득이 한 자리에 모여 앉아 서로 돈목을 나눌 수 없는 것이 한이 되었다.
내가 늦게 태어난 터에 어찌 감히 한 마디로 옛 일을 말할 수 있을까마는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간략하게 여러분 앞에 말씀드리는 바이다.
무릇 계라는 것은 옛날의 일이요, 지금은 세호라고 이름하는 것이 어떨까. 우리 선조이신 옥봉선생은 나의 10세조이신데 매호선생과 함께 향내의 여러 선생과 도의의 교를 맺고 동갑의 우의를 다졌다. 강론으로 도를 갈고 닦으며 부지런함에 힘쓰고 의를 따른다는 것은 진실로 먼훗날 후생들이 본받을 바를 말함이요, 어찌 말세에까지 미치는 바가 아니겠는가.
지난날 만년에 광흥사에서 임계회를 만들었을 때가 만력 계축년 9월이었다. 김동리공과 신학유공 김정자공 세 분 선생은 모두 나이가 적어 별좌에서 회에 참가하였는데 그림의 장막 뒤에 나란히 그 모습이 전하는 것은 당시의 아름다운 풍속이었다. 지금 그 유상이 아직도 우리 집에 있는데 받들어 펼쳐보니 락사 향산이 완연히 해동에서 다시 보는 듯 하였다.
그러나 아깝도다. 각 가문의 후손들이 혹은 있기도 하고 혹은 없기도 하고, 또 있는 자손들도 각 처에 흩어져 찾을 길이 없으니 선조의 뜻을 이어받아 호의를 함께 할 수 없구나. 그래서 이재준형과 안재준형이 의논을 제기하기를 약간씩 돈을 거두어 후손들의 이름이라도 기록하여 계를 더욱 보람있게 운영해 보자고 하였는데 이는 매우 장한 뜻이었다.
스스로 돌아보니 내가 앞줄에는 끼일 수 없으니 뒷줄에나마 끼여서 또한 내가 잘 알지 못하므로 군자 여러분께 우러러 묻겠으니 세호 두 글자로 하는 것이 맞는지요. 맞지 아니하는지요.
흥하면 폐하고 폐하면 흥하는 것은 세상의 당연한 이치이다. 그런데 이 계첩이 흥폐의 느낌이 없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만력 1613(계축)년 9월 우리 선조 곡강선생께서 같은 나이의 여덟 분 선비와 함께 학가산 광흥사에 모여 계에 대한 이야기와 도를 논하며 며칠을 지내면서 향산의 뜻을 본받고 모임을 마치셨다. 이어 한 첩을 만들어 임계회라 이름 짓고 열 한분 선비의 진상을 차례대로 첩에다 그리고, 또 시를 나란히 실었으니 이 어찌 아름다운 일로 폐함이 있겠는가.
해를 넘겨 1695(을해)년 9월에 나의 8대조 청전공께서 여러 가문의 자손들과 더불어 계를 닦고 이어가자고 그 시의 서문에 말한 것이 이 계가 다시 일어나게 된 까닭이라 하겠다. 한 폭의 그림과 주옥같은 시구들이 지금까지 밝게 빛나 사람들이 볼 수 있는데 수 백 년 후까지 향산이 있을 것인지 알지 못하지만 그때까지 볼 수 있기를 바라는 바 지금부터 몇 계축을 지나도록 세월이 오래되고 세상 일이 더욱 소원하여져서 그 자취가 없어질까 근심스러운 마음 금할 길이 없다. 반달은 이미 둥글지 못하고 큰 하늘의 구름이 갑자기 흩어졌다 모였다 하는 것이 흥폐의 까닭인즉, 오늘날 이 계가 이어지리라고 어찌 알 수 있겠는가.
1613(계축)년의 계가 1913(계축)년에 이어진 것도 또한 우연한 일이 아닌 것이다. 좋아하고 싫어함은 범서의 차이이니 올해 4월 20일 광흥사에 모여 계를 닦았다. 불초한 내가 할 바가 아니로되 선조의 뜻을 이어받아 유첩을 어루만지니 우아한 감이 일어남을 금치 못하였다. 분수를 헤아리지 못하고 주제넘게도 계첩의 끝에다가 몇 자 적어 뒷날 후생들이 보기를 기다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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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스페셜, 400년 맺어진 의리 '안동 계회'어니스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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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기사 - 역사스페셜, 400년 맺어진 의리 '안동 계회
- 방송 : 2010. 10. 16 (토) 20:00~21:00(KBS 1TV)
- 진행 : 한상권 아나운서, 김진희 아나운서
- 연출 : 심광흠 PD
- 글 : 최미혜 작가
[어니스트뉴스=차호재기자] 시대를 뛰어넘는 의리와 인연, 안동 선비들의 모임 기록, 계회(契會)
400년 이상 지속되고 있는 '임계계'(壬癸契)와 ‘우향계’(友鄕契) 그들이 남긴 계모임 속 숨은 비밀을 파헤쳐 본다.
지난 2005년 KBS 'TV쇼 진품명품'에서 1억 5천만 원의 감정가를 받아 화제가 된 한 장의 그림이 있다. 임자년(1552)과 계축년(1553년)생인 선비 11명이 환갑 즈음인 1613년의 모임을 기록한 <임계계회도>다. 오늘날 우리가 사진을 찍어 나눠 가지듯 400년 전의 사람들은 계회 장면을 참가 인원 수 만큼 그려 나눠 가졌던 것.
그렇다면, 나머지 후손들도 계회도를 소장하고 있을까? 제작진의 수소문 결과, 순흥 안씨, 진주 하씨, 영해 박씨, 안동 권씨 총 4문중에서 임계계회도를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과연, 4문중의 후손들이 소장하고 있는 계회도는 모두 똑같은 그림일까?
연락되지 않는 회원 ‘허응길’의 후손을 찾아라!
4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매년 4월 10일 정기모임을 지속해 오고 있는 임계계회. 하지만 11개 문중 가운데, 유일하게 ‘김해 허씨’ 허응길의 후손들만 연락이 닿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김해 허씨 허응길’의 후손을 찾기 위해 제작진이 직접 나섰다.
단서는 오직 허응길이라는 이름과 1553년 계축생이라는 나이, 그리고 현감을 지냈다는 좌목의 정보가 전부. 과연 그의 후손을 찾을 수 있을까? 허응길의 단서를 추적하던 제작진은 대구 계명대학교 도서관에 소장 중인 1584년 문, 무과 시험 합격자 명단에서 계축년(1553년)생의 ‘허응길’의 기록을 확보할 수 있었다.
또한 대구 망우공원에 있는 ‘임란호국영남충의단’에서 망우당 곽재우와 함께 영남 의병으로 활동한 허응길의 기록도 추가로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런데, 모든 기록의 허응길은 모두 본이 다른 ‘하양 허씨’. 과연 하양 허씨 허응길은 우리가 찾는 인물일까?
530년 최장수 유계(儒契) ‘우향계’의 비밀
1478년 안동 지역 5문중의 선비 13인이 결성한 우향계. 이 계는 530년의 역사를 이어오고 있는 우리나라 최장수 선비들의 모임이다. 우향계의 회원 13인은 모두 당시 안동의 향촌 사회를 주도하던 대표적인 양반 가문 출신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한 선비들이다. 이들은 왜 벼슬길에 발을 끊고 초야에 묻히고자 했을까?
우향계를 조직할 당시 모임의 참석자들은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에 오른 세조에 반대했던 인물들. 즉, 우향계는 계원들 상호 간의 친목을 도모하는 단순한 계모임이 아니라 세조의 왕위 찬탈이라는 엄혹한 현실 속에서 안동의 향촌 자치를 지켜나간 비밀 결사체로써의 기능을 담당했던 것이다.
대대손손 이어온 안동 선비들의 모듬살이 기록
1478년, 안동의 다섯 문중 선비 13명이 모여 시작한 <우향계>와 1613년 안동의 11명 선비들이 첫 모임을 시작한 <임계계>. 이 계회들은 4~500년에 걸쳐 후손들에게 확대 전승되면서 선조들이 맺은 의리를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이는 우리 시대에 다시 돌아보고 계승해야 할 소중한 전통 가치일 것이다.
(서울=연합뉴스) 홍성록 기자 = 400년 가까이 이어온 계 모임이 있어 화제다. "임계계회"(壬癸契會)라고 이름 붙은 이 모임은 이달 8일 KBS 1TV "TV쇼 진품명품" 녹화를 통해 일반에 알려지게 됐다. 경북 안동에 사는 하시락(70) 씨가 조상들의 계 모임을 그림으로 담은 "임계계회도"(壬癸契會圖)의 가치를 "진품명품"팀에 의뢰했기 때문. 하씨가 감정을 의뢰한 "임계계회도"는 1613년 11명의 선비가 안동 학가산 광흥사에서 가진 모임에 대해 참석한 사람들의 명단과 글, 모임의 그림 등을 담은 것. 모임의 이름이 "임계계회"인 것은 임자(壬子.1560년)년과 계축(癸丑.1561년)년에 태어난 사람들이 모였다는 데서 유래됐다. 임계계회는 의뢰인 하씨 대를 포함 무려 13대에 걸쳐 이어지고 있다. 모임에 참가한 문중은 안동 권씨, 영해 박씨, 경주 최씨, 일직 손씨, 진주 하씨, 예안 이씨, 순흥 안씨, 순천 김씨, 한양 조씨, 김해 허씨 등 10개 집안. 안동 권씨는 이 모임에 두 집안이 참여했다. 하씨는 28일 연합뉴스와의 전화통화에서 "병자호란, 일제 강점기 등 국난이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계속해서 모임을 이어왔다"면서 "올해 4월 10일에 393회 모임을 가졌다"고 말했다. 하씨는 "진품명품"팀에 임계계회도의 감정을 의뢰한 것은 진품 여부를 알기 위해서뿐 아니라 현재 모임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는 김해 허씨 집안의 후손을 찾겠다는 뜻도 있다. 그는 "호는 하암(河巖), 자는 길원(吉元)인 전현감(前縣監)을 지낸 허응길(許應吉) 어른의 자손을 찾고 있다"면서 "그분의 자손을 찾아 선조의 모임을 제대로 잇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앞으로도 이 모임이 계속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하씨는 "선조들의 특별한 유언이 있어 이 모임을 계속하는 것이 아니라 대대로 아버지가 하는 것을 보고 자연스럽게 따라하게 됐다"면서 "현재 후손들은 사회생활이 바빠 참여하지 못하고 있지만 마음으로는 다 이 모임을 이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덧붙였다. 현재 "임계계회"의 회원들은 안동을 포함 영주, 봉화 등에 흩어져 살고 있다. 매년 문중별로 돌아가며 한 차례씩 모임을 갖고 우의를 다진다. 이날 "진품명품" 녹화에서 임계계회도는 1억5천만원의 가치가 있는 것으로 판정 받았다. sunglok@yna.co.kr (끝) <저 작 권 자(c)연 합 뉴 스. 무 단 전 재-재 배 포 금 지.>
지난 2005년 KBS 'TV쇼 진품명품'에서 1억 5천만 원의 감정가를 받아 화제가 된 한 장의 그림이 있다. 임자년(1552)과 계축년(1553년)생인 선비 11명이 환갑 즈음인 1613년의 모임을 기록한 <임계계회도>다. 오늘날 우리가 사진을 찍어 나눠 가지듯 400년 전의 사람들은 계회 장면을 참가 인원 수 만큼 그려 나눠 가졌던 것. 그렇다면, 나머지 후손들도 계회도를 소장하고 있을까? 제작진의 수소문 결과, 순흥 안씨, 진주 하씨, 영해 박씨, 안동 권씨 총 4문중에서 임계계회도를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과연, 4문중의 후손들이 소장하고 있는 계회도는 모두 똑같은 그림일까?
연락되지 않는 회원 ‘허응길’의 후손을 찾아라!
▲‘김해 허씨’ 허응길의 후손 ▲허응길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임란호국영남충의단’
4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매년 4월 10일 정기모임을 지속해 오고 있는 임계계회. 하지만 11개 문중 가운데, 유일하게 ‘김해 허씨’ 허응길의 후손들만 연락이 닿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김해 허씨 허응길’의 후손을 찾기 위해 제작진이 직접 나섰다. 단서는 오직 허응길이라는 이름과 1553년 계축생이라는 나이, 그리고 현감을 지냈다는 좌목의 정보가 전부. 과연 그의 후손을 찾을 수 있을까? 허응길의 단서를 추적하던 제작진은 대구 계명대학교 도서관에 소장 중인 1584년 문, 무과 시험 합격자 명단에서 계축년(1553년)생의 ‘허응길’의 기록을 확보할 수 있었다. 또한 대구 망우공원에 있는 ‘임란호국영남충의단’에서 망우당 곽재우와 함께 영남 의병으로 활동한 허응길의 기록도 추가로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런데, 모든 기록의 허응길은 모두 본이 다른 ‘하양 허씨’. 과연 하양 허씨 허응길은 우리가 찾는 인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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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년 역사와 전통의 기록 ‘임계계회도’
▲4장의 임계계회도▲임계계회도
지난 2005년 KBS 'TV쇼 진품명품'에서 1억 5천만 원의 감정가를 받아 화제가 된 한 장의 그림이 있다. 임자년(1552)과 계축년(1553년)생인 선비 11명이 환갑 즈음인 1613년의 모임을 기록한 <임계계회도>다. 오늘날 우리가 사진을 찍어 나눠 가지듯 400년 전의 사람들은 계회 장면을 참가 인원 수 만큼 그려 나눠 가졌던 것. 그렇다면, 나머지 후손들도 계회도를 소장하고 있을까? 제작진의 수소문 결과, 순흥 안씨, 진주 하씨, 영해 박씨, 안동 권씨 총 4문중에서 임계계회도를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과연, 4문중의 후손들이 소장하고 있는 계회도는 모두 똑같은 그림일까?
연락되지 않는 회원 ‘허응길’의 후손을 찾아라!
▲‘김해 허씨’ 허응길의 후손 ▲허응길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임란호국영남충의단’
4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매년 4월 10일 정기모임을 지속해 오고 있는 임계계회. 하지만 11개 문중 가운데, 유일하게 ‘김해 허씨’ 허응길의 후손들만 연락이 닿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김해 허씨 허응길’의 후손을 찾기 위해 제작진이 직접 나섰다. 단서는 오직 허응길이라는 이름과 1553년 계축생이라는 나이, 그리고 현감을 지냈다는 좌목의 정보가 전부. 과연 그의 후손을 찾을 수 있을까? 허응길의 단서를 추적하던 제작진은 대구 계명대학교 도서관에 소장 중인 1584년 문, 무과 시험 합격자 명단에서 계축년(1553년)생의 ‘허응길’의 기록을 확보할 수 있었다. 또한 대구 망우공원에 있는 ‘임란호국영남충의단’에서 망우당 곽재우와 함께 영남 의병으로 활동한 허응길의 기록도 추가로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런데, 모든 기록의 허응길은 모두 본이 다른 ‘하양 허씨’. 과연 하양 허씨 허응길은 우리가 찾는 인물일까?
첫댓글임계 계회에 대하여 소상히 올려주신글 잘 보았습니다.KBS에서 방영된 임계 계회의 끝부분을 잠시 보았는데 허응길 후손의 사람으로 대곡문중의 성열 형님께서 나오시던데 그점에 대해 의문점이 좀 생기는군요 그럼 우리 하양허씨가 김해허씨로 변관 했다가 다시 하양허씨로 보계변증을 했는게 사실임니까? 그렇다면 단종사화 때문이겠죠?...
첫댓글 임계 계회에 대하여 소상히 올려주신글 잘 보았습니다.KBS에서 방영된 임계 계회의 끝부분을 잠시 보았는데 허응길 후손의 사람으로 대곡문중의 성열 형님께서 나오시던데 그점에 대해 의문점이 좀 생기는군요 그럼 우리 하양허씨가 김해허씨로 변관 했다가 다시 하양허씨로 보계변증을 했는게 사실임니까? 그렇다면 단종사화 때문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