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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위기설이 심심찮게 들린다. 그럼에도 문학인을 기리는 문학관 은 늘고 있다. 이 시대가 문학에 거는 희망의 증거가 아닐 수 없다. 문 학관에서는 크든 작든 문단을 빛낸 작가들을 만날 수 있다. 장르별로도 다양하다. 지방자치단체의 투자규모에 따라 시설의 편차도 있다. 이처럼 전국적으로 산재한 문학관을 다 돌아보기는 쉽지 않다. 그 중에 서 많이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꼭 들러봐야 할 만한 문학관이 있다. 어 떠한 환경에서도 붓을 놓지 않은 작가혼이 살아있는 장場이다. 문학관 탐방을 마련한 것은 치열한 작가들의 문학정신을 배워 집필의 자세를 고쳐 잡고자 하는 데 있다 - 편집실 -
고통 속에 피운 꽃 정 은 영(수필가, 울산예총 사무처장)
『강아지 똥』 『몽실 언니』 의 작가 권정생 선생이 세상과 작별한 지 오는 5월이면 만 8년 이 된다. 그간 남은 자들이 문화재단을 만들었고 권정생문학관인 ‘동화나라’가 지난해 문을 열면서 그는 살아있을 때보다 더 스타가 되어가고 있다.
그가 종지기를 했던 안동시 일직면 조탑리 일직교회와 그의 오두막을 포함한 조탑 마을 일대가 근래 문학기행지로 부상하고있다. 작가의 생가生家가 아닌 ‘살던 집’이 유명세를 탄 것은 보기 드문 현상이다. 권정생 선생의 흔적을 찾아간 2월 끝자락 금요일은 푸석푸석 마른 바람이 온종 일 불었고 봄을 시샘하는 꽃샘추위가 심술을 부렸다.
울산에서 안동시 일직면 조탑리 까지는 경부고속도로와 중앙고속도로를 이용, 약 2시간 30여 분이 걸렸다. 내비게이션에 조탑리가 나오지 않아서 걱정이 됐지 만 남안동 톨게이트를 벗어나자마자 오른편으로 조탑리 방향 안내판이 눈에 들어 왔다. 톨게이트에서 그의 오두막으로 가는 길에는 권정생 선생 살던 집 500미터, 또 조금 더 가면 권정생 선생 살던 집 150미터를 알리는 안내판이 있다. 조탑 마을 경로당을 지나자 권정생 선생 살던 집 골목이 있다. 그러나 우선 그가 종지기를 하면서 『강아지 똥』 『몽실 언니』를 집필했던 일직교회부터 찾아갔다. 권정생 선생으로 유명해진 일직교회는 마을이 끝나는 곳에 있었다. 이 교회 이 창식 목사(55)는 2003년 6월 부임해 와서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약 3년 6개월 을 함께 지냈다고 했다.
권정생 선생은 교회에서 종지기를 할 때 아명인 경수 이름을 따서 경수 집사로 불리었다. 경수 집사는 틈틈이 어린이들을 모아 교회에서 동화를 가르치는 것을 가장 즐거워했다고 한다. 교회 뒷마당에는 그가 『강아지 똥』 『몽실 언니』를 썼던 토담방이 지금은 조립식 패널로 지어져 있다. 그가 종을 쳤던 종탑은 토담방 앞에 철 구조물로 세워져 있다. 그러나 이것은 권정생 선생이 쳤던 종탑이 아니다. 그때의 종탑은 교회 앞 도로가 확장된 곳에 있었다. 나무로 만들어졌고 규모도 지금의 것보다는 컸다. 방치된 종탑은 차임벨 도입과 함께 쓸모가 없어졌다. 그러나 어느 날 도로가 확장되면서 사라졌다. 현재의 종탑은 사라진 예전 종탑을 아쉬워하던 대구 모 유치원 원장이 7년 전 에 300만원을 내서 세운 것이다. 그 덕분에 문학기행을 온 사람들이나 어린이들 이 수시로 종을 쳐보는 종지기 체험을 하고 있다. 종탑 아래 나무로 만든 작은 게시판에는
「새벽 종소리는 가난하고 소외받고 아픈이가 듣고 벌레며 길가에 구르는 돌멩이도 듣는데 어떻게 따뜻한 손으로 칠 수 있어」 라고 쓰여져 있다.
교회 신도들이 한겨울에도 손이 튼 채 맨손으로 종을 치는 그를 보고 안쓰러워 서 장갑을 끼고 종을 치라고 하자 그가 했다는 말이다.
그의 청빈한 삶은 그가 떠나고 난 후 그의 흔적이 남은 일직교회, 살던 집, 문학 관 개관 등으로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그는 유언으로 “내 가고난 후 아무 흔적도 남기지 마라”고 했지만 지금 조탑리는 그의 흔적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일직교회 이창식 목사도 시인으로 등단해서 동화집을 포함해 네 권의 작품집을 냈다. 한참을 이야기 하다가 교회를 나오려는데 그가 「빌뱅이 언덕 꽃삼만데」 「동금 동산」이라는 작품집을 손에 쥐어준다. 이 목사는 권정생 선생이 살던 집을 둘러보고 갈 때 꼭 권정생 문학관인 동화나 라를 가보라며 약도까지 그려 주면서 신신당부를 했다. 다시 마을로 돌아왔다. 마 을 안길을 따라서 그가 세상에 나서 처음 가진 집, 처음 문패를 단 그가 살던 집을 찾아갔다. 그러나 집은 구불구불한 흙 담장 골목이 끝나도 나오지 않았다. 건다보니 산으로 이어지는 산책로가 나왔다. 산책로 옆에 헛간 같은 것이 보였다. 마을 끝 후미 진 곳에 상여를 보관하는 곳집이었다. 이 곳집 모서리를 돌아서자 권정생 선생 살 던 집 안내판과 함께 소박하기 이를 데 없는, 슬레이트지붕에 빨간 페인트를 칠한 오두막 한 채가 언덕아래 교회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사후 발간된 산문집 『빌뱅이 언덕』 서문에 보면 권정생 선생이 살았던 빌 뱅이 언덕아래 집은 산 꼭대기를 중심으로 공동묘지가 있어서 꽃을 단 상여가 많 이 드나들어 사람들이 꽃산만뎅이라고 했고 빌뱅이 언덕을 포함해서 그 산 이름 을 빌배산이라고 불렀다. 1983년 여름, 교회가 내려다보이는 이곳에 『몽실 언니』 계약금으로 토담을 두른 전체면적 8평의 두 칸짜리 집을 지었고 그해 가을에 이 사를 했다고 한다.
이 집은 집짓는 비용을 아끼기 위해 교회 마당에서 신도들과 틈나는 대로 흙벽 돌을 찍어서 지은 집이다. 돈을 아끼다보니 이 집은 마루가 없다. 그냥 마당에서 올라서면 댓돌이 있고 문을 열면 방이다. 동남 쪽 벽은 비바람에 허물어지지 않게 교회 지붕을 교체할 때 나온 양철지붕을 덧대놓았다. 마당 입구에 있는 변소는 벽 돌을 포개서 벽을 만들었고 지붕은 역시 양철판으로 덮어서 겨우 비를 피할 수 있 는 정도였다. 변소 문은 판자 쪼가리들을 생긴 대로 못질해서 만든 누더기 문이 다. 집 뒤는 그의 유골을 뿌린 빌뱅이 언덕이 있다. 한겨울 설한풍을 빌뱅이 언덕 이 그나마 막았을 것 같다. 방안 풍경이 궁금해졌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 모두 한결같았던가 보다. 한지가 발라진 방문이 누군가에 의해 찢겨져 있다. 그 틈새로 본 방안은 검소한 그의 삶 을 단번에 느낄 수 있게 소박했다. 방안에는 액자에 든 그의 사진이 원목탁지위에 놓여 있을 뿐 세간이 별로 없었다. 방안을 살피다 고개를 들면 문지방 위에 마분 지로 「권정생」이라는 문패가 빛바랜 채 붙어 있다. 마당에는 곧 쓰러질 것 같은 개집이 있고 수돗가 산수유가 주인이 있는지 없는 지도 모르고 해마다 봄이 오면 늘 그랬듯이 꽃을 피울 준비로 꽃대가 한껏 물이 올랐다. 마당 곳곳에는 그를 평생 괴롭혔던, 결핵에 좋다는 약재를 심었던 흔적으 로 네모지게 줄을 쳐 놓은 곳이 몇 군데 있다. 손바닥만 한 정구지 밭도 있다. 권 정생 선생이 살던 집 마당 끝 바위에 서면 언덕 아래로 흘러가는 조탑 거랑이 있 고 너른 조탑 들판이 가슴을 탁 트이게 한다.
그가 살던 집을 나와서 그의 문학관이 있는 ‘동화나라’로 향했다. 동화나라는 일 직교회에서 의성 방향으로 5킬로미터 쯤 떨어진 망호리에 있다. 일직남부초등학 교가 폐교된 것을 안동시와 권정생 어린이 문화재단에서 동화나라로 재탄생 시켰 다. 하지만 찾아가는 길이 쉽지 않았다. 설명을 들었는데도 가면서 몇 번을 물었 다. 아직은 내비게이션에도 등재되지 않아서 자주 묻는 것밖에 도리가 없다. 헤매다 겨우 찾아간 동화나라는 규모가 웅장했다. 1층 교실 일부를 문학관 전시 실로 만들었고 그의 도서들을 판매하는 서점이 있다. 전시실에는 책상으로 쓴, 칠 이 벗겨진 밥상이 있고 치료목적으로 사용됐던 핀셋 등이 소독약과 함께 있다. 아 직 2층은 개방하지 않았다. 동화나라에서는 그의 작품을 모두 만날 수 있다. 일직교회 이 목사는 그가 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 모두 실존 인물이라고 했다. 그의 대표작 『몽실 언니』 는 결핵을 앓으면서 매달 한 번씩 보건소에 약을 타러 갔다가 그곳에서 만난 아주 머니의 이야기라고 했다. 또 몽실이는 일직교회에서 권정생 선생의 동화지도를 받았던 실존인물이다. 「아기늑대 3형제」에 나오는 시내미골도 조탑 마을 골짝이 름이고 춘자 아주머니도 조탑 마을 사람이다. 그는 자기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면서 자연과 사랑을 노래했던 자연주의자였다. 권정생 선생은 죽기 전에 인세 등으로 모은 전 재산 12억 원 중 2억 원은 결핵환 자인 자기를 내치지 않고 보듬어준 마을 사람들에게 천만 원, 교회에 천만 원, 친 지들에게 천만 원 등으로 나눠주고 나머지 10억 원은 티벳과 북한 어린이들에게 나눠주도록 한 유언이 동화나라 전시실에 있다.
그는 일본에서 나서 청송으로 왔지만 가난 때문에 미싱 가게 점원, 군고구마장 사 등을 전전하다 18세가 되던 해에 안동시 일직면 조탑리로 와서 살았다. 그러나 22세 때인 1961년 결핵에 걸려서 외지로 돌다가 1966년부터 1982년까지 약 16년 간 일직교회 종지기로 살면서 그의 대표작들이 탄생되는 시기를 맞는다. 1969년 동화 『강아지 똥』으로 문단에 얼굴을 알린 그는 2007년 5월 일흔 한 살로 세상과 작별할 때 까지 140편의 단편동화, 5편의 장편 동화, 5편의 소년소설, 100편이 넘 는 동시와 동요, 140여 편에 이르는 산문을 남겼다고 한다. 대충 앞에서 들먹인 그의 이력은 인터넷이나 백과사전을 펼치면 그냥 알 수 있는 내용들이다. 그러나 그가 살던 곳에서 느끼는 그의 흔적들은 언 땅을 비집고 올라오는 보리싹처럼 싱 그럽고 상큼하다. 평생 결핵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그는 빼빼마른 모습이었지만 늘 웃음을 잃지 않았으며 사람이 너무 착해서 마을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그는 주일학교 교사로 창작동화 구연하는 것을 큰 즐거움으로 알았다고 한다. 나서 처음으로 얻은 직업인 교회 종지기 일이 없어지면서 그는 작품 활동에 매진, 주옥같은 작품을 많이 남겼다. 한번쯤 찾아가볼만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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