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균 칼럼] 民家 포격과 우라늄탄, 가면 벗은 北
입력 : 2010.11.23 23:11
- ▲ 김창균 정치부장
대낮에 보란 듯이 연평도 포격 美 과학자 불러 核 위기 선포
北, 민얼굴로 거침없는 도발 南, 흉악범과 맞설 각오 섰나
북이 연평도에 해안포를 쏜 것은 전쟁 행위다. 연평도 중심가에 해당하는 면사무소 주변지역에 수십발의 포탄이 떨어졌다. 민간인 살상(殺傷)을 노렸거나 민간인 살상도 무릅쓴 무력공세다. 6·25 전쟁 상황이 재현된 것이다. 북은 한반도 시계를 60년 전으로 되돌리려는 것일까. 1953년 정전협정을 파기하고 한반도를 전시(戰時)로 몰아가려는 것일까.
북은 이달 초 방북한 미국 과학자에게 우라늄 농축용 원심 분리기를 공개했다. "원심 분리기 2000개를 갖고 있다"는 설명을 덧붙이기도 했다. 우라늄탄을 만들 수 있는 원심 분리기 제조는 북이 그동안 국제사회와 맺어온 핵(核) 합의를 휴지조각으로 만든 것이다.
북은 이제 성가신 가면(假面)을 벗어버리기로 한 듯하다. 남(南)을 향해, 국제사회를 향해 거침없이 도발행위를 하고 있다.
북은 지난 3월 26일 야음(夜陰)을 틈타 서해안 바다로 침투해 천안함에 어뢰를 쐈다. 북은 이번엔 백주(白晝)에 육상을 향해 대포를 쐈다. 천안함 때는 "남(南)의 자작극"이라며 혐의를 부인했지만, 연평도 포격은 두 차례에 걸쳐 과시하듯 이뤄졌다.
1·2차 북핵 위기는 미국이 북이 숨겨둔 핵 시설을 공개함으로써 불거졌다. 이번 3차 위기는 북이 스스로 자신의 핵시설을 공개함으로써 시동이 걸리고 있다. 북은 예전엔 자신들의 비핵화(非核化) 의지는 확고하다고 변명을 늘어놓았지만, 북은 이제 "미국의 대북 적대정책이 바뀌지 않는 한 비핵화는 없다"고 말하고 있다.
좌파(左派)들의 주장처럼 이명박 대통령과 오바마 미 대통령이 북한과 대화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북이 포악해진 것일까. 햇볕 정권이 재창출됐다면 북은 한반도 평화의 궤도로 나아가고 있을까.
북한에서 군사과학분야 고위직을 지낸 탈북자는 "북한이 우라늄 농축을 위한 원심분리기 제작에 착수한 것은 2000년 초였다"고 증언한다. 북은 이 무렵 파키스탄으로부터 고농축 우라늄 제조 설계도를 입수해 원자력 총국의 지휘 아래 과학원 공학연구소 등 과학자들을 총동원해 작업을 진행했다고 한다.
2000년 초는 남북 특사들이 정상회담을 사전 조율하던 시점이다. 박지원 당시 문화부장관과 북측 송호경 아태평화위 부위원장은 3월 17일 상하이, 22일 베이징, 4월 8일 베이징 등 세 차례 중국에서 접촉했다. 4월 10일 남북은 동시에 6월 정상회담 개최 사실을 발표했다. 북은 대화 일꾼을 앞세워 평화 공세를 펴면서, 뒤편에선 과학 일꾼들에게 새 흉기를 준비시켰던 것이다.
북이 이후 우라늄 농축에 성공한 시기는 2007년 말 정도였을 것이라고 우리측 전문가들은 추측하고 있다. 2007년 9월 6자회담에서 북핵 불능화 합의가 이뤄졌고, 북은 그 합의 정신에 따라 2008년 6월 전 세계가 생중계하는 가운데 영변 원자로의 냉각탑 폭파 쇼를 벌였다. "영변 원자로를 폐기처분키로 결정한 것은 그것을 대체할 우라늄탄 개발에 어느 정도 자신을 갖게 됐기 때문일 것"이라는 게 통일연구원 연구위원의 분석이다.
2007년 10월 3·4일 평양에선 2차 남북정상회담이 열렸다. 정상회담 합의문에는 '한반도 핵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 합의가 순조롭게 이행되도록 공동노력한다'고 돼 있다. 이런 합의문을 쓰고 있을 때 북한 과학자들은 우라늄 농축 성공을 자축하는 샴페인을 터뜨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돌이켜 보면 북의 우라늄탄 개발은 김대중·김정일 1차 정상회담 무렵부터 시작됐으며, 노무현·김정일 2차 정상회담 무렵에 완성단계에 이르렀다는 얘기가 된다.
만일 진보 좌파가 15년째 정권을 이어갔다면 북(北)은 은닉과 기동이 용이한 우라늄탄 개발 사실을 숨긴 채 남측으로부터 단물을 계속 빨아 먹고 있었을 것이다. 안주머니 속에 우라늄탄이라는 흉기를 감춘 채 미국 인공위성에 노출되는 플루토늄탄 제조시설은 동결해 놓고 거짓 평화공세를 계속해 나갔을 것이다. 이명박-오바마 행정부의 대북 정책은 북한 정권의 진실을 앞당겨 드러내게 만든 것이다.
이제 우리는 민얼굴의 북을 마주하고 있다. 평화의 가면을 벗어던진 북이 앞으로 어떤 일을 벌일지는 누구도 짐작할 수 없다. 이명박 정부는 자기 정체가 드러난 흉악범과 맞설 각오를 해야 한다.
‘타닥~’ 포성 … 불타는 마을 보곤 “전쟁” 판단, 출항허가도 없이 …
[중앙일보] 입력 2010.11.24 01:11 / 수정 2010.11.24 02:35출항허가도 없이 주민 27명과 배로 섬 탈출
인천으로 긴급대피한 어부 윤희중씨
인천 연안부두에 내린 윤희중(48·사진)씨는 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전쟁터를 벗어났다”고 했다. 23일 밤 8시40분쯤이었다.
꽃게잡이 선원인 그는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생사를 가늠하지 못했다.
이날 오후 2시40분쯤이었다. 이웃집 할머니·할아버지 등 4명을 자신의 카니발 승합차에 태우고 연평도 여객선 터미널로 가고 있었다. 집에서 터미널까지는 10여 분 거리여서 윤씨는 평소 이웃들에게 이 같은 봉사활동을 마다하지 않았다.
출발한 지 5분여쯤 지났을까. 밖에서 ‘타닥~’ 소리가 났다. 분명 총성이나 포성소리였다. 그런데 이상했다. 평소 ‘꽝’하고 났던 우리 해군 포성소리가 아니었다. 그래서 북한군이 사격을 하는 줄로 알았다. 이웃들을 부두에 데려다 줄 때까지 ‘타닥~’ 소리는 계속됐고 뭔가 불안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오후 3시, 선장 집에 도착해 보니 김장을 돕던 선원 가족 10여 명이 넋이 나간 듯 마당에서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윤씨는 소리를 질렀다.
“이렇게 있으면 어떡해. 빨리 피해야지. 전쟁이다 전쟁이야.” 그들은 바로 옆 농협 마당 대피소로 몸을 피했다. 거기에는 100여 명의 주민들이 대피해 있었는데 모두가 불안에 떨고 있었다. 내부엔 전깃불도 없어 깜깜했다. 누군가 말했다. “북한이 공격을 한 것 아냐.” 그러자 바로 옆 누군가는 한 수 더 떴다. “북한군이 쳐들어오는 것 같은데.”
그렇게 윤씨는 100여 명과 어둠 속에서 불안에 떨었다. 이러다가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후 4시40분쯤, 선주가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이렇게 죽을 수는 없다. 인천으로 가자.”
그러나 무작정 밖으로 나온다는 것은 분명 목숨을 걸어야 했다. 언제 포격이 계속될지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윤씨 가족과 선장이 밖으로 나서자 주민들이 뒤따랐다. 모두 28명이나 됐다. 선장은 자신의 꽃게잡이 어선 신복호를 운항하기로 하고 통제소에 전화를 했다. 그러나 통제소는 출항 시간이 늦어 허가할 수 없다고 했다. 또 북한 포 사격으로 운항이 위험하다는 경고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선장과 윤씨 등은 무시하기로 했다. 자신들의 목숨이 더 소중했다.
오후 4시30분. 윤씨는 가족 등 27명과 함께 출항했다. 그는 선장에게 최고의 속력을 내라고 주문했다. 그리고 4시간에 걸친 항해 끝에 인천항에 도착했다. 평소 같으면 6시간이 걸렸을 항해였다. 인천 부두에 내린 윤씨가 기자에게 말했다. “정말 긴 하루였습니다. 어떻게 살아왔는지 모르겠소.”
그리고 그가 한마디 더했다. “북한 괘씸한 놈들….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한다.
사건·사고
- 전사한 서정우 병장·문광욱 이병 ‘안타까운 사연’
입력 : 2010-11-23 23:05:17ㅣ수정 : 2010-11-24 00:20:14
ㆍ“오늘부터 말년휴가, 배야 꼭 떠라 기도했는데…”
ㆍ서 병장 미니홈피에 글 남겨… 네티즌 19만여명 방문 애도
ㆍ“어제도 어머니에 안부전화” 문 이병 가족들 망연자실
북한의 연평도 포격으로 23일 전사한 서정우 병장(22)은 이날부터 ‘말년 휴가’였던 것으로 알려져 주위를 더욱 안타깝게 했다. 동국대 법학과 재학 중 입대한 그는 지난 3일 싸이월드 미니홈피 초기화면에 쓴 ‘배야 꼭 떠라, 휴가 좀 나가자’라는 글에서 “3주만 버티다가 13박14일 말년 휴가 나가자”며 휴가를 손꼽아 기다렸다. 서 병장은 22일 밤에 쓴 글에서도 “내일(23일) 날씨가 안 좋다는데, 꼭 배가 뜨기를 기도한다”고 적었다.
故 서정우 병장(왼쪽)·故 문광욱 이병
서 병장의 후배로 추정되는 한 청년은 그의 홈페이지에 “형 왜 전화 안 받아? 오늘 휴가나온 거 맞잖아. 동명이인이잖아. 사람들이 왜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어, 안 죽은 사람한테. 나 이렇게 울고 있는 거 처음이야. 그니까 전화 받아”라고 적어 네티즌의 마음을 울렸다. 아들이 해병이라고 밝힌 홍성욱씨는 “며칠만 기다렸으면 그리워하던 사회인이 됐을 텐데 안타깝다”며 “다툼 없고 평화로운 곳에서 태어날 거다. 이런 나라 만든 우리 또래를 대표해서 진심으로 사과한다”고 방명록에 적었다. 서 병장의 홈페이지에는 이날 자정 방문자가 19만8000명을 넘어섰으며 접속자 폭주로 한때 접속이 제한되기도 했다.
“아들아…” 북한의 공격으로 전사한 서정우 병장 가족들이 23일 밤 시신이 안치된 경기 성남 국군수도병원으로 들어가고 있다. | 연합뉴스
서 병장 부모가 사는 광주 남구 진월동 ㄷ아파트 집은 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
서 병장의 전사 소식을 접한 이웃 주민들은 좋은 청년 한 명이 희생됐다며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김모씨(57)는 “부모들이 오후에 급히 어디론가 떠나는 모습을 봤다”면서 “하도 급히 떠나 사연을 물어볼 수 없었다”고 말했다. 친구 김모씨는 “아니길 바랐는데, 매일 전화했었는데, 이제는 못하는 거냐. 좋은 곳으로 가기를 항상 기도할게”라고 말했다.
이날 함께 숨진 문광욱 이병(20)의 본가가 있는 전북 군산시 수송동의 ㅅ아파트에서도 가족들의 비통한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문 이병의 집에는 비보를 듣고 급히 귀가한 아버지 영조씨(47)와 어머니, 여동생, 큰아버지 영구씨(57) 등이 모여 차마 믿기지 않은 소식에 넋을 잃고 있었다.
전사한 문 이병이 지난 9월7일 ‘해병대 신병 1124기 소대별 사진’이라는 제목으로 훈련병 시절 사진을 올리자 아버지 영조씨는 “문광욱 울(우리) 아들 든든하고 멋지다. 멋진 해병이 되기까지 파이팅…”이란 댓글을 달기도 했다. 12일 뒤인 9월19일에는 같은 사진 밑에 “4주차가 끝났는데 어떻게 변해 있을까. 구릿빛 얼굴에 눈빛은 강렬하게 빛이 나겠지. 잘 버텨다오 문광욱. 힘내라. 파이팅”이라고 부성애를 나타냈을 정도로 해병 아들을 자랑스러워했다 .
문 이병의 큰아버지 영구씨는 “어제 광욱이가 엄마에게 전화해 편하게 잘 있다고 걱정 말라고 했는데. 그 전화가 마지막이 될 줄이야…”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군장대학교 1학년에 다니다 지난 8월 해병대에 입대한 문 이병은 최근 연평도로 배치됐다. 문 이병은 입대 3개월여 만에 연평도 포격전에서 희생되고 말았다. 영구씨는 “서둘러 군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며 1학기를 마치고 곧바로 군에 지원했다”면서 “몇 시간 전에 군으로부터 조카가 사망했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는데 아직도 광욱이가 살아 있는 것 같아 믿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사상자가 옮겨진 경기 성남의 국군수도병원에는 전국에서 사상자 가족들이 모여들었다. 이날 국군수도병원에는 부상을 입은 병사 15명과 전사한 병사 2명의 시신이 도착했다. 부상자 명단이 나오기 전까지 병원 정문에는 연평도에서 군 생활을 하는 장병 가족들이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리기도 했다.
이날 오후 소식을 접한 가족들은 침통한 표정으로 병원에 들어섰다. 중상을 당한 최주호 병장의 고모 최모씨는 “부산에서 올라오는 부모를 기다리고 있다. 제대를 한 달 앞두고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며 병원 문 앞에 주저앉았다.
- 전사한 서정우 병장·문광욱 이병 ‘안타까운 사연’
ㆍ서 병장 미니홈피에 글 남겨… 네티즌 19만여명 방문 애도
ㆍ“어제도 어머니에 안부전화” 문 이병 가족들 망연자실
북한의 연평도 포격으로 23일 전사한 서정우 병장(22)은 이날부터 ‘말년 휴가’였던 것으로 알려져 주위를 더욱 안타깝게 했다. 동국대 법학과 재학 중 입대한 그는 지난 3일 싸이월드 미니홈피 초기화면에 쓴 ‘배야 꼭 떠라, 휴가 좀 나가자’라는 글에서 “3주만 버티다가 13박14일 말년 휴가 나가자”며 휴가를 손꼽아 기다렸다. 서 병장은 22일 밤에 쓴 글에서도 “내일(23일) 날씨가 안 좋다는데, 꼭 배가 뜨기를 기도한다”고 적었다.
故 서정우 병장(왼쪽)·故 문광욱 이병
“아들아…” 북한의 공격으로 전사한 서정우 병장 가족들이 23일 밤 시신이 안치된 경기 성남 국군수도병원으로 들어가고 있다. | 연합뉴스
서 병장의 전사 소식을 접한 이웃 주민들은 좋은 청년 한 명이 희생됐다며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김모씨(57)는 “부모들이 오후에 급히 어디론가 떠나는 모습을 봤다”면서 “하도 급히 떠나 사연을 물어볼 수 없었다”고 말했다. 친구 김모씨는 “아니길 바랐는데, 매일 전화했었는데, 이제는 못하는 거냐. 좋은 곳으로 가기를 항상 기도할게”라고 말했다.
이날 함께 숨진 문광욱 이병(20)의 본가가 있는 전북 군산시 수송동의 ㅅ아파트에서도 가족들의 비통한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문 이병의 집에는 비보를 듣고 급히 귀가한 아버지 영조씨(47)와 어머니, 여동생, 큰아버지 영구씨(57) 등이 모여 차마 믿기지 않은 소식에 넋을 잃고 있었다.
전사한 문 이병이 지난 9월7일 ‘해병대 신병 1124기 소대별 사진’이라는 제목으로 훈련병 시절 사진을 올리자 아버지 영조씨는 “문광욱 울(우리) 아들 든든하고 멋지다. 멋진 해병이 되기까지 파이팅…”이란 댓글을 달기도 했다. 12일 뒤인 9월19일에는 같은 사진 밑에 “4주차가 끝났는데 어떻게 변해 있을까. 구릿빛 얼굴에 눈빛은 강렬하게 빛이 나겠지. 잘 버텨다오 문광욱. 힘내라. 파이팅”이라고 부성애를 나타냈을 정도로 해병 아들을 자랑스러워했다 .
문 이병의 큰아버지 영구씨는 “어제 광욱이가 엄마에게 전화해 편하게 잘 있다고 걱정 말라고 했는데. 그 전화가 마지막이 될 줄이야…”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군장대학교 1학년에 다니다 지난 8월 해병대에 입대한 문 이병은 최근 연평도로 배치됐다. 문 이병은 입대 3개월여 만에 연평도 포격전에서 희생되고 말았다. 영구씨는 “서둘러 군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며 1학기를 마치고 곧바로 군에 지원했다”면서 “몇 시간 전에 군으로부터 조카가 사망했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는데 아직도 광욱이가 살아 있는 것 같아 믿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사상자가 옮겨진 경기 성남의 국군수도병원에는 전국에서 사상자 가족들이 모여들었다. 이날 국군수도병원에는 부상을 입은 병사 15명과 전사한 병사 2명의 시신이 도착했다. 부상자 명단이 나오기 전까지 병원 정문에는 연평도에서 군 생활을 하는 장병 가족들이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리기도 했다.
이날 오후 소식을 접한 가족들은 침통한 표정으로 병원에 들어섰다. 중상을 당한 최주호 병장의 고모 최모씨는 “부산에서 올라오는 부모를 기다리고 있다. 제대를 한 달 앞두고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며 병원 문 앞에 주저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