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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도서관이었다. 러시아풍의 회색의 건물이었는데 홀에 들어서면 한여름에도 시원했다. 에어컨은 아예 필요하질 않았다. 아주 가끔 삼복 철이면 선풍기를 틀기도 했는데 그것도 해가 중천에서 지글대고 있는 정오 한나절뿐이었다. 라온은 그 도서관에서 책도 읽고, 글도 쓰길 좋아했다. 아름드리나무들에 가린 창은 한낮에도 햇볕이 잘 들지 않았고, 도서관 안 어디선가 고서나 오래된 신문 따위를 갉아대는 좀벌레의 아슴아슴한 소리가 들려오듯 했다.
라온은 시집을 한 권 낸 적 있는 시인이기도 했지만 시가 밥을 먹여줄 수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된 뒤로는 곧바로 방송국 기자로 취직을 했다. 그리고 딱 일요일 반나절만이라도 도서관의 낡은 책상 앞에 앉아 이제는 잘 쓰이질 않는 시를 꿈꿨다. 라온은 오늘도 나무그늘이 무섭게 드리운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가방에서 두터운 스프링노트를 꺼내고 몽블랑볼펜을 꺼냈다. 칠이 희치희치 벗겨졌음에도 아직 무늬가 선명한 커다란 나무책상에 그것들을 차례로 내려놓으면서 그는 잠시 이 자리에 머물렀던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가서 뭘 하면서 사는 걸까? 그는 숨을 크게 들이쉬면서 묵직한 세월의 무게를 받아들인다. 숨 막힐 듯한 그 무게가 가슴을 지지누를 즘에 그는 숨을 조금씩, 조금씩 내쉬면서 빠른 속도로 뭔가를 스프링노트에 적는다.
우리는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가는가?
적고나서 다시 읽어보니 어느 시집인지 철학서인지에서 따온 구절 같다. 그럼에도 쉽게 그 페이지를 찢어버리질 못한다. 그는 멍하니 그 구절을 내려다본다.
우리는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가는가?
내리꽂히는 일광등의 불빛에 눈이 아프다.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아서 라온은 바삐 두 눈을 슴벅인다. 눈물이 핑 돌 것만 같다. 딱딱히 굳어졌던 마음이 말랑말랑해진다. 이제 시를 쓸 준비가 다 되었다는 걸 그는 직감적으로 안다. 그가 급히 볼펜을 찾아들었다. 그 순간, 너무 급하게 쥐는 바람에 볼펜이 쑥 미끌면서 책상 밑으로 빠져들었다. 어, 그가 저도 몰래 지른 작은 비명에 건너편에 앉아 공부를 하고 있던 안경을 건 여학생이 목을 돌려 그쪽을 본다. 그는 재빨리 몸을 아래로 숙이고 필을 찾는 척 한다. 아니, 필을 줍는다. 떨어졌으면 당연한 일인데 그 순간에 왜 자신이 찾는 척 몸을 숙여야했는지…… 그런 자신이 우스우면서도 슬퍼진다. 책상 밑 저편으로 굴러간 볼펜을 겨우 끄당겨 잡고 몸을 일으키려던 찰나, 그는 책상 밑 천장에서 뭔가를 발견한다. 뭐지? 싶었는데 누런 봉투가 거기 있었다. 누런 유리테이프로 잘 붙여져 있었는데 왠지 께름칙한 생각이 들어 곧바로 거기로 손을 내미는 대신에 그는 쓱 몸을 일으켜 주변을 다시 한 번 확인해보았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커다란 도서관 안은 거의 비어있다. 아까 여학생 외에 남학생 두 명이 저쪽 편 창가 쪽으로 자리 잡고 있었고, 그의 뒤편엔 나이 들어 보이는 노인 한 분이 신문을 보고 있었다. 그는 바다 밑 속으로 입수하는 해녀마냥 크게 숨을 몰아쉰 채 다시 책상 밑으로 몸을 도사렸다. 왠지 모를 스릴이 느껴졌다. 영화에서 보는 첩보원마냥 민첩하게 그의 손이 움직였다. 봉투를 잡아당기니 테이프가 아무런 맥도 못 추고 스르륵 떨어졌다. 너무 쉽게 떨어지는 바람에 오히려 당황해진 그는 봉투를 무릎 위에 놓고 한참 이모저모 살펴보았다. 쉽게 볼 수 있는 누런 편지봉투에는 아무런 글자도 적혀있질 않았다. 그는 조심스럽게 봉투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다시 앞뒤를 꼼꼼히 살펴보아도 아무런 글자가 없다. 그는 손가락으로 봉투의 입구를 벌려본다. 봉투는 밀봉되어 있거나 그렇지도 않았다.
누가. 여기에. 이런 봉투를 남겼지? 왜?
그는 짜릿한 스릴을 느끼면서 봉투 안 내용물을 꺼낸다. 얇은 선지였다. 그가 보기에도 최상품의 선지였다. 잠자리 날개 같은 선지를 조심스럽게 책상 위에 펼친다. 그의 눈으로 빼곡한 희미해진 글자들이 들어왔다. 편지 같았다.
인연이 되는 이가 이 글을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맨 위쪽에 그런 구절이 적혀있었다. 꼭꼭 눌러쓴 단아한 글씨체였다.
그리고 아래로 좀은 큰 글자로 「위대한 역설」이란 글자가 적혀있었다. 위대한 역설이라…… 시 같았다. 그는 아래의 구절들을 거침없이 읽어 내려갔다.
사람들은 종종 변덕스럽고 불합리하며
자기중심적이다.
그럼에도 그들을 용서하라.
네가 친절을 베풀면
이기적이거나 무슨 저의가 있을 거라고 탓할지 모른다.
그럼에도 친절하라.
네가 정직하고 솔직하면
사람들이 널 속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정직하고 솔직하라.
네가 오랫동안 쌓아올린 것을
누군가 하루밤새 무너뜨릴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것을 쌓아라.
네가 평온과 행복을 얻으면
그들은 시샘할지 모른다.
그럼에도 행복하라.
네가 오늘 한 선행을
사람들은 내일 잊어버릴 것이다.
그럼에도 선을 행하라.
네가 가진 최고의 것을 세상에 줘도
충분하지 않다고 할 것이다.
그럼에도 네 최고의 것을 세상에 주어라.
이런 시였다. 밑에 역시 작은 글씨로 켄트 M. 키스라는 서명이 적혀있었다. 처음 듣는 시인의 이름이었다. 그는 시인도 시인이지만 이런 시를 남겨놓은 봉투의 주인이 더욱 궁금해진다.
대체 누구지? 대체 왜?
그는 두 번째 페이지를 넘긴다.
당신이 지금 이 편지를 펼쳐놓고 읽고 있다면 그런 생각 먼저 하시고 있겠죠. 누가, 대체 왜서?
일단은 나 자신을 먼저 소개를 해야겠지요. 내 이름은 소담이라고 해요. 지금 이 책상 앞에서 내가 이 글을 적고 있는 때는 1989년. 늦가을이고 창밖에 내다보이는 오동나뭇잎들이 다 말라 비틀어져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우수수 손바닥만 한 나뭇잎들이 날려 떨어지군 하네요. 당신이 지금 읽고 있는 때는 대체 몇 년도일까요? 10년 뒤? 아니면 20년 뒤? 그렇다고 내가 없는 그 세상이 궁금해진 건 아니에요. 내 나이 스물아홉.
여기서 라온이 중얼거린다. 묘하게 나도 스물아홉인데. 그는 머리를 갸웃 둥하고 깨알 같은 글자들을 계속 읽어 내려간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스물아홉보다는 나이가 많았으면 좋겠어요. 어쩌면 이 삶을 달관한 그런 안목이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어쩌면 내가 복이 있어서 그런 사람을 만날 수가 있었다면 이런 글을 이렇게 남기지는 않았겠지만.
아무려면 어때요. 이제 다 상관없는 일인걸. 내가 없는 세상에서 누가 보든 말든……
그렇지만 먼 훗날이래도 한사람만은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나의 진실한 존재를. 내가 가장 힘든 때 “위대한 역설”을 만났어요. 영어로 만났지만 나는 한눈에 알아봤죠. 내가 여태껏 살면서 찾는 것이었다는 걸. 내 삶 역시도 위대하길 바랬던 걸까요? 그런 욕심이 있었는지도 모르겠어요. 누구라도 자신이 성장하고 또한 위대해지기를 바라지 않을까? 그렇게 자신을 위안도 해 봅니다. 사람들 안에서 나는 평범함을 거부했던 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결국 이 자리에까지 왔는지도.
오늘이 내 생애 마지막 날이에요. 며칠 전에는 「내 생애의 마지막 날들」그런 책을 쓸까, 잠깐 생각해본 적도 있었죠. 내가 믿었던 것들을 변치 않고 실천할 수가 있는 유일한 방법이 사라짐이에요. 무로의 귀환, 만약에 내생이 있다고 해도 나는 다시는 사람으로도 동물로도 식물로도 태어나고 싶지 않아요. 나는 조금씩 허물어지고 변화하는 자신을 봐줄 수도 그대로 놓아둘 수도 없어요. 그것을 용납할 수가 없다는 걸 스스로 너무나 잘 알죠. 누군가가 나를 나에게서 해방시켜줄 수도 없다는 것도 너무 잘 알고 있고.
나는 실패했어요. 당신도 이 시의 매력을 느끼나요? 지금 당신은 어떻게 살고 있나요?
라온의 눈길은 “지금 당신은 어떻게 살고 있나요?”에 머물러 있다.
그는 다시 한 번 그 구절을 혀 아래 소리로 읽어본다.
당신은 어떻게 살고 있나요?
라온은 등줄기가 싸늘해짐을 느낀다. 귀신방망이에 한대 얻어맞은 듯 정신이 멍멍해진다. 라온은 그냥 무시하고 지나쳐버릴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래, 나는 도대체 어떻게 살고 있는 건가? 나는.
나는 적당히 세상과 타협해서 사는 법을 읽혔어. 나는 물질적인 것을 똥 보듯 했지만 그것 없이는 못산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것을, 그것도 빠른 시일 내로 얻어야겠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지금 하고 있는 일도 가능하다면 돈을 얻을 수 있는 일로 빨리 교체해야 한다는 걸 알아. 그리고 그렇게 할려고 나름 노력하는 중이고…… 서서히 시 따위는 잊혀져갈 거고 어느 날 내 마음까지도 삭막해질 거라는 것도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실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라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어. 나는 딱 10년, 서른아홉까지만 일을 할 거야. 그리고 내 영혼을 구제해야겠지……
라온은 의미심장하게 머리를 끄덕이고는 손가락으로 다음 장을 펼친다.
나는 완벽한 인격이, 아니죠. 궁극의 정신이 가능하다고 믿었어요.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이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 같은 것 말이에요. 그래서 한 선택이었어요. 나는 유명대학의 철학교수이면서 또 하나의 신분이 있었죠. 기공대사. 사람들은 그렇게 나를 불렀어요. 우주와의 합일, 나는 그것을 사람들과 나눴죠. 그 안에서 나는 종교였고, 우주였으며, 따르는 자들의 꿈이자 희망이었어요. 내가 그런 나 자신의 모습을 보기 전까지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고 그 안에서 나는 그 모든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죠. 나뿐 아니라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 들였구요. 내가 그 모든 것을 알아챘을 때는 이미 내려갈려야 내려갈 수 없는 그런 자리에 와있어 버린 거예요. 나 자신만이 알아챘죠. 이건 아니야. 허지만 내게는 이미 아니라고 소리칠만한 용기가 눈곱만큼도 남아있질 않았어요. 내가 소리쳤다고 해서 믿어줄 사람이 있을까? 갑자기 이 순간, 그런 의심도 드네요.
결국 나는 가장 소심하고 비겁한 방범을 생각해냈어요. 사라짐. 신선이 되어 선계로 사라져갈 수만 있다면 좋겠지만 나는 자신을 더 큰 환상에 놔두질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어요. 내게는 죽음이었어요. 그럼에도 이 길을 끝까지 걸어간 누군가가 내 손을 잡아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어요. 내가 사라지고 난 뒤에라도 말이에요. 혹여, 당신은 그 궁극의 길을 탐구할 준비가 되어있나요? 당신은 보이질 않는 이 기(气)에 대해 흥미를 느끼나요? 단언컨대, 이 글을 읽고 난 당신은 여기서 벗어나기 힘들 거예요. 도망치고 싶기도 하겠지만 결국은 이 길을 가게 될 거예요. 당신이 시인이든 아니든, 돈이 많던 아니던, 행복하다고 여기고 있든 그렇지 않던…… 당신은 이것이 당신의 운명이라고 받아들이게 될 거예요.
당신은 나예요. 내가 당신이기도 했듯이.
라온은 여기서 끔쩍 놀란다. 뒤통수에서 싸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조심스럽게 뒤돌아보지만 아무도 없다. 아까 신문을 읽고 있던 노인네도 언제 나간 건지 보이지 않는다. 그는 얄따란 선지를 손안에 움켜쥔다. 모조리 없애버리고 싶은 충동이 그를 핥고 지나간다. 그럼에도 그는 안다. 다시는 이 글을 마주하질 않았을 때의 자신으로 되돌아갈 수가 없다는 것을.
다시 손바닥으로 움켜쥐었던 편지를 편다. 오래된 선지에서 솜털이 포시시 일어선다. 다시 읽고 있던 구절을 찾아 읽어 내려가기 시작한다.
당신은 나예요. 내가 당신이기도 했듯이.
당신은 자신에게서 가장 소중한 그 무엇을 아직도 간직하고 싶어 해요. 허지만 세상 속에서 살다보면 언젠가는 그것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위험도 알고 있어요. 맞죠? 그것이 당신으로 하여금 이 편지를 찢어버리지 않고 계속 읽도록 한 힘이죠. 당신은 그것을 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얻기 위해서 가끔은 오래도록 하기 싫은 그것과는 위배되는 일도 할 거예요. 그럼에도 버틸 수 있는 힘이 무엇인지를, 정확히는 이름 할 수가 없지만 알고 있어요. 그렇죠?! 나도 그랬어요. 그래서 버틸 수가 있었죠. 허지만 그 끝에 낭떠러지라는 걸 당시에는 몰랐었죠. 그다음부터는 아무도 걷지 않은 보이질 않는 길이 분명 있을 텐데…… 솔직히 있을까? 그런 의심이 생겨난 뒤라…… 나는 여기서 내 탐구를 멈춥니다. 탐구를 멈추는 순간, 내가 왔던 길들도 풍경들도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어졌어요. 당신이라면, 여기에서 멈추질 않을 수도 있어요. 내가, 내 허무한 죽음으로 그 발판을 만들 거니까요. 확신하건대, 당신은 절대로 내가 온 이 길을 그대로 걷지 않을 거니까요. 내가 죽음을 택하기 전, 어느 길어귀에서 머뭇거렸던 길어귀에서 당신은 정확하게 그 길을 찾아낼 수가 있을 거예요. 그 길을 찾아주세요. 그리고 머뭇거리지 말고 걸어가주세요. 부탁입니다. 제 부질없던 생에 의미를 부여해주세요.
왼쪽 모서리에 1989년 11월 14일이란 글자가 남겨져 있었다. 라온은 볼펜을 들어 노트에 꾹꾹 박아 적는다.
1989년.
꼬박 28년 전이다.
그는 다시 1989년이라고 적힌 아래로 28년 전, 이라고 적어 넣는다.
그리고 1989년은 라온이 태어난 해였다.
라온은 자신과도 갈라놓을 수가 없는 이 특별한 해인 1989년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편지의 주인의 이름이 소담이라고 했다. 그는 노트에 소담이란 이름을 적어놓고 나서 노트를 닫았다. 그러고 난 뒤 그의 행동이 빨라졌다. 라온은 책상 위에 널어놓은 모든 것을 정리해 차곡차곡 가방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 도서관에서 나오니 나무그늘에 가렸던 햇살이 쨍쨍하니 그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그는 사막에서 비를 맞듯이 잠시 가을햇살 아래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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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담에 관한 자료는 의외로 많았다. 도서관에서 나와 찾은 곳은 게임을 즐기기 위해 가끔 들렸던 PC방이었다. 검색창에 “대학교수 소담 자살”이란 단어들을 입력하자 소담에 관한 자료들이 주르르 나왔다. 그중 하나를 클릭하고 들어간다.
기공사 소담 투신자살을 한 원인을 밝혀내려고 경찰에서는…… 사이비종교 논란이 그 원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사이비종교?
그 뒤에는 별로 도움이 될 만한 정보가 없다. 되돌아가기를 누르고 다른 뉴스 하나를 클릭한다.
「소담은 종교였나?」 그런 제목이었다.
이번 뉴스에서 그는 흥미로운 정보 하나를 건져낸다.
연서대학 교수이기도 한 소담은 어린 시절부터 기공수련을 받아온 것으로 알려졌으며 그가 기공을 사람들에게 전수하게 된 것은 벌써 8년 전부터였다.
뉴스에는 그렇게 씌어져 있었다. 그는 스프링노트를 펼치고 볼펜으로 그 정보를 차례로 적어 넣었다.
연서대 교수
어릴 적부터 기공수련
사이비종교 논란
21세부터 사람들에게 전수함.
그러니까 소담은 놀랍게도 연서대 철학교수였다. 이 문화가 유구한 도시에서 가장 유명한 대학교. 그리고 라온에게도 둘도 없이 친숙한, 라온의 모교이기도 한 대학교.
됐다! 그는 그를 감싸고 있던 긴장감이 그 순간 스르르 풀려져나가는 소리를 들었다. 그와 동시에 심한 허기를 느낀다. 여기저기에서 맵고, 짭짤하고, 달콤한 음식냄새가 날아왔다. 라온은 맛있는 걸 먹고 싶어졌다. 컴퓨터 화면 오른쪽 구석을 보니 오후 두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라온은 잠시 라면을 시켜먹고 싶다는 유혹에서 허둥거리다가 결국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점심을 먹기에는 좀 애매한 시간임에도 그는 충분히 밝고 근사한 가게로 들어가 근사한 음식을 먹고 싶어진다. 결국 그는 근처에 있는, 진과 자주 들렸던 피자집으로 향한다. 운수가 좋다면 이 시간대에 꽤 차분한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식사시간을 맞춰 가면 꽉 찬 손님들 때문에 별 수 없이 늘 기다릴 수밖에 없는 가게였기에 그는 하루 전에 미리 예약을 했고, 예약을 하질 않으면 아예 피자먹을 생각은 꿈도 못 꿨다. 사람들이 줄서 기다려서 먹을 만큼 물론 피자 맛도 좋았다. 예약은 안했지만, 이미 점시시간이 훨씬 지난 시간이었고 왠지 피자를 먹고 커피를 마시고 싶어졌다기보다는 햇살이 쏟아지는 그가 자주 앉던 2층 창가의 구석진 자리에 가 마음을 진정하고 싶었다. 이상하게 아까부터 으슥으슥 몸이 춥기도 했다.
그의 예산이 맞았다. 2층은 거의 텅 비어 있었고, 홀 중간 테이블에서 어린아이 하나를 데리고 온 나젊은 엄마가 아이에게 조각피자를 먹이고 있었다. 그는 햇살이 비춰드는 창가 구석진 자리로 가서 앉았다. 그리고 곧장 따라와 메뉴판을 내주는 여자종업원에게 거침없이 큼직한 새우가 듬뿍 들어간 날씬한 해물피자를 시키고 아메리카노 한 잔을 먼저 갖다달라고 했다. 해물피자는 진이 더 좋아했다. 진과 6년째 같이 먹다보니 이 역시 그가 가장 좋아하는 피자종류가 되었다. 진은 지금쯤 산 정상에 올랐을지도 몰랐다. 언제부터인가 일요일은 그들 각자 알아서 보냈다. 책읽기를 좋아하는 그는 도서관으로, 등산을 좋아하는 진은 산으로 그렇게 각자 스케줄을 잡았다. 물론 처음에는 여느 연인들처럼 뭐든지 같이 하기를 원했던 적도 있었다. 결국은 좋은 시간들이 상대방의 짜증과 초조함으로 채워졌고, 그로 인해 다툼도 잦았다. 결국은 일요일 하루를 각자 원하는 대로 보내기로 하면서 그 모순이 해결되었다. 해결된 듯 해 보이는 그 속에 해결되지 않은 뭔가가 숨겨져 있다는 걸 그도 진도 알아챘지만 두 사람 다 모른 체했다.
종업원이 따뜻한 커피잔을 그의 앞에 놓았다. 그는 햇살 아래 웅크러졌던 어깨가 서서히 펴지는 것을, 그래서 주름 잡혔던 마음이 부풀어나면서 좀 더 건강해지는 것을 커피 한 모금을 들이키면서 음미한다. 이 순간만큼은 커피 맛에만 집중하기로 했고, 그만큼 커피향이 그의 몸 안에서 따뜻하게 피어났다.
커피 한 잔을 거의 다 마실 즘에야 피자가 나왔다. 그는 포크대신 손으로 들고 와작와작 피자를 떼어먹었다. 식욕이 왕성해지기 시작했다. 종업원을 불러 커피 한 잔을 더 시켰다.
아, 잘 먹었다!
라온이 다시 머리를 들었을 때는 피자 한 판이 다 사라져버린 뒤였다. 라온은 파스타 하나 더 시켜먹을까 생각하다가 머리를 흔든다.
지나치게 많이 먹어도 에너지소모가 커질 테니까.
종업원이 두 번째 잔의 커피를 내려놓고 피자판과 접시며 포크를 치웠다. 그는 뱃속으로부터 발끝, 손끝, 머리끝으로 온기가 퍼져나가는 것을 기분 좋게 느낀다.
됐어. 이젠 슬슬 봐야지……
그는 커피잔을 한편에 밀어놓고 멜 가방에서 스프링노트와 볼펜을 다시 꺼냈다. 그리고 노트에 끼워있던 누런 편지봉투를 꺼내 그 안의 내용물을 다시 꺼냈다. 아까보다는 훨씬 침착해져 다시 한 번 얇은 선지를 펼치고 그 안의 내용들을 읽어 내려갔다. 햇빛 아래 그 글들을 읽고 있자니 소년시절 첫 연애편지를 받아볼 적 마냥 약간의 쑥스러움이 일렁였다. 편지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한 번 다 읽고 나서 그는 그것을 노트 위에 펼쳐놓은 채 사색이 되었다.
그래, 소담이 몸 담그고 있었던 철학과부터 찾아가봐야겠어. 당시에 소담을 가까이에서 지켜봤던 지인 중 한사람이라도 찾을 수가 있을 거야. 28년 전이니까, 현재 나이로는 56세. 운 좋으면 퇴직안한 분을 쉽게 만날 수도 있겠어. 헌데 내가 왜 이렇게 열정을 내고 있는 거지? 나랑 뭔 연관이 있는 사람도 아닌데…… 그냥, 이 편지자체를 쓰레기통에 집어넣고 무시해버릴 수도 있을 텐데.
갑자기 고막을 찢는 듯 자지러지는 듯한 울음소리에 라온은 소스라치듯 주위를 둘러본다. 언제 몰려들었는지 꼬맹이들이 재잘대는 소리가 2층 홀에 넘쳐나고 있었고, 그중 한 아이가 뭐에 비위가 상했는지 울어 제끼고 있었다. 고개를 기웃하고 보니 홀 중간에서 아이들이 모여서 피자모형을 만들고 있었는데 피자집에서 주최한 피자체험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쳐, 엄마 말 안 들을래? 다른 애들 봐, 다 잘하고 있는데…… 넌 뭐하니?”하고 우는 아이를 겁박에 핀잔주는 아이엄마의 목소리도 간간히 들렸다.
“나도 잘했어, 잘했는데 엄마가…… 엄마가……”
울어대면서 변명하는 아이의 말소리는 흐느낌 속에 거의 파묻혔다.
라온은 급히 테이블 위에 놓인 것들을 정리해 넣고 배낭을 들고 도망치듯 자리를 뜬다. 쫓기듯 아래층으로 내려가는데 층계어귀에서 누군가가 그를 불렀다.
“이게 라온기자 아닌가?”
돌아보니 4년 전에 퇴직한 노참도 기자였다. 라온이 대학졸업 후, 방송국에 발을 들여놓은 해 그러니까 노참도 기자는 퇴직을 했다. 같이 한 사무실에서 근무했던 시간은 고작 삼사 개 월 뿐이었다.
“아, 선배님.”
라온이 머리 숙여 인사를 한다.
“혹시나 했는데…… 자네가 맞네그려. 여긴 어쩐 일인가? 허허허, 음식점에 어쩐 일이라니…… 내가 좀 두서가 없네. 난 손주랑 여기 피자체험 나왔다네. 보다시피 손주 시바라지나 하고 있다네.”
허허 웃는 노 선배의 손에는 아이의 옷과 앙증맞은 노랑 가방이 들려져있었다.
“천륜지락이지요.”
라온이 인사차원에서 말을 받았다.
“바쁜가?”
노 선배가 물었다.
“아닙니다. 별일 없습니다.”
라온이 대답했다.
“아까 올라오면서 보니까 하도 심각하게 앉아 뭔 생각을 하길래 차마 가서 알은 체를 못했네.”
노 선배의 주름에 걸린 걱정을 쳐다보다가 그는 문득 노 선배라면 왕년의 소담의 사건에 대해 알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왜 그 생각을 못했지?
그는 생각이 급해져서 금방 말을 잇지를 못한다.
“뭐든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이라면 말을 하게.”
노 선배는 진심이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노 선배가 먼저 아까 그가 앉았던 창가 테이블로 몸을 움직였다. 그가 따랐다.
자리에 앉고 나서 노 선배가 흘낏 아이들 무리를 건너다보고 다시 그에게 물었다.
“말해보게. 낑낑 앓지 말고. 혹시 자네 연인이랑 갈라선 건가?”
노 선배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라온은 급히 두 손을 들고 아니라고 부정하였다.
“아니, 아닙니다. 저희들은 별문제가 없습니다.”
“아, 그런가? 그럼 다행이네. 내가 실수를 했네. 오지랖이 넓었네. 자네 나이또래라면 당연히 심각한 고민이 그쪽인줄로만…… 오해해서 미안하네.”
노 선배가 뭔가 쫓으려는 듯 손을 저었다.
“아닙니다. 선배님. 걱정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건 진심이었다. 노 선배가 오래전부터 누군가의 고민 상담을 많이 해준다는 것은 방송국 내부에도 잘 알려져 있었다. 그만큼 신뢰가 가는 사람이었다.
“선배님, 혹시 소담이란 교수에 대해 아십니까? 기공사라고도 하던데.”
그가 물었다.
“……소담이라?”
노 선배가 머리를 기우뚱했다.
“연서대랍니다.”
그가 대답했다.
“혹시, 그 소담을 말하는 거 아닌가? 기공이 한창 유행되던 그 무렵에 유명한 그 소담을 말하는 겐가? 투신자살을 한……”
“네, 맞습니다.”
그가 연신 머리를 끄덕였다.
“어찌…… 참 오래된 일인데?”
노 선배가 그를 건너다보았다. 오래된 사건에 관심을 갖는 그를 의아해 하는 눈빛이었다.
라온은 편지 얘기를 꺼낼까 하다가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아 그냥 머리만 의미심장하게 끄덕인다.
“소담에 관해서 나도 한 번 취재를 했던 적이 있네. 내가 집에 돌아가 있는 자료들을 정리해서 자네한테 메일로 보내줌세. 쓸모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주신다면, 너무 고맙지요. 그러지 않아도 인터넷으로 자료를 검색해봤는데…… 유용한 자료가 얼마 없었습니다.”
라온이 웃었다.
“헌데 자네 기공에 관심이 있는 겐가?”
노 선배가 물었다. 노 선배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눈빛이었다.
“네?”
라온이 조금 놀란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아닌 것 같군. 놀라는 걸 보니. 하다면 그 소담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게 영 이해가 안 된단 말이야.”
라온이 허구프게 웃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동감입니다.”
퇴직한지 4년이 넘는 노기자의 얼굴에 뭔가 모를 아쉬움이 스쳤다.
“그렇군.”
“친구들, 오늘 재밌었어요?”
아이들에게 강사가 물었다.
“네!”
아이들이 이구동성으로 합창을 했다.
“여러분,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피자체험강좌가 끝나가고 있었다. 노 선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끝나는가보네. 일어나세.”
그때 대여섯 살로 보이는 사내아이 하나가 “할아버지!”라고 부르며 쪼르르 달려왔다.
“우리 자미 재미없어?”
노 선배는 훈훈한 할아버지 모습으로 다시 돌아갔다.
“아저씨한테도 인사해야지.”
아이가 또랑또랑 그에게 시키는 대로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라온은 아이를 바라본다. 아이랑 말을 건네 보는 게 참 오래만이라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응, 네가 자미구나. 멋지구나!”
아이가 손에 들린 알록달록한 피자모형을 내밀었다.
“피자 드실래요? 아저씨.”
아이의 해맑은 얼굴을 보면서 그는 아이를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아이를 가질려면 결혼을 해야겠지……
“라온도 이제 서른 다 되었지?”
그의 심중을 헤아린 듯 노 선배가 그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이제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아야질 않겠나?”
“네. 그러게 말입니다.” 그도 빙그레 웃었다.
“청첩장 기다리고 있겠네!”
문 앞에서 갈라지면서 노 선배가 그에게 의미심장하게 말을 던졌다. 아이가 고사리 같은 손을 들어 그에게 빠이빠이를 했다.
11월이 가까워지면서 어둠이 빨라졌다. 그는 집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3
진은 저녁을 먹고 들어올 거라고 했다. 전화 주는 것도 귀찮은지 위챗으로 메시지를 보내왔다. 답장을 보내는 것도 귀찮아 그러거나 말거나 궁시렁 거리면서 전기포트에 생수를 받아 올렸다.
자꾸 떨어져 나가려는 진을 그대로 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그는 요즘 따라 부쩍 하고 있었다.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언젠가는 떨어져나간 살비듬같이 아예 기억을 못하게 되는 날도 오리라는 걸, 그는 짐짓 아닌척했지만 살 떨리게 느끼고 있었다. 나쁘지 않은 느낌이었고, 뭔가 새롭게 시작할 수도 있겠다는 은근한 의욕도 새 피부세포마냥 은밀하게 돋았다. 그것은 삶의 비늘 같은 것이었다.
진은 대학후배였다. 진은 외국어전공이었고, 그 분야의 빼어난 실력자였다. 영어는 말할 것도 없고, 프랑스어와 독일어도 곧잘 했다. 싸움이 짙어질 때면 진은 우아한 프랑스어로 그를 비난했다. 한마디도 알아들 수 없던 그는 결국은 화를 내는 대신에 희죽희죽 웃으면서 실컷 욕해보시지, 하는 제스처로 두 팔을 펼쳐들고 어깨를 으쓱했다.
진은 속에 있는 화를 그런 식으로 풀었다.
“그냥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욕하면 안 되나?”
언젠가 그가 물은 적 있었다.
“아니, 편해. 알아들을 수가 없으니까. 싸우고 난 뒤에도 아무렇게나 던진 말들이 남질 않을 거니까. 감정도 상하지 않고. 당신 마음도 상처받지 않게 되고……”
그의 팔베개에 누워있던 진이 풀이 죽어 변명하였다. 조금 전에 한바탕 신경질적으로 화를 낸데 대하여 신경을 쓰고 있음이 분명하였다. 그는 순간, 그 말에 고마워해야하나 고민하였다.
진은 화를 주체하질 못했다. 그 자리에서 폭발적으로 풀어야만 했다.
“엄마가 그러는 게 무섭고 엄청 싫었어. 헌데 내가 지금 딱 그 모양이야……”
진의 그 말을 듣고 난 뒤 그는 진을 품에 꼭 껴안았다.
진은 수많은 책들을 번역을 했고, 그중 몇 권은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진은 점점 일거리가 많아지면서 그에게도 차라리 기자 일을 그만두고 그녀와 함께 번역 일을 같이 하자고 제안했다. 그 제안을 거절하고 나서부터였다. 진은 그가 하는 일에 일체 관심을 끊어버렸다. 그따위 일들은 아예 일도 아니란 듯이. 라온이 심각하게 돈을 벌수 있는 일들을 고민했던 것도 그때부터였다. 진이 그랑 의논도 없이 집 보러 다닌다는 것도 그 뒤에 알았다. 진은 자신의 명의로 된 보금자리를 마련하고자 했다. 진의 언니네 별장에 들어와 산지도 벌써 두 번째 가을을 맞고 있었다. 언니부부가 합세를 해서 진을 부자인 지인의 아들과 결혼시키고자 하고 있다는 건 그도 아는 일이었다.
원두커피를 간다. 커피의 구수한 냄새가 그의 불편함을 한결 부드럽게 만든다. 더운물을 조금씩 기울여 부어가면서 커피를 따라낸다. 진이 보기 좋아하는 그의 모습 중 하나다. 이렇게 따른 커피를 베란다 테이블에 마주앉아 야금야금 마신 지 오래됐다. 오늘밤 진은 아주 늦게야 돌아올지도 몰랐고, 그는 긴 작업을 해야 한다.
그는 뜨거운 커피가 그득 담긴 컵을 들고 서재로 향한다. 그와 진이 별장의 1층을 썼고, 가끔 다녀가는 진의 언니네 부부와 아이들이 2층과 3층을 썼다. 1층에는 커다란 부엌과 화장실과 넓은 거실 외에도 방 두 개가 있었는데 그중 하나를 침실로 쓰고, 다른 하나를 서재 겸 작업실로 썼다. 대체로 진이 작업하고 있을 경우가 많았다. 번역을 하고 있을 때 진은 누군가가 곁에 있는 것에 민감해 하였고, 그럴 경우 그는 거실의 침대를 해도 너끈할 커다란 황화리나무찻상 한쪽 모서리에서 일을 했다. 서재로 들어가 보니 여기저기 온통 불교관련 책과 사전들이 가득 펼쳐져 있고 쌓여져 있다. 진은 요즘 불교관련 책을 번역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다시 거실로 나와 늘 앉았던 자리에 커피 잔을 내려놓고 다시 서재로 가 자신의 전용 노트북을 꺼내온다. 그리고 배낭에서 스프링노트와 볼펜을 꺼내고 오늘 만나게 된 편지를 꺼내어 차례로 나무찻상 위에 올려놓았다.
노트를 펼치고 다시 한 번 적어놓은 단어들을 까끈히 훑어보았다. 그러고 나서 그는 노트북을 켰다. 일단 먼저 메일부터 뒤적여보았다. 혹시나 했는데 노 선배의 메일 한 통이 들어와 있었다.
클릭하고 들어간다. 자료들을 찾았다는 소식과 함께 먼저 보이고 싶은 것이 있어서 메일을 보낸다고 했다. 첨부된 문서를 클릭한다. 천천히 문서가 화면에 펼쳐졌다.
사진이었다. 소담의 생전 사진. 한 장도 아니고 여러 장이 하나씩 펼쳐졌다. 첫 장은 “1985년 제12회 기공수련을 기념하며”란 글자가 새겨져 있는, 백여 명은 됨직한 사람들과 함께 찍은 단체사진이었고, 그 다음 장은 소녀시절의 소담인 듯한 독사진이었다. 흑백사진이었지만 이목구미가 또렷하게 살아나있었다. 눈이 까맣고, 콧날이 시원했고 얼굴피부가 맑았다. 생머리를 도인처럼 쪽져 올린 탓일까, 알 수 없는 신비로운 분위기가 미묘하게 감도는 모습이었다. 친근한 기운이 느껴졌다. 세 번째 장과 네 번째 장은 칼라사진이었는데 역시 소담의 독사진이었다. 연서대학 배지를 가슴에 달고 찍은 사진이 먼저 있었고, 그다음에 하얀 옷을 입고 명상을 하고 있는 사진이 펼쳐졌다. 하얀 햇살이 가부좌를 하고 눈을 감고 앉은 그녀의 이마로 쏟아지고 있는 사진이었다. 마지막 장은 밝고 상큼한 얼굴의 여대생시절의 소담과 조금 나이 들어 보이는 대학생이 어깨를 살포시 기대고 찍은 사진이었다. 거기서 라온은 깜짝 놀라 다시 한 번 눈을 크게 뜨고 들여다본다. 다시 봐도 틀림없는 노 선배였다. 젊은 날의 노 선배, 노참도 기자였다. 라온은 놀라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할 수가 있을까?!
라온은 당장 노 선배를 찾아가고 싶은 충동을 억누른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고, 일찍 잠자리에 드는 사람들은 이미 잠들었을 시간이었다. 밤 열시가 넘었는데도 진은 아직까지 소식이 없다. 어디 노래방에서 한층 열을 올리는지도 몰랐다. 전화를 해볼까 하다가 그는 적어도 열두시까지는 기다려보기로 한다. 진이 나가는 등산동호회 회원들 대부분이 자기 시간은 자체로 계획하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그중에는 진과 마찬가지로 번역과 통역을 하는 사람들과 소설가나 여행 작가, 화가나 촬영가나 작사가나 등산가뿐 아니라 전통요리나 전통문화, 차도나 꽃꽂이 강사도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린 자영업자라고 할 수가 있어.” 진이 그랬다.
“기자는 없어?”
그가 물었고 진이 절레절레 머리를 저었다.
“없어.”
그래도 가끔 홍보를 해줄 사람이 필요한 게 아니냐고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말을 던졌으나 진은 더 이상 대꾸를 하질 않았다.
노트북으로 소담에 관한 자료들을 몇 편 더 찾아보지만 더는 유력한 자료들을 찾아낼 수가 없다. 그때 당시는 인터넷이 보급되기 훨씬 전이었었고, 아무도 이렇게 빠른 인터넷문화가 전 지구촌을 하나로 만들어 휩쓸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때였으니까. 소담은 이미 많은 사람들 기억 속에서 사라져버렸다. 소담을 기억하고 있는 몇몇 사람들만이, 아직까지도 기공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은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그녀를 기억하고 있을 터였다. 그 사람들을 찾아내는 일이 어쩌면 바다에서 바늘 찾기처럼 묘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커피잔이 비어있다. 그는 멀거니 커피를 마실려고 들었던 컵 밑굽을 들여다본다.
누가 다 마셨지?
그는 중얼거리면서 컵을 든 채 부엌으로 들어간다. 아까 끓여놓은 물이 어느새 다 식어있었다. 따뜻한 물이라도 더 마시고 싶어진다. 그는 자신이 비웠으면서도 언제 한 모금씩 다 마셨는지를 기억하지도 못한다는 것에 대하여 조금 충격을 먹은 얼굴로 전기포트에 생수를 담는다.
포도주 한 잔이 생각나는 밤이다. 그는 쩝쩝 입을 다신다. 내일 시간을 내서 노 선배를 찾아가야지 생각했다. 일단 먼저 내일 뵐 시간을 내달라고, 그리고 자료도 직접 받을 거라고 메시지를 남겨야지 생각하면서 그는 물이 끓기를 기다린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텅텅 하고 울린다.
“라온, 벌써 자는 거야?”
진이 현관에서부터 소리치며 그를 불렀다.
“잘 생긴 우리 신랑 어딨지? 아, 아파!”
그가 현관에 나갔을 때 진은 기분이 잔뜩 좋아져 벽모서리에 쪼아 이미 벌겋게 부풀어난 이마 오른편을 한손으로 만지작거리면서 히죽히죽 웃고 서있었다.
“응, 우리 신랑 여기 있네…… 얘가 날 때렸어! 얘 좀 혼내줘!”
진이 벌건 이마를 내보이면서 다른 한손으로 입구의 벽모서리를 가리켰다.
“그랬어? 이런, 벌겋게 부었네. 가서 계란 굴려야겠다.”
그가 진을 잡아끌었다.
진이 끌려 들어가는 중에도 “쟤를 좀 혼내줘. 쟤를 혼내야지”라고 계속 소리 질렀다.
오늘밤은 역시, 긴 밤이 될 것 같았다. 그는 현관 쪽으로 계속 손을 뻗어가며 어거지를 쓰는 진을 번쩍 들어 안아 올렸다. 창밖 느티나무에서 동그란 잎들이 바삭바삭 떨어져 부서지는 소리가 그의 귀에까지 들렸다.
4
하루 내내 바쁘게 보내고 나서 오후 늦게야 노 선배한테 연락을 할 수가 있었다.
“기다리고 있던 참이네.”
노 선배가 어제 만났던 피자집 앞에서 일곱시에 보자고 했다.
“저녁식사 같이 하시지요?”
라온이 말했다.
“저녁은 혼자 해결하고 나오게. 나는 저녁을 안 먹는다네.”
노 선배가 대답했다.
“저녁을 안 드신다고요?”
그가 놀라서 물었다. 삼시세끼, 밥은 꼭 먹어야하는 줄로만 알고 있던 그였다. 아프다면 모를까? 물론 바쁜 방송국스케줄 때문에 가끔 점심을 거르기도 하긴 했었다. 그렇다고 삼시세끼 중 한 끼를 빼먹을 그가 아니었고, 어느새 보면 남들 자는 늦은 밤 라면을 끓여 후룩후룩 불어가면서 먹고 있었다.
“그렇네. 하도 오래돼서…… 한 30년 전 부터인가? 안 먹다보니…… 내게는 안 먹는 법이 됐다네. 소식하다보니 배고프지도 않고.”
노 선배가 간단히 설명을 보탰다.
“그럴 수도 있네요……”
“그럼 그때 보지.”
통화를 마치고도 그는 노 선배에 대해 전혀 알 수가 없다는 생각에 골몰했다. 좀 특이한 사람인 것 같았다. 조금 뒤 진이 위챗 문자로 저녁 들어와 먹겠냐고 물었다. 그는 오늘 늦을 것 같다고 답장을 보냈다. 밥은 밖에서 해결하고 들어갈 거라고 걱정 말고 너나 잘 챙겨먹으라고 했다. 진은 어제 술주정이 미안했던 모양이었다. 밤새 토하고 낑낑 앓아대는 진 때문에 그는 한숨도 자질 못했다. 게다가 아침 일찍 죽 끓여놓고 출근을 한 터였다. 진이 알았다고 했다. 그리고 죽 맛있게 잘 먹었다고, 덕분에 살았다고 했다. 그리고 끝에 하트를 날리는 고양이 이모티콘을 보냈다. 그도 하트를 하나 찾아 날려 보냈다.
그는 피자집 앞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근처의 국수가게에서 국수 한 그릇으로 저녁을 해결하였다. 여섯시 사십오분 쯤 되어서 피자집 앞에 도착하니 노 선배가 이미 그 앞에 와 있었다.
“식사는?”
노 선배가 그를 보자 물었다.
“저 앞 국수가게서 지금 막 먹고나온 길입니다.”
그가 대답했다.
“그럼, 가세.”
노 선배가 길을 재촉했다.
“아니, 선배님. 차, 차를……”
그가 세워져 있는 자신의 까만색 아우디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하지만 노 선배는 들은 척도 않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길거리에는 어느새 사람들로 가득 찼다. 잠깐사이 노 선배의 모습이 사람들 속에 잠겨버렸다. 그는 부랴부랴 노 선배를 뒤쫓아 갔다. 사람들이 몰려있는 쾌분잡한 거리를 꿰뚫고 나가면서 대체 어디로 가는 건지도 모르면서 부지런히 노 선배의 등을 쫓았다. 이외로 노 선배의 발걸음은 젊은이 못지않게 신속하고 민첩하였다. 손주나 보고 있던 늙은이랑은 전혀 맞물리지가 않았다. 차들이 여기저기서 경적을 울려댔고, 사람들의 말소리가 웅웅 거리바닥에 울렸다.
조금 뒤, 그는 노 선배의 뒤에서 숨이 차 헐떡거렸다. 꽤 먼 거리였다. 거리 몇 개를 지나고 공원 하나를 꿰찔렀다. 이런 공원이 있었나 싶게 이름도 생소한 공원이었다. 방금 그들은 북삼환로변의 인교를 지났다. 이환로에서 삼환로까지 그는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었다. 노 선배는 그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계속 앞으로만 나아갔다. 그의 이마에서 땀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그는 편한 차를 놔두고 이렇게 정신없이 걸어야하는 것이 영 이해가 되질 않았다. 등산을 좋아하는 진이 이해되질 않을 때랑 비슷하였다.
왜 굳이 힘든 걸 자초하는 거지?
10월의 마지막 밤이었다. 사환로가 훤히 내다보이는 쯤 아파트 대문 앞에서 노 선배가 뚝 발걸음을 멈추었다.
“다 왔네!”
그가 헐떡이며 다가서자 노 선배가 힐끗 그를 올려다보더니 나직이 말을 내뱉었다.
“좀 더 훈련을 받아야겠군.”
안쪽 깊숙이 들어가자 희한하게도 차 소리가 들려오질 않았다. 노 선배는 자주 왔던 모양으로 앞에서 성큼성큼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걸었다. 따라가느라고 이미 기진맥진한 그는 더 이상 노 선배에게 어디로 가느냐고, 대체 누굴 만나는 거냐고 물을 기운도 남아있질 않았다. 그는 얌전히 노 선배의 뒤를 따를 뿐이었다. 시계를 보니 2시간 가까이 걷고 있었다. 차가 있고난 뒤 그는 2시간은 커녕 단 20분도 발로 걸어본 적이 없다.
조금 뒤 그들은 한 고층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노 선배가 28층을 눌렀다. 맨 꼭대기 층이었다. 엘리베이터가 한참을 올라갔고, 그는 심한 현기증을 느꼈다. 목이 말랐고, 빨리 어딘가에 털썩 주저앉고만 싶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노 선배는 노크도 없이 복도 구석진 곳의 집문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소리 없이 문이 열렸다.
“왔어요?”
여자의 목소리가 안에서 울려나왔다. 조금 뒤 모습을 드러낸 여자의 모습에 그는 하마터면 으악, 비명을 지를 뻔 했다. 안에서 걸어 나온 여자의 얼굴은 사진에서 본 소담의 얼굴과 똑 같았다.
이럴 수가?
여자가 웃었다.
“놀랐나보네요? 저랑 소담이 꼭 닮았죠? 제 동생의 사진을 봤군요!”
라온 대신 노 선배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쌍둥이자매였단 말을 내가 안했군.”
거실 안으로 들어선 노 선배가 그를 돌아보았다. 그는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어정쩡하니 현관 안에 서있었다.
“자, 들어와요.”
여자가 안으로 안내했다.
“라온이라고 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그가 인사를 했다. 그리고 여자가 이끄는 대로 거실 한복판에 놓여져 있는 소파에 가 앉았다.
“여기에 앉으세요. 소담이 예전에 쓰던 소파예요.”
여자가 말했다. 여자의 뒤에 이은 말에 라온은 다시 놀라 일어서려고 하는데 이번에는 여자가 그의 어깨를 살며시 눌러 다시 앉혔다. 주변을 살펴보니 그가 앉은 소파가 제일 컸고, 양편에 조금 작은 사이즈의 소파가 두 개 마주 향해 놓여있었다. 그중의 하나에 노 선배가 앉았다.
그는 약간 불안해져서 거실주변을 바라보았다. 집은 복식구조였는데 부엌 쪽에 올라가는 계단이 보였다.
“아참, 먼저 구경해보세요. 괜찮아요!”
여자가 머리를 끄덕였다.
“저 사람한테 먼저 물 한 잔 주세요.”
노 선배가 그 대신 부탁했다.
“아참, 그러네요. 둘이 같이 걸어오신 거예요?”
여자가 물었다.
“아니면 언녕 도착했지요.”
노 선배가 웃었다.
여자가 욕실로 가더니 따뜻한 수건 하나를 가져와 그에게 내밀었다. 그는 땀과 먼지로 얼룩진 얼굴을 닦고 여자가 내밀어주는 차를 마셨다. 살 것만 같았다. 그것은 단순한 차가 아니라 체력이 바닥나 고전해진 몸에 에너지를 꿀꺽꿀꺽 삼켜 넣은 듯 상쾌했다. 그제서야 집안에 가득 흐르고 있는 거문고의 잉잉,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로서는 알 수 없는 곡이었다. 몸이 노곤해지면서 기대 앉은 소파가 점점 편안해진다. 이번에는 은은한 향이 코 속으로 가득 들어왔다. 오랜만에 움직여준 근육들이 환호하는 소리가 몸 안에서 푹푹 울렸다. 집안 곳곳을 구경하고 싶은 호기심이라던가, 소담에 관한 모든 것에 대한 궁금증들이 더는 촉박하게 다가오질 않는다는 걸 그 순간 느꼈다. 몸 안의 세포들의 아우성과 함께 있는 이 순간이 무엇보다도 만족스럽고 충만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그는 두런두런 울려오는 말소리에 잠에서 깬다. 잠에서 깼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몸은 누워있지도 소파에 기대여 있지도 않았다.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채 가부좌를 튼 자세였다. 요가 프로그램에서 봤던 명상자세라는 걸 그는 금세 알아챘다.
뭔 일이 일어난 거지?!
이제 말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소담의 기운이 느껴져요. 그래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소담의 언니라고 했던 여자였다.
“그렇죠? 나도 처음에 그걸 느꼈거든요. 그러니까 인연 따라 여기까지 온 걸 거예요.”
노 선배의 목소리다.
“소담의 기운? 인연? 나에 대해 말하는 것인가?”
그의 머릿속이 다시 복잡해졌다.
“일어났네요.”
그가 몸을 뒤척거리자 여자가 아는 척을 하였다.
“잔 건가요 제가? 초면에……” 그가 쑥스럽게 얼굴을 부볐다.
여자가 그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주무신 것 같겠지만 결코 잔 건 절대 아니에요.”
여자는 50대 후반의 나이로 치면 너무 젊었다. 30대 후반같이 보였다. 소담이 살아있다면 역시 저 모습일까? 라는 생각이 짧게 라온의 뇌리를 스친다.
“겨우 5분이 지난걸요? 그 5분이 우리 인생만큼 길 때도 있어요. 안 그래요?”
여자가 말했다.
그는 여자의 말에 진심으로 동의한다.
위층은 텅 비어 있었다. 한쪽 벽면에 거울이 박혀있었고, 바닥은 알 수 없는 나무가 깔려있었는데 역시 향이 짙었다. 나무숲에라도 들어선 것 같았다.
“향 좋죠? 나무향이예요. 바닥 전체를 심신이완에도 좋은 측백나무로 깔았죠. 여기서 요가 수업도 하고 명상수련도 하죠.”
여자가 설명했다.
“헌데 제가 어떻게 불러야 할지……”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내 이름은 소미예요. 소미라고 불러도 되고, 아니면 이모라고 불러도 되구요.”
여자가 쾌활하게 웃었다. 젊어 보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름을 그대로 부르기도 누나라고 부르기도 애매했다.
“그럼 이모라고 부르지요.”
그가 대답했다.
“하나 물어볼게. 소담에 관해서는 어떻게 알게 된 거지? 무엇이 당신으로 하여금 소담에 대한 것들을 탐색하도록 한 거야?”
소미가 거울에 비친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거침없이 물었다. 이모라고 부르겠다고 하였지만 소미가 반말을 막 해오자 그는 약간 당황해 한다. 그럼에도 그는 미묘한 환희를 느낀다.
그는 더 이상 감출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닫는다. 그는 도서관에서 소담의 편지를 발견했던 과정을 일일이 얘길 한다.
“편지라니?”
소미가 놀라 몸을 돌려 이번에는 정면으로 그를 바라본다. 그가 머리를 끄덕였다. 왠지 다시 한 번 확인을 해줘야 할 것만 같았다.
“편지는?”
소미가 다시 물었다.
“아래 소파에 둔 제 배낭 안에……”
그가 대답하자 소미가 그의 곁으로 성큼 지나갔다. 그도 급히 따라 내려갔다.
배낭 안에서 노트에 끼워넣은 편지를 꺼내 소미에게 내민다. 소미가 그것을 받아 읽는다. 두 눈이 다급하게 움직였다. 편지를 움켜쥔 소미의 두 손이 무섭게 떨리고 있었다. 그것을 지켜보는 노 선배 역시 굳어졌다.
“어떻게? 어떻게!”
소미가 소리치다시피 “어떻게”를 연달아 부르짖었다. 노 선배가 다가와 소미의 손에서 편지를 받았다. 그리고 읽어내려 가기 시작했다. 노 선배의 얼굴 근육이 경련을 일으키듯 펄떡였다.
“정말로 소담이 이런 글을 남겼다고?”
노 선배가 믿겨지질 않는다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소담의 필체가 맞아요.”
소미가 나른하게 말을 던졌다.
침묵이 묵직하게 거실 안에 들어찼다.
소담과 소미 두 쌍둥이 자매를 낳고나서 며칠 뒤 엄마가 죽었다. 어린 두 딸아이를 데리고 아버지는 별 수 없이 산 속에 살고 있는 아이들의 할아버지한테로 갔고, 아이들은 여섯 살이 될 때까지 쭉 거기서 살았다. 할아버지는 사십년째 종남산 산속에서 도를 닦고 있었다. 아버지가 결혼을 하고 자신의 부친을 뵈러 아내와 갔을 때 할아버지는 아이 가질 생각을 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했다. 그럼에도 엄마는 아이를 갖고 싶어 했고, 얼마 뒤 임신을 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말씀을 안들은 것을 죽을 때까지 후회를 했다. 할아버지에게 두 딸아이를 맡겨 두고 아버지는 다시 도시로 나가 일을 했고, 아이들이 먹고살 돈을 벌었다. 아버지는 자신이 크는 내내 아예 집안을 돌보지 않은 자신의 부친을 결국 용서하질 못했고, 쌍둥이 자매의 곁으로 다시 돌아오질 못했다. 아버지는 밑에 몇몇 사람들을 무어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면서 인터리어 일을 해주곤 했는데 어느 날, 밤늦게 귀가하다가 교통사고로 엄마가 있는 저세상으로 갔다. 소담과 소미가 다섯 살 때 일이었다. 소담과 소미는 부모님에 대한 아무런 기억도 갖고 있질 못했다. 소담과 소미는 산 속에서 자유로운 노루처럼 컸다. 얼굴빛이 맑고 투명해서 누구라도 보면 눈을 떼질 못했다. 그리고 여섯 살이 되는 해, 할아버지는 그중 한아이만을 지인에게 맡겨 학교공부를 시키기로 했다. 그게 소담이었다. 겁이 많은 소미에 비해 동생인 소담은 겁도 없었고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했다. 소담은 공부도 잘했고, 어렵지 않게 중점대학에 갔고, 어린 나이로 교수가 되었다. 산에 남은 소미는 할아버지 밑에서 글자를 깨치고, 대학을 읽고 논어에 장자를 읽었다. 소미와 소담은 그렇게 각자의 인생을 만들어갔다. 그들 자매는 방학 때면 만나서 온 산을 쏘다녔고 새벽에 일어나 할아버지와 함께 기를 모으고 태극권을 배웠다. 그런 삶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계속 되었다. 허연 수염의 학 같으셨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소미에게 산에 있질 말고 소담이 한테로 가 소담을 도우라고 유언을 남겼다. 그리고는 햇볕 아래 사붓이 앉아 햇볕 쪼임을 하다가 그대로 돌아가셨다. 할아버지가 자신을 떠나보내기 위해 먼저 떠난 것이라고 소미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소담과 소미는 그렇게 다시 같이 살게 되었다. 소담이 갓 숙소에서 아파트로 집을 옮긴 뒤였다. 소담에게서 기공을 배우는 사람들이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기 전이었다.
소미가 거기서 말을 멈췄다. 아직도 아까 읽은 소담의 편지에서 받은 충격이 가시지 않은듯 했다.
“내가 알고 있는 한 내 동생은 결코 자살할 사람은 아니었어. 참, 긍정적이고 밝은 에너지가 언제라도 넘치는 사람이었거든.”
소미가 믿기질 않는다는 듯 말했다.
“그렇죠. 우린 소담이 자살하였다고 경찰에서 결론을 냈어도 지금껏 믿고 있질 않았어요. 누군가가 뒤에서 밀었다고…… 아니면 피할 수 없는 사고가 난 거라고 그렇게 믿으려고 했죠.”
노 선배가 말을 받았다. “「위대한 역설」을 소담이 참 좋아해서 책상머리에 붙여놓고 보군했죠. 처음엔 뭔지 나도 몰랐는데 내가 영어를 아예 몰라(이 말은 라온에게). 소담이 나에게 중문으로 한구절한구절 번역을 해줬죠. 헌데 소담이 번역해서 읊어주는 그 구절구절이 왜 그리도 마음이 아프던지…… 그때 소담이 많이 힘들어 한다는 걸 알았죠.”
소미가 「위대한 역설」이 적혀있는 장을 라온에게 내밀었다.
문득 라온은 자신이 아직 갈 길이 멀었다는 걸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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