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6.24 일 약남 이헌락 공 묘소 참배
포항시 기계면 소재 : 약산 남쪽기슭 비학산 부감원(자좌)
1768 하양현감 에 부임하여 현감의 선외가(19세 윤장 형 윤침의 딸이 하양허씨로 이응기의 처)를 찾아내고
환관절차(김해허씨로 잘못사용하고 있음을 하양허씨로 찾는) 협의하고 안동사고 구호적 등본을 안동부사에게 의뢰하여 문과방목 예시, 여강이씨 비음기 등 증명을 통하여 김해허씨로 잘 못 사용하고 있는 본관(21세 주부공 면 부터- 26세세 洙까지 144년)을 하양허씨로 환관시켜 주신분임니다.
답사 : 여강이씨 종친회 이동락 이원준 하양허씨문경공파 종친회 허성열 허동순 허광열
약남선생이공묘갈명병서
약남 선생이 하세하신지 백오십여년에 묘갈을 이루려고 6대손 석천과 종5대손 홍구가 입재정공께서 잘 지은 행장을 소매에 녛어 나(이병관)를 천리길로 찾아와서 묘갈명을 청함에 나는 늙은 나이에 정신력이 없어 감당하지 못함을 사양하나 거두어 들이지 않고 드리니 나는 행장을 받아서 읽고 짓는데 말을 하니 선생의 이름은 헌락이고 자는 경순이며 성은 이씨인데 본관은 여주(여강)며 고려 향공진사 휘는 세정이 상조이시라.
조선조에 와서 휘는 번, 번께서는 생원이신데 증직은 좌찬성이시며 아들 둘을 낳으시니 장남의 휘는 언적 즉 회재선생이시고 차남의 휘는 언괄이시니 농재선생이며 증직은 도헌재주이니 이로 약남공(헌락) 칠대조가 되고 고조부 휘는 역이시고 증부 휘는 집, 조부의 휘는 덕훈 아버지 휘는 신중인데 학문과 행금의 이름이 들렸다. 수직을 첨지중추부사를 내려 받았다.
어머니는 월성최씨 정무공 진립의 후손 급제하신 최덕기의 따님이다. 숙종 무술(1718) 2월 어느날 양좌리(양동) 집에서 태어나시니 총명한 기상이 남달리 빼어났다.
여섯 살에 사략을 읽은 후 순, 우 임금의 세계를 묻기를 순임금이 전욱의 육세손이라면 우임금은 어찌 전욱의 손자가 되는냐고 하니 장자도 대답을 못하였다. 열 살에 주역을 읽고 포괘의 시귀를 풀줄아니 미성동이라도 중인의 재주를 고루 갖추었고 열여덟 살에 향해에 올랐고 이십칠 세에 진사시에 입격하고 신미년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어 복을 벗은 후(삼년상) 아버지 명으로 성균관(태학)에 유학하던 중에 조정에서 재주 있는 선비를 뽑는데 약남공은 여러 번 올랐으니 경진년(1760.41세)에 강릉참봉에 제수되고 계미년에 평시남부봉사에 올랐고 갑신년에 의금부 도사로 옮겨 을유년에 사포서별제에 올라 병술년에 장악원주부에 옮겨
조금후 하양현감(1768)을 받고 사양하니 상 말씀 너가 능한 관리가 되겠느냐 잘하는 관리가 되겠느냐 대답하기를 신은 재주가 미치지 못하여 어찌 감히 미리 기약을 하겠습니까 다못 마음과 힘을 다하여 백성을 다스릴 따름 입니다. 국왕 말씀이 너는 이 추노 회재선생 고을 사람으로 오늘의 내 명령을 저버리지 않으니 명하여 보내니 공의 뜻은 관에 대하여 문교를 숭상하려고 먼저 학교를 찾아보고(향교서원서당) 허문경공 사당에 알묘하고 유적을 찾아 모아 판각하여 실기를 펴내라 매월 가르친 시험을 하양읍 자제를 모아 치르고 공의 복봉을 덜어내어 상을 주어 인재를 양육했다.
그시 경상도 관찰사가 자기 집 사노를 자기 자제의 군역을 대신할 사사로운 청탁을 하니 공은 국법에 의거하여 허락지 않으니 두려히 보고 경탄을 더욱 가하니 강직하여 혼들리지 않음이 이와 같았다.
임기가 차서 돌아오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삼년상의 복상을 예에 벗어나지 않았다. 병신년 정월에 정조 세사시 명유를 뽑아 세자익위사를 충직할 때 안순암 정복 같이 뽑히게 되어 세자 위솔로 잠시한 후 통례원인의를 제수 받았다.
삼월에 영조가 승하하여 능역을 마치고 영남의 유림에서 합동 반역신을 몰아내는 상소문을 공의 손으로 소수장이되어 지었다. 정유년에 상의원 주부에 옮기고 팔월에 함창현감을 받고 부임하여 현에 동계 정선선생(정온) 가묘가 있는 데 자손이 심히 가난하여 공이 제사때 마다 제수를 갖추어 지내도록 도왔다. 기해년에 파직되어 돌아왔다. 전 함창현감 시 임인년 교승자의 잘못으로 전관에 미친화를 입어 관동 울진으로 유배되었다. 번암 채재공 당시 영의정이 시를 지어 뜻을 치하하여 붙이니 공은 받아보고 경옥같은 시를 화답하여 시끄러움을 재우고 적소에 가도 얼마 되지 않으면 사면되어 돌아올 뜻을 써 보내니 이해 가을에 과연 죄 없음을 사면되어 돌아왔다. 경술년은 나라에서 정조의 아들 세자가 태어난 경사로 공은 연만한 조정의 신하로 첨지중추부사에 올라 태평감은가를 지었다. 만년에 경주부 북 산수 좋은 약산 남쪽 기슭에 자리 잡아 자호를 약남 옹이라 하였다. 신해 십일월 이십삼일 고종(죽음)을 산거에서 할 때 병을 앓으면서도 책 읽는 것은 폐하지 않았고 밤이면 고인이 모은 글 외루기를 하며 정신과 본성을 기르고 명을 바꿀 때 안동 도산 퇴계선생 고종기를 다 읽고 탄식하며 노선생(퇴계)께서도 많은 한을 남기셨는데 하물며 우리 같은 무리야 고종기에 따르려니 자질들에게 장례와 제사에 유밀과를 쓰지 말고 심의와 정자건으로 염연히 돌아가심이 가히 정력함이 이에 있었다. 익년 사월에 비학산 부감원(자좌)에 장사지내니 죽 숙부인 묘 남쪽이라. 부인 월성이씨 익제선생 재현의 후손 문용의 따님이니 공보다 십년 먼저 돌아가셨다. 아들 둘이 있으니 정용 정함이다. 정용의 아들은 욱상 희상이고 정함의 아들은 표상 추상이다. 사위는 김민수이고 이로서 증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아 아 공의 문장은 굉걸하고 학술은 깊어 정수하고 집에서 효도하고 우애하는 근본이 실지 덕을 세상 벼슬살이에 이력을 펴나갔다. 당시의 남치암 남경희, 업제 종노 두 큰 선비가 행장과 연보 모든 징문을 신필로 지었으니 나를 돌아보면 글을 잘 못하는데 어찌 더 보태고 빼리요. 내가 일찍 우리 사문에 들으니 의론 대상의 선비로는 들림이 이백년이래 영남하에는 이름난 명유로는 약남공이 수가 되리니라 재주없는 나는 늦게나서 당일의 집지를 받지 못했음이 한이 되는데 이 묘갈일을 내 이름을 부탁하니 진실로 나의 사사로이 분수에 넘치는 광영이나 드디어 참람함을 잊고 명을 지어 말하니
높은 문원공(회재) 백세의 선비 밑둥치요
형제같이 공부에 나아가신 말을 하려니 농재선생이시라(아우)
원류는 이미 크게 받아 공은(약남) 나면서 독실했다.
나이 어릴 때 빛나는 선망을 받고 북두칠성같고 북극성 같았다.
조정에 명유 뽑을 때 공께서 우두머리로 안겼다.
세자 익위사 위솔로 맑은 이름 올렸으니 우리 영남 유림의 영광되라 국왕은 어질고 능한 시하 알아보셨네
임금 분부받고 다스린 공적 얼음 같이 맑았구나
청백하며 임기차서 돌아는 길 싣고 올 것 없은 빈수레 가벼워 흔들거렸네.
만년에 물 맑고 명산 찾아 한가로이 마음 놓았네
넉넉하게 지나시다 밟은 자치 순리이니 죽음도 편안하다.
장사 지내 감춘 채백은 비학산 아담하고 좋은 봉우리에
후세 썩지 않은 실행을 이 돌에 새겨 징표하리라
세상장집서(경진) 지율중중품(4월) 가선대부장례원소경원임
규장각부제학연안 이병관 근찬
달성후인 笑庭 徐 永 祚 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