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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 지 거 리
- 복상사 -
윤명
수의와 장지를 다 마련한
칠순 노인들의 입씨름 판
절대명제: 명대로 살다 편안히 가는 길
교장 퇴물 맏이의 제의
‘ 죽음에 대비하여 철학 보습을 더 받을 것
연금은 장례비에 쓰고‘
둘째 촐랑이
‘ 장님들도 찾아가는 황천길
떠밀리면 지옥에라도 가야지
사자들이 모시는 데라면
막내의 능청
‘ 호스피스도 장기은행도 안락사도‘
다 입찬소리
불안공포를 황홀히 메우는 데는
복상사가 최상‘
치매증세의 의뭉한 두꺼비 벽창우들
모두 이를 스긍
‘묘안이로고 신부정중만 일지 않으면’
유세장에서
윤명
색종이(흰, 연두, 하늘, 계란색)들이
흩뿌려지는 유세장
핏대를 세운 남녀노소
(황, 청, 적, 녹색)들
큐에 찔린 관자놀이들
갈팡질팡 텀불링하는
빌리어드들
동서남북 이합집산
어느 포켓으로 굴러가야 할지
21세기로 통하는 대문은 열렸다지만
구렁텅이에 박히지는 말아야지
구경 가세
갈 바에야
활어조에 헤엄치는 도다리 넙치보다야
백주발검한는 개와 원숭이 싸움이
신날 판
밤바다에서
윤명
짐짓 떨어져 나갈
곡한에 내가 섰다
등에층층이 둘러선 방파제는
지금 나로부터 멀리 숨지어 가고
앞에는 배신의 절벽을
난타하다 돌아온 해일만이
황망히 포말진다
이제는 뒹굴어도 소리쳐도
기울어진 태양을 껴안을 수는 없다
휘어진 수평선을 당겨봐도
해상에 늘어진 산맥은
따라 일어서질 않는다
나는 모래를 다져
바닷속에 던져 본다
하이얗게 싯기어 밀려나온 패각이
흑도 앞에 오열할 뿐
조여드는 어둠속엔
갈증난 심장만이
눈을 뜨고 서둘기 시작한다.
노가리집
윤명
어두운 외줄기 골목을 좁게 돌아선 자리에 마련한
촛불을 밝힌 뮤즈의 산실
여기서는 통금 사이엔도 의미없고
종소리는 더욱 소용이 없다
여기에는 크고 작은 내 혈육들이 덩답게 모여 온다
절름발이 외팔이 타박 관통의 중상 경상
무릎이 터진 허리가 부러진
가슴팍이 뚫어진 가난한 마음들이
자색의 연막을 피워놓고
잔 잔이 뜨거운 피를 부어 마신다
시렁에는 푸른 멍이 든 개고기에
살진 돼지고기 게다가 문어
양미리도 고기라고 꼬리친다
그 속에 목이 걸려 희생된 미이라 노가리가
뭇 남류에 휩쓸려
이마에서 피를 흘리며 꿈틀거리고 있다
때로 나도 해어진 하루를 가방에 담아들고
이 격전의 뒤뜰 타다 남은 판자걸상을 주즐고 앉아
따스한 아내의 웃음에 섞인 찬 이슬을 따라 놓고
굶주려 잠든 어린 놈의 어설픈 뒷모슴을 쓰다듬어 가며
노가리를 씹다보면
문득 나도 한 마리의 노가리
잔 속은 피피
이윽고 깨진 내 머리에도 열이 오르고
숨막혔던 가슴에도 호흡과 신경이 넘쳐 흘르면
내 몸뚱이에선 기름진 위선의 베일도 벗겨지고
그리곤 사랑과 미움속을 헤매던 깊은 안개도 걷혀
모빌유 같은 피고름이 머리속에서 뮤즈로 피어나고. . . . .
한마디 해보시오
- 시우 영섭의 영전에 -
윤명
무릎을 대고 종일을 앉아서도
우린 할 말이 없었다
바람 부는 언덕에 올라앉아
입을 다물던 우리의 오랜 사연
그러던 친구는
풍덩 호면을 깨고 빠져
갈앉은 올이 되었으니
이젠 햇살 쏟아지는 고향 마을
바닷소리 들으며 쉬는 대밭 머리에
내 소주 한 병에
노가리 다섯 마리 들고
찾아가게 되었구려
입술 뾰죽이 내밀고
눈을 감고
끝내 말을 안하던 친구여
이제나마 입을 열고
가만히 한마디 해보시오
놈들이 욕심이 많아서
세상를 망쳤고
교육도 잘 안됐다고
부담 없는 친구
마음 속에 구김을 안 두던 친구여
흙방 화로에 부치는 감자전 같이
정다웠던 내 친구를
앞서 보냈으니
나
수유리 골목에 자목련이 피면
혼자라도 찾아 나서리다
평생 나그네 봇짐 풀어 놓았던
그 하숙집 뒷산 구빗길을
변함없이 돌아 내려오리다
먼저 떠나간
영섭 형이여
복 도
윤명
녀석은
어미 잃은
병아리
한나절을
터널 같은 복도에 갇혀
지냈다
죽지풀린 아비를 뒤따르며
교실 안을 기웃거리던
녀석은
서성거리다 지쳐
창에 볼 부비며 졸았다
지금은 밴발로
황토 비탈을 내리달리며
마음껏 외치는
저승놈이지만
지금도 이따금
내 핏줄에 들어와
흐느낌을 쪼으며
지낸다
설옥 권금성에서
윤명
송백과 잡목들은
낭떠러지에 얼어붙어서도
말이 없었다
산기운데 밀려난 먼 발치
은빛 언덕과 들에는
바람에 주름져간 내 기억들이
아롱져 있고
냉엄한 하늘과 바다가
구름 사다리도
다가오고 있었다
순간
이마를 찌르는 소리 마다
- 메뿌리를 늘여 버티되
세파에 문적거리지 말 것
나래를 펴 새벽 하늘을 들이키되
때로 날벼락을 삼킬 도량도 배울 것
- 다그치는
태초의 말씀
이윽고
가득찬 시야 한 구석엔
해사한 보름달이
얼굴을 내밀었었고
다시 주문진에 와서
원영동
주문진에 다시와서
우리는 오징어회를 먹었다.
술도 마시고 바다도 마시고
저녁 노을 속애 앉아
친구와 함께 술을 마셨다.
고향의 매운술
매운 바람을 자정까지 마셨다.
맨 정신으로는 도저히 해어질수 없어
그 친구와 함께
우리는 독한 술을 마셨다.
해 뜨는 아침까지 바다를 마셨다.
묵호항에서 울릉도까지
원영동
그 태백산
맥두대간을 넘어온 기차를
묵호항에서 배를 타고
바다너머 울릉도에 갔다.
울릉도곁에 섬이 보이는
그 언덕에서 바람을 가르고
다시 기차는 떠났다.
노을 속의 기차는
누엿누엿 파도를 싣고
해 뜨는 아침에도
그렇게 다시금
기차는 떠났다.
울릉도 그 섬까지
배도 떠났다.
호수 위에 누워서
-경포도에서-
원영동
경포호는 바다와 손 잡고
비 오는 밤이며
늘 울었다.
저 대관령의 준령도
율곡의 높은 학문도
요절한 허란설헌의 시 한편도
여기 함께 누워 있다.
달뜨는 밤이면
해지는 노을 속에서
술도 마시고
해와 달도 함께 마시면서
지금도
비오는 밤이면 늘 울었다.
황향한 호수 위에 누워서
늘 울었다.
보광리 학산마을
원영동
보광리 학산 마을은
산도 깊고 술도 깊었다.
아침이면 동구밖에서
흰 날개를 접으면서
학이 울었다.
수백 수천의 학무리가
끼억끼억 울면서
끼억끼억 춤을추면서
둥지 위에서
둥지 밖에서
하늘을 날았다.
봄이면 오고
가을이면 뜨면서
끼억끼억 짝을 짓고
끼억끼억 새끼를 치면서
보광리 학산 마을은
숲도 깊고 물도 깊었다.
그러나 지금은
학도 떠나고 그도 떠나고
숲도 묻도 떠나고
노을만 깊어 갔다.
초당마을의 홍길동을 찾아서
원영동
바다가 보이는 초당 마을엔
큰 소나무 숲이 있고
허균의 낡은 기와집도 있었다.
그는 여기서 낳아
여기에서 홍길동전을 구상했다는데
홍길동은 비바람을 다스리는
대중을 업어서
대중을 크게 섬기는 공부를 해다던가.
모름지기 큰 꿈 큰생각은
그 아비 정승에개서가 아니라
노비 춘섬 어비께서는
크게 웃고 크게 죽이는
크게 빼앗아 놓아주고
그가 문득 물에서 배를 타고
율도에 가서 나라를 세우니
백성의 소리를 들어서
백성의 땅에
백성의 집을 짓고
백성을 등에 업고 땀흘리면서
백성의 주인이 되는
백성의 나라를 세우니
허허 그런 나라
그런 백성 참 좋았다.
강릉의 추억
원영동
대관령 성낭당에서 가마골 반점귀틀집 주막 어흘리까지 지금도 대관령 성낭당에 가면 산적이있을 것만 같다. 오솔길앤 개 풀 갈대지붕도있고 반점이 주막에서 어흘리 대관령 박물관까지는 쉬엄쉬엄 한나절 길이다만.
한양 말죽거리에서 여주 강나루까지는 하루길이다. 나루를 건너는 해만 또 한밤. 치약산을 넘을해만 또 하루 밤이다. 대화가 모래제 마평 걸은리 신리를 지나서 평리 가시머리진부. 횡계 주암 숲바윗골 높은다리 지금의 고랭지 채소 밭은 늦가을
서리 빨에서 새하얀 모밀꽃이 였다.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의 무대도 봉평 진부 대화의 오일장이다. 갓 쓰고 노새나 가마 타고 원님과 하인 마부도 서울에서 강릉까지는 여드레 한 열흘길이라. 하루에 육십리길이라.
1923년 쯤 인가. 신작로가 생기고 전압선이 놓일 때 갈릉에서 원주행 버스가 있었는데. 목탄차 운전수 옆에 조수가 풍차를 돌리면서 언덕길을 쉬엄쉬엄 올랐던가. 춘청행 서울행이 개통된것은 해방후다. 6. 25후까지도 동해상사 버스로 하루행이 였다.
나는 6. 25때 거기서 싸우고 닷기 병중 사범 강고에서 10여년을 봉직했다. 이제 생가하니 수족이 잘리는 아픈 행로였다. 엇그제 대관령을 넘으면서 터널을 뚫고 신차선 공사가 한창인 현장을 지나면서 사뭇 감회가 깊었다. 설악산 고속전철이 가마골 반정이 귀틀집 주막에서 한양을 떠난 율곡의 아비가 용꿈을 꾸었다는 그 주막엔 심사임당의 효친비가 보인다. 아롱아롱 가마골 반정이 어흘리 그 오솔길을 다시 걷고 싶다만. 서점 삼문사 와
경주집 노가리 막사발의 아전술맛 오월단오가 오면 남대천 굿파도 일품이다. 강뚝을 따라 노암리 철교까지는 노란 붉은 색 휘장이 펄럭이고 곡바단 나팔소리에 가시네도 붐였다. 야비구 순대집 무당의 작두춤도 진풍경이지만 대관령 산실령의 행차도 장관이었다. 춘햐의 그네 뛰기. 방자의 치렁치렁한 댕기도 있었다.
성남동 야시장의 경주집 노가리 마사발의 아린 술맛도 기억하고 싶다. 카바드 막걸리에 취한 문학의 습작시대도 풍미로웠다. 통행금지 시간이 지나선가 순경에게 끌려 갔던 어설픈 픙작도 기억하고 싶다. 그때는 말술이었다. 고성방가 오줌을 싸면서 술병을 높이 들고 거리르 누볐던 기억도 새롭다. 성내동 혼마제 서울치과 앞에는 중앙보통학교가 있었다. 갑오경장 이듬해인가 구한국 정부령으로 3년제 초등학교가 생겼다. 총독부교육령으로 4면제 심상소학교 개칭되고 2년제 본과를 마치면 스물두어살 애아비가군청 서시가 되고 춘천이나 서울로 유학을 떠났다. 그수비 연병장에서 짚신 신고 동물 돼지 오줌똥에 입바람을 넣어서 축구 랍시고 진종일 공을 찼다. 그년이 강릉초등학교가 창립된지 백주년이 되는 셈이다. 강릉의 명물은 역시 삼문사 서점이다.
해질녘이면 극장 앞 서점으로 보인다.
잡지레야 문예 현대문학 학원 아리랑희망이 있었지만 신간서적은 천하으뜸에 서점이었다. 화제의 베스트셀러 앞에서 철학과 문학을 논했다. 나는 그때 월급의 절반이상을 탕진했다. 책이 책을사고 술이 술을마시고 바다의 숲이바다와 숲을 거닐고 남대천 뚝방을 하였었이 뛰었다.
강릉은 교육의 도시다. 삼문사는 그때의 메신저다 그 주인의 교육인품도 그 자녀의 교육됨도 천재였다.
일년의 한 두 번씩 삼문사는 우리 선생님들을 아강춘으로 출대했다.
주인내외가 한복을 입고 아들 딸이 현관에 도열해서 주십도로 허리를 굽히면서 손수 음식을 접대했다.
나는 선생대접을 그때처럼 정중하고 막중하게 받아본 일이 없다. 대관령은 누구의 산인가. 바다는 하늘은 누구의것인가. 물론 나의 가장 소중한 재산이다. 그러나 서점 삼문사또한 나의 귀중한 보배가 아닐수없다.
나는 그때의 그런 그런 글을 쓰고싶다.
약력
*강릉사범병중 강릉고 교사역임 *한국농민문학회회장
*한국문인협회 이사 *한국문인산악회장
*국제펜 한국 이사 *시집 감자꽃 태산 등 다수
*한국현대시인협회부회장
非情의 詩學
이승훈
시집 山上垂訓에서 읽게 되는 두드러진 시적 특성은 삶에 대한 비정한 인식이다. 비정하다는 말은 희노애락의 감정에 좀처럼 휘말리지 않는 심리세계를 뜻한다.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면서 삶을 바라보는 이러한 태도는 우리시의 경우 靑馬에게서도 일찌기 나타난 바 있다. 그가 「바위」에서 노래한 삶에 대한 비정한 인식은 애련에 물들지 않고, 희노에 움직이지 않는 태도, 안으로 안으로만 자신의 삶을 채찍질하겠다는 냉혹한 의지였다. 이러한 의지가 尹明 시인에게서는 초기작품인 「寒木抄」에서
겨울 산정에
척추를 세운
나무 하나 있었다.
백일의 눈초리엔
표정을 박제하고
한천에 눈이 들씨우면
현기증을 삼켜
오연했다.
같은 시행들로 나타난다. 삶에 대한 비정한 인식이 여기서는 단순한 비정함으로 끝나지 않고 오연함으로 제시된다. 겨울 산정에 오연하게 버티고 서 있는 나무가 보여주는 것은 어떤 표정도 박제가 되어버린 삶, 현기증을 삼키며 냉혹하게 견디는 삶이다. 그것은 지상의 소음, 세속의 가치로부터 자신의 삶을 건지기 위한 고독한 의지만이 성취할 수 있는 삶이다. 그렇기 때문에 겨울 산정에 서 있는 나무는 척추를 세우고 서 있다. 척추를 세운다는 것은 곧게 섬을 의미하지만, 시 속에서 그것은 세속적인 삶의 세계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며 동시에 바르게 서는 삶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꼿꼿이 서려는 삶의 태도, 이 땅 선비들이 추구했던 선비 정신을 표상하기도 한다. 그것은 일체의 역조를 거부하겠다는 단호한 의지로 요약되는 삶이다.
자신의 삶에 대한 비정한 인식, 어떠한 역률도 거부하겠다는 이러한 준엄한 의지는 「山上垂訓」에서는 부러진 겨울 나무의 이미지로 변용된다. 척추를 세우고 차거운 겨울 하늘을 꼿꼿이 견디는 한목의 이미지로 여기에서는 “창 맞은 곰”의 이미지로 변용된다. 시의 화자는 겨울 산위에 창 맞은 곰처럼 쓰러져 있다. 배경은 여기에서도 눈발치는 산정이다. 그러나 시의 화자는 척추를 세운 겨울 나무가 아니라 창 맞은 곰에 비유된다. 창 맞은 곰처럼 그가 겨울 산정에 쓰러졌다는 것은, 세속적인 삶에 대한 거부, 일체의 역리를 거절하겠다는 그의 의지가 제대로 실현될 수 없음을 암시한다. 자신의 삶을 비정하게 다스리려는 의지가 허물어질 때 시의 화자가 겨울 산정에서 듣는 것은
한숨과 슬픔이 가득한
자식들을 위하여 너는
더불어 기도하라
너희는 선택받은 짝이니
세상 재물없다 괴로워 함은
하찮은 몸부림
이라는 묵시의 소리이다. 산상수훈이란 원래 신약성서 마태복음 1 - 7장에 실린 예수의 교훈을 뜻한다. 예수는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등이 받게 될 여덟가지 복 및 계음에 대하여 갈릴리 부근의 산에서 설교했다. 산상수훈이란 산 위에서 내린 교훈이라는 뜻이다. 이 시는 이러한 성서적 내용이 개작되는 소위 패로디의 형식으로 제시된다. 대페로 모든 패로디가 그렇듯이, 여기서도 예수의 산상수훈에 대한 兩( )的 반응을 보여 준다. 패로디가 노리는 것은 개작의 대상, 다시 말하면 원전의 의미를 왜곡하거나 풍자함에 있다. 이 시에서도 사정은 비슷하다. 창에 맞은 곰처럼 겨울 산정에 쓰러진 화자가 듣는 교훈은 예수의 말씀이라기보다는 가난한 삶을 견뎌야 하겠다는 화자의 의지이다. 그것은 삶의 모든 고통을 달게 견디는 일로 요약된다. 그리하여 시의 후반에서 화자는 녹아 빠진 자신의 머리를 주워 담고, 텅빈 산등을 까마귀처럼 날아 내려 온다. 창에 맞은 곰처럼 산정에 쓰러졌던 화자는 묵시의 소리를 듣고, 드디어 희생한다. “녹아 빠진 내 머리를 주워 담으며”는 이러한 희생을 암시한다. 그가 희생하는 것은 달게 견디는 일만이 삶의 본질임을 새겨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 까마귀처럼 산등을 날아 내린다. 날아 내리는 것은 다시 세속의 공간으로 그가 돌아옴을 의미한다.
그러나 겨울 산정에서 묵시의 소리를 듣고 희생한 그의 이미지가 그냥 새가 아니라 까마귀라는 것은 여러가지 의미를 함축한다. 까마귀는 불길한 징조를 상징한다. 또한 그것은 행복이 아니라 불행, 아름다움이 아니라 추함, 공포 따위를 상징한다. 산상수훈을 체험하고 희생한 화자의 삶은 어딘가 불안의 그늘을 감추고 있다. 그러한 불안은 세속의 삶을 동혈에 비유하는 「洞穴」에서
부엉이는 불안의 불을 켜고
달팽이는 의혹에 잠겨
먼 피바다의 모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삶으로 표상된다. 화자는 이러한 삶에서 벗어나고저 한다. 그것은 새로운 “정염의 불씨”를 가꾸려는 의지로 나타나며, “뱀의 미열”을 감싸려는 의지로 나타난다. 그렇지만 이러한 동굴같은 삶을 박차고 뛰어나가려는 화자의 의지가 가장 섬짓하게 형상화되는 것은 「푸주에서」라는 시에서이다. 자신의 삶에 대한 비정한 인식, 이러한 인식이 환기하는 결연한 의지, 곧 세속적 삶의 역리를 거부하려는 단단한 의지는 마침내 이 시에서 자신의 육신을 소나 돼지처럼 도살시켜 무게를 달자는 무서운 목소리로 드러난다. 푸주에서 환자가 보는 것은 소나 돼지의 육피가 아니라 우리들의 멍든 초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차라리 우리
저마다의 멍든
육피를
도려내자.
허기진 눈알들을
우벼내자.
고 절규한다. 그렇다. 이 시에서 듣게 되는 화자의 목소리는 절규에 가깝다. 우리들의 멍든 삶, 허기진 눈을 어떻게도 치유할 수 없다는 절망 속에서 그는 우리들의 멍든 육피를 도려내고, 허기진 눈알을 우벼내고자 말한다. 그것은 고통을 갈퀴에 담아 꽃피우려는 비정한 절규이다. 이러한 절규가 나타날 수 밖에 없는 것은 「黑人象」에서 묘사되는 적도 밑 하늘이 끄슬린 삶, 스코르가 오지 않는 삶, 「山家幕景」에서 묘사되는 빛깔 잃은 통나무 굴속에 웅크린 어미의 눈시울로 집약되는 삶 때문이다. 화자는 이러한 현실, 고통받는 삶의 극한에서 마침내 자신의 피를 흘리는 한 마리 노가리가 됨을 의식한다. 「노가리집」에서 읽을 수 있는 세계가 그렇다. 그것은
시렁에는 푸른 멍이 든 개고기에 살찐 돼지고기 게다가 문어
양미리도 고기라고 꼬리치는데
그 속에 목이 걸려 희생된 미이라 노가리가 뭇 남류에 휩쓸려
이마에서 피를 흘리며 꿈틀거리고 있다.
때로 나도 해어진 하루를 가방에 담아 들고 이 격전의 뒷들 타다 남은
판자 걸상을 주줄고 앉아 따스한 아내의 웃음에 섞인 찬 이슬을 따라 놓고
굶주려 잠든 어린 놈의 어설픈 뒷모습을 쓰다듬어가며 노가리를 씹다 보면
문득 나도 한 마리의 노가리
잔 속은 피 피
처럼 노래된다. “어두운 외줄기 골목을 좁게 돌아선 자리에” 있는 노가리집에서 화자가 체험하는 일상적 공간은 피의 이미지로 점철된다. 이때 피는 혁명이나 공격의 이미지가 아니라 희생의 이미지로 디가온다. 한마디로 그것은 피 흘리는 삶을 표상한다. 고통의 극한에서 체험하는 이러한 피흘림은 삶을 비정하게 인식하면 할수록 더욱 짙은 농도를 띤다. 삶의 어려움, 희생된 삶의 참담함을 묘사하는 이 시에서 그러나 화자는 희생의 미학에 대해 말한다. 그것은 피고름의 시, 다시 말하면 “모발유같은 피고름이 내 머리 속에서 뮤즈로” 피어나는 그러한 경지를 일컫는다. 이러한 경지는 냉엄하게 자신의 삶을 성찰할 수 있을 때만 가능하다. 그것은 삶에 대한 비정한 인식이 마침내 도달한 시의 공간이다.
자신의 삶에 대한 비정한 인식, 그러한 인식이 환기라는 치열한 삶에의 의지는 「밤바다에서」라는 시에서 세속적인 삶으로부터 자기이탈이라는 안타까운 몸짓으로 변용된다. 세속적 삶은 피 흘리는 삶, 희생된 삶으로 요약된다. 「밤바다에서」는 그러한 삶의 극한에서 화자가 자신을 다시 세우려는 안타까운 몸짓을 보여준다.
짐짓 떨어져 나갈
극한에 내가 섰다.
등에 층층이 둘러선 방차제는
지금 나로부터 멀리 숨지어 가고
있는 시간으로 묘사된다. 이 시에서 눈여겨 볼 부분은 “내가 섰다”는 구절이다. 선다는 것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시인의 경우 세속적인 삶에의 거부, 비정한 자기성찰, 그리하여 오욕으로 점철되는 일상적 삶의 모순이나 역리를 꿋꿋이 딛고 일어서려는 결연한 의지를 표상한다. 밤바다에서 화자가 서 있는 것은 노가리집에서 화자가 앉아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이미지이다. 앉아 있을 때 혹은 쓰러졌을 때 화자가 보여주는 것은 피 흘리는 삶, 희생당한 삶으 모습들이었다. 그러나 그가 서 있을 때, 그것은 한목의 이미지에서 읽을 수 있었듯이 피 흘리는 삶, 희생당한 삶을 딛고 꼿꼿이 일어서려는 의지를 표상한다. 이 시에서도 그렇기 때문에 화자는 “하얗게 씻기어 밀려 나온 패각, 이 ”혹도 앞에 오열할 뿐“인 시간 속에서 ”갈증난 심장만이 / 눈을 뜨고 서둘기 시작한다”고 뇌인다. 갈증난 심장이 눈을 뜨고 서둘기 시작한다는 말은 새로운 정염의 불씨가 타오르기 시작함을 뜻한다. 그것은 모래를 바다 속에 던지는 화자의 행위에서도 암시된다. 휘어진 수평선을 당겨도 해상에 늘어선 산맥을 따라 일어서지 않는다. 그러나 화자는 바다에 모래를 던진다. 그것은 자신의 삶에 대한 은밀한 성찰을 암시한다. 이러한 성찰은, 무론 비정과 의지를 기본율로 하지만, 예컨대 「모래통」같은 시에서는 비정의 밑바닥까지를 꿰뚫어 보려는 또 다른 의지의 세계로 나간다. 「모래통」에서 화자가 노래하는 것은 부재하는 꽃망울과 대비되는 바다의 기쁨이다. 꽃망울은 없지만, 바다가 밀려온다는 사실에 대한 화자의 찬탄은 그러나 모래통을 “아프도록 웃어볼 수 있는” 언저리로 인식함으로써 세속적인 삶의 역리를 초월하려는 자기풍자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욕설에 말려 시들기 보다는 목청을 높여 웃어보겠다는 이러한 태도는 물론 세계에 대한 냉소주의적 태도를 동반한다. 물론 비정의 밑바닥에서 이 시인이 체험하는 것은 일종의 해학, 곧 자기풍자와 세계에 대한 냉소이다. 그리고 마침내 하늘 끝에 웃는 바다를 그가 보게 되는 것도 이러한 시각 속에서이다. 이러한 시각 속에서 그는
숨은 망막에
바다의 핏자국을
새기리니
물론, 알몸이야
바다 소리에 뒤집혀
귀 없는 번데기로 묻히지만,
실은, 아직
금 가지 않은
비정의 밑바닥이 좋다
부질없어 좋다
고 말한다. 비정의 극한에서 이 시인이 체험하는 이러한 태도는 「낙원동」, 「관철동」에서는 아이러니의 태도로 변용되며, 강남을 노래한 시편들에서도 강남에 대한 아이러니칼한 시점으로 드러난다.
시집 山上垂訓에서 읽게 되는 삶에 대한 비정한 인식, 그러한 인식이 환기하는 강인한 의지, 그러한 의지가 성취하는 간명한 시적 공간은 다시 산상의 세계, 지상의 세계, 바다의 세계로 니뉘어진다. 「한목」 「푸루」 「모래통」의 이미지는 尹明 시인의 세계를 집약하는, 매우 치열한 고통의 산물이다.
東洋的 思惟와 ‘허허’ 哲學
洪 性 岩 (동덕여대 국문과 교수)
< 1 > 시인과 고향
元永東시인은 강원도 사람이다.
출신지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의 성격이나 작품 모두가 강원도적이다.
강원도 사람을 흔히 「巖下老佛」이라고 한다. 큰 바위 아래서 참선 중에 있는 늙은 중이란 말이다. 그 늙은 중은 이미 도를 깨쳐서 부처의 경지에 들었다. 세속의 온갖 잡사에서 초연하고 구름 비 바람으로 부터도 초탈하여 바위 자체인양 의연하다. 그렇다고 그 부처의 내면마저도 바위처럼 무감감한 것은 아니다. 인류의 온갖 어리석음이 눈에 들어 오고 귀에 들린다. 그들에 대한 자비심으로 그 심장은 터질듯 고통스럽다. 인류의 생명과 행, 불행을 주관하는 그 엄청난 일들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수행해야 하는 부처님의 임무는 참으로 외롭다.
元永東시인은 곧 ‘巖下老佛’의 전형이다.
그는 남보다 먼저 웃고 남보다 먼저 말하고 남보다 먼저 행한다. 남을 즐겁게 하고 싶고 남을 편하게 하고 싶고 남에게 도움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그렇게 남보다 빨리 하려고 항상 서둔다. 그래서 성미가 급하다는 오해도 받는다. 그러나 내면 깊숙이 있는 그 외로움을 누가 알 것인가? 그것은 시인 자신의 몫이다.
元永東시인이 강원도의 산과 물과 바다를 즐겨 찾는 것은 그러한 자신의 내면과 강원도적인 속성이 너무나도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 자연이 시인을 길러 주었고 그 자연이 지금도 시인을 위로해 주기 때문이다.
“나는 원주에서 나서 철원에서 자라고 강릉에서 뜻을 기렸으니 감자꽃이다. 송강은 강원도의 산하를 두루 섭렵하고 저 관동별곡도 썼지만 나는 빈손일 따름이다만. . . . 나의 고향은 강원도 도처에 있다. 강원도에는 깊은 추억의 눈물겨운 메시지도 있고 감격스러운 팡세의 파노라마도 있다. 잠시 머물고 잠시 쉬는 곳 어디인들 고향이 아닐까마는 나의 강원도는 분명히 아름답고 영원한 유토피아다. ”
---영원한 고향, 아름다운 산하 찾아. <월간 태백>----
강원도는 元永東시인의 유토피아다.
그는 강원도 원주군 문막에서 팔남매의 0째 아들로 태어나서 유년기엔 뒤뜰처럼 여겨지는 섬강에서 뛰놀았다. 그곳에서 목탄차를 타고 함경도 원산, 함흥, 단천까지 가보기도 했다. 유년기적 고향의 체험은 다음의 시로 형상화 된다.
“해뜨는 문막은 치악산을 바라보면서
섬강을 끼고 길게 누워 있는데
아침이면 잠깨어 삽질하는
늙은 농부가 있어 더욱 아름답다. “
----“해뜨는 문막에서”중에서----
그후 가친이 만주의 연해주로 떠나게 되어 팔남매 중 다섯은 강원도 철원군 북면으로 이사를 해서 소년기를 보낸다. 그곳에서는 금강산이 가까와서 내금강역 벚꽃놀이도 가고 장안사, 표훈사, 마하연, 만폭동 구경으로 밤을 새운 기억도 갖고 있다. 6:25때는 학도병이 되어 울진, 삼척, 묵호, 강릉, 간성, 아야진, 고성, 통천, 원산, 영흥까지 강원도의 동해안 해안을 주파한 기록도 있다. 그리고 대학을 졸업해서는 강릉사범학교에서 10여년간 교편을 잡게 되는데 이때가 시인의 청춘이었다. 이곳에서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일으킨다. 그는 강릉에서의 생활을 다음과 같이 술회한다.
“그때 강릉에는 유명한 ‘삼문사’가 있었는데 전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서점으로 전시도 잘 되고 고객도 많았다. 그 학부모는 1년에 한 번쯤은 전 직원을 초청했다. 전가족이 정장하고 현관에서 교사들을 맞거나 중국집으로 초대를 했는데 주인은 나비 넥타이에 연미복을 입고(부인과 따님은 한복을 입었다. ) 성생님들께 90도로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음식도 가족들이 나르고 부복하듯 했다. 스승의 절대 권위를 경배했던 삼문사집의 가풍은 후일 그 자제들을 모두 명문대학에 진학시켜서 그리로 이어졌지만 그 삼문사의 단골손님이 황금찬, 윤명, 이인수, 신봉승, 함종덕, 서근배, 이성교, 김남형, 함혜련, 이영섭, 엄기원, 김정개 같은 유명한 분인데 훗날 중앙문단에 모두 등단했다. ”
---‘영원한 고향 아름다운 산하 찾아”<월간 태백>----
元永東시인은 매달 월급의 반을 이 삼문사에서 책을 사는데 썼다고 한다. 그만큼 당시의 강릉은 문학적 열기가 높던 곳이었다. 그들 문학도들은 노가리 주점의 값싼 카바이드 막걸리를 마시며 톨스토이의 인생독본과 파스칼의 팡세를 논했다.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를 읽고 까뮤의 ‘이방인’을 토론했다. 철학적 논쟁도 했지만 청년 문학도다운 객기도 부렸다. 경찰서 정문인 객사문에 오줌을 깔기고 남대천 제방뚝에서 비틀거리며 고성방가가 예사였다. 50년대와 60년대의 암울한 시기에 젊은 지성인들의 몸부림이기도 했다.
그는 이런 강릉의 문학풍토에 한 멤버가 되었고 그것이 시인으로 문단에 데뷰하게 된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그는 이 시기에 김용호, 김광섭, 신석정시인의 추천으로 <자유문학>지로 데뷰를 하게된다. 그리고 상당한 수의 제자들을 키우게 된다. 강릉에 대한 기억은 다음의 시편에 나타나고 있다.
“바람은 모질게 육신의 마디를 두들긴다.
西의 대관령 東의 갯바람
모두가 내 젊은 꿈을 앗아간 바람이었다.
나는 너로 하여금
시들었던 꿈을 다시 새기고
이렇게 지금은 內室에서 종일 운다. “
---“江陵誌”중에서---
元永東시인은 강원도에서 태어나고 강원도에서 성장하고 강원도에서 시인이 되었기 때문에 그는 강원도를 사랑한다. 그러한 사랑의 마음은 수시로 강원도의 산하를 찾는 것으로 표현된다. 그는 본래 산을 좋아하여 휴일에는 동료문인들과 더불어 서울 근교의 북악산, 도봉산, 관악산, 수락산, 불암산, 수리산, 감악산 등을 오르고 여가의 시간이 길때는 한라산의 백록담, 지리산의 천왕봉, 소백산의 국망봉, 태백산의 주목군락지, 월출산의 기암절벽을 찾는다.
그러나 그가 특별히 애착을 느끼는 곳은 춘천의 연엽산, 홍천의 팔봉산, 화천의 무학봉, 명주의 오대산, 삼척의 두타산, 횡성의 태기산, 정선의 가리왕산, 인제의 대암산, 속초의 설악산 같은 강원도의 산들이다. 그리고 영월의 어라연, 동해의 무릉계곡, 고성의 북천 골짜기, 양양의 한계령, 명주의 소금강, 평창의 방아다리, 태백의 용정 같은 강원도의 계곡과 약수터 등이다.
그 밖에도 그는 동해안을 따라 끝없이 펼쳐지는 광활한 바다와 흰 모랫벌, 소나무 방풍림, 포구의 어선들, 그리고 긴 장화로 부둣가에서 질퍽거리는 어부들을 사랑한다. 문막의 섬강은 물론이요 춘천의 소양강, 강릉의 남대천도 사랑한다. 그런 점에서 그는 강원도의 모든 자연에 대해서 특별한 애착을 지닌다.
고향에 대한 시인의 사랑은 다음의 시편들을 통해서 형상화 되고 있다.
“한가위 달 밝은 밤에 경포에 오르니, 동해 만리 수평 위에 달 하나.
호수도 水心에 달 띄우고, 酌禁 10일이라.
너 없은들 눈동자에 어리는 달무리, 내 안에 그득하다만,
西의 대관령 東의 바다, 파도소리 갈매기는 잠들고 문명이 앗은 백사장엔 네온이 현란하다. “
----“玩月 批點” 중에서----
“설악산 千佛洞은 길 올라 칠십리
길너머 골마다 구비구비 단풍이라
예닐곱 아흐레 묵으면 曲百潭 다 볼까
붉은 나무 다래덩굴 머루 좋아 신나무 떡갈나무
벼랑 위에 돌무더기 비선대 미륵봉
깊은 곳에 울긋불긋 수 놓아 바람 잔다. “
-----“풍류 단풍” 중에서-----
“7월 중복은 내 어려서 마냥 세세 한 번은 꼭 찾아 오르는 上院寺.
상원사는 오대산 月精寺의 山內本寺.
내 여기 크고 작은 폭포 아래서, 한 해의 열기를 잊고 물을 맞는다.
한강의 물줄기를 따라 한 사오백리, 그 水源의 오대산 상봉에 와서, 내 새삼 낙조에 여운지는 신랏적 梵鐘에 귀 기울이면, 그 선덕여왕 때의 매미소리 한갖 風樂 잡힌다.
---“山行 飮水” 중에서----
元永東시인이 강원도의 산천에 대한 인식은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에서의 정서와 일맥 상통한다. 강원도의 산과 강과 바다에 대한 찬탄과 그 아름다움을 즐길 줄 아는 풍류의 면에서 그러하다. 위의 시편들에서도 시인의 풍류의식이 두드러지고 있음을 살필 수 있는데, 우리의 경우 풍류란 곧 인간 행복의 본질에 근접한 것으로서 신라이래로 전해지는 우리의 고유의 사상이기도 하다.
즉 풍류속에 행복이 있고 풍류속에 여유가 있고 풍류속에 건강이 있다. 이 풍류는 자연과 하나가 되는 과정에서 극대화 된다. 이는 시인의 다음 말에서도 엿볼 수 있다.
“흔히들 빛과 공기와 물은 생명의 3대 요소라고 한다. 그 중에서도 물이 으뜸이고 공기가 으뜸인데, 아름다운 산하의 명산(공기) 명수(약수)는 생명의 근원이다. 인체 몸무게의 3분의 2가 수분이라고 하니 무병장수의 맑은 물, 푸른 공기는 건강의 첫째 조건이다. . . . . . . 산에 가서 산을 마시고 물에 가서 물을 마시고 飮水思源하니 새삼 하늘이 푸르다. 산처럼 물처럼 자연 그대로의 순리와 섭리로 살아가는 것이 산행의 목적이다. ”
-------“영원한 고향, 아른다운 산하 찾아“<월간 태백>--
자연의 순리와 자연의 섭리를 따라 자연처럼 살고자 하는 시인의 마음은 곧 그의 좌우명으로 나타난다. 元永東시인의 좌우명은 <思無邪> <他山之石> <上善若水>다. 그는 생각함에 있어서 사특함이 없기를 소망한다. 다른 사람의 보잘 것 없는 행동에서도 내가 지켜야 할 본분을 배운다. 가장 선한 것을 물의 생태에서 배우고자 한다. 남보다 아래에 있고자 하며 항상 순리대로 살고자 하며 무리한 욕심을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그가 좋아하는 친구도 조금 부족한 것 같고 조금 어리석은 것 같고 조금 무디고 조금 양보하고 남의 형편도 생각할 줄 아는 그런 사람을 좋아한다. 이처럼 그는 강원도적인 사람을 사랑하는 강원도 시인이다.
<2> 영원한 스승의 길
元永東시인은 평생을 교육자로 일관해 왔다. 강릉사범학교에서 교편생활을 시작한 이래로 다른 어떤 직장도 기웃거려 본 적이 없다. 제자들을 위하여 정력을 쏟았고 그것으로 보람을 삼았다. 그의 시도 어떤 면에서는 교육의 한 방편이었다. 시를 통하여 스스로 올바른 인간이 되고자 했고 시를 통하여 올바른 인간을 기르고자 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시는 다분히 긍정적이고 윤리적이다.
“아들아!
소금의 맛과
사랑의 맛은
한없이 경험하고
한없이 주는데 있느니라.
星霜을 품고 生業을 배운
아비의 말을 잊지 말아라. “
--- <人生吟>중에서---
“너는 너로 하여금 분명히
죽어서 다시금 살아나는 땀의 敎訓을 배우지 않은 한
그 손금은 평생을 두고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이다.
땀의 교훈!
그것은 바위돌 하나를 밀어서 山頂에 올리는
평생의 작업이다. “
----<운명론> 중에서---
앞의 시가 ‘사랑’의 속성을 말한 것이라면 후자는 ‘땀’의 위력을 말한 것이다. 바로 사랑으로 베풀고 땀으로 실천하는 것이 元永東시인의 교육사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의 주위에는 많은 제자들이 구름처럼 몰려 있다.
“나의 제자 중에는 문인, 교수, 변호사, 판사, 시장, 군수에서부터 국민학교 선생님에 이르기까지 화려하다. 가장 열심히 땀흘려 교육했던 것으로 자부하지만, 정성이나 땀은 교육의 수단이지 목표는 아니다. 가장 부드러우면서도 가장 강한 사람 , 사람다운 맛이 나고 사람다운 향기가 나는 사람을 나는 몇이나 키웠던가. ”
----「영원한 고향, 아름다운 산하 찾아」 중에서---
元永東시인은 학교에서 제자들을 직접 교육하기도 했지만 문학의 길을 함께 걷는 동료, 후진들에게 문학의 참된 길을 선도하는 길잡이 역할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가 각종 문학 단체에서 활동하면서 많은 문우를 사귀게 되는 경우에서나 산행을 통하여 여러 문우들과 우정을 돈독히 하는 일정 속에는 바르게 배우고 바르게 행하려는 큰 뜻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우리 한국문인 산악회는 건강과 우정과 자연보호를 높이 든 친목의 깃발이 있다. 문덕수, 황명, 함동선, 장윤무, 이은방, 이동희 교수를 비롯하여 엄한정, 정득복, 김인섭, 최용순, 조효현, 최단천, 권철학, 송복순 등 기라성 같은 중진과 소장 문인이 30-40명이나 늘 모인다. 도시락과 소주 한잔에 지참금도 없이 새벽에 나와서 저녁에 별을 보고 전국을 누빈다. ”
----「영원한 고향, 아름다운 산하 찾아」 중에서---
元永東시인을 평하여 문덕수는 ‘온화하고 중후한 인품의 성실한 사람’(「흰돌의 초상」서문)이라고 평한 바가 있고 황금찬은 ‘천성의 인품처럼 맑고 아름다운 생각과 건강하고 성실한 시를 쓰는 사람’(「흰돌의 초상」에서)이란 말로 평한 바가 있다. 장윤익은 원영동의 시가 ‘모든 사물을 너그럽게 포용하고 사랑’하는데서 출발하고 ‘스승의 마음이 곧 시의 마음’이라는 확고한 창작정신을 지니고 있음을 설파한 바도 있다. (「흰돌의초상」에서)
스승의 마음이 곧 시의 마음이라는 이러한 창작 정신은 元永東시인의 오랜 교육자로서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시가 지향하는 바도 스승의 길과 일치하는 것들로서 성인 숭배나 역사에서의 교훈, 그리고 후진들에 대한 조언이란 양상으로 나타나게 된다.
“나를 사람이 사람되게 향기 짙은 꽃나무로,
우람한 잣나무로,
친구여! 지극히 작은 돌 하나로
어디서나 있으나 마나한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
없어서는 아니 될, 꼭 있어야 할
그 사람으로 다져주신 어른이여!”
----「스승의 교훈」 중에서---
“悉達多는 녹야원에서 이슬 하나 먹고
여든살에 열반하기까지
스물아홉 젊은 나이에 집을 나와
太子의 탈을 벗으며 45년간이나
나무 밑에서 눈 덮인 들판에서
혹은 산 위에서 大慈大悲하신
석가는 용궁의 보물을 앗고
또 옥황상제의 召命을 거역한 손오공을 다스리어
슬하에 두엇도다.
-----「석가의 눈동자」 중에서----
위의 시편들이 ‘스승의 교훈’을 다룬 점이나 세계적인 성인인 ‘석가모니’를 찬양하는 것들은 모두 인류의 바른 가르침을 천착해 보는 스승으로서의 시인의 위상이다. 이러한 태도는 고향의 사물을 조국애로 확대 인식하거나 기행시들이 모두 역사와의 만남으로 변용되는 양상에서도 들어난다.
“우리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아들의 핏줄 하나로
고향에 사시더니,
아들이 먼저 만세를 부르고
할아버지께서도 산허리에 묻히자
그가 젊어서 입으시던 옷과 생각이랑
모두 거두어 홀홀단신“
-------「고향」 중에서----
“산이 여기까지 뻗어 온
강이 여기까지 흘러 온 고구려 땅
中原 들판에 너는 홀로 와서
역사의 무덤처럼 무성한 풀숲나루에
우뚝 너는 돌로 묻혀
千有五百年 노을 하나로 謫所에 갇혀
묘비인양 碑峯 하나 지금은 눕혀져 있다.
-----「碑」 앞에서----
고향 땅의 아버지 할아버지는 나라의 독립을 찾으려고 만세를 부르던 그 아버지며 할아버지이고 우리의 산과 강은 고구려의 산과 강으로 역사의 기억을 함께 간직한 것들이다. 이처럼 시인은 항상 일상의 것들도 모두 역사의식의 투영속에서 파악하고자 한다. 이는 작은 것 하나도 소홀히 취급하지 않는 시인의 애착과 포용성의 결과이지만 이런 마음의 밑 바탕엔 스승의 길을 지향하는 기본 의식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제자들을 의식해서 쓴 시편들은 한 둘이 아니다.
“아침의 교문은 목책을 끼고
포풀라나무가 줄지어 섰고
아이들의 얼굴이 하나씩 짝지어
분주히 밀려 온다“
----「질서」 중에서---
“꽃의 香氣
꽃의 精氣
나도 꽃처럼 사뭇 피면서 半白을 살았다.
격렬하게 흐느끼듯 폭풍우를 눕히는
음악당의 피아노소리가 여운진다.
바야흐로 正午의 교실은
난숙한 꽃밭이다. “
--------「正午의 꽃밭」 중에서---
“어쩌다 하늘을 본다.
바쁜 시간이면 공을 차거나
계단 같은 데서
혹은 실험실 해바라기 밭에서도
나무 가지 사이에 걸려 있는 노을은 붉게 탔다.
아이들의 눈동자가 더욱 밝아서 좋은
어느 日沒의 뜰악은 아직도 만세소리가 쟁쟁하다. “
---「만추」 중에서---
등교길에 보이는 아이들은 포풀라나무처럼 질서 있고 싱싱하며 교실에서 웃고 떠드는 아이들은 정오의 꽃밭처럼 아름답다. 운동장에서 공차기를 하는 아이들과 이겨서 만세를 부르던 그 목소리의 여운들은 저녁 노을속에서 더욱 쟁쟁하게 기억된다. 시인은 그런 아이들을 사랑하며 반백을 살아 왔다.
그리고 그런 아이들을 사랑하기 위해서 시인은 스스로를 연마해야 했다. 부단한 자기 연마야 말로 올바른 스승의 길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항상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돌아보고 추호도 잘못이 없는 바른 길을 살고자 염원한다. 그러한 염원은 욕심을 버리는 것이며, 성실하고자 하는 것이며, 자신의 인격을 갈고 닦아 보다 새로와지는 것이기도 하다.
“生의 病을 견디고 다스리며
生의 病을 묻고 씻으며
한없이 강가를 올라 왔다.
물엔 물꽃
돌엔 돌꽃
흰물 흰돌에 새겨진 肖像
그리운 너의 얼굴이 하나하나 새겨진다.
물: 돌 위에 그려지는 큰 얼굴
너를 지우려고 강에 와서
너를 다시 그리고 새긴다. “
-------- 「흰돌의 초상」 중에서------
물과 돌은 같은 개울에 어울려 있지만 그 속성은 전혀 다르다. 물은 형체가 없고 수시로 변하는 종류라면 돌은 변화를 모르고 하나의 형상을 영원히 지속하고자 한다. 시인은 이런 돌과 물에 자신의 얼굴을 새기고자 하고 또 새롭게 변형시키고자 한다. 그의 많은 과거가 돌꽃으로 형상화 되고 또한 물꽃으로 변형되고 있다. 하나의 나를 지우고 하나의 나를 만들어가는 작업을 통하여 시인은 나날이 새로와진다. 그리고 그런 새로움 속에서 제자들 또한 성장하고 시인은 영원한 스승의 길을 걷게 된다.
<3> 생활시와 풍류정신
元永東시인은 범속한 생활인임을 자처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시는 항상 일상적인 생활을 소재로 하고 있고 그래서 부담이 없다. 이런 범속한 생활인으로서의 위상은 생활의 기초 단위인 가정과 혈연과 평이한 세속사에 대한 관심에서 찾아보게 된다.
“한 칸 집을 부러워하던 아내가
삼층집 침대에서 손자놈을 재우듯 지아비를 재운다.
꽃 같던 얼굴이 시나브로 떨어져서 나무등걸처럼 우뚝 섰다.
눈서리 내려도 아내의 목소리는 변하지 않았다. “
-----「夫婦頌」 중에서---
“오늘 아침은 신문이 없으니
하루가 허전하다.
잠시 보면서 잠시 잊으면서
그렇게 우리 부부의 하루는 시작된다. “
---「아내의 신문」 중에서---
“그해 봄이던가
살구꽃이 피고
살구나무에서 살구가 떨어질 때까지
아내는 입덧을 했다. “
----「아내의 입덧」 중에서---
인용된 시에서 시인은 주로 아내의 일상을 시로 형상화시키고 있음을 살필 수 있다. 특히 근래엔 아내를 소재로한 연작을 쓸만큼 그가 아내를 의식하는 정은 각별하다. 그는 ‘시작 노트’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나는 팔불출인가 봐. 아내를 사랑하니까. 내가 그렇게 말하면 아내는 또 나는 칠순인가 봐. 남편도 아이도 한없이 자랑하고 싶으니까 한다. 그렇게 해서 우리 집은 모두가 자랑으로 일관한다. 좋은 버릇 좋은 습관 그런 것으로부터 아내가 만든 음식은 모두가 좋다. 아이들도 어미의 고전적인 미소로부터 옷매무새 입매무새까지 사랑하고 자랑한다. ” ( 「시작 노트」 <시문학> 1995. 2. )
元永東시인이 가족에 대한 사랑은 각별하다. 그는 3남 1녀의 자녀들을 훌륭히 키웠다. 가정을 이끌어 나가는 가훈은 ‘땀흘리는 사람’이 되자는 것이다. 그렇게 모두들 자기의 본분에 열심이다. 부모가 솔선수범하고 자식들이 본받고 따르는 그런 모범적인 가정이다. 기독교적인 신앙의 밑받침이 이런 유대를 더욱 돈독히 한다. 막내 딸인 혜정은 아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집안의 가장인 우리 아빠, 나는 아빠의 글쓰는 모습을 가장 사랑한다. 하얗게 피어오르는 연기 넘어로 왠지 모르는 푸근함과 멋을 간직한 한 시인을 발견하곤 아빠의 작은 팬이 되어 버린다. 따뜻한 차 한잔에 우리 아빠와 나는 행복을 느낄 수 있다. ”(원혜정, 「우리 집」<흰돌의 초상>)
생활의 기본 단위라고 할 수 있는 가정에 대한 안정은 시인의 긍정적 가치 의식과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 아내를 사랑하고 자식을 사랑하는 그 마음이 그대로 제자들을 사랑하고 동료들을 아끼는 마음으로 확대 된다. 또한 우주의 모든 것들을 긍정적으로 보고자 한다. 산은 산이라서 좋고 물은 물이라서 좋다.
“어머니는 죽어선들 아들을 위하고
아들은 살아 남아 어머니를 섬기더니
지금은 우리 어머니 古稀가 되시어
양옥집에서 손자놈을 재우신답니다“
---「新母像」 중에서----
“무수한 곷들이 피고지던 가지 위에
하늘이 준 最大의 恩惠로
하늘의 空白을 채우면서
百으로 紅으로 受胎한 능금알“
---「果園」 중에서---
“내 안에 영원히 있어 더욱 그리운
해가 되어라.
달이 되어라.
무엇이든지 소리치며 和答하는 짐승이 되어라. “
----「和答」 중에서---
元永東시인의 긍정적 우주관은 앞의 인용시를 통하여 쉽게 인지할 수 있다. 즉 처음 시는 어머니와 자식으로 이어지는 인간 관계에 대한 시인의 시각이라면 둘째는 자연물에 대한 시각이며 세번째는 추상화된 것으로서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상대로 한 것이다. 어머니와 아들과 손자로 이어지는 따뜻한 사랑의 대물림과 과원의 과목들이 충만한 하늘의 은혜로 수태하는 결실과 그리고 내 안에 들어와 해가 되고 달이 되는 너와의 융화는 모두 시인의 긍정적인 세계관을 들어낸 것이다. 주어진 현재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또한 누릴 줄 아는 시인의 인식은 그 자신 자연의 상태로 환원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호와 하느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시고 나서 그 완벽함에 스스로 만족하시고 ‘보기에 좋더라’라고 감탄하신 그런 지순하고 지고하신 큰 섭리를 그대로 받아들임에서 가능한 것이다. 산처럼 물처럼 자연 그대로의 순리와 섭리대로 살겠다는 마음 가짐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대사회적인 발언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고 설혹 그런 마음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일상적이 것으로 약화되기 마련이다.
“나라와 정부를 힐란하거나
정치를 욕하고 힐책하는 것이 아니란다.
십원짜리 동전 두어개를 삼킨 공중전화 앞에서
정부를 욕하고 전깃불이 꺼져서만이
항변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약한 자의 實戰으로나 생각하면서
들어 줄 수 있는 자의 喜悅로나 생각하면서
그저 俗氣로 민중은 抗辯하는 것이다. “
---「抗辯」 중에서---
元永東시인의 이런 긍정적 우주관은 작품 세계의 단조로움에 빠질 우려가 없지 않다. 이런 우려를 그는 풍류로 극복해 보이고 있다.
“물을 마신다. 황소처럼 酒煙을 끊은지 오랜 내가 새삼 여기와서 飮水思源을 吟味하듯 인생의 無常함을 짐짓 느낄 줄이야! 물속의 가제야! 작은 은어떼들 껑충 뛰는 이 작은 始原에서 한 더위를 잊었노라”
---「山行 飮水」 중에서---
“어하! 勺水不入이다만, 술 아니면 謫仙 李白이 紅粧이 어디 있나. 大抵 달빛이 내 안에 있고, 내 밖에 달빛이 그득하니, 秋毫도 너 그르다 아니하리. 어하! 스위스의 레만, 北極의 달도, 내 안에 있다만, 어찌 東의 네 얼굴에 비기랴. ”
----「玩月 批點」 중에서---
이런 일련의 시들은 일상적 생활을 긍정하는 바탕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자연과 일상을 즐기는 것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풍류는 신라시대 이래로 우리의 국풍(國風)이다. 자연을 사랑하고 자연을 즐기며 자연의 섭리대로 사는 가운데 장수무병하고자 하는 우리 고유의 사상이다. 신라의 화랑들이 심신을 단련하는 한 방편으로 풍류를 앞세웠도 우리의 선비들이 세속을 초월하고 극복하는 방편으로 풍류를 내세웠다. 풍류는 극락정토를 우리의 현세에 구현해 보고자 하는 사상이며 저승에서가 아니라 이승에서 이루어 보고자 하는 종교이기도 하다.
시인은 이런 풍류의 정신을 시로써 구현하고자 햇고 그런 노력은 기행시의 출현을 가능하게 했다.
“史眼의 都市
예술의 파리는
노을 속에 붉게 타고 있었다.
선동적인 마르세이에스여!
榮光스런 三色旗여!
永遠하라!“
----「巴里 素描」 중에서---
“런던塔의 날개 잘린 까마귀들이
나라의 국보를 지킨다는데
방탄 유리 상자 속에 550캐러드 다이아몬드는
차라리 버려라.
너에게는 민주주의의 꽃밭
빅:벤이 있고
처칠 首相이 있지 않은가. “
----「런던과 처칠像」---
元永東시인의 기행시들은 풍류시의 변용 양상으로서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즉 시를 생활화 하고 시를 즐긴다는 면에서 그 인식의 범주가 동일하기 때문이다. 시가 생활이고 생활이 시이기를 바라는 시인의 풍류의식을 이들 작품들을 통해서 접근해 볼 수 있는 것이다.
<4> 동양적 사유와 「허허」철학
元永東시인의 시에서 일관되고 있는 것은 동양적인 사유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사물을 대하되 요란하지 않고 과장하지 않고 수묵화적이며 정태적이다.
“아주 큰 湖水다.
꽃들이 피면서 갈대밭은 더욱 울고 있었다.
바람으로 울면서 가난으로 울면서
호수는 여나문개의 물줄기가 모여서
山과 하늘을 품었다. “
---「湖水」 중에서---
“숙이와 같이 손을 잡고 놀다가
십리 멀리 숙이와 손을 잡고 놀다가
수정궁 다리 밑에 물을 뿜고 놀다가
예닐곱 숙이와 손을 잡고 놀다가“
---「水彩畵」 중에서---
위의 시들은 소재적인 면에서는 차이가 있다. 즉 앞의 시는 자연물을 대상으로 한 것이고 후자의 경우는 숙이와의 추억이라는 행위이지만 두 작품에서 느껴지는 수묵화적인 분위기는 동일하다. 즉 시인은 현상의 사물을 그대로 제시하기 보다는 화폭에 옮겨서 보여주는 방법을 사용한다. 사물은 하나의 틀속에 균형을 잡고 하나의 행위도 기억의 시간 속에 갇힌 모습이 된다. 그의 시에서 느껴지는 정태성과 정물성은 그런 기법을 통해서 가능하게 된다.
이 시인의 성공적인 작품이라고 평가되는 「꽃밭」에서도 그런 틀의 의식은 분명하다.
“해질녘에 우연히 꽃밭을 보면
하나의 노을이 꽃봉오리에 와서
두어개의 꽃잎이 노을 속에 피어서
서너 개의 꽃나무가 수없이 노을로 만발하면서
드디어는 靑의 하늘이
紅의 꽃잎이
수없이 수없이 불을 밝히면서
지상의 모든 램프를 모아 놓고
古宴이나 觀燈의 불꽃놀이 같은
靑紅의 꽃밭“
----「꽃밭」 중에서----
이 작품은 시인의 청춘을 그대로 엿보게 할만큼 찬란하고 아름답다. 그런 화려를 극한 찬란함에도 불구하고 이 꽃밭은 하나의 화폭속에 정물로 자리잡은 채색화의 범주를 넘어서는 것이 아니다. 즉 꿈의 빛깔이고 환상의 풍경이며 역동적이기 보다는 관조의 산물이다. 여기서의 꽃은 노을과 더불어 스러져가는 것의 아름다움이다. 즉 동양적 사유의 바탕에서 창작되어졌기 대문이다.
元永東시인의 동양적 사유는 그의 「허허」철학에 잘 반영되어 있다.
“때로는 엄숙하게 기도하며
눈을 감고 흐느끼는 아내는
허허 숙연하고 찬연하기까지 했다. “
----「아내의 눈물」 중에서---
“남자끼리 있을 때도 싸우고
여자끼리 있을 때도 싸우고
남자와 여자가 함께 있을 때는
절대로 싸우지 않았다.
우리 부부는 평생을
허허 한번도 싸우지 않았다. “
---「싸우는 자와 싸우지 않는자」 중에서---
元永東시인의 근작시 중에서 「허허」의 표현이 자주 나온다. 그런데 이런 표현은 작품적 분위기를 위해서라거나 운율적 기교로 사용된 것이라기 보다는 인생과 우주를 대하는 시인의 기본적 의식 곧 ‘달관’의 자세와 무관하지 않다. 이순(耳順)의 나이에 들어선 시인에게는 세상의 만사가 자연의 섭리 이상이기 어렵다는 깨달음과 궤적을 같이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깨달음 때문에 시인은 남과 시비를 벌이는 일이 없다. 남을 비평한 적도 없다. 나를 낮추고 남을 높인다. 할 수만 있다면 남에게 도움이 되고자 한다. 「허허」 한 번 웃고 모든 것을 포용할 줄 아는 시인은 동양적인 달인의 면모를 지닌다. 그래서 그의 주위는 늘 후광처럼 부드러움이 감돌고 화기로운 서기가 감돈다.
元永東시인의 시들이 우리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이유도 그런 것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무리해서 시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과일 나무에 열매가 맺히듯이 시인은 때를 기다려 열매를 맺게한다. 자기다운 작은 열매로서 충분하다. 무리한 명작을 소망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그런 아버지에
그런 어머니지만
나의 나를 사람답게 손잡아주고
또 나의 아내를 더욱 아내답게
잡아주고 안아주어서
강이 되고 산이 되게 어루어 주었다. “
----「사람답게」 중에서---
시인은 인용의 시에서처럼 나는 나답게, 아내는 아내답게, 그리고 강이나 산처럼 사람답게 되고자 한다. 그런 소망을 위해서 자연에 거스르지 않고 자연의 섭리에 귀를 기울이며 살고자 한다. 어려움에 부딪칠 대마다 「허허」 한 번 웃고 매듭을 풀어 버리고 「허허」 한번 웃고 세속의 욕심들을 떨쳐 버린다. 허허」 한 번 웃는 것으로 만사형통이다. 참으로 위대한 달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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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 또 감사
윤명 선생님의 이영섭 시인에 대한 절규.....
(*선생 님은 정태완의 옥천초교 6학년1반 담임이었지요.
지금도 선한 그 모습 지우기 어려운 심정입니다,)
원영동 선생 님!고마우신 선생님....................
(*저의 병설 중 문예반 선생님, 그 당시 발행되었던
<양지>창간호를 열어보니 저의 "이끼"란 제목의 시가 보이네요
그리운 그 시간 지금도....................)
윤명 은사님의 글 올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선생님의 오랜 옛시를 보고 갑니다. 노가리 집. 그리운 노가리집.. 밤바다 등
선생님의 예전의 모습이 담겨잇읍니다 요즘 건강은 어떠신지요?
이영섭 형의 사모님이 우리 아파트에 계셔서 첫 시집을 1권 구하엿읍니다 시집 원시의 벼랑....너무 반가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