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출전날 새벽의 회상
고대하던 용인시장배 배드민턴대회 시합날, 내가 60대에 들어서 입문한 배드민턴의 선수로서 첫 출전, 아니 난생 처음으로 공식 시합 첫출전의 운동과는 거리가 먼 나에게는 가위 역사적인 날이 밝았다. 이날을 맞는 나의 설레임 가운데 아련한 반세기 전 오늘처럼 손꼽아 기다렸던 어느 청명한 가을날이 밝아오는 지금도 생생한 내 마음속 잔영, 붉게 물든 동쪽 하늘의 여명이 회상된다.
동족상잔의 쓰라린 상채기가 겨우 아물어가는 격동의 오십년 초반, 나의 중학교 3학년 때인 1958년 가을, 온 나라가 '못살겠다 갈아보자' '갈아봤자 별 수없다' 구호의 정치 이벤트 정부통령 선거를 치루고 힘들고 헐벗은 수렁을 빠져나오고자 안간힘 몸부림쳤던 그 시대, 마치 힘든 삶의 질곡중 막간 청량수인듯, 백두대간 소백산 구간 자락에 터잡은 아담한 소도시 예천에는 맑은 옥색 하늘만큼이나 쾌적하고 설레는 열띤 향연이 펼쳐졌으니, 매년 개최되는 읍내 중, 고등 라이벌전이며 이는 학교들만이 아닌 범예천읍민 행사이기도 하였다.
내 고향에는 중. 고등학교가 각 둘이었는데, 사립학교로 대창중, 대창고 공립학교로 예천중, 예천농고가 있어 런닝메이트로 계열화되어 정기적으로 매년 가을 읍내 중심부에 있는 예천 초등학교 (당시 예천서부 국민학교)에서 라이벌전이 개최되었다. 영국 옥스포드와 켐브리지 대학이 메년 라이벌전을 열어 런던 시민의 사랑을 받는다는데 이 행사 또한 고향 읍민의 아낌을 받아 그 축소판이라 할만하다.
나는 당시 예천중 3년생이었고 8회였었는데 7회와 6회 선배들이 주축이었던 대회에서 2년간 연속하여 라이벌 대창중에 고배를 마셨다. 그래서 우리가 주축이된 올해야 말로 설욕을 하겠다고 절치부심하여 시합 훨씬 전부터 출전 선수들을 선발 방과후 체육선생님 지휘하에 강훈에 돌입하였으며, 나를 포함한 일반 학생들은 우리의 영웅들이 기필고 통쾌한 승리를 안겨주어 누적된 패배의 한을 시원하게 풀어주길 간곡히 바라면서 온 마음을 다하여 성원하였었다.
추억은 아름다운 것인가! 흑응산을 등에 지고 소백산맥 오지에서 발원된 내성천 지류 한천이 앞쪽을 휘돌아 감아도는, 양지바른 터전에 자리잡은 그림같은 소도시 예천의 행사장에는, 비록 마이카시대니 성인병이니 하는 넘쳐나는 오늘날의 풍요와는 대조적인 가난하고 부족한, 그러나 자동차 소음, 매연하나 없는 맑은 공기와 청명한 옥빛 하늘, 따사로운 가을햇살 아래 교실앞 화단에는 코스모스, 맨드라미, 백일홍이 곱게 피어 가을 정취를 물씬 풍기고 있었다. 그곳에서의 온통 설래임과 열병같은 흥분에 푹 빠졌던 하루를 회상하니 아련한 반세기 전이었건만 마치 어제 일같이 설래임의 잔물결이 리메이크되어 내 마음에 닥아옴을 느낀다.
우리 예천중은 운동장 동쪽에, 학교의 상징 독수리가, 맑은 창공을 날으는 진짜 같이, 펄럭이는 깃발아래 브라스밴드와 응원단이 진쳤으며, 상대편 대창중은 서쪽에 그들의 사자 깃발과 함께 브라스밴드, 응원진이 자리잡았었다. 까까머리 우리들은 교호 <아카라카 칭 아카라카 쵸 아카라카 칭칭 쵸쵸쵸( 형님벌 예천농고는 입시랜체이호 카시케시캐시코였는데 각각 연세대와 고려대의 교호인줄 나중에 알았으며 상대의 교호는 지그재그로 시작된 것이었던 것 같다) >와 응원가를 브라스밴드 연주에 맞추어 목이 터져라 부르며 온종일 응원의 열을 올렸다.
우리는 '무궁화 가지뻗어 솟은 우리집 앎의 힘 찾고자 모인 학우야'로 시작되는 교가와 함께 <문무의 빛난 칼날 날세운지 오래다, 경기의 사명 예중의 명예 마음에 새겨오던 가을이 왔다. 이 기상 굳센힘을 당해낼자 누구냐(이 구절에서는 당시 이기선 물상선생님의 성함을 차용 이기선 물상선생 당해낼자 누구로 -'로'는 경상도 북부지역 사투리성 어미- 바꿔 부르면서 재미있어 하기도 했었다) 승리는 우리것 싸워라 이겨라 예중 예중 예중 무적의 왕자 예중 프레이 예중 프레이 예중 야!>의 응원가를 관악대의 쿵짝 리듬에 마추어 열창했고 상대편은 <대지를 굳게 밟고 창공을 처다보며(이를 우리는 '돼지를 삶아 먹고' 로 바꿔 부르면서 조롱하곤 했었다)>의 교가(응원가?)로 화답하며 선의 경쟁 열기에 가득찬 운동장을 끊임없이 달구어 나갔다.
트랙안에서의 펼쳐진 상황은 환상 그 자체였다. 경기 종목은 형님뻘인 고등하교급에서는 넓이 뛰기, 높이 뛰기가 포함되었으나 중학교는 전부 달리기로서 100m, 200m, 5000m, 계주 등이였었고 우리측 유니폼은 보라색이었는데 모든 종목에서 우리 선수들이 완전히 휩쓸어, 올림픽대회 여자양궁 종목에서 태극깃발이 시상대를 독점할 때 같았다.
단거리의 이창선, 장운현, 장거리의 이형우, 이상국, 황철호 등 우리 선수들이 준마처럼 상대편을 멀리 따돌리고 내 달릴 때 우리들은 서로 얼싸안고 환호했고 몇배나 더 큰소리로 응원가를 불러댔다. '이 기상 굳센 힘을 당해 낼자 누구냐' 부분에는 주먹을 불끈 쥐고 휘두르면서.. 사실 우리의 스타들이 승리하여 연패의 한을 시원하게 풀어 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으나 이렇게까지 화끈일줄은 기대하지 않았었다. 운동경기중 통쾌함과 감격스러움은 나로서는 세상에 태어난 후 가장 강렬한 것이고 수십년 후 서울 월드컵 대이탈리아 8강전 때 패배가 확실한 종료 직전 설기현의 꿈같은 동점골과 안정환의 환상의 햇딩슛 골든볼 역전승, 온 나라를 벌겋게 달구었던 그 때가 이에 비견할만한 두번째가 되는 것같다.
이와 같은 압도적 승리에는 이유가 있었다. 우리들은 육이오가 발발하던 해에 초등학교에 입학하였고, 전쟁혼란 와중 휴학등 영향으로 중학교 우리 기에는 왕만학도가 많아 몇명의 기혼학생까지 있었다. 이들은 자기들끼리만 모여 킬킬대기도 했는데 아마 아름다운 새색씨와의 새콤달콤 짜릿한 신혼 얘기였을 것이고 우리가 가까히 가면 어른이 아이들한테 하듯이 '저기가서 놀아' 라면서 따돌리곤 했다. 이들 왕만학도들은 라이벌 대창중보다 우리쪽에 몰려 있어 선수들의 주축을 이루었고 따라서 경기는 청소년 대 소년 대항전과 같았었다. 이유야 어떻든, 우리는 숙원이 통쾌하게 달성되는 그 순간의 감격에 흥건히 도취되었고 어둠이 서서히 깔려 대회가 마무리 된 후에도 운동장을 떠나지 않고 응원가등을 계속 반복하여 열창하였다.
이어 우리들은 읍소앞길-안동통로-시장통으로 연결되는 디귿자 형 거리를 교가와 응원가를 부르면서 스크램을 짜고 행진에 돌입하였고 이렇게 하여 승리의 환희를 실컨 만끽한 후 꿈같은 하루를 마감하여 집으로 돌아갈 때 쯤, 투명한 동쪽 가을 하늘에는 우리의 귀가길을 밝혀주려는 듯 해맑은 둥근 달이 서서히 떠올라오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 환희의 거리행진은 이로부터 4년 후 나의 성장한 키만큼이나 확장되어 재연되었으니 장소는 소도시 예천이 아니라 수도 서울 심장부 을지로와 종로였다. 나는 중학교를 마친 후 용케도 명문 서울고등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하여 (이 일로 나는 스타가 되기도 했었다) 고등학교를 마친 후 고려대학교에 입학하였고 그 해 가을에 개최된 '우리는 영원한 맞수' 연세대와의 정기전 '고연전'(상대측에서는 연고전이라 하였고 한국의 켐브리지-옥스포드 전으로 불리기도 했다)에서였다.
종목이 중학교 때의 육상과는 달리 농구, 럭비, 야구, 축구 등이었으며 경기장이 위치한 을지로 6가 성동원두 일대는 양쪽 응원단의 함성으로 들썩들썩 하는듯 했다. 우리가 '안암골 호랑이 신촌골 망아지'라 소리치면 상대는 '신촌골 독수리 안암골 고양이'라 응수했고, 당시 우리측 응원단장은 MBC '늘푸른 인생'의 명사회자 이상룡이었다. 그때 불렀던 여러 응원송 중 어린이 행진곡이었지만 경쾌하여 포함된 가사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걸어나아가면 온 세상 어린이를 다 만나고 오겠네 온 세상 어린이가 하하하하 웃으면 그 소리 울려퍼지겠네 달나라까지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를 특히 신나게 불렀었던 것같다.
경기가 끝난 후 우리들은 스크램을 짜고 함성을 지르며 을지로 입구 보신각을 거쳐 종로, 2년전 대한민국 정치사의 획을 긋는 4.19 학생혁명 직접도화선인 된 4.18 고대생 의거 때 우리 선배들이 시위를 마치고 귀교하던 중 자유당의 사주를 받은 이정재 깡패집단이 습격하여 길바닥에 혈흔이 낭자했던 그래서 사진이 실린 조간신문을 보고 격분한 서울 장안의 전체 대학생들이 총궐기했던 그곳 역사의 현장, 5가를 거쳐 학교로 돌아왔다. 이 거리 행진으로 상당한 교통 장애가 발생을 하였겠으나 시민들은 조국의 미래를 짊어질 젊은이들의 열정을 애정어린 눈길로 너그럽게 받아주었었다.
우리들은 학교로 돌아와 해산한 후 삼삼오오 학교앞 제기동을 관통하는 우리가 '세느강'이라고 부르기도 했던 지저분한 중량천 지류변의 무허가 단골 선술집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항상 해오던 '연탄불에 구운 꽁치 안주와 카바이트 막걸리' 폭음하며 소리높여 응원가 <강산에 빼난 정기 온 누리에 펼쳐라,(맹호는 굶주려고 풀을 먹지 않나니) 고대 건아 가는 곳에 당해 낼 자 누구냐, 천지를 흔들어라 끓는 피 솟구치는 날래고 용감한 이 기세를 보아라, 고려대학교, 고려대학교, 아아~ 고려대학교 고려대학교 승전고를 울려라 꽃다발을 받아라, 영광은 모교에 큰 공은 너의 것이다> 를 <마셔도 사내 답게 막걸리를 마신다, 맥주는 싱거우니 신촌골로 돌려라 ~ 엽전대학교 촌놈대학교~
이대생은 우리 것 숙대생도 양보 못한다>로 가사를 바꾸어 합창하며 불러댓다.
바뀐 가사에는, '구두에 광내고 머리기름 바르는 기생오래비같은 연대생들 너희는 맥주나 마셔라( 지금은 이나그나이지만 당시 맥주는 막걸리에 비해 훨씬 고급 술이었다).
우리는 가난하지만 사랑하는 조국의 술 신토불이 막걸리를 즐겨 마시는 이땅 젊은이의 嫡子이노라' 라는 호연지기를 담고 있으며 이대생 어쩌구 하는 가사는 말도 안되는 우스개지만 우리들은 당시 오매불망 이성에의 그리움을 가슴에 담고 있었던 청춘의 절정기를 지나고 있었던 것이다. 가슴속에 남아 있는 열기를 완전히 불태우고 새벽이슬이 내릴 때 쯤 가서야 우리들은 제기동 일원 각자 하숙집으로 돌아갔다.
내 생애의 꽃피는 봄에 해당하는 학창시절에는 마치 첫사랑 열애에 빠진듯한 순정의 모교애로 응원석에서 다소 다혈질에 속하는 나는 열정의 응원을 불태웠는데 이제 초로를 바라보는 60대의 오곡이 무르익는 가을에 뜻밖이고 전혀 기대하지도 않았던 경기장 코트에서 시합하는 당당한 선수가 되어 오늘 출전하는 것이다. 60대 혼복 초심자 최하급 수준의D조, D조면 어떻고 A조면 어떠냐 다같이 용인배 공식경기의 의엿한 출전선수인 것을.. 나는 응원석에서 코트장으로의 일약 변신의 벅참과 먼 옛날 회상의 설래임을 가슴에 가득 담고 신끈을 꽉 조인 후 라켓을 챙겨 경기장인 용인 종합운동장을 향해 힘찬 발걸음으로 문밖을 나섰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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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영웅들-쟁취한 우승기, 상장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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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때의 나)- 위 사진들,중학교 졸업 앨범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