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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년 1월 16일 수요일. 맑음(캄보디아)
잠을 설쳤다. 밤새 개 짖는 소리와 이상한 동물 소리가 시끄러웠다. 그래도 상쾌하게 아침을 맞이했다. 창가에는 참새 한 마리가 앉아있다. 도마뱀도 보인다. 참문으로 밖을 내다보니 키 큰 야자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기와지붕이 아닌 유럽성당에서 본 나무판 지붕이 이색적이다. 아마 프랑스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공기는 상쾌하다. 아침이라 그렇게 덥지 않은 기후다. 비포장의 숙소 앞길에서는 윗옷을 입지 않은 젊은이 둘이서 재기차기를 하고 있다. 걱정이 없는 즐거운 표정이다.
배우고 선진화된 사회가 더욱 불평이 많은 것이 이상했다. G.G.H(글로벌 게스트 하우스)에서 제공하는 아침식사를 한다. 커피와 빵과 잼이 주어진다. 맛있게 방법도 없이 손닿는 대로 먹어치운다. 아침 6시부터 식사가 시작된다. 제법 사람들이 많다. 밤에는 동물들이 시끄럽고 낮에는 사람들이 시끄럽다. 아침 7시 30분에 어제 예약해 둔 승용차에 탔다. 1일 투어 하루 대절비가 20달러다. 오토바이는 두당 5달러다. 약간 낡은 차지만 에어컨도 나오고 잘 굴러간다. 소나타 급인데 일제 도요다 차량이다.
중고차를 수입해서 사용하는 형편이다. 도로 규칙은 우리나라와 같은데 차량들의 운전석은 두 가지 다 사용하고 있다. 가이드 겸 기사는 순진하고 잘 생긴 젊은 총각이다. 도로는 중앙선은 없지만 잘 정비되어있다. 그랜드 호텔이 제일 튼데 그 앞을 지나는 길은 정원수도 잘 가꾸어져 있고 도로 양 옆에는 잔디가 깔려있어 보기 좋다. 고목의 키 큰 나무들이 가로수로 있다. 그 다음이 경찰서 앞이다. 자전거가 많다. 여행일정은 하루 밖에 없어 오전에는 앙코르 톰과 타 프롬, 오후에는 앙코르 와트와 프놈바껭 사원으로 정했다.
입장료는 1일 권 두당 20달러다. 차나 오토바이가 없이 걸어서 관광은 엄두도 낼 수 없을 정도로 넓다. 입장권 판매소에서 표를 끊고 우리는 앙코르톰으로 차를 타고 간다. 고목나무가 주변에 있어 그 규모를 짐작케 한다. 아침이라 거리에는 사람들의 이동이 적다. 코끼리 두 마리가 보인다. 앙코르 톰은 앙코르 와트에서 약 1.5km 떨어져 있다. 와트는 절, 사원이다. 앙코르 톰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하나의 도시란다. 앙코르 톰 중앙에 위치한 바이욘 사원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뚫린 두 개의 도로에 의해 도시가 4 등분되고 4등분된 도시 북쪽에 왕궁이 자리 잡고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없다. 왕궁은 목조였다는데 석조사원의 규모와 정교함을 보아 왕궁도 대단했을 것 같다. 앙코르 톰은 총 5개의 성문이 있다. 동서남북 대문인데 동쪽에는 승리의 문(Victory Gate)과 사자의 문(Gate of the Dead) 두 개가 있다. 우리는 앙코르 톰의 성문 중 보존 상태가 가장 좋은 남문으로 들어간다. 차에서 내리니 벌써 관광객들의 무리가 여기저기 보인다. 가이드북의 사진으로 보던 눈에 익은 모습이 다리 양 옆에 길게 늘어서 있다. 머리 7개의 살모사 머리가 7개인 거대한 뱀을 안고 있는 석상들이 종대로 다리 난간을 장식하고 있는데 입이 벌어질 정도로 규모도 크고 정교하다.
이 7머리 뱀의 이름이 신화에 나오는 나가(Naga)라는 뱀이다. 오른쪽이 악신. 왼쪽이 선신들이란다. 혼자 왔다면 소름끼치는 모습이다. 입을 꼭 다물고 부릅뜬 눈의 무뚝뚝한 표정이 겁을 준다. 이 앙코르 톰은 주위 12km의 해자(성 둘레에 판 연못)와 성벽이다. 12세기 말에 쿠탈 왕조의 최전성기를 이룬 자야바르만 7세가 세운 도성이다. ‘거대한 도시’라는 뜻이란다. 54개의 나가들을 안고 있는 석상들을 보며 해자 위의 다리를 걸어 남문에 이른다. 웃음을 머금고 있는 얼굴이 크메르인의 야릇한 미소란다. 울창한 고목 숲과 함께 눈앞에 펼쳐진 검은 회색의 돌상들이 정말 놀랍다. 문을 통과하니 어디로 해서 왔는지 모르지만 우리 차가 왔고 총각의 순진한 미소가 우리를 맞이한다.
차를 타고 바이욘 사원으로 향해 가다가 오른쪽으로 틀어 동문 쪽에 세워준다. 이 앙코르 톰 성벽 내부에는 약 80여개의 석조 유적이 있는데 그 중심이자 큰 것이 이 바이욘 사원이다. 고맙게도 이곳에서 한국인 교수와 병원장들 20여명을 데리고 다니며 설명해 주는 한국 가이드를 만나서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이 석조유적들은 사암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사암이 600년 동안 성장하다가 퇴화하는데 12세기에 세워져서 지금은 퇴화기란다. 지반은 이암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깊이가 15~20m가 모두 진흙이 이암이란다.
이 이암의 특징은 공기 중에 나오면 기포가 밖으로 나와 제주도 돌 같이 구멍이 생긴단다. 색깔은 황토색이다. 앙코르 사원들을 지은 사암들은 이곳에서 80km나 덜어진 크렌 산에서 운반해 온 것이란다. 차로 3시간을 달려야 하는 거리인데, 당시에는 어떻게 그 거대한 돌들을 운반했는지 궁금했다. 바이욘 사원은 자야바르만 7세가 12세기 말에 건립한 톰의 중심 사원이다. 세력 확장을 하면서 죽어간 영령들을 위로하기 위한 사원이라는 말도 있다. 처음에는 1054개의 탑이 있었다.
70%가 파괴되고 지금은 49개만 남아있다. 사면에 얼굴이 새겨져 있으니 얼굴 수만도 196개다. 사방팔방으로 미소 띤 얼굴의 거대함이 엄숙한 기분에 사로잡히게 한다. 이 ‘크메르 미소’는 500 리알 지폐에도 인쇄되어 있다. 이 얼굴은 바야자르만 7세의 얼굴이라는 설과 부처의 얼굴이라는 설이 있다. 바이욘이라는 뜻이 ‘사각을 비추는’ ‘세상을 비추는’이라는 뜻인데 실제 알아볼 수 있는 것은 20개 정도다. 여기는 불교 사원이다. 모든 절이 그렇듯이 이 사원도 동쪽이 정문이다. 동쪽이 해가 뜨기 때문에 삶을 나타내고, 서쪽이 죽음을 나타낸다. 앙코르 유적이 복원불능 70%인데 그나마 일부분을 복원하는데도 3년이 걸렸단다.
94년부터 98년까지 유네스코와 일본이 했단다. 자야바르만이 지방의 호족출신으로 태국 시암족을 퇴치하면서 세력이 커져 왕권과시로 이 유적들이 탄생되었다. 우리도 가이드 의 안내를 따라 동쪽으로 들어섰다. 여기저기 가이드의 안내를 받고 설명을 듣는 무리들로 붐빈다. 이곳 앙코르 유적 중에서 이 바이욘 사원만이 심한 건조기에도 마르지 않고 있는 우물이 있다. 옛날에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고 추측한다. 1960년부터 프랑스, 일본을 중심으로 복원작업을 하고 있는데 실제와 맞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가이드를 따라 시계방향으로 돌며 벽면에 새겨진 부조를 감상했다. 3부분으로 되어있다. 동쪽에서부터 남쪽으로 내용은 약간씩 달랐다. 처음 부조의 3층은 왕이 중심이다. 말을 타고 있는 사람이 자야바르만 7세다. 2층은 전쟁장면이다. 제목이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옴’이란다. 부조에 나타나는 크메르 군사들의 모습이 당당하다. 강건한 크메르 군사들의 특징은 귀가 크고, 머리를 뒤로 모두 넘긴 올백이고 옷은 앞에만 가린 나체의 모습이다. 턱수염과 모자(갓)를 쓴 사람들은 중국 남부에서 데려온 군사들이란다.
1800여개가 이곳 앙코르 유적이다. 그 특징은 똑같은 돌의 크기가 하나도 없고 균형미가 완벽한 것이란다. 이 사원하나를 짓는데 설계도만 10톤 트럭 5대 분량이란다. 그 설계도면을 읽는 데만도 몇 년이 걸린다니 믿거나 말거나 다. 그래서 이 사원 유적들은 설계도면 없이 지어졌다는 것이 정설이다. 정말 이것을 구상하고 지은 사람이 대단하고 더 대단한 사람은 시킨 사람인 것 같다. 이 부조들을 보며 가이드가 제시한 내용은 짓고 나서 조각했을까? 조각하고 지었을까? 이다. 말에는 조각하며 지어나갔단다.
왜냐하면 짓고 나서 조각하면 틀렸을 때 돌을 빼야하는데 뺀 흔적이 없단다. 정말 재미있는 말이다. 다음에는 군사들의 훈련장면이 보인다. 1962년, 다 무너진 것을 프랑스가 복원했다. 맨 아래 바탕에는 육지에서 생활하는 장면, 특히 농경생활의 모습이 조각되어있다. 지붕 밑에 다양한 생활의 모습이다. 젖먹이는 장면, 이 잡는 장면, 산파가 애를 받고 있는 장면, 학교 수업 중에 졸고 있는 모습, 애를 업고서 공부하는 모습이 보여 정겹게 느껴진다.
농사짓는 모습, 시장에서 꼬마가 과일을 사달라고 하는데 엄마가 끌고 가는 모습, 불 피워 돼지고기 바비큐 하는 모습이 잔치집이다. 닭싸움, 개싸움, 곡식을 수확하며 터는 모습 등 아주 다양한 삶이 그려져 있어 흥미롭다. 그 위의 모습이 전쟁 장면이다. 바다 위에서 배를 타고 온 적과 싸우는 모습이다. 아군은 머리를 올백으로 넘긴 크메르 군사이고 적군은 투구를 쓴 베트남 참족이다. 배를 갈고리로 걸어서 침투하고, 수중으로 침투하는 모습이 보인다. 악어 등 수중 동물도 보이는데 죽어있는 모습까지 아주 생동감 있는 장면이다.
보트에 타고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지금도 보트 축제에 탑승인원 인 50~55명의 근거가 이 부조에 있단다. 개싸움, 닭싸움의 유래도 이곳부터인가보다. 제일 위의 모습은 설법장면이 있어 그들의 종교생활을 볼 수 있다. 남문의 입구에는 춤추는 압살라의 모습이 요염하게 부조되어있다. 이 부조의 총길이가 1.2km에 달하고 등장인물 수가 11000명을 넘는다고 하니 놀랍다. 도대체 이것을 몇 명이나 동원해서 만들었을까? 크메르 왕국의 멸망원인 중 하나가 전염병이 돌아서 죽었다는 이야기와 수 백 년에 걸쳐 계속된 대규모 건설 사업을 꼽는데, 후자에 더 신빙성이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사원에 들어섰다. 돌들이 붙인 것도 아닌데 견고하게 서 있는 모습이 감탄이다. 돌에는 인위적으로 뚫어놓은 구멍이 여기저기 보인다. 큰 구멍은 들들을 연결하려는 용도이며 중간 구멍은 돌들을 운반할 때 코끼리가 쉽게 운반할 수 있도록 뚫었다는 설이 있다. 또 처음에는 구멍이 보이도록 건축되지 않았는데 구멍이 보이는 것은 복원을 임의대로 했기 때문이란다. 사원에 들어서니 오른쪽에 잔디밭이 있고 또 조그만 사원이 있다. 이것은 우리의 제실과 비슷한 곳이다.
종손이 살거나 곡식, 제기 등을 보관했던 곳으로 라이브러리라고 하는데 도서관이라는 뜻과 창고라는 뜻도 있단다. 바이욘 사원은 두 개의 다른 시대에 지어진 붙어있는 사원이란다. 이는 사람이 들어갈 수 없는 곳에도 섬세한 조각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란다. 세워진 시기가 다르단다. 우리가 서서 설명을 듣는 곳 밑에는 수로가 있고 물이 쉽게 빠지도록 구멍이 뚫려있다. 바닥에서 위로 약 30cm 정도 조각이 되어있지 않은데 이것은 이곳까지 물이 잠기기 때문이란다.
이 수로를 잘 만들어 놓지 않으면 우기 때 엄청난 비의 양으로 사원이 이렇게 존속될 수 없단다. 그들의 건축술과 과학을 볼 수 있었다. 이 바이욘 사원은 불교사원이다. 다른 불교사원은 당 바닥에 단층으로 짓는 것이 보통이다. 이 사원은 유독 3층으로 구성되어있어 힌두교의 영향을 볼 수 있는 것이 특징이란다. 2층 불상이 있어야할 자리에는 불상이 모두 없다. 이는 그 다음 힌두교 정권에 의해 모두 긁어서 없어진 것이란다. 다음에 멈춰선 곳이 ‘링가’라는 돌이 있는 곳이다.
칙칙한 천장에서는 박쥐 똥이 떨어져 돌 위에 널려있다. 링가라는 것은 남성의 성기를 말하는데 이들은 링가가 모셔져 있다고 표현한다. 힌두교에서 나오는 3신중 하나인 시바신의 남근이기 때문이다. 힌두교의 3신은 보존의 신인 비슈느, 창조의 신 브라마, 파괴의 신 시바다. 각자 고유한 권한이 있단다. 지구의 일대기를 창조하는데 시바신이 늦게 와서 세상 만들기를 비슈느와 브라마가 둘이서 만들었다. 화가 난 시바신은 파괴를 계속해서 두 신이 사과를 했단다.
이를 할 수 없이 받아들인 시바신은 자기 남근을 떼서 지구에 버려두고 자기는 더 이상 자기의 역할을 하지 않기로 맘먹고 세상을 떠나버렸단다. 이 링가는 남근을 형상화 한 것으로 약 50cm의 높이에 뭉뚝한 원통형 모양이다. 세워져 있는 밑에는 여성의 자궁을 나타내는 홈이 파져있다. 사각의 판 한 구석에는 물이 흘러나가도록 홈이 파져있다. 남신과 여신의 운동으로 세상에 필요한 것이 창조된단다. 말이 고상해서 힌두교 경전이라고 하지만 쉽게 말해서 성행위에 의한 모든 것이 결정된다는 원색적인 이야기다.
다산, 생산의 상징으로 남근을 숭배하는 것은 여러 나라의 공통적인 현상이다. 깊고 좁은 돌 틈을 걸어서 꺾어지니 어두운 곳에 불상이 있다. 손전등을 들고 가이드가 우물이 있음을 알려준다. 마시기 위한 것인지, 정수, 빌기 위한 정수가 필요해서 만든 것인지 모르지만 아주 심한 건기에도 마르지 않는 우물은 이곳뿐이란다. 또 하나의 링가가 있는 곳을 지나 계단을 올라 3층에 서니 야릇한 미소를 가진 거대한 불상의 얼굴들이 가득하다. 하도 많이 있어 어디 숨어도 보고 있는 얼굴이 있다.
왜 이렇게 많이 만들었을까? 숨어봐야 헛일 이라는 뜻인가? 내가 이 얼굴을 보고 있는지 얼굴들이 나를 보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곳이 이사원에서 사진을 찍으면 부처와 얘기하고 있는 것 같이 나온다는 장소다. 또 한편은 사진 배경에 부처의 얼굴이 가장 많이 나오는 곳이란다. 무두들 사진 찍느라 정신이 없다. 어느 곳에서 사진을 찍어야 잘 나오는지도 여행자에게는 아주 중요한 정보다. 우리도 사진을 찍었다. 북문 쪽으로 나와서 좀 멀리 뒤를 돌아서니 뒤에서 보는 바이욘 사원의 웅장함과 섬세함이 다시 한 번 느껴진다.
아내가 화장실을 찾아간다. 무너진 돌 위에 앉아서 기다린다. 어디선가 이국적인 음악소리가 들린다. 돌아보니 불상이 있는 절에서 연주를 하고 있다. 나무로 된 실로폰과 우리 같은 북, 그리고 처음 보는 여러 개의 엎어놓은 그릇 같은 꽹과리를 치고 있다. 원 중앙이 볼록한데 그 소리가 맑고 깨끗하다. 우리 꽹과리 보다는 두꺼운 소리다. 모두 두 명씩 6명이 연주를 한다. 표정도 없이 기계적으로, 감정이 없는 연주다. 외국 사람들이 신기한지 소리를 녹음하고 촬영한다. 반복되는 멜로디에 금방 실증이 난다.
우리 차는 벌써 북문으로 와서 그늘에 주차시켜놓고 있다. 바로 옆에 있는 바푸욘 사원과 코끼리 테라스로 발걸음을 옮겼다. 바이욘 북쪽에 위치한 바푸욘 사원은 메루산을 형상화해서 만든 사원이란다. 복원 공사 중이라 자세히는 알 수 없다. 탁 트인 테라스로 이어지는 가파른 계단이 있으며, 피라미드 스타일이 인상적인 11세기 힌두교 사원 유적지다. 다시 그 북쪽 옆에 보니 피네미나까스가 있다. 피네미나까스란 천상의 궁전이란 뜻이다. 당시 중국 사신이었던 주달관의 기록에 의하면 3층 사원 맨 위에 금으로 장식되어 있었단다.
그리 상상해 볼 뿐이다. 새삼 세월이 무서워진다. 북쪽 끝에는 왕궁이 있었는데 지금은 터만 남아있다. 동쪽에 있는 코끼리 테라스에 갔다. 햇볕은 뜨겁게 대지 위에 비치고 잔디밭의 초록색이 예쁘다. 하늘을 향해 기둥처럼 길게 뻗은 흰색 기둥의 큰 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이 코끼리 테라스는 350m 길이의 테라스에 코끼리 행렬이 부조되어있다. 튀어나온 곳에는 코끼리 코 모양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간간히 사자와 가루다(힌두교에서 나오는 불사조)도 부조되어있다. 테라스 앞에 광장이 있다.
그 옛날 이곳에서 행사가 열리곤 했는데 출정을 앞둔 왕이 그 군대를 이곳에서 사열을 했으리라. 그때의 국력은 하늘을 찌를 듯 강성했단다. 테라스 쪽에서 바이욘 사원을 보니 테라스 위에 자리 잡고 있는 것 같다. 광장에서는 아이들의 운동회를 한다면 멋질 것 같다. 다음에는 문둥왕 테라스라는 곳으로 갔다. 앙코르 톰에 있는 12세기 다층 테라스로 힌두교 신화에 대한 정교한 조각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자야바르만 7세와 또 한 명의 왕이 문둥이였다는 소문에 근거한다. 가이드마다 알려주는 것이 다르다.
벽면에는 좁은 길이 미로같이 나있다. 밖의 부조와 안의 부조가 복잡하게 되어있다. 밖에는 5개 또는 그 이상의 층으로 나뉘어져있다. 세상을 상징한다고 한다. 안쪽은 천상의 세계를 나타내는 부조란다. 특이하게 이 부조의 돌은 황토색의 사암으로 되어있다. 안쪽으로 들어서니 압사라, 검을 들고 있는 왕과 진주로 몸치장을 한 형상 등 머리가 어지럽게 새겨져 있다. 복잡한 부조에 비해 좁은 길 구석에 앉아 아쟁을 연주하는 걸인의 단순한 가락이 대조적이다. 조금 더 걸어가니 나무로 된 피리를 부는 소리가 구슬프게 들린다.
테라스 위에 올라서니 성별을 구별할 수 없는 누드 조각이 초라하게 있다. 이것이 두 명의 왕 중 한 사람이란다. 또 하나의 설은 죽음의 신인 야마라는 설명도 있다. 이 조각의 머리가 없다. 실물은 프놈펜 국립박물관에 있단다. 자세히 보려면 끝도 없겠다. 당시의 역사도 공부해야하고, 힌두교의 경전도 알아야 하고, 벽화와 건축술도 공부해야 할 것 같다. 그나마 사전에 공부한 것과 현지 가이드의 귀동냥으로 극히 일부를 알게 된 것도 고마운 일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것이 정말이다.
흐름이야 전체적으로 비슷하다. 더 보겠다는 욕심을 접고 잔디밭으로 살살 걸어서 그늘에 대기 중인 차로 발걸음을 옮겼다. 승용차를 타고 승리의 문으로 차를 몰고 나온다. 승리의 길을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폐허의 모습이 보인다. 승리의 문은 비교적 보존이 잘 되어있다. 승리의 문을 지나니 길 양편에 두 개의 사원이 보인다. 북쪽에 있는 것이 토마논(Thommanon)이란 힌두 사원이다. 시바와 비슈누를 모신 사원이란다. 남쪽에 있는 시원이 12세기에 지어진 테보다(Chau Say Tevoda Temple)라는 힌두 사원이다.
거의 폐허 상태이다. 우리 차는 타 프롬 사원으로 달려간다. 정글로 둘러싸인 이 상징적인 12세기 불교 사원 유적 사이로 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중간 중간에 이름 모를 돌무더기가 보인다. 사원들이 무너진 것이란다. 숲속 길을 따라 조용히 차를 몰아간다. 타 프롬 입구에 도착했다. 비포장에 황토 흙먼지가 날리고 신발에도 들어온다. 악기연주라는 한 가족이 보인다. 같은 연주를 유럽의 광장에서 한다면 제법 수입이 좋을 것 같다. 이색적이고 소리도 예쁘다. 돌로 된 문을 지나 50m 정도를 걸어 들어가야 사원이 있다.
수령이 약 300년 정도 되었다는 엄청 자란 나무들이 인상적이다. 특히 이곳은 방문객들이 앙코르 발견 당시의 그 느낌을 받을 수 있도록 일부러 복원하지 않고 폐허의 모습 그대로 방치해 놓은 곳이다. 사원은 불교의 특징으로서 단층이다. 들어가는 입구에는 물이 말라버렸지만 해자가 있다. 동서남북으로 4개의 문이 있다. 바이욘트리(어떤이는 무화과나무, 가이드는 스폰지 나무)에 의해 겨우 10%도 안 되는 사원의 모습만 남게 되었다. 최근에 스펑나무(Spung tree)로 알게 되었다.
특히 이곳은 자야바르만 7세의 어머니를 기리기 위한 사원이란다. 오랜 세월이 흘러 지금은 자연 앞에서 초라한 모습으로 변해있다. 주변에 사람들이 없다면, 거기에 비까지 내리는 우기라면 음산하고 무서울 것 같은 분위기다. 그 당시는 2700명의 관리와 615명의 무희를 포함하여 이곳을 유지하는 인력만 80,000명이 있었다고 한다. 그 엣날의 화려함과 영화를 짐작케 한다. 50m 걸어서 사원 입구에 들어섰다. 좁고 어두운 복도로 이어져 길을 잃기 쉬운 사원이다. 스펑 나무는 잔뿌리가 없는 나무로 기생나무이다.
다른 나무나 바위의 상단 벽에 붙어 아래로 성장하는 나무다. 기존 나무를 감싸서 죽이고 성장해 가는 거대한 나무다. 문어발 같이 축 늘어져 있는 모습이 놀랍다. 재미있는 말로 이 나무의 별명은 나쁜 나무란다. 나무를 감싸고 위, 아래로 자라고 있는 거대한 모습, 담장과 건물을 감싸고 커가는 모습이 가관이다. 사원의 아름다움은 간데 없고 정글의 힘, 자연의 힘, 세월의 힘이 더욱 인상적이다. 곳곳에 이 나무를 잘라놓은 흔적이 보이고, 더 이상 무너지지 않도록 버팀목이 있어 걷는 이가 불안하다.
사원 내부에 한 평 조금 더 되는 공간 벽에 무수한 구멍이 있는 사방 벽을 본다. 이곳은 어머니의 형상이 있던 곳으로 밤에 촛불을 켜 놓으면 어머니의 형상이 환희 볼 수 있도록 불빛이 반사되도록 사방에 보석을 무수히 많이 박아 놓았던 흔적이란다. 구멍은 이 보석을 상하지 않게 빼가기 위해 더욱 커졌단다. 당시의 화려함이 상상이 간다. 계속 걸어가니 사람들이 모두 서서 자기의 가슴을 쳐다보고 있다. 가슴을 주먹으로 치면 공명이 되어서 공간에 북소리로 울린다. 재미있는 곳이다.
분명 다른 목적으로 만들어 졌으리라. 거대한 스펑 나무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다가 길을 잃어버렸다. 단체 팀, 가이드를 잃어버린 것이다. 발길 닿는 대로 걸어간다. 구걸하는 꼬마들과 어른들이 있다. 조가만 악기를 파는 꼬마가 끈질기게 따라붙는다. 우리는 북문을 찾아야한다. 우리 가이드가 우리를 남문에 내려놓고 북문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한적한 외길을 돌아서 한참을 걸어 북문에 이르렀다. 손으로 만든 아쟁 비슷한 악기를 판다. 개당 5달러라고 하는데 1달러가지 떨어진다. 시내 가게에서는 7달러 정도 하는 것이다. 사고 싶었으나 남은 일정이 많아서 갖고 다니는 것이 불편할 것 같았다. 차를 타고 숙소로 간다. 오전 관광이 끝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