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淵源 과 都始祖
우리 광산이씨(光山李氏)는 멀리 대보공김알지(大輔公金閼)로 부터 연원(淵源)하여 신라천년의 영고성쇠(榮枯盛衰)를 거쳐 국운이 쇠잔(衰殘)함에 군웅(群雄)이 할거(割據)하는 난세에 웅지(雄志)를 펴 고려국(高麗國)을 송도(松都)에 세운 궁예왕(弓裔王)의 후예(後裔)로 전한다.
태봉국주(泰封國主) 궁예왕(弓裔王)의 행적과 치세(治世)를 살펴보면, 신라 제48대 경문왕(景文王; )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 경문왕(景文王)이 등극(登極)전 헌안왕(憲安王)의 사위가 됨으로써 서자(庶子)로 전락하게 되고 5월 5일 중오일(重午日)의 출생설화가 두 왕비( )로 하여 나라에 불길하다는 구실을 만들게하여 죽이게 하였으나, 유모의 기지(機智)로 생명을 보전하였다.
억센 장성기(長成期)에 유모로부터 자신이 왕손임을 알고서 어린나이에 심기일전(心機一轉)하여 신라의 왕자로서 버림받은 자신의 억울한 과거를 통한(痛恨)히 여겨 절치부심(切齒腐心)하여, 심신을 단련 문무(文武)의 자질을 길러 잃어버린 왕위를 되찾아야겠다는 결심으로,10세가 조금 넘은 어린 나이로 세달사(世達寺: )에 들어가 중이되어 선종(善宗)이란 승명(僧名)으로 은인자중(隱忍自重) 때를 기다렸다.
신라 51대왕 진성여왕조(眞聖女王朝)에 나라는 날로 쇠약해져서 정치가 문란(吝亂)하고 백성들은 관(官)의 악정(惡政)에 견디다 못해 분산(分散)하여 다른나라의 주현(主縣)으로 반부(反附)하는 사람이 반이나 되고 원근각처(遠近各處)에 도적들이 때를지어 일어났다, 웅지(雄志)를 가슴에 묻고 기다리던 선종(善宗)도 웅지(雄志)를 품고 진성왕(眞聖王) 5년(891) 죽주적괴(竹州賊魁) 기훤(箕萱)을 찾아갔으나 바른 대접을 받지 못하자 진성왕(眞聖王) 6년(892) 기훤(箕萱)의 부하인 원회(元會)․신용(申熔)을 대동하고 북원(北原:) 양길(梁吉)에게 몸을 의탁하였다. 양길(梁吉)은 선종(善宗)의 영용(英勇)함을 한눈에 알아보고 기용하더니 드디어 일군(一軍)을 나누어 동쪽 지방을 경략(經略)하게 하였다.
이에 궁예(弓裔)는 주천(酒泉)․내성(奈城: )․욱조(郁鳥: )․위진현(衛珍縣: )등을 습격하니 이들이 모두 항복하였다.
진성왕(眞聖王)8년(894) 궁예(弓裔)가 명주(溟洲: )를 치매,무리 3,500명을 14대로 나누어 금대검(金大鈐) ․모흔(毛昕)․장귀평(長貴平)․ 장일(長一) 등을 사상(舍上)( )으로 임명하고 병사들과 고락(苦樂)을 한가지로하며 취함에 공사를 구분, 상은 후히 하고 벌은 엄히하니 이에 모든 군민이 그를 공경(恭敬)하여 장군으로 추대(推戴)하였다.
뒤이어 저족(猪足: )․광천(狂川: )․부약(夫若: )․금성(金城)․철원(鐵圓:鐵原)을 격파하니 군세(軍勢)가 심히 강성 하여졌다.
궁예장군은 군영본부(軍營本部)를 철원(鐵圓)에 두고 사방을 진압하기에 이르니 저강이서(沮江以西)와 오대이북(五垈以北)의 무리들이 다투어 내항(來降)하는 자가 많아졌다.
이렇게 되자, 궁예(弓裔)는 조직을 확장하여 내외관직(內外官職)을 설치하였고 군민들 사이에 개국(開國)을 원하는 여론이 무르익어가자 송악군 토호(松岳郡 土豪)인 사찬(沙粲: ) 왕륭(王隆)은 욱일승천(旭日昇天)하는 궁예(弓裔)의 위세에 위협을 느껴 진성여왕(眞聖女王) 9년(895년) 아들 왕건(王建)과 같이 귀순(歸順)하니 궁예는 크게 기뻐하여 왕건(王建)을 금성태수(金城太守:金化)로 봉하고 왕륭(王隆)에게 송악군(松岳郡)을 진수(鎭守)하라 하였다.
왕륭(王隆)이 진언하기를ꡐ만약 장군이 조선(朝鮮: ) 숙신(肅愼: ) 변한(卞韓: )의 땅에 왕이 되시고자 하면 먼저 송악(松嶽)에 성을 쌓고 도읍을 정함이 상책이라ꡑ하니 궁예(弓裔)는 그 말이 옳다하여 왕건(王建)으로 개성 주위에 최초로 축성을 맡기니 그때 왕건(王建)의 나이 20세였다.
진성여왕(眞聖女王) 10년(896) 왕건(王建)으로 하여금 승령(僧嶺)․임강(臨江)의 두현(縣)을 공취(功取)케하고 신라 효공왕(孝恭王) 원년(897년)에 인물현(仁物縣: )의 항복을 받았다.
광할한 영토와 강성한 군대를 보유한 궁예(弓裔)는 한북명군(漢北名郡)으로서 산수가 수려한 송악군(松岳郡)에 도읍 할 것을 내정하고 관궐(官闕)을 준비케 하는 한편 공엄(孔嚴: )․검포(黔浦: )․대구성(大口城: )을 차례로 취하였다.
이때 국원(國原: )등 30여성을 거느리고 있던 북원(北原)의 양길(梁吉)이 궁예(弓裔)가 송악군(松岳郡)에서 개국을 준비한다는 소식에 대노(大怒)하여 30여 성(城)의 경병(勁兵)을 총동원하여 습격을 감행(敢行)하나 이 정(情)을 미리 알고있던 궁예군에게 도리어 가평(加平)땅 요충지에서 역습을 받아 궤멸(潰滅) 당하고 말았다. 효공왕(孝恭王)3년(899) 2월 궁예(弓裔)는 송악성(松岳城)을 보수 확장케하며 왕건(王建)을 정기대감(精騎大監)으로 삼아 양주(楊州) 견주(見州: )를 정복하였다.
그해 11월에 처음으로 팔관회(八關會)를 개최하였다. 효공왕(孝恭王) 40년 경신년(庚申年:900년)에 왕건(王建)에게 명하여 광주(廣州)․충주(忠州)․당성(唐城: )․청주(靑州: )․괴양(槐壤: ) 등지를 거두어 드렸다.
왕건(王建)은 그 공으로 아찬(阿飡:6급)의 벼슬을 내렸다. 효공왕(孝恭王) 5년 신유년(申酉年:901; )선종(善宗) 궁예(弓裔)는 고구려 유민을 기반으로 송악(松岳)에 도읍을 정하고 고려국( )의 건국을 선포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라 말하기를,
ꡐ지난날 신라는 당나라에 군사를 청하여 고구려를 격파하였으므로 엣날 평양구도(平壤舊都)는 사냥터가 되어 초목이 우거지게 되었으니 내 반드시 그 원수를 갚을 것이다.ꡑ하였고, 궁예왕이 어느때 남쪽으로 순행(巡行)하여 흥주(興州: )의 부석사(浮石寺)에 이르렀을 떼에 신라왕상(新羅王像)의 벽화가 있는 것을 보고 칼을 빼어 이를 쳐서 없앴는데 지금도 그 자취가 남아 있다고 하는 것을 보면 궁예왕(弓裔王)이 출생때 왕실(王室)에서 버림을 받은 원한이 얼마나 가슴에 사무쳐 있었던 것인지 알 수 있겠다.
그런데 국호를 고려(高麗)라 한 것은 고구려 유민을 포용하여 위대했던 지나간 영광을 재현하려는 착상은 좋았으나 궁예왕(弓裔王)의 기반인 철원(鐵圓)을 떠나 서울을 송악(松岳)으로 정한 것은 시기상조(時機尙早)의 대단한 실책이었다.
(弓裔王 高麗國創建 - 三國遺事)
송악(松岳)은 원래 왕건세거(王建世居)의 땅으로 누대(累代)에 걸쳐서 예성강(禮成江)을 오르내리며 전국 귀족과 토호(土豪)들과 연계된 밀접한 상권을 형성하여 개성(開城) 특산물을 중국(中國) 등에 수출하고 중국비단 등을 수입하며 해마다 막대한 부(富)를 누리게 하여 왕씨일가(王氏一家)에 인적조직과 경제적기반이 확고히 형성되어 있던 곳으로 왕건(王建)이 궁예(弓裔)에게 자진항복(自進降伏)할 때도 송악의 안전을 보장 받기위함 이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개국 전후 왕건(王建)에게 막대한 인적 물적 의존의 증대는 혈족(血族)과 인맥(人脈)이 없는 궁예왕(弓裔王)으로서는 나라를 만들어 왕건(王建)에게 넘겨 주는 작업으로 적당하였고 궁예왕(弓裔王)의 정치적 실패는 송악정도(松岳定都)에서 비롯하게 되었으니 몇년후 번창개경(繁昌開京)과 비례되어 기존의 개성 상권이 전국을 지배하여 강대해지는 왕건일족(王建一族)의 세력을 견제할 수 있는 방법이 송악(松岳)에 도읍을 두고는 불가능하다고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궁예왕(弓裔王)은 고심 끝에 왕건(王建)을 중심으로 하는 고구려 유민들의 재기의 상징인 고려(高麗)의 국호를 버리기로 한 것 같다.
효공왕(孝恭王) 8년(904) 7월, 국호를 마진(摩震)이라 고치고 년호를 무태(武泰)라 하여 신왕조 탄생을 확고히 국민들에게 인식시키려 하여 철원(鐵圓)으로 환도(還都)를 단행(斷行)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비로서 광평성(廣評省: )을 설치하고 관원을 갖추었다.(註1)
신생국의 강대한 힘을 과시하기 위하여 그해 상주(尙州) 등 30여성의 주현(州縣)을 공취(功取)하니 공주장군(公州將軍) 홍기(弘奇)가 그 무리를 거느리고 항복하여 왔고 효공왕(孝恭王) 9년 패서(浿西: )를 13진으로 분정(分定)하였는데 평양성주(平壤城主) 검용장군(黔用將軍)이 투항해오고 증산성(甑山城: )의 적의(赤衣) 황의적(黃衣賊) 명귀(明貴) 등이 항복하여 왔다.
이후 궁예왕(弓裔王)은 스스로 강성함을 믿고 신라를 합병할 뜻을 두고 신라 경주(慶州)를 멸도(滅都)라 부르게 하였다.
효공왕(孝恭王) 15년(911) 궁예왕(弓裔王)은 삼분되어 있는 천하를 통일하여야 한다는 큰 포부를 실현하기 위하여 국호를 태봉(泰封)이라 고치고 년호를 수덕만세(水德萬歲: )원년이라 불러 이 왕국이 길이 번영할 것이라 하였다. ꡐ새로운 나라는이재까지와는 달라야 한다. 왕실의 기초를 튼튼히 하고 천하를 통일하는 수도에 적합한 궁성이 있어야 한다ꡑ하고 궁예왕(弓裔王)은 철원(鐵圓) 북쪽 27리 풍천원(楓川原: )에 큰 궁전을 건축하였고( )이 궁성을 지키기 위하여 20여곳에 성곽을 축조하기에 이른다.
이것이 궁예왕(弓裔王)의 두번째 실책이었다.
원래 철원지역을 중심으로 유랑농민 대중을 규합하여 이들의 추대로 위대한 지도자로 떠올라 국가를 세웠으나 아직은 왕권이 확고히 다져지지도 않았을 뿐아니라 계속되는 전쟁으로 허약한 재정을 무릅쓰고 왕의 주력기반인 철원․평강․윤천 등지의 농민을 부역시켜 궁성과 성곽축조를 강행하니 이 지방 대중의 신망을 잃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정세를 감지한 궁예왕(弓裔王)은 실추된 인기를 만회하기 위하여 왕건(王建)으로 하여금 수군(水軍)으로 서해를 돌아 금성(錦城: )을 공격시켜 점령하는 성과를 올렸으나 가두어 놓은 호랑이를 풀어주는 세번째 실책을 저질렀다고 하겠다. 송악(松岳)에서 궁예왕(弓裔王)에게 불안을 준 왕건(王建)은 철원 천도 후 내정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으려는 조심성을 보여 은인자중(隱忍自重)하여 오던중 금성출전으로 왕과의 불편한 관계를 유보 할 수 있었다.
궁예왕(弓裔王)은 뿌리깊은 왕건일당(王建一黨)을 금성(錦城)에 진주시켜 놓고 신라병탄(新羅倂呑)의 상호 장해세력이었던 후백재왕 견훤(甄萱)과의 천하 쟁탈전에 대비한 포석(布石)을 마친 뒤 내정을 쇄신하고 특히 궁예왕(弓裔王)이 세달사(世達寺)에서 뼈져리게 느껴온 불교(佛敎)의 타락은 개혁하지 않으면 안 될 큰 명재였다. 신라(新羅)의 국교(國敎)인 불교(佛敎)는 그 때 귀족(貴族)과 특권층의 전유물화(專有物化)되어 절과 승려(僧侶)는 오직 권도(權道)에만 아부하였으니 백성(百姓)은 부처를 떠난지 오래 되었다. 궁예왕(弓裔王)은 이러한 백성에게 말하기를,ꡐ부처(석가불)의 시대는 갔다.세로운 세상의 부처인 미륵불이 이 세상을 구원 할 것이다.ꡑ라고 설파(說破)하고 새로운 불교생성에 전력을 기울여 왕 스스로 경서(經書) 20권을 지어 강설(講說)함에 힘을 쏟으며 자신을 미륵불(彌勒佛)(註2)이라 칭하고 이자(二子)를 청광보살(靑光菩薩)․신광보살(神光菩薩)이라 하여 비단으로 장식한 백마를 타고 동남(童男) 동녀(童女)로 번개향화(幡蓋香花)를 받들고 그 앞에 비구승(比丘僧) 200명에게 범패(梵唄) 염불(念佛)을 하게 하였다 한다.
그러나 기성불교(旣成佛敎)의 뿌리깊은 항거(抗拒)가 있어 승(僧) 석청(釋聽)이 말하기를 "이는 사설괴담(邪說怪談)이라 가르칠 것이 못된다" 고 악평하자 궁예왕(弓裔王)이 대노(大怒)하여 철추(鐵椎)로 그를 때려 죽였다 한다.
신라 신덕왕(神德王) 2년(913년) 금성(錦城)에 주둔하고 있던 왕건(王建)은 불안감이 감도는 왕성의 정세를 파악하는데 힘쓰며 끊임없이 자기세력을 확장하기 위하여 지방토호 중에서 세력있는 자와 혼인을 통한 기반구축에 힘씀으로( )왕도 왕건의 세력을 어쩌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유추하건데, 궁예왕(弓裔王)은 하는 수 없이 방향을 바꾸어 무마책(撫摩策)을 써서 장남인 태자(太子)를 나주(羅州)에 파견(派遣)하여 형세를 살피는 한편 군심(軍心)을 안정 시키기 위해 왕을 대신하여 시상(施賞)을 하며 진주군의 교체방법과 절차를 협의케 하였다.
그후 왕건수하의 장수를 개별적으로 소환하여 궁성내의 한직(閑職)에 승진시키는 방법으로 이들의 세력(勢力)을 거세(去勢)하는데 힘쓰고 때를 기다려 도성의 군사 수천을 나주(羅州)의 왕건군(王建軍)과 교체케 하였다. 회군(回軍)하는 왕건에게 백강장군(百舡將軍: )을 겸하여 수군도 통괄하는 훈령(訓令)도 내려졌다.
다시 불안하여진 왕건은 비장한 각오로 정주(貞州: )에 철군(撤軍)하여 심복부하를 단속(團束)시켜 군영(軍營)을 엄히 하며 정세를 관망(觀望)하였다. 그러자 궁예왕(弓裔王)은 왕건(王建)을 파진창시중(波珍滄侍中)으로 승진시켜 조속히 부임(赴任)하라 명하고, 군사들은 원정의 노고를 위로하여 후상을 내려 가족을 만나도록 휴가를 내린다 하여 불렀지만 왕의 의도를 읽은 왕건(王建)은 수하참모들과 숙의(熟議)끝에 대결할 수 밖에 없다고 결심하고 정주군영(貞州軍營)에서 이핑계 저핑계로 미동(微動)도 하지 않으며 도성내 자기 세력의 동태를 예의주시(銳意注視)하며 시기가 무르익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계속되는 왕명을 시행하려는 왕사의 끊임없는 독촉도 강도를 더하였고 결과적으로 격돌은 면하기 어렵게 되고 결과는 실전으로 단련된 왕건군은 왕명을 등에 업고 방심한 도성군의 허를 찔러 철원(鐵圓)으로 입성하였던 것이다.
신덕왕(神德王) 4년(915) 항명(抗命)으로 도성에 입성한 시중(侍中) 왕건군은 궁예왕(弓裔王)에게 왕건(王建)을 시기모함(猜忌謀陷)한 중신의 처벌을 요구하였을 것이고 왕당파(王黨派)는 궁성을 고수하여 왕건(王建) 제거에 혈안이 되었을 것이니 도성과 궁성은 소란과 혼란의 뒤범벅이 된 와중에 궁예왕(弓裔王)의 심복은 하나하나 사라져 갔을 것이다.
이와같은 정세로 궁예왕(弓裔王)은 내치(內治)는 부진하고 신불교(新佛敎)를 통한 국기확립(國基確立)으로 낙토(樂土)를 이루려던 통치이념은 반대에 부딪칠 뿐 아니라 궁내로 스며드는 왕건(王建)의 밀탐자(密探者)로 아무도 믿을 수 없다는 의심으로 고심하던 때, 충간(忠諫)하던 처자(妻子)를 가혹한 방법으로 죽였다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건에는 분명히 상식에 어긋나며 현실적으로 이해 할 수 없는 정치적인 중대한 음모가 숨겨져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씨조선(李氏朝鮮)조(朝) 우왕(禑王)을 신돈(辛旽)의 자식(子息)으로 몰아 왕권을 탈취하는 구실로 삼았으나 오늘날 이를 믿는 역사가가 아무도 없드시 이 또한 궁예왕(弓裔王)을 완전한 광인(狂人)으로 만들어 인간파산적 폐인으로 국민에게 인상을 심어주며 왕창근(王昌瑾)의 고경(古鏡)에 따른 날조된 일화를(註3) 널리 퍼트려서 왕건(王建)의 반역행위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나아가 왕건(王建)이 나면서 겨드랑이에 용린(龍鱗)이 돋아 있었으니 왕이 될 천운(天運)을 타고 났다고 선전(宣傳)(註 4)하여 왕건(王建)의 왕위찬탈(王位纂奪)의 당위성을 백성들에게 이해 시키려고한 철저히 계획된 조작극임을 쉽게 인지하는 바나, 고려조(高麗朝)500년의 기정화(旣定化)를 여하히 규명하여 바로 잡을 것인지 두고두고 우리들이 풀어야 할 숙제가 아닐 수 없다.
아마도 실상을 바로보자면 신라(新羅) 경명왕(景明王) 2년(918) 태봉왕국(泰封王國)의 조정은 왕건의 세력으로 다지어지고 민심도 용의주도(用意周到)한 왕건(王建)에게 기울자 왕건 일파(王建一派)는 무서운 음모로 왕(王)이 미쳐서 관심술(觀心術) 운운하며 왕비(王妃)와 태자(太子)를 죽였다는 유언비어를 조작 유포하여 이러한 광인에게 국정을 맡길 수 없다고 선동(煽動)하여 장군 홍술(弘述)․백옥(白玉)․삼능산(三能山)․복사귀(卜沙貴: )등 4명이 왕건(王建)을 끼고 반란을 일으키니 다급해진 궁예왕(弓裔王)은 가족친권(家族親眷)을 구원 할 틈도 없이 필신부하(必臣部下) 군사의 호위속에 6월 야중(夜中)에 궁성을 빠져나와 현 군탄리(軍炭里)를 경유,명성산(鳴聲山: )에 은거(隱居)하면서 부하들과 항쟁을 다짐하며 이 산 8분능선(八分陵線)에 급히 석성(石城)을 쌓고, 왕건군(王建軍)과 대치(對峙)하였다.
그러나 구름같이 포위운집하는 추격군을 노려본 궁예왕(弓裔王)은 대세(大勢)가 이미 기울어졌음을 직감하고, 수행(隨行) 군사를 모아 사태가 절망인 점 을 설명하고 각기 생명을 보전토록 타이르며 군사의 해산령을 내리게 하였다.
떠나는 군사들이 소리내어 슬피우니 산골이 울음소리로 요란하였다.
지금도 이슬비 내리고 바람부는 날에는 울음소리가 들린다 하여 명성산(鳴聲山)이라 이름한다고 한다.
궁예왕(弓裔王)은 측근 몇 사람을 거느리고 현 평강(平康)방면으로 도망 중 수풀속에 숨은 폭도의 죽창에 찔려 삼방(三防)땅( )에 이르러 마상(馬上)에서 분사(憤死)하였으나 생시(生時)처럼 꼿꼿히 앉아 있었다 한다.
왕건(王建)이 달려와 조문(弔問)하나 유해(遺骸)는 움직이지 않으므로 모 든사람이 겁내어 부득이 직립(直立)한 채로 입관(入棺)케하여 석축(石築)으로 수십 길이나 높다란 분묘(墳墓)를 만들어 왕후(王侯)의 예(禮)에 따라 정중히 장례를 지냈다고 하며 오래도록 년1회 향사(享祀)를 올렸다고 전한다.
궁예왕(弓裔王)은 진성여왕(眞聖女王) 5년(891) 천하를 도모(圖謀)하려는 웅지(雄志)를 품고 전장(戰場)을 횡행(橫行)하기 28년 태봉왕국(泰封王國: )을 세워 견훤(甄萱)의 후백제국(後百濟國)과 더불어 후삼국(後三國)을 정립하였으며 천하를 통일하여 종교개혁(宗敎改革)을 통한 지상낙토(地上樂土)를 이루려던 위대한 꿈이 무너지니 왕위(王位)에 재위(在位)한지 18년만의 일이다.
<泰封國宮城趾와 周圍地形>
嗚聲山(923m)位置圖
믿고 중용(重用)한 부하 왕건(王建)의 치밀한 계략에 말려들어 일세를 풍미(風靡)하던 효웅(梟雄)도 씻을 길 없는 오명(汚名)에 천추(千秋)의 한을 남겼으리라.
화려했던 풍천원(楓川原) 관지(官趾)에는 석등 하나 외로이 서있어( ) 그날의 영화를 전하여 주고 평강(平康) 검불랑(劒拂浪)의 연병장 고사(古事)하며 문막(文幕)뒤 건등산(建登山)에서 견훤(甄萱)의 대부대를 격파하던 용장(勇將)의 무용담(武勇談)은 촌노(村老)들의 입으로 전하여지고 홍지리(洪之里)의 어수정(御水井: )과 동송면(東松面) 금학산(金鶴山)의 칠성대(七星臺)등 영웅은 가고 전설 만이 전해진다.
신라(新羅) 경명왕(景明王) 2년(918) 나라를 찬탈(簒奪)한 왕건(王建)은 국호를 고려(高麗)로 환원(還元)하고 송도(松都)로 천도(遷都)하여 노련한 외 교술로 신라의 중신들을 회유(懷柔),농락(籠絡) 경주(慶州)를 제외한 신라의 전 국토가 고려(高麗)에 반부(反附)하니 경순왕(敬順王) 9년(935) 12월 왕은 태자(太子)의 간곡한 만류와 반대를 무릎쓰고 쇠잔(衰殘)해진 나라를 왕건(王建)에게 바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로써 992년간 존속(存續)해온 신라(新羅)는 멸망하였다.
또한 후백제왕(後百濟王) 견훤(甄萱)은 경순왕(敬順王) 원년(927) 기백(幾百)의 군병으로 5천의 신라(新羅)를 구하러온 왕건군(王建軍)을 팔공산(八公山) 동수(桐藪)땅( )에서 맞아싸워 결정적인 대승을 거두니 그 전투에서 왕건(王建)은 사지에서 부하장수 금락(金樂)과 용장(勇將) 신숭겸(申崇謙)의 죽음의 항쟁으로 간신히 탈출할 수 있었다. 견훤(甄萱)은 그 후 승전(勝戰)한 기세를 타서 대목성(大木城: )과 경산부(京山府: )․강주(講州: )를 노략한다. 그러나 견훤(甄萱)은 부곡성(缶谷城)을 공격하여 의성부(義城府)의 태수(太守)총신(寵臣) 홍술(洪述)이 대항하다 죽는것을 구경할 수 밖에 없도록 하는 천재적 전략가 이건만, 왕건(王建)의 반간지계(反間之計)의 술수에 말려들어 내분으로 인한 부자형제간의 골육상쟁(骨肉相爭)의 우(愚)를 범하게 되니 결국, 건국 45년만에 자멸(自滅)의 길을 걷게된다.
<弓裔王의 敗走路>
이로써 고려(高麗)는 서기 936년에 비로서 청천강(淸川江)이남의 삼국통일국가(三國統一國家)를 완성하게 되었다.
이 즈음에 비운의 왕가인 궁예왕(弓裔王)의 후손은 어떻게 되었을까?
망국의 격변속에 산실(散失)한 왕손들은 생존을 위한 고초를 짐작할 뿐 확실한 사증(史證)은 찾을 길 없으나 구전(口傳) 가첩(家牒)의 기록을 토대로 추고(推考)되어 전하는 바에 의하면, 광산이씨(光山李氏) 득성조(得姓祖) 궁예왕(弓裔王)으로부터 오전(五傳)하여 형성된다.
혹 설에 의하면 고려태조(高麗太祖) 23년(940) 경담(敬曇)께서 태조(太祖)의 만류를 뿌리치고 광산군(光山郡)으로 피거(避居)하였다 하며 그의 아들 구(球)께서 광주호장(光州戶長) 지방토호(地方土豪)인 이씨가(李氏家)에 서(壻) 가 되어 득관조(得貫祖)이신 종금(宗金)을 낳으셨다고 하나 진위(眞僞)는 확인 할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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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1) 이때 설치된 관부(官府)는 광평성(廣評省:신라의 집사성(執事省)과 같은 최고행정부), 병부(兵府),대용부(大龍附:후 개창부(改倉部)),수춘부(壽春部:예부(禮部)),봉빈부(奉賓部:예빈부(禮賓部)),의형부(義刑部:형부(刑部)),납화부(納貨府:대부사(大府寺)),
내봉성(內奉省:도성(都省)금서성(禁書省;비서성(秘書省)),남상단(南廂壇:장작감(將作監)),수단(水壇:수부(水部)),원봉성(元奉省;
한림원(翰林院)),비룡성(飛龍省;대복사(大僕寺)),물장성(物藏省;소부감(少府監)),사대(史臺;사역원(司譯院)),식화부(植貨府;과수(果樹) 재배를 맡음),장선부(障繕府;성곽수리를 맡음), 주도성(珠淘省)등 인데 광평성(廣評省)의 장관은 광치내(匡治奈;후개시중(後改侍中)) 차관은 서사(徐事;시랑(侍郞)) 다음은 외서(外書;원외랑(員外郞))요, 이밖에 품직(品職)을 설(設)하여 정광(正匡)․원보(元輔)
대상(大相)․원윤(元尹)․좌윤(佐尹)․정조(正朝)․보윤(甫尹)․군윤(軍尹)․중윤(中尹)이라고 하였다.
(註2) 자씨(慈氏)라 번역.현재는 보살(菩薩)로 그 정토(淨土)인 도솔천(兜率天)의 천인(天人)을 위하여 설법하고 있지만 석가불(釋迦佛)의 예언에 의하여 그 수(壽)가4000歲(인간의 567천만년)가 되었을때 이 세상에 하생(下生)하여 용화수(龍華樹)밑에서 성불(成佛)하고 삼회(三會)에서 설법할 약속임. 이때는 불(佛)의 자격을 얻으므로 미륵불(彌勒佛)이라 함.
(註3) 왕창근(王昌瑾)이란 상인이 당나라부터 와서 철원시경(鐵圓市境)에 살았는데 시장에서 어떠한 사람을 보니 용모가 기이하고 백발이 성성한 사람이 낡은 의관(衣冠)을 하고 왼손에 자완(慈椀)을 들고 오른손에 고경(古鏡)을 들고 왕창근(王昌瑾)에게 말하기를 "나의 이 거울을 사겠는가?" 함으로 이를 기이하게 여겨 고경(古鏡)을 쌀과 바꿨는데 그 사람이 쌀을 받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준 뒤에 어디론지 사라졌다. 이에 왕창근(王昌瑾)은 집으로 돌아와 거울을 벽에 걸어 놓았는데 햇빛이 거울에 비치니 그면에 가느다란 글씨가 보였음으로 읽어본즉 다음과 같은 고시(古詩)가 나타났다.
上帝降子於辰馬 상제가 아들을 진마에 내리시니
先操鷄後搏鴨 먼저는 닭을 잡고 뒤에는 오리를 잡으리라
於巳年中二龍見 사년사이에 두용이 나타나
一則藏身靑木中 하나는 몸을 푸른 나무속에 감추고
一則顯形黑金東 하나는 모양을 검은 금이 동쪽에 나타났도다.
하였다. 왕창근(王昌瑾)이 의심하여 이를 조정에 알리니 왕은 뜻을 알지 못하여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왕창근(王昌瑾)과 같이 그 고경(古鏡) 주인을 찾아오게 하였으나 그 사람은 전혀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교삽사(敎颯寺) 불당에 진성소상(鎭星塑像)이 그 사람과 닮았다는 보고에 궁예왕(弓裔王)은 이상이 여겨 송관홍(宋官弘)․백정(白貞)․허원(許原)등 학자를 불러 뜻을 풀어 알리라 명하였다.
3인이 이 고시(古詩)를 보니,
상제(上帝)가 이들을 마진(馬辰)에 내렸다 함은 마한(馬韓)과 진한(辰韓)을 말함이요. 이용(二龍)이 나타나 하나는 푸른나무 속에 감추고 하나는 검은 금속 속에 나타났다 하는 것은 푸른나무는 곧 소나무(松)로 송악군(松岳郡)을 이름이며, 송악(松岳)의 용(龍)은 왕건(王建)을 일컫음에 틀림없으며 금은 곧 쇠(鐵)니 철원(鐵圓)을 일컫음이니 지금의 왕이(궁예왕) 여기서 일어나고 여기서 망한다 하는 뜻이다. 그리고 먼저 닭(계림(鷄林))을 잡고 뒤에 오리(압록강(鴨綠江))까지 점령하여 나라를 통일한다는 뜻으로 풀이를 하였으나 궁예왕(弓裔王)에게 이와같이 보고하면 왕건(王建)의 목숨은 물론 자신들도 살아남지 못하리라고 단정하고 마침내 좋은 말로 적당하게 꾸며 보고하여 넘겼다
고 한다.
(註 4) 고려(高麗) 태조(太祖) 왕건(王建)이 용종(龍種)임을 자처하고 그 물증(物證)으로서 용린(龍鱗) 곧 용비늘을 고려왕조 대대로 계승 해 내려왔다. 이 고려 용비늘에 대한 조선조(朝鮮朝)중종(中宗)때의 기록을 보면 ꡐ잘 살펴보니 대모갑(玳瑁甲:열대 해양에 서식하는 거북이의 등겁질)을 깎아 용비늘 처럼 만든것ꡐ이라 하였다 이 용비늘은 명종(明宗) 때 경복궁(景福宮)의 화재로 소실되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