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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전서 2강 메시지_아산UBF(2022년 3월 13일)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씀 / 데살로니가 전서 2:1-16
요절 / 데살로니가 전서 2:13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캠퍼스 목자는 어떻게 복음역사를 섬겨야 하는가? 자비량 선교사는 어떻게 선교역사를 섬길 것인가? 오늘 말씀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감당하여야 할 것에 대하여 잘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말씀에서와 같은 아름다운 생명 구원역사가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1. 고난과 복음전파
1절과 2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이 헛되지 않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아나니,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전하였노라.”
사도 바울이 소아시아 서쪽 드로아 지방에 이르렀을 때 밤에 환상 중에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소아시아 지방에서의 선교를 성령께서 허락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대신 성령께서 마케도니아 사람 환상을 주신 것임을 영접하고 성령의 방향에 순종하여 바다를 건너갔습니다. 마케도니아 지방 첫 성이 빌립보였습니다. 여기에서 부유한 루디아를 첫 열매로 얻었습니다. 점치는 소녀에게서 귀신을 내쫓았는데, 돈벌이가 없어진 사람들이 바울을 핍박하여 감옥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감옥에서 감사하고 기도하였더니 감옥이 무너지고 간수가 회개하여 구원 얻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바울일행은 빌립보에서 쫓겨났습니다. 그 후 선교하고 개척한 교회가 데살로니가 교회입니다. 데살로니가에서도 성령의 역사가 있었지만 유대인들이 바울을 쫓아냈습니다. 할 수 없이 베뢰아로 갔는데 유대인들이 거기까지 쫓아와서 또 쫓아내어서 지금 이 서신을 쓰고 있는 곳은 아테네입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서 왔는데 고난을 받았습니다. 성령의 방향에 순종하였는데 핍박을 받았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있는 곳에 고난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쓰시는 종인데 어려움이 계속되었습니다. 한마디로 데살로니가 선교는 고난으로 시작하였고 고난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이야기 하는 것은 현재 데살로니가에 남겨진 성도들도 고난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있는 곳에 고난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쓰시는 사람에게 왜 고난이 있는 것일까요? 돈 좋아하고 세상의 소유를 좋아하는 사람은 별 문제 없이 잘 사는 것 같은데 주의 뜻대로 사는 사람, 복음을 열심히 전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왜 고난이 따르는 것입니까?
2. 복음을 맡은 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3-6절을 보십시오. 사도 바울과 일행이 데살로니가를 개척할 때 어떤 동기와 목적을 가졌는지 밝히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개척목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복음을 위탁받았다는 사명감이 데살로니가를 개척한 동기였습니다. 데살로니가는 예수님께서 맡기신 사명에 순종하여 개척한 교회였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개척된 교회였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우리 학생들은 의아하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주의 종들이 교회를 개척하는데 다른 뜻도 있습니까? 할 것입니다. 학생들이 소감을 쓸 때, 목자에게 지적 받겠다는 생각을 한다면 그런 사고 습관을 빨리 회개하여야 합니다. 학생들이 교회에 친구들을 초청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 목자님이 기뻐할 것 같다고 생각이 들면 그것도 빨리 회개하여야 합니다. 예수님 말씀을 전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복음을 맡기셨고 이 복음을 잘 전하고자 내가 먼저 말씀을 깊이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순수한 뜻과 올바른 목표를 가져야 합니다. 문제는 이것이 잘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우리는 자신을 굉장히 선하고 훌륭한 사람이라는 착각을 하면서 그것이 얼마나 문제가 있는지 깨닫지 못합니다. 성경을 보면, 모세가 언제 이스라엘을 노예상태에서 구원하려고 마음을 먹었습니까? 40세 때입니다. 그가 왕자로 있을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쓰지 않으셨습니다. 모세는 ‘내가 이스라엘을 구원해보지요’ ‘내가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보겠다’ 한 것입니다. “내가 한 번 해볼게요” 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십니다. 다윗왕이 언제 역사 전면에 나타났습니까? 아직 소년이었을 때, 물맷돌로 골리앗을 쓰러뜨리면서가 아닙니까? 그 때 다윗의 나이 열여섯 살 정도로 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윗에게 맡기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그 후 14년 동안 고난 받게 하셨습니다. 그런 다음 30세에 이스라엘을 다윗에게 맡겨주셨습니다. “내가 한 번 해볼게요” 자신이 주인입니다. 스스로 자신이 얼마나 영적으로 무지하며 얼마나 마음이 부패하기 잘하며 얼마나 하나님 역사를 섬기기에 부적합한 지 모르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복음 역사를 섬길 때, 역사가 일어나면 스스로 뿌듯해 하며 스스로 영광스러워 합니다. 자기는 중심에 있고 내가 언제든 애니콜 외치면 무슨 문제든지 달려와 섬겨주는 하나님을 바라면서 주님을 단지 자신의 헌신적인 주변인으로 여깁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도구로 여기는 죄입니다. 이런 죄를 회개하지 않고 있으면 결국 고칠 수 없는 영적 불치병에 걸립니다. “나는 위대하다” “나는 이런 면에서 특별하다” “이런 나를 교회가 알아주고 세상이 알아주어야 한다” 자기영광에 몰입하는 상태에 빠지는데, 이 병에 걸리면 결코 고치지 못합니다. 자기 영광을 구하는 영적인 병을 고치는 사람을 아직 못 보았습니다.
하지만, 이 죄에 빠지지 않는 길이 있습니다. 고난입니다. 고난은 일이 많아져서 고달픈 상태나 그런 수준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요셉은 17세에 노예로 팔렸습니다. 25세에는 감옥에 갇혔습니다. 다윗은 14년 동안 죽음의 위협을 당하고 쫓겨다니며 미움과 시기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모세는 여섯 명의 처제들이 있는 처가에서 말 못하는 양들을 데리고 광야에서 양똥 치우며 철저히 낮아지는 40년 세월을 보냈습니다. 고난의 시간동안 그들은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위태로웠으며 존재감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깊은 억울함의 밤과 낮을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어떨 때는 너무 괴로워 ‘죽은 개와 같은 나를 왜 이렇게 추격하십니까?’ 울부짖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고난을 통하여 그들은 하나님만 바라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사람들로 빚어졌습니다.
사도 바울과 일행들도 계속되는 고난, 끈질기게 방해하는 유대인들의 핍박과 투옥과 추방을 겪으며 ‘왜 복음을 전하여야 하는가?’ 목표가 분명해 졌습니다.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만 바라보고 부르심을 견고하게 하였습니다. 고난 받은 것 없이 주의 일을 하겠다 하고 연단 받은 것 없이 주의 일을 나름대로 해보겠다 하는 사람은 어리석습니다. 주님의 일을 하고자 한다면 충분히 준비를 하여야 합니다. 그것이 거룩하신 하나님께 쓰임받고자 하는 기본 자세입니다. 총 들고 전쟁터에 나가기면 하면 적들이 그냥 도망칩니까? 한국전쟁 초기 투입된 미군들이 그렇게 생각하였다고 합니다. ‘작고 미개한 동양인들이 미국인들만 보아도 도망칠 것이다’ 생각하며 웃으며 들어왔습니다. 어떤 지휘관은 철모도 쓰지 않았습니다. 북한군 최선봉을 맡은 사람들은 중국 국공내전에서 산전수전 겪은 조선의용군들이었습니다. 중공에서 실전경험한 사람이 북한 인민군내 10만 명에 달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최초의 미군 스미스 대대는 오산에서 전멸 당했습니다. 다치거나 산 사람은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천안 전투에서 연대장 마틴 대령이 천안삼거리에서 탱크포에 직격당해 전사하였고 그의 34연대는 패전을 거듭하며 너무 피해가 많아 미국 육군에서 최초로 34연대 단대호가 없어졌습니다. 34연대가 속한 24사단 사단장 딘 소장은 대전 근교에서 인민군 포로가 되는 수모까지 당하였습니다. 이 군인들은 일본에 주둔하며 파티를 즐기며 5년간 점령군의 쾌락을 맛보며 지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연단 없는 군인들이면서도 ‘우리가 가면 적들은 다 도주할 것이다’ 막연한 낙관, 근거 없는 오만을 가지고 전쟁에 왔습니다. 준비 없는 군인들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역사가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 말 진짜에요?’ 내 말이 의심되는 사람들은 저녁에라도 천안 삼거리초등학교와 천안박물관 사이에 가보시면 됩니다. 24사단 34연대 연대장이 북한군 T-34 탱크포에 맞아 전사한 곳이라고 여러 가지 표지가 되어 있습니다.
고난 받지 않고는 주의 사명을 온전히 수행하기 어렵습니다. 연단 받지 않은 전도자는 열매 맺는데 더 많은 시간이 걸리는 법입니다. 우리는 흔히 고난의 시간을 의미 없는 시간이라 생각 합니다. 전도의 뜻을 가진 사람들이 그냥 말씀 전하면 되는 거 아닌가 생각 합니다.
주의 종은 깨끗하여야 합니다. 목적이 깨끗하고 의도가 순수하고 마음이 정결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스스로 깨끗하고 순수하다고 여긴다면 착각 속에 있는 것이며 자신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완전히 부패하여 조금도 선한 일에 쓰일 수 없는 타락한 인생입니다.
사도 바울도 고난 받았는데, 우리 주 예수님께서도 많은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 오셔서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히브리서 5:8,9 절 말씀입니다. 위대한 사도 바울도 고난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향하는 마음을 더욱 정결하게 하였는데, 우리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도 고난을 주신 후 하나님을 섬기고 백성들을 사랑하는 총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도 고난의 시간을 통과한 후 이스라엘 백성들을 섬기는 지도자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종 다윗도 고난을 통하여 연단 받게 하신 후 이스라엘을 양처럼 돌보는 목자 같은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우셨는데, ‘나는 선하다’ ‘나는 깨달은 바가 있다’ ‘나는 해볼 만 하다’ 여긴다면 영적으로 어두운 상태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시간이 이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는 일에만 소모될 것입니다.
“우리는 너희에게서든지 다른 이에게서든지 사람에게서는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였노라” 많은 고난 받은 사도 바울과 일행들은 데살로니가 형제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여러 영혼들을 섬기는 일을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였습니다. 따라서, 데살로니가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세워진 교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동기와 목적이 정화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완성과 성숙의 요건을 갖춘 것이라고 여길 수 없는 것입니다. 동기와 목적이 깨끗해졌다면 과정과 방법과 내용도 하나님의 거룩한 복음을 담을 만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동기와 목적은 순수한데 양들을 데리고 막걸리 마시며 상담하는 목자가 예전에 있었습니다. 동기는 순수하지만 해병대나 공수부대 같은 강압적이고 비인격적인 군대훈련 시키는 일도 있었습니다. 왜 그러셨는가 물어보니 “내가 말씀이 없고 내용이 없어서 그랬다”고 고백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3. 본을 보이는 사명인의 자세 : 유모의 헌신과 아버지의 교육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사도 바울과 일행들이 복음전파 사명을 받고 구체적으로 어떤 방법과 어떤 내용으로 데살로니가 교회를 개척하였는지 7절부터 밝히고 있습니다.
첫째, 사도 바울과 다른 일행들이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하고 양들을 섬길 때 나타낸 것은 양들에게 본이 되는 생활과 올바른 사명인의 자세였습니다. 바울과 일행은 양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았습니다. 양들을 생각하고 배려하였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의 사도의 권리를 말하며 주거와 식사문제를 양들에게 비용 부담시키지 않았습니다. 사도이면서도 스스로 일을 하여 비용을 마련해가며 복음역사를 섬겼습니다. 데살로니가 양들을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마땅히 권위를 주장할 수 있으나 도리어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가 되어”
사도 바울과 일행들은 양들처럼 같이 일하고 같이 땀 흘리면서 같이 어려움을 겪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사도 바울과 일행들은 대학원생의 괴로움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과 일행들은 평신도들이 직장에서 얼마나 많은 요구를 회사로부터 받으면서 수고하고 애쓰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깊은 이해와 공감을 가지고 전하는 복음은 생동감 있고 생명력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종은 사람에 대한 깊은 이해와 공감이 있어야 합니다. 이해가 없으면 양들을 인내하기 어렵습니다. 공감하지 못하며 전하는 말은 양들에게 감동을 주기 어렵습니다.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노라” 사도 바울은 9절 말씀에 이것을 기록하였습니다.
둘째, 사랑의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7절 후반절과 8절을 보십시오.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 너희가 우리를 사랑하는 자 됨이라” 유모는 젖먹이는 시기부터 양육에 참여합니다. 이 시기 어린 아이는 먹여주고 씻겨주며 밤낮 보살피지 않으면 생존하기 어렵습니다. 유모는 아기의 생존과 성장을 위하여 자기 시간과 자기의 모든 관심을 다 쏟아주어야 합니다. 유모는 전적으로 아기의 양육에만 전념하도록 부탁받은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돈 받고 남의 아기를 길러주는 차원을 벗어나 하나님의 복음만 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명까지 양들에게 주고자 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양을 향한 사랑의 수고를 하되 목숨까지 주고자 하였습니다. 어떤 목자는 평소 친절하고 빵도 사주고 먹을 것도 잘 사주는데, 자기 공부 위한 시간은 절대 양들에게 내주지 않았습니다. 어떤 목자는 다른 것은 다 해줄 수 있지만, 양이 자기 집에 오는 것은 허락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어떤 분은 ‘내가 물리적인 섬김은 하였으나 양들의 명예를 높여주는 섬김은 하지 않았다’ 회개하는 것도 보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면서 양들이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자라나도록 예수님의 이름으로 우리의 사랑을 아낌없이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셋째, 가르치고 교육하였습니다. 10~12절을 보십시오. 함께 해주면서 이해와 공감이 있고 어머니와 같은 따뜻한 사랑으로 섬긴다고 하여도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이해와 사랑하는 것에서 그칠 때, 양들은 철부지로 살아갑니다. 그들은 이해받으려고만 하면서 다른 사람은 이해해 주지 않는 문제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들은 섬김과 사랑을 받았으면서도 그것을 누릴 줄만 알지 다른 사람에게 그만한 사랑을 해주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과 일행들은 데살로니가에서 옳은 믿음의 길을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였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훈계하고 분명하게 교육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이런 교육과 훈계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사람들이 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라”
이해하고 공감하고 사랑의 수고를 아끼지 않고 그러면서도 가르치고 훈계하고 연단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런 일은 자기가 먼저 사랑을 믿고 또한 자기가 먼저 연단 받아 본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은 순종을 배우지 못하였으면서 양들에게 순종을 요구한다면 양들은 따르기 어렵습니다. 자신은 연단 받은 것이 없으면서 양들에게 연단 주려고 한다면 그런 연단은 지속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사랑받고 연단 받고 그 유익을 아는 사람이 다른 인생에 대해서도 사랑으로 섬기고 연단할 수 있습니다. 연단 받은 요셉이 그 유익을 알기에 감정을 억제하고 형들을 훈 연단하여 형들이 복의 근원답고 12지파의 머리가 될 만 한 사람들이 되도록 도운 것이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4.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고 고난에 동참한 데살로니가 형제들
1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고난 받으며 사명을 감당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복음 전하고 양들에게 본을 보이며 사도의 직분을 다한 바울의 수고를 하나님께서 복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뚜렷한 열매를 주셨습니다. 데살로니가 형제들은 사도들이 전한 복음을 사람의 말로 받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습니다. 사도들이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말씀 권능이 역사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은 그들에게 성령께서 깊은 은혜를 주셨습니다.
말씀의 은혜 받은 데살로니가 형제들은 그들도 핍박 앞에서 고난 받았습니다. 고난은 목자님들이나 감당하는 것이고 나는 은혜를 누리면 되는 것이라 여기지 않았습니다. 데살로니가 형제들은 고난을 그리스도를 믿을 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로 영접하고 고난 속에서 인내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고난을 받으며 장차 오실 예수님을 바라보는 소망을 붙들었으며 귀한 믿음인 재림신앙에 도달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난 받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그들이 받는 고난은 일찍이 예루살렘의 성도들도 받은 것이라 알려주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예수 믿는 성도들도 유대인들로부터 핍박을 받았습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도 예루살렘 형제들과 같이 유대인들의 고난을 받음으로써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고난의 동지이며, 믿음의 동지가 되었습니다. 데살로니가의 형제들은 그들을 핍박하는 유대인들이 마치 하나님을 올바로 믿는 정통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며 거들먹거리지만 사실은 예수님을 죽인 자들이요 옛적에는 선지자들을 죽인 고집불통의 불신전통을 가진 자들임을 알려 줍니다. 그런 자들이 가하는 핍박이므로 훼방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정통성도 없고 정당한 것도 없는 대적자들이며 복음의 원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굽히지 아니하고 고난 받는 데살로니가 형제들은 착하고 충성된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결론적으로 오늘 말씀을 볼 때 좋은 열매 맺기 위해서는 목자가 먼저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이 땅에서의 복음 전파는 많은 경우 고난을 동반합니다. 목자가 고난 받을수록 양들은 살아나는 법입니다.
다음으로 좋은 열매 맺는 목자는 동기와 목적이 순수합니다. 복음 전파 사명에 충실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합니다. 좋은 열매 맺는 목자는 본을 보이며 따뜻한 사랑으로 보살핍니다. 주의 말씀으로 가르치고 교육하는 수고를 감당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성경말씀을 자기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접하는 아름다운 역사가 활발하게 지속되기를 기도합니다.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아산 UB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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