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세자, 경주 최 부잣집의 뒤주
선조들은 논밭의 귀한 곡식을 거둬들이고 창고, 광, 나무통 뒤주에 보관했다. 나무로 만들어 곡식을 담은 궤櫃의 용도에 따라 크기가 다르다. 큰 뒤주는 1 ~ 2가마의 곡식이 들어갔다. 곡식을 귀중하게 여기며 절제하면서 식량을 해결했다.
조선시대 문헌상에 뒤주의 사연이 후대에 전해 온다. 뒤주에 얽힌 역사적인 슬픈 사연이 있다. 춘공기春空飢에 배고픈 사람에게 나누어준 사연도 있다.
곡식을 담아둔 뒤주에 얽힌 사연은 많다. 그중 조선시대 두 가문의 사연을 소개한다.
두 가문의 뒤주에 관한 사연이 다르다. 서민층의 사연은 아니다. 조선시대 왕권의 세력자와 만석꾼 부자의 사연이다.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일이다.
먼저 임오년 화변禍變 사연이다.
사도세자는 1762년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었다.
조선시대 권문세가, 왕족은 왕위세습을 위해 온몸을 바쳐 몰두했다. 권력에 바뀌면 일부 사람은 죽음과 궁궐 밖으로 내몰리고 귀양 갔다.
영조는 재위 52년 동안 유지하면서 감정의 기복이 심했다. 사도세자는 어릴 적에는 영조의 총애를 받는다. 사도세자는 장성하여 정도의 길을 가지 않았다. 환관, 나인, 노비가 직언하거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수십 명을 죽인다. 이런저런 이유로 영조, 사도세자 부자지간의 갈등이 세상에 알려졌다. 왕족 가문으로서 일어나자 말아야 할 사건이 일어났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창경궁 뒤주에 가둔다. 영조는 하루에 한 번 뒤주를 흔들며 생사를 확인한다. 그런 절박한 상황에서 영조의 마음은 얼마나 애통했을까?
아버지가 후계자의 친아들을 뒤주 안에서 8일 만에 죽게 만든다. 그토록 자식을 죽음으로 몰고 간 이유는 시대적 상황과 여러 가지가 작용을 했다. 알려진 것은 ‘의대증 ’, ‘진현’, ‘기행’, ‘살인’ 등이다. 필자는 앞에 열거한 사항은 설명은 하지 않는다. 이미 문헌과 트브 방송에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영조는 아들 사도세자를 그 자리에서 몰아내고 서인으로 폐위시키고 자식이 태어난 조선 한성부 창경궁 뒤주에 가두고 죽게 한 것은 측근 신하, 외척의 잘못이다. 영조와 사도세자의 책임도 크다. 사도세자는 죽기 전에 칼로 두 차례 자결하려 했으나 신하들의 제지로 실패했다. 사도세자의 모친 영빈이씨는 충격을 받아 영조에게 눈물을 흘리면서
“주상의 옥체는 어찌 소중하지 않겠습니까가?”하면서 ’대처분‘이란 말을 감히 영조에게 했을까?
다음은 경주 최씨 최종률(1724 ~ 1773)은 만석군의 아들로 태어나 부를 이은 최 부잣집의 사연이다.
그의 아들 최기영(1768~ 1834)는 이름 없는 선비나 행색이 초라한 사람에게 잠자리와 밥을 제공했다. 그 당시 최 부잣집 대문 앞에 6~ 7개의 뒤주를 만들어 놓는다. 한 줌 쌀을 집어 들고 가면 하인들이 밥을 지어주고 잠자리 내준다. 뒤주 구멍을 만들어 손님이 쌀을 한 주먹 쥐고 가져가게 뒤주 구멍을 만들었다. 하루에 100여 명이 쌀을 뒤주에서 가져간다. 욕심을 부려 두 손을 넣어 많아 가져가고 싶어도 뒤주 구멍이 작아 가져가지 못했다. 욕심을 부리지 못하게 만든 뒤주 구멍의 지혜가 담긴 궤의 쌀독이다.
경주최씨 가문은 진사 이상 벼슬을 자제한다. 한양가서 관직을 받으면 부와 권력을 얻지만 대립하여 잘못된 경우가 많은 것을 목격한 사성공파 최진립은 자식과 후손에게 유훈을 내린다.
’과거시험은 보되 진사 이상의 벼슬은 하지 말아라!‘ 라는 가훈을 지키도록 한다. 재산을 유지하고 양반의 반열에 올라도 최소한 소과인 진사는 생원에 급제한다. 정치와 경제를 분리하여 엄격히 실천한다.
최국선(1631~1682)는 1672년 상옹원 참봉에 제수된다. 임금의 명을 어기지 못하다가 최진립 할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노부모의 봉양 핑계를 대고는 관직을 내려놓았다. 그 후 그는 고향으로 온다.
조선시대 권력가의 가문과 지방의 만석꾼의 가문의 뒤주의 구멍에 얽한 사연은 다르다.
사도세자 가문은 ‘종사보위’를 300년이었고, 경주최씨 부자는 300년 동안 만석꾼을 유지했다.
부불삼대, 권불십년, “부는 삼대를 넘기기 힘들고, 권력도 10년 넘기는 일 힘들다.”라는 말이 새롭게 느껴진다.
구멍 뒤주에 관련되어 세상에 화제로 떠오른 두 가문은 ’종사보위‘와 ’만석꾼 집안‘을 이으려고 노력한 가문이다.
암행어사 김정희의 악연
사람은 인연으로 살아간다. 대부분 사람들은 좋은 인연으로 살아가길 원한다. 그렇지만 좋은 인연만큼 악연으로 이어진 사람도 있으니, 자신이나 자신 주변에 해를 입혀 나쁜 결과를 가져온 것으로 맺어진 사람이다.
이글에서는 충남 예산군 신암면이 고향인 조선 후기 암행어사 김정희의 악연을 소개한다.
‘김정희’라고 하면 떠오르는 것은 추사고택, 세한도, 추사박물관, 제주도 유배, 추사체 등이다. 그는 41세인 1826년(순조 26) 2월, 임금으로부터 충청우도 암행어사를 제수받는다. 봉서, 사목, 마패, 유척 등을 수령하고 충청우도에서 110일간 암행 감찰을 했다. 그는 충청우도의 해당 고을과 외딴 마을을 살폈다. 남루한 옷과 찢긴 삿갓을 쓰고 다니며 관리들이 공무와 관련하여 어긋난 일은 하는지 두루 살핀다.
1826년 6월 25일, 김정희는 자신이 목격하고 느낀 바를 작성하여 임금에게 보고한다. 충청우도 암행어사로 활동한 복명서, 인명부와 안흥굴포(안면도) 해운항로 개설 문제 등이 주요 골자다. 이때 김정희는 지역관리자 59명을 암행 조사했다. 짧은 기간에 충청우도와 경기도 관내를 순찰하여 비리를 적발하고 임금에게 장계를 올리는 일은 힘들었다. 행장을 차리고 말을 구하지 못하면 먼 길을 걸어서 수천만 리를 다녀야만 했기 때문이다.
김정희는 암행어사 수행 중 감사와 현감, 군수 등 12명을 삼정을 문란하게 한 행위, 악질적인 지방의 토호 비리의 명목으로 적발한 후 징계하였다. 그중 충남 서천군 비인현감 김우명은 부정이 많았다. 이에 그를 파면하고 관가의 창고를 봉했다. 뒷날 이 일이 근원이 되어 김정희 가문과 김우명의 악연은 모질게 이어져 대를 이어 지속되었다. 김우명과 김정희는 나이 차가 난다. 당시 김우명 비인현감은 59세로 김정희보다 한참 위였다. 그 당시 김정희 경주김씨 가문은 높은 관직과 신분을 누렸으나, 이후 김우명과의 악연으로 큰 어려움을 겪게 된다.
1826년(순조 26) 9월, 김정희는 암행어사로 대산 지방 시찰 중 평신첨사가 백성들에게 부당하게 가렴주구하니 이를 적발하여 막아 주었다. 그러한 음덕을 기리고자 ‘어사 김정희 영세불망비’를 지역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세웠다.
현재 이 비문은 다른 곳에서 이곳으로 옮겨져 서산시 대산읍 대산리 1365-8번지 국도 29호선 도로변에 여러 비석과 나란히 세워져 있다. 계단을 올라가면 오른쪽 첫 번째 비석이다.
비의 전면 좌우 측에는 4언 대구 글이 있다.
御使 金正喜 永世不忘碑
赴王事忠 作民業安
穙我賴誰 雪山甚重
慱施之澤 永防加斂
證比不忘 於千萬年
임금을 섬김에 충성스럽고 백성의 생업을 편안하게 하다.
백성들은 누구에게 의지하는가. 설산(雪山)은 매우 중하다.
백성에게 나누어주고 베풀어 윤택해졌다. 세금을 가혹하게 거둬들이고 백성들의
재물을 무리하게 빼앗는 일을 영원히 막아 주다.
이런 업적은 대산 주민들은 잊지 않느니, 아아, 천년만년을 이어지길 바란다.
1830년 8월, 그가 암행어사 시절 봉고파직 시킨 김우명을 안동 김문은 무관직인 오위의 종6품 중앙관직 부사과로 복직하도록 전략을 꾸민다. 그리고 복직된 김우명은 김정희의 부친 김노경을 탄핵하여 전남 강진현 고금도로 유배되도록 한다. 그러나 김우명과 김정희 가문과의 악연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1840년, 김우명과 김정희의 악연은 14년이 지나서도 이어졌다. 1826년 봉고파직 당한 김우명은 1839년 6월 사간원의 대사간이 되고 김정희를 탄핵하여 궁지로 몰아넣는다. 그해 9월, 결국 김정희는 제주도 대정현으로 귀양길에 오르고, 가시울타리 안에 갇히는 위리안치의 형을 받는다.
영조의 계비인 정순황후 김씨의 오빠는 경주 김문의 김귀주다. 그는 사도세자를 탄핵해 죽게 한 문신이다. 경주 김문은 시파인 순조비 순원왕후의 장인인 김조순을 중심으로 하는 안동 김문과 대립각을 세우다 큰 피해를 본다.
안동 김문은 왕족의 가족보다 힘이 센 척사가문이었다. 그들은 김정희의 암행어사 시절 봉고 파직당한 김우명 원한을 재차 이용하는데, 그때 김우명의 나이 73세였다. 세도정치를 편 안동 김문은 혼인을 통해 가문들과 결합하여 국혼을 맺었다. 그들은 왕실과 결합한 경주 김문과 다른 가문에게 화를 입혔다.
김정희는 수십 년 동안 김우명과의 악연으로 높은 관직에 도달하지 못하고, 긴 세월 제주도에서 유배 생활을 했다. 김정희는 유배 생활 중 많은 책을 저술했고, 후배를 양성하면서 인고의 생활을 이겨낸 훌륭한 인물이다.
지금까지 두 사람 간의 모진 악연을 대략 살펴보았다. 그런데 예산지역 사람들은 대부분 젊은 시절 김정희가 암행어사로 활약상을 잘 모른다. 다만 암행어사 수행 중에 아쉬운 점은 홍성군 성리학자 남당학파 한원진이 저술한 책 중 일부를 불태웠다.
2011년 친필본 ‘추사 김정희의 암행보고서’ 발굴되었다. 기쁜 일이다. 이런 학술지 자료들이 많이 세상에 알려지길 바란다.
그동안 김정희 연구 논문과 서적이 세상에 많이 나왔다. 그러나 암행어사 김정희에 대한 연구 논문은 소수에 불과하다. 앞으로 김정희에 관한 연구와 발표가 더 다양하게 이루어지길 바란다. 세상에 알려진 암행어사 박문수는 암행어사가 아니다. 일반어사이다. 추사 김장희는 어사를 떠나서도 모든 면에 있어 박문수보다 뛰어난 학자이다.
젊었을 때 예산군이 고향인 김정희 암행어사 행적은 지금 보아도 자랑스럽다. 우리 주변에서 조선 후기 김정희 가문처럼 모진 악연은 일어나지 않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