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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월 중순(10수)
하루시조011
01 11
가마귀 검거라 말고
무명씨(無名氏)
가마귀 검거라 말고 해오라비 셀 줄 어이
검거니 세거니 일편(一便)도 한저이고
우리는 수리두리미라 검도 세도 아녜라
가마귀 – 까마귀
해오라비 – 해오라기. 깃 색깔은 등 쪽이 검은색, 배 쪽은 흰색, 날개는 회색이며, 다리는 겨울에는 누런색, 여름에는 붉은색이다.
셀 – 흴. (세다 - 머리카락이나 수염 따위의 털이 희어지다.)
수리두리미 – 독수리 닮은 학(鶴).
어이 – 어찌 알리요?
일편(一便) - 어떤 일의 한 측면. 한빛.
한저이고 – 하고(되고) 싶지만
검다 희다 하는 것을 까마귀와 해오라기를 들어 비유법으로 사용된 시조 작품의 예는 많습니다. 해오라기 대신에 백로를 쓰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해오라기 색깔이 회색인데도 ‘세다’고 하여 까마귀와 대립시킨 것입니다.
수리두루미가 두루미의 일종이긴 한 모양인데, 두루밋과에는 두루미, 재두루미, 흑두루미, 검은목두루미 따위를 포함하여 14종이 있다고 합니다. 색깔은 회색이라고 봐야겠지요.
살다보면 흰색도 아니고 검정색도 아닌 회색일 수밖에 없을 때가 많습니다. 남북이 갈라져서 사상을 편가름하며 살아온 우리 한민족에게는 회색이 용납되지 않았던 시기도 길었지요. 최인훈의 ‘광장’의 주인공이 겪었던 고민이 생각납니다.
시적 화자처럼 자기는 잿빛이라 미리 말한다면 편가르기 고민을 피해 갈 수는 있겠으나 흑백 어느 쪽의 부름도 받을 수가 없겠지요. 그런 ‘부름’에 연연해 하지 않는다면 괜찮겠지만요. [최이해 崔伊海 해설]
덕분에 매일 시조한수씩 음미하게 됩니다. 오늘은 특히 한저이고 옛말을 배웠네요. 꾸벅
하루시조012
01 12
너볏하자 하니
무명씨(無名氏)
너볏하자 하니 모난 데 가일세라
두렷하자 하니 남의 손대 둘릴세라
외 두렷 내 번듯하면 개 둘릴 줄 있으랴
너볏하자 하니 – 아주 떳떳하고 의젓하게 처신(處身)하려 하니
가 – 변(邊)
두렷하자 하니 – 둥글둥글 살아가려 하니
남의 손대 – 남으로부터
둘릴세라 – 휘둘릴 것이라. 이용당할 것이라.
외 두렷 내 번듯 – 외유내강(外柔內剛)
개 둘릴 줄 – 휘둘림을 당할 리
어휘가 예스러워 시정(詩情)을 전해 받지 못할 뻔했으나, 알고 보니 가장 쉬운 외유내강을 말하고 있습니다. ‘가일세라’는 여전히 어렵군요. 모가 난 곳이 주위가 될세라, 그리하여 주변 사람들이 베이거나 다칠세라 정도로 의역을 해봅니다.
‘너볏’과 ‘두렷’이 서로 대척점에 선 말이라는 것을 정리하면서, 참 많은 어휘가 사라졌음을 알게 됩니다. ‘손대’의 해석도 미심쩍어서 어미로 쓰였다면 모를까 ‘~으로부터’는 두루뭉술한 표현이지 싶습니다.
'개'가 나와서 요즘 젊은이들이 두고 쓰는 그 개인가 했는데 여기서는 휘 의미의 접두사로군요
이 작품을 살펴보면서 외유내강으로 살지 못하고 내유외강(內柔外剛)으로 살아온 것만 같아 살짝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이.시조는.지금쓰지않는 옛말이 많이.나와 어렵군요.
남의.손대의 손대는, 최경창과.헤어지며 쓴.홍랑의.유명한.시조의 초장끝에도 나오죠.
묏버들.갈해꺾어.보내노라.님의 손대
오늘도 잘.배웁니다. 감사합니다
외유내강의 순수우리말 표현이 너무 멋집니다
홍랑의 손대는
님께 라고 풀어지죠
암튼
교수님 한 마디 한 마디 복사해서 갈무리하고 있습니다
주걱주걱
그 새 이름을 물어온 친구한테는 고스란히 복사해서 교수님 이름과 함께 전달했고요 ㅋ
님의손대 님에게(께) 란 뜻으로 여기서도 남의손대 즉, 남에게 로 똑같이 해석가능합니다
하루시조013
01 13
빚은 술 다 먹으니
무명씨(無名氏)
빚은 술 다 먹으니 먼 데서 벗이 왔다
술집은 제연마는 헌 옷에 얼마 주리
아해야 서기지 말고 주는 대로 받아라
제연마는 – 저기이건마는
서기지 말고 – 억지를 써서 속이지 말고
작품 속의 벗은 참 발이 짧군요. ‘발이 길다’는 관용구는 별식(別食)을 하거나 먹을 때 ‘짜잔’ 등장하는 인물에게 붙여줍니다. 식구끼리 먹기에도 모자라는데 또 나눌 사람이 왔으니 속으로는 마뜩잖으나 한민족의 정서가 내색(內色)을 하면 안 되는지라 이 관용구 하나로 마무리를 하는 것이지요.
먼 데서 왔으니 재우고 먹여야지요. 상은 채소 반찬에 탁주라도 내야 하고요. 주점(酒店)은 아주 가까워 그냥 외상 달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옷가지를 들려 심부름을 보냅니다.
헌옷을 주면 술을 바꿀 수가 있었네요.
작품 속에 나타나는 당시 풍속을 접하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래도 걱정 하나. 헌옷이라, 서기지 않고 받아온 술이 감질나게 적은 양이면 어쩐대요.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014
01 14
가더니 잊은 양하여
무명씨(無名氏)
가더니 잊은 양(樣)하여 꿈에도 아니 뵌다
설마 임이야 그 덧에 잊었으랴
내 생각 아쉬운 전차로 임의 탓을 삼노라
양(樣)하여 – 모양인 듯
덧 – 짧은 동안. 사이.
전차 – 연유(緣由)나 까닭.
자주 쓰는 부사 ‘어느덧’에 ‘덧’도 이 작품 속의 ‘덧’이로군요.
‘전차’가 ‘까닭’이라는 걸 배우던 학창시절이 생각납니다.
별리(別離)가 인생사 필연일 수밖에 없다하지만 선인(先人)들은 ‘꿈’을 통해 이런저런 가능성을 열곤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그런가요. 통신수단의 발달로 꿈은 꿈일 뿐, 보고싶으면 금방 목소리를 확인하고 더구나 화상통화가 일반화되었습니다.
‘탓’은 책임 전가의 쉬운 방법이지요. 그래도 이 작품 속의 화자는 솔직해서 ‘내 아쉬운 생각으로’ 부러 탓을 끌어다 댔다고 시적 진실성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동짓달 긴긴 밤을 노래한 여러 시조작품들 중의 수작(秀作)임에도 무명씨 작품이라서인지 잊혀져 가고 있어 보여 끌어왔습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015
01 15
각씨네 고와라 하고
무명씨(無名氏)
각씨(閣氏)네 고와라 하고 남의 애를 끊지 마소
흐르는 세월(歲月)을 자네 따라 잡으실까
백발(白髮)이 귀밑에 흩날릴 제 뉘우칠 법(法) 있으리라
각씨(閣氏) - 젊은 여인네의 지칭(指稱)이자 호칭(呼稱)이었는데, 현재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시적(詩的) 화자(話者)는 아마도 젊은 여인네에게 연정(戀情)을 호소하는 남정네로 보입니다. 고운 자태를 내세워 남의 애를 태우지 말게나. 그대도 늙을지니 나중에 뉘우칠 것이리라.
거의 윽박지르는 듯한 구애입니다.
‘애’는 우리말 한 음절 어휘입니다. 애를 쓰다, 애를 태우다, 애를 끊다, 애를 끓이다 등 따라오는 서술어가 여러 가지입니다.
이 남정네의 나이는 어느 정도나 되었을까요. 각씨네와는 스무 살 이상 층하가 날 것이라는 의견이 있는가 하면 아마 엇비슷할 것이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후자의 경우는 신분이나 형편상 층하가 있다고 해야겠습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016
01 16
겨울날 다스한 볕을
무명씨(無名氏)
겨울날 다스한 볕을 임 계신 데 비추고자
봄 미나리 살진 맛을 임에게 드리고자
임이야 무엇이 없으랴마는 내 못잊어 하노라
임 – 임금
살진 맛 – 진미(珍味)
충성(忠誠)이 몸에 배인 조선왕조시절의 선비 중에 한 사람이 남겼을 법한 작품입니다. 이름을 숨긴 무명씨가 아닌 그야말로 어쩌다 이름씨가 떨어져 나간 실명씨(失名氏) 작품이라고 해야겠습니다.
시조 속의 ‘임’을 ‘임금’이라 획정하고나면 감상의 맛과 멋이 현저하게 떨어지고 맙니다.
에이구나, 벼슬에서 물러나 다시 불러주기를 기다리는 ‘그렇고 그런’ 작자의 작품이구나.
그래서 저는 ‘임’을 ‘그리운 사람’으로 바꾸어 감상하곤 합니다. 시적 화자보다 훨씬 갖춰진 환경에 있는 상대방에게 자신이 지닌 기중 귀한 무엇을 보내고 싶은 심정이 그런대로 애틋하게 전해져 옵니다.
봄 미나리의 살진 맛이라니요, 먹어본 사람들 많으실 겝니다. 요즘은 하우스에서 지하수로 키워낸 이른 봄맛이 시작되고 있을 것이고요.
겨울 햇볕에 대한 표현이 ‘다스한’입니다. ‘따스한’도 아니고 ‘따듯한’도 ‘따뜻한’도 아닌.
고시조를 통해 우리말의 풍부한 어감을 한 바가지 퍼갑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017
01 17
공명도 헌신이라
무명씨(無名氏)
공명(功名)도 헌신이라 헌신 신고 어디 가리
벗어 후리치고 산중(山中)에 들어가니
건곤(乾坤)이 날더러 이르기를 함께 늙자 하더라
공명(功名) - 공을 세워 이름이 널리 알려짐. 또는 그 이름.
후리치고 – 후려치고
건곤(乾坤) - 하늘과 땅. 천지자연.
공명을 경멸하고 산수(山水) 자연(自然)으로 가자는 권유(勸誘)가 담겨 있습니다.
신흠(申欽)의 시조에도 ‘헌신짝 버선’으로 공명을 비유했는데, 아마 이 시조가 앞섰다면 가져다 쓴 것이 될 것이나 그건 알 수 없습니다. 신흠 선생의 헌신짝은 공명을 이뤄본 사람으로서의 경험담이라 할 것이고, 무명씨의 이 작품에서의 헌신은 미경험자이지만 지레 알고 공명을 피해 자연에 드는 자의 가치 판단입니다.
입신양명(立身揚名)이 조선시대 선비된 자들의 최대 목표였음을 감안한다면 참 어려운 권유임에 틀림 없습니다.
‘함께 늙자’는 비슷한 표현이 많은 작품에서 보입니다. 자연의 의인화가 유한한 인생의 무한함으로의 변신을 이끌고 있습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018
01 18
기러기 산이로 잡아
무명씨(無名氏)
기러기 산이로 잡아 정(情)들이고 길들여서
님의 집 가는 길을 역력(歷歷)히 가르쳐 두고
밤중만 님 생각날 제면 소식(消息) 전(傳)ㅎ게 하리라
산이로 – 산 채로
역력(歷歷)히 - 자취나 기미, 기억 따위가 환히 알 수 있을 정도로 또렷하게.
기러기가 등장하는 시조는 참 많습니다. 이 작품에서는 소식 전달자로서의 기러기가 등장합니다. 상투적(常套的)입니다. 상투 – 변하지 않는 버릇. 통신기술의 발달이 상상력을 갉아먹어서인지 ‘빠름’만 살아 있고, ‘정성’은 있는 둥 마는 둥 할지라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중국의 1리(里)를 10리로 늘여잡은 우리 민족이고 보면 기러기가 날아가야 소식이 닿는 변방과 오지의 거리감이 안 잡힐 수밖에요.
정들이고 길들이고. 비슷한 어감을 늘어 놓으니 좋군요, 공(功)들이고 힘들이고. 뭔가를 들이는 일은 곧 살아가는 일이 됩니다.
생각날 때마다 편지를 썼던 젊은날이 있었습니다. 그 ‘님’은 글도 안 쓰는지, 아니면 개명(改名)이라도 했음인지 검색창에 가끔씩 이름자 쳐 넣어보지만 이거다 할 만한 기사는 뜨지 않습니다.
섣달 그믐날이 다 와가고, 억세게 밤이 깁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이 시조는 부안의 명기인 매창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지요. 즐감합니다.
이 시조시는 여창지름시조로 즐겨부르기도하여 반갑네요.
하루시조019
01 19
그리던 임 만난 날 밤은
무명씨(無名氏)
그리던 임 만난 날 밤은 저 닭아 부디 울지 마라
네 소리 없도소니 날 샐 줄 뉘 모르리
밤중만 네 울음소리 가슴 답답하여라
없도소니 - 없더라도
밤중만 - 밤 내내
닭은 정확하고 부지런한 덕성을 지녔습니다. 새벽을 알리는 귀한 역할도 해오고 있지요. 그런데 이 시조에서는 닭 울음에 대한 원망이 주조를 이룹니다. 닭이 울지 않아도 날은 새기 마련이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한 때 이 땅의 민주화 투쟁을 이끌던 표어도 있습니다.
회포(懷抱), 품을 회, 안을 포. 그래서 ‘푼다’는 말을 붙여서 쓰면서 남녀간의 애정행위를 일컫는 말로 쓰입니다. 그냥 ‘가슴에 품은 생각’이라는 본래의 의미가 변색을 하는 것이네요.
닭의 낮울음은 저 잡혀 먹을 소리요, 이 작품 속의 ‘밤중만’ 울음소리는 새벽에 여러 차례 울어대는 상황이라 하겠습니다. 첫홰를 신새벽으로 하여 네댓 차례 울지요. [최이해 崔伊海 해설]
시적 화자가 현재 회포를 푸는 중인지.
아니면 그런 상황을 가정해서 한 마디 읊은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은데요.
이 모호함 또한 무명씨의 기술입니다.
하루시조020
01 20
기러기 저 기러기
무명씨(無名氏)
기러기 저 기러기 네 행렬(行列) 부럽고야
형우제공(兄友弟恭)이야 제 어이 알랴마는
다만지 주야(晝夜)에 함께 낢을 못내 부러하노라
형우제공 - 형은 우애하고 아우는 공경한다
낢 - 날다의 명사형
오늘은 설날입니다.
예전에는 설날 전날에는 묵은 세배라 하여 조상님 사당에 절하고, 동네 어르신들 찾아 뵙고 하면서 지나간 한 해의 무탈함에 감사했습니다.
설날 당일에는 차례를 지내며 덕담을 나누고 이어서는 일가친척들을 찾아가 세배를 올렸습니다.
정월 보름날까지는 세베기간이었습니다.
세배는 형제간에 줄을 지어 이 집 저 집, 논두렁 밭두렁 길을 이어가며 행렬을 이뤘는데, 여기서 나온 말이 ‘안행(雁行)’입니다. 기러기 줄지어 날 듯 형제간에 나란히 길을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족보를 따질 때 ‘항렬(行列)’이 나오는데요, 모두 갈 행 行 을 쓰고 항렬 항이라 읽습니다.
오늘 시조작품을 읽자니 기러기를 등장시켜 형제간에는 무릇 함께해야 한다는 가치관과 유교 도덕이 드러납니다. 자칫하면 가족 이기주의로 흐를 폐단도 있겠으나 요즘처럼 핵가족 시대에는 자못 부러운 옛 풍경입니다. 사촌간이라도 의(宜)가 살아나는 새해가 되기를 바라봅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첫댓글 1월 중순분 10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