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시조 01/75 – 산중신곡 01/18
만흥(漫興) 01/06
윤선도(尹善道, 1587~1671) 지음
산수간(山水間) 바위 아래 띠집을 짓노라 하니
그 모른 남들은 웃는다 한다마는
어리고 향암(鄕闇)의 뜻에는 내 분(分)인가 하노라
산수간(山水間) - 산과 물 사이. 자연풍경 속.
띠집 – 지붕을 띠로 이은 집. 띠 - 볏과의 여러해살이풀.
그 모른 – 그 뜻을 모르는.
어리고 – 어리석고.
향암(鄕闇) - 시골에서 지내 온갖 사리에 어둡고 어리석음. 또는 그런 사람.
분(分) - 분수. 자기 신분에 맞는 한도.
만흥(漫興)이란 ‘저절로 일어나는 흥취(興趣)’입니다. 고산은 ‘산중신곡(山中新曲)’ 18수 중에 만흥 6수를 남겼습니다. 그 첫 번째 작품입니다. 연속성이 있으니 수편(首篇)이라고 할 수 있겠죠. 집을 짓는다는 것은 그것이 띠집이든 와가(瓦家)든 정주(定住)를 의미합니다. 산수간 곧 자연 속에서 살리라 하는데, 속 모르는 남들은 비웃습니다. 양반 나리께서 얼마나 견딜까 하는 걱정도 섞여 있습니다. 그렇거나 말거나 그게 제 분수라면서 스스로를 우매한 촌사람이라 낮추고 있습니다.
산중신곡은 임오년(1642, 인조20) ○금쇄동(金鎖洞)에 있을 때이다.
고전번역원 현대어 번역본을 끌어옵니다.
산수간 바위 아래에다 띳집을 짓는다 하였더니
내 뜻 모르는 남들은 날 비웃는다고 한다마는
무지렁이 내 마음에는 분수인가 여기노라
고산시조 02/75 – 산중신곡 02/18
만흥(漫興) 02/06
윤선도(尹善道, 1587~1671) 지음
보리밥 풋나물을 알맞춰 먹은 후(後)에
바위 끝 물가에 슬카지 노니노라
그 남은 여남은 일이야 불을 줄이 있으랴
알맞춰 – 알맞게. 먹을 만큼, 적당히.
슬카지 - 슬카장. 싫도록, 실컷.
노니노라 – 놀아다니노라. 이리저리 거니노라.
여남은 – 딴 나머지. ‘여’는 ‘여느’ ‘다른’의 옛말.
불을 줄이 – 부러워 할 까닭이.
정치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내려와 마치 미뤄둔 일을 해치우듯 산수간에 푹 묻혀 지내니 부러울 일이 전혀 없답니다. 평소에 쓰던 한자어(漢字語)도 잊어버렸을까요, 고유 한글 어휘로만 아름답게 빚어낸 한 폭의 산수화입니다. 어렵지 않으니 설명이 필요 없고, 고산이 시로 그린 그림을 대하니 사람은 있는둥 마는둥 아주 작게 보입니다.
고전번역원 현대어 번역본을 끌어옵니다.
보리밥 풋나물을 알맞추 먹은 뒤에
바위 끝 물가에서 실컷 노니노라
여남은 일이야 부러워할 게 있으랴
고산시조 03/75 – 산중신곡 03/18
만흥(漫興) 03/06
윤선도(尹善道, 1587~1671) 지음
잔(盞) 들고 혼자 앉아 먼 뫼를 바라보니
그리던 임이 오다 반가움이 이러 하랴
말씀도 웃음도 아녀도 못내 좋아하노라
뫼 – 산(山).
오다 – 온다고 한들.
못내 – 언제까지나.
먼뎃산이 부르지도 않았는데, 금방 앞에 나타나네요. 술잔을 든 늙은이 앞에 냉큼 다가온 뜻은 무엇일까요. 겹쳐진 산 날개들이 너울너울 춤을 추는 것이니 소리 없는 바람 가락에 밎추어 취흥(醉興)을 돋우려는 뜻이겠지요. 그 산, 뫼를 대하면서 그리던 님보다 더하다고 반다움을 드러냈습니다. 말씀이나 웃음이 꼭 소리로만 전해지는 건 아니지요.
고전번역원 현대어 번역본을 끌어옵니다.
술잔 들고 혼자 앉아 먼 산을 바라보니
그리워하던 님이 온다 한들 이렇게까지 반가우랴
말도 없고 웃음도 없어도 못내 좋아하노라
고산시조 04/75 – 산중신곡 04/18
만흥(漫興) 04/06
윤선도(尹善道, 1587~1671) 지음
누구서 삼공(三公)도곤 낫다하더니 만승(萬乘)이 이만하랴
이제 혜어든 소부(巢父) 허유(許由)가 약돗더라
아마도 임천(林泉) 한흥(閑興)을 비길 곳이 없세라
누구서 – 누구가. 누가. ‘서’는 옛말로, 조사로 쓰인 것임.
삼공(三公)도곤 – 삼공보다. 삼공은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등 세 정승.
만승(萬乘) - 만 개의 수레. ‘승’은 네 마리 말이 끌던 전투용 마차로 한 승에는 백 명의 군졸이 붙었다고 한다. 만승의 군ㄷ대는 천자(天子) 곧 황제의 군대였음.
이만하랴 – 이보다 못하다.
이제 – 지금.
혜어든 – 생각하면. ‘혜다’에는 ‘생각하다’의 의미도 있었다.
소부(巢父) 허유(許由) - 허유 소부. 부귀영화를 마다하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성천자(聖天子)라고 추앙받는 중국의 요임금이 허유에게 천하를 주겠다고 하자 허유는 더러운 말을 들었다고 하여 잉수이강(潁水江) 물에 귀를 씻었으며, 소부는 허유가 귀를 씻은 더러운 물을 소에게 먹일 수 없다고 하여 소를 끌고 상류로 옮아갔다는 데서 유래한다.
소부(巢父)와 허유(許由) : 모두 고대 요(堯) 임금 시절의 고사(高士)로, 기산(箕山)에 들어가 숨어 산 이들이다. 요 임금이 허유를 불러 구주(九州)의 장(長)으로 삼으려고 하자 허유가 그 소리를 듣고는 더러운 말을 들었다고 하면서 영수(潁水)의 물에다가 귀를 씻었고, 소부가 소를 끌고 와서 물을 먹이려 하다가 그 귀를 씻은 물을 먹이면 소를 더럽히겠다고 하면서 상류로 올라가 물을 먹였다고 한다. 《高士傳 許由》
약돗더라 – 약았구나, 영리했구나. ‘돗다’는 ‘~도다’의 옛 말씨.
임천(林泉) - 숲과 샘. 또는 숲속의 샘. 산림천석(山林泉石). 아름다운 자연의 한 면. 세상을 버리고 은둔하기 알맞은 곳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한흥(閑興) - 그윽한 흥겨움.
한자어(漢字語)가 많이 나옵니다. 먹물깨나 든 선비임이 분명합니다.
거짓 없는 자연을 대하고 사는 것에 대한 즐거움을 중국 고사 인물을 데려와 비교하고 있습니다. 삼공이나 제후 나아가 황제보다 낫다는군요. 그런데 자꾸 이러면 실재로는 임금 바로 앞이 그리워서 딴소리하는 것으로 들리지 않을까요.
초장 첫구의 ‘누구’는 어디서 나왔던 조언(助言)의 말이었을까요. 귀거래사(歸去來辭)일까요.
고전번역원 현대어 번역본을 끌어옵니다.
누구는 삼공(三公)보다 낫다 하나 만승(萬乘) 천자가 이만하랴
이제 생각해 보니 소부(巢父)와 허유(許由)가 현명하였구나
자연 속의 한가한 흥취는 아마도 비길 곳이 없을레라
고산시조 05/75 – 산중신곡 05/18
만흥(漫興) 05/06
윤선도(尹善道, 1587~1671) 지음
내 성(性)이 게으르더니 하늘이 알으실사
인간만사(人間萬事)를 한 일도 아니 맡겨
다만당 다툴 일 없는 강산(江山)을 지키라 하시도다
성(性) - 성품, 성격.
알으실사 – 알았구나. 아셨도다. ‘ㄹ사’는 ‘~도다’ ‘~로구나’의 옛 말씨.
한 – 한 가지.
다만당 – 다만. 단지. 다만지. ‘당’은 강세가 담긴 표현으로 ‘다만지’의 ‘지’처럼 시조 종장 첫구의 음수율 세 글자를 맞추는 기능이 있다.
강산(江山) - 강과 산.
그럴싸한 변명이군요. 하늘이 아시고, 작자의 게으른 성품에 맞춰 ‘너는 강산이나 지키렴’ 했답니다. 인간사 세상에는 만 가지 일이 있어, 각자의 소임대로 업(業)을 행하며 삽니다. 하늘이 ‘이제 됐다, 쉬어라’ 할 때까지요. 자연과 더불어 소일(消日)하는 노년의 삶은 어쩌면 시상(施賞)과도 같겠습니다.
고전번역원 현대어 번역본을 끌어옵니다.
내 성품이 게으른 걸 하늘이 아시고서
인간 만사를 한 가지 일도 맡기지 않으시고
다만 다툴 사람 없는 강산을 지키라 하시는도다
고산시조 06/75 – 산중신곡 06/18
만흥(漫興) 06/06
윤선도(尹善道, 1587~1671) 지음
강산(江山)이 좋다한들 내 분(分)으로 누웠느냐
임군 은혜(恩惠)를 이제 더욱 아노이다
아무리 갚고자 하여도 해올 일이 없세라
분(分) - 분수(分數). 하늘이 나눠준 복(福).
아노이다 – 아나이다. 압니다.
해올 일 – 시킬 일. 할 일.
없세라 – 없구나.
당시 선비들에게 모든 귀결을 군은(君恩)으로 돌리던 풍습이 이 작품에도 나오는군요. 만흥(漫興) 곧 ‘저절로 일어나는 흥취’라는 주제로 지어진 여섯 수의 마지막이 너무 상투적이라 실망스럽습니다. 크게 봐서는 자연이, 하늘이 내게 준 복분(福分)이겠으나, 벼슬했던 작가에게는 구체적으로 임금의 은혜라 말할 수도 있겠거니 치부하렵니다.
한 가지 더. 이 작품은 40수로 되어 있는 어부사시사의 여음(餘音)으로 다시 사용하였습니다. 임군을 향한 신하의 지극정성이 표현된 것입니다.
고전번역원 현대어 번역본을 끌어옵니다.
강산이 좋다 한들 내 분수로 누운 것이겠는가
임금님 은혜를 이제 더욱 알겠노이다
아무리 갚고자 해도 해 드릴 일이 없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