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2024.10.22.화)부터, 유니크unique한 경전
『단마파다dharmapada 法句經』에
설해진 불타의 지혜를 하루에 하나씩만
깨닫는 ‘일일일오一日一悟’,
『남전법구경南傳法句經』을 원문과 번역
그리고 약간의 설명을 덧붙입니다.
『단마파다Dhammapada 法句經』
제1장 대구對句의 장, 雙品
[제1구]
(모든 행위는 마음이 먼저 이끈다.
마음이 주인이고, 마음이 조작한다.
만일, 더러운 마음으로
혹은 말하고 혹은 행동하면,
이것은 곧, 괴로움이 그를 따르는 것이
마치 수레바퀴가 소의 발을 따르는 것과 같다.)
[원문]
“제법의선도 의주의조작
諸法意先導 意主意造作
약이염오의 혹어혹행업
若以染汚意 或語或行業
시즉고수피 여륜수수족
是則苦隨彼 如輪隨獸足”
『화엄경』 <야마천궁게찬품>에
“마음은 그림을 그리는 화가와 같다.
능히 모든 세상일을 다 그려낸다.
오온이 다 마음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무엇도 만들지 않는 것이 없다.”
라고 있고,
또,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은 조금도 차별이 없다.”
라고도 있다.
곧, ‘마음이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은 없다’
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마음이라는 것은,
불가사의하게도 가만히 내버려두면,
마치 쇠처럼, 녹이 스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마음도 잘 생각하고, 고민하고,
욕망(번뇌)의 풀이 무성하게 자라지 않도록
관리해야만 지혜의 길이 나온다.
사물에는 다 길이 있다. 그것은
바로 그 특성을 잘 활용하는 것이다.
진리는, ‘자리이타원만自利利他圓滿’이다.
예를 들면, 칼은 그 사용법 하나로,
주체인 칼도 그 대상도 같이 살리는 것이다.
그러나, 서로 죽이는 것은, 악이 된다.
『맹자』<진심 하>에.
“산언덕에 발자국이 난 틈바구니도
지속적으로 왕래하면 길을 이루게 되지만,
잠깐동안이라도 왕래하지 않으면
띠 풀이 자라 막히게 된다.
지금 띠 풀이 자라나 마음을 막고 있구나.”
라고 있다.
‘호텔 객실 청소원’연구가 있다.
연구대상자는 하루 종일
힘든 육체노동을 하는 객실 청소원들이었다.
그들에게 “규칙적으로 운동을 합니까?”고 물었더니,
그들은 “전혀 운동을 안 한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런 청소원들을 두 집단으로 나누고
한 집단에게 그들이 하는 일을
마치 헬스클럽에서 운동하는 것처럼 생각하라고 지시했다.
다시 말하면, 침대보를 씌우고
침구를 정리하는 일이 헬스클럽에서
기구를 써서 근력운동을 하는 것과 같다는 식으로.
그 한 가지 외에, 다른 것들은 변화시키지 않았다.
오로지 사고 방식(마인드세트mindset)하나를 바꾼 결과,
실험집단은 체중, 허리, 엉덩이 비율,
체질량 지수, 혈압이 줄었다고 한다.
이 모두가 자기 일을 운동으로 여기겠다는
마음 변화가 작용한 결과였다.
반면 다른 집단에서는, 이런 신체적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한다.
이것을 ‘심신일원론心身一元論’이라고 한다.
‘노동勞動’은, 주어진 것에 수고로이 움직임, 곧 수동적이다.
‘운동運動’은, 자발적으로 운전해 움직임, 곧 능동적이다.
같은 움직임(動)이라도,
마음 하나 먹음에 따라
마음이 죽고(악)/사는(선) 것이다.
석(가모니세)존은, 최초 혼자서 수행하시고,
깨달음을 열은 후에, 수행집단인 승가를 만드셨다.
석존도 고독한 수행을 하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얻은 깨달음은
사람들이 알기 어렵기 때문에,
자신의 가슴에만 머물러 두려고 생각하셨다.
그런데, 범천에게 3번이나 권청받아
드디어 결의하여 가르침을 설하고,
그 가르침에 의해 사람들이 구제되어가는 모습을 보고,
모두 다 구제되는 곳에, 참 불교가 있다고 생각하신 것이다.
인생의 반을 자신의 미혹과 수행에 쓰시고,
남은 반생을 타자를 위하여 바치신
석존의 인생은, 참으로 ‘自利利他圓滿’이다.
석존처럼, 자신의 괴로움에 사무치도록
끝까지 서로 마주한 사람은, 타자의 괴로움을
헤아리고,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좌선이나 명상을 하고 있을 때는,
자신 혼자서의 시간이다.
그때의 자기 혼자의 수행과,
다 같이 하는 수행. 그 양자가
있지 않으면, 진실한 깨달음과,
진실한 수행은 있을 수 없다.
‘마인드푸르네스(mindfulness 마음챙김)’
가 유행하고 있다
.
구극적으로는 ‘自利利他圓滿’이 제일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자기에게 상냥함을 향하면,
타자의 일이나 세상의 문제에도
눈을 돌려갈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자비의 실천이다.
사람에게 동정심을 가지고 접하는 것이,
자기자신의 치유로도 연결된다.
자리와 이타, 어느쪽부터 스타트해도 된다.
그 어느 쪽 하나가 결여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이다. 마치 새의 양날개처럼.
장모가 시골에서 ‘농작물’을 보내주었다.
아내가 “한달 먹을 건 걱정없어 좋다”고 말한다.
“옆집에 좀 나누어 주면 어때?”라고 말하니,
“왜 나누어주는데, 아깝게!”
“같이 나누어 먹으면 얼마나 좋아.
나는 주어서 좋고, 그쪽에는 받아서 기쁘고!”
아내가 “그건 그래!”
이것저것 잔뜩 챙기더니 쪼르르 나간다.
주어서 손해보지만, 받은 사람 기뻐하는 그 모습에,
손해보아도 환희심이 생긴다.
진실로 ‘자리이타원만’이 아닌가.
길게 썼다 지웠다. 누구 노래의 노랫말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