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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문]
고문헌을 통해 본 장양공 이일 장군 재조명
1. 머리말
홍순석 1) (강남대 명예교수)
장양공(壯公)이일(李鎰, 1538~1601)은 조선 선조(宣祖)의 각별한 총애를 받은 무신(武臣)이다. 북방의 여진족을 물리쳐 영토를 지켜낸 공적은 역사가들의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반면 임진왜란 당시의 전과(戰)에 대해선 공과(過)가 대립된다.
조선 중기 여진족 정벌과 임진왜란을 당하여 거의 같은 시기에 활동하면서 전장(戰場)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던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 1545~1598)과 충장공(忠壯公) 신립(申砬, 1546~1592)에 비해, 장양공 이일(李)은 여진족 정벌에 혁혁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 초기에 패배를 맛보면서 끝까지 분투하였지만 여전히 비판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 인물이다.
최근 SNS에 올려진 이순신과 이일 두 장군이란 글은 대표적인 사례이다.
「녹둔도(鹿屯島)에서 유일하게 패한 이순신(李舜臣)의 사형을 건의하며 못되게 굴던 이일(李鎰)과 이순신의 운명은 그 후 정반대로 되었으니 사필귀정이다. 이순신이 전라좌수사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로 연전연승하는 동안 경상도 순변사(巡邊使)였던 이일은 상주에서 왜군에게 패한 후 신립(申砬)과 함께 싸운 탄금대 전투에서 또 패해 신립은 자결했고 이일은 황해도로 밀려났다. 이일도 뛰어난 장군이었지만 조총에는 역부족인 반면 이순신은 거북선과 화포로 무장해 무패의 장군이 되었다. 그 후 광해군(光海君)의 분조를 돕기도 하고 포도대장 함경도병마사(咸鏡道兵馬使) 등을 역임하다 1601년 부하를 죽인 살인죄로 잡혀 죽었다.2)
장양공 이일 장군의 평가에서 상반된 견해가 제기된 사건은 ①녹둔도 침입사건 ②상주·충주 전투에서의 패주(敗走), ③정평(定平)에서의 죽음이다. 이 세 가지 사건에 대해서 『장양공전서(壯襄公全書)』의 기록과 선조실록(宣祖實錄)』을 비롯한 여러 고문헌의 기록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그리고, 1722년(경종2, 壬寅) 7월에 좌참찬에 추증되고 장양(壯襄)이란 시호를 추증하였음에도 이 같은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장양공전서』를 바탕으로 한 이일 장군의 연구는 이미 이원명 교수에 의해 집중적으로 다루어진 바 있다. 따라서 본 발표에서는 『장양공전서』외의 고문헌 자료에서 이세 가지 사건을 주목하여 살핀다. 이를 통해 장양공 이일장군의 위상을 재조명하는 단서가 될 것으로 본다.
① 녹둔도 침략사건
녹둔도 침략사건에 대해 당시 둔전관(屯田官)으로 있었던 조산만호(造山萬戶) 이순신(李舜臣)에 대한 처벌에 관한 기사는 『선조수정실록』 『장양공전서』『충무공전서』에서 각기 다른 시각으로 기록하고 있다.
우선, 장양공전서에 수록된 <행장(行狀)>, <시장(諡狀)>, <신도비명(神道碑銘)>, <정토시전부호전도서(征討時錢部胡戰圖序)>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조정에서 순신을 잡아 추국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는데, 공이 그 재주와 용기를 아까워하여 조정에 백의종군을 청하여 이로써 발탁되어 마침내 임진왜란에 큰 공을 세우게 되었다.」 (이담, <증정헌대부 의정부좌찬찬 지의금부사 이공행장>>
「이일이 이순신의 백의종군을 조정에 청하여 이른바 충무공을 구한 것이다. 이로써 이순신이 발탁되어 마침내 임진왜란에 큰 공을 세우게 되었다.」 (이담,<정토시전부호도서>)
「공은 사람을 알아보는 식견이 크게 뛰어났다. 시전(錢錢)의 싸움에서 조산만호 이순신이 군율을 범하여 장차 중한 죄를 입게 되었다. 공은 이순신이 충성스럽고 용맹하여 쓸 만한 인물임을 알고는 우선 용서하여 백의종군하게 할 것을 청하였는데 마침내 명장이 되었다." (이의현, <순변사장양이공신도비명병서>)
「조정의 의논이 장차 이순신을 잡아들여 추국해야 한다고 하니 공이 그 재주와 용기를 아까워하여 백의종군을 청하여 죄를 용서하게 하였다." (이재, <증의정부좌찬성 이공행장)
「충무공 이순신이 조산만호로 군율(軍律)을 범하여 죄가 장차 헤아릴 수 없었는데 힘껏 청하여 죄를 용서하게 하고 공을 세워 갚도록 하였는데, 마침내는 노량의 승첩이 있게 되었다. 그 감식(鑑識)이 또한 이와 같았으니, 나라 사람들이 공을 중흥의 양장(良將)이라 함이 까닭이 있는 것이다.」 9) (안윤행, <증시장양이공신도비명병서>)
「당시 이충무 순신이 군율을 상실하여 죄가 장차 헤아릴 수 없었는데 힘껏 청하여 죄를 용서하게 하고 공을 세워 갚도록 하였는데, 마침내는 노량의 승첩이 있게 되었다. 그 감식이 또한 이와 같았다.」10) (정범조, <순변사시장양이공신도비명>>
앞에서 보듯이 『장양공전서』에 수록된 자료에서는 이순신이 군율을 어긴 중죄를 조정에서 문책할 때 이일 장군이 이순신의 재주와 용기를 알아보고 백의종군을 청해서 속죄하게 하였으며, 훗날 임진왜란에서 크게 승리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에 반하여, 충무공 이순신에 관련된 자료에서는 상반된 시각에서 기록하고 있다. 김육(金堉, 1580~1658)의 <통제사이충무공신도비명(統制使李忠武公神道碑銘)>, 윤휴(尹鑴, 1617~1680)의 <통제사이충무공유사(統制使李忠武公遺事)> 기록을 정리해 보인다.
「공이 건원보에 있는 동안에 부친의 상을 당하여 분상(奔喪)하고 왔으며, 삼년상을 마치고 곧 사복시 주부(司僕寺主簿)가 되었다가 겨우 보름 만에 다시 조산 만호(造山萬戶)에 제수되었다. 순찰사 정언신(鄭彦信)이 녹둔도에 둔전을 개설하고 공을 시켜 겸하여 관할하게 하였다. 공은 둔전의 군사가 적다고 하면서 여러 차례 수자리 군사를 더 보내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병사 이일이 허락하지 않았는데, 가을이 되어 과연 오랑캐들이 대거 침입해 왔다. 공은 힘써 싸워 이들을 막아 내고 그 괴수를 쏘아죽인 뒤, 그대로 추격하여 사로잡힌 둔전 군사 60여 명을 빼앗아 돌아왔다. 그런데도 병사는 공을 죽여 자신의 잘못을 모면하려고 하여, 장차 영문(營門)에서 공[이순신]의 목을 베려고 하였다. 군관(軍) 선거이(宣居怡)가 공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술을 권하며 진정시킬 적에 공은 정색하며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이 모두 천명에 달린 것이거늘 술을 마셔서 무엇 하겠는가." 하고는, 뜰 안으로 들어가 항변하면서 조금도 굴복하지 아니하였다. 그러자 병사도 기운이 꺾여 공을 수금하고서 계문(啓聞)하였다. 상께서는 공에게 죄가 없음을 살피시고 죄를 인 채 종군하게 하였다가 얼마 뒤에 다시 오랑캐의 목을 바친 공로로 용서하였다.11) (김육, <통제사이충무공신도비명>
「이듬해 가을에는 녹도(鹿島)의 둔전(屯田) 보호하는 일을 겸하였다. 순신이 녹도가 홀로 동떨어져 있어서 방수(防守)가 허술하다는 이유로 누차 병마절도사 이일(李)에게 군대를 더 늘려서 방수시킬 것을 청하였으나 이일이 따르지 않았다. 8월에 오랑캐가 과연 군대를 일으켜 안개가 자욱한 때를 틈타 아군의 성책을 포위하였는데, 성책 안에는 군졸 10여 명밖에 없었다. 순신이 성책의 문을 닫고 손수 활을 쏘아 그 아군 진영에 접근해온 적군 수십 명을 사살하니, 오랑캐가 놀라서 달아났다. 이에 순신은 단기(單騎)로 성책문을 열고 나가서 큰 소리로 외치며 쫓아가니, 오랑캐가 마침내 모두 도망쳐 버렸으므로, 그들이 약탈해간 사람들을 모두 다시 빼앗아 돌아왔다.
그런데 이일은 적이 침범하게 했다는 이유로 죄를 얻을까 염려한 나머지, 순신을 죽여서 입막음하려고 순신을 수감해 놓고는 참형시키려고 하였다.12) (윤휴, <통제사이중무공유사>)
위의 기록에서는 녹둔도 사건에서 이순신이 패한 이유가 상관인 이일 장군에게 있는데도 자신의 잘못을 모면하려고 이순신을 참수(斬首)하려 했으며, 이순신이 계문(啓聞)하여 천명하니 선조가 백의종군을 명하였다는 내용이다.
『선조수정실록』 (1587년 9월 1일조.)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오랑캐가 10여 인을 살해하고 1백 60인을 사로잡아 갔다. 이경록(李慶錄) 이순신(李舜臣)이 군사를 거느리고 추격하여 적 3인의 머리를 베고 포로 50여 인을 빼앗아 돌아왔다. 병사(兵使) 이일이 이순신에게 죄를 돌림으로써 자신은 벗어나기 위하여 형구를 설치하고 그를 베려 하자 순신이 스스로 변명하기를, “전에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 신보하여 더 보태주기를 청하였으나 병사가 따르지 않았는데 그에 대한 공첩(公牒)이 있다" 하였다. 이일이 수금하여 놓고 조정에 아뢰니 "백의종군(白衣從軍)하여 공을 세워 스스로 속죄(贖罪)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상이 수병(戌兵)이 죽은 것을 애도하여 호당(湖堂)에 명하여 시를 지어 조문하게 하였다. 이로부터 둔전(屯田)이 폐지되었는데, 논하는 이들은 정언신(鄭彦信)이 실책(失策)한 것으로 탓하였다. 이순신이 순변사(巡邊使)의 휘하에 종군하여 반노(反虜) 우을기내(于乙其乃)를 꾀어내어 잡아서 드디어 죄를 사면 받았는데 이로부터 유명해졌다.」13)
북병사 이일이 이순신 등의 죄를 심문하는데 이순신의 변을 듣고 조정에 품신하여 백의종군에 처하도록 하였다는 기록이다.
『선조실록』 1587년 10월 16일조의 기록을 보면, 녹둔도 사건이 피해가 매우 컸기 때문에 북병사 이일은 이들을 하옥시키고 중앙에 급히 보고하니, 비변사에서 이들을 잡아 심문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선조(宣祖)는 “전쟁에서 패배한 사람과는 차이가 있다. 북병사로 하여금 장형(杖刑)을 집행하게 한 다음에 백의종군시켜서 공을 세우게 하라.14)고 하였다.
그리고 이일장군이 증보한 『제승방략』 녹둔도(鹿屯島)조에 보면 “이경록 등을 잡아다가 그 죄를 심문하였으나, 임금이 특별히 그들을 용서하여 백의종군하게 하여 공로를 세워서 스스로 충성을 다하게 하였다.15)고 하였다.
이상의 기록을 검토하면, 당시 종2품 함경북도 병마절도사로서 녹둔도 침략에 대한 당시 둔전관 조산보 만호(종4품) 이순신 등에 대한 문책은 불가피하였을 것이고, 이를 조정에 아뢰어 국왕의 명대로 백의종군토록 하였다고 보는 것이 가장 객관적인 기록으로 설득력이 있다.
② 상주·충주 전투에서의 패주(敗走)
이일 장군에 관한 고문헌의 기록에서 가장 빈번하게 기록된 사항이 상주·충주 전투에서의 패주(敗走)이다. 상주 전투에서 수장인 이일(李鎰)은 말을 달려 북쪽으로 달아나고 종사관 윤섬(尹暹)·교리 박호(朴箎) · 판관 권정길(權正吉)은 모두 죽었다는 사실은 훗날 수 많은 사가(史家)들의 비판을 받았다. 유성룡은 『징비록(懲毖錄)』에서 이일이 갑옷과 말을 버리고 알몸으로 도주했다고 기록하였다.
「적군이 이일(李鎰)을 급박히 추격해 오자 이일이 말을 버리고 옷을 벗고 머리를 풀어 헤치고 알몸으로 달아나 문경에 이르러 급히 장계하고 죄를 기다리다가 신립이 충주에 있다는 말을 듣고 새재를 버리고 신립의 군중으로 갔다.」16)
이에 반하여 이의현(李宜顯)이 지은 <장양공시장(壯襄公諡狀)>에서는 “사세(事勢)가 구제할 방도가 없음을 깨닫고 마침내 말을 돌려 돌아갔다."고 기술하였다. 『장양공전서』에 수록된 <행장> <신도비명>에서도 불가피한 처사였음을 서술하고 있다.
「공이 오합지졸인 민병과 함께 서울에서 내려온 장사 8,9백명을 인솔하고 고을 북쪽의 진을 치는데 미처 반을 치기도 전에 적이 대거 이르렀다. ... (중략) ・・・왜적이 좌우익으로 나누어 아군의 뒤쪽으로부터 포위해 들어오니 공이 사세(事勢)가 구제할 방도가 없음을 깨닫고 마침내 말을 돌려 돌아갔다. 문경에 이르러 패배한 장계를 치계하니, 임금께서 회유하시기를 "승패는 병가에서 흔히 있는 일이다. 경이 힘을 다하지 않음이 아니니 경의 죄를 용서한다. 임무를 부여하니 경은 반드시 흩어진 백성을 불러모으라. 부곡에서 불러모아 신립과 서로 힘을 모아 어려움을 구하라"17)
이에 공을 순변사로 삼아 가서 방어하게 하였다. 공은 급작스럽게 명을 받고 수행하는데 불러 모은 병사가 겨우 8, 9백 명에 지나지 않았다. 상주에서 왜적과 마주쳤는데 적의 세력이 대단하여 싸움에 불리하였다. 이때 도원수 신립이 충주에 주둔해 있었는데, 공이 맞아들여 함께 조령(鳥嶺)을 지키려고 하였으나, 신립이 듣지 않았다. 부득이하여 신립에게 돌아가니 신립이 단내의 상류에 진을 치고 있었다. 공[李鎰]이 단월역에 주둔하니 왜적이 길을 나누어 크게 들이닥쳤다. 포성과 북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는데 공기 돌격하여 적의 머리 10여급을 베었지만 신립은 적에게 밀려나고 전군이 패몰(敗沒)하였다.」18) (안윤행, <증시장양이공신도비명>)
신흠(申欽, 1566~1628)은 여러 장사들이 왜란 초에 무너져 패한 사실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일 장군에 관련한 기록만 정리해 보인다.
「순변사 이일(李鎰)이 출정할 때 단지 군관(軍官) 및 사수 60여인을 이끌고 가면서 내려가는 도중에 군사 4천여 명을 거두워 모았다. 4월 24일 상주(尙州)에 도착했는데, 이일의 생각에 우리 군사가 오합지졸인 만큼 마땅히 습진(習陣)시켜 기다려야 한다고 여겼다. 그러나 진을 미처 반도 펼치기 전에 적이 갑자기 이르렀으므로 별수 없이 대진(對陣)하였으나, 교전하기도 전에 적이 먼저 포를 쏘아대 철환(鐵丸)이 비오듯 쏟아졌으므로 아군이 대적하지 못하였는데, 이에 적이 함성을 지르며 진을 무너뜨리자 우리 군사가 궤멸되면서 사상자가 무더기로 발생하였다. 이 와중에서 이일(李鎰)만 단기(單騎)로 몸을 빼어 달아나고 종사관(從事官) 윤섬(尹暹)·박호(朴箎) 등은 모두 죽었다.)
『선조실록』 『국조보감』 『연려실기술』 등의 문헌에서 선조 25년의 기사를 보면 이일장군은 상주에서 패주(敗走)한 이후 문경에 이르러 장계를 올려 대죄待罪)하여 죽음을 청하고, 다시 조령을 넘어 신립의 군진으로 향하였다.
「왜적이 상주에 침입했는데, 이일의 군대가 패배하여 돌아왔다. 종사관인 홍문관 교리 박지(朴篪)·윤섬(尹暹), 방어사 종사관인 병조 좌랑 이경류(李慶流), 판관 권길(權吉)이 모두 죽었다. 이일이 문경에 이르러 장계를 올려 대죄待罪)하고, 다시 조령을 넘어 신립의 군진으로 향하였다.20)
「적병이 충주에 침입하였는데 신립(申砬)이 패하여 전사하였다. 처음에 신입이 군사를 단월역(丹月驛)에 주둔시키고 몇 사람만 데리고 조령에 달려가서 형세를 살펴보았다. 얼마 있다가 이일(李鎰)이 이르러 꿇어앉아 부르짖으며 죽기를 청하자 신립이 손을 잡고 묻기를, "적의 형세가 어떠하였소?" 하니, 이일이 말하기를, “훈련도 받지 못한 백성으로 대항할 수 없는 적을 감당하려니 어떻게 할 수 없었습니다.」 21)
21일에 이일이 문경(聞慶)에 이르러 급히 장계했는데, “오늘의 적은 신병(神兵)과 같아 감히 당할 사람이 없으니 신은 죽음을 각오할 따름입니다." 하였다.22)
박동량(朴東亮)의 <임진일록(壬辰日錄)>에서도 이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4월) 21일 이일이 문경에 도착하여 치계하기를, 오늘날의 적은 신병(神兵)과 같아서 감당해 낼 자가 없습니다. 신은 오직 죽을 따름이옵니다.” 하였다. 이에 궁중도 결코 견고하지 못하다고 판단하여 마침내 미투리 등 멀리 가는 도구를 구입하고, 또 사복시에 명하여 즉시 사용할 수 있는 말을 정돈케 하여 비상시의 사용에 대비하게 하였다.23)
위의 기록에서 이일 장군이 상주·충주 전투에서 패주(敗走)하였지만, 구차하게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도주(逃走)한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전란 중에 이일 장군이 선택한 사생관(死生觀)이 다른 장수들과 달랐음을 몇몇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우선, 김상헌(金尙憲)이 지은 <경상좌도수군절도사박홍신도비명(慶尙左道水軍節度使朴泓神道碑銘)>과 윤섬(尹暹)의 <행장>에서도 이일 장군이 전란 중 택한 사생관을 엿볼 수 있다.
「평양성에서 패하고는 장차 용만(龍灣)에 있는 행재소로 가려고 하였는데, 마침 순변사 이일(李鎰)이 공을 보고 말하기를, "국사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우리들이 공연스레 죽는다고 해서 무슨 이로움이 있겠는가. 이제 해서(海西)로 가서 한 귀퉁이를 지키고 있으면 뒷날에 조정이 회복되는 바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24)
「이일이 달아나면서 윤섬에게, “헛되게 죽기만 하는 것은 쓸 데 없으니 나를 따르라.”하니 윤섬이 대답하기를, “장차 임금을 뵈올 수 없다.” 하고 박호와 함께 죽었다.」 25)
실제 이일장군은 상주·충주전투에서 패주한 뒤에 몸을 숨겨 목숨을 연명한 것이 아니라, 적진(敵) 속에서도 몸을 피하여 당시의 전황(戰況)을 조정에 알려 대처할 수 있게 하였다. 그가 올린 장계(狀啓)가 얼마나 중대하였는지 다음 기록에서 가늠할 수 있다.
「이일(李鎰이) 몸을 빠져나와 달아나 산중에 들어갔다가 적 두셋을 만나 사살하여 머리 하나를 베어 가지고 강을 건너 급히 장계를 올렸다. 조정에서 비로소 신립이 패한 것을 알고 임금의 피난 행차가 곧 떠났다.」 26)
======== 주 석 =============
1) 강남대 명예교수, 해동암각문연구회 회장. 한국한문학전공,
2) 이순신과 이일 두 장군」 (cafe.daum.net/shineunh)
3) 『장양공전서(壯公全書)』는 1893년에 후손들이 편간한 것으로 이일 장군의 업적을 선양하기 위한 시각에서 기록된 자료집이라는 사실은 당연하다. 반면, 이 밖의 고문헌의 기록도 기록자의 시각에 의해 달리 해석된 사례도 적지 않다. 『선조실록(祖)』의 기록이 정사(正史)인만큼 기본적으로 검토해야 할 사안이라고 본다. 『선조실록』을 수정하여 『선조수정실록』이 편찬되었다는 사실도 문제점이 제기되겠지만 이는 전문 역사가의 몫으로 남겨둔다.
4) 본 발표는 이원명 • 박상진의 「장양공 이일장군 연구』를 비롯하여 이원명 교수의 이일 장군 관련 논문에 바탕을 두고 마련했음을 밝혀둔다.
5) 「以此朝廷有拿鞠舜臣之議,公惜其才勇,啓請于朝白衣從軍.賴以擢用.卒成大功於壬辰之亂」(李標,<贈正憲大夫議政府左贊贊知義禁府事李公行壯 『莊襄公全書』卷2)
6)「將軍請于朝李公舜臣汝諧白衣從重向所謂忠武公賴以擢用卒成大功於壬辰之亂」 (李權,<征討[討滅]時錢部胡戰圖序> 『壯襄公全書』 卷2)
7)「時錢之役.造山萬戶李舜臣. 以失律將被重辜,公知其忠勇可用. 請姑貰以白衣從軍,後途爲名將亂日」 (李宜顯,<巡邊使壮襄李公神道碑銘>『莊襄公全書』卷2)
8)「朝議將拿鞫舜臣公惜其才勇啓請白衣從軍得以貰罪」 (李縡,<贈議政府左贊成李公行>『莊襄公全書』卷2)
9)「當李忠武舜臣失律於造山. 罪將不測. 力請貰罪, 以責來效. 卒有露梁之捷.其鑑讖又如此. 國人之推公爲中興良將.有以也哉」 (安允行, <贈諡壯襄公李公神道碑銘>『壯公全書』卷2).
10)「當李忠武舜臣失律. 罪將不測. 力請貫其罪. 以責來效. 卒有露梁之捷. 其鑑讖又如此」 (丁範祖.<巡邊使謚莊襄公神道碑銘>『海左集』 卷24)
11) 「公在堡, 奔父要而來, 服閱, 即主司僕簿. 纔半月. 拜造山萬戶, 巡察使鄭彦信設屯田于鹿屯島,使公兼管,公以屯軍少. 屢請添戍. 兵使李鎰不許, 秋.虜果大入, 公力戰拒之. 射殪其酉餘. 追擊之.奪所據屯軍六十餘人還, 兵使欲殺公自解, 將斬之, 營下軍官宣居怡執手流涕, 勸酒壓驚, 公正色曰, 死生.命也. 何以酒爲.入庭抗辨不少屈. 兵使意沮.囚以啓聞. 上察其無罪. 命載罪自效.俄而. 獻級蒙宥」 (金堉,<李統制忠武公神道碑銘>『谷卷13)
12) 「明年秋.兼護鹿島屯田.舜臣以島孤遠.防守疏盧,屢請兵使李鎰添兵戍之, 鎰不從。八月,膚果舉兵. 乘大霧圍柵.柵中只有十餘卒, 舜臣閉柵門. 手弓射殺其致陣者數十人,膚驚走退.舜臣單騎出柵.大呼逐之。膚逐大奔,盡奪其俘掠而還,鎰恐以致寇得罪,欲殺舜臣滅口,收舜臣將斬之」 (尹鑴,<統制使李忠武公遺事 『白湖全書』卷23)
13)「賊胡殺十餘人 擴百六十人而去 慶祿. 舜臣率兵追擊 斬賊三級 奪還五十餘人 兵使李鎰欲歸罪舜臣 以自解設刑具 將斬之 舜臣自辨, 前見兵少備單 報請盆 而兵使不從 有公牒在 鎰繫囚以聞 命白衣從軍 立功自贖 上悼戍兵死沒 命湖堂 賦詩致悼 自是屯田罷 而論者各彦信失策矣 舜臣從軍 巡邊使麾下誘捕反虜于乙其乃遂免罪 自此有名」 (『宣祖修正實錄』 卷21, 宣祖 20年(1587) 9月1日丁亥)
14) 「備邊司公事 李慶祿 李舜臣等拿來事 入啓 傳曰與戰敗者有異 令兵使決杖 白衣從軍 自效可也」 (『宣祖實錄』 卷21,宣祖20(1587) 10月 16日 辛未)
15)「朝廷議拿景綠等鞫之 上特使白衣從軍立功自效」,(李鎰 『制勝方略』 鹿屯島條)
16)「賊追鎰 急鎰棄馬脫衣服 被髮赤體而走 到聞慶 馳啓待罪 聞申砬在忠州 遂棄鳥嶺赴其軍<懲毖錄>」(李肯翊,『燃藜室記述』卷15, 宣祖朝/壬辰倭亂大駕西狩)
17)公率烏合民兵及京來壯士合八九百, 出陣于州北川邊. 布陣未半 賊大至....(中略) ...賊分左右翼. 繞出軍後, 公知事不濟. 遂撥馬而回. 到聞慶. 馳啓敗將. 上回諭曰. 敗將. 兵家之常. 非卿不盡力. 姑貰卿罪. 以責來效. 卿須招集散亡. 呼召部曲. 與申位相機猗角. 圖收桑楡 (李宜顯<壯襄公全書 卷3)
18)「於是始以公爲巡邊使.使往禦之.公倉卒受命. 行收兵僅八九百人.與賊遇於尙州. 賊勢大. 戰不利. 時都元帥申砬. 軍忠州. 公欲激與守鳥嶺. 而鉝不至, 不得已還詣砬. 砬陳撻水上. 公屯丹月驛, 而賊分道大至, 砲鼓震天. 公突擊斬十餘級, 而砬爲賊所擠, 全軍敗沒」 (安允行,<贈諡壯襄李公神道碑銘> 壯襄公全書』卷2)
19)「巡邊使李之出師,只率軍官及射手六十餘人. 行收兵得四千餘人. 四月二十四日至尙州. 鎰以士卒烏合, 當習陣以待之. 布陣未半. 賊猝至. 因與對陣. 未及交鋒,賊先放砲. 鐵丸雨下, 我軍不能抵敵, 賊大呼陷陣,我師犇潰, 死者相枕籍. 鎰單騎脫身走.從事官尹暹, 朴茂皆沒」 (申欽,<諸將士難初陷敗志> 象村集』卷56)
20)「倭入尙州. 李鎰兵潰走遠. 從事官弘文校理朴篪尹暹. 防禦使從事官兵曹佐郎李慶流判官權吉皆死. 鎰到聞慶狀啓待罪¸還踰鳥嶺趍申砬軍」 (『國朝寶鑑』 卷31/宣祖朝八).
21) 賊兵入忠州, 申砬敗死. 初, 砬軍次月丹驛, 獨與數人, 馳至鳥嶺, 看審形勢, 俄而李鎰至, 跪呼請死, 砬執手問曰 賊勢何如 鎰曰 以不敎之民, 當無適之賊, 無可爲者矣」 (『宣祖修正實錄』 宣祖25年 壬辰(1592) 4月14日 癸卯)
22)「二十一日 鎰到開慶 馳啓曰 今日之賊 有似神兵 無人敢當 臣則有死而已」 (李肯翊,『燃藜室記述』 卷15, 宣祖朝/壬辰倭亂大駕西狩)
23)二十一日 李鎰到開慶. 馳啓曰. 今日之賊. 有似神兵 無人敢當, 臣則有死而已. 於是宮中亦有不固之志. 遂貿繩鞋等遠行諸具. 又命司僕寺整立馬. 以待不時之用」 (朴東亮, <壬辰日錄[一]> 『寄齎史草』下)
24) 「平壤敗. 赴龍灣行在. 適巡邊使李鎰見公謂曰. 國事至此. 吾等徒死何益. 今往海西. 保守一隅. 庶爲他日朝廷恢復之資」 (金尙憲 <慶尙道 水軍節度使朴公神道碑銘幷序>『淸陰集』 卷24)
25) 「鎰逃去 謂暹曰 徒死無益 願公從我 暹曰 將無以見主上逐與朴箎同死」 (李肯翊,『燃藜室記述』 卷15, 宣祖朝/壬辰倭亂大駕西狩)
26) 「李鎰脫身 而逃入出 遇賊數三射殺得一級 渡江馳啓 朝廷始知砬敗 車駕卽發」 (李肯翊, 『燃藜室記述』 卷15, 宣祖朝/壬辰倭亂大駕西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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