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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 화두에서 선문답으로, 트래픽에서 생성과 창발로.
- 천지인으로부터 ‘자아 심기’(심주 心主, 心柱, 心珠 心炷 心呪 ): 심지가 굳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중세에서는 하늘과 땅 그리고 인간이라는 세 화두가 있었다. 이 천지인(天地人)의 화두는 그 시초와 끝을 알 수 없기 때문에, 문제거리로서 철학사 속에 흐르고 있었다. 구천문학(astrologie, 점성술), 구화학(alchimie, 연금술) 그리고 생명(영혼)이란 세 갈래의 문제가 있었다. 그런데 서양에서 코페르니쿠스 이래로 하늘의 뚜껑이 열리면서 하늘을 인식하는 방식을 천문학(astronomie)에게 물려주고, 물질의 해명은 시간을 기다려야 했지만, 생명에 관한 그리고 지상에서 생성과 소멸에 대해서는 온갖 잡다한 이야기가 1730년에 생성(되기)의 설화로 전개되었다고 한다. 신 없이도 생명(영혼)은 가능한가? .
그런데 영혼의 문제가 화두로서 데카르트(1596-1650)의 영육의 두 가지 실체라고 제기되었다가, 신(창조주) 없이도 착하고 훌륭하고 멋있는 또는 놀라운 사회를 만든 세상(중국)의 이야기가 유럽에 전해지면서, 정신에 속하는 영혼과 육체에 속하는 영혼의 이분법에 문제가 제기되었다. 육신의 영혼은 영원성 또는 성자(신 또는 천사)가 될 수 없다는 말이 진실일까를 물어보는 과정을 거쳤다. 중국에서는 모든 생명은 부타가 될 수 있는가? 달마이래로 6조 혜능을 거쳐서 조주선사에까지 자아는 없는 것이 아니라 있기는 한데 그 지위를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수련과 명상을 하면, 자아를 정초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렇게 구해진 자아 또는 ‘나’가 현세의 지위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보았을 것이다. 서양은 하늘과 땅을 과학에게 돌리고, 신학이 장악했던 영혼을 철학이 다루면서 영혼과 신체의 관계를 다양하게 다루었다.
근세는 자아(나)의 화두를, 한편으로 공리와 원리 속에서, 다른 한편으로 경험의 법칙과 사회의 합의 속에서 이중성으로 다루어야 한다고 보았다. 중세 유명론자들에서 천국 또는 천사를 이름뿐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실재적이고 구체적인 인간을 하늘과 땅(고상함과 비천함, 무죄와 원죄)라는 이분화 해서 다룬다는 것이 우화 또는 유비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정신의 지식과 감각의 인식 사이의 구별로서 다루었다. 불교는 불성에 대한 유명론을 거치는 방식을 선문답에서 논의 해보았으나 답이 없었다. 세상사에서 신체의 고통만큼이나 전쟁에서 비참함을 해소할 방법을 찾아야만 했을 것이다. 산중으로 들어간다고 전쟁에서 고통과 비참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회피의 수단일 뿐이다.
불국토 또는 용화세상(화엄세상)이 이루어지기에는 자아의 문제가 중요하기보다, 마치 대승 사상처럼 타인과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뿌리칠 수 없었다. 이에 불교에 대해 유교가 전통적으로 용화세상이나 신선계와 달리 평천하(平天下)를 들고 나올 것이다. 그럼에도 유교는 격물치지성의정심으로 불교의 색수상행의를 넘어서려 하였다. 어째거나 전래의 신선계든, 불교의 불성계든, 유교 성인계든 백성과 더불어 나라 안위와 평안을 바라는 것이었다. 이것이 배운 자들 또는 사대부들만의 평천하의 문제가 아니라, 나라의 근간을 이루는 만백성의 근본문제가 해소되어야 하는 나라가 있던지, 공동체가 있어야 사람들이 잘 지내며 현존할 수 있다는 것을 누구나 알게 되었다.
서양에서 천문학과 지상의 사물을 다루는 학문의 발달로, 인간이 지닌 지식과 신체의 감각들도 학문적으로 다룸으로서, 오랜 전승으로 유일신앙의 신의 명령과 계율 속에서도, 인간 스스로 자유를 찾으려 노력하였다. 근세의 철학자들은 고대에서 자연의 숙명적 원인을 알고 있었고, 그리고 신의 절대성이 유명론 이래로 가상(우화)이지만 삶에서 운명의 유한성(경계성)을 알게 되었지만, 자아가 숙명과 운명을 벗어나는 길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그리고 인간은 상상을 대상으로 하는 과학들과 삶의 터전의 학문들과 연관들을 정립하기 쉽지 않았다. 동양에서 유교에서는 일반적으로 숙명을 수용하고, 공동체의 터전에서 삶의 운명이 각자에게 맞는 삶의 조화 또는 화이부동을 인정하자고 한다. 이에 비해 불교는 누구에나 불성이 있어서 만민 평등을 이룰 수 있다는 대승의 전통을 전하였으나, 중국에서는 송대에 이르러 불교에 비해, 사대부들이 전통을 되살린 전례의 방식으로 유교의 평천하에 기울어졌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한정된 기간과 터전을 벗어나지 못하는 삶을 보다 넓게 길게 잘 살기를 바랐다. 그렇다고 지구를 떠나는 삶이 아니지만, 당시의 소통과 교통의 수단 상으로 한정된 삶의 범위 이상의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지구는 둥글다. 그러나 지구의 남반구 반대편에서 산다는 것은 아직은 다른 이야기로 남는다. 그러한 시기에 마젤란 이후 잉카와 마야 문명을 서구에 유일 신앙자들이 약탈하고 파괴하면서, 서구의 승리처럼 보였지만, 그래도 인도와 중국은 그들에게 전혀 다른 삶의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런 세상을 총과 대포로서 협박하고 위협하면서 공포를 안기고 지배하기까지, 서양은 인간 종의 문제에서 개인 각자의 자아의 문제는 표면 아래로 흐르게 된다.
동양도 바깥의 힘에 밀리기도 하였지만, 또한 전통적으로 인간에 비추어진 즉 인간화한 하늘과 땅을 지식화 하였지만, 하늘과 땅을 인간의 사유범위 밖에다 두는 학문(과학)을, 서양처럼, 발전시키지 않았다. 하늘과 땅을 합하여 우주 속에서 인간이라는 생각이 더 많이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인간 종에서 각 개인의 자아의 문제는 화두로서 다룬 이래로 선문답 시절에서 나라(왕조)의 평천하에 밀려나, 표면 아래로 침잠해서 흐르고 있었다. 동아시아에서 서구의 침임으로 평천하의 한계선이 무너지면서 자아에 대한 반성이 표면위로 오를 것이다.
서양은 지구상의 발견과 더불어 다른 세상들의 여러 삶의 방식을 보았고, 또한 다른 문화의 삶에 대한 반성과 성찰로서 자기 문화에 대한 반성이 있었지만, 서구 문명의 발달이 다른 지역을 식민지화하면서 부귀와 영화를 누리는데 취하여 있었다가, 자체 안의 산업화과정에서 자산가와 노동자 사이의 불평등을 보았고, 인간이 인간에 대한 지배에 대한 반성이 일어났다. 신 앞에 평등이라는 생각과 인간의 자유라는 자연권의 발달로, 삶의 터전 속에서 공산주의 이념이 생겨나고, 그 과정으로서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이론을 정립하게 될 것이다.
나(자아)는 스스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자각에 비해, 타자를 조작하고 타인을 지배하면서 지배자로서 상부가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였다. 이런 사회적 구성과 구축이 얼마나 많은 인간들을 핍박과 비참으로 몰아넣었는가는 역사의 과정에서 있어 왔다. 그러면 이런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개인이 지배계급 또는 상층부에 진입하는 것을 목표로 삶을 것인가? 사람들은 누구나 배우고 익히며 노력하면 함께 잘 살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 지배자에 반대하는 또는 유일신앙에 반대하는 나쁜 생각일까? 누구나 태어나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것인데, 교육과 영양에 의해 구별되지 않았던가? 이 때문에 현자는 교육과 의료의 무상화를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2:29, 58OKG)
동양에서 평천하(平天下)든 용화세상(龍華世上)이든 공동체의 터전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사유가 세상을 평화롭고 행복하게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서양의 도래에서 과학문명이 이 동양을 지배하려는 전쟁을 치르면서, 동양은 문화의 전통에 문명의 도구를 끌어들여야 했다. 화두도 표면 밑으로, 평천하의 이상도 현실의 뒷면으로 밀려났다. 그럼에도 백성의 삶에는 과학의 발달에도 여전히 고(苦)와 비참이 그대로 있다. 이런 상태들은 전쟁과 제국의 위협에 대한 공포 속에서 계속되었다. 그럼에도 우리나라에서 70여년의 휴전이지만 전쟁없이 사회를 개조해가면서 문명의 도구들의 평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냉장고와 세탁기는 민중의 삶의 양식을 바꾸어 놓았다. 게다가 스파트폰이라는 누리소통의 도구는 또 다른 욕망(탐욕이 아니라)을 불러일으켰다. 소통 방향의 다원화와 입력과 발산의 다중성은 ‘나’의 주체가 있는지를 자문하기에 이른다. 그렇다고 ‘나’가 누구인지를 인공지능인 쳇GPT에게 답을 듣는다는 것이 아이러니일까?
화두의 첫째 물음이, 하늘과 땅이 아니라 나(자아)라는 국면에 이르렀다. 하늘과 땅에 대해 다룰 수 있는 여러 학문들이 발달하듯이, ‘나’에 대해 생물학, 사회학, 역사학, 인류학, 심리학으로 다룬다고 해서 ‘나’를 찾게 되는가?
학문을 대상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관계로서 다루어야 한다고들 한다. 인간은 사회 속에서 또는 전지구 속에서 사건들의 연관들로 다루어야 한다고들 한다. 누리 소통 시대에 ‘나’는 누리소통에서 흐름들의 양인 트래픽에 의해 규정되는가? 나는 트래픽에 의해 설정된 방식으로 규정된다고 하더라도, 그 흐름의 접속과 연관은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과정중에 있다. ‘나’, 자아는 살아가는 과정 중에서 노력하고 연마되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까? 그러면 자아는 원래 있지도 않고, 그렇다고 나를 대상으로 삼아 내가 만들고 싶어하는 대로 만드는 것도 아니라, 트래픽에서 형성되는 사건 속에서 활동하는 동안에 ‘나’가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면 진정한 나는 무엇인가? 잘 만들어 가야 하는 ‘나’, 생성하는 ‘나’로서 현 상태가 아닌가.
진솔한 나는, 힘쓰고, 애쓰고, 용쓰고, 기쓰고, 즉 노력하고 내공을 키우는 “자아”가 실재 현존하는, 살아가는 ‘나’이다. 그래서 먹고, 자고, 싸고, 일하며 산다. 그리고 저너머로 간다. 이 ‘나’는 이 “다음”을 모른다.]] (3:21, 58OKJ)
*덧글 ***
라이프니츠의 충족이유율과 선문답의 대립자들의 설법은 각각이 성립한다. 각자 이야기가 화두에 귀착시켜려는 방식은 파라독사이며, 개구즉착이다. 동서양은 달리 생각한 것이 아니다. 단지 터전의 먹거리 잠자리가 달라서, 삶의 양태들을 만드는 시기가 다를 뿐이다. 인류 의식 발전의 과정과 역사는 상사(相似) 구조들 속에서 확장되어 간다.
상사구조의 발생은 연역 논리(공리체계든 원리체계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경험영역에서 발생한다. 연역체계는 표면의 현상에서 상동구조를 만들기에 의견들의 차이(또는 대립)들을 생산한다. 경험에서 발생은 방향도 다르고 개별성의 자기 정립도 다르다. 특히 근세에서 자아의 성립을 표면의 이중성으로 여기는 것은, 개별성이 이중성이 뚜렷해 졌다는 것이다.
[고대 철학 이래로 한 용어가 이중성을 가지는 것은 다반사였다. 내가 고민스러웠던 것은, 아페이론을 아낭케(필연)이라고 할 때, 어떤 이데아든 어느 이데아도 제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의미에서 필연성이라 한다. 다른 한편 아페이론을 방황하는 원인이라 하는데, 이데아(원본)가 없다고 생각하면, 아페이론에서 발생은 모두 우연적이지 않는가? 그러면 세계는 필연의 산물인가 우연의 산물인가? ... 인연연기는 필연의 계열인가 우연의 계열들인가? 그 계열들(다발)이 자기 발전의 과정에서, 필연이라기보다 그 과정이 전체(온생명)에 내속되어 있다고 한다면, 그게 인연연기가 아닌가. 이 내속성 때문에 다른 계열들과 협력과 동의, 상부상조가 필요하며, 각자의 노력에 의해 완성될 수 있을 때 충분조건(적합하고 충만하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57LMG)]
[여기서 필연과 우연을 마치 선승의 대답처럼 한다. 너는 우연으로 보이제, 그게 다 불성이니라, 니가 필연으로 보는 것은 너의 아집이 만들어 놓은 그물이야, 그러니까 인연 연기의 그물에 빠져나오지 못하지. 그물 속에 자아가 있다고 하는 것은 필연적이지만 한계 속에 있으며, 그 틀을 벗어나서 있으면, 필연에 비해 우연처럼 보이지만 그 우연을 깨닫게 되면 만상에서 불성을 보게 되는 것이야, 즉 자연이 불성이고 신성이지. - 라이프니츠도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것인데, 플로티노스의 영향일 것이다.(57LMG)]
라이프니츠가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와 달리, 자아은 온모나드 속에 한 모나드이다. 이 모나드는 온 모나드를 비춘다. 당대의 사변(specculation)이란 말은 거울에 비추는 것이라 한다. 세계를 상상을 통해 비추어 안다는 것이, 추억들과 기억을 통해서라고 하면 인연연기와 비슷하게 사유한 것이 아니겠는가.
인연연기란 그 인간(싯달다든, 공자든, 소크라테스든, 예수이든) 속에 필연적 사건들이 있다고 하는 선문답들이 있다. 아담에게 930년을 살았던 인연연기가 필연적으로 있고, 역사가 소크라테스가 일흔을 산 흔적이 인연연기에 필연적으로 있다고 한다. 이런 선문답의 진술은 사후약방문과 같다고 반박한다. 그런데 아담이 그렇게 살지 않았다면 어떻게 살아겠느냐고 거꾸로 묻는다. 묻는 자가 달리 살았을 수 있을 것이라 한다. 진술자는 그러면 그 달리 산자는 아담이 아니라 다른 인물이라 할 것이다. 그 다른 인물도 필연성이라고 할 때, 그 필연성은 정해진 한계 내에서 그렇고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필연성이다. 건희에게도 필연성 있느냐고 물으면, 그 자는 그자신의 사변의 논리상 필연성이라 한다. 그러면 건희의 이 다음은?, 이 다음도 필연성이라 한다. 그런데 이 다음을 아는 것은 신이라고 말할 것이고, 신의 필연성이라 할 것이다. 선승도 인연연기의 삶을 살았고, 이 다음도 인연연기의 삶을 살 것이라 한다. 이 필연성의 질서 또는 진리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의미에서 종교는 필연성을 설교한다.
그렇다면, 대중이 묻기를 필연에 따라 살다가 가는데, 노력과 내공을 쌓을 필요가 있을까요? - 필연성론자는 그게 숙명인데 어쩔 거여. = 여기서 이탈자는 말하기를 당신은 그리 사세요, 나는 손발이 움직이는 대로 달리 살 게요. - 그리 사는 것도 부처님 손바닥에서 삶이고, 신의 필연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거요. = 그런 것을 모르다고 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아요, 손바닥이든 필연성이든 있기는 한가요, 흐름을 따라 살면서 부딪히는 중생과 더불어 웃고 울며 사는 거지요. 그 웃으며 즐겁게 사는 방식, 힘쓰고, 애쓰고 용쓰고, 기쓰고 사는 것이 생명이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어요? 그러니 용화세계든 천국이든 가고 싶으면 당신이나 가세요. - 그런 삶을 잘 살면 불국토이고 천국이지, 그렇게 살지 못하게 되어 있는 숙명을 거스를 필요가 없어요. = 기적과 아자르(주사위놀이), 음덕과 덕분, 은총과 자비는 언제 어디서 일어나는지 모르기 때문에, 삶에서 예외적 사건인데, 노력과 내공은 이 예외적 사건을 인민 대중과 함께 만들려고 노력하는 거지요, 그 노력을 하는 과정에서 만난 인물들과 터전에 대한 고마움을 것이, 무상보시를 받는 것과 같아서 즐겁게 맞이하는 거지요, 조그만 선업을 쌓으려 힘쓰는 노력, 그게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이라 여기고, 내공을 소통하는 과정이 즐거움일 것이라, 세상에 동지를 만나는 즐거움이 가장 큰 즐거움이라고 공자도 말했다는데, 먹고 자고, 먹고 자고 하면서도 흐름을 폭(부피)로 확장하는 과정에서 동지를 만난다는 즐거움, 그 즐거움으로 끊임없이 움직이며 살아가는 것이, 삶의 필연일 것이라. 논리상 필연이든, 결과적(사후약방문)의 필연이든, 백성의 피와 살을 빨아먹으려는 좀비들의 이야기이거나, 공포를 심어서 위협하고 협박하며 잉여생산을 빼앗아 축적하는 성직자들의 탐만치이지. 이들이 인민에게 아편으로 천국을 말하면서 사기치는 것이지. - 당신은 지옥 갈거요. = 당신이나 먼저 천당 가서 살고 여기에 있지 않으면, 인민 대중이 즐거이 살리라. 좀비들은 그 좋다는 천국에 왜 안 가는지 모르겠어.
크리스트교의 천국이니 저세상을 말하는 것은 고착적 세계인데 비해, 인연연기는 고착적 세계가 아니라 이어지는 세계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여기 지금 터전에서 조그만 선한 일이라도 하면 세상은 즐거운 세상, 훌륭한 세상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예수라는 젊은이도 여기 지금 이런 착한 일을 하면서 살아가자고 한 것이다. 착한 일들을, 무상보시(아카페), 자비, 포틀래치를 지금 여기 실행하는 것이 천국이라 한 것이다. 진솔한 종교는 무소유인데 카톨릭도 크리스트교도 돈이 너무 많고, 마치 고려말 불교의 절이 토지를 너무 많이 소유하여 세상의 변화를 맞이하였듯이, 종교가 소유를 너무 많이 하고 있고, 그것으로 인민에게 겁박하는 것은 악마의 짓거리들이다. 세계는 변한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영혼의 예는 온의식 상태가 상호연관 속에 있다는 것이고, 케사르의 예는 역사적으로 케사르의 사건들이 필연적이라는 것이 생성적 우연의 필연성이라는 것이다. 전자의 영혼은 기억에 관하여 설명이고, 후자는 역사의 과정에서 우연적 사건들의 연쇄 계열의 필연성이다. 둘다 세상에서 일어난 것이다. 전체에 작동이 있듯이 부분으로서 케사르의 행동에서 작동이 필연적으로 개입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그러나 이것은 형이상학적 해결이다. 왜냐하면 온의식의 필연성이 개별의식의 필연성에 동일하게 적용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온의식의 온일자와 개별현존의 일자(모나드)를 구별했을 것이다. 이 후자의 모나드가 전체를 반영한다고 하지만, 특이자로서 모나드는 생성, 창안, 발명, 혁명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이루어진 것이 끝(목적)이 아니라 이루어진 것을 토대로 생성과 확장 또 다시 이질반복을 실행하고 살아간다.(57LMG)]
사실들의 나열이 진실의 일부이지만 진리인 것은 아니다. 여러 사실들의 연관의 계열들은 다양하게 펼쳐져 있다. 그 계열들을 개인은 다 경험할 수 없지만, 인간들이 행한 계열들은 개인의 것보다 많다는 것은 사실들이다. 이 사실들의 총체가 진리일 것이다.
달을 보라고 하면 손가락을 본다고 한다. 고정된 대상에서도 고정된 손가락에서도 답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달을 보면서, 무엇인가 이루어지는가라는 생각에 마음이 편하고, 먹을 것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그러면서 진리는 저 달처럼 하늘에 있을 것이라는 유비적 설교들은 인민을 호리는 수법이다. 그저 현실에서 조그만 선을 실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물이악소이위지 물이선소이불위지(勿以惡小而爲之 勿以善小而不爲之)하라. 888을 실행하면서, 먹거리와 잠자리를 잘 마련하면서,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 삶의 보람이며, 즐겁고 기쁘게 사는 것이다.
[선승의 화두로서 자아(영혼)에 대해, 선문답으로 아는 것(가지성)과 아는 것의 대상화(개별화) 사이에서 어느 것을 선택할 수 없다. 고양이의 불성: 모든 것이 불성이 있다고 인식하는 것과, 고양이라는 종이 불성으로서 대상화 되는 것(고양이 불상)은 다른 문제이다. 전자는 실체의 상징화이고 후자는 노력하는 삶의 과정의 성취의 문제이다. - 라이프니츠는 전자의 형이상학적 문제를 용어로, 후자를 개별자로서 지위로서 개념으로 다루어야 한다고 했을 것이다. - 불성으로 표현하는 연꽃은 용어(상징)이며, 연못에서 피는 연꽃은 개별성이다. 그럼에도 자연에서 잘 자라 풍광을 이룬 여러 모습 등등과 더불어 연못 속의 연꽃이, 또한 싯달다가 들어 내밀었던 연꽃과 같은 아름다움처럼 일반화의 불성과 개별의 불성이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진실이 들어 있을 것이다. (57LMG)]
상징의 불성을 넘어서, 불성이 생명에 대한 경외심이라고 해보자, 그 중에서 인간의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심은 것은 인간사에서 터전과 지금 잘 살아보자고 하는 것이다. 잘, 즐겁게, 행복하게, 산다는 것은 일 잘하고, 베푸는 것에서 온다. 사람이 모여서 연결되어 노력하면, 그 노동의 분업에 의해, 혼자서 생산하는 것에 비해 생산물에서 잉여생산이 생겨나며, 이 분업의 과정이 실면 길수록 잉여는 커져 간다. 이 잉여를 공동체에서 공공(공산)활동에 쓰자고 하는데, 몇몇 이기심에 가득찬 이들이 자기의 사적이익으로 차지(전유)한다. 이 사적소유가 사람들의 즐거움과 기쁨, 생명의 활력과 확장을 가로막는다. 그 막아선 경계 안에서 고착성과 고정성이 있으며, 이것을 지배하려는 탐욕과 오만이 그 인간들을 치졸하게 만든다. 이번 사건에서 김건희와 윤석열은 탐욕과 오만의 결합으로 치졸한 행태로 좀비들 중에 요상한 좀비를 만들었다. 이 좀비에게 푼돈을 얻어먹었던 극우의 행태들이, 괴상한 좀비들이 드러날 것이다. 요좀비와 괴좀비를 벌하는 것은 탐욕의 축적물(금전, 재산)을 모두 회수하는 것이다. 그리고 걸승들이 굴을 파며 수도하려는 개마고원으로 보내 함께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면 선업을 쌓아야 할 것이다.
삶은 과정이며, 대상화가 아니라 사건들의 연결망처럼 이루어진다. 자아를 찾는 것은 온자아(세상) 속에서 찾아야 한다. 그 찾는 방식이 숫자로 보여주는 트래픽이 있다. 그 트래픽에서 누리소통에서 학습과 동지를 만나는 것이 공자가 말한 열락이다. 진솔한 동지를 만나 세월을 리좀처럼 흐르면서 엮어가는 것이 열락이리라. (58OL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