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위에 오른 후 태종을 곤혹스럽게 만든 것은 휘하 세력들 간의 충돌이었다. 즉위한 직후인 1401년 1월 허조·김종남의 대립사건이 그랬다. 사헌부의 관리 허조가 근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마침 왕에게 매를 바치러 오던 응인(鷹人·궁중의 매사냥꾼)인 김종남 일행과 맞닥뜨렸다. 규정에 따르면 응인은 말에서 내려 사헌부 관리에게 길을 양보해야 했다. 하지만 김종남 일행은 그것을 무시하고 말을 탄 채로 궁궐로 들어가 버렸다. 허조는 사헌부 아전들을 시켜 김종남의 종을 잡아 감옥에 가뒀다.
얼마 후 김종남으로부터 이 상황을 보고받은 태종은 허조를 불렀다. 왕의 호출을 받고 들어가려는 허조 일행을 이번에는 궁궐지기 장교가 막아섰다. 데리고 들어가는 아전 7명 중 1명만 데리고 들어가라는 것이었다. 허조는 다시 그 장교의 종을 하옥시켰다. 응인을 석방하라는 왕명에 대해서도 허조는 ‘사헌부를 능멸한 그들을 풀어줄 수 없다’고 버텼다. 그러자 태종은 순군(巡軍), 즉 경찰을 동원해 허조의 종들을 가두게 했다. 비유하자면 청와대 직원과 검사가 충돌했을 때 대통령이 경찰을 동원해 검찰청 직원을 구속시켜 버린 것이다.
이 조치를 두고 사헌부의 관리들이 항의했다. ‘사헌부 관리가 길을 갈 때 사람들이 길을 양보하는 것은 그 사람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왕명을 받드는 관리이기 때문인데, 응인과 궁궐지기가 허조에게 독직(瀆職·직책을 업신여김) 행위를 한 것은 곧 왕명을 두려워하지 않음을 보여준 것’이라는 게 상소 내용이었다. “신하들의 곧은 기운(直氣)이 꺾이면, 꼭 말해야 하는 일이 있더라도 우물쭈물해 감히 진언(進言)하지 못하는 풍토가 조성될 것”이라고도 했다. 태종은 이 상소를 읽고 자기 뜻을 거스른 관리들을 일단 지방으로 좌천시켰다가 돌아오게 했다(허조는 그다음 해에 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 승진). 그는 또한 사헌부 관리를 업신여긴 김종남을 10여 일 뒤 지방으로 내쫓았다.
2016년 SBS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 이방원(태종)의 젊은 시절을 연기했던 유아인(위). 세종이 태종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기 위해 1442년 세운 태종 헌릉 신도비.
처음에는 ‘국왕을 능멸했다’며 사헌부 관리를 꾸짖던 태종이 생각을 바꿔 응인을 처벌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한마디로 이목(耳目)이 수족(手足)보다 중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왕의 눈과 귀에 해당하는 대간(臺諫·사헌부와 사간원)이 존중받으면 왕이 판단을 제대로 할 수 있고, 손과 발에 해당하는 측근 신하들의 사사로운 언행도 예방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이목의 관리를 발탁해 예기(銳氣)를 기르고 그들에게 중한 권세를 빌려주는 것은 장차 간신(奸臣)의 싹을 꺾기 위해서’라는 믿음이 34세의 군주 태종으로 하여금 왕의 자존심보다는 국가 기강을 우선시하는 판단을 내리게 했다.
허조·김종남의 대립사건에서 보듯이, 태종은 자신을 거스르는 말에 대해서 불쾌한 반응을 보이다가도 끝내는 받아들이곤 했다. 예를 들어 보자. 1401년 7월에 태종은 개경에 궁궐을 개축하는 것을 비판하는 언관들을 모조리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언관들은 ‘궁궐 개축하는 일로 경기 백성의 고생이 심하다’고 비판했는데, 공사는 모두 승군(僧軍)들이 하고 있었는데도 거짓된 말로 나랏일을 저지하려 한 자들을 처벌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대신들은 “언관이 없으면 나라꼴이 엉망이 된다”면서 넓게 포용하는 임금의 덕을 베풀 것을 호소했고, 태종은 웃으면서 그 호소를 받아들였다. 1407년 10월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허조는 2년 전에 진행된 창덕궁 공사 이후로도 토목공사가 계속돼 백성들이 무척 힘들어하는데 “그 원망이 결국 누구에게 돌아가겠느냐”고 상소했다. 이 말을 들은 태종은 “나의 충신은 오직 허조뿐”이라면서 공사를 중지시켰다.
나중에 부왕 이성계는 태종을 ‘강명(剛明)한 군주’라고 불렀다. 강명하다는 말의 일차적인 의미는 ‘말을 헤아리는 능력’, 즉 귀에 거슬리더라도 나라에 도움 되는 말을 받아들이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뜻이다. 강명하다는 말의 또 다른 의미는 실행력이 높다는 것이다. ‘대학연의’를 읽다가 승지가 간언(諫言)의 중요성을 이야기하자 태종은 그 자리에서 “과실이 있거든 직언해 꺼리지 말라”고 지시했다. 또한 경연에서 신참(新參·새로 과거에 합격한 사람)에게 말(馬)을 바치게 하는 관행이 지적되자, 바로 “의정부에 내려 없애도록 하라”고 지시한 예가 그것이다.
태종은 특히 선제적 조치를 매우 잘 내린 지도자였다. 즉위 초반(재위 2년) 안변 부사 ‘조사의 난’ 때, 그는 유배지에 있는 형 이방간에게 “의혹을 품지 말라”고 편지해 반군 편에 서지 않도록 먼저 조치해서 난을 제압했다. 아직 중원대륙의 정치 상황이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가장 먼저 명태조 주원장의 넷째 아들 연왕(나중의 영락제)을 찾아가 신뢰를 쌓는 등 선제적 외교를 펼친 것도 좋은 예다.
태종은 정보전에 고도로 능숙한 정치가였다. 선제적 조치에 성공하려면 가장 중요한 것이 정확한 정보력인데, 이 점에서 그는 탁월했다. 왕위에 오르기 전에는 이숙번이나 하륜과 같이 권력에서 소외된 인물들을 측근으로 끌어들여 상대방의 핵심 정보를 빼내오기도 했으며, 재위 중에는 경차관(敬差官·중앙에서 파견한 조사관)을 전국에 보내 수령들의 행정 실태 및 민심의 향방을 조사해 오게 했다. 그는 역대 국왕 중 가장 많은 경차관을 지방에 파견한 군주인데, 재위 13년(1413년) 8월에 기록된 ‘경차관 봉행 사목(奉行 事目)’을 보면 곡식의 풍흉 정도는 물론이고, 백성에게 이롭고 해로운 것과, 업무를 태만히 한 수령의 성명을 탐문하라는 등 세세한 내용을 담고 있다.
마지막으로 강명한 군주 태종은 자연재해에 대해서 적극 대응했다. 재위 중반부인 1412년 7월 17일의 실록을 보면 태풍이 불고 폭우가 쏟아져 곡식이 모두 쓰러졌다. 이 소식을 들은 왕은 놀라고 두려워 잠에 들지 못했다. 다음 날 왕은 내시를 보내 들판의 곡식을 확인하게 했으며, 이미 익은 곡식을 제때에 수확하지 않아서 손해 입게 한 연유를 묻고 “종일 큰바람이 불었는데도, 들판에 나가 논밭을 살피지 않은 수령들을 조사해 아뢰라”고 지시했다.
아울러 그는 조운선(漕運船) 침몰 사망자 가족에게 세금을 면제해주라고 말했다. 태풍이 잦은 7월에는 배를 바다에 띄우지 못하게 하는 법을 세우기도 했다. 피해 상황을 축소해 보고한 관리들을 여지없이 직위 해임했다. 특이한 것은 태종이 ‘옥력통정(玉曆通政)’이라는 책을 읽고 풍우의 재변이 끼칠 후속 피해를 예방하도록 한 점이다. 일시적 조치에 그치지 않고 반복돼 나타나는 재해의 피해를 연구해서 미리 방비하도록 한 것은 그동안의 다른 임금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다.
가뭄이나 홍수 등 자연재해가 발생했을 때 왕들이 취하는 일반적인 조치는 자기반성과 기우제다. 이는 동중서(董仲舒)의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에 근거한 것으로 땅 위의 지도자들이 어떻게 정치하느냐에 따라 하늘의 기운이 다르게 나타난다는 관념에 따른 것이다. 태종 역시 가뭄이 들면 맨 처음 철주(輟酒·술을 그침) 및 감선(減膳·반찬 수 줄이기)과 사냥 중단 등의 자기를 절제하는 행동을 보였다. 기우제나 기청제와 같은 제사도 지내게 했다. 특이한 것은 태조를 비롯한 대다수 왕과 달리 태종은 제사를 맨 나중에 언급한다는 점이다. 이는 ‘제사보다 인사(人事)가 먼저’라는 자신의 신념에 따른 것이다.
태종은 달이 금성(金星)을 범했다는 보고를 받은 직후, 좌우 신하들에게 “천변(天變·하늘의 변화)을 만났다고 반드시 빌 것은 없다. 그것이 어찌 군신(君臣)이 각기 자기의 맡은 바 일을 바르게 하는 것만(各正乃事) 같겠느냐?”(태종실록 11년 1월 5일)고 말했다. 또한 전라 지역의 지진 소식을 듣고 해괴제(解怪祭)를 지내야 한다는 서운관(書雲觀) 관리에게 “천재지변을 만나면 마땅히 인사를 닦아야 한다(遇天災地怪 當修人事)”면서 거절했다(태종실록 12년 2월 1일). 한마디로 그는 천재지변에 대한 최고의 대응책은 임용을 잘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앞서 1412년 태풍 때도 태종은 피해가 어느 정도 수습된 7월 21일에 신하들을 편전(便殿)으로 불러들여 인재를 추천해달라고 말했다. “근일에 태풍의 재변이 있는 것은 인사에 감응함이 있었던 까닭에 그리된 것”이라면서, 왕 자신이 잘못한 점은 없는지, 시행 중인 정책이나 법령에 문제는 없는지를 모두 말하되, 면전에서 말하기 어려우면 봉투에 담아서 아뢰라고 지시했다. 여기서 보듯이 태종은 제사 대신 현지 확인과 수령의 역할 독려, 그리고 피해자 보호와 인사 조치 등 철저하게 ‘사람’ 중심으로 접근했다. 잘못을 우연에 돌리지 않고 사람에게서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고 스스로 책임지는 자세를 보인 것이다. 그것이 그의 시대를 ‘전국의 창고가 가득 차고 인재가 넘치는’ 나라로 만들었다.
여주대 세종리더십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