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 임씨 시조로 알려진 임완 선조님의 고려사 기록과 당대 금석문(묘지명) 사료를 바탕으로, 선계 전승에 대한 학술적 고증과 가문의 역사적 실체에 대해 정리해 본 글을 공유합니다. 이는 <임씨상계보감(2013) P.460>의 옥구관 계보도에 익산관 시조 임완 선조님이 옥구관 임유문 선조님의 아들로 계대되어 있는 문제를 바로잡고자 하는 취지도 있습니다.
익산 임씨 시조는 고려의 문신 임완(林完)으로 전해진다. 그는 고려 초중기의 실존 인물로, 1114년 예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관료사회에 진출했고 이후 고위 관직에까지 오른 분이다. 이 글은 어느 문중의 계통을 높이거나 낮추려는 뜻에서가 아니라, 익산 임씨 시조로 전하는 임완의 선계가 현재 확인되는 고려시대 사료와 어떻게 부합하는지를 살펴보기 위한 것이다.
후대의 족보에서는 그의 선계를 옥구 임씨 계통과 연결하여 임개(林槩)의 손자이자 임유문(林有文)의 아들로 전하고 있다. 오늘날 일부 성씨 자료나 인물정보에서도 이러한 계보가 그대로 인용되고 있다. 그러나 임완을 임유문의 아들로 잇는 계보는 당대 사료와 맞지 않는다.
가장 직접적인 자료는 1152년에 작성된 「임광묘지명」이다. 여기에는 그의 신원을 “휘는 광(光)이고 자는 언실(彦實)이며 초명은 완(完)이고, 서송(西宋) 장주(漳州) 사람”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그는 무진년인 1088년에 태어났으며, 1112년 상선을 따라 고려의 수도 개경에 들어와 벼슬을 구하였다. 관찬 역사서인 『고려사』 역시 임완을 “본래 송나라 사람”이라고 하였고, 1114년 과거 급제자 명단에서도 그를 “송나라 진사 임완”이라고 기록했다. 즉 임완이 송나라에서 고려로 귀화한 인물이라는 것은 서로 다른 당대 기록들이 일관되게 전하고 있는 사실이다.
한편 임유문의 가계는 이와 별개로 분명하다. 『고려사』는 임개를 옥구현 사람으로 기록하면서 그의 아들로 임유겸과 임유문을 들고 있다. 따라서 임개와 임유문의 부자관계는 사료로 확인된다. 문제는 그 다음에 임완을 연결하는 후대 족보의 계대이다. 임유문이 임완의 아버지였다면, 고려의 고위 관료였던 임유문의 아들이 어떻게 송나라 장주에서 태어나 성장하였으며, 송나라에서 진사가 된 뒤 1112년에야 상선을 타고 고려에 들어와 벼슬을 구했는지가 설명되지 않는다. 더구나 임완이 고려에 들어온 무렵 임유문은 이미 중앙정계에서 활동하던 중진 관료였다. 임완이 급제한 1114년에 임유문은 어사대부(御史大夫)의 지위에 올랐다. 이러한 상황에서 외국에서 귀화한 '송나라 진사'가 그의 아들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혹여 임유문이 젊은 시절 송나라에 건너가 아들을 얻었고 후일 그 아들이 아버지를 찾아 고려로 입국했다는 극적인 가설을 세우지 않는 한.
「임광묘지명」의 내용도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묘지명은 임완의 출신과 입국 과정뿐 아니라 두 차례의 혼인, 자녀와 사위까지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한다. 이에 따르면 임광은 합문부사(閤門副使) 유문지(劉文志)의 딸인 첫 번째 부인에게서 두 딸과 아들 하나를 두었다. 장녀는 직장동정(直長同正) 박혁문(朴赫文)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출가하기 전에 죽었으며, 두 딸 모두 임광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아들 임사룡(林師龍)은 당시 도재고판관(都齋庫判官)이었다. 두 번째 부인은 지후(祗候) 서억(徐億)의 딸로, 그 사이에서 딸 하나를 두었으며 이 딸이 주부동정(注簿同正) 이구수(李龜壽)에게 출가하였다. 그런데 이처럼 가까운 가족관계를 구체적으로 적으면서도 임유문이나 임개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만일 임유문이 실제 친부였고 임개가 조부였다면, 두 사람 모두 당대 고려의 최고위급 관료였다는 점까지 고려할 때 이러한 침묵은 더욱 설명하기 어렵다. 따라서 위에서 말한 극적인 가설 역시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므로 임완을 옥구 임씨 임개의 손자, 임유문의 아들로 연결한 후대 족보의 기록은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임완이 익산 임씨의 시조로 전해지는 것과 그의 혈통을 옥구관의 임개·임유문 계통에 연결하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이다. 임완이 고려에 정착하여 후손을 남겼고 그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받들었다는 역사와 전승은 성립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임완의 선대까지 고려의 기존 임씨 가문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아니다. 당대 사료가 보여주는 임완은 어디까지나 송나라에서 태어나 고려로 들어온 귀화인이다.
그렇다면 후대에는 왜 임유문과 임완을 부자로 연결한 계보가 전해지게 되었을까. 가장 먼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후대에 시조의 선계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같은 성씨를 가진 동시대의 저명한 인물들이 하나의 계보로 연결되었을 경우이다. 임개와 임유문은 『고려사』에 이름이 남은 고위 관료였고, 임완 역시 고려 중기의 저명한 문신이었다. 특히 임유문과 임완의 나이 차이가 서른두 살로 실제 부자 세대와 자연스럽게 맞는다는 점은 후대에 두 사람을 연결하기 쉬운 조건이 되었을 수 있다.
한편으로는 또 하나의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도 있다. 임완이 고려에 들어온 1112년, 그는 스물다섯 살의 젊은 선비였다. 송나라에서는 진사였지만 이제 고려로 귀화한 이상 새로 사회적 기반을 만들어야 하는 처지였다. 반면 임유문은 그보다 서른두 살 위였고 이미 중앙정계의 고위 관료였으며, 두 사람은 같은 임(林)씨였다. 이후 임완이 짧은 기간 안에 과거에 급제하고 고려의 관료가문과 혼인하며 빠른 속도로 중앙 관료사회에 정착한 사실을 보면, 그 과정에서 기존 고려 관료의 후원이나 보호를 받았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물론 그 후견자가 임유문이었다고 전하는 자료는 어디에도 없다. 다만 후대 계보가 여러 고려의 임씨 인물 가운데 유독 임유문을 임완의 아버지로 연결했다는 사실은 한 번 생각해볼 만하다. 실제로 임유문이 고려에 막 들어온 임완을 가까이에서 후원하거나 보호했고, 임완이 그를 아버지 세대의 가까운 인물로 따랐다면, 그러한 관계에 대한 기억이 오랜 전승 과정에서 혈연관계로 바뀌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임완이 임유문을 아버지처럼 따랐다”는 기억이 훗날 “임완은 임유문의 아들이었다”는 계보로 정착했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결국 현재의 사료로 확인되는 것은 분명하다. 임완은 송나라에서 태어나 고려로 들어온 귀화인이며, 옥구 임씨 임유문의 아들이 아니다. 따라서 임개에서 임유문을 거쳐 임완으로 이어지는 후대 족보의 기록은 사실과 다르다. 그 잘못된 계보가 생겨난 이유도 단정할 수 없다. 족보 편찬자가 가문의 선계를 명문 관료가문에 연결하기 위해 만들어낸 것일 수도 있고, 귀화인 임완의 고려 정착 과정에서 임유문이 가까운 후견자로 관계를 맺었던 사실이 오랜 세월 동안 와전되고 혈연으로 왜곡되어 전해진 것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분명한 것은, 임완이 임유문의 아들로 이어질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임완의 선계가 옥구 임씨의 임개·임유문 계통과 연결될 수 없다는 사실은 익산 임씨 가문의 위상을 낮추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잘못 전승된 선계를 바로잡고, 가문의 실제 역사적 출발점을 분명히 하는 일이다. 임완은 12세기 송나라에서 고려로 건너와 스스로 당당히 과거에 급제하고 중앙의 고위 문관으로 성장한 인물이었다. 이러한 송나라 귀화인으로서의 독자적인 역사야말로 정사와 금석문을 통해 확인되는, 익산 임씨가 시조로 받드는 임완의 역사적 실체인 것이다. 후대에 덧붙여진 선계보다는, 확실한 사료가 전하는 그분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밝히는 것이 가문의 역사적 정체성과 자부심을 더욱 분명하고 당당하게 세우는 길일 것이다.
[옥구 임씨 (沃溝 林氏] 네이버 카페로 초대합니다.
https://cafe.naver.com/okkulim
From 옥구인 임병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