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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신년 말씀 1강
말씀/시편 1:1-6절
요절/시편 1:2절
복 있는 사람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Happy New Year! 한 해의 마지막 날을 예배로 보내게 되어 감사합니다. 한 해가 가고 새해를 맞이하는 시점이 오면 항상 사자성어들이 등장합니다. 1,300여명의 교수들이 2023년을 돌아보며 “견리망의(見利忘義)를 뽑았습니다. 견리망의란 “이로움을 보자 의로움을 잊다”는 뜻입니다. ‘나라 전체가 마치 각자도생의 싸움판이 된 것 같은 위기의식으로 뽑았다고 합니다.
지난 화요일 “서울의 봄” 영화가 천만관객을 돌파하는데 일조했습니다. 영화관을 나오는데, 영화의 여운과 시편 1편 말씀이 뒤섞여 복잡했습니다. 영화는 견리망의한 자들의 승리로 끝납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군인의 길을 지키고자 했던 사람들은 고문을 받고, 쿠데타를 성공한 자들은 단체 기념사진촬영을 합니다. 그리고 기념사진촬영 사진 한쪽에 쿠데타에 참여한 자들이 후에 얻게 된 권력의 자리를 자막으로 보여줍니다. 씁쓸함을 안겨주는 장면입니다. 영화가 정말 씁쓸한 것은 영화속에서만 일어나는 이야기가 아니라, 혹은 오래전 그 때 그 시절에만 일어나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고 일어나고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악인의 꾀를 따르고 죄인의 길에 서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는 자들이 복 있는 자들처럼 보이는 모습, 반대로 그 꾀를 따르지 않고 그 길에 서지 않고 그 자리에 앉지 못한 자들은 미련하고 복 없는 자들처럼 보이는 모습들을 삶의 여정에서 심심치 않게 만나게 됩니다.
그렇다면 시편 저자는 어떤 믿음으로 1절을 고백한 것입니까! 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고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여기서 악인, 죄인, 오만한 자들은 엽기적인 범죄를 저지른 싸이코패스 같은 비정상적인 인격을 가진 사람들을 말하지 않습니다. 악인의 꾀를 따른다는 것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 불의한 방법을 쓰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것입니다. 죄인의 길에 서는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과 소망의 길이 아닌 자기 욕심의 길에 서는 것입니다. 오만한 자리에 앉는 것은 남들 위에 군림하여 종처럼 부리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는 것입니다. 따라서 시인은 악인이나 죄인이나 오만한 자라는 부정적인 표현을 썼지만, 어떤 상황 어떤 사람들에게는 전혀 다르게 해석될 수 있습니다. 다시 영화이야기로 돌아가면, 전두광은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는 배짱 좋은 탁월한 보스로 해석되고, 언론을 통해 구국의 영웅으로 선전됩니다. 악인의 꾀를 쓰고 싶고 죄인의 길에 서게 하고 오만한 자리를 탐하도록 만드는 이유입니다. 인간의 본성 또한 말씀보다 꾀,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기 영광, 섬김보다 오만한 자리에 익숙합니다.
그렇다면 시인은 어찌하여 이런 고백을 한 것입니까! 그는 정의로운 시대를 살았기에 이리 고백한 것입니까! 시편은 총 5권으로 되어 있는데, 150편의 시를 무작정 모아놓은 것이 아닙니다. (1권:1-41편, 2권:42-72편, 3권:73-89편, 4권:90-106편, 5권:107-150편), 1권은 다윗왕 통치시대를 주로 배경으로 하고 있고, 2권은 솔로몬 통치시절, 3권은 왕국의 분열과 멸망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4권은 출애굽 시절 모세의 인도로 광야생활을 했던 것을 배경으로 하며, 5권은 바벨론 포로생활을 마치고 예루살렘 귀환과 새 이스라엘 건설을 배경으로 합니다. 대략 1,000년에 걸쳐 구전으로 내려온 시들을 바벨론 포로기 후반에 정리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시편 대부분의 시는 억압과 고통을 당한 시대 배경에서 나왔습니다. 시편을 읽어보면 얼마나 많은 탄식과 부르짖음과 간구와 눈물이 담겨 있는지 모릅니다. 마음이 상하고 무너진 사람들이 시편 말씀으로 생수를 삼는 이유입니다. 대표시인 다윗만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영광과 평화의 시절은 잠깐이요, 왕이 되기 전에는 사울로 인해, 왕이 된 후에는 자식들로 인해 오래토록 고통으로 얼룩진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런데도 시인은 외칩니다. “복 있는 자는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고 오민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다” 영어성경에는 이렇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Blessed is the man who...", ‘Blessed', 이는 이미 복 받은 상태를 말합니다. 이렇게 살아야 복을 받는다는 말씀이 아니라 복 받은 사람이니까 이렇게 산다는 말씀입니다. “와! 저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았어! 그러니까 저렇게 살 수 있는거지!!” 세상의 행복론이 아닌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는 행복론입니다. 복을 받은 사람들이기에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고 말씀을 따라갑니다. 복을 받은 사람이 육신의 안일과 욕망을 채우는 길에 서지 않고 부르심의 길에 섭니다. 복을 받은 사람들만이 오만한 자리가 주는 쾌락에 빠지지 않고 섬기는 자리가 주는 기쁨과 의미를 즐길 줄 압니다.
시인의 관점으로 보면, 한 해의 마지막 연휴에 여기 이렇게 주일예배를 드리러 온 분들 또한 복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사는 세상이 어떤 세상입니까! 갭 투자 이야기, 코인과 주식 이야기, 아파트 이야기, 자동차 이야기, 여행이야기, 오락과 연애이야기로 가득합니다. 그런 이야기의 맨 앞자리에 있는 사람은 신나고 맨 뒷자리에 있는 사람은 슬피 우는 세상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세상에 살면서 돈도 안 되고 암송으로 압박하는 이런 예배에 나올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이기에 그런 것입니다. 어떤 이는 부모님 때문에 나오게 되었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복 있는 가정에 태어나서 나오게 된 것입니다. 세상의 룰을 따르지 아니하고 율법을 따라 가고 있다면, 자기 욕심을 좇아 살지 않고 부르심을 따라 살고 있다면, 이미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고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복 받은 자입니다. 멸망으로 가는 넓은 문이 아닌 생명으로 가는 좁은 길에 들어섰으니 복을 받은 자입니다. 세상을 앞서가는 것으로 복을 삼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을 복으로 아는 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2절을 같이 암송해 보겠습니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묵상이란 원어로 ‘하가(,הָגָה)라고 합니다. 비둘기가 모이를 쪼아먹으며 내는 소리(사38:14), 혹은 사자가 먹이를 움키고 으르렁거리며 먹는 소리(사31:4)를 말합니다. 저희 집 포리가 뼈다귀를 받으면, 양발로 붙잡고 뜯어먹으며 그르릉 내는 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이 율법을 묵상하는 것은 율법을 제대로 소화하고자 소리내어 암송하는 것입니다. “악인의 꾀, 죄인의 길...,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묵상하는도다... ” 시편의 시인중의 하나였던 다윗도 그리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다윗이 나발을 죽이려고 가는데, 아비가일이 나타나서 다윗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는 분입니다. 나발의 피로 그 싸움에 오점을 남기지 마십시오” 귀로만 듣고 끝나 버렸으면 분노를 잠재우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는 사람이라...“ 입으로 굴리고 굴리다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그렇게 묵상하다보면 신기하게도 분노가 사그라들고 감정대로 일을 저지르고 싶은 욕망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다윗의 그런 체험들은 그 때 그 사건으로만 끝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첫째 아들 암몬이 누이동생 다말을 성폭행하고 내쫓았을 때, 암살롬이 그런 암논을 죽이고 반역을 꾀했을 때, 한없이 추락하는 순간 순간, 다윗은 여호와의 싸움을 입으로 되뇌이고 또 되뇌였을 것입니다. 그때마다 혈기 혹은 절망을 견디는 용기와 믿음을 얻었을 것입니다. 우리 각자에게도 그런 체험들이 있기에, 다윗도 그렇지 않았을까 추론해 보는 것입니다. 시골에서 밭일을 하는 할머니들을 보면 입으로 흥얼대는 노래들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알아듣지 못하는 그런 노래를 중얼중얼하면서 밭일을 합니다. 그 노래가사의 에너지가 늙은 육신으로 노동의 무게를 감당할 힘을 얻게 합니다. 그와 같이 율법을 즐거워하여 묵상하는 사람은 삶의 무게를 감당할 힘을 얻습니다. 고난의 시간을 견딜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시인은 말씀합니다. 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시냇가에 심겨진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런 것인지 그림이 그려집니까! 이는 황량한 광야를 다녀본 사람이라면 바로 와 닿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생명력 왕성한 씨앗이라도 메마른 땅에 떨어지면 열매는 고사하고 싹 조차 틔울 수 없습니다. 생수를 끊임없이 공급받아야 합니다. 인생의 여정에는 항상 풍성하고 은혜로운 시절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광야처럼 메마르고 혹독한 시간도 만나게 됩니다. 율법을 즐거워하고 묵상하는 사람은 시절에 상관없이 열매를 맺습니다. 그것이 형통입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의 요셉은 젊은 날 아버지 집에서는 거짓이 없는 순수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러다가 하루 아침에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혹독한 광야에 던져진 것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39:2절을 보면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심으로 그를 형통한 자가 되게 하셨다고 기록했습니다. 그가 형통한 자가 되었다는 것은 노예에서 벗어나 자유민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노예로서 형통한 것입니다. 신분은 노예로 추락했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하나님의 비전을 붙들고 살아간 것입니다. 힘들어도 견디다보면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데, 그때를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생수를 공급받지 못해 침몰한 것입니다. 주의 말씀은 어느 때를 만나든지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 수 있는 형통을 가져다줍니다.
‘서울의 봄’ 영화에서 이태신 장군은 전두봉을 끝내 제압하지 못하고 제압당합니다. 그가 마지막 장면에서 전두봉에게 달려가 내지른 말이 있습니다. “너는 대한민국 군인으로도, 한 인간으로도 자격이 없어” 감독이 세상을 향해 남기고 싶은 메시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당시에는 끌려가서 고문당하며 강제로 쫓겨나고 메말라 버린 것 같았으나, 양심을 지킨 한 인간으로서 그리고 군인다운 군인으로서 역사에 남았습니다.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묵상하는 사람은 그와 같이 마르지 아니하며 형통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23년은 제게 어느 해보다 목자로 살기에 쉽지 않은 해였던 것 같습니다. 목자로 사는 것이 마치 달리다가 숨이 목에까지 차올라서 그만 달리고 싶은 그런 시간처럼 다가왔습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한 해를 지나올 수 있는가? 돌이켜보면 돌이켜볼수록 매주 말씀을 전하는 십자가가 나를 살렸음을 보게 됩니다. 말씀 노트를 준비하고 그 말씀으로 말씀 공부를 인도하고 그 말씀으로 메시지를 쓰고 쓴 메시지를 다듬으며 리허설 하고, 예배 후에는 다시 들여다보고..., 그런 시간들이 제 마음과 생각을 붙들어 어둠속으로 침몰하지 아니하고 목자의 자리를 지키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자기를 발견하고 사람들에 대해, 세상에 대해 알아가는 통찰력을 주었습니다. 목자로서 내적 깊이와 결단을 새롭게 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가슴 깊이 새기게 했습니다.
이제 2024년 한 해를 맞이하는 이 때, 두려운 마음중에서도 소망을 붙드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여전히 부족하고 여전히 많은 문제가 있지만, 주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갈 때 목자로서 한 해를 살 수 있는 힘을 얻을 것입니다. 새해 주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묵상함으로 생명력 잃지 않는 형통한 목자로 살기를 기도합니다. 여기 있는 모두가 주의 말씀으로 형통한 한 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즐거워하지 아니하고 묵상하지 아니하는 자들이 만나게 될 비극이 무엇입니까! 4,5절을 암송해 보겠습니다. “악인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바람에 나는 겨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겨는 정미 과정을 거쳐 벗겨내고 남은 곡식의 빈 껍질을 말합니다. 고대에는 오늘날과 같은 정미소 기계가 없기에 바람을 이용하여 낱알과 껍질을 분리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바람이 불면 알곡과 섞여 있던 겨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멀리 날아가게 됩니다.
인생 여정에는 여러 바람이 불어 닥칩니다. 시련이나 질병의 바람이 불어닥칠 때도 있고, 성공이나 유혹의 바람이 불어올 때도 있습니다. 그러한 바람들은 의인에게는 의인을 더욱 의인으로 만듭니다. 그런 바람이 불어옴에도 율법을 붙들고 의인의 자리에 서서 섬기는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반면 악인과 죄인들에게는 그 정체를 드러내게 하는 심판이 됩니다. 고난의 바람이 불어오면 악인은 더 이상 손해보고 희생하는 자리에 남아있지 못합니다. 견디고 감당하는 의인들의 모임에 남아있지 못하고 자기 유익을 좆는 길을 찾아 떠납니다. 가룟 유다가 그러했습니다. 스승의 죽음이 다가오자, 그는 돈을 사랑하고 정치적 야심을 앞세우던 본래 마음을 숨길 수 없었습니다. 그는 제자의 자리를 지킬 수 없었으며 은30에 스승을 팔아넘기고 제자공동체를 떠났습니다. 제자의 타이틀에 의해 가려져 있던 돈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정체가 드러났습니다. 유다는 자신의 결정을 현실감각을 가진 지혜로 생각했겠지만, 예수님과 영영히 단절되는 끔찍한 심판이었습니다. 우리가 고난의 바람이 불어올 때, 더욱 겸손히 고개를 숙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할 이유입니다. 고난의 바람이 불어오면, 그 때가 말씀을 실제적으로 붙들어야 할 시간이 닥쳐왔음을 알고 기도해야 합니다. 성공의 바람 또한 그러합니다. 의인을 의인으로, 악인을 악인으로 드러나게 합니다. 사울은 왕의 자리에 올랐을 때, 사람들의 인정에 끌려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났습니다. 시기심을 감당하지 못해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는 결국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고 대적자의 자리로 옮겨가고 말았습니다. 세상에 처음부터 악인으로 태어난 사람 없습니다. 죄인의 길에 던져진 사람, 오만한 자리에 앉혀진 사람은 없습니다. 말씀이 없으니까 세상을 본받아 혹은 세상에 상처받아 혹은 세상에 휘말려 그렇게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의 바람이 불든지 성공의 바람이 불든지, 우리는 여호와의 말씀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2024년을 향해 어두운 전망들이 많습니다. 금방 끝날 것 같은 우크라이나 전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고,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은 언제라도 중동의 화약고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이런 분위기를 타고 한반도마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무역으로 먹고 사는 우리가 미국과 중국의 진영다툼에 끼여 심상치 않은 위기를 만나고 있습니다. 기후위기는 또 어떠합니까! 지난 가을 은행나무숲으로 유명한 인제의 어떤 곳을 방문했는데, 패턴을 벗어난 연이은 장마로 은행나무가 병들어 썩어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정치는 실종되고 갈등과 미움의 폭은 점점 커져만 가고 있습니다. 보이는 세상만 생각한다면 새해맞이는 희망보다 걱정이 앞섭니다. 그럴지라도 우리들은 염려나 두려움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시인은 최종적으로 고백합니다. 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인정한다는 말씀은 안다, 속속들이 경험하여 안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의인들의 길을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천부께서 우리 머리카락 숫자까지도 알고 계신다고 말씀했습니다. 무엇이 부족한지도 알고 무엇이 필요한지도 아십니다. 무엇이 좋은 것인지도 아십니다. 그러므로 우당탕당 좌충우돌하며 사는 것 같으나 실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성경에서 제일 많이 고난받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욥이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23:10) 극심한 고난을 만났는데도 그가 아신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늘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들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지금 현실문제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을지라도 너무 많은 근심과 염려로 한 해를 출발할 필요가 없습니다. 조급한 마음에 휘둘리다보면 오도방정을 떨다가 오히려 악수를 두게 됩니다. 우리가 다만 염려해야 할 것은 나의 발걸음이 의인들의 길을 떠나 악인들의 길로 가지 않을까입니다. 말씀으로 부단히 우리 마음과 생각을 비추어보고 주 앞에 늘 새롭게 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그를 통해 2024년을 여전히 의인들의 길에 남아 있다면, 그는 여호와의 복을 받은 자이며, 복을 받을 자입니다. 성경이 가르쳐주는 가장 구체적이며 가장 놀라운 복 있는 사람으로 사는 비결입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 믿음 주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