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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1 第1問題 (全10節) - 거룩한 가르침에 관하여
㉠-그것이 어떤 性質의 것인지, 그리고 範圍에 대하여 우리의 意圖가 일정한 限界 안에서 理解되기 위해
먼저 거룩한 가르침 自體에 관해 그것이 어떤 것인지, 또 그것의 範圍가 어디까지인지를 考察할 필요가 있다.
1節
㉡; 哲學的 學⽂分野들 외에 또 다른 가르침이 必要한가?
㉢
㉠ 거룩한 가르침은 계시로부터 오는 가르침을 말한다. 즉 그런 가르침은 적극적일 수도 있고 소극적일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이런 가르침은 계시와 관련된 진리의 복합을 말한다. 성 토마스가 같은 개념으로 쓰는 용 어들, 즉 성서 그리고 거룩한 가르침에 귀속시키는 성격들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런 가르침의 單一性에 주목해야 한다. 이런 가르침의 단일성은 종속관계를 갖는 여러 원천으로부터 유래한다. 성서는 하느님의 영 감으로 쓰인 것이고 사도적 전승은 교회 안에서 살아 있는 것이고 교회 자체의 정의는 성서와 사도적 전승 의 의미와 내용을 명백하게 하는 것이고 인간의 이성은 신앙으로 조명된 이성을 말한다. 처음의 두 원천은 다른 것들을 조건 지어 준다. 교회와 신학자의 이성은 前者들의 내용을 명백하게 하여준다. 성서와 전승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한 가르침을 명시할 때 여러 명칭이 사용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 본래 節은 일차적으로 마디를 가리킨다. 따라서 식물계에서는 대의 마디를 가리켜 竹節이라 하고 인체에서 는 마디를 가리켜 關節이라 한다. 라틴어에서는 관절을 articulus라 하였다. 이런 마디節을 문장에 도입하여 그 구분을 章, 節로 표기해 왔다. 그러므로 라틴어의 구분인 pars는 우리말로 部로 caput은 章으로 articulus는 節로 표기하여 왔다. 그리고 章, 節의 구분은 우리 문장의 관례이다. 이희승 저 ‘국어대사전’도 문장의 구분을 章, 節로 제시한다. 이런 구분을 더 세분하여 갈 때는 條, 項 등으로 표기한다. 章, 節의 경 우 節의 내용이 Q짧은 때는 項으로 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 우리는 여기서 성 토마스가 ‘신학대전’ 서술에서 일관되게 사용하는 방법에 대하여 약술하고자 한다. 성 토 마스는 모든 문제의 시작에서 그 문제가 내포하는 문제들의 제목을 열거한다. 그리고 각 절은 ‘다음과 같이 (이렇게) 진행된다.’로 시작된다. 그 전개방법은 다음과 같은 네 부분이다. 즉 각 절의 제목이 주어지는데 그것은 ‘… 인가?’, ‘… 이 아닌가?’의 의문문으로 제시된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贊, 反의 토론을 거치지 않 는 해결, 다시 말해 이런 토론을 거치지 않고 이루어지는 명백하고 결정적인 해결의 편견을 배제한다.
⒜ 그는 간략한 선행적 토론을 설정한다. 그것은 항상 ‘… 으로 생각한다.’로 제시된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성 토마스가 주장하려는 것과 다른 난제들을 제시한다. 이런 견해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항상 성 토마스의 학설 과 반대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성 토마스는 가끔 그런 난점들을 해명하려고 한다.
⒝ 이런 논거들 다음에 토마스는 둘째 부분을 제시한다. 그것은 ‘그러나 반론이 있다.’로 표시한다. 여기서 위에 서 말한 것과는 다른 주장이 하나 혹은 여럿이 제시된다. 이런 주장은 위 논거들에 대한 직접적인 반론은 아니며 토마스로부터 항상 인정받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그런 주장이 토마스 자신의 해결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경우 그는 가끔 그런 주장을 배척한다.
⒞ 문제 해결의 부분은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그것은 토마스가 제기된 문제에 대해 자신의 해결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나는(이상의 것에) 답하여 말하여야 한다.’로 시작된다. 혹은 또 이것에(이상에) 답하여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로 번역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해결은 각 節의 主文(본문) 전체를 형성한다. 이 부분의 전개는 획일적으로 되지 않고 문제의 다양성에 따라 또는 벌써 취급한 문제들과의 관련에서 다 양하게 이루어지며 더 풍요로운 진리가 제시된다. 그러므로 이 부분에서는 문제가 잘 드러나며 증명된다. 또 한 이 부분에서는 때로는 역사적 탐구가 이루어지기도 하고 때로는 벌써 제시된 원리들의 재음미가 이루어 지기도 한다. 그뿐만 아니라 때로는 새로운 원리들이 주어지거나 결론으로서의 텍스트가 연역되기도 한다. 사실 토마스는 여기서 그가 머리말에서 약속한 명백함과 간결함과 일관성의 양상을 잘 드러내 준다. 또한 논리적 형식에 있어서도 토마스는 여기서 다양성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또 이 부분에서 그는 스콜라 철학 후기에 많은 남용을 가져왔던 삼단논법의 경화된 형식에 구애되지 않는다. ⒟ 마지막으로 토마스는 위에서 제기된 논거들에 해답한다. 그는 해답에서 ‘그러므로 첫째에 대해서’로 시작한 다. 토마스는 위의 논거들에 대해 그것들이 토마스 자신이 해당 절에서 주장하는 학설과 배치되지 않는 한 배척하지 않는다. 즉 토마스는 자기의 학설과 배치되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는 허용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반론이 있다,’ 부분에 대해서는 드물게 논란한다. 그것은 이런 반론은 일반적으로 토마스의 학설에 호의적이 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런 논거를 토마스가 항상 자기 학설로 하는 것은 아니다.
토마스의 異論에 대한 제1문제 3 哲學的 여러 學文分野들 외에 또 다른 가르침이 있을 必要가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
① 事實 集會 3,22¹에서도 “너는 명령을 받은 일에만 전념하여라. 숨겨진 일은 너에게 필요한 것 이 아니다.”고 하는 바와 같이 사람은 理性을 넘어가는 것에 대해 試圖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理 性에 從俗되는 것들은 哲學的 여러 學文分野가 充分히 傳할 수 있다. 그러므로 哲學的 여러 學問分 野 外에 또 다른 가르침을 갖는다는 것은 不必要한 것으로 생각된다.
② 그 밖에도 가르침은 有에
㉣ 관한 것이 아니면 안 된다. 그 理由는 어떤 것도 有와 還置(轉換) 되는 眞이 아니면 알려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哲學的 여러 學文分野는 有의 모든 部分에 대 해 論하며 또한 하느님께 대해서도 論한다. 따라서 哲學者 아리스토텔레스가 ‘形而上學’ 6券에서 말 하는 바와 같이 哲學의 어떤 部分은 神學, 즉 神的學文이라 불린다. 따라서 哲學的 여러 學文分野 外에 또 다른 가르침이 成立되거나 있을 必要가 없었다.
㉤ 해답은 그가 주문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데서 제시된 원리들을 의거한다. 그런데 이런 해답은 가끔 토마스 학설을 더 명백하게 해주며 완성시킨다.
㉣ 有는 있는 것 또는 존재자로 표현된다. 문맥 여하에 따라서는 존재, 실재, 존재사물로도 쓸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철학적 용어로서 유와 있는 것, 존재자 등은 동의어로 쓰인다. 전통철학에서는 엄밀한 의미로 유와 존재가 사이에도 이래와 같은 이유로 구별을 짓는다. 유(ens)는 라틴어 동사 있다(esse)의 분사형이다. 이런 분사는 먼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 실재하는 것, 존재자를 의미한다. ‘사랑하다’ 동사의 경우 그 분사가 ‘사랑하는’, ‘사랑하고 있는’을 표시하여 현실적인 사랑의 실천을 의미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유는 먼저 존재의 실천 혹은 존재의 현실을 의미한다. 이것은 여 기 지금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분사적으로 有라 한다. 이런 이유로 유는 현실적으로 있는 것, 존재자에 해당된다. 또한 유는 ‘있는 주체’이거나 가능적인 것을 뜻한다. 위에서 말한 사랑의 실천의 경우, 사랑하는 현실은 그 행위의 주체를 전제한다. 이런 주체는 그 행위의 가능성이다. 이것은 사랑의 행위가 현실화되기도 하고 현실화되지 않기도 하여 주체로, 가능성으로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유의 개념을 명사적 有라 한다. 이런 것은 실제적인 것뿐만 아니라 가능적인 것, 본질적인 것, 즉 유 전반에 해당된다. 이런 의미로 명사적 有개념은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도 해당된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아도 존재 가능한 것, 혹은 純 가능 적인 것, 즉 純 본질적인 것에도 유개념은 해당된다. 따라서 ens를 단적으로 존재자로 표현하는 데는 선뜻 수긍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우리는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사물의 작용 혹은 활동성과 현실성 그리고 주체와 가능성 등에서 유의 개 념을 존재론적으로 파악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전통 형이상학 특히 토마스 철학은 유의 존재론적 구조인 존재와 본질 문제를 해명한다. 일반적으로 말해 분사적 유는 존재를 의미하고 본질을 公認知 혹은 함축한 다. 또 한편 명사적 유는 분사적 유보다 형이상학이 더 폭넓은 대상이 된다. 그 이유는 명사적 유는 현실적 유(존재)뿐만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순수 가능적 유까지도 포함하기 때문이다. 사실 존재할 수 있는 것이 모두 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현실유 외에 가능유도 있다. 이렇게 우리 인식 작용은 유개념의 존 재론적 분석에서 본질과 존재의 개념에 도달한다. 토마스는 유의 본질과 존재의 실재적 구별을 명쾌히 제시한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형이상학에서는 존재와 본질이 실제적으로 구별되며 대칭되는 낱말이기 때문에 존재가 표현되는 존재가 안에 본질을 내포 시켜 쓰는 것은 그리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본질을 무시하거나 전적으로 본질을 인정치 않는 경우에는 ens를 표현하는 데 있어 존재자 일변도로 쓰는 것은 타당할 것이다. 우리나라 불교계에서 쓰고 있는 四有(本有, 生有, 死有, 中有) 용어에도 유의함이 좋을 것이다. 또한 위대 한 철학자들에게는 각기 독특한 내용을 담은 철학용어들이 있듯이 가장 위대한 철학자이며 신학자인 성 토 마스에게도 그의 독특한 사상을 표현하는 용어 ens(有)의 개념이 부각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생 각된다. 용어의 부적합성 내지는 오류가 내용의 眞相을 왜곡시키거나 변질시킨 예를 우리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역력히 보아 온 터이다. 토마스의 유의 개념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본질과 존재는 토마스 철학에서 엄밀한 의미로 실재적으로 구별되지만 본질도 有無의 입장에서 볼 때 없 는 것이 아니고 어떤 의미로 있는 것이니 정확한 표현은 아닐지라도 ‘존재자’로 표현되는 것도 가능하다. ㉤ 이런 이론은 근대 합리주의에서 재연되었다. 이런 주의사상은 신학이 인간을 그 본성상 불완전한 것으로 전제하기 때문에 신학은 무용한 학설이며 생명력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학을 인간의 품위와 자율성에 해로운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신학은 고려할 여지가 없는 것이고 학문함에 있어 인간은 철학으로 충 분하다는 것이다. 철학은 최고의 지혜이며 전 우주는 철학의 판단에 종속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 이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1 4 그런데 다음과 같은 反論이 있다. 2티모 3,16에서는 “성경은 전부 하느님의 영감으로 쓰인 것으로 가르치고 꾸짖고 바로잡고 의롭 게 살도록 교육하는 데에 유익합니다.”라고 한다. 神的 靈感으로 이루어진 書冊은 人間 理性에 의해 發見된 哲學的 여러 學文分野에 從屬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哲學的 여러 學文分野 외에 神的 靈感으로 이루어진 또 다른 學文이 있는 것이 有益하다.㉥ 나는 이상의 것에 答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 한다. 人間의 救援을 위해 人間 理性으로 探究되는 哲學的 여러 學文分野 外에 하느님의 啓示를 따라 이뤄지는 어떤 가르침이 있을 必要가 있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人間은 하느님으로부터 理性의 把握을 넘어가는 어떤 目的에로 秩序지어 졌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사 64,4 “당신께서는 의로운 일을 즐겨 하는 이들을, 당신의 길을 걸으며 당신을 기억하는 이들을 받아들이셨습니다.”라고 한 말대로 이다. 그런데 人間은 自己의 意圖나 行 爲를 目的에로 秩序지어 주어야 하므로 人間은 目的을 미리 알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 人間의 救援 을 위해 人間의 理性을 넘어서는 것들이 하느님의 啓示를 통해 人間에게 알려질 必要가 있었다. 또한 人間 理性으로 探究할 수 있는 하느님에 관한 것에 대해서도 人間은 神的 啓示로 敎育될 必要가 있었다. 그 理由는 하느님에 대해 理性으로 探究되어야 할 眞理는 적은 數의 사람들에게만 可能할 것이며 또한 오랜 時間을 거쳐 많은 誤謬가 뒤섞여 人間에게 渡來할 것이겠기 때문이다. 그 런데 그런 眞理의 認識에 하느님 안에 있는 人間 救援이 달려 있다. 따라서 人間에게 救援이 더 共 通的으로 더 確實하게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神的인 것에 대해 神的 啓示로 가르쳐져야 한다. 그러므로 理性에 의해 探究되는 哲學的 여러 學文分野 外에도 啓示로 말미암은 거룩한 가르침이 있어야 했다. ➥ 그러므로 나는 첫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人間의 理性 以上의 것을 人間은 理 性으로 探究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信仰으로 하느님께로부터 啓示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 므로 聖書의 같은 곳에서 계속해 “눈동자가 없으면 빛을 보지 못한다. 아는 게 없으면 큰소리치지 마라.”(集會 3,25)라고 한다. 바로 이런 點에서 거룩한 가르침이 成立된다. ➥ 둘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認識될 수 있는 것에 대한 觀點의 差異는㉦ 다른 여 러 學文을 導入한다. 天文學者와 自然學者는 같은 結論을 論證해 낸다. 예컨대 ‘地球는 둥글다’고 한 다. 그러나 天文學者는 數學的 方法, 즉 數學的 媒辭, 다시 말해 質料에서 抽象되는 媒辭로 論證한 다.㉧ 그런데 自然學者는 質料에 대해 考察하는 媒辭로 論證한다. 그러므로 哲學的 여러 學文分野가 自然的 理性의 빛으로 認識할 수 있는 觀點에서 다루는 같은 事物들을 다른 學文이 神的 啓示의 빛으로 認識하는 觀點에서 다루어도 아무런 支障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거룩한 가르침에 속하는 神學은 哲學의 한 部分의 자리를 갖는 神學과는 그 類가 다르다. 런 주장에 대한 토마스의 답변을 볼 것이며 거룩한 가르침의 영구한 유익성을 그가 어떻게 논증하는지를 볼 것이다. ㉥ 이 반론에서 제기된 논거는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로 나타났다. 계시에서 분출된 거룩한 교설은 그리 스도교가 도래한 후 세계에서 사상과 삶을 새롭게 하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이런 그리스도교 교설은 플 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도 말할 수 없었던 새롭고 높고 풍요로운 말과 용어들을 산출하였다. 따라서 그리 스도교 교설의 유익성은 더 논란할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이런 거룩한 교설, 신학을 대학에서 추방하려는 움직임은 아주 잘못된 인식이며 크나큼 不義인 것이다. ㉦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것이 명백하다, 즉 원리의 다양성은 학문을 다양화하기에 충분하고 可知的 類의 다 양성이 원리의 다양성에 수반된다.”(분석론 후서 주해 1권) ㉧ 토마스 당시에는 천문학이 수학에 속하였다. 제1문제 5 2節; 거룩한 가르침은 學⽂인가?㉨ 거룩한 가르침은 學文이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 ① 사실 모든 學文은 自明的 原理에서 出發한다. 그런데 거룩한 가르침은 自明한 것이 아닌 信仰 條項에에서 出發한다.㉩ 2테살 3,2²에서 “모든 사람이 믿음을 가지고 있지는 않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하는 바와 같이 거룩한 가르침은 學文이 아니다. ② 그 밖에도 學文은 個別的인 것들에 관한 것이 아니다. 거룩한 가르침은 예컨대 아브라함과 이 사악과 야곱의 行蹟 등과 이와 비슷한 것들에 대해 다룬다. 그러므로 거룩한 가르침은 學文이 아니 다.그런데 다음과 같은 反論이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三位一體論’ 14券에서 “그것에 의해 아주 健全한 信仰이 생겨나고 養育되고 保護되고 全長하게 되는 그런 것만이 이 學文에 歸屬된다.”고 말한다. 이런 것은 거룩한 가르침 外 에 다른 어떤 學文에도 속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가르침은 學文이다. 나는 이상의 것에 答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 한다. 거룩한 가르침은 學文이다. 그런데 學文은 두 가지 種類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어떤 學文 은 知性의 自然的 빛으로 알게 된 여러 原理에서 出發하는데 예컨대 算術學, 幾何學 등의 學文의 경우다. 그리고 어떤 學文은 더 上位의 學文의 빛으로 알게 된 여러 原理에서 出發하는데 예컨대 光學은 幾何學에 의해 明白하게 된 여러 原理에서 出發하며 音樂의 學文은 算術學에 의해 알려진 여러 原理에서 出發하는 것과 같은 경우다. 거룩한 가르침은 이런 後者의 樣態로 學文이다. 그것은 記實 거룩한 가르침이 하느님과 福된 자들에 관한 더 높은 學文의 빛으로 알게 된 여러 原理에서 出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치 音樂의 學文이 算術學에서 주어진 여러 原理를 믿는 것과 같이 거 룩한 學文은 하느님께로부터 啓示된 여러 原理를 믿는 것이다. ➥ 그러므로 나는 첫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各 學文의 여러 原理는 自明的으로 알려진 것이거나 더 上位의 學文의 知識이 還元된다. 그런데 거룩한 가르침의 原理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後者의 것이다. ➥ 둘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거룩한 가르침에 있어서 個別的인 것들이 傳해지는 것은 그런 것들에 대해 다루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런 個別的인 것들이 導入되는 것은 때로는 倫理 學의 경우에 있어서와 같이 生活의 模範을 위한 것이고 때로는 聖書와 거룩한 가르침의 基礎인 하 느님의 啓示를 우리에게 到達케 해 준 사람들의 權威를 드러내기 위해서다. 3節; 거룩한 가르침은 單⼀한 學⽂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