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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시와 관념시와 상상
홍문표(문학평론가)
시를 쓴다는 것은 넓은 의미에서 상상을 통하여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언어행위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언어행위란 반드시 말하고자 하는 의지나 내용이 요구된다. 시인은 시를 통하여 무엇인가를 말하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내용이란 시인의 의식이며 의식이란 바로 세계에 대한 시인의 인식이거나 관심아라고 요약할 수도 있다.
그런데 세계에 대한 인식이거나 관심은 크게 두 개의 차원으로 압축된다. 하나는 물질적인 존재의 차원이요, 다른 하나는 그 존재에 대한 가치를 헤아리는 의미의 차원이다. 이를 물질적인 세계와 정신적인 세계라고도 한다. 사물의 세계와 관념의 세계라고도 한다. 인간이 의식하고 경험할 수 있는 세계란 결국 물질의 세계와 관념의 세계로 양분된다. 시인이 말하고자하는 내용도 이 두 세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따라서 물질의 세계를 상상적으로 표현할 때 이를 물질시 또는 사물시(事物詩)라 하고 관념의 세계, 즉 정신의 세계를 상상적으로 표현할 때 이를 관념시(觀念詩)라고 한다.
인간이 추구해야 할 가치 있는 진실(reality)의 세계란 어느 족이며, 그것은 사물의 존재에 대한 올바른 인식일까. 그 존재에 대한 의미의 해석일까. 이러한 물음에 대하여 시인은 그의 인생관이나 섹ㅖ관에 따라 어떤 이는 사물의 존재성에 집착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관념적인 의미의 세계를 강조하기도 한다.
사물시 물질적 존재의 세계를 추구하는 시인은 필연적을고 사물의 존재성을 사물의 이미지를 통하여 그 진실을 형상화하려고 한다. 여기서 존재성이란 이미 알려진 사물의 객관적 개념이나 인식이 아니라 시인이 발견한 새로운 사물의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 랜섬은 이러한 시를 물질시(physical poetry)라고 하였다. 물질시는 사물의 존재성만을 나타낼 뿐 일체의 관념적인 의미해석을 배제한다.
상상의 세 유형
연상적 상상 우리가 일상적 경험에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旣知의 유사성에 근거한 상상이며 창조적 상상은 시인의 비상한 직관에 의해서 전혀 유사성이 없는 사물들을 결합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 사람은 강철이다"
라는 말은 그 사람의 강인한 체력을 강철에 견주어서 표현한 연상적 상상이지만
"그 사람은 놋쇠의 항아리다"
라는 말은 분명 상상력에 의한 진술이지만 사람과 놋쇠항아리 사이에는 전혀 예상을 뛰어넘는 이질성을 느끼게 하는 창조적 상상이다.
낙엽은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페
포화에 이지러진
도룬시의 가을을 생각케 한다
길은 한 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일광의 폭포속으로 사라지고
조그만 담뱌연기를 내어뿜으며
새로 두 시의 급행열차가 들을 달린다
-김광균<추일서정>에서
인용한 시를 보면 시인은 낙엽, 길, 급행열차라는 소재들을 선택하여 가을의 서정을 그리고 있다. 그는 먼저 낙엽이라는 대상을 보면서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나, 포화에 이지러진 도룬시의 가을 하늘을 연상한다. 물론 낙엽을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로 대치한 상상은 얼핏보아 생소하고 이질적인 거리감을 느끼게 하여 지나치게 현현학적이다. 그러나 지천으로 흩날리는 낙엽이나 이미 돈으로서의 기능을 잃은 망명정부의 지폐는 무가치하다는데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길을 '구겨진 넥타이'로 표현한 것은 우리에게 친숙성을 줄뿐만 아니라 꾸불꾸불한 길을 눈에 선하게보는 듯 하여 연상적 상상의 묘미를 느끼게 한다. 연기를 내뿜으며 들을 달리는 급행열차의 모습을 담배연기로 연상한 것도 흥미로운데 이들은 모두 본래의 소재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하여 과거에 경험했던 유사한 사사물들을 연상적인 결합으로 동일시한 것이다.
이 창가에서
들어요
둘이서만 만난 오붓한 자리
빵에는 쨈을 바르지요
오 아니예요
우리가 둘이서 빵에 바르는
이 쨈은 째쨈이 아니라 과수원이예요
우리는 과수원 하나씩을
빵에 얹어서 먹어요
-전봉건<과수원과 꿈과 바다 이야기>에서
이 시는 우리가 아침에 대하는 식탁의 일상에서 빵에 바르는 쨈을 소재로 하여 쨈의 원료인 과일을 연상하고 과일에서 다시 과수원을 연상하면서 마침내는 빵에다 쨈을 바르는 것이 아니라 과수원 하나씩을 얹어 먹는다는 식사법을 연상하기에 이른 것이다. 쨈과 과일과 과수원의 관게는 가장 밀접하게 인과성을 지닌 사물이며 우리의 경험 속에서 쉽게 재생시킬 수 있는 친근한 이미지다. 이러한 이미지의 재생은 원관념이 되는 째쨈의 의미나 과수원의 의미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다만 쨈의 존재를 그와 관계가 깊은 과수원으로 구체화시켰을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상력이 얼마나 삶을 풍요롭게 하는지를 이 시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일상적인 쨈에서 과수원을 연상하고 빵에 과수를 얹어 먹는 상상은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 바로 시적 상상력의 즐거움이다. 이러한 시들의 경우 시인의 상상은 과거에 경험한 이미지들을 재생하였거나 유사한 이미지들을 연상하여 결합한 것이라고 하겠다.
잎이 지면
겨울 나무들은 이내
악기가 된다
하늘에 걸린 음표에 맞춰
바람의 손끝에서 우는
악기
나누만은 아니다
계곡의 물소리를 들어보아라.
얼음장 밑으로 공명하면서
바위에 부딪혀 흐르는 물도
음악이다
윗가지에는 고음이
아랫가지에서는 저음이 울리는 나무는
현악기,
오늘처럼
첮니에 흰 눈이 하얗게 내려
그리운 이의 모습이 지지워진 날은
창가에 기대어 음악을
듣자.
감동은 눈으로 오기보다
귀로 오는 것.
겨울은 청각으로 떠오르는 무지개다
-오세영<음악>
이 시도 겨울의 차가운 풍경들을 오히려 음악으로 연상하고 있다. 나무들의 윗가지는 고음이 아랫가지는 저음이 울리는 현악기로 큰바위는 강음이 작은 바위는 저음이 울리는 관악기로 연상하였다. 하늘의 바람소리, 계곡의 물소리들을 음악으로 연상하였다. 그리하여 겨울을 청각으로 느끼고 아름다운 음악으로 감상하는 시적 감동에 잠기는 것이다.
창조적 상상 그러나 다음의 경우는 사물에 대한 시인의 상상이 매우 비약하고 있음을 본다.
내가
돌이 되면
돌은
연꽃이 되고
연꽃은
호수가 되고
-서정주, 「내가 돌이 되면」
인용한 시의 상상은 나와 돌과 연꽃과 호수가 하나로 융합되는 비상한 관계다. 나와 돌의 유사성을 굳이 말한다면 ‘서로가 침묵하는 조건이라든지 비정한 의지를 대신한다.’라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돌과 연꽃에서 유사성을 찾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연꽃과 호수의 관계도 이질적인데 연꽃이 호수에서 핀다는 점은 관련성이다. 따라서 이 시는 유사성에 의한 연상보다 시인 자신의 주관적인 창조성이 강하다. 비유사성의 결합인 것이다. 그것은 과거 경험을 그대로 재생한 것이 아니라 새롭게 생산한 것이며 독특하게 창조한 것이다. 앞서 전봉건의 시에서 쨈과 과수원과의 관계는 상당부분 공통점을 갖고 있었지만 서정주의 돌과 연꽃의 관계는 그러한 공통성이 적다는 말이다. 이때 나와 돌과 연꽃의 관계는 재생적 상상이나 연상적 상상에서처럼 의미가 확충되는 것이 아니라 전혀 이질적인 것으로 창조된다.
그런데 앞서 인용한 시들은 모두 물질적 소재와 물질적 이미지의 상징적 연결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김광균의 <추일서정>에서 낙엽이 지폐로 되거나 전봉건의 작품에서 쨈이 과수원으로 되거나 돌이 연꽃으로 되는 일은 모두가 물질과 물질의 이미지를 1:1 단순 대비한 유사비유사성의 관계다. 그러나 다음의 시에서는 물질과 물질의 이미지뿐만 아니라 관념과 이미지가 중충으로 혼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존재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너는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
눈시울에 젖어드는 이 무명의 어둠에
추억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나는 한밤내 운다.
나의 울음은 차츰 아닌 밤 돌개바람이 되아
탑을 흐들다가
돌에까지 스미면 금이 될 것이다.
....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여.
-김춘수, 「꽃을 위한 서시」
인용한 시에서 "나는 위험한 짐승이다."라는 상상도 매우 이질적인 창조적 상상이다. "너는 미지의 까마득한 어둠"이라는 부분도 그렇다. '존재의 흔들리는 가지 끝'이란 구절에서는 관념을 사물화한 방식이다. '추억의 한 접시불'도 관념의 사물화다..나의 울음이 돌개바람이 되었다가 금이 되는 과정은 상상의 중층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꽃에 대한 화자의 상상은 미지의 까마득한 어둠, 추억의 한 접시 불, 탑, 신부 등으로 변형되면서 새로운 존재성을 드러낸다.
내 마음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 섣달 날으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서정주 ,「冬天」
이 시도 고도로 상상의 비약을 구사한 작품이다. 이 시의 대표적인 소재는 내 마음 속, 상상 속에 있는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이다. 우리 님이라는 집단적 사고도 특이하지만 그러한 님의 눈썹을 천 일이나 되는 긴 밤의 꿈으로 씻었다는 상상이다. 눈썹이라는 물질 이미지를 일 천 밤의 꿈이라는 관념 이미지로 씻었다는 말은 현실적 논리적 사고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경지다. 그리고는 하늘이라는 무한한 공간에 그 눈썹을 심었더니 동지섣달에도 견디는 매서운 새가 그러한 사연을 알고 있는 눈썹을 비끼어 간다는 매우 공상적인 설화다. 여기서 눈썹을 초승달이라고 지적하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 님의 고운 눈썹으로 상상하는 경우 결코 해석은 단순하지 않다. 거기다가 천 일이나 긴 밤의 꿈으로 씻었다는 표현이나 하늘에 심었다는 상상은 일반적으로 씨앗을 논밭에 심는 것이라는 상식을 훨씬 뛰어넘는 우주적 상상력의 방식이다. 마지막에 동지섣달에도 견디는 새가 그걸 알고 비끼어 간다는 말에는 어떤 절대적 가치에 대한 외경을 느낄 만큼 엄숙하기도 한데 이는 초승달에 대한 단순한 감각적 이미지가 아니라 초승달의 이면에 숨어 있는 비법이나 섭리가 고도의 상징적 수법으로 처리된 창조적 상상의 예라고 할 수 있다.
해석적 상상 그러나 상상력이 과거 체험의 이미지들을 재구성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결코 정신 능력의 종합적인 기능이며 유기적인 활동이지 별개의 독립된 기능이라고 단언할 수 없는 일이다. 인간의 정신 활동이란 이성적인 사상이나 감성적인 정서 사 상상력과 더불어 유기적으로 작용하는 것이며, 그러기에 비록 시인이 상상적인 시를 쓰는 경우라고 할지라도 정서와 사상이 도움을 받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사물의 이미지를 마음속에 그릴 때 이미 그 이미지는 시인의 정서와 사상이 반영된다. 또한, 이미지를 결합하여 어떤 통일체를 구성할 때에도 시인의 정서와 사상이 개입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사물에 직면하게 될 때 먼저 객관적으로 그것을 인식하게 되고, 연상작용을 통하여 인식을 확대할 뿐만 아니라, 나와 인생과 세계와 어떤 관계,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이처럼 상상의 과정에서 인생에 대한 보다 깊은 가치 인식이나 사상을 조화시켜 보는 경우, 이러한 상상을 윈체스터(C.T Winchester)는 해석적 상상(interpretative imagination)이라고 하였다.
당신의 불꽃 속으로
나의 눈송이가
뛰어듭니다
당신의 불꽃은
나의 눈송이를
자취도 없이 품어줍니다 -김현승, 「절대 신앙」에서
인용한 시는 우선 '당신의 불꽃'과 '나의 눈송이'로 대비된다. 당신과 나, 불꽃과 눈송이는 단순한 사물 이미지가 아니다. 당신은 신이나 절대적 존재, 나는 인간을 대신하는 이미지일 수가 있다. 불꽃은 신의 은총, 절대적 힘이고 눈송이는 보잘것없는 찰나적 존재인 눈송이가 감히 불꽃에 뛰어드는 도전을 한다. 그러나 당신은 그 도전조차 자취도 없이 품어주는 절대적 사랑을 행사한다. 여기서 불꽃이 눈송이를 자취도 없이 품어준다는 표현은 시인의 독특한 해석이다. 불꽃과 눈송이를 뛰어듦과 품어줌의 관계로 바라본 이러한 상상이 바로 신과 인간에 대한 시인의 독특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잎 위에 흘러내리는 햇빛과 입 맞추며
나무는 그의 힘을 꿈꾸고
그 위에 내리는 비와 뺨 비비며 나무는
소리 내어 그의 피를 꿈꾸고
가지에 부는 바람의 푸른 힘으로 나무는
자기의 生이 흔들리는 소리를 듣는다
-정현종, 「사물의 꿈1-나무의 꿈」
이 시의 중심 소재는 나무다. 시인은 나무의 다양한 현상을 섬세하게 관찰한다. 우선 나뭇잎 위에 흘러내리는 햇빛과 입 맞추는 모습을 관찰한다. 물론 흘러내린다나 입 맞춘다는 표현은 상상이다. 그런데 햇빛과 입맞춤을 통하여 그의 힘을 꿈꾼다는 표현은 시인의 주관적 해석이다. 나무가 비와 뺨 비비는 것은 연상적 상상이다. 그런데 소리 내어 그의 피를 꿈꾼다는 것은 역시 해석적 상상이다. 바람의 푸른 힘으로 자기의 생이 흔들리는 소리를 듣는다는 것도 해석적 상상이다. 물론 연상적 상상이나 창조적 상상에도 일정한 해석적 요소가 있다. 그러나 해석적 상상은 사물을 유기성이나 이질성으로 형상화하기보다 사물의 의미를 주관적으로 해석하고 새롭게 명명하는 것이다. 이 시의 의미는 나무가 햇빛과 비와 바람을 통하여 존재한다는 것이며 이는 모든 사물의 삶이 서로 어울려서만 가능하다는 공생의 이치를 말하고 있다.
사물시와 관념시와 상상
시를 쓴다는 것은 넓은 의미에서 상상을 통하여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언어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언어 행위란 반드시 말하고자 하는 의지나 내용이 요구된다. 시인은 시를 통하여 무엇인가를 말하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내용이란 시인의 의식이며 의식이란 바로 세계에 대한 시인의 인식이거나 관심이라고 요약할 수도 있다.
그런데 세계에 대한 인식이거나 관심은 크게 두 개의 차원으로 압축된다. 하나는 물질적인 존재의 차원이요, 다른 하나는 그 존재에 대한 가치를 헤아리는 의미의 차원이다. 이를 물질적인 세계와 정신적인 세계라고도 한다. 사물의 세계와 관념의 세계라고도 한다. 인간이 의식하고 경험할 수 있는 세계란 결국 물질의 세계와 관념의 세계로 양분된다.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도 이 두 세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따라서 물질의 세계를 상상적으로 표현할 때 이를 물질시, 또는 사물시(事物詩)라 하고 관념의 세계, 즉 정신의 세계를 상상적으로 표현할 때 이를 관념시(觀念詩)라고 한다.
인간이 추구해야 할 가치 있는 진실(reality)의 세계란 어느 쪽이며, 그것은 사물의 존재에 대한 올바른 인식일까. 그 존재에 대한 의미의 해석일까. 이러한 물음에 대하여 시인은 그의 인생관이나 세계관에 따라 어떤 이는 사물의 존재성에 집착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관념적인 의미의 세계를 강조하기도 한다.
사물시 물질적 존재의 세계를 추구하는 시인은 필연적으로 사물의 존재성을 사물의 이미지를 통하여 그 진실을 형상화하려고 한다. 여기서 존재성이란 이미 알려진 사물의 객관적 개념이나 인식이 아니라 시인이 발견한 새로운 사물의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 랜섬은 이러한 시를 물질시(physical poetry)라고 하였다. 물질시는 사물의 존재성만을 나타낼 뿐 일체의 관념적인 의미해석을 배제한다.
피아노에 앉은
여자의 두 손에서는
끊임없이
열 마리씩
스무 마리씩
신선한 물고기가
튀는 빛의 꼬리를 무고
쏟아진다.
나는 바다로 가서
가장 신나게 시퍼런
파도의 칼날 하나를
집어 들었다.
-전봉건, 「피아노」
이 시는 피아노 치는 상태를 가장 객관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는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정신적 의미를 찾아볼 수가 없다. 피아노 치는 손가락의 모습을 열 마리씩 스무 마리씩 신선한 물고기가 헤엄치는 모습으로 이미지화했을 뿐이다. 말하고자하는 시적 대상도 손가락이라는 사물이고 이를 연상적으로 이미지화한 것도 물고기라는 사물이다. 다만 피아노에서 울리는 음악적 감각을 파도의 칼날로 표현했는데 이것도 역시 의미나 관념이 아니라 물질이다. 역사나 정의, 애국심이나 어떤 사상같은 것과는 전혀 무관하다. 인생이나 사회에 대한 의미나 사물의 가치에 meo한 해석이 전혀 깃들어 있지 않고 오직 사물의 미적인 이미지만 구사된 것이다. 이러한 시를 순수시, 사물시라 하고 이러한 상상을 순수상상이라고 한다. 또한, 물질 이미지만을 동원하였기에 즉물시(卽物詩)라고도 한다.
많은
태양이
쬐그만 공처럼
바다 끝에서 튀어 오른다.
일제히 쏘아 올린 총알이다.
짐승처럼
우르르 몰려왔다가는
몰려간다.
능금처럼 익은 바다가 부굴부글 끓는다.
일제 사격
벌집처럼 총총히 뚫린 구멍 속으로
태양이 하나하나 박힌다.
바다는 寶石箱子다
-문덕수 「새벽 바다」
인용한 시도 태양이 솟아오르는 모습을 사물 이미지를 통하여 그리고 있다. 태양은 공으로, 빛은 총알로, 파도는 짐승으로, 바다빛은 능금으로 그리고 바다는 보석상자라는 사물들을 동원하여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소재(대상) | 상상(이미지 |
태양(사물) 햇빛(사물) 파도(사물 바다(사물) 새벽바다(사물 | 공(사물) 총알(사물) 짐승(사물) 능금(사물) 보석상자(사물 |
시인이 현실의 정치나 역사나 인생의 문제를 배제할 때 역사의식의 결여라든지 현실도피라는 비난을 받기도 하지만 이들 시인이 추구하는 리얼리티는 오히려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는 것이 참된 시학이라는 입장이기도 하다. 그것은 마치 화가가 캔버스에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면 그만이지 거기에 거창한 역사와 철학이 있어야 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과 같다. 왜냐하면, 역사는 역사가가, 철학은 철학자가 할 일이기 때문이다.
도마 위에서
번득이는 비늘을 털고
몇 토막의 斷罪가 있은 다음
숯불에 누워
香을 사르는 물고기
고기는 젓가락 끝에서
맛나는 分身이지만
지도 위에서는
자욱한 硝煙 속
총칼에 찝히는 領土가 된다.
-김광림 「석쇠」에서
이 시는 표면적으로는 상당한 관념적 언어들이 있어서 관념시가 아닌가 오해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자세히 보면 역시 순수한 물질적 이미지로 구성된 시다. 여기서 단죄란 고기를 토막 내는 행위, 향은 냄새, 분신은 살점, 지도는 석쇠, 초연은 연기, 총칼은 젓가락, 영토는 물고기의 이미지이다.
관념시 한편 시인은 사물의 미학적 세계만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의 세계를 이미지를 통하여 표현하는 경우도 있다. 의미의 세계는 시를 포함한 모든 문학 장르가 문자를 그 수단으로 한다는 점과 문자는 바로 의미의 기호에 불과하다는 사실 때문에 필연적으로 문학은 의미와 부딪히게 된다. 그러나 문자를 의미 전달의 수단으로만 생각한다면 이는 철학이나 학문의 문장과 다를 바가 없다. 따라서 시는 의미의 세계를 전달하는 문자를 사용하고는 있지만, 그 의미를 가시적이고 감각적인 이미지의 문자로 표현하는 것이다. 의미의 세계, 관념의 세계, 추상적인 세계를 이렇게 이미지로 표현하는 것이 시의 본질이며 시의 예술성이기도 하다.
의미의 세계를 논리적으로나 추상적으로 서술한다면 그것은 과학이거나 철학이거나 학문이다.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논리화나 추상화는 사물의 구체적인 리얼리티를 드러내지 못한다. 따라서 사물의 실존적 리얼리티를 드러내는 일은 사물이든 관념이든 그것을 구체적인 사물이미지로 표현하는 방식이 아니고는 불가능하다. 여기에 사물이미지를 절대조건으로 하는 이유가 있다.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 깊고,
불타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변영로 「論介」에서
이 시는 임진왜란 때 진주 남강에서 적장을 끌어안고 순절한 기생 논개의 우국충절을 추모한 시다. 이 시는 양귀비나 강낭콩이라는 사물이나 강물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논개의 뜨거운 조국애에 대한 사랑과 무서운 절개를 나타낸 것이다. 이 시의 중심은 거룩한 분노, 불붙는 정열, 붉은 마음이다. 그것은 바로 주인공의 강한 의지와 신념과 애정이다. 따라서 그것은 물질이 아니라 우리의 감정이며 이성이며 관념이다. 더구나 이러한 관념들이 종교나 사랑이나 죽음이라는 용어들로 대비하면서 더욱 논개의 의미를 강하게 전달하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관념을 관념으로 표현했고, ‘붉은 마음’만 ‘양귀비꽃’이란 사물 이미지로 표현했다. 따라서 무거운 느낌이다.
소재(대상) | 상상(이미지) |
거룩한 분노(관념) 불붙는 정열(관념) 붉은 마음(관념) | 종교(관념) 사랑(관념) 양귀비꽃(사물) |
사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려는 사물시와 달리 이처럼 시인 자신의 의지나 관념을 강하게 전달하려는 시를 관념시(platonic poetry)라고 한다.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哀憐에 물들지 않고
희로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년 非情의 緘默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遠雷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유치환「바위」
인용한 시도 강한 의지를 표명한 관념시다. 여기에 등장하는 바위는 허무를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를 대신하는 이미지일 뿐, 화자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가 되는 죽음이라는 관념적 세계다. 그런데 죽는다면 바위와 같은 존재가 되겠다는 내용이다. 이 시에서 화자의 관심은 사물이나 물질의 구체적인 존재성에 대한 해명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적인 생각을 사물화하는 관념의 사물화 작업이다. 더구나 이 시에서 놀라운 점은 죽음에 대한 허무나 불안이라는 인간의 한계성을 초극하고자 하는 철학적 사고가 ‘바위’라는 물질 이미지로 전이되었을 뿐만 아니라 위 중에서도 애련에 물들지 않고, 희로에 움직이지 않고, 억년 비정의 함묵 속에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이나 원뢰가 되거나, 두 족으로 깨뜨려도 소리내지 않는 그러한 상상의 바위가 되겠다는 표현은 바로 시적 상상력의 깊이를 한층 더해 주는 작품이 아닐 수 없다.
껍데기는 가라.
四月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東學年의 곰나루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中立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漢拏에서 白頭까지
향기로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인용한 시의 핵심은 제목에서 보는 바와 같이 ‘껍데기는 가라’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껍데기는 과일의 껍질과 같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이고 역사적이며 민족적인 의미를 상징하고 있다. 우리의 것, 우리 민중적인 것, 우리의 강토, 이런 것을 알맹이로 보고 순수한 우리 것이 아닌 정치, 경제, 문화, 사상 등 일체의 외래적이고 외세적인 것들은 물러가라는 정치적 관념의 시다.
사물시가 이미지를 통해 단지 보여주거나 제시해 주는 것임에 반하여 관념시는 관념의 내용을 전달하려는데 더 큰 비중을 두는 경우가 있다. 여기서 관념의 내용이란 철학이거나 사상이거나 종교일 수도 있고 지나친 것은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선전물이 될 수도 있다. 특히 선전이나 목적의식을 가질 때 독자에 대하여 어떤 관념을 불가피하게 강요하게 된다. 절제가 없는 감정이나 의지를 동반한 관념시가 예술성이나 이미지보다 관념 자체를 더 중시하는 태도는 관념시의 특징인 同視에 단점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사물 이미지를 순수하게 드러내는 사물시는 관념을 가능한 대로 배제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미지 자체의 감성을 중시하고, 지성에 의하여 감정과 의지를 규제하며, 독자에게 어떤 관념이나 사상을 강요하지 않는 점은 사물시의 장점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인간에 대한 관념으로 귀착되어야 한다. 인생론적 입장에서 순수 사물시를 기교주의라고 비판하는 경우도 있다. 이에 비하여 의미를 중시하는 관념시는 예술성이 상실된 비문학적 목적시로 오해되는 경우가 있다. 결국, 시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물질이냐, 관념이냐 하는 그 내용보다 그것이 얼마나 상상력과 결합된 예술작품인가에 있다.
형이상의 시 그렇다면 이러한 사물시와 관념시의 양극을 벗어나 이들이 갖는 장점을 보다 발전적으로 통합시키는 시의 방법은 없을까. 그것은 사물과 관념의 타협이나 절충이 아니라 완전히 양자를 초극하는 놀랍고도 신선한 시적 세계의 창조라는 의미에서 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랜섬은 형이상의 시 (metaphysical poetry)의 정당성을 제시한다.
形而上이라는 말은 形而下라는 말의 반대어다. 형식을 떠난 무형적인 것을 의미하기도 하고, 시간 및 공간 속에서 경험적 현상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이성적 사유나 독특한 직관에 의해서만 인식될 수 있는 초자연적, 초월적인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우리의 감각적인 눈으로는 볼 수 없는 神이나 절대자의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다. 신이나 절대자나 보편성이나 영원성의 존재 원리를 탐구하는 학문을 형이상학이라고도 한다. 형이상 시는 일차적으로 형이상성, 곧 신이나 절대자의 존재 인식과 관련이 있다.
말하자면 지성적인 것이 아니라 천상적인 것, 현실적이거나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 부분적인 것이 아니라, 총체적인 것이다. 그러면서도 관념과 구별되는 것은 바로 천상적인 것, 즉 우주적 진실이나 영원성이나 신의 절대성이라는 경건한 세계로 승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역사적으로 볼 때 단테의 「신곡」이나 루크레티우스의 「만상의 본질에 대하여」 등을 들 수 있겠다. 17세기 영국의 던(J.Donne)이나 현대의 엘리어트(T.S.Eliot) 등의 작품을 지적할 수가 있겠다.
그리어슨(H.Cricrson)은 우주나 삶에 대한 여러 관념을 시인의 정신과 상상으로 해석하고 이를 통일하고 명료하게 하여 기쁨과 슬픔 등 개인의 의식을 강화하고 그 시인 자신의 영혼의 편력 속에 우주적 운명이라는 드라마를 간결하게 요약해 보이는 것이라고 하였다. 말하자면 상상력에 의하여 형이상적 세계 인식을 시적 형식으로 표현한 시라고 하겠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할 점은 형이상 시는 내용만이 아니라 그 표현 방법에 있어서 놀라운 상상적 이미지를 동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점에 대하여 엘리어트는 사상의 감각적 파악이라는 말로 요약하고 있다. 그는 사상으로 치우친 명상시와 감정으로 치우친 19세기 낭만주의 시, 다시 말하면 감수성의 분열을 보이는 시를 반대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주장한 것이 사물을 총체적으로(as a whole) 보는 힘, 곧 사상과 감각이 통합된 감수성을 강조한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서
당신이나 내가 사라져 버리면
서로 가진 비밀처럼
둘은 둘이겠지만 하나가 되겠지요
이렇게 말하고 치켜드는 그의 얼굴
그 아름다움을 빛내는 두 눈이
땅에 내렸다가 다시 제자리로 가고자
하늘을 바라보는 두 별과도 같았다
-허버트 「사랑은 영속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관한 노래」에서
이 시는 제목이나 내용에서 보듯이 사랑의 영원성에 대한 노래다. 그처럼 흔한 사랑의 내용이지만 이 시에서는 사랑의 관계가 통속적으로 해석되지 않고 무한한 우주 속에서 경건하고 거룩한 모습으로 신비화되고 있는 형이상학적 인식임에도 불구하고 상상력이 놀랍게도 구체화되고 있다. “빛내는 E 눈이/땅에 내렸다가 다시 제자리로 가고가/하늘을 바라보는 두 별과도 같았다”라는 대목을 보면 사랑스런 눈빛을 땅에 내렸다가 제자리로 가는 하늘의 두 별과 대비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상이한 두 사물의 기발한 비유를 寄象的 비유(conceit)라고 하는데 이는 형이상 시가 구사하는 상상력의 특징이기도 하다.
네 마음은
네 안에 있다 하지만,
나는 내 마음 안에
있다.
마치 달팽이가 제 작은 집을
사랑하듯….
나의 피를 뿌리고
살을 찢던
네 이빨과 네 칼날도
내 마음의 아늑한 품속에선
어린 아이와 같이 잠들고 만다.
마치 진흙 속에 묻히는
납덩이와도 같이.
내 작은 손바닥처럼
내 조그만 마음은
이 세상 모든 영광을 가리울 수도 있고,
누룩을 넣은 빵과 같이
아, 때로는 향기롭게 스스로 부풀기도 한다.
동양의 지혜로 말하면
가장 큰 것은 없는 것이다.
내 마음 그 가없음을
내 그릇에 알맞게 줄여 넣은 듯,
바래움의 입김을 불면 한없이 커진다.
그러나 나의 지혜는 또한
풍선처럼 터지지 않을 때까지만 그것을….
네 마음은
네 안에 있으나
나는 내 마음 안에 살고 있다.
꽃의 아름다움은 제 가시와 살보다
제 뿌리 안에 더 풍성하게 피어나듯이….
-김현승 「마음의 집」
이 시를 보면 그리스도의 거대한 사랑과 절대적인 존재성을 드러내는 ‘형이상적 신앙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러한 종교적 관념들이 구체적인 상상의 이미지로 잘 대비되고 있다.
첫째 연을 보면 내 마음은 내 안에 있지만 나는 내 마음 안에 있다는 관념적 인식이 '달팽이가 제 작은 집을 사랑하듯'이란 이미지로 컨시트 되었다.
둘째 연은 피를 뿌리고 살을 찢긴 증오와 무력의 이빨과 칼날도 내 마음속에서는 어린이와 같이 용해되는데 그것을 '진흙 속의 납덩이'로 비유하고 있다. 셋째 연에서는 손바닥같이 조그만 마음이지만 세상의 모든 영광을 가리울 만한 능력이 있으며 누룩을 넣은 빵처럼 확대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넷째 연은 무한한 마음이지만 풍선처럼 한계를 알고 절제할 수 있다는 내용이며 마지막 연은 마음의 거처를 다시 꽃과 뿌리의 관계로 대비하고 있다.
이처럼 연마다 형이상학적인 표현이 대비되는 서술방식을 중층묘사(multiple description)라고도 한다. 추상적인 내용과 상상적인 이미지를 교차시켜 가면서 어떠한 사물을 표현한 시적 방법이다.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상상이란 과거에 체험했던 사물의 이미지를 재구성하는 것이지만 그것을 시라는 언어형식을 통하여 구체화하는 경우, 사물의 존재성을 이미지로 드러내기 위한 사물시의 방법, 일상적인 관념들을 이미지와 결합하여 전달하는 방법, 그리고 마지막엔 관념과 사물의 본질을 이미지와 결합하여, 더 이상적인 시적 표현을 시도하려는 한 측면일 뿐이며 그것은 독자적인 영역이 아니라 정서와 사상과 행동이 유기적으로 활동하는 삶의 총체 속에서 지배된다는 사실을 감안해야 한다. 또 형이상 시는 랜섬이 특별히 분류한 것이지만, 넓은 의미로 볼 때 관념시의 한 유형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시란 사물과 관념에 상상적인 이미지를 결합한 것이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상상의 방법을 달리 사회학적으로 분류하면 이미지, 비유, 상징, 신화 등으로 확장시킬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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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초보자들 여기에 배울것이 이렇게 많은데~~츠암나
좋은 시에 감성이 부풀어 올라 배가 부릅니다.
위에 시처럼 감성을 건드리는 시를 써야 하는데, 시는 제자리걸음만 하는데 나이만 속절없이 지나갑니다.
우 교수님 잘 읽었습니다.
도움이 되는 글에 心醉했다 갑니다.
항상 健康하시고 健筆하시기 바라며 幸福한 나날 이어가시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