梅 軒 精 舍 글 ; 동필
매헌정사는 蔚州郡 熊村面 谷泉里 웅촌초등학교 교문에서 지방도로를 따라 서남쪽으로 십리쯤 가면 고련리 연답 마을이 있다. 마을 입구의 언덕에서 동향으로 훤히 보이는 정사가 忠肅公의 6세손인 謙益(겸익) 公을 追慕(추모)하기위한 精舍다.
뒤 산은 香爐(향로)같이 생겼다하여 향로봉이라고도 하며, 연꽃이 반쯤 핀 모양이라 하여 蓮花峰(연화봉) 이라고도 하는 산 아래에, 앞은 확 트인 넓은 논 자락이 펼쳐있고, 멀리는 붓끝 같이 생긴 筆峰(필봉)이 우뚝하여 언뜩 보아도 精氣(정기)가 가득한 곳인 것 같다.
이곳은 性智大師(국풍)가 점지했다는 명당으로 공의 묘소가 있으며, 묘소아래 공의 사후 360년 뒤 2004년 甲申 11월 후손의 정성으로 復元(복원)된 매헌정사가 있다. 30평의 넓은 정사와 관리사인 雲孤齋(운고재)와 대문인 仁義門(인의문)으로 우람한 자태의 韓屋(한옥)이 자리하고 있다.
「公의 字는 子裒(자부)요, 호는 梅軒이다. 선조8년 웅상읍 주남에서 태어났으며 5세때 父喪을 당했고, 壬亂을 당하자 重患(중환)의 어머니를 엎고 원적산으로 避身(피신)하여. 평소의 집안에서처럼 병간호를 至極(지극)精誠(정성)하였으며 뒷날 그곳을 이 효자곡이라 하였다.
하루는 伐木(벌목) 길에 倭兵(왜병)과 싸워 큰 칼을 빼앗아 종가에 보관해왔으나 현재는 전하지 않고 있다. 이에 나라에서는 軍資監(군자감) 奉事(봉사)로 除授(제수)하였고, 贈職(증직)으로는 漢城府(한성부) 右尹(우윤)이다.
백형 謙受(정주 판관)의 주선으로 醴泉(예천)의 林觀海 門下生으로 3년간 9경을 讀破(독파)한 修學期(수학기)는 공의 人品(인품)으로 녹아내렸다.
또한 매헌정사는 戊申譜(무신보)의 산실이자 학성이씨 5파 系行(계행)이 확정된 역사적인 聖所(성소)이다.(復元記文에서) 」
18세에 임란이 일어나자 伯兄과 義兵으로 戰鬪(전투)에 참가하여 큰 공을 세웟셨고, 나라에 忠誠하고 부모 孝誠을 다하는 충효정신을 몸소 실천 하셨다.
晩年(만년)에 落鄕(낙향)하여 매헌정사를 짓고 독서와 시를 짓고 꽃을 키우며 소일하시다, 향년 71세로 운명하였다. 유고는 전하지 않으며 家狀(가장)과 行狀(행장)으로 公(공)의 업적과 행적을 잘 알 수 있다.
아들은 6형제를 두었으며 후손은 부산, 울산, 웅상 등 여러 곳에 3천 여명으로 번성하였다.
후손으로 공의 6세손 養吾(양오-반계)공은 문학의 큰 泰斗되셨고, 6세손 覲吾(근오)공은 대과급제 司憲府(사헌부) 持平(지평) 벼슬을 하셨고, 10세손 錫瑨(석진)공도 大科及第(대과급제)하셨고, 文耈(문구 3세-성균 생원) 璋燦(장찬)(8세손- 의금부 도사) 奎龍(규용)(9세손-진사), 奎魯(규노 9세손-진사)등 많은 선비와 학자와 문집이 있는 후손이 많이 배출되었으며,
宗孫(종손) 竟煥(경환)는 공직에서 퇴임하여 부산에서 오가며 관리에 전념하고 있다. 현존 후손으로는 厚洛. 東煥. 樹傳. 官洙. 永煥 (육군 소장) 등 많은 후손이 있다.
끝으로 매헌정사 복원을 기리는(칭송) 필자의 졸작을 현판에 새긴 것을 옮겨 본다.
梅 軒 精 舍 頌
엎드려 생각하옵니다.
宣祖 朝 어려운 時節 呱呱聲을 울리셨네.
讀書精進과 勤儉修行으로 愼獨하시고,
仁義를 行함에 厚하고 勇氣있게 하시어,
孝行으로 우뚝 서고 忠節로 報國하셨네 .
겨레 위한 衷情으로 義兵이 되시어,
七年 壬亂 奮鬪하여 民族에 功 세우시고.
여섯 아들 길러내니 나라 棟樑 되셨네.
晩年에는 精舍지어 後學을 가르치시니,
溫厚하고 高潔한 性品 子子孫孫 기리리라.
香爐峰 山麓 아래 性智大師 占地한 곳.
萬年 幽宅 定하시어 後孫에게 蔭德주시네,
四方에서 氣 모이고 筆峰이 우뚝 서니,
大科及第 두 子孫에 紅牌 白牌 累帳이요.
文武로 代를 이어 忠孝 傳家 이루었네.
仙하신 지 三百六拾 星霜 이제야 精誠 모아,
陽地 바르고 瑞氣어린 幽宅아래,
後孫의 爲先으로 梅軒精舍 세웠습니다.
좋은 날을 擇하여 落成을 告하오니,
尊靈께서는 洋洋 歆格하옵소서.
2004年 甲申 十一月 十七日
十二世孫 東 苾 삼가 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