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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竹語辭
1.
틀에 박힌 예술의 유혹을 뿌리치고 외롭더라도 나는 나의 길을 가고자 합니다. 기교보다는 따뜻한 손놀림이 훨씬 더 사람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진리가 그러하듯 거침없는 붓놀림만이 나를 자유롭게 해줍니다. 바로 자유와 진리는 한 원천이기에.
2.
표현하기 힘든 충만감에 나 자신을 잊고 있는 순간 나는 이미 혼자가 아닙니다. 나에게 화폭 하나하나는 마치 땅을 일궈 가을걷이 하는 터전입니다.
3.
선(線)은 죽음을 가로지르고 색채는 천상의 향연을 펼칩니다.
4.
하늘나라는 단순하지만 내가 살고 있는 이 지상은 복잡합니다. 더 큰 꿈을 꾸어야 합니다. 후라 안젤리코의 환희에 넘치는 색조들을 공간에 담기 위해 시간을 더 받쳐야겠습니다. 프로방스의 햇살, 남불 하늘이 나를 부릅니다.
5.
눈부신 빛은 격렬한 빛이 아닙니다. 며칠 동안 강렬한 빛에 시달렸습니다. 8월 10일경 접어들어 격렬했던 빛은 부드럽게 빛나기 시작합니다. 이 빛에서 얻어낸 작업이 하도 만족스러워 눈물이 날 것 같았습니다. 이번 기회에 지나치게 강렬한 요소들을 제거해 진정한 힘으로 변화시켜 보고 싶었습니다.
6.
스테인드글라스에 빛이 투과될 때 스테인드글라스가 설치된 주변 벽에 어떻게 비치는지, 바닥에는 어떻게 형상이 만들어지는지, 여름과 겨울에 해의 고도(高度)가 다를 때 어떻게 될지 예측해야 합니다. 색도 해가 뜨는 곳에는 파랑·보라처럼 차가운 색을, 해가 지는 곳에는 빨강·노랑처럼 따뜻한 색을 배치합니다... 빛이 창을 통해 들어왔을 때 분위기는 꼭 렘브란트 성화(聖畵)같습니다.
7.
그렇게 맛난 과일을 주던 무화과나무가 나이가 들어 밑둥을 잘라냈습니다. 잘려나간 그루터기는 얼마나 오랫동안 열매를 맺었는지 연륜을 드러냅니다. 멈출 줄 아는 지혜를 배웠습니다.
8.
내 작업이 의미가 있다면 언젠가 내가 공을 들였던 교회들을 누구나 순례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가톨릭 종교와는 무관하게 누구든 아름다움을 찾아나서는 이들에게 말입니다. 내 작품은 우리네 가슴에 선뜻 다가오는 아름다운 모자이크처럼 어떠한 주장이나 선동이 없는 온전한 봉헌일 뿐입니다.
9.
빛을 향해 가슴을 연다는 것 : 뭔가를 베푸는 것처럼 그 황홀함을 느끼는 것.
10.
지금 스테인드글라스를 만들기 위해서 맘껏 자유롭게, 진정한 수채화같이 서로 섞여드는 색깔들의 아무런 제한도 없이 모험을 감행하고 싶습니다.
11.
저는 로마네스크 예술의 단순성에 대한 향수를 지니고 있습니다. 제 스테인드글라스는 형상도 없이 매우 단순한 색채일 뿐, 원초적이라 할 만한 그런 단순함의 의미를 추구합니다. 그리하여 이들이 돌로 지어진 벽으로 하여금 노래하게 해야 합니다. 스테인드글라스는 교회의 눈입니다. 방심할 틈도 없이 빛을 전해야 합니다.
12.
수세기 동안 잠자고 있던 공간을 색채가 뒤바꾸어 놓았습니다.
13.
주님, 소외된 이들과 내쳐진 환자들을 위로하기 위해 참 빛을 비추어주시고 이끌어주시는 달처럼 제 가슴을 어루만져 주십시요.
14.
저는 비구상이라는 표현을 좋아 합니다. 작금의 세태는 온갖 형상의 이미지들이 범람하고 있습니다. 텔레비전, 각종 모임들이나 영화가 형상의 표현으로 그득 차 있습니다. 우리가 기거하는 세상은 이미지, 아이디어와 온갖 캐릭터들로 오염되어 있습니다. 모든 게 형상이 차고 넘쳐 신비스러움이 자리 할 곳이 없습니다. 저는 신비를 좋아합니다. 저는 신비스런 세계를 찾아 그림 속에 그것을 표현합니다.
15.
저는 합리적이거나 논리적이며 이지적인 것들을 그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감각을 소중히 여깁니다. 어떤 이들은 제 그림을 보고 아무 것도 볼 수 없다고 말합니다만, 또 어떤 이들은 보면서 행복하다는 이들도 있습니다. 제 그림을 이해하는 데 꼭 이지적이어야 할 필요는 더더군다나 없습니다.
16.
지난 세기에 살아계셨던 형제가 있었습니다. 글자를 모르셨지만 제 그림을 보고 늘 명상을 하셨지요. 그 분은 저보고 잘 지내느냐고 묻기보다는 당신의 그림 색깔은 잘 지내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 분은 제가 쓰는 색깔이 곧 제 삶인 것을 이해하셨던 셈이지요.
17.
아침에 일어나 바닥에 깔려 있는 것들을 다 연결해서 대형 창문에 걸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밖에 나가 개울에 원형다리가 물에 비쳐 둥근 스테인드글라스처럼 눈에 들어와 그 아름다움 안에 마음을 가라앉혔습니다. 돌아오던 중 작품이 설치된 것을 보고 축하에 가까운 말들이 오고가는 듯했는데, 가서 올려다보니 마치 딴 세계 같았습니다. 그토록 강한 색깔들이 햇살에 비치니 조용하기만 했고 전체 흐름도 있었습니다.
18.
앞으로도 고위 성직자가 되거나 큰 상을 받는 일은 거리가 먼 일일 것입니다. 그저 그리고 싶어서 그릴 수 있고 그려낸 것들이 세상 사람들의 정서에 작으나마 도움이 된다면 내겐 이미 보이지 않은 벼슬이자 대상(大賞)입니다. 메마른 땅을 촉촉이 젖게 하는 비나 나뭇가지들에 고요히 내리는 흰 눈발처럼 내 그림들이 조용히 사람들에게 평화와 안정을 준다면 한 사제 화가로서의 작은 사명을 완수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19.
내 마음 속에 투영된 불멸의 빛깔들은 외로울 때, 지쳐 있을 때, 더 나아가 그림을 시작하기 전, 그런 환희, 꺼지지 않는 빛을 소화해내겠다는 생각을 갖도록 용기와 희망을 주줍니다. 스테인드글라스는 말이 없기 때문에 더 깊이 와 닿는 침묵의 메시지나 다름 없습니다.
20.
납선을 둘러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탈피했을 때 마치 죄수가 교도소에서 풀려나온 것처럼 해방된 기분으로 그림을 자유롭게 펼쳐갈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동양화 붓을 이용하여 굵게 긋는 선들이 나로 하여금 서양의 스테인드글라스에 새로운 세계를 마련하게해준 셈입니다.
21.
반 고흐의 그림에 뾰족이 타오르는 것 같은 나무 끝은 하늘을 향한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보입니다. 그에게는 희망도 있었지만 끊임없이 자신에 대한 물음이 있었습니다. 강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토록 강렬한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22.
세잔은 그림 그리는 재주가 없어 보이는 화가였기에 오히려 크게 되었을 것이라 추측해 봅니다. 만일 그를 알아주는 사람들이 있었다면 그림 속에 투영된 산처럼 육중한 내면적인 힘을 잃었을지도 모릅니다. 따돌림을 받았어도 집념을 버리지 않은 작가였습니다. 그처럼 약한 사람도 강인함이 싹트며 자랑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커다란 용기를 줍니다.
23.
그림을 그리기 위해 얇은 종이에 흰 칠을 하여 적당한 재질을 만들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거센 사람을 상대하듯 저항하지 않으면 칠이 제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팔의 힘이 여간 요구되는 게 아닙니다. 유도시합을 하는 두 선수처럼 누워 있는 종이와 나의 맞대결은 침묵으로 시작됩니다. 역시 기선 제압은 화가가 해야 하므로 말없이 버티고 있는 종이를 상대로 인내가 더 필요합니다.
24.
야곱이 밤새도록 하느님과 씨름한 얘기를 떠올리면서 물감을 칠하고 기름을 붓고 바이올린을 다루는 연주자처럼 어르다가 판을 점령하여 거센 황소를 쓰러뜨리는 투우사처럼 가장 중요한 부분에 붉은 색으로 그림의 눈을 만듭니다. 그림은 어느새 하나의 창이 되어 나를 이끄는 창문으로 변신합니다. 그 창문을 그윽하게 내려다보면 꿈에도 볼 수 없는 세계가 드러납니다. 처음부터 애먹던 조건에서도 최선을 다하여 무엇인가를 이뤄내는 일이야말로 나의 작업입니다. 언제나 새로움을 향해 과감한 시도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25.
샤갈 선생! 당신이 100세 가깝도록 불붙는 듯 한 색채로 화려한 작품을 창작해 낸 생애 자체가 감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까다로운 피카소도 당신만큼 색채를 잘 다루는 화가가 없다고 했습니다. 많은 화가들이 유행에 민감하게 헤매다가 급류에 휩쓸려 사라지 것을 보면서 대가는 흔들리지 않는 바위와 같음을 새삼 느꼈습니다. 당신이 넘겨준 바통을 이어받아 달리려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일일 것입니다.
26.
생명을 뜻하는 피, 우리를 비추는 정열적인 태양, 우리 생활에서 없어서는 안 될 불, 성령의 상징, 순교자들의 수난 등등 가장 귀한 색이야말로 붉은 색입니다. 물감 중에도 붉은 색이 가장 종류가 많고 가장 고상하거나 가장 천박할 수 있는 것도 붉은 색입니다. 최초의 인간, 아담 역시 붉은 흙으로 빚어진 뜻에 연유한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27.
내 자부심은 현대 스테인드글라스 분야에서 서양인들이 모방하기 힘든 나의 유일한 스타일을 성취했다는 점입니다. 며칠 전 샤르트르 대성당 지하에 설치된 스테인드글라스를 바라보는 이들의 반응이 참 좋았습니다. 내 작업들이 빛을 터뜨릴 수 있는 무기가 되어 창조주의 눈에 들었으면 하는 바람이 가장 큽니다. 그래서 매순간 그분의 도구이기를 청하곤 합니다.
28.
스테인드글라스를 햇볕 쪽에 설치하고 마지막 손질을 하는데 나비 한 마리가 날아왔다가 다시 멀리 사라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마치 어머니의 부활하신 빛을 제게 전하고 날아간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어머니의 보이지 않는 격려에 힘입어 찬란한 색채로 무한의 빛을 향해 달릴 것입니다. 아! 빛은 춤을 춥니다.
29.
마티스와 보나르 그림의 큰 매력은 창문을 중심으로 그렸다는 점에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역설적인 얘기지만 보나르는 미술관의 아름다움은 창밖의 풍경이라고 했다지요. 답답한 일들이 많을수록 마음속 저 깊은 곳의 창문이라도 활짝 열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가 간혹 있습니다. 창을 열면 새로운 공기, 눈에 들어오는 풍경이 이내 상쾌해집니다. 그림 자체를 열린 창문이라 여긴다면 그림 안에 또 다른 창문이 있어 우리 마음도 활짝 열립니다.
30.
자신보다 더 강한 선수와 늘 마주쳐 싸워야 비로소 위대한 운동선수라 할 수 있습니다.
31.
수도승은 방안에서 예술가는 작업실에서 숨겨진 비밀을 찾아내려 하는 것이 올바른 태도인 듯 싶습니다. 최대한 단순하고 영속성 있는 긴장감에 스스로 매료될 수 있도록...
32.
가장 잘 아는 것 같으면서도 모르는 것이 내 자신입니다. 문제는 남을 의식하는 데서 흐트러지는 확신. 알고 보면 내 안의 잠재력은 광산만큼 풍요로운데...
33.
요란스런 색채로 구성된 그림들은 어지럽고 줄기가 없다. 날아가는 화살처럼 단순한 획 하나로 캔바스를 가로 지르는 힘이 생길 때까지 요약할 수 있다면...
34.
가장 가공할만한 일은 포장된 허세다. 어느 분야에서든 완벽주의가 낳는 위험이 바로 그것이다. 나름대로 완벽하다고 생각하는데서 교만이 생기기 때문이다. 완벽주의는 최대의 자학이다.
35.
제 작품 속에는 어린 시절의 색채와 풍경에 대한 추억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 뿐 아니라 헤엄을 치고 고기를 잡았던 강물과 밭의 이미지도 스며들어 있습니다. 저는 모든 이들에게 아름다움을 전하고자 합니다. 아름다움이야말로 모두에게 진실이며 모두를 구원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36.
물고기를 골라 어항에 넣는다거나 좋은 포도주를 골라 잔에 따르듯 색깔을 선택하곤 합니다. 저에게 예술은 절대적인 아름다움과 사랑의 찬미와 복종입니다.
37.
저의 그림은 종교적 장면을 표현하고 있지 않은 대신 영적인 저의 감성과 영혼의 내적인 움직임을 드러냅니다. 수도복이 수도자를 만드는 게 아니듯...
38.
빛의 길은 존재합니다. 아주 가까이, 눈에도 가슴에도 다가와 있지만 스쳐지나가듯 보지 못할 뿐입니다.
1.
틀에 박힌 예술의 유혹을 뿌리치고 외롭더라도 나는 나의 길을 가고자 합니다. 기교보다는 따뜻한 손놀림이 훨씬 더 사람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진리가 그러하듯 거침없는 붓놀림만이 나를 자유롭게 해줍니다. 바로 자유와 진리는 한 원천이기에.
2.
표현하기 힘든 충만감에 나 자신을 잊고 있는 순간 나는 이미 혼자가 아닙니다. 나에게 화폭 하나하나는 마치 땅을 일궈 가을걷이 하는 터전입니다.
3.
선(線)은 죽음을 가로지르고 색채는 천상의 향연을 펼칩니다.
4.
하늘나라는 단순하지만 내가 살고 있는 이 지상은 복잡합니다. 더 큰 꿈을 꾸어야 합니다. 후라 안젤리코의 환희에 넘치는 색조들을 공간에 담기 위해 시간을 더 받쳐야겠습니다. 프로방스의 햇살, 남불 하늘이 나를 부릅니다.
5.
눈부신 빛은 격렬한 빛이 아닙니다. 며칠 동안 강렬한 빛에 시달렸습니다. 8월 10일경 접어들어 격렬했던 빛은 부드럽게 빛나기 시작합니다. 이 빛에서 얻어낸 작업이 하도 만족스러워 눈물이 날 것 같았습니다. 이번 기회에 지나치게 강렬한 요소들을 제거해 진정한 힘으로 변화시켜 보고 싶었습니다.
6.
스테인드글라스에 빛이 투과될 때 스테인드글라스가 설치된 주변 벽에 어떻게 비치는지, 바닥에는 어떻게 형상이 만들어지는지, 여름과 겨울에 해의 고도(高度)가 다를 때 어떻게 될지 예측해야 합니다. 색도 해가 뜨는 곳에는 파랑·보라처럼 차가운 색을, 해가 지는 곳에는 빨강·노랑처럼 따뜻한 색을 배치합니다... 빛이 창을 통해 들어왔을 때 분위기는 꼭 렘브란트 성화(聖畵)같습니다.
7.
그렇게 맛난 과일을 주던 무화과나무가 나이가 들어 밑둥을 잘라냈습니다. 잘려나간 그루터기는 얼마나 오랫동안 열매를 맺었는지 연륜을 드러냅니다. 멈출 줄 아는 지혜를 배웠습니다.
8.
내 작업이 의미가 있다면 언젠가 내가 공을 들였던 교회들을 누구나 순례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가톨릭 종교와는 무관하게 누구든 아름다움을 찾아나서는 이들에게 말입니다. 내 작품은 우리네 가슴에 선뜻 다가오는 아름다운 모자이크처럼 어떠한 주장이나 선동이 없는 온전한 봉헌일 뿐입니다.
9.
빛을 향해 가슴을 연다는 것 : 뭔가를 베푸는 것처럼 그 황홀함을 느끼는 것.
10.
지금 스테인드글라스를 만들기 위해서 맘껏 자유롭게, 진정한 수채화같이 서로 섞여드는 색깔들의 아무런 제한도 없이 모험을 감행하고 싶습니다.
11.
저는 로마네스크 예술의 단순성에 대한 향수를 지니고 있습니다. 제 스테인드글라스는 형상도 없이 매우 단순한 색채일 뿐, 원초적이라 할 만한 그런 단순함의 의미를 추구합니다. 그리하여 이들이 돌로 지어진 벽으로 하여금 노래하게 해야 합니다. 스테인드글라스는 교회의 눈입니다. 방심할 틈도 없이 빛을 전해야 합니다.
12.
수세기 동안 잠자고 있던 공간을 색채가 뒤바꾸어 놓았습니다.
13.
주님, 소외된 이들과 내쳐진 환자들을 위로하기 위해 참 빛을 비추어주시고 이끌어주시는 달처럼 제 가슴을 어루만져 주십시요.
14.
저는 비구상이라는 표현을 좋아 합니다. 작금의 세태는 온갖 형상의 이미지들이 범람하고 있습니다. 텔레비전, 각종 모임들이나 영화가 형상의 표현으로 그득 차 있습니다. 우리가 기거하는 세상은 이미지, 아이디어와 온갖 캐릭터들로 오염되어 있습니다. 모든 게 형상이 차고 넘쳐 신비스러움이 자리 할 곳이 없습니다. 저는 신비를 좋아합니다. 저는 신비스런 세계를 찾아 그림 속에 그것을 표현합니다.
15.
저는 합리적이거나 논리적이며 이지적인 것들을 그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감각을 소중히 여깁니다. 어떤 이들은 제 그림을 보고 아무 것도 볼 수 없다고 말합니다만, 또 어떤 이들은 보면서 행복하다는 이들도 있습니다. 제 그림을 이해하는 데 꼭 이지적이어야 할 필요는 더더군다나 없습니다.
16.
지난 세기에 살아계셨던 형제가 있었습니다. 글자를 모르셨지만 제 그림을 보고 늘 명상을 하셨지요. 그 분은 저보고 잘 지내느냐고 묻기보다는 당신의 그림 색깔은 잘 지내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 분은 제가 쓰는 색깔이 곧 제 삶인 것을 이해하셨던 셈이지요.
17.
아침에 일어나 바닥에 깔려 있는 것들을 다 연결해서 대형 창문에 걸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밖에 나가 개울에 원형다리가 물에 비쳐 둥근 스테인드글라스처럼 눈에 들어와 그 아름다움 안에 마음을 가라앉혔습니다. 돌아오던 중 작품이 설치된 것을 보고 축하에 가까운 말들이 오고가는 듯했는데, 가서 올려다보니 마치 딴 세계 같았습니다. 그토록 강한 색깔들이 햇살에 비치니 조용하기만 했고 전체 흐름도 있었습니다.
18.
앞으로도 고위 성직자가 되거나 큰 상을 받는 일은 거리가 먼 일일 것입니다. 그저 그리고 싶어서 그릴 수 있고 그려낸 것들이 세상 사람들의 정서에 작으나마 도움이 된다면 내겐 이미 보이지 않은 벼슬이자 대상(大賞)입니다. 메마른 땅을 촉촉이 젖게 하는 비나 나뭇가지들에 고요히 내리는 흰 눈발처럼 내 그림들이 조용히 사람들에게 평화와 안정을 준다면 한 사제 화가로서의 작은 사명을 완수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19.
내 마음 속에 투영된 불멸의 빛깔들은 외로울 때, 지쳐 있을 때, 더 나아가 그림을 시작하기 전, 그런 환희, 꺼지지 않는 빛을 소화해내겠다는 생각을 갖도록 용기와 희망을 주줍니다. 스테인드글라스는 말이 없기 때문에 더 깊이 와 닿는 침묵의 메시지나 다름 없습니다.
20.
납선을 둘러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탈피했을 때 마치 죄수가 교도소에서 풀려나온 것처럼 해방된 기분으로 그림을 자유롭게 펼쳐갈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동양화 붓을 이용하여 굵게 긋는 선들이 나로 하여금 서양의 스테인드글라스에 새로운 세계를 마련하게해준 셈입니다.
21.
반 고흐의 그림에 뾰족이 타오르는 것 같은 나무 끝은 하늘을 향한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보입니다. 그에게는 희망도 있었지만 끊임없이 자신에 대한 물음이 있었습니다. 강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토록 강렬한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22.
세잔은 그림 그리는 재주가 없어 보이는 화가였기에 오히려 크게 되었을 것이라 추측해 봅니다. 만일 그를 알아주는 사람들이 있었다면 그림 속에 투영된 산처럼 육중한 내면적인 힘을 잃었을지도 모릅니다. 따돌림을 받았어도 집념을 버리지 않은 작가였습니다. 그처럼 약한 사람도 강인함이 싹트며 자랑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커다란 용기를 줍니다.
23.
그림을 그리기 위해 얇은 종이에 흰 칠을 하여 적당한 재질을 만들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거센 사람을 상대하듯 저항하지 않으면 칠이 제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팔의 힘이 여간 요구되는 게 아닙니다. 유도시합을 하는 두 선수처럼 누워 있는 종이와 나의 맞대결은 침묵으로 시작됩니다. 역시 기선 제압은 화가가 해야 하므로 말없이 버티고 있는 종이를 상대로 인내가 더 필요합니다.
24.
야곱이 밤새도록 하느님과 씨름한 얘기를 떠올리면서 물감을 칠하고 기름을 붓고 바이올린을 다루는 연주자처럼 어르다가 판을 점령하여 거센 황소를 쓰러뜨리는 투우사처럼 가장 중요한 부분에 붉은 색으로 그림의 눈을 만듭니다. 그림은 어느새 하나의 창이 되어 나를 이끄는 창문으로 변신합니다. 그 창문을 그윽하게 내려다보면 꿈에도 볼 수 없는 세계가 드러납니다. 처음부터 애먹던 조건에서도 최선을 다하여 무엇인가를 이뤄내는 일이야말로 나의 작업입니다. 언제나 새로움을 향해 과감한 시도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25.
샤갈 선생! 당신이 100세 가깝도록 불붙는 듯 한 색채로 화려한 작품을 창작해 낸 생애 자체가 감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까다로운 피카소도 당신만큼 색채를 잘 다루는 화가가 없다고 했습니다. 많은 화가들이 유행에 민감하게 헤매다가 급류에 휩쓸려 사라지 것을 보면서 대가는 흔들리지 않는 바위와 같음을 새삼 느꼈습니다. 당신이 넘겨준 바통을 이어받아 달리려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일일 것입니다.
26.
생명을 뜻하는 피, 우리를 비추는 정열적인 태양, 우리 생활에서 없어서는 안 될 불, 성령의 상징, 순교자들의 수난 등등 가장 귀한 색이야말로 붉은 색입니다. 물감 중에도 붉은 색이 가장 종류가 많고 가장 고상하거나 가장 천박할 수 있는 것도 붉은 색입니다. 최초의 인간, 아담 역시 붉은 흙으로 빚어진 뜻에 연유한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27.
내 자부심은 현대 스테인드글라스 분야에서 서양인들이 모방하기 힘든 나의 유일한 스타일을 성취했다는 점입니다. 며칠 전 샤르트르 대성당 지하에 설치된 스테인드글라스를 바라보는 이들의 반응이 참 좋았습니다. 내 작업들이 빛을 터뜨릴 수 있는 무기가 되어 창조주의 눈에 들었으면 하는 바람이 가장 큽니다. 그래서 매순간 그분의 도구이기를 청하곤 합니다.
28.
스테인드글라스를 햇볕 쪽에 설치하고 마지막 손질을 하는데 나비 한 마리가 날아왔다가 다시 멀리 사라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마치 어머니의 부활하신 빛을 제게 전하고 날아간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어머니의 보이지 않는 격려에 힘입어 찬란한 색채로 무한의 빛을 향해 달릴 것입니다. 아! 빛은 춤을 춥니다.
29.
마티스와 보나르 그림의 큰 매력은 창문을 중심으로 그렸다는 점에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역설적인 얘기지만 보나르는 미술관의 아름다움은 창밖의 풍경이라고 했다지요. 답답한 일들이 많을수록 마음속 저 깊은 곳의 창문이라도 활짝 열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가 간혹 있습니다. 창을 열면 새로운 공기, 눈에 들어오는 풍경이 이내 상쾌해집니다. 그림 자체를 열린 창문이라 여긴다면 그림 안에 또 다른 창문이 있어 우리 마음도 활짝 열립니다.
30.
자신보다 더 강한 선수와 늘 마주쳐 싸워야 비로소 위대한 운동선수라 할 수 있습니다.
31.
수도승은 방안에서 예술가는 작업실에서 숨겨진 비밀을 찾아내려 하는 것이 올바른 태도인 듯 싶습니다. 최대한 단순하고 영속성 있는 긴장감에 스스로 매료될 수 있도록...
32.
가장 잘 아는 것 같으면서도 모르는 것이 내 자신입니다. 문제는 남을 의식하는 데서 흐트러지는 확신. 알고 보면 내 안의 잠재력은 광산만큼 풍요로운데...
33.
요란스런 색채로 구성된 그림들은 어지럽고 줄기가 없다. 날아가는 화살처럼 단순한 획 하나로 캔바스를 가로 지르는 힘이 생길 때까지 요약할 수 있다면...
34.
가장 가공할만한 일은 포장된 허세다. 어느 분야에서든 완벽주의가 낳는 위험이 바로 그것이다. 나름대로 완벽하다고 생각하는데서 교만이 생기기 때문이다. 완벽주의는 최대의 자학이다.
35.
제 작품 속에는 어린 시절의 색채와 풍경에 대한 추억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 뿐 아니라 헤엄을 치고 고기를 잡았던 강물과 밭의 이미지도 스며들어 있습니다. 저는 모든 이들에게 아름다움을 전하고자 합니다. 아름다움이야말로 모두에게 진실이며 모두를 구원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36.
물고기를 골라 어항에 넣는다거나 좋은 포도주를 골라 잔에 따르듯 색깔을 선택하곤 합니다. 저에게 예술은 절대적인 아름다움과 사랑의 찬미와 복종입니다.
37.
저의 그림은 종교적 장면을 표현하고 있지 않은 대신 영적인 저의 감성과 영혼의 내적인 움직임을 드러냅니다. 수도복이 수도자를 만드는 게 아니듯...
38.
빛의 길은 존재합니다. 아주 가까이, 눈에도 가슴에도 다가와 있지만 스쳐지나가듯 보지 못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