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리랑카의 평화를 축복하며
스리랑카가 27년의 극심한 내전을 끝내고 평화가 왔다는 모 방송의 며칠 전
다큐프라임 방송을 보면서, 나의 스리랑카 사랑의 만감이 되살아난다.
방송의 제목은 “찬란한 섬 스리랑카(Last Paradise), 희망의 자프나(Jaffna)”였다.
작은 섬나라, 인종(싱알리스:타밀)과 종교(불교:힌두)로 찢어진 현실을 보면서
나의 현역 당시 나름대로의 뚝심으로 스리랑카에 몰두했었다.
수도 콜롬보와 국제공항 29Km에 고속도로 건설, 타밀족의 반군지역인 자프나에
상수도 건설을 위하여 몇 달씩을 스리랑카에 상주하기도 했다.
80년대 초에 신선호의 율산실업이 망하면서 대타로 들어간 경남기업이 스리랑카의
한국기업 터주대감이 되었고, 그 뒤를이어 갑을방적 나의 동기 박창호 회장이
갑을랑카를 설립하여 한국이 스리랑카 최대투자국이 되었다.
내가 스리랑카 고관들을 한국에 초청할때면 박회장은 언제나 자신의 벤츠를
외무부의 허락도 없이 의전차량으로 내어주었다.
고속도로공사 입찰을 앞두고 쿠마라쿵가 여자 대통령을 비공식 초청을 했다.
부모가 워낙 쟁쟁한 대통령 아버지에다가 어머니는 세계최초의 여자 수상이고
본인의 프랑스학벌도 대단해서 누구도 못 다루는 우상이다. 언젠가 반군의
자폭테러단에게 부상을 당하기도 했지만.
대통령의 첫 일정이 부평 대우자동차 방문이었다. 그 공장에는 여자 화장실이 따로
없었다. 그래서 급히 호텔급의 화장실을 준비했는데, 정작 대통령은 나타나지 않았다.
청와대와 외무부 담당자들이 새벽부터 설치고, 나는 남자 화동의 동선에서부터
대통령의 모든 행동을 준비했었는데, 막상 12시가 되어도 대통령은 오지않았다.
국빈 방문에 앞서 와있던 스리랑카 경호실과 정보부 직원들과는 이미 소주도 나누었던
사이라서, “왜 안 오는데?”했더니 그 전날 밤에 롯테호텔(1박에 400만원)근처 소공동에서
과음을해서라니 김우중 회장도 할 말을 잊었었다. 다행히 급히 공장 연수원에 차린
오찬에는 나타나서 한 숨은 돌렸는데, 쿠마라퉁가의 돌발행동은 서울공항 도착때부터
확인되었다. 오후 4시에 도착하기로한 특별기가 해가 저물어도 나타나지를 않았다.
콜롬보에서 서울, 7시간인데. 부슬비가 내리는 성남 공항에서 외무부와 회사의 여러
사람들이 뜬눈으로 하룻밤을 지내고, 새벽 6시에 도착한 전용기에는 딱 12명만 타고 왔다.
30명 수행원들은 다 어디에 두고? 당시 스리랑카의 치안이 워낙 불안해서 누구도 대통령과
동승하기를 꺼렸다고 하였고, 무장 경호원들의 총기 실탄도 확인할 길이 없었다.
그리고 우역곡절 끝에 우리가 수 억불 짜리 고속도로공사 낙찰을 했는데,
당시의 IMF사태로 대우그룹이 파산위기에 몰려있었다. 그래서 스리랑카정부 각 부처에서 나온 태스크포스가
대우에는 공사를 맡길 수 없다고 했다. 한국 정부의 지불보증을 받아오라고 했다. 법무부와 재무부, 환경부대표들이
나를 엄청 괴롭혔다. 영국의 Finacial Times가 “대우 파산”이라고 크게 보도했던 그 날이었다.
나는 일주일 내로 모든 해명을 주겠다고 하고 급거 귀국을 했다. 그 떄 워크아웃상태에
있던 경남기업의 사장은 권노갑의원이 밀어준 조병수 허깨비사장 이었다. 나를 보고
“왜 꼭 채이사만이 해결할 수 있느냐? 누구 허락으로 귀국했느냐?” 나는 “너는 모른다”고
접어두고, 서울보증보험과 삼일회계법인의 나의 인맥들을 가동하여 보기 좋게 주말에 모든 준비를 갖추고
고속도로건설 스리랑카정부 부처 대표들의 콧대를 확실히 꺾어주었다.
이제는 본론, 자프나 상수도공사 이야기.
내가 갔던 당시만해도 20년 넘게 자프나는 버려진 도시였다. 아름다운 해변과 평화로운
자연환경의 그 시민들은 누구에게도 보호를 받지 못했는데, 나와 현대엔지니어링 일행이
자프나에 상수도를 건설해 주겠다니까 환대가 끝이 없었다.
우리나라는 외국의 원조만 받다가 어느 날 원조를 해주는 나라로 바뀌는 바람에 이와 같은
EDCF(대외협력기금) 프로잭트도 할 수 있었다.
계획한 상수도의 수원지는 반군들의 지역 밖이였다. 같은 나라에서 두 번씩이나 여권을 내보여야
하고, 수도 콜롬보로 오는 비행기를 타려고 해도 외국 여행과 다름이 없었다.
그 후 스리랑카는 오슬로평화협정 등으로 곧 평화가 올듯했는데, 불과 2년전에 인종과 종교의 갈등을 접고
평화가 정착했다고 하니 그 평화가 지속 되기를 빌면서, 내가 목숨을 걸고 오갔던 그 인도양 해변,
누와라엘리아 골프클럽의 100주년 기념행사 라운딩, 상큼한 실론티의 향을 영원히 잊지 못하며,
지구상에 유일한 스리랑카의 누드비취에서 불러보았던 나의 노래들도 새삼 여운으로 남는다.
첫댓글 선배님께서는 정말로 가슴뛰는 삶을 살아오셨다는 생각이듭니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가장중요한것은 자신의 의지라는것을 또 한번 느낌니다 선배님은 삶을통해 많은지식을 쌓고 그지식을 쌓은만큼 베푸시는 선배님의 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잊고 살았는데 갑자기 생각이나네요 홍해바다 방파제에서 밤이면 꿈에본 내고향을 참 많이도 불렀습니다
이사장, 지금은 누드비취가 없어졌다네요. 그때에도 유럽 FTA가 있었다면 유럽산의 신선한??? 사우디 주베일, 담맘 해변에 오래 앉아있다가 구안와사걸린 사람도 있었어요. 바람이 한 쪽으로만 부니까. 스리랑카에서는 경남직원들도 타밀반군에게 몇명이 희생되었지요. 나의 스리랑카 2선 에이전트는 바로 그 반군 타밀족의 골수 힌두였습니다. 홍콩이나 싱가폴의 호텔에서 접선을 할때도 그는 꼭 이마에 붉은 도장을 찍었고, 그의 방에 가면 힌두교향내가 가득했지요. 나는 정말 세계를 누비면서, 목숨을 건 진한 삶을 살았다고 회상합니다. 지금도 동년배, 동기들이 뭐라고하든지, "니들이 뭘 알어?"
재경지천 만세
어느 땐가 콜롬보출장을 마치고 귀국하는 날, 지사 직원들과 몇몇 교민들을 위로하느라고, 심야 대한항공 출발시간을 기다리면서 "한국관" 노래방에서 양주 몇병을 비우고(당연히 내가 반 정도를 받아 마셨겠지), 무사히 귀국을 했는데 아차 안경을 두고왔어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나의 안경이 그 다음날 사무실로 전달이 되었드라고요. 신통방통! 도토리들도 끼리와는 통하니까 내가 그 콜롬보의 못된 텃새 속에서도 참 좋은 친구들과 좋은 인연을 가졌었다고 위로합니다.
오랜만에 카페 들와서 젊은날 고문님의 생생한 다큐글 접하니 새
커보이십니다 . 큰뜻품은 지천 후배님들 모두에게 멘토가 되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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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님께서는 지구곳곳을 다니시며 너무도 큰일들을 하셨군요. 비공식이라지만 대통령을 초청하고, 그런데 대통령이 시간약속이 철저하지못하다면 기본적 외교결례가 아닌가요.
상식적으로는 이해하기 힘드네요. 아무리 내전을 치르고있는 작은섬나라이지만...사실 스리랑카에 대해선 별~관심을 갖고있지않아선지, 인도양의 실론섬. 실론티. 인구의 대부분이 불교신자. 그정도의 얕은 상식뿐이었는데
선배님의 글을통해 상식의 깊이를더할수있어, 무엇보다 감사합니다. 젊은날 열정적인 에너지를 여러대륙에 뿌려놓은결과로 오늘날 대한민국의 위상이 G 20을 이끌, 의장국의 나라로 발전했고 ,
한류의 열풍이 아시아를넘어 유럽까지 입니다
제가 스리랑카에 상주하는 짧은 기간에도 많은 불교단체들이 왔고, G20에는 도저히 미치지 못하는 행태들도 보았습니다. 힐튼호텔에는 "해피아우어"가 있었는데, 양주와 안주가 6시까지는 모두 반값. 전에 경남기업 사주였던 신기수회장(작고: 박근혜의 애인?)을 모시고 실컷 취하다보면 최고급 큐바 하바나 시거에 이란산 케비어안주가 나오고, HSBC 지사장 부부가 합석을하면 또 연어알 큰통을 선물하기도 했지요. 29층 쌍둥이 아파트를 지었는데 분양이 안되고 금융비용은 눈덩이가 되니까 우째던 추가 금융을 위해서 꼬셔볼려고.. 문제는 콜롬보시의 화장터 연기가 그 쪽으로 불어오고, 눈앞에 빈민 주거지가 내려다 보이기 때문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