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무주군 설천면 소천리에 위치한 무주구천동 33경 중 제 1경인 '나제통문(羅濟通門)'은
높이 5~6m, 너비 4~5m, 길이 30~40m인 굴(窟)로 삼국시대 때 신라와 백제 때에 만들어졌다고 알려져 있다.
라제통문(羅濟通門)은 크게 옛날의 신라와 백제의 경계, 지금의 전라도와 경상도의 경계를 잇는 굴(窟)이다.
그래서 이름도 신라와 백제를 잇는 문(門)이라 하여 라제통문(羅濟通門)이라고 불러왔다.
실제로 이곳에 있는 안내문도 그런 식으로 씌여있다.
즉 이 굴이 신라와 백제의 경계에 위치하여 두 나라가 병참기지로 삼아 한반도 남쪽의 동서 문화가 교류하던 장소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굴이 삼국시대에 만들어 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끝의 글이 조금 이상하다.
교류는 하였는데 아직도 특유의 자기네 고장의 사투리를 쓰고 풍습이 다르다는 것이다.
천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왜 그런 현상이 유지되고 있는지는 설명이 없다.
더구나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로는 양쪽의 사람들이 서로 통혼(通婚)도 안한다고 한다.
뭔가 이상하다.
우선 이 통문(通門)이 있는 주변을 살펴보자.
강(江)을 따라 천혜의 암벽이 앞을 막고 있다.
즉 신라나 백제로는 이곳에 성(城)을 쌓을 걱정없이 적은 군사로도 적(敵)을 방어할 수 있는 곳이다.
왜 이 천혜의 방어벽에 구멍을 뚫었을까?
문제는 또 하나 있다.
지금의 다리가 없으면 공중에 굴을 뚫은 것이나 다름없다.
굴의 위치를 낮게하면 비가 오면 물이 넘쳐 신라땅으로 들어갈 것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굴을 뚫으면 다리를 건설해야 하는 문제가 있다.
경상도 쪽에서 본 라제통문.
전라도 쪽에서 본 라제통문.
양쪽에서 보면 굴로 들어가는 입구가 언덕을 이루고 있는 것을 알수 있다.
즉 의도적으로 굴의 위치를 높여서 큰 물이 들었을 때 물이 넘치는 것을 방지한 것이다.
지금 다리가 있기 전의 옛날에는 어떤 형식의 다리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전무(全無)하다.
여러가지 추리를 해 보건데 결코 이 굴은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런데 왜 이런 의문의 전설이 만들어 진 것일까?
그리고 왜 굴 입구에는 옛날 초소와 같은 것을 만들어 놓고, 엉터리 안내판을 설치하고,
지금도 포졸과 같은 복장을 하고 이곳의 거짓이야기를 해 주는 사람이 근무하고 있는 것일까?
이 굴이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굴이 아니라 일제강점기에 뚫은 굴 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러한 사실을 추적해 역사 교과서에서 관련 내용을 삭제하게 만든 역사학자 "오재성"씨 말에 의하면
“이 굴의 원래 이름은 기니미굴”로 1910년경 일본인들이 인근 금광에서 채굴된 금을 용이하게 옮기고,
이 지역의 농산물과 임산물을 옮겨가기 위하여 뚫은 굴로 당시 김천과 거창을 잇는 신작로였다”고 설명한다.
이 굴의 명칭이 바뀐 것은 1963년 무주구천동 33경을 만들면서부터 였다고 한다.
당시 이곳에 주준하고 있던 군부대의 정훈장교가 무주구천동 33경의 이름을 붙이면서 시작됐다고 한다.
이때부터 "나제통문"이란 이름으로 둔갑해 교과서에 등장했고 학생들의 수학여행의 필수코스가 된 것이다.
굴을 뚫을 당시의 현장을 목격한 노인들은 모두 사망한 상태이지만
무주군의 행정기록을 적어놓은 ‘무주군청지 적성지(赤城誌)’에는 당시 공사를 한 작업일지가 있다고 한다.
이런 사실을 밝힌 오재성 선생은 교과서에서도 사라진 사실을 아직도 믿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 놀랍다” 며
“불과 몇 십년 전 일도 이렇게 왜곡되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우리의 많은 역사적 진실을 사실 그대로 밝히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고 강조한다.
경상도 무풍면쪽에는 경주 김씨의 열녀비(烈女碑) 하나가 있다.
그외에는 아무런 글씨도 찾을 수가 없다.
하지만 전라도 무주쪽을 보면 많은 글자를 찾을 수가 있다.
무주쪽 통문 오른쪽 위편에 있는 암석문(岩石文)들.
암벽을 파고 끼워넣은 이 암석문(岩石文)은 누가 만들었는지 또 어떤 내용인지는 모르겠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만을 보고 돌아간다.
나 역시 그렇게 보고 와서 사진을 관찰하다가 새로운 글자를 보고 여러 방면으로 검색을 해 봤다.
우선 다리 좌측 암벽위에 (붉은 원 내) 글씨가 있다.
내 사진으로는 판독이 어려워 다른 분의 사진을 찾아 봤다.
블로거 닥밭골(심충성)
심충성님의 블로그에 이곳의 글씨에 대한 자세한 내역이 들어있다.
大朝鮮 隆熙 三年(대조선 융희 삼년):1909년
石帽坮(석모대):돌이 모자를 닮은 坮.
李雲採(이운채)라는 분이 쓴 것인모양이다.
라제통문 맨 위에도 글씨가 있다.
把酒臨風(파주임풍):술잔을 잡고 바람을 맞이한다. 라고 써 있다.
이글은 범중엄(范仲淹)의 악양루기(岳陽樓記)에 나오는 글이라고 한다.
물가의 바위에도 글자가 있다.
심충성님 사진
斗村 李先生 剖(두촌 이선생 부)
氷魚躍㪽(빙어약소)
두촌 이선생이 갈라서 얼음에서 고기가 뛰어 오른 곳 이란 뜻이란다.
여기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해내려 온다고 한다.
斗村 이만경선생의 어머니께서 한 겨울에 잉어가 먹고 싶다고 하셨단다.
한 겨울에 잉어를 잡숫고 싶다는 어머니께 어떻게 잉어를 잡아다 드릴까?
이 추운 겨울 꽁꽁 얼어붙은 물에서 어떻게 잉어를 잡을 수 있을까 걱정하던 두촌선생은
어머니에게 어떻게 하던 잉어를 구하겠노라고 대답을 하고 개울가로 나왔다.
꽁꽁 얼어붙어 개울에서 어떻게 잉어를 잡을 수가 있을까?
두촌선생은 불효가 되는 것이 안타까워 냇가를 오르내렸지만 잉어가 있을 리가 없었다.
드촌선생은 설음이 북받쳐 개울의 얼음을 두 손으로 두드리며 통곡을 했다고 한다.
그러자 냇물의 얼음이 깨지며 그 속에서 잉어 한 마리가 튀어 나왔단다.
두촌선생의 지극한 효성이 하늘과 땅을 감격시킨것이라고 한다.
두촌 선생이 잉어를 가지고 와서 어머니께 드리자 마을 사람들은 하늘이 내려준 효자라며 칭찬했다.
후에 그의 효성에 감탄한 후학들이 잉어가 나온 이곳에 빙어약소(氷漁躍所)라는 글을 새겨
두촌선생의 지극한 효성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이곳 외에도 두촌 선생의 효성에 꿩이 떨어진 곳에는 설치자투소(雪雉自投所) 라는 碑가 있다고 한다.
潭鶴 (담학) : 심충성님 사진.
이렇게 암각글자가 많은 것은 이곳의 자연환경과 무관하지 않을 듯하다.
어쩌면 저 굴이 뚫리기 전에는 굴이 있던 위치에도 글자가 있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글자야 어찌됐던 나제통문(羅濟通門)의 궁굼증을 푼 것이 이번 여행의 큰 수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