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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바냐 새벽기도 2장
더 늦기전에 회개하라 습 2:1-2
더 늦기 전에 여호와를 찾으라 습 2:3
기도를 방해하는 요소 습 2:3
심판과 재앙이 오기전 습 2:3
이방적인 삶을 버리라 습 2:1-3
긍휼함을 받는 방법 습 2:1-3
불레셋의 심판 습 2:4-7
은혜가 임하면 습 2:4-7
모암과 암몬 습 2:8
은혜가 임하면 습 2:9
모압과 암몬이 멸망한 이유는 습 2:10-11
남쪽 구스의 심판 습 2:12
앗수르의 심판 습 2:13-15
더 늦기전에 회개하라
습2:1-2
오늘 본문은 지금으로부터 2600년 전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의 첫 왕은 사울입니다. 그 다음은 다윗이고 다윗이 죽자 솔로몬이 왕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정치를 잘 하다가 말년에 영적으로 음란하여 우상을 섬기고 육적 음란에 빠져 아내를 1,000명이나 거느렸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이 죽자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로 나누어지게 되었습니다. 북 왕국이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을 떠나 방탕하다가 앗수르에게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남 유다도 타락하고 있었습니다. 우상 숭배와 방탕 그리고 음란과 타락으로 하나님을 떠나고 있었습니다. 이 때 스바냐 선지자가 나타나서 외치는 예언의 소리가 오늘 봉독한 말씀입니다. 1-2절입니다. 성경의 메시지는 항상 이중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심판과 구원의 메시지입니다. 듣고 회개하여 돌아 온 사람들에게는 여호와의 구원하심과 은혜와 긍휼하심이 임할 것이며, 외면하고 핍박하는 자들에게는 그대로 갚음이 될 것입니다.
2절에서 스바냐 선지자는 ‘명령이 시행 되기전 광음이 겨같이 날아 지나가기전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임하기전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 너희에게 이르기 전에 그리할지어다’하였습니다. 이것은 모여야 할 시간이 정해져 있음을 언급한 것입니다. 우리는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기 전에 120년 동안 진노의 날이 올 것과 구원의 메시지를 전했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두 노아를 비웃으며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의 날이 임하자 방주의 문은 닫히고 모든 사람들은 지면과 함께 멸망을 당했습니다.
지옥을 본 사람들의 간증을 듣거나 책을 읽어 보면 울부짖는 소리, 탄식하는 소리, 고통의 신음소리 등, 비참한 모든 소리들 가운데 공통되는 점은 후회하는 소리들입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예수님 믿어둘걸, 이런 고통의 장소가 있는 줄 알았더면 미리 회개할걸, 이럴 줄 알았더면 있는 재산 하나님께 바치고 선한 사업에 써두기나 할걸, 이런 죄의 심판이 있는 줄 알았더면 죄를 짓지 말걸’ 등등, 기회가 다 지나간 것에 대해 후회하는 말들뿐이라는 것입니다. 기도가 아무리 만능의 열쇠라고 해도 기회가 지난 다음에는 소용이 없습니다.
본문 말씀에 자세히 보면 ‘전’ 즉 ‘늦기 전에’란 말이 네 번이나 나옵니다. 두려운 말씀을 잘 들어보십시오. ‘수치를 모르는 백성아 모일지어다 모일지어다 명령이 시행되기 전, 광음이 겨같이 날아 지나가기 전,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임하기 전,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 너희에게 이르기 전에 그리할지어다’ 얼마나 절박한 심정으로 말씀하신 것입니까?
1.더 늦기전에 회개해야 합니다.
‘수치를 모르는 백성아 모일지어다 모일지어다’죄를 짓고도 부끄러워할 줄 모르고, 죄를 짓고도 양심이 마비되어 뻔뻔하고 완악한 마음을 가진 유다 백성들에게 경고하신 말씀입니다. 어서 늦기 전에 모여서 회개하라는 말씀입니다. ‘명령이 시행되기 전’이란 하나님의 심판의 명령이 시행되어 큰 불행과 고통의 날이 오기 전에 회개하라는 말씀입니다. ‘광음이 겨같이 날아가기 전’이란 말씀은 세월이 다 지나기 전에 시간이 겨같이 날아가기 전에 빨리 회개하라는 말씀입니다. 시간은 빨리빨리 지나갑니다.
시90:10절‘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니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기회가 다 지나기 전에 어서 모여와서 회개하라는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진노가 임하기 전’이란 말씀은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기는 해도 영원히 참으시는 분은 아니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지기 전에 어서 가증한 죄, 거역한 죄를 회개하라는 말씀입니다.
대하7:14절‘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하셨습니다. 겸손히 하나님을 찾고 악한 길에서 돌이켜 회개하면 하나님이 하늘에서 듣고 죄를 용서해 주시고 그 땅을 치료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가정에 병든 것도 치료받고 사업에 병든 것도 치료받고 사회가 병들고 나라가 병든 것도 치료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사55:6-7절‘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도 때가 늦기 전에 어서 죄의 길에서 돌이켜 불의한 사람은 그 악한 생각을 버리고 돌아오라는 말씀입니다. 죄를 회개하지 않기 때문에 기도 응답을 못 받고 치료를 받지 못하고 축복을 받지 못합니다. 사59:1-2절‘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1절에 여기 수치를 모르는 백성들이란 소위 하나님을 섬긴다고 자부하던 유다 백성들을 가르키는 말입니다. 우리는 먼저 ‘수치를 모르는 백성아’라는 선지자의 외침에 겸허하게 머리를 숙이고 ‘모일 것’을 촉구하는 예언자적인 말씀에 순종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자기 몸에 똥이 묻었으면서도 겨묻은 다른 사람을 야단치는 나의 잘못에 수치를 느끼고 여호와 앞에 돌아가 회개해야 할 줄고 믿습니다. ‘수치를 모르는 백성들아’라는 말의 본 뜻은 ‘죄에 대하여 부끄러움을 모르는 백성’이란 뜻으로 ‘회개하기를 원치 않는 백성’을 뜻하는 말입니다. 즉 자기 스스로 무엇이 잘못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삿1:28절을 보시면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가나안의 거민들을 다 몰아내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청종치 아니하고 그들을 ‘아 쫓아내지 않았다’고 하는 내용이 등장합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가나안의 거민들이 힘이 세고 철병거가 있어서 못 쫓아냈었다고 알고 있으나 솔직히 말하면 못 쫓아 낸 것이 아니라 안 쫓아 낸 것입니다.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수아를 통하여 가나안의 여인들과의 혼인을 금지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수 23:12-13) 가나안의 여인들을 이미 부인으로 취했기에 그들은 쫓아낼 힘은 있었어도 쫓아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삿 3:5-7) 아니 애초부터 쫓아내기가 싫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하고 부인들의 신앙을 따라 바알을 섬기는 우상숭배의 죄를 범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극심한 심판을 받았는데 (삿 3:8) 우리는 스바냐 선지자가 여호와의 명령이 시해되기 전, 광음이 겨 같이 날아 지나가기 전,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임하기 전,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 너희에게 이르기 전에 여호와 앞에 모이라는 말씀에 순종하는 백성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느혜미야 8장을 보십시오. 무너졌던 솔로몬 성전의 재건으로 인해 몸부림치던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성벽을 재건한 다음 수문앞 광장에 모였는데 이들은 속죄의 날을 정해놓고 울었고 하나님의 종들에 의해 선포되는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운 마음으로 들었으며 하나님께 감사의 예물을 바쳤습니다. 그러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죄를 깨달은 백성들의 큰 소집이 있었고 (18절) 말로 다할 수 없는 큰 기쁨이 이스라엘의 회중을 감쌌습니다.(17절) 이와 같이 오늘 우리들이 함께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할 때 개인의 문제뿐 아니라 국가적인 어려움도 다 해결될줄로 믿습니다.
행2:1절‘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히10:25절‘모이기를 폐하는 사람들의 어떤 습관과 같이 하지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워 옴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이렇듯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이 모이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서 민족의 죄와 자신의 죄를 놓고 회개할 때 하나님의 크신 구원의 역사가 있다는 사실을 성경은 구구절절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오늘 이 자리가 수치를 모르던 자들이 수치를 깨닫고, 회개를 모르던 자들이 회개하며, 회개를 원치 않는 백성들이 다 모여서 회개하고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를 받는 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더 늦기 전에 여호와를 찾으라
습 2:3
1.하나님의 명령이 시행된 후라면 어쩔 수가 없습니다.
늦기 전에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사야 38장에 병들어 죽게 되었다가 15년 생명을 연장한 히스기야 왕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히스기야 왕이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 왕의 생명을 거두시려고 작정하셨습니다. 그러나 아직 시행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에게 하나님께서 히스기야 왕의 생명을 거둘 작정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히스기야 왕에 가서 하나님의 계획을 알려 주었습니다. 히스기야는 이 말을 듣고 하나님의 작정과 시행 중간에 자기가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더 늦기 저에 기도하여야겠다고 결심하고 낯을 벽으로 향하고 기도하였습니다. 몸부침 치는 눈물의 기도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의 눈물을 보셨습니다. 간절한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사38:5-6절에 시행을 보류하셨습니다.
요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니느웨 백성들이 타락하고 있으니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죄에서 돌이키게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니느웨 백성이 구원받는 것이 싫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원수 국가 앗수르의 수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니느웨로 가는 배를 타지 않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풍랑이 일어났습니다. 배 선장은 이 배에 하나님께 죄지은 사람이 있어서 배가 풍랑을 만나고 있으니 제비를 뽑아서 죄인을 찾아내겠다고 하였습니다. 요나가 뽑혔습니다. 배를 건지고 수많은 사람들을 살리려고 요나를 다에 던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요나는 고래 밥이 된 것입니다. 죽을 운명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고래뱃속에서 하나님이 자기 생명을 거두기를 시행하기 전에 기도하였습니다.
2.더 늦기전에 열심히 기도해야 합니다.
3절‘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했는데 여기서 ‘여호와의 규례’는 하나님을 섬기는 제도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법대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성도들의 생활법규가 무엇입니까? 가장 중요한 것이 주일을 거룩히 지키는 것입니다. 주님의 거룩한 날에 육신의 쾌락을 위하여 놀러다니며 죄를 지으면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또 중요한 것은 우리 모든 수입의 십분의 일을 거룩히 구별해 바치는 일입니다. 물질 쓰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신앙도 알 수 있고 그 사람의 인격도 알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천지만물의 주인이신데 우리의 헌금 행위를 얼마나 중요시했으면 성전의 헌금궤 앞에서 한 사람 한 사람 헌금 행위를 지켜보시고, 오늘 이 과부가 가장 정성을 많이 바친 사람이다라고 칭찬했겠습니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 하나님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가로막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한국의 모든 성도들이 정확하게 십일조 생활을 하면 하나님이 분명히 지켜주시고, 모든 재난과 사고로부터 보호를 받고 싶습니까? 주일을 거룩히 지키고 아까워하지 말고 정확히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십시오.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습니다.
3.본문에‘여호와를 찾으라’는 말씀은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찾아야 하나님이 가까이 하시고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고 하나님의 분노가 임하고 무서운 심판의 명령이 시행되려고 할 때에 목숨 걸고 기도하고 간절히 부르짖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풀리고 무서운 심판을 면할 수가 있습니다.
신구약 성경에 보면 위대한 신앙의 사람들은 모두 애국자였습니다. 그들은 모두 목숨 걸고 나라 위해 기도했고 통곡하며 기도했고 죽으면 죽으리라고 기도했습니다. 바로 이 때에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한 말을 명심해야 합니다. 에스더4:13-14절‘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면하리라 생각지 말라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비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했습니다.
보잘것없는 고아 출신이요, 다른 민족인데 대제국의 왕후가 된 것은 바로 이 때에 멸절당할 민족을 구원키 위해서 축복하신 것인데 자기 혼자 평안히 있겠다고 입다물고 잠잠하고 있으면 ‘하나님은 너 아니고 다른 사람 통해서 이 민족을 구원할 수 있고, 너와 네 아비 집은 멸망할 줄 알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을 듣고 에스더가 ‘예, 알았습니다. 죽으면 죽으리이다’하고 금식기도를 부탁하고 자기도 시녀들과 함께 기도하고나서 자기 민족을 구원했습니다. 늦기 전에 기도해야 합니다. 미적거리다간 망하고 맙니다. 할 말을 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하며 가증한 죄를 지은 것을 보고 하나님이 몹시 분노하셔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출32:10절‘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하실 때 웬만하면 ‘잘 되었습니다. 목이 곧고 패역한 백성이라 무지무지하게 속을 썩히는데 하나님 뜻대로 하시옵소서’ 할 것 같은데 그게 아닙니다. ‘모세가 그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또 하나님의 언약을 말하면서 출32:11-14절‘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주를 가리켜 그들에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나의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영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라고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꼼짝 못하시고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했습니다.
자기 생명을 내던지고 하는 기도가 그 민족을 구원했습니다. 민수기 14장에도 여리고 성을 정탐하고 돌아와서 보고하는 말을 듣고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며 우는 것을 보고 하나님이 진노하여 진멸하겠다고 하실 때에 모세가 또 그와 같은 기도를 드렸습니다. ‘애굽에서부터 지금까지 이 백성을 사하신 것같이 사하옵소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네 말대로 사하노라’말씀하셨습니다. 늦기 전에 기도해야 합니다. 회개하며 부르짖어야 합니다.
기도는 한마디로 ‘하나님 아버지와 그 자녀인 성도와의 대화’라고 정의 내릴 수 있습니다. 아버지와 자녀의 대화는 솔직하고 단순합니다. 정치가의 연설처럼 대중들에게 자신의 장점을 열거하는 연설이 아닙니다. 성경은 하늘을 우러러 자신의 장점을 열거하는 연설이 아닙니다. 성경은 하늘을 우러러 자신의 의로움을 떠벌리며 기도했던 바리새인이 의롭지 못하다고 말씀합니다. 오늘날에도 바리새인과 같은 실수를 범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자신과 사이가 나쁜 성도를 마음에 두고 자신의 거룩한 신앙생활을 나타내기 위해 온갖 미사여구를 사용하여 기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기도는 기도한 자신은 열심히 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하늘나라에서 잡동사니 취급을 당할 뿐입니다.
기도는 인간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을 감동시키기 위한 미사여구는 필요치 않습니다. 이제 우리는 기도의 골방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만 들으시면 됩니다. 가장 솔직한 우리의 마음을 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수 있는 올바른 기도입니다. 마6:6절‘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움직일 수 있는 권능을 우리에게 부여해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능력은 오직 기도라는 파이프를 통해서만 우리에게 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은 기도라는 기어가 들어가야만 우리의 삶에서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아무리 가문 땅이라도 물이 지나가는 곳에 있는 나무들은 잎이 무성합니다. 물이 있는 곳에는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도가 들어가는 곳마다 죽었던 것이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날 줄로 믿고 기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를 방해하는 요소
습 2:3
무디 설교 집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아버지가 어린 아들을 데리고 바닷가로 낚시하러 갔습니다. 아들을 바위에 앉혀 놓고 조금 멀리 떨어져서 낚시를 하고 있었습니다. 고기가 잘 잡혔습니다. 정신이 없었습니다. 너무나 즐거웠습니다. 신났습니다. 시간가는 줄도 몰랐습니다. 한참을 정신없이 낚시질하다 보니 물이 굉장히 많이 들어 와 있었습니다. 그 때서야 섬광같이 아들 생각이 났습니다. 허겁지겁 아들을 놓아두었던 바위로 달려 와 보았습니다. 이미 바위는 물에 잠겨 있었습니다.
아들이 얼마나 애타게 아버지를 부르다가 물에 빠져 죽었을 가요? 아버지는 통곡을 하였습니다. 시간이 다 흐르기 전에 할 일이 있습니다. 해가 지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50전에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60전에는 그래도 그 정도는 되어야 할 일이 있습니다. 70 전에 그 정도는 마쳐야 할 일이 있습니다. ‘광음이 겨같이 날아가기 전에’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기도를 방해하는 요소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영적인 것들이 죽어 있습니다.우리 주변에 죽어 있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기도의 물을 주어야 합니다. 가정의 어려움이 있습니까? 기도의 물을 주면 가정이 살아납니다. 영혼이 죽은 사람이 있습니까? 기도의 물을 주면 영혼이 살아날 수 있습니다. 어떤 환경이라 할지라도 기도가 있으면 전성기가 옵니다. 기도하는 곳에 승리의 역사가 있습니다. 기도에 이렇게 엄청난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악한 마귀는 잘 압니다. 그래서 마귀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기도를 못하게 만듭니다. 이 시간 기도를 방해하는 요소들에는 무엇이 있는가를 생각해 봅시다.
1.분주함입니다.
우리를 정신없게 만들고 바쁘게 만드는 것들이 많습니다. 아무 가치도 없고 의미도 없는 일에 뛰어다니게 만듭니다. 의미심장하고 중요한 일보다 대개 긴급한 일들로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밥하는 일’, ‘가스 밸브 잠그는 일’, 사실 이런 일들이 긴급하기는 합니다. 하지만 긴급한 일에 뛰어다니다 보면 중요한 일은 다 놓쳐버립니다.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도다. 삶의 우선순위가 기도다’이렇게 결심하고 결단해야 합니다. 여기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새벽기도에 참석하기 위해 한 달 동안만 이렇게 새벽을 깨우는 운동을 벌이면 나중에는 우리 체질이 개선됩니다. 밤 문화가 다 깨어져 버리고 새벽 문화가 활성화될 것입니다. 한 달만 저녁에 일찍 자고 새벽에 일어나면 체질이 개선되고 악한 습관들이 다 바뀔 것입니다. ‘주여, 모든 분주함을 끊어버리고 무릎 꿇게 하옵소서’
2.우리는 다른 것을 의지할 때 기도하지 않습니다.
기도보다 더 믿을 것이 많을 때는 기도하지 않습니다. 돈, 능력, 권세 등등이 기도에 방해물이 될 수 있습니다. 사31:1절‘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 진저 그들은 말을 의뢰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앙모치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거니와’기도하지 않는 이유가 믿을 것이 너무 많기 때문임을 잘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기도에만 매달린다는 것은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오직 주님만 의지합니다’이런 마음으로 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도를 비상 낙하산으로 생각하는 사람을 미워하십니다. 낙하산은 최후의 수단으로서 할 수만 있으면 사용되지 않을수록 좋은 도구입니다. 낙하산을 사용하는 상황은 결코 좋은 상황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기도를 비상 낙하산이라도 되는 듯 여긴다는 것입니다. ‘제일 마지막에 사용하는 것이 기도다. 그리고 되도록 사용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편안한 인생이 되기를 원한다’이런 배짱들을 가지고 산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낙하산이 아니라 공격용 무기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도가 우리의 최고의 힘입니다. 기도할 때 하늘과 땅이 움직입니다. 역사의 물줄기가 바뀝니다. 무엇으로 사람의 마음이 변화됩니까? 기도해보십시오. 사람이 변합니다. 지금 답답하게 보이는 길들이 열립니다. 기도의 능력을 활용하는 하나님의 종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3.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몰라서 기도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기도하면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성령께서 구해야 할 것들을 가르쳐 주십니다. 여러분은 기도의 제목이 바뀌는 것을 느낍니까? 기도회 시작할 때 기도하고자 한 제목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도회 마칠 때쯤 보면 기도의 제목이 달라져 있습니다.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기도하면 할수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분의 뜻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기도할 때 반드시 수첩을 펴놓고 기도합니다. 처음에는 기도할 때 ‘내 사정을 아뢴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기도를 하다보니 내 사정이 아니라 주님의 마음을 듣는 시간으로 바뀌었습니다.
‘나는 이렇게 하고 싶은데 하나님은 더 급한 것이 있다’라고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추적하는 작업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듣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기도가 충만해지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이해하고, 방황하지 낳는 직선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항상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길로 인도함 받는 우리 주의 백성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기도는 심는 것입니다. 많은 기도를 심어서 많은 열매를 거두기를 부탁드립니다. 기도는 물 대는작업입니다. 우리가 물댄 많은 곳에서 왕성한 생명현상이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기도가 닿은 곳에 열매가 맺히게 하소서’ 하나님이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낙심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열매를 보여주십니다. 항상 기도하세요. 하나님은 열매를 열리게 해주십니다. 자주 하나님께 찾아가세요. 하나님은 자주 응답해 주십니다. 일평생 기도하세요. 하나님은 일평생 도와주십니다. 그리고 영원히 함께 하십니다. 기도는 곧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기도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이 바라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면 분명히 응답을 받을 것입니다.
김진태라는 37살 된 사형수 이야기가 신문에 실렸습니다. 그는 사형수였습니다. 10년을 감옥에서 사형수로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왕 죽을 것 성실하게 살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사람을 죽이고 사형수가 된 것을 철저히 회개하고 사형이 집행되는 그 날까지 교도소에서 굳은 일은 혼자 다 맡아 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이왕 죽을 몸 아끼지 말자고 다짐하였습니다. 누가 영치금을 넣어 주면 죽을 몸이 ‘돈을 써서 무엇 하느냐’고 여기며 헌금하고 이웃을 돕는 일에 모두를 사용하였습니다.
3개월마다 방이 바뀌는 데 바뀔 때마다 그 안에 있는 이들을 다 전도하였습니다. 그래서 감옥에서 그의 전도를 받은 사람이 600명가량 되었습니다. 장기도 모두 기증하였습니다. 사형당하는 순간 각막, 간등 장기를 모조리 떼어 가라고 싸인을 하였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에 이 사실이 보고되었습니다. 김 대통령은 정권 말기에 이 사람을 살리고 대통직을 물러가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면권을 행사하였습니다. 사형에서 면제되었고 10년 살았으니 출감되었습니다. 작정된 것이 시행되기 전에 늦기 전에 기도하면 하나님이 숨게 만들어 주십니다. 기도히기를 좋아하는데 방해 거리가 생겨나지 않도록 기도하셔서 여러분이 기도하는 것마다 응답받는 역사가 일어나시기를 축원합니다.
심판과 재앙이 오기전
스바냐 2:3
우리는 심판의 날, 곧 본문에 기록된 말씀대로 진노의 날, 재앙의 날이 임하기 전에 우리 성도들은 경성하고 회개하며 또 하나님께 간절힌 부르짖어 기도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것도 실망을 주고 낙심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여러분을 더 가까이 하기 위한 것입니다. 선지자 스바냐도 이 말씀을 한 것이 낙심시키고 절망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이키기 위함이며, 두려워 떨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자기들의 죄를 두려워하게 하기 위하여 이러한 경고의 예언을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때일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이 스바냐 선지를 통해 하나님께 숨기움을 받고 보호받는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그런데 이러한 일이 일어나기 전에 해야 될 일이 있다고 했습니다.
오늘 말씀드릴 스바냐 선지는 유대왕 요시아 때의 예언자로서 선한 왕이었던 히스기야 왕이 죽은 후 므낫세, 암몬, 두 왕이 우상을 숭배하고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대단히 타락하고 문란했던 때의 선지자입니다. 이 죄로 말미암아 부패했기 때문에 만일 속히 회개하고 돌이키지 않으면 바벨론 나라가 들어와 이스라엘을 치는 무서운 재앙과 심판이 임하게 되리라고 하면서 이 무서운 심판과 재앙의 날이 오기 전에 어서 속히 하나님을 찾아서 회개하고 돌이키라는 경고의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찾으라고 했습니다. 암5:4절‘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고 했고, 6절에도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명예나 물질이나 쾌락을 찾는 것보다 하나님을 먼저 찾아야 합니다. ‘찾으라’는 말은 하나님을 사모하고 구하라는 말도 되고, 또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라는 뜻도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앙모하고 사랑해야 되겠습니다.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새 힘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겔 22:30절‘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서서 나로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서 찾다가 얻지 못한고로 내가 내 분으로 그 위에 쏟으며 내 진노의 불로 멸하여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보응하였느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의 불로 그 백성들을 멸하려고 했을 때 그것을 가로막아 하나님 앞에 용서해 달라고 부르짖는 사람이 있으면 용서하여 주려고 했으나 아무도 없었기에 멸망시키고 말았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아무리 이 백성이 타락하고 부패했다 할지라도 믿는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막아 서서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할 때 공산당의 남침의 위협도, 재난도 막아 주실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금년이야말로 과거 어느 때보다 더욱 하나님을 사모하고, 의지하며 간절히 기도하고, 부르짖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자신과 가정과 교회와 나라와 민족을 위해 항상 기도해야 할 해인 줄로 생각합니다.
더 늦기전에 여호와를 찾아야 합니다. 어느 여름 밤, 식구들이 함께 모여 저녁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어린 손자와 할머니가 마주보고 앉아 있었습니다. 한참 맛있게 식사를 하다가 어린 손녀가 소리쳤습니다. ‘할머니! 할머니’할머니는 식사를 하다가 호들갑을 떠는 손자를 점잖게 꾸짖었습니다. ‘얘야, 밥을 먹을 때는 조용해야지. 그렇게 호들갑을 떠는게 아니란다’,‘그래도 할머니 급한 일인데’,‘참아라, 밥을 다 먹은 후에 말을 하렴’,‘그게 아닌데’묵묵히 식사를 마친 후, 할머니가 입을 열었습니다. ‘얘야, 아까 급한 이야기라고 한 게 뭐냐? 이제 말해 보렴’손자는 힘없이 대답했습니다. ‘이젠 때가 늦었어요’,‘때가 늦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아까 할머니 국에 파리가 한마리 빠져 있었거든요. 그걸 말하려고 했는데, 지금 그 파리는 할머니 뱃속에들어가 버린 걸요’,‘뭐야’ 이놈아...더 늦게 전에 여호와를 찾아야 합니다.
우리 민족이 하나님의 천노를 받지 않고 이 국가적인 어려움을 이겨나가기 위해서는 여호와를 간절히 찾아야 합니다. 3절에서 스바냐 선지자는 여호와를 찾으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 말은 습1:6절‘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는 자’ 와 비교되는 말씀으로써 ‘찾으면 생명이 있고 찾지 않으면 죽음만이 있을 뿐이라’는 말씀입니다. 즉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가 ‘여호와를 찾음에 있다’는 것으로써 민족과 교회의 흥망성쇄가 여기에 달려 있다 하는 무서운 말씀입니다.
암5:4,6 절에 보면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라고 강조하고 있는데 성경은 여호와를 사모하고 찾을 때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고 구원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음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사43:3.시42:1.시19:37) 그렇다면 여호와를 찾는다고 할 때 구체적으로 우리는 어떤 것을 찾아야 하겠습니까? 겸손이 없었기에 죄의 수치를 몰랐습니다. 공의가 없었기에 사회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불의와 부정을 일삼았고 겸손이 없었기에 죄를 죄로 여기지 않았으며, 혹 더러 죄를 죄로 여겨도 회개할 줄 몰랐습니다. 여러분, 이러한 자들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2절에 예언대로 반드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을 맞이하게 되는데 스바냐는 그 사실을 다음과 같이 예언했습니다. 습1:12‘그 때에 내가 등불로 예루살렘에 두루 찾아 무릇 찌끼 같이 가라 앉아서 심중에 스스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복도 내리지 아니 하시며 화도 내리지 아니하시리라 하는 자를 벌하리니 그들이 재물이 노략되며 그들의 집이 황무할 것이라 그들의 집을 건축하나 거기 거하지 못하며 포도원을 심으나 그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심히 빠르도다 여호와의 날의 소리로다 용사가 거기서 심히 애곡하는도다. 그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무와 파괴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요’ 우리는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성회, 공의와 겸손으로 가득차도록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복된 약속을 붙드시기를 바랍니다. 3절 말씀은 우리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앞에서 한국의 교회와 민족이 살기 위해서는 먼저 여호와 앞에 나가야 하고 하나님을 간절히 찾아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마지막으로 우리 성도들이 이런 삶을 살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의 약속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고 믿음으로 그것을 굳건히 붙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3절‘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3절의 말씀은 언뜻 오래되기가 쉬운 구절입니다. 축복과 약속의 말씀이라는 사실이 잘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어떤 성도가 주일을 지키지 않고 고구마 캐러 가다가 길에서 호랑이를 만났습니다. 놀란 성도는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이 호랑이로부터 살려 주세요’그런데 한참 기도하니, 옆에서 호랑이도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성도는 호랑이에게 물었습니다. ‘호랑아 너 지금 무엇 하니’,‘응 기도 한다’,‘너 하나님 아니’,‘응, 안다’ 그는 살았구나 싶어서 다시 물었습니다. ‘너 지금 무슨 기도했니’,‘응, 식사기도’ 그는 속으로 하나님께 다시는 주일을 어기지 않을 터이니 살려달라고 기도하는데 지혜가 떠올랐습니다. ‘호랑이야! 식사 기도는 더 오래 하여야 한단다’그리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호랑이가 식사 기도를 오래 할 때 옆 나무위로 잽싸게 올라가서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여호와의 규례를 어기면 진노가 임하지만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면 하나님이 분노의 날에 숨겨 주십니다.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스바냐 선지자는 구체적으로 이 구원의 약속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주고 있습니다. 남은자가 있어 각각 자기 처소에서 여호와께 경배할 것이다(2:11), 입술이 깨끗해지고 사죄의 은혜가 넘치며 여호와의 기쁨이 될 것이다(3:9), 큰 명성과 칭찬을 얻을 것이다(3:20),주께서 늘 함께 할 것이다(3:15,17), 우리는 주의 초림을 예배했던 세례요한과 같이 주의 재림을 예비하는 제 2의 세례요한이 되어 이 거칠고 메마른 세상을 향해 회개를 촉구하고 담대히 주의 재림을 선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우리가 늦기 전에 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회개하시고. 기도하시며, 하나님을 찾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방적인 삶을 버리라
습2:1-3
오늘 본문 스바냐서 2장은 세계 만민을 향한 회개 촉구와 이방 나라들에 대한 심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1장에서 자기 백성의 심판을 말씀하신 후에 이방의 멸망을 다룹니다. 왜 맨 먼저 자기 백성을 다루실까요? 그것은 더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벧전4:17에‘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했습니다. 지금 이방 종교나 사회 문화 기타 세상이 더 타락하지만 왜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더 고통받게 하시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맛 잃은 소금이 사람의 발에 밟히듯 하시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교회를 더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심판은 언제나 교회에서 먼저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자기 백성 유다 나라의 심판을 말씀하신 후에 이제는 이방 나라의 심판을 말씀하십니다. 본문의 이 회개 촉구에서 우리는 몇 가지의 사실을 발견합니다. 이방인적인 삶이 어떤 것임을 말씀합니다.
1.죄의 수치를 모르면 이방인적인 삶입니다.
여기 ‘수치’라는 ‘닉사프’라는 용어는 ‘부끄러워하다, 사모하다’라는 뜻을 가진 ‘카사프’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그러므로 수치를 모른다란 죄악을 행하고도 너무 뻔뻔스럽다는 뜻입니다. 물론 이방인도 양심도 있고 어느 정도 선도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의 양심은 없습니다. 특히 동양인들은 양심보다는 체면을 중시합니다. 엡4:17-19에도‘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한다’했습니다. 아직도 죄를 보고도 놀라지 않는다면 이방인의 속성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하나님을 열망하지 않아도 이방인적인 것입니다.
앞의 ‘닉사프’의 다른 의미인 ‘사모하다’는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죄란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것도 죄지만 하나님을 열망하지 않고 안이한 것도 죄입니다. 이방인이 구하는 것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는 현세적인 것이요 간혹 내세를 추구하는 종교가 있긴 하나 역시 자기만을 위한 것일 뿐 하나님을 열망하는 그런 종류는 아닙니다. 우리 기독교의 특징은 그 무엇보다 하나님을 원함이요 그 분을 사랑함이요 그 분과 연합되어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6:31-33절‘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하셨습니다. 여기 그의 나라와 그의 의는 예수님이시오 성령이십니다. 혹시 하나님 열망 없는 안이한 삶이라면 속히 이방인의 껍데기를 벗으시기 바랍니다.
3.회개하지 않는 것도 이방인적인 것입니다.
1절에 ‘수치를 모르는 백성아 모일지어다 모일지어다’했습니다. 여기 ‘모일지어다 모일지어다’는 단순한 모음이 아닌 회개를 암시하는 용어입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할 때마다 모였던 것처럼 뉘우치며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를 간구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그런데‘모일지어다’를 두 번을 반복함은 회개하고 회개하라 깊이 더 깊이 회개하라는 강조형입니다. 우리가 회개를 그렇게 해야 합니다. 구약 시대 성도들이 모여서 회개함 같이 우리도 흩어진 마음을 모아 진심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이것이 구약 모임의 신령한 의미입니다. 마음을 모아 하는 회개가 아니면 그것은 회개가 아니오 기도도 아닙니다.
욜2:15-18에 ‘너희는 시온에서 나팔을 불어 거룩한 금식일을 정하고 성회를 선고하고 백성을 모아 그 회를 거룩케 하고 장로를 모으며 소아와 젖 먹는 자를 모으며 신랑을 그 방에서 나오게 하며 신부도 그 골방에서 나오게 하고 여호와께 수종드는 제사장들은 낭실과 단 사이에서 울며 이르기를 여호와여 주의 백성을 긍휼히 여기소서 주의 기업으로 욕되게 하여 열국들로 그들을 관할하지 못하게 하옵소서 어찌하여 이방인으로 그들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말하게 하겠나이까 할지어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자기 땅을 위하여 중심이 뜨거우시며 그 백성을 긍휼히 여기실 것이라’했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모여서 기도하는 일도 필요합니다. 모두가 집에서도 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영광을 보이시기 위해서 모여서도 기도하도록 하십니다. 그렇지 않고 이루어 주시면 사람들이 제 복에 그렇게 된 줄로 착각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마음을 모으지 않는 이방인적인 삶이라면 속히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4.하나님 두려움도 범죄 하면 죽는 것을 모름이 이방인적인 것입니다.
2절에 ‘명령이 시행되기 전’이라 했습니다. 여기 ‘명령’은 개역 성경에서 ‘규례’로 번역된 용어로서 율법의 규정을 가리킵니다. 즉 율법에 나타난 저주의 규정대로 시행되기 전에 회개하라 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심판이 율법에 명시된 대로 임할 것을 시사합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만 굳센 약속을 했습니다. 신27:15에 ‘장색의 손으로 조각하였거나 부어 만든 우상은 여호와께 가증하니 그것을 만들어 은밀히 세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응답하여 아멘 할지니라’했습니다. 16절에도, 17절에도, 18절에도 19, 20, 21, 22, 23, 24, 25, 26절에도 저주의 규정이 나옵니다. 신명기 28장에도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는 자에게 임할 저주가 더 자세히 나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이면에는 이방인은 범죄하면 죽는다는 것을 모른다는 뜻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참으로 안다면 회개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방인은 이 사실을 모르기에 하나님 두려운 줄 모릅니다. 범죄하면 죽는다는 것을 모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아직도 이방적인 속성이 많아서 하나님 두려운 줄 모르고 살아가는 심령이 있습니까?
5.육신에 만족하는 것이 이방인적인 기질입니다.
‘광음이 겨와 같이 날아 지나가기 전’이라 했습니다. 광음이란 ‘욤’이라는 용어로 ‘날’이라는 뜻으로 지상을 사는 동안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겨는 흔히 악인 종말의 허망함을 시사하는 용어입니다. 그래서 시1:4에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했고, 마4:3에 ‘또 너희가 악인을 밟을 것이니 그들이 나의 정한 날에 너희 발바닥 밑에 재와 같으리라’ 했습니다. 그러니까 죽어 심판을 받기 전에 회개하라는 교훈입니다. 그러므로 광음이 겨와 같이 날아 지나가기 전이란 미래를 대비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혹은 현재의 육신적 삶에 도취되어 있다는 뜻도 암시되어 있습니다. 벧전4:3에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것에 만족하여 살고 있다면 이방인의 삶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6.하나님의 심정을 모름이 이방인적인 삶입니다.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임하기 전,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 너희에게 이르기 전에 그러할지어다’ 했습니다. 여기 ‘진노’란 ‘하론 아프’라는 용어인데 ‘아프’란 분노로 인해 숨을 몰아쉬는 것을 가리키고 ‘하론’은 진노로 말미암아 얼굴이 뻘겋게 달아오르는 상태를 가리키는 용어가 합성된 말입니다. 이것을 신인동성동형론적인 표현이라 하나님에 대한 것을 사람을 빌어 설명한 것입니다. 이처럼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타오르는 진노를 모르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심정을 모릅니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진노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성령으로 내 심령 안에 있어 하나님과 함께 기뻐하고 슬퍼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영원 전부터 아버지의 기쁘신 뜻대로만 사셨습니다. 이처럼 참된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심정을 헤아립니다. 이와 같이 죄악의 두려움을 모르고 현실에 안주하고 있으며 하나님을 열망하지 않고 마음을 모아 회개하지 않으며 죄의 결말과 하나님 두려운 줄 모르고 육신에 만족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깨닫지 못하는 이방인의 마음이 있다면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긍휼함을 받는 방법
습2:1-3
그것은 여호와와 그 공의와 겸손을 구함입니다. 3절에‘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했습니다. 여기 여호와를 찾으라는 것은 회개를 뜻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는 것은 그 구체적인 회개의 내용으로 믿음과 성화를 향한 노력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여기 ‘혹시’란 불확실을 가리킨다기보다 겸손한 자들조차도 그 심판에서 제외되기 어렵다는 의미입니다. 그만큼 여호와의 날은 철저히 죄악을 처리하시는 날입니다. 아무도 이 날에 자기를 의인이라고 할 자가 없습니다. 나는 믿을 만큼 믿고 회개할 만큼 했다고 자부하던 사람도 자신의 죄악을 발견하고 애통합니다. 즉 겸손하고 경건한 성도들도 겨우 얻는 성화 구원인데 이방인적인 기질 가지고는 불가능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더욱 여호와와 그 공의와 겸손을 구해야 합니다.
벧전4:7-9절에‘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 서리요’라 했습니다. 이 겨우 얻는 구원은 성화 구원입니다. 눅13:24에‘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하셨습니다. 이 세속을 떨구는 구원을 이루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마음은 우리 속의 죄악의 원수로 인해 기뻐하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지어다’ 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마치 욥이 욥23:10절‘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한 고백과도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신자들을 불과 같이 훈련하시고 계신다라는 말씀입니다. 이 훈련에 열심히 동참하시어 신앙생활에 부족함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장성한 수준을 향하여 자라 가시기 바랍니다.
1.모여야 할 대상자는 누구인가?
1절‘수치를 모르는 백성’은 수치스러움이 가득찬 백성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말은 모욕적인 언사로 하나님을 찾지도 아니하며 무감각하게 살아가는 백성들을 가리킵니다. ‘모일지어다 모일지어다’이 말은 히브리어적 표현 방법으로서 강조를 한 말입니다. 심판의 날, 진노의 날인 여호와의 날이 이르기 전에 모여서 하나님을 찾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때가 있는 법입니다. 그 때를 놓치면 구원이 불가능합니다. 구원은 우리의 육신의 생명이 살아있을때에 가능한 것입니다. 고후6:2‘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했습니다.
3절‘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입니다. 본 구절에서 스바냐가 권면하는 대상은 오직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뿐입니다. 왜냐하면 그 외의 사람들은 도저히 여호와의 날에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겸손한 자들은 누구인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구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계명과 규례들을 지키는 자들입니다. 이방인이나 유다 백성이나 그 혈통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을 간절히 기대하며 겸손히 공의를 행하며 하나님의 규례를 즐겨 찾는이들입니다.
2.언제 모이여야 하는냐
2절에 의하면 명령이 시행되기 전에 모여야 합니다. 광음이 겨같이 날아 지나가기 전, 낮과밤을 말하는 날자가 순식간에 지나간다는 뜻입니다.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임하기 전,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 너희에게 이르기 전에 그러할지어다 했습니다. 이것은 여호와의 날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이 정도가 매우 강할 뿐 아니라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표현한 말입니다. 스바냐가 지속적으로 다른 표현을 사용해서 엄한 심판이 임하는 여호와의 분노의 날을 설명하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여호와 앞으로 돌아서도록 초청하기 위함입니다.
3.모여서 구해야 합니다.
3절‘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했습니다. 마7:7절‘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했습니다. 마7:8절‘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마7:11‘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2:3절‘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숨김을 얻는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보호를 받는다.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스바냐는 겸손한자들 조차도 심판이 행해지는 여호와의 날에 겨우 하나님의 은혜를 얻을 것인지 모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상은 아모스에게도 나타납니다. 암5:15‘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공의를 세울지어다’했습니다.
스바냐는 그런 사람들에게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공의는 표준새번역에 보면 올바로 사는 것을 뜻하고, 겸손을 구한다는 것은 가난을 구하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공의와 겸손은 도덕 교과서에 나오는 어떤 덕목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질서를 뜻합니다.
올바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 그의 삶과 교훈을 통해서 공의와 겸손이 무엇을 뜻하는 지 명확하게 나타났습니다. 공의는 하나님이 원래 창조하셨던 세계의 회복을 뜻하는 것입니다. 올바로 사는 길은 바로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지켜 사는 것입니다. 창조질서를 지킨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 체계의 일부임을 인식하고 그 체계가 막히거나 망가지지 않도록 협력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바로 위로는 하나님을 섬기고 아래로는 자연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올바른 삶 즉 공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런 공의의 회복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 그리고 인간과 자연 사이의 막힌 담을 헐어서 원할한 생명의 순환이 이루어지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우리에게 섬기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스바냐가 말하는 공의 즉 올바로 사는 길입니다. 여기서 섬긴다고 할 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섬기고, 사람을 섬기고, 자연을 섬기는 것을 뜻합니다. ‘섬긴다’는 봉사한다는 뜻입니다. 높은 자리에 올라 섬김을 받는 것과 달리 낮은 자리에서 하나님의 세계에 속한 모든 존재를 봉사하는 것을 뜻합니다. 섬김을 받아 마땅하신 하나님의 아들조차도 섬기러 이 땅에 오셨다면 말할 것도 없이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은 다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스바냐는 겸손을 구하라고 하였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가난하게 살라는 말입니다. 가난을 추구한다는 말은 이 세상에 대한 욕망을 버린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가난이란 돈이 없는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도 명예도 모두 버린 상태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 땅에서 상위권에 오르기 위해 필요한 재물이나 권력이나 명예를 모두 포기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그가 하늘에서 가지셨던 모든 영광과 부와 존귀를 버리고 완전하게 가난한 자로 이 땅에 오셔서 철저하게 섬기는 삶을 사시다가 마침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이런 철저한 비하, 가난, 겸손함을 통해서 비로소 새로운 생명의 역사가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우리도 예수님처럼 모든 욕망을 비우고 가난한 자로, 겸손한 자로 주님을 따르며, 그가 하신 것처럼 이웃을 섬기고, 자연을 섬기며 하나님을 섬길 때 여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우리 안에 아직도 이방인의 속성이 있습니다. 이 속성으로는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 이 속성 가지고는 성화에 이를 수 없습니다. 이 속성도 은혜의 심판을 받아 처리되어야 합니다. 진정 자신을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과 겸손을 구하며 날마다 새로워지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정금 같이 나오는 상주감리교회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불레셋의 심판
습2:4-7
블레셋에 대한 심판입니다. 여러 지명들이 다 블레셋의 성읍들입니다. 가사, 아스글론, 아스돗, 에그론이라는 네 개의 대표적인 큰 성읍이 버리우고 황폐되고 도망가고 뽑힌다는 것입니다. 5대도시를 자랑하는 족속이지만 여기 4개 성읍만 기록한 것은 동서남북 네방면으로 이방인의 멸망을 예고하는 것과 대비시키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블레셋은 사사시대로부터 이스라엘을 많이 괴롭힌 나라입니다. 블레셋이 유다를 공격할하여 이길 때마다 어떤 마음이었겠습니까? 우리의 신이 너희의 신보다 강하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니 더욱 교만하여 진 나라입니다. 이런 나라를 멸하여 거민이 없게 하시겠다고 합니다. 그 나라가 무너져서 성읍이 목장이 되어버릴 것이며 유다의 남은 자손들이 그곳에서 양떼를 먹일 것이라고 합니다. 유다를 심판하셔도 멸절하지는 아니하십니다. 남은 자손들이 있는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이 참 신이심을 증거 하시는 것입니다.
심판의 대상으로 먼저 블레셋이 언급되는데 블레셋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는 다섯 개의 블레셋 성읍 가운데 네 개를 언급함으로써 시작됩니다. 그 중에 갓이 빠져있는 이유는 웃시야와 히스기야가 이미 갓을 정복하여 멸망했기 때문입니다. 블레셋은 유다 남서쪽 지중해 연안에 있는 나라로 이들 민족의 초기 역사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이 살던 주전 2100년 쯤에 이미 해안에 정착했으며 여호수아 때부터 이스라엘과는 적대관계였습니다. 주목할 사실은 아스돗이 대낮에 멸망한다는 것인데 이런 시간에 적들이 침입한다는 것은 특이한 일로서 전혀 예상치 못한 시간에 심판이 있을 것을 말해 줍니다.
해변에 거주하는 블레셋 사람들에게도 심판이 임할 것입니다. 이들에게 미칠 심판은 그들의 거주지인 해변은 황폐하게 되고 아무도 살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과수원도 파괴되어 그 자리에는 잡초와 엉겅퀴가 무성하게 될 것입니다. 거주지였던 땅은 짐승이 짓밟고 풀을 뜯어먹는 장소가 될 것입니다. 이곳에 남은 유다의 남은 자들이 들어와 살게 되는데 이는 유다가 바벨론 포로로부터 70년이 지나 다시금 회복될 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블레셋의 주요 도시와 지역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심판 기사를 통해 볼 때 블레셋이 겉으로는 크지는 않지만 내용적으로는 여러 면에서 대단한 족속입니다. 블레셋은 지금 이스라엘과 대치하고 있는 팔레스타인들을 가리킵니다. ‘블레셋’이라는 이름이 히브리어로는 ‘펠레쉐트’로서 팔레스타인이라는 이름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그러나 현재에야 예수 믿으면 형제자매지만 구약의 기록을 영적으로 보면 블레셋은 사단의 상징입니다.
사단이란 우리가 은혜 받기 전에는 얼마나 맹위를 떨쳤던 자들입니까? 이스라엘 허리 한쪽 부분에 거주하면서 이스라엘이 조금만 약해지면 쳐들어와서 괴롭히고 괴롭히던 족속이 바로 블레셋입니다. 이처럼 성도가 조금만 영적으로 약해지면 시험하던 악의 세력입니다. 블레셋은 싸움을 좋아한 호전적인 민족입니다. 사울도 다윗도 얼마나 그들 때문에 수고가 많았습니까? 이처럼 사단은 지금도 시시각각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치기 위해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는 찾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은혜의 날에 사단의 역사가 어떻게 되는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1. 십자가의 공로가 나타나 사단은 패배자가 됩니다.
4절‘가사가 버리우며’라고 했습니다. 가사란 ‘강한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블레셋은 참으로 끈질기고 끈질긴 나라입니다. 그래서 ‘가사가 버리우며’라는 문구에서 블레셋의 장구성을 엿봅니다. 왜냐하면 버림을 받을 수 없는 그들이었건만 버림을 받는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단은 지상 인간들의 왕권은 사라지고 역사는 바뀔지라도 그들의 세계는 변함없이 계속된 강대한 것입니다. 사단은 아담의 왕권을 빼앗아 공중 권세 잡은 이 세상의 임금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주권 하에서만 가능한 일이지만 사단은 이 세계의 모든 분야를 마음대로 할만큼 강력한 권세를 가졌습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 할 때도 눅4:6-7절‘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고 시험할 만큼 그 권세는 아담에게 빼앗은 합법적이요 강한 것이었습니다. 심지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승리하셨지만 여전히 승리자처럼 행세하려는 것이 사단의 세력입니다. 아직도 십자가에서 승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단의 대적을 속수무책으로 당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이해하시겠습니까?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여호와의 날에는 그들이 비로소 버림을 당합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날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는 날은 비로소 예수 공로가 현실화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2. 은혜가 임하면 사단의 세력은 힘을 잃고 맙니다.
또 ‘아스글론이 황폐되며’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엿보이는 것은 블레셋의 부요와 번영입니다. 토지가 비옥하고 포도의 주산지이기도 한 이 곳이 여호와의 날에 황무지로 변하고 만다는 예언입니다. 아스글론은 유다 지파가 잠시 정복한 이후 사울과 다윗시대에도 정복하지 못한 강한 도시입니다. 이런 강하고 부요와 번영이 있던 곳이 황무지로 변합니다. 이것은 당시 개념으로 볼 때 국가적인 힘을 잃음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은혜가 임하면 사단은 그 강력하던 힘을 잃습니다. 그러나 기억할 점은 사단의 미혹은 전에도 이 후에도 은혜를 받기 전에나 후에도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항상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두루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 받으면 더 이상 성도의 마음을 정복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사단의 시험을 당하지 않도록 열심히 기도해야 합니다. 가정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사단은 멀리멀리 피하고 맙니다. 사단을 왜 하나님께서 아직 놔두십니까? 자기 백성 훈련용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묵상파다 말씀파다 그런 소리 말고 최소한 사단을 이길 만큼은 경성해서 신앙생활을 경성해서 해야 합니다.
3. 은혜가 임하면 사단은 추방당합니다.
또 ‘아스돗이 백주에 쫓겨나며’라 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블레셋의 요새화된 안정성을 봅니다. 그러니까 아스돗은 블레셋의 일부분에 불과하지만 이 한 성을 통해서 블레셋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아스돗은 블레셋의 5대 성읍 중에서 가장 세력이 강하고 안정된 곳으로 아무도 넘보지 못할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안심하며 낮잠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져서 백주 대낮에 쫓겨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 말고는 아무도 그 어떤 방법으로도 사단을 추방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위치가 얼마나 안정된 곳이든지 제자들도 하나님의 능력을 입기 전에는 아무리 귀신을 명하여 나가라 나가라 했지만 꼼짝하지 않았습니다. 그 만큼 강력한 세력이 사단입니다. 그들은 인간보다는 비할 수 없는 큰 권세와 능력과 꾀를 가졌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기도와 금식 외에는 이같은 것이 나갈 수 없느니라’하셨습니다. 기도와 금식이란 무엇입니까? 성령의 은혜와 겸손을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기도하면 은혜가 임하고 은혜가 임하면 귀신이 나갑니다. 혹은 금식하면 겸손해지고 겸손해 지면 은혜가 옵니다.
하나님을 끝까지 믿고 사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전에 사단에게 넘어간 모든 것이 이제는 우리의 것으로 회복됩니다. 우리를 넘어지게 하고 황폐하게 했던 사단의 역사는 사라지고 우리에게 성령이 역사하사 평안과 영적인 부요로 넘치게 하시는 푸른 초장의 양이 되게 하십니다. 마치 가나안 땅을 정복한 만큼 복을 누리게 하심과 같이 사단을 정복한 만큼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복락을 누립니다. 영적 전쟁을 하면 할수록 우리는 복락을 누립니다. 의로움이 오고, 기쁨이오고, 평안이오고, 능력이오고, 형통이오고, 기적이 옵니다. 그러므로 복되고 아름다운 삶을 위해서는 영적 싸움을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은혜가 임하면
습2:4-7
1.은혜가 임하면 사단이 더 이상 정착하지 못합니다.
또 ‘에그론이 뽑히우리라’ 했습니다. 에그론은 블레셋 5대 성읍 중 가장 북쪽에 위치한 성으로 이스라엘의 산간 지역을 장악하기 위한 요새지였습니다. 이 땅은 ‘불모지’라는 의미이지만 그들이 완전히 정착하였고 더 많이 정착하려고 이스라엘을 넘보던 곳입니다. ‘뽑히우리라’는 의미는 ‘뿌리 채 뽑히다’라는 뜻으로 정착의 흔적조차도 남지 않을 것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사단은 사람들의 마음에 정착하려고 얼마나 애쓰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불모지 즉 물 없는 곳을 찾아다닙니다(마12:43). 이 물 없는 곳은 말씀이 없고 은혜가 없는 것입니다. 그곳이 그들이 정착할 쉴 곳이기도 합니다. 사실 사단의 영향권에서 완전히 벗어난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그러나 은혜가 임하면 사단은 각인에게서 추방을 당합니다. 왜냐하면 사단이 거할 집이 다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사람에 정착할 때 반드시 틈이 있어야 들어오고 집이 있어야 거하게 되는데 그 집은 잘못된 비 진리나 상한 마음이나 죄악이나 불신앙이나 어떤 잘못된 고정관념 두려움 등입니다. 마치 귀신이 돼지 떼에 들어갔듯 이런 마음은 사단이 좋아하는 집이요 그래서 그들은 이런 집을 짓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런데 은혜 받아 이것이 사라지고 나니 사단이 어떻게 정착할 수 있겠습니까?
2.은혜가 임하면 사단은 더 이상 우리를 넘어뜨리지 못합니다.
5절에 ‘해변 거민 그렛 족속에게 화 있을진저’했습니다. 여기 ‘그렛 거민’은 그레데 섬에서 이주하여 블레셋 사람들이 된 한 족속을 가리킵니다(렘47:4; 암9:7). 그들은 해변 지역에 거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렛족속은 그레데섬에서 불레셋 남부해안으로 이주한 거민으로 지중해 연안 비옥한 땅에 살던 해변 거민입니다. 그리고 옛날 출애굽 할때에 자기들의 땅에 이스라엘 사람들을 발도 못붙이게 해서 애굽에서 직선거리로 열하루깃을 되지않는 곳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로 우회하여 40년 넘게 한 적이 있습니다. 그토록 자기들의 땅 자기사는 곳에 대해 애착심과 이기적 아집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의 당이 이제 자신들의 거처도 되지 못해 버리고 도망가야 할 정도로 황폐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자기것을 지나치게 배타적으로 챙기는 사람일수록 그 소유물이 자기 것으로 오래 남지 않는 법입니다. 빈몸으로 왔다가 빈몸으로 가야하는 인생인데 그렇치 못할 때 이렇게 황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항상 이스라엘의 옆구리를 떠나지 않고 괴롭혔습니다. 어떻게 괴롭히느냐? 사단은 세상 정욕의 육신적인 것을 통해서 괴롭힙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시험할 때도 모두 육신적인 것들을 가지고 했습니다. 민33:55에‘너희가 만일 그 땅 거민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지 아니하면 너희의 남겨 둔 자가 너희의 눈에 가시와 너희의 옆구리에 찌르는 것이 되어 너희 거하는 땅에서 너희를 괴롭게 할 것이요’했습니다. 이렇게 너희 너희 너희 너희라는 말씀을 일곱 번이나 강조하시며 경고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아무리 블레셋이 강하고 이스라엘을 지배했어도 예루살렘이 그들의 지배하에 들어간 적은 없었다는 점입니다. 이게 놀라운 기적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대장간조차도 무기를 만들까 염려하여 농기구조차 블레셋에 벼르러 갈 만큼 자유가 억압되어 있었지만 예루살렘은 정복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보여주는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단은 우리 육체와 심령은 정복해도 우리 거듭난 새 생명은 만지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요일5:18).
그리고 또 한 가지는 그들이 허리에 있었던 것처럼 이 지상에 있을 동안에는 그들과는 계속적인 씨름을 해야 합니다. 엡6:12에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창3:15에‘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하신 것처럼 다윗이 블레셋 장수 골리앗의 머리를 물맷돌로 쳤던 것도 예수님께서 사단의 머리를 깨신 것의 예표입니다. 그 때 시내의 매끄러운 돌이 5개였죠?(삼상17:40) 하나로서 일은 끝났지만 5개가 나온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5는 고통의 수입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통해서 승리하실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또 시내의 매끄러운 돌이라고 한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성경에 약속하신 예언의 성취임임을 시사합니다(고전15:3,4). 그리고 대장끼리 싸워서 승리를 결정한다든가 블레셋은 틀림없는 사단의 예표입니다. 이런 장군들의 대결은 당시 소수의 지역에만 있었던 특수한 것으로 이런 진리의 예표가 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이런 해변에 거하는 그렛 족속 블레셋이 여호와의 날에는 사라지게 됩니다.
3.사단이 나갈 때 악의 속성까지도 함께 처리됩니다.
5절에 ‘블레셋 사람의 땅 가나안아 여호와의 말이 너희를 치나니 내가 너를 멸하여 거민이 없게 하리라’했습니다. 여기 블레셋을 가나안으로 지칭한 것은 블레셋이 가나안의 끝에 위치한다든가, 가나안이란 ‘낮은 땅’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어 해변 지역에 거주하는 그렛 사람과 연관된 표현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블레셋은 가나안의 멸망할 7족속 중 하나라는 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7족속의 하나가 아니라 가나안을 모두 블레셋 땅인 것처럼 호칭함을 유의해야 합니다.
그들 5대 성읍은 동맹을 체결하여 이스라엘을 위협했고 철기로 무장하고는 이스라엘을 공략했으며 심지어 언약궤까지 빼앗아 갈 정도였습니다. 그들 5대 성읍 방백들의 공통점은 협의하여 혈맹관계를 유지하면서 이웃 부족의 침략을 임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불레셋 성읍들이 황폐하여 버리우고 살 처소가 되지 못하여 피하며 성벽이 뿌리뽑히듯이 지반까지 무너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고 대적하는 사람들의 은거지와 견고한 기업은 이무리 겉보기에는 튼튼하고 번성하는 것처럼 보여도 일순간에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남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은 자랑스런 근거마져도 허무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의 역사에서 가나안 전체가 블레셋 땅이 된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2000년 동안 나라를 잃고 세계의 방랑자가 된 사이에 블레셋이 그 땅을 모두 차지하여 살므로 성경의 예언은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런 배경을 통해서 어떤 신령한 진리를 전달하시기 위함입니다. 가나안 7족이 영적으로 무엇입니까? 전적 부패하고 타락한 죄악의 속성입니다. 이처럼 모든 악의 속성이 사단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단의 세력이 제거될 때 다른 악의 속성도 아울러 처리됨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하실 때 의의 모든 것이 나타나고 사단이 정복할 때 모든 부패한 악의 속성들이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사단을 이김은 악을 이김이요 사단의 시험은 곧 악의 시험입니다. 이것이 신령한 공식입니다. 그러므로 은혜의 날에 사단의 추방은 물론 그와 함께 다른 악까지 함께 처리됩니다.
4.은혜의 날에 사단이 물러간 그 자리에는 성령의 온갖 아름다운 은혜와복락이 존재합니다.
6-7절‘해변은 초장이 되어 목자의 움과 양 떼의 우리가 거기 있을 것이며 그 지경은 유다 족속의 남은 자에게로 돌아갈지라 그들이 거기서 양 떼를 먹이고 저녁에는 아스글론 집들에 누우리니 이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가 그들을 권고하여 그 사로잡힘을 돌이킬 것임이니라’했습니다. 이것이 바뀌어지는 은혜입니다. 유다 발자국도 허용하지 않던 완악한 불레셋의 온 지경이 마침내 유다의 남은 자들의 목초지로 사용되어서 양떼를 먹이고 키우는 목초지와 목자들의 움막의 터전이 되리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회복시킨 한아님은 그 땅가지 주셔서 그들의 기쁨이 이전의 고통보다 배가 시키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호와의 날은 이런 축복의 날입니다. 이 날은 성도를 온전케 하시는 날이요 악과 사단의 세력이 사라지는 날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런데도 이 날을 사모하지 않으시렵니까? 우리 모두 이 은혜의 날을 사모하여 날마다 하나님을 경외하시기 바랍니다.
모암과 암몬 1
습2:8
오늘은 모압과 암몬에 대한 심판의 경고입니다. 모압과 암몬이 여호와의 날에 어떻게 되는가?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모압과 암몬이 비유적으로 무엇을 암시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이들은 육체와 그에 속한 마음 그러니까 자아를 가리킵니다. 갈5:19-21에‘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했습니다.
우리는 모압과 암몬이 육체와 육신적인 마음을 가리키는 증거를 많이 찾을 수 있습니다. 이들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소생들이기 때문에 이스라엘과 한 혈족들입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는 신2:8-9절‘모압을 괴롭게 말라 그와 싸우지도 말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영혼과 육체는 서로 갈등관계이긴 하지만 한 인격의 구성이기 때문에 죽이거나 소멸시킬 수는 없는 관계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롯과 그의 두 딸들과의 관계 속에서 되어진 불륜의 자손들입니다. 이처럼 거듭난 성도들의 마음에도 아직은 부정한 두 종류의 성향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육체와 그 마음입니다. 엡2:3에‘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다’고 말씀합니다.
모압과 암몬은 가나안을 향해 가는 이스라엘의 앞길을 막았습니다. 이처럼 우리 신앙 생활하는데 무엇이 장애 원인입니까? 육신과 그 마음인 자아인 것입니다. 그래서 비켜 가는 이스라엘을 모압왕 발락은 기어코 저주받게 만들려고 발람 선지자를 불러 뇌물을 주어 저주하게 하지만 실패로 돌아가자 결국은 발람 선지자를 재물로 설득하여 이스라엘을 우상과 음행으로 저주받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육체와 그 마음입니다.
성경은 롬8:13절‘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고 말씀합니다. 육신 욕망 하자는 대로하다가는 하나님의 진노를 면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모압과 암몬이 섬겼던 신을 보세요. 어떤 신입니까? ‘그모스 혹은 몰렉’이라는 신입니다. 이 신들을 숭배하는 방법은 자식을 태워서 드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육체와 그 마음이 열망하며 섬기는 세상 정욕은 우리의 영혼을 불태우는 악한 죄악입니다. 이 세상 정욕 때문에 얼마나 우리의 심령을 죽이고 또 죽였습니까?
그런데 이런 일이 있었지요? 다윗이 암몬을 치러 갔을 때도 암몬 왕이 왕자를 태우자 그 왕의 그 통분함이 얼마나 컸던지 다윗에게도 느껴져서 정복을 그만 두고 돌아와 버린 일입니다. 이와 같이 회개하다가도 세상 정욕이 더 강하면 더 이상 진행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울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각과 좋은 물건들을 다 멸하지 못하고 남겨 놓았습니다. 이 아각 역시 불 정열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세상 정욕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우리 육신을 가진 사람들은 이 세상 탐욕 끊기가 그렇게도 어려운 것입니다.
그리고 암몬과의 전쟁이 다윗이 이방을 정복하던 최후의 전쟁이요 가장 어려운 전쟁이었습니다. 이처럼 육신적인 자아를 정복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힘든 일 아닙니까? 그래서 바울은 고전15:31절‘나는 날마다 죽노라’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모압과 암몬은 가나안에 가려고 광야를 통과하려는 그 때부터 시작하여 끝까지 지속적으로 침략하여 괴롭힌 민족들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모압(민22-24장;삿 3:12-30;삼상 12:9; 왕하 3:5-27; 13:20)과 암몬(삿 10:6-11:33; 삼하 10:1-11:1; 느2:10,19;4:3,7)과 계속적으로 전쟁을 치렀습니다. 이처럼 육신은 우리가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지속적으로 우리 인격의 일부가 되어 끊임없이 신앙생활을 방해합니다. 그렇다고 밥 안 먹여 죽일 수도 없지 않습니까?
모압과 암몬은 이스라엘이 어려움을 당하거나 약해질 때마다 어김없이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훼방하고 욕을 보였습니다. 이게 육신과 자아의 모습니다. 그런데 모압과 암몬은 이 동편에 거하여 끝없이 대적합니다. 본래 요단 동편은 아직 요단강을 건너지 않았다는 점에서 세상살이의 상징입니다. 이와 같이 이렇게 저렇게 어떻게 살펴보아도 모압과 암몬은 육체와 자아의 상징입니다. 그럼 여호와의 날에 이들은 과연 어떻게 될까요?
1.다시는 경계를 범할 수 없게 되어 집니다.
8절‘내가 모압의 훼방과 암몬 자손의 후욕을 들었나니 그들이 내 백성을 훼방하고 스스로 커서 그 경계를 침범하였느니라’했습니다. ‘훼방과 후욕(모욕)’은 모압과 암몬이 유다를 괴롭힌 특별한 사건을 가리키기보다는 지속적으로 유다를 침략하여 괴롭힌 전역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이스라엘을 향해‘훼방’을 부렸다고 했습니다. 이 훼방이란 말은 어떤 누구를 못살게 군다는 말입니다. 또한 욕하고 모독한다는 뜻도 담겨져 있습니다. 다라서 본문의 ‘훼방’은 모압이 이스라엘을 몰살게 굴었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이름을 욕하고 모욕했다는 것입니다. 암몬자손의‘후욕’이라는 말도 같은 뜻입니다. 이스라엘을 향하여 비아냥거리고 못살게 굴고, 그들이 믿는 하나님의 이름을 비방한 것입니다.
모압과 암몬은 원래 정상적인 경로를 통해서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롯과 두 딸이 아버지를 술을 먹이고 잠재우고서는 관계를 맺고 태동한 것입니다. 모압과 암몬의 족속의 시작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두 딸에 의하여서 시작이 되었습니다. 자랑스럽게 내놓을만한 혈통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상하리만큼 이스라엘을 괴롭혔습니다. 롯의 큰 딸의 자식은 모압의 조상이 되었고, 롯의 작은 딸의 자식은 암몬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모압과 암몬은 이스라엘이 어려움을 당하거나 약해질 때마다 어김없이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훼방하고 모욕을 주었습니다. 습2:8‘후욕을 들었나니’하나님의 백성들이 고난중에 하나님에게 호소 할 때에 반드시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고난을 들으신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은혜와 응답을 주십니다. 창4:10‘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출2:23-24절‘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 시91:15‘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저희 환난 때에 내가 저와 함께 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렘33:3‘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했습니다.
그렇지만 여호와의 날에는 그렇지 않게 됩니다. 이처럼 육신적인 삶은 하나님을 욕되게 합니다. 그 뿐 아니라 우리 영혼을 훼방합니다. 그런데 여기 스스로 커서 가나안 즉 하나님 나라의 경계를 범하였습니다. 계시록에 보면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을 육체의 본능이라고 한 것과 같이 경계를 넘어서 나타납니다. 육신과 자아가 제 위치에서 충성하면 하나님의 아주 귀한 도구이지만 자꾸 그 소욕 따라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경계를 침범하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그래서 인격의 중심인 하나님 자리를 육신이 차지하여 인격을 좌지우지하려 합니다.
그런데 은혜가 임하면 다시는 이 경계를 넘지 못하게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육신을 다스리는 방법은 은혜 받는 길입니다. 갈5:16절‘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했습니다. 그리고 은혜 받은 삶을 롬14:8절‘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한 것처럼 은혜 받으면 이제는 훼방도 후욕도 아니고 오직 주를 위한 삶으로 바뀝니다. 왜냐하면 육체의 본능은 죄가 아니고 그 본능은 여전하지만 심령이 성령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육체도 자아도 그 통제를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그렇게 중요합니다. 마음이 변화되면 모든 것이 다 변화됩니다. 잠4:23절‘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했습니다. 우리 신앙이 조금만 약해지거나 육신적인 죄악이 앞서려 할 때 어김없이 찾아와 나를 괴롭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사람이든 무엇이든 오히려 감사하시고 자랑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은혜 받은 성도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특별 은총임을 믿고 신앙의 슨리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은혜가 임하면
습2:9
소돔과 고모라는 가나안 중에서도 특히 아름답고, 비옥한 평지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은혜를 거두시니, 소금 구덩이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모압과 암몬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물론 소돔과 고모라처럼 유황불로 망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바벨론의 공격을 받아 소돔과 고모라처럼 황폐해질 것입니다. 어떤 지역에 사람이 몰린다는 것은 거기에 무언가 돈 될 만한 일이 있다는 뜻입니다. 모압과 암몬은 목축으로 유명한 곳이었습니다. 또 요단 동편 왕의 길로 많은 상인들이 내왕했기 때문에 통행세 수입도 짭짤했습니다. 그러나 세계의 중심이 옮겨지면, 더 이상 아무 이익도 얻지 못할 것이며, 자동적으로 사람들의 발길도 끊어질 것입니다.하나님이 길을 지중해 쪽으로 옮겨 버리시면, 한때 번창했던 모압과 암몬도 자동적으로 소금 구덩이가 되고, 인적이 끊어진 황폐한 곳이 될 것입니다.
1.은혜가 임하면 세상 정욕이 소멸되어 사라집니다.
9절‘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장차 모압은 소돔 같으며 암몬 자손은 고모라 같을 것이라’했습니다. ‘맹세’는 언약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확실 하기에 모압과 암몬에게 내리실 하나님의 심판의 확실성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만군의 여호와이신 하나님의 계획은 감히 어느 누구도 수포로 만들 수 없습니다. ‘모압은 소돔 같으며 암몬 자손은 고모라 같을 것이라’ 본 구절에서 모압과 암몬의 멸망을 소돔과 고모라에 비유하는 것은 심판의 완전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그 흔적조차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파괴 되었는데 모압과 암몬도 이와 같을 것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롯의 사위들이 소돔성에서 유황불에 죽고 아내는 도망치다 뒤를 돌아봄으로 소금 기둥이 되고 롯과 두 딸만 살았는데 결국 이 롯의 자손 모압과 암몬도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소돔 고모라는 세상의 상징입니다. 모압과 암몬의 교만은 그들 스스로 멸망할 것을 자초했습니다. 모압과 암몬 사람들의 교만이라는 것은 죄악이 얼마나 큰 죄인줄 모르고 있었습니다. 교만은 참된 자신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사울의 경우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처음에 겸손하고 성실한 사람입니다. 삼상9:21절‘나는 이스라엘 지파의 가장 작은지파 베냐민 사람이 아니오며 나의 가족은 베냐민 모든 지파의 가장 미약하지 아니하나이까’했던 사람입니다. 왕위에 오르고 나서는 비천하고 별볼일 없던 시절을 망각하고 점점 자신을 올바로 보지못하고 왕의 신분으로 하지말아야 항 제사문제도 넘보고 교만으로 눈이 멀었습니다. 더 나아가 인간관계를 파괴시키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저주로 바꾼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소돔 고모라가 왜 망했습니까? 유1:7에‘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소돔과 고모라도 결국은 세상 정욕과 육신이 결탁하여 만들어낸 타락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여호와의 날에 소돔과 고모라처럼 이 모압과 암몬 땅을 불바다를 만드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은혜의 역사로 본다면 성령의 역사하심이 마음속에 세상 정욕을 태워버릴 것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이 성령의 불이 하나님을 위해 뜨거운 열심을 발휘하게 하실 것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이사야가 그랬듯이 성령의 뜨거운 제단 불로 심령을 청소해 주십니다.
3.은혜가 오면 특별한 은총이 주어집니다.
잘못되지 않도록 귀한 안전장치가 주어집니다. 9절 중반절에 ‘찔레가 나며’ 했습니다. 여기 찔레가 무엇입니까? 이것은 황무지에 나는 가시나무입니다. 그들이 거하는 처소는 온통 찔레가 돋아나서 더 이상 씨앗을 뿌릴 수 없는 땅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모압과 암몬은 더이상 땅의 소산을 먹을 수 없게 되며, 그들의 소유는 하나님의 은총을 통해서 살아남은 유다의 남은 자들이 소유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은혜가 오면 마음이 견고해져서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9절 중반절에 ‘소금 구덩이가 되어 영원히 황무하리니’ 했습니다. 문자적으로는 저주의 땅이 되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소금 구덩이란 당시로서는 농사도 못 짓고 저주입니다. 그러나 죄악에 대한 저주이니 축복입니다. 이 소금 구덩이는 견고한 언약의 상징입니다. 즉 은혜가 임하면 마음이 견고해져서 더 이상 죄악에 방황하지 않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히13:9에‘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했습니다.
은혜가 임하면 주님께 귀히 쓰이는 도구가 됩니다. 9절‘나의 끼친 백성이 그들을 노략하며 나의 남은 국민이 그것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라’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백성’과‘국민’이라는 단어에 특히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백성’이라는 뜻의 히브리어‘암미’는 이스라엘 자손을 가리킵니다. ‘국민’이라는 뜻의 ‘고이’ 또는‘고임’이라는 히브리어는 이방인을 가리킵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이방인들 중에 하나님의 백성이 된 자들이 모압과 암몬 족속의 땅을 차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꼭 물리적인 땅을 차지한다는 뜻이라기보다는 그들이 누리던 주도권과 일반은총이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올바른 신앙을 가진 자들과 이방인들 중에 믿는 자들에게 넘어간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들어서 존귀하게 하시고, 그들을 통해 일하시는 것은 세상의 똑똑한 사람들에게 굉장한 시험거리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1:26-29절‘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페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원래 지식이 많고, 똑똑한 사람들을 높이신다면, 아무도 수군거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면에서 자기보다 못한 사람, 계급도 낮고, 가난하고, 무식한 사람들을 높이실 때, 그들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따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바벨론 사람들이나, 애굽 사람들을 높이셨다면, 모압과 암몬도 군소리 없이 따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들보다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높이시니까 자존심과 교만 때문에 받아 들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민족들 중에는 일찍부터 자존심을 버리고, 이스라엘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압과 암몬과 앗수르가 가지고 있던 주도권뿐 아니라 일반은총까지 넘겨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처음 기독교가 들어왔을 때 지체높고 자존심이 강한 양반들은 선듯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기독교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주로 가난하고 신분이 낮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시대가 바뀌면서 기존 체제를 고수하던 양반들은 몰락하고 기독교를 받아들여 새로운 가치관과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사회 지도층으로 진입하여 과거에 양반들이 누리던 일반은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압과 암몬의 땅을 차지한다는 것은 영적인 주도권은 물론이고 물질적인 축복이나 학문적인 축복 경제적인 축복까지 차지한다는 뜻입니다.
복음은 항상 세상을 바꾸어 놓습니다. 이것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공통되게 나타나는 현상들입니다. 그리고 그 변화의 주역은 하나님을 먼저 받아들이는 가난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며, 억압받는 자들이지만, 복음을 통해 마음과 정신이 열림으로써 앞선 사고방식을 가지게 되며, 결국 세상의 축복도 먼저 누리게 됩니다. 환경의 도전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도태되게 마련입니다. 처음 철도가 생겼을 때, 거부했던 도시들은 삼류도시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사람은 도전을 받아들이면서 적응력도 커지고, 통찰력도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환경의 도전보다 더 무서운 것이 복음의 도전입니다. 복음은 기존의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을 전부 뜯어고칠 것을 요구합니다. 즉 육신도 철저히 영혼과 함께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봉사하고 자아도 새 자아가 되어 겸손히 하나님께 순종하고 충성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모압과 암몬이 멸망한 이유는
습2:10-11
진리의 중심에 들어 있는 영광은 찬란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싸고 있는 껍데기가 너무 초라해서 겉만 보는 사림은 실망하기 십상입니다. 기독교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교회를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를 어느 정도 알기는 아는데, 그 안에 들어 있는 영광은 보지 못한 채, 인간적인 껍데기만 보고, 실망한 사람들이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처음 온 사람들보다는 믿은지 오래 된 사람들이 훨씬 더 교회에 대해 비판적일 뿐만 아니라 신앙도 냉소적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기독교 신앙의 인간적인 면만 보았을 뿐 그 안에 들어 있는 신적인 영광은 보지 못했으면서도 자신이 기독교의 진리를 다 알고 있다고 착각하며 기독교에는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고 단정해 버립니다.
모압과 암몬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비방하고 스스로 자신을 높여서 교만해진 것은 이스라엘의 인간적인 면만 보고 그 안에 있는 신적인 영광은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이처럼 기독교를 피상적으로만 접한 사람입니다. 오히려‘해변 사람들’은 여호와를 받아들일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사람들은 오직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배우고, 하나님께 경배함으로써 축복에 동참할 것입니다. 그리나 모압과 암몬 사람들처럼 모든 내용을 잘 아는 것 같지만 실상은 인간적인 겉모습만 보고, 실망하고, 등을 돌린 자들은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1.교만은 멸망의 길로 가는 것이다
10절에 ‘그들이 이런 일을 당할 것은 교만하여 스스로 커서 만군의 여호와의 백성을 훼방함이니라’.‘함’이 암시하는 것처럼 이제는 그러한 교만도 사라지고 신령한 일을 훼방함도 사라져서 오히려 돕게 됩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하여 영원히 멸망당하게 되는 이유는 교만입니다. 교만은 거만 하거나 자존심이 강하거나 남을 무시하거나 없신여기는 행위입니다.
성경에는 잠8:13‘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 잠11:2‘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 잠16:5‘무릇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니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치 못하리라’, 잠16:18‘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잠18:12‘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 잠29:23‘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선지자 스바냐만이 모압과 암몬의 죄목을 교만으로 규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사야와 예레미야도 모압과 암몬의 죄를 교만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사16:6‘우리가 모압의 교만을 들었나니 심히 교만하도다 그의 거만하며 교만하며 분노함도 들었거니와 그 과장이 헛되도다’, 렘48:26‘모압으로 취하게 할지어다 이는 그가 나 여호와를 거스려 자만함이라 그가 그 토한 것에서 굴므로 조롱거리가 되리로다’ 모압과 암몬은 유다를 침략하여 후욕했을 때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었다고 생각하여 자고하였습니다. 그들의 교만은 수치와 멸시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2.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자
세상적인 것을 경계하고 하나님을 경건 되게 섬기는 몸과 마음으로 변합니다. 11절 이 구절은 마치 느브갓네살이 다니엘의 세 친구를 통해 나타난 일로 깨닫고 두려워하며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던 모습과 흡사합니다(단3:29).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사는 방법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이 경건함이 깃들 때 비로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이루어집니다.
습2:11‘여호와가 그들에게 두렵게 되어서 세상의 모든 신을 쇠진케 하리니’유다를 대적하였던 주변 국가들, 곧 블레셋(4-7절), 모압과 암몬(8-11절), 구스(12절),그리고 앗수르(13-15절)의 파괴와 멸망은 모든 열국들이 섬기던 모든 신들을 파멸시키는 효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열국들은 자신들의 신을 최고의 신으로 섬겼습니다. 그러나 열국은 유다 주변 국가들과 그들의 신이 파멸당하는 것을 목격하고 자신들이 섬기던 신이 결코 여호와의 심판에서 자신들을 구출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11절‘이방의 모든 해변 사람들이 각각 자기 처소에서 여호와께 경배하리라’, ‘이방의 모든 해변 사람들’은 문자적으로 ‘열국의 모든 섬에 사는 거주민들’을 가르키는 것입니다. ‘각각 자기 처소’는 여호와에 대한 경배가 보편적인 것으로 변할 것임을 시사합니다. 스바냐는 특별한 성소는 물론 모든 곳에서 보편적이면서 초월적으로 여호와를 경배하게 될 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말1:11‘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 만군의 주 여호와가 참 하나님임을 만국의 족속들이 결국은 알게 될것임을 강조한 말이기도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도 한번 촛대가 옮겨지면, 전혀 힘을 내지 못하고, 이름만 남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구원 역사의 중심에 끝까지 남아 있을 수 있습니까? 무엇보다 교회의 본질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인간적인 것으로 신적인 영광을 죽이거나, 억압하면, 안 됩니다. 항상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말씀을 구하며 기존의 사고방식을 버리고, 새로워 질 생각을 해야 합니다. 교회가 사는 길은 오직 복음의 도전을 항상 받아들이는 이것입니다.
케케묵은 옛날 사고방식을 고집하면, 하나님의 새로운 요구에 응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요구 하시든지, 그대로 순종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과거가 아무리 영광스러웠어도 그 시절만 돌아다보고 있으면, 안 됩니다. 세계는 지금 들끓고 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며, 내가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지 않으면, 순식간에 삼류로 전략해 버릴 것입니다. 나중에 깃발 들고, 한국의 교회당 주변을 관광하는 여행객들에게‘이것은 교인들이 만 명씩 모이던 큰 교회였는데, 지금은 박물관으로 쓰고 있다’라는 설명을 들려주게 된다면,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무엇보다 중요한 일은 교회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는 이것입니다. 교회는 단순히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문화적인 공간이 아닙니다.
교회는 죄인을 치료하는 병원입니다. 교회는 실패한 자, 질병에 시달리는 자, 우울증 환자, 정신병자를 말씀으로 치료해서 새롭게 만들어 세상으로 다시 내보내는 곳입니다. 만약 교회가 세상 적으로 성공한 사람들과 훌륭한 사람들만 모이는 문화적인 공간이 되었다면, 이미 그 정체성을 잃은 것입니다. 교회는 죄인들을 치료해서 세상 구석구석으로 내보내어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해야 합니다.
지나친 제도화는 성령의 역사를 제한할 수 있기 때문에 제도가 성령의 역사를 죽이지 못하도록 항상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도는 성령의 기능을 보완하고, 돕는 것이 되어야지, 성령의 역사가 소멸될 정도로 절대적인 것이 되면 안 됩니다. 교회 안에는 인간적인 요소와 신적인 요소가 함께 있어서 항상 갈등을 일으키게 되어 있습니다. 신적인 요소만 너무 강조하면 교인들이 답답하고 사랑이 없으며 재미가 없다고 불평합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요소가 너무 번창하면 말씀이 사라지고 사람 사이의 친목과 자랑으로 가득 차 버립니다. 바로 이 갈등이 우리로 하여금 늘 기도하게 만들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부족함을 인정하게 만들며 복음을 이론이 아닌 실제로 만드는 것입니다.
교회는 진리를 풍성하게 밝히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예배 때마다 성령의 역사가 흘러 넘쳐서 우리의 상한 심령이 고침을 받는 일이 일어나야 합니다. 말씀의 역사가 풍성하게 나타냐는 곳이 결국은 세계의 중심지가 될 것입니다. 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세계의 역사를 바꾸어 갈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래서 은혜가 중요합니다. 참으로 은혜를 받은 사람은 변화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은혜 받고 교만하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셔서 여호와의 은혜의 날이 우리에게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남쪽 구스의 심판
습2:12
오늘 본문은 남쪽의 구스가 심판받을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던 세상 나라들은 차례로 역사적 교훈을 남긴채 사라지고 있습니다. 산다는 것은 얼핏보면 투쟁같이 보이지만 그러나 생존경쟁에도 흥망성쇠는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하고 잘 믿는다고 하여도 교만하고 믿음이 없다하여 남을 우러러 보아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양지가 그늘이 되는 예는 모든 인간살이에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구스의 심판입니다. 구스는 현재의 에디오피아입니다. 이 구스는 상류 나일강가에 있던 성읍인데 무역을 하면서 일찍부터 유대인과 접촉하여 문물을 교환했고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이들은 흑색피부(렘13:23)를 가진 자들로 사업에 종사하였으며 부유했습니다(사43:3). 이들은 세라에 의해 인솔되어 유다를 침략했다가 아사에게 패한적이 있으며(대하14:9-15), 앗수르와 동맹하여 바벨론에 대항하여 유다지경 까지 나왔다가 요시야를 죽게 한 적도 있습니다(대하35:20).
그러나 일직이 모세가 구스여인을 아내로 택한 것(민12;1)등을 고려하연 유다와는 상당히 긴밀한 외족교적 관계를 유지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구스가 여호와의 쓰시는 칼에 살육을 당하는 참상을 겪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여호와의 칼인란 바벨론을 말합니다. 이렇게 구스가 멸망당하는 원인은 스바냐 선지자가 활약하던 당시에 유다왕 요시야를 애굽왕 느고에게 죽음을 당했기 때문인데 당시 구스는 애굽에게 병합되어 있었으므로 애굽의 멸망과 함께 멸망이 선포된 것입니다.
구스는 함의 아들이었고 노아의 손자입니다. 애굽을 여러 시대에 걸쳐 다스렸습니다. 따라서 이 경고는 아마도 구스뿐 아니라 애굽도 포함한 경고일 것입니다. 이 예언은 여호와의 칼로 상징된 느부갓네살 왕이 남쪽으로 원정해 애굽과 그의 동맹국인 구스를 함께 정복함으로써 성취되었습니다. 이로써 어떤 세력도 작정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이 역사적으로 증명되었습니다.
남쪽에 위치한 큰 나라들의 멸망을 언급한데 이어 이제 북쪽에 있는 앗수르를 향해 심판이 선포됩니다. 이 예언은 니느웨의 유명한 관개 시설을 파괴하는 것을 예고합니다. 이 도시에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정원들을 만들 수 있도록 관개시설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앗수르는 이미 쇠퇴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그 당시 최강의 국가였습니다. 그 나라는 3세기 동안 세계 패권을 장악하였고 주변의 나라들을 침략하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앗수르의 가장 큰 도시 난공불락의 요새인 니느웨 성이 멸망하여 황무케 되리라는 예언은 믿기 어려울 만큼 충격적입니다.
고대세계는 앗수르와 애굽이라는 강력한 두 축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가나안 땅은 곧 그 곳을 연결하는 중앙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세계의 중심지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유다와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세계의 중심은 새로운 곳으로 옮겨질 것입니다.
12절에‘구스 사람들아’ 한때 구스가 막강한 세력으로 애굽 전 지역을 지배한 적이 있습니다. 여기‘구스’라는 말은 곧 애굽을 의미하기도 하고, 피부가 검은 사람들을 총칭하기도 합니다. 여기에서‘구스’사람들이 죽임을 당한다는 것은 세계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애굽을 멸망시키신다는 뜻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다른 축 앗수르도 멸망시켜서 사막 같이 황폐하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의 멸망을 통해 세계 질서를 재편성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세계의 중심은 이제 일원화되어 바벨론 폐르시아. 마케도니아. 로마로 넘어갈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전 세계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지금까지 세계는 애굽과 앗수르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움직였고, 이스라엘은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연결하는 다리로서 양 방향으로 하나님의 의를 전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의를 저버린 채, 제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자, 하나님은 그들을 멸망시켜 전 세계로 흩어 보내심으로써 신약 교회를 준비하게 하셨습니다. 중심적인 위치를 빼앗긴 애굽과 앗수르는 어떻게 됩니까?
14절에서 멸망 후의 니느웨에 대한 모습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한 때 그토록 강력했던 도시가 서 있던 곳은 목초지가 될 것이며 가득했던 도시는 가축 떼와 야생 동물이 깃들이는 폐허가 될 것입니다. 니느웨는 당시 문화와 기술과 미의 중심지였습니다. 큰 도서관들과 건물들을 갖고 있던 이 도시의 성벽은 내성과 외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내성은 약13km 길이의 성벽으로 둘러 있었습니다. 길이가 약 100km 높이는 30m 였으며 그 넓이는 전차 세 대가 나란히 경주할 수 있을 정도로 넓은 9m 이상의 폭을 가졌으며 성문이 14개에 1500개의 망대로 요새화된 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화려하고 웅장한 도시는 완전히 파괴되어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유다를 괴롭힌 이방에 대한 심판은 결국 유다의 회복을 알리는 소망의 메시지입니다. 그러나 이 메시지는 유다의 회복의 차원을 뛰어넘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는 모든 세력의 멸망을 암시해줍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 순복하고 그분만을 예배하는 백성들이 마지막 때에 누리게 될 회복과 영광을 약속해 주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유대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 이제 그분을 믿는 모든 자에게 이 소망의 메시지가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의 날에 심판 대상이 점점 늘어납니다. 그래서 우리 영혼을 온전케 하시고 사단의 세력을 추방하시고 육신의 삶을 온전케 하시고 이제 구스를 통해서는 세상을 처리하시며 앗수르를 통해서는 하나님께서 치시던 매조차 꺾어 던져버리시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이렇게 여호와의 날은 일목요연하게 전개됩니다. 그러나 시간적으로는 거의 동시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럼 구스를 통해서는 어떤 심판인지 살펴보겠습니다.
12절‘구스 사람아 너희도 내 칼에 살륙을 당하리라’이 구스는 남쪽의 애굽 곁의 에디오피아를 가리킵니다. 구스가 애굽과 통합되기도 했기 때문에 애굽과 같이 취급하기도 하는 나라입니다. 이 구스의 심판은 사18:1이나 겔38:5에도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너희도’라는 용어로 볼 때 구스 역시 모압과 암몬 족속에게 내린 것과 동일하게 완전한 멸망일 것임을 시사합니다. 벌써 애굽이 나오면 무엇인지 짐작이 가시죠? 계11:8에‘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여기서 영적으로 애굽은 소돔과 같고 또 애굽은 예수님께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내려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이는 세상을 가리킵니다.
이렇게 성경에서도 영해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19:18에 보면 이 애굽에 대해서 재미있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날에 애굽 땅에 가나안 방언을 말하며 만군의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는 다섯 성읍이 있을 것이며 그 중 하나를 장망성이라 칭하리라’세상을 장망성이라고 했다는 사실입니다. 장차 망할 성입니다. 이 장망성은 계시록에서는 바벨론과 내용적으로 맥을 같이 하는 성입니다. 계18:2절‘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했듯 세상 죄악의 멸망입니다.
그럼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승리하시고 역사 속에 성령이 강림하셨는데도 아직도 세상에 죄악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은혜 받은 심령 속에는 이 세속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은혜에 비례해서 은혜가 충만한 만큼 세상의 존재도 그러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이 죄악 세상은 영원히 사라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됩니다. 우리는 지금 대단히 불안정하고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의 성도들은 우리보다 훨씬 더 어려운 시기를 이겨 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 큰 일을 해 내지 않았습니까? 우리들도 세계역사를 바구어 나가는 일에 대해서 쓰임받도록 기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앗수르의 심판
습2:13-15
이제는 북쪽 앗수르의 심판입니다. 한 마디로 앗수르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연단하시던 악의 도구입니다. 그래서 사10:5에 ‘앗수르 사람이여 그는 나의 진노의 막대기요 그 손의 몽둥이는 나의 분한이라’했습니다. 그렇지만 이 진노의 몽둥이가 스스로 강해진 줄 알고 교만해지자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10:15절‘도끼가 어찌 찍는 자에게 스스로 자랑하겠으며 톱이 어찌 켜는 자에게 스스로 큰 체하겠느냐 이는 막대기가 자기를 드는 자를 움직이려 하며 몽둥이가 나무 아닌 사람을 들려 함과 일반이로다’했습니다.
1.먼저 징계의 도구들이 생각의 변화를 일으킵니다.
13절에 ‘여호와가 북방을 향하여 손을 펴서 앗수르를 멸하며 니느웨로 황무케 하여 사막같이 메마르게 하리니’ 그랬습니다. 여기 니느웨가 나오는데 니느웨는 당시 역사적으로 최강의 국가인 앗수르의 수도였습니다. 니느웨가 사흘길이라고 했을 만큼 큰 도시였습니다. 욘4:11에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여 명이요’했는데 어린이만도 12만이라면 100만이 되는 당시로서는 가장 큰 성입니다. 그리고 니느웨의 관개 시설은 절대로 물이 마르지 않을 정도의 완벽한 시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손을 펴서 앗수르를 멸망시키시고 물을 끊어 니느웨를 마치 사막처럼 황량하게 만드실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여기 물을 끊으시듯 물은 영적으로 말씀이나 사상과 생각으로서 진노의 도구들의 생각이 바꾸어짐을 가리킵니다.
초대교회가 박해를 받은 것도 로마 황제가 가진 착각의 물 때문이었습니다. 이 자신과 신하들의 착가의 물이 공급되는 한 이 박해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다른 왕국을 신봉하며 자기들에게 복종하지 않는 집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300년 동안 기독교를 경험해 본 결과 그들은 악한 자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그들은 자기들의 생각을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공인하고 나아가서 국교로 삼기에 이르렀습니다. 과거 유교 봉건 가정에서 가장이 밖에 나가면 듣는 소리가 예수 믿는 것 나쁘다는 것이었기 때문에 예수 믿는다고 사랑하는 자녀를 때리고 심지어 자부를 때리고 쫓아내고 그랬던 것입니다.
혹은, 은혜 받으면 고통을 당해도 고통스럽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사10:24에 ‘시온에 거한 나의 백성들아 앗수르 사람이 애굽을 본받아 막대기로 너를 때리며 몽둥이를 들어 너를 칠지라도 그를 두려워 말라’했습니다. 이렇게 은혜 받으면 때리지도 않을뿐더러 때려도 아프지도 않고 나를 위한 것으로 믿어지기에 은혜롭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천국이 저희 것이요 영광의 영이 자기 위에 머물러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2.다음은 징계의 도구들이 더 이상 악을 품지 않을 뿐더러 크게 우호적으로 변합니다.
14절에 ‘각양 짐승이 그 가운데 떼로 누울 것이며 당아와 고슴도치가 그 기둥 꼭대기에 깃들일 것이며 창에서 울 것이며 문턱이 적막하리니 백향목으로 지은 것이 벗겨졌음이라’했습니다. 이처럼 앗수르는 주변국가들을 침략하여 거두어들인 전리품과 조공으로 최상의 번영을 누렸습니다. 그들의 도시는 백향목으로 치장될 만큼 대단한 부요와 사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이 행해진 후의 모습은 황량함과 적막함 그 자체였습니다. 그래서 니느웨는 수많은 사람들이 북적대던 것과는 달리 야생 짐승들의 집단 서식처가 되어버렸습니다. 여기 나오는 당아는 올빼미인데 성경에서 황량함의 일면을 보여주는 표상입니다(시 102:6; 사 34:11). 이렇게 니느웨 성은 도저히 사람이 거할 수 없고 야생 짐승들만이 사는 완전한 파멸을 당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이제 앗수르는 양떼들이 풀을 뜯는 초장이 되고(사27;10), 마르고 황폐한 사막이 되며 그 사막에는 짐승들만 살아가게 되어(사35;1), 대제국의 수도를 찾는 사람들에게 노라움과 조소를 품게 합니다. 스바냐의 이 예언은 갈대인들에 위해서 성취되었습니다. 앗수르는 이 지상에서 사라졌습니다. 이 야생동물의 천국이란 무엇일까요? 완전히 자연으로 돌아가 더 이상 악인들이 거하지 않는다는 것과 아울러 고독과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도움을 구하는 상태로 바꾸어짐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로마를 보더라도 박해의 기간이 끝나자 그 악한 황제들이 자신들의 악함을 버리고 이제는 자기들이 아쉬워서 축복해 달라고 심히 고독하고 약한 자세를 보입니다. 이렇게 바꾸어져 버립니다. 이것은 기독교에 대한 절대 우호를 암시합니다.
그래서 야곱을 해치려고 왔던 에서의 군대가 호위대로 변합니다. 그런데 연단의 도구들이 변하면 더 잘하게 됩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은 빌리델비아 교회에도 주어졌습니다. 계3:9에 ‘보라 사단의 회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않고 거짓말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저희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은혜 생활만 하면 하나님께서 징계의 막대기를 꺾으시고 이토록 환경까지도 바꾸신다는 교훈입니다.
3.은혜 생활을 하면 모든 누명이 다 벗겨질 날이 옵니다.
15절에 ‘이는 기쁜 성이라’비단길을 통해 동서로 장사하러 다니던 사람들이 니느웨성터를 지나다니며 느끼는 인생 무상과 권력의 덧없음을 잘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니느웨에 살던 앗수르 사람들은 수도의 시민으로서 긍지와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오직 나만 있고 나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라고 자만했습니다. 저들은 자신들의 영광이 오래갈 줄 믿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손이 펼쳐지는날 그들은 들짐승의 거처로 그 영광스러운 곳을 내어주고 지상에서 사라져가는 비극을 겪어야 했습니다. 지나가는 나그네마다 성터를 보고 웃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모든 나라들을 지배하고 통치하게 되자 심각한 교만에 빠졌습니다. 교만한 앗수르는 만군의 여호와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오직 자신만이 존재할 뿐이라고 착각하였습니다. 그 결과 앗수르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 멸망당하여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이 앗수르의 황폐와 조롱거리는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신원하심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만민의 조롱이 됨은 이제 자기 백성들의 누명까지도 벗겨주심입니다.
그동안 애굽과 앗수르가 강대국 행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힘을 실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이 세계를 새롭게 재편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안에서는 애굽과 앗수르 뿐만 아니라, 바벨론도 잠깐 지나가는 나라이며, 페르시아도 잠깐 지나가는 나라이고, 알렉산더의 마케도니아도 잠깐 지나가는 나라입니다. 오직 영원한 나라는 로마 시대에 탄생할 그리스도의 나라뿐입니다. 그 유명한 나라들은 지금 역사책이나, 고고학책에 그 이름만 남아 있습니다. 로마에 가 본 사람들이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이 작은 곳이 어떻게 세계를 지배했느냐? 는 것입니다.
로마의 지금은 광장에 노인들이 어슬렁거리고, 비둘기들이 한가하게 날아다니며, 관광객들이 깃발 들고 한 줄로 서서 열심히 돌아다니고 있을 뿐입니다. 이런 일들을 통해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서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세상 나라는 결코 영원하지 않습니다. 즉 소련이 무너지고, 이렇게 갑자기 냉전시대가 끝나 버릴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하나님이 성도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공산 치하에 있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신 것입니다. 소련이 무너진 후,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과 선교사들이 그곳을 찾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동안 이슬람 세계는 우리에게 잊혀진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에서 큰 테러 사건이 일어나고, 전쟁이 벌어지면서 이슬람에 대한 관심이 급속히 커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슬람과의 충돌이 하나님께서 그 문을 열어서 수억에 이르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기회를 열어 주시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성도 여러분!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는 귀합니다. 우리가 은혜 생활만 하면 세상도 처리해 주실 것입니다. 징계도 멀리 철회시켜 주실 것입니다. 환경의 변화를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날이 좋은 것입니다. 지금 무엇 때문에 방황하고 마음 아프십니까? 우리 모두 은혜를 구하여 하나님께서 다 해결해 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