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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미술관에서 김봉태, 조엘 샤피로, 줄리안 오피, 이용덕,
백남준/안은미, 조혜경, 최승희 등의 <Now Dance>展을 보고
전시명 Now Dance展
전시단체 서울대학교미술관 학예실
작가 김봉태, 조엘 샤피로, 줄리안 오피, 이용덕,
백남준/안은미, 조혜경, 최승희
전시기간 2012년 7월19~9월16일
전시장소 서울대학교미술관
관람일시 7월19일 17시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에 새로 건립된 서울대학교미술관(관장 권영걸 교수)에서 김봉태, 조엘 샤피로(Joel Shapiro), 줄리안 오피(Julian Opie), 이용덕, 백남준/안은미, 조혜경, 최승희 등의 <Now Dance>展을 관람했다.
<Now Dance>展은 춤과 관련된 율동적인 조형물과, 영상물, 그리고 댄싱 퍼포먼스(dancing performance)를 촬영한 사진작품 展이다.
나쵸 두아토(Nacho Duato), 피나 바우쉬(Pina Bausch), 머스 커닝햄(Merce Cunningham), 마틸드 모니에(Mathilde Monnier), 윌리엄 포사이스(William Forsythe), 자샤 발츠(Sasha Waltz), 빔 반데케이부스(Wim Vandekeybus), 마기 마랭(Maguy Marin), 로이드 뉴슨(Lloyd Newson) 등이 토대를 놓은 포스트모던 댄스에 내재된 예술성과 줄리앙 오피(Julian Opie), 백남준, 김봉태, 최승희, 안은미, 이용덕, 배영환, 조혜경 등의 작품을 <Now Dance>展에 부각시켰다.
나쵸 두아토(Nacho Duato 1957~)는 스페인 발렌시아 출신으로 18세에 런던 램버트 스쿨에 입학, 비교적 늦게 무용 교육을 받기 시작하여 모리스 베자르 스쿨과 미국의 앨빈 에일리 무용단을 거치며 무용수로서의 기량을 쌓았다. 1980년 스톡홀름에 있는 컬버그 발레(Cullberg Ballet)에서 프로무용수로 데뷔한지 1년만에 네덜란드 댄스 씨어터의 지리 킬리안(Jiri kylian)에 의해 발탁되어 지리 킬리안과 함께 네덜란드 댄스 씨어터의 주요 레퍼토리를 안무하면서 유럽 무용계에 선을 보이기 시작했다.
1987년 유럽 최고의 무용가에게 수여하는 VSCD의 Golden Dance Award를 수상하였으며, 1988년 지리 킬리안과 한스 반 마넨에 이어 네덜란드 댄스 씨어터의 상임안무가로서 ‘킬리안의 후계자’로 세계 무용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어 1990년 34세의 젊은 나이에 조국 스페인국립무용단을 맡아 이 무용단을 금세기 최고의 무용단 위치에 올려놓았다.
나초 두아토는 세계 무용계의 새로운 형식의 흐름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그것을 자신만의 독창적인 스타일로 승화시키는 뛰어난 감각을 가지고 있으며, 클래식하고 절제된 고도의 테크닉을 기반으로 현대적인 감각의 언어와 음악, 그리고 그의 정신적 근원을 이루는 스페인의 문화와 민족성을 절묘하게 조화시켜 다른 어떤 무용단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하고도 수준 높은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1990년 6월 스페인국립무용단의 예술감독으로 부임한 이후 1995년 스페인주재 프랑스대사관이 수여하는 문화훈장과 1998년 스페인정부가 수여하는 순수문화예술상, 2000년 국제 무용가협회의 최고의 국제안무가상을 수상하는 등 화려한 수상 경력이 말해주듯 현재 스페인국립무용단을 세계적인 무용단으로 끌어올린 나초 두아토는 우리 시대의 최고의 안무가 중 한 사람이다.
피나 바우쉬(Pina Bausch1940~2009)는 20세기 가장 위대한 무용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독일의 세계적인 무용수이다. 1973년 부퍼탈 무용단의 예술감독 겸 안무가로 취임한 이후 연극과 무용의 경계를 넘나드는 ‘탄츠테아터(Tanztheater)’라는 혁신적인 장르를 발전시킴으로써 독일의 지방도시 부퍼탈의 이름없는 시립 무용단을 세계 최정상에 올려 놓은 위대한 예술가이다.
피나 바우쉬는 1940년 독일 졸링겐에서 태어났다. 엣센 폴크방 예술대학과 미국 줄리어드 음악원에서 공부했다. 1962년 귀국해 폴크방 무용단 프리마돈나로 활동하다 1969년 '시간의 바람 속으로'를 발표, 쾰른 콩쿠르 1위를 차지하면서 본격적인 안무가의 길로 들어섰다.
33세인 73년에 부퍼탈(Wuppertal) 시립 무용단 예술감독을 맡은 뒤 무용과 연극의 경계를 허문 '탄츠테아터(Tanztheater 극무용)' 라는 새 장르를 만들어 냈다. 무용작품에서 연극적인 대사를 구사하고 무대장치도 추상성을 벗어나 일상용품들로 구성하는 '무용+연극'이다.
그녀의 대표작으로는 '이피게니에 타우리스' '카네이션' '카페 뮐러' 등이 있고, 피나 바우쉬의 작품의 주제는 일관되게 현대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간에 접촉의 어려움과, 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소통을 갈구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린다.
1982년에 초연된 이래 피나 바우쉬의 작품 중 가장 많이 공연되었던 독일이름의 'Nelken'은 영어로 '카네이션'이다. '카네이션'은 무대를 가득 덮은 1만 송이의 꽃 속에서 펼쳐지는 여러 인간 군상들의 다양한 모습을 통해 21세기의 현대를 살아가는 현재의 우리의 모습을 뒤돌아보게 한다.
피나 바우쉬의 창작활동에 있어 가장 큰 특징 하나는 한 도시에 장기 체류하며 그 도시를 모티브로 창작하는 '세계 도시 시리즈'이다. 이는 1989년 '팔레르모, 팔레르모(이탈리아 팔레르모)'를 시작으로 하여, 1991년의 '마드리드(스페인)', 1994년 '비극(오스트리아 빈)', 1996년 'Only You(로스앤젤레스)' 그리고 1997년 홍콩 반환을 기념한 '유리 청소부(홍콩)', 2000년 '비젠란트(부다페스트)', 2001년 '아쿠아(브라질리아)'등이 있다.
2005년에는 한국을 소재로 한 작품 '러프 컷'을 서울에서 초연했다.
2009년 6월 30일 지병인 암으로 68세 나이에 타계한 바우쉬는 불과 5일 전에 암진단을 받았다. 무용계는 갑작스럽게 날아온 부음에 모두들 충격과 안타까움을 전했다. 떠나기 2주전 일요일까지도 그녀는 무용단과 부퍼탈(Wuppertal) 오페라 하우스의 무대 위에 섰다고 전한다. 그의 꿈과 열정이 고스란히 담긴 영화 <피나 바우쉬의 댄싱 드림즈>가 우리나라에서 개봉되어
큰 감동을 주었다. 2001년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그녀에게>도 봐두면 좋을 영화다.
피나 바우쉬는 20세기 무용의 혁명가로 불리고 그녀의 안무는 70년대 이후 세계 무용계의 가장 중요한 흐름을 만들어냈다. 경계를 허물고 상반된 개념들을 융합시켜 새로운 형식의 연극과 현대무용, 무언극을 통합한 독창적인 탄츠 테아터를 만들어 내, 전 세계의 폭발적인 사랑을 받았다. 무용인가, 연극인가 하는 논쟁이 없지 않지만, ‘무용-탄츠(Tanz)’와 ‘연극-테아터(Theater)’를 융합한 ‘탄츠테아터(Tanztheater)'는 바위쉬만의 독특한 주제선택, 특히 남녀 간의 끝이 없는 갈등과 사랑, 개인과 그룹과의 미묘한 관계들을 짧은 대사와 몸짓, 노래, 멜로디, 전통적인 연극의 요소와 주제에 어울리는 세노그라피(Scenography) 등 총제적인 무용극을 창안한 천재 무용가다.
<머스 커닝햄 안무작)
머스 커닝햄(Merce Cunningam 1919~2009)은 현대무용의 개념을 혁신한 20세기 미국 무용계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특히 포스트 모던 무용(post modern dance)을 언급할 때 거의 빠짐없이 등장하는 머스 커닝햄은 무용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고 중요한 인물 중의 한 사람이다.
머스 커닝햄은 전통적이고 관례적인 무용의 규범을 깨뜨리고 무용예술과 일상생활의 구분을 타파하여 무용의 포스트 모더니즘을 일으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의 무용에 대한 독자적인 사상과 철학은 무용의 의미와 미적 가치를 완전히 변형시켰고 그가 확립한 안무원리와 작품기법은 무용계 전체에 예기치 못했던 대전환점을 가져왔다.
마사 그레이엄의 수제자였던 머스 커닝햄은 현대무용에 우연성과 즉흥성을 도입하고, 현대음악의 대가 존 케이지나 추상표현주의 화가 프란츠 클라인, 윌렘 데 쿠닝 등 음악과 미술, 디자인 등 다른 장르와의 적극적인 혼합을 시도하며 신체언어가 주는 순수표현력의 폭을 확대시켰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과 45년간의 우정을 통해 많은 공동작품을 발표하기도 했다. 1990년대에는 컴퓨터 기술을 단순한 장치 이상의 표현 매체로 그의 작품에 전면적으로 끌어들이며 커닝햄 무용의 전위적 감각을 과시했다.
머스 커닝햄은 한국에는 1984년 1월 자신의 예술적 동반자이자 위대한 현대 음악가 존 케이지(John Cage)와 함께 한국을 방문한 바 있으며, 2004년 4월에는 세계 최고의 록밴드로 이름높은 '라디오헤드(Radio Head)', 아이슬랜드 밴드 '시규어 로스(Sigur Ros)'와 함께 내한하여 공연을 가진바가 있다.
<마틸드 모니에 안무작>
마틸드 모니에 (Mathild Monnier)는 80년대 프랑스 누벨 당스(Nouvelle Danse 새로운 춤)의 주역인 마틸드 모니에는 프랑스의 현대무용가다.
1994년 몽펠리에 랑그독-루시옹의 국립안무센타(Centre Chorégraphique national de montpellier languedoc-roussillon)의 예술감독으로 임명되면서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과 공동작업을 진행하고, 철학자 장-뤽 낭시(Jean-Luc Nancy), 영화감독 클레어 드니(Claire Denis), 예술가 버버리 세메스(Beverly Semmes), 재즈음악가 루이 스크라비(Louis Sclavis), 작곡가 데이빗 모스(David Moss), 헤이너 괴벨스(Heiner Goebbels) , 거장 플라티니스트 에리카(eRikm) 등과의 다채로운 협업을 통해 장르간의 벽을 허무는데 일조해 왔다.
최근에 그녀는 P.J. Harvey의 락뮤직 콘서트, 가수 필립 카테린(Philippe Katerine)과 ‘핑크 팝 세팅’을 함께 한 2008 vallee 쇼에 참여했다. 이들의 공동작업을 통해 만들어진 공연은 2008년 아비뇽 페스티벌에서 공연되었다.
같은 해 몽펠리에 무용축제에서 <템포76>을 Gyôrgy Ligeti의 음악으로 만들었고, 2008년 2월에는 수로게이트 시티(Surrogate Cities)라는 오페라에 발탁되기도 했다. 130명이 무대에 출연하고, 괴벨스의 곡을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이 오페라는 도시 내부의 권력투쟁을 그리고 있다. 또한 몽펠리에 무용 축제에서 스페인 공연예술가 라 리보(La Ribot)와 해학적인 듀엣을 발표했다. 2009년, 클래식 발레인 ‘백조의 죽음’을 참고해서 <파브로바 3’23>를 만들었고, 2010년에는 시각예술가 도미니크 피가렐라(Dominique Figarella)와 긴밀하고 섬세한 작업으로 소아페라(Soapéra)>를 창작하였다. 2011년, 안무가 Loïc Touzé와 작가 Tanguy Viel과 협업으로 <우리들의 이미지들>를 영상에 중점을 두고 만들었고, 1984년에 초연되었던 장-프랑수와 뒤르르(Jean-François Duroure)와의 듀엣인 <Pudique acide / Extasis> 를 그 해 몽펠리에 댄스페스티발에서 다시 발표하였다. 마틸드 모니에의 다음작품은 <쌍둥이의 파라독스>로 몽펠리에 댄스페스티발에서 첫 선을 보일 예정이다.
1994년 몽뻴리에 국립안무센터의 수장이 되는 동시에 몽뻴리에 무용축제에 참여해 탁월한 기량을 보였다. 마틸드 모니에는 몸의 진정성과 공간과의 연관성에 관심을 두고 특히 프랑스(몽뻴리에)-아프리카의 자페증이 있는 사람의 움직임을 연구하면서 새로운 개념의 그룹작업으로 실험정신을 발휘하고, 아비뇽 페스티발, 몽뻴리에 무용축제, 떼아트르 드라빌 극장(파리), 파리가을축제 및 베를린, 이스탄불, 리스본, 런던, 멕시코뉴욕, 몬트리올, 로마, 비엔나, 아프리카, 아시아까지 국제무대에서 많은 작품을 올렸다. 2005년 영화감독 클레어 드니(Claire Denis)가 그녀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마틸드를 향하여>를 제작하였다. 국제영화제에 출품된 이 영화는 마틸드의 춤과 춤에 대한 그녀만의 철학을 기록하고 있다.
2012년 가을 서울국제공연예술제에 참가하는 그녀의 공연에 기대를 한다.
윌리엄 포사이드(William Forsythe 1949~)는 뉴욕 출생으로 1969년에 조프리 발레학교를 졸업하고 조프리 발레단(1971-73)을 거쳐 유럽으로 건너가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으로 이적하여 1981년까지 활동하고, 리처드 크레이건과 공동 제작한 <Orpheus>로 국제적인 안무가로 성공하였다.
이후 유럽 무대를 중심으로 프리랜서로서 활동을 시작한 그는 1982년에 프랑크푸르트 발레단의 안무가로 부임하여 1984년에 단장 겸 수석 안무가가 되었다.
2004년에 프랑크푸르트 발레단을 그만두고 자신의 발레단을 창단했다.
그는 고전 발레의 정형적 움직임에서 탈피하여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폭발, 엇나간 균형감, 직선적이고 각진 움직임 구사하며 1980년대 모던 발레의 새로운 주류를 창조하였다. 기존의 무용 기법을 뒤집는 한편, 무용과 연극의 전통적 요소 안에서 무질서 상태를 이끌어 내려고 하였다. 즉 신체가 하나의 선으로 자연스레 흐르는 것을 거부하고 신체 각 부위가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형태를 극단적으로 추구하였으며, 허무주의나 초현실주의적 성향을 덧붙였다. 그가 구성한 작품 중 두 무용수간의 파드되(pas de deux)는 상호 교감보다는 팽팽한 긴장감을 일으키게 한다. 또한, 소재의 폭을 확대하거나 무대장치와 조명의 가능성을 최대한 활용하는 점에서 실험성이 강하였다.
프랑크푸르크 발레단에서 독창적인 많은 작품들을 올렸으며 더 나아가 파리오페라 발레단, 로열 발레단, 베를린 슈타츠오퍼 발레단을 비롯해 고전 발레의 본고장인 마린스키 발레단, 볼쇼이 발레단 등 세계 주요 발레단들이 그의 작품을 지속적으로 올리고 있다. 현시대를 살아가는 발레 무용수들에게 있어 포사이드의 작품은 당연히 거쳐야 할 관문이라고해도 과언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독일 탄츠테아터를 대표하는 윌리엄 포사이드(William Forsythe)와 사샤 발츠(Sasha Waltz)는 세계 무용사의 한 획을 그었다. 현재 독일에서 활발히 활동 중인 윌리엄 포사이드는 60, 70년대를 풍미했던 탄츠 테아터 1세대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전대의 안무가들과는 달리 자신의 작업을 탄츠 테아터라는 고정된 용어로 설명하기를 거부한다. 기존의 것들에 대한 응용과 변형, 그리고 이를 통한 지속적인 창작 과정이 있을 뿐, 그 어떤 작품도 하나의 용어가 대표하는 장르적 특징을 마치 의도한 듯 고스란히 담아낼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다. 최근의 작품 경향이 무용, (언어)연극, 오페라, 순수 미술 및 응용 미술 간의 극단적인 탈장르화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어쩌면 이미 탄츠테아터라는 명료한 용어는 불명료한 현재의 경향을 담아내기엔 너무나 벅찬, 과거형 고유명사가 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 탄츠테아터의 중심 지표가 정체되고 권력화된 기존의 무용 질서에 대한 과감한 도전 정신 속에서 형성되었다고 할 때, 탄츠테아터라는 용어의 의미는 현재까지 퇴색되지 않은 채 이어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미 60세가 된 미국 출신의 세계적인 안무가 윌리엄 포사이드를 독일 탄츠 테아터의 후세대라는 이름으로 카테고리 화 시키는 게 가능하긴 한 건지 가 의문점이기는 하지만 고향에서 무용 교육을 받은 토박이 뉴요커 윌리엄 포사이드가 70년대와 80~90년대에 각각 슈투트가르트 발레단과 프랑크푸르트 발레단에서 안무 작업의 전성기를 보냈고, 프랑크푸르트 발레단과의 계약 후에 창단한 '포사이드 컴퍼니'가 지금까지도 독일의 작센주와 헤센주의 지속적인 지원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포사이드의 안무 세계와 독일의 무용계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짐작하는 건 그리 어려운 게 아니다. 게다가 전통 발레를 변형시키는 작업에 주안점을 뒀던 포사이드의 초기 안무에서부터 퍼포먼스 적 요소를 도입함으로써 즉흥성을 강조한 2000년대의 안무를 살펴보아도 그 자체가 최근 유럽 무용계의 대표적 경향인 '컨쳅 탄츠(Konzept tanz)'가 발생하는 과정을 대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윌리엄 포사이드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다른 안무가들과 뚜렷이 구분되는 독창적인 안무 방식을 드러냄과 동시에 유럽 무용의 연대기적 변화와 양상을 나타내 기 때문이다. 과거의 탄츠 테아터와 지금의 탄츠 테아터 사이의 과도기를 보여주는 한편, 과거의 요소와 지금의 요소를 동시에 담아내고 있는 그의 작업은 탄츠 테아터에 깃든 의미의 폭을 넓힘으로써 탄츠 테아터라는 표기 자체를 투명하게 만든다. 뉴욕에서 태어나 플로리다에서 무용 교육을 받은 포사이드는 1973년 독일로 건너가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 입단한다. 이후 1984년 프랑크푸르트 발레단의 무용 감독으로 임명될 때까지 그는 이곳의 상임 안무가로 일하며 슈투트가르트 발레단 및 뮌헨, 런던, 베를린, 파리 등 세계 각지의 발레단을 위한 새로운 작품들을 창작한다.
그가 프랑크푸르트 발레단과 맺은 20년간의 무용 감독 계약은 프랑크푸르트 발레단을 세계적인 혁신 무용단으로 이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아티팩트Artifact>(1984), <임프레싱 더 차르Impressing the Czar>(1988), 작곡가 톰 윌렘즈(Thom Willems) 그리고 디자이너 이세 미야케(Issey Miyake)와 공동으로 <더 로스 오프 스몰 디테일즈 The Loss of small Details>(1991) 등의 대표작들을 발표한다. 프랑크푸르트 발레단과의 계약 종료 후, 2005년 자신의 개인 무용단인 '포사이드 컴퍼니Forsythe Company'를 창단한 그는 이후 독일의 헤센주(프랑크푸르트)와 작센주(드레스덴)의 지속적인 지원을 바탕으로 프랑크푸르트의 '복켄하이머 데포트Bockenheimer Depot'와 드레스덴의 '페스트슈필하우스 헬레라우 Festspielhaus Hellerau' 양 극장을 활동무대로 삼아 지금까지도 정기적으로 새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그의 작품이 보여주는 가장 큰 특징은 윌리엄 포사이드 자신이 언급한 바 있듯이 인간의 움직임을 언어적으로 분절시킨다는 점이다. '무용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언어로 비유하자면, 구문을 형성하는 규칙(Syntax)'이다 라고 한 그의 말은 윌리엄 포사이드의 안무를 이해하는 핵심 키워드라 할 수 있다. 즉, 온 몸 구석구석을 역동적으로 전환 가능한 지점들로 변형시킴으로써 몸을 구성하는 기관 전체가 중심을 잃은 채 분절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마치 프랑스 후기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업에 주로 등장하는 꼴라주나 몽타주에서와 같이, 이리저리 뒤틀리고 꼬이고 축 늘어진 신체 기관들은 관객들에게 낯선 인상을 줌과 동시에 그 자체로 하나의 새로운 화음 형식, 즉 색다른 화음으로서의 '불협화음'을 제시한다. 이 같은 경향은 전통 발레로부터 보다 거리를 둔 후기 작품으로 올수록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며 여기에 언어, 음악, 영상 등의 요소를 강화시킴으로써 최근 작품은 하나의 독자적이고도 복합적인 탄츠 테아터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자샤 발츠(Sasha Waltz 1963~)는 1999년 서른여섯 나이에 독일 실험극의 산실로 불리는 베를린의 샤우뷔네(Schaubuehne am Lehniner Platz)에 무용감독으로 입성했다. 1962년 창립된 샤우뷔네는 독일 연극의 거장 페터 슈타인의 실험적이고 독창적인 무대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세계적인 극장이다. 샤우뷔네는 자샤 발츠와 더불어 신세대 연출가인 토마스 오스트 마이어(36)를 연극감독으로 영입하여 침체된 독일 공연계에 젊은 관객들을 끌어들였다. 자샤 발츠와 오스트 마이어는 샤우뷔네 입성 이후 각자 차례로 내놓은 작품들을 통해 탄츠 테아터와 언어극의 경계를 넘나드는 새로운 연극형태를 선보이면서 이들의 "어린 나이"를 문제삼는 문화계 일각의 우려를 가볍게 잠재웠다.
쟈샤 발츠는 1963년 독일 카를스루헤 태생으로, 유럽 현대무용의 효시로 평가받는 마리 비그만의 제자 발트라우트 코른하스에게서 춤을 배웠다. 이어 3년간 암스테르담에서 수학한 후, 장학금을 받아 뉴욕으로 건너가 1년간(86-87년) 활동했다. 이후 안무가, 실용예술가, 음악가들과 함께 작업하면서 다양한 예술적 안목을 키워나갔다. 1993년 지금의 남편이자 발츠 무용단의 예술감독 겸 드라마투르그인 요헨 잔디히(Jochen Sandig)를 만나 "자샤 발츠와 손님들"(Sasha Waltz & Guests)이라는 댄스앙상블을 조직, 첫 프로젝트인 "여행 3부작(Travelogue-Trilogie)"으로 세계 25개국을 순회공연 했다.
자샤 발츠라는 이름을 본격적으로 세계에 알린 작품은 "코스모나우텐 거리"(Allee der Kosmonauten. 1996)"이다. 그는 이 작품 하나로 일약 세계 무용계의 스타로 떠올랐고, 베를린을 벗어나 세계 유명 축제에 연이어 초청받았다. 그 후 "Zweiland"(97) "Na Zemlje"(98), 그리고 "다이얼로그 프로젝트"(99)를 차례로 발표했는데, 특히 "다이얼로그 프로젝트"는 인간의 몸과 건축학의 상관관계를 다룬 작품이다.
자샤 발츠의 샤우뷔네 첫 작품 "육체"가 무대공간과 과학, 역사를 배경으로 인간의 몸을 해부하고 탐색하는 시도였다면 같은 해 11월 선보인 "에스"(S)는 인간이 움직이기 시작한 태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는 원죄를 저지르면서 벗은 몸을 인식하게 되는 순간에 초점을 맞춰 몸의 근원을 탐색한다. 또 성별을 규정하는 요소에 주목해 에로스와 섹스를 중심으로 한 인간의 그리움과 욕망을 묘사한다. 여기서 집중적으로 그려지는 것은 과연 몸의 언어란 무엇이며 어떤 메시지를 표현하는가이다. 이런 의미에서 제목 "S"는 일차적으로 독일어로 성(Sexualitaet)을 암시하지만 보는 이에 따라서 그리움(Sehnsucht), 원죄(Suedenfall), 아름다움(Schoenheit)등으로 다양하게 해석되기도 한다.
"몸 3부작"의 완결 편으로 2002년 2월 초연된 "노바디"(NoBody)는 문자 그대로 몸의 부재를 담론한다. 아비뇽 연극제와의 공동제작인 이 작품은 몸의 신체적, 물리적 현상과 표현들이 강조된 "육체"와 달리 인간의 영적인 면, 형이상학적인 면에 초점이 맞춰진다.
"인간에게 종국에 남는 것은 과연 무엇이며, 죽음에 직면해서 또는 죽음을 인식하고 났을 때 우리는 무엇을 느끼며 어떻게 반응하는가?"라는 질문을 화두로 던진 이 공연은 보이는 몸으로 보이지 않는 죽음과 몸의 부재를 이야기한다는 역설적 설정으로 흥미를 더한다.
이 3부작에서 자샤 발츠가 그려내는 몸의 무대는 그가 살고 있는 독일사회를 지배하는 개인주의에 대한 불만인 동시에 더불어 사는 몸에 대한 그리움의 표현이기도 하다. 자샤 발츠 자신은 이렇게 말한다. “베를린의 테크노 축제인 러브 퍼레이드에서건 다른 공공장소에서건 독일 사람들이 몸을 다루는 방식이 싫어요. 항상 팔꿈치로 남을 미는 격이죠. 모든 게 능력이나 권력하고만 연결되고요. 인도 같은 나라에 비해 몸이 훨씬 폐쇄적으로 느껴져요" 이 얼마나 솔직하고 적나라한 표현인가.
빔 반데키부스(Wim Vandekeybus)는 안느 테레사 드 케이르스마커(Anne Teresa De Keersmaeker), 얀 파브르(Jan Fabre)와 함께 오늘날 세계를 휩쓸고 있는 벨기에 현대 무용의 3대 지주다. 빔 반데키부스는 울티마 베즈(Ultima Vez) 무용단의 예술감독이고, 무용수이자 안무가, 연출가이며 배우, 사진작가, 비디오 아티스트, 그리고 영화감독으로도 활동하고 있는 전방위 예술가이기도 하다. 1964년 벨기에에서 태어나 대학에서 심리학을 공부했던 공연예술 분야로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리고 곧 현대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로 불리는 벨기에 출신의 세계적인 예술가 얀 파브르(Jan Fabre)를 만나 함께 작업하게 되면서 그로부터 공연 예술에 대한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그 후 점점 자신만의 작업 스타일을 추구해가겠다는 열의를 품게 된 반데키부스는 드디어 1986년 자신만의 작업 공동체인 울티마 베즈(Ultima Vez)를 창단하고 이 단체를 구성하는 12명의 젊은 아티스트들과 함께 에너지와 육체에 대한 다양한 실험을 개시한다. 1987년 발표한 그의 첫 안무작은 미국 뉴욕의 저명한 공연예술상인 베시 어워드(Bessie Award)를 두 번이나 수상하면서 국제적인 명성을 쌓기 시작한다.
울티마 베즈의 작품 스타일은 빔 반데키부스의 풍부한 상상력의 원천인 동시에 인간의 신체와 본능적인 면에 집중하고 있다. 다재다능한 예술적 역량을 모두 무대 위에 쏟아내며 한정된 무대를 확장시키고, 새로운 코드와 몸짓을 창조해내며 육체가 해낼 수 있는 표현의 영역을 확장시켜온 빔 반데키부스의 작품은 무용뿐만 아니라 음악, 영화, 텍스트가 한데 어우러지며 ‘댄스 시어터’라는 단어만으로는 한정지을 수 없을 만큼 총체극의 진수를 보여준다. “무용과 음악의 냉혹한 대립 - 그의 작품이 보여준 위험하고 투쟁적인 풍경”이라는 언론 평이 말해주듯 빔 반데키부스의 작품은 강인한 육체와 힘, 그리고 무용과 폭력이 혼합된 듯한 안무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와 관능미로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세계의 관객들을 사로잡고 있으며 창단 20년이 지난 지금에도 울티마 베즈의 성공시대를 열어가고 있다.
빔 반데케이부스는 2003년과 2005년에 내한공연을 했다.
<마기 마랭 안무작>
마기 마랭(Maguy Marin 1961~)은 스페인계 부모 사이에서 1961년 프랑스의 뚤루스(Toulouse)에서 태어났다. 여덟 살 때 뚤루스(Toulouse)의 콘서바토리(Conservatory)에서 발레를 배우면서 무용을 시작하였고, 파리로 이주하여 당시 유명한 러시아의 발레리나 니나 비로부바(Nina Vyroubova)에게 사사하였다. 그 후 스트라스부르(Strasbourg)에 있는 오페라 발레단에 입단하여 직업무용수로 출발하였다. 스트라스부르에서 국립연극학교의 학생들을 만나면서 기존의 춤에 회의를 느끼고 새로운 학업을 위한 진로를 모색하였다. 공연예술에 대한 지식을 넓히고자 열린교육을 추구하던 그녀는 모리스 베자르(Maurice Bejart)의 ‘무드라(Mudra)’에서 수업을 하게 되었다.
안무가로 활약하며 마기 마랭(Maguy marin)은 독일의 후기 표현주의의 피나 바우쉬(Pina Bausch) 같이 기존 발레의 규격화된 형식과 현대의 춤동작을 타 예술분야와의 접목을 시도하여 작품에 반영하고 있다.
이것은 춤동작에만 의존하지 않고, 연극적 기법을 사용한 독일 문화의 독점적인 장르라고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탄츠 떼아트르(Tanz Theatre)’식 표현인데, 마기 마랭(Maguy Marin)의 작품들은 춤에 청각적 요소들이 가미되어 있는 ’탄츠 떼아트르(Tanz Theatre)`에 대한 프랑스적인 변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녀는 총체적이고 종합적인 매체를 활용함으로써 대규모의 인원으로 장시간 투자하여 복잡다기한 현대의 사회상을 무용으로 표현했다.
1981년 사무엘 베케트(Samuel Barclay Beckett)의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영감을 얻어 창작한 <메이 B May be>를 초연하여 크게 성공했는데, 교묘하게 교차하는 희·비극의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로 인하여 예술성이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그밖에 주요 작품으로 <바벨 바벨 Babel Babel>(1982), 파리오페라발레단을 위하여 만든 <정사 Jaleo>(1983)와 <어둠의 교훈 Lecon de Tenebres>(1988), 리옹오페라발레단을 위하여 안무한 <신데렐라>(1985), 리옹오페라발레단과 공연한 <일곱 가지 치명적인 죄 The Seven Deadly Sins>(1987)가 있다.
1997년 서울국제공연예술제 참가작으로 <와테르조이 Waterzooi>와 <메이 B May B>를 공연하였다. <와테르조이>는 관객으로 하여금 극에 몰입하지 않고 객관적인 입장을 갖도록 하는 브레히트식 특성을 갖춘 작품이다.
이 같은 변화는 새로운 예술개념과 형식 그리고 새로운 표현수단과 매체를 수용함으로써, 계속 발전적인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로이드 뉴슨 안무작>
로이드 뉴슨(Lloyd Newson 1956~)의 DV8은 연극과 무용, 이념과 편견의 모든 벽을 부수며 끊임없이 파격과 일탈을 감행해 왔다.
“늙고, 뚱뚱하고, 신체적 장애를 지닌 무용수들이 계속 무대에 서서 그들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도록 격려 받지 못한다면 무용이라는 예술장르는 계속 미성숙한 상태로 남을 뿐이다. 나는 무용수들이 그들의 육체, 그 이상을 사용하기를 바란다.”
로이드 뉴슨은 영국에서 뜻이 맞는 젊은 무용인들과 의기투합하여 1986년 DV8을 창단했다. 당시 영국에서 생소했던 Physical Theatre라는 이름으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알린 로이드 뉴슨은 무용의 추상성을 배격하고, 일상적인 제스처와 연극적 동작들을 재구성해, 기존의 무용미학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파격적인 작업을 벌였다.
로이드 뉴슨의 작품에서는 그가 하고 싶은 분명하고도 구체적인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 그는 그저 아름다운 동작이 아니라 살아있는 인간의 신체이기에 가능한 모든 표현방법을 이용해 개인의 삶과 관계, 우리를 둘러싼 현실과 사회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 대한 언론의 평에는 ‘진실(Truth)’ 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로이드 뉴슨의 작품세계는 현대무용과 클래식 발레에 넓게 퍼져있는 전통적 미학과 형식에 도전하는 방식으로 컨템퍼러리 댄스에 역동적 충격을 가하는 것인데, 무용의 추상성을 배재하고 파격과 일탈을 일삼으며 움직임과 연극적인 동작들로 재구성 된다. 또한 그의 작품에 나타난 특성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그의 정치, 사회, 문화적 특성을 언급함에 있어서 현실세계에 대한 끝없는 관심을 가지고 소외된 이들과 약자를 관찰하고 누구의 편에 서서 그들을 대변하기 보다는 있는 그대로를 실연한다. 둘째, 안무의 과정도 오랜 리서치를 통해 사실에 기반을 두며 한편의 다큐멘터리라고 할 정도로 하나의 완성된 기록에 가깝다. 셋째, 로이드 뉴슨은 무용과 텍스트, 다큐멘터리, 애니메이션, 연극과 영화의 영역에 걸쳐있으면서 하이브리드 양상을 보였다. 따라서 그는 하나의 이름으로 정의되기를 거부하며 현존하는 연극이나 클레식한 무용을 재해석하기 보다는 오리지널 작품을 고안하는데 흥미를 가졌다. 넷째, 안무의 특성에 있어서 그의 안무는 피지컬 시어터라는 방법론 즉 극장주의적 연극의 일부를 포함하고 자신들의 의사표명과 전개에 있어서 무수한 텍스트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지만 정제된 이성적 버벌 커뮤니케이션(verbal communication)의 방식과 더불어 메타키네시스(Metakinesis)의 측면이 강한신체의 넌버벌 커뮤니케이션(non-verbal communication)의 영향력에 동시에 주목했다. 다섯째, 구체적으로 움직임 사용에 있어서 작품마다 주된 모티브의 반복과 캐릭터의 특성을 살리는 부분이 돋보이고 단절보다는 유동적 흐름이 주를 이룬다.
로이드 뉴슨은 언행일치의 예술가로써 그의 실천에 믿음이 간다.
2005년 3월에 내한해 LG 아트 센타에서 세계초연인 <JUST FOR SHOW>를 공연했을 때, 많은 관중이 공연장을 찾은 것은, 그가 다리가 절단된 사람, 혹은 한쪽 팔이 소아마비인 장애자나 노령의 일반인이나 뚱뚱한 중년 같은 사람들과 작업을 했다는 <삶의 댓가 The Cost of Living>라는 작품의 명성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그의 작가정신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과 격려의 박수를 보낸 것으로 생각된다.
<조엘 사피로 작품>
조엘 샤피로(Joel Shapiro 1941~) 뉴욕에서 출생한 조엘 샤피로는 뉴욕 대학교에서 학사와 석사를 받고, 1970년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뉴욕 현대 미술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오르세 미술관 등 세계 유수의 미술관 및 갤러리에서 100회 이상의 개인전 및 회고전을 가진 세계적인 조각가다. 또한 퐁피두센터, 폴 게티 미술관, 테이트 갤러리 등 세계 유명 미술관에 그의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샤피로는 육면체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단순한 조형 언어를 통해 추상과 구상의 관계를 깊이 탐구하는 작가다. 작가는 기하학적 형태 안에 마치 인체의 움직임을 포착한 듯한 풍부한 표현성을 가진 작품을 창조하고, 공간 속으로 뚫고 나가는 듯한 강한 동세와 미적 긴장감이 느껴지는 작품들은 마치 무용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조엘 샤피로는 20여 년 동안 자신의 사고와 작품 제작의 과정들을 반영하는 직사각형 형태에 천착해왔다. 그는 특유의 복합적인 명쾌함을 얻기 위해 가장 단순한 수단을 선택했다. 철저히 무생물적인 직사각형은 자연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그것은 순전히 인간의 발명품이다. 물론, 직사각형은 도시와 산업 및 후기 산업 사회 어디서나, 즉 사원, 주택, 마천루, 상자, 영화 스크린, 피에트 몬드리안(Piet Mondrian)의 정신적 본질의 추구, 애드 라인하르트(Ad Reinhardt)의 예술의 정수에 대한 추구, 우표, 그리고 다른 수많은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조엘 샤피로의 막대인형 같은 형상을 구성하는 단순한 직사각형 블록들은 어린 시절의 블록 쌓기 놀이처럼 보이기도 하고, 또한 현실과의 유사성을 최대한 없앤 샤피로 조각이 출발했으나, 그것에 반해 발전했던 1960년대 후반과 70년대 미니멀리즘 기하학의 엄격하게 잰 듯한 기하학적 구조로 보이기도 한다. 미니멀리즘의 깎아낸 듯한 형태와 개념적 엄격성은 샤피로의 초기작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는 도널드 저드 Donald Judd의 냉정하고 현실적이지 않은 계산적 기하학보다는 토니 스미스 Tony Smith의 섬세하게 자연과 연결된 기하학에 더 가깝다. 또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점은 샤피로의 동남아시아 조각에 대한 경탄이다. 동남아시아 조각은 심지어 성적인 자세를 표현할 때에도 정신적 고요함의 숨결을 전달하는 형태와 볼륨의 억제로 가득하다. 인체의 움직임을 나타내는 데 있어 크메르 시대 이전 혹은 크메르 캄보디아의 사암 조각이나 남부 인도의 콜라 브론즈 조각, 그리고 태국의 중세 브론즈 조각에서 보여지는 형태의 간결함과 예리한 표현은 동남아시아 조각에서 너무도 자주 나타나는 특징인데, 이 특징들이 샤피로의 춤추는 듯한 기하학에 영향을 미쳤다.
샤피로의 춤추는 듯 보이는 기하학적 조형물은 작품에 생생한 정신을 불어넣고, 작품을 철학적으로 보이게도 한다.
줄리안 오피(Julian Opie 1958-)는 영국 출신의 화가이자 판화가, 조각가이자 설치미술가다. 런던 골드스미스 대학에서 공부했다. <남성용 셔츠를 두 단계에 걸쳐 벗는 여성>은 줄리안 오피의 전형적 특징인 단색조와 검은 윤곽선을 이용한 작품이다. 오피는 종종 사진과 비디오 영상에서 얻은 이미지를 컴퓨터로 조작해 가장 단순한 윤곽선을 창조해 냈다. 단 몇 개의 선과 모양만으로 완성된 인간 형상은 마치 도로 표지판처럼 간략한 그래픽 양식으로 환원되어 있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오피는 특정 몸짓과 포즈—위에 그려진 인물을 모델 같다고 생각하게 만드는—를 인식하는 일반 사람들의 의식을 자극한다.
끈 달린 하이힐과 손바닥만 한 끈과 팬티, 늘씬하고 꼿꼿한 자세와 우아하게 걸친 셔츠 등은 이 여성이 패션모델임을 암시한다. 그녀는 좁다란 패션쇼 무대를 따라 워킹을 하며 셔츠를 벗어 보이는 중이다. 몸에서 분리된 원형 얼굴은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이 관람자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다. 여기서 줄리안 오피는 사람들의 일반적 지각을 볼모로 장난을 치고 있다. 그림의 비밀스러운 제목은 여성의 정체성에 대한 추측을 열어 놓는다. 그녀의 포즈와 옷차림으로 보아 그녀는 모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가슴을 훤히 드러내놓고 있으며, 옷을 벗어 제치고 있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그녀의 포즈가 도발적이라는 것, 그리고 성적 유혹의 하나에 해당한다는 점을 깨닫게 한다. 그녀는 포르노 잡지의 사진이나 스트립쇼 클럽의 한 장면으로도 손색이 없어 보인다. 오피가 참조한 미술사를 관류해 온 여성의 초상, 즉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1538)와 마네의 <올랭피아>(1863)처럼, 이 작품 속의 여성은 남성의 흥분을 위한 단순한 관능적 상징물로 환원되고 있다.
백남준(白南準,1932~2006)은 한국에서 음악공부를 시작하고 일본 동경대학에서 현대작곡가 아놀드 쉔베르그에 관한 논문을 썼으며 1956년 유럽을 여행하다가 아방가르드 음악과 퍼포먼스에 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연구하고자 독일에 정착했다. 1958년 다름슈타트 하계현대음악캠프에서 백남준은 현대음악의 거장 존 케이지를 만났다. 작곡과 퍼포먼스에 관한 케이지의 사상은 백남준은 물론 급진적 예술운동 그룹인 플럭서스의 창시자로 음악캠프에 초청된 조지 마치우나스 등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텔레비전이라는 대중매체에 대한 백남준의 최초의 탐구는 1963년 독일 부퍼탈의 갤러리 파르나스에서 그의 첫 개인전 <음악 전람회 - 전자 텔레비전; Exposition of Music-Electronic Television>에서 제시되었다. 비디오 아트의 기념비적인 사건이 된 이 전시는 텔레비전을 기계적으로 조작한 작품, 관객과 상호작용하는 비디오작품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최초의 전시 이후 40여 년간 그는 수많은 개념과 기계적 발명을 통해 전자 이미지가 미술의 영역으로 소개되고 수용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64년 뉴욕으로 이주한 백남준은 텔레비전과 비디오에 관한 탐구를 지속했고, 1960년대 말에는 텔레비전과 동영상이미지에 관한 미학적 논의를 불러일으킨 신세대 작가들의 첨병 역할을 했다. 1970년대와 80년대에 걸쳐 그는 다른 작가들을 지원하고 새로이 부상하는 미술매체의 잠재성을 현실화 시키는데 몰두하면서 이 분야의 대표자로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가 처음 미국에 갔을 때 당시에 길거리 예술가들은 백인들이 이었다.
흑인들도 흔치 않았는데 동양인이 길거리에 바이올린을 끌고 다니고 멀쩡하게 소리 나는 피아노를 부수는 공연은 참 해괴하고 어이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이상한 짓들을 하는 이가 왜소한 동양이다 보니 비교적 쉽게 논란꺼리가 되었다. 물론 초창기의 반응은 우려와 비난이었고, 또 유색 인종에 대한 조소도 섞여 있었다.
그의 악기 퍼포먼스는 나름 주목을 끌게 되고 중반 이후 시작한 브라운관에 반복, 무의미한 신호들을 실어 보내고 이 브라운관을 탑 또는 로봇 비슷한 모양을 꾸민 조형물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일단 그의 시작으로 사람들은 퍼포먼스라는 장르가 생긴 것을 알았고, 또한 예술의 한 분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김봉태(金鳳台 1937~)는 서울미대를 졸업하고 미국 캘리포니아 오티스미술대학원에 유학했다. 20년 넘게 미국에 머물다가 80년 중반 귀국했다.
그는 한국, 미국, 일본, 프랑스 등에서 38회의 개인전과 그룹전을 개최했다.
김봉태는 70대의 노장이면서도 신선한 작업을 하는 작가로 김봉태가 지니고 있는 장점이다.
가장 현대적인 작업이면서도 우리 민족의 고유한 색채를 주색으로 하는 그의 작업은 현대작가와 민족작가라는 칭찬을 듣는다. 그가 오랫동안 화두로 삼고 있는 창(窓)은 바로 인간의 영혼이고 마음의 눈이다. 맑은 영혼, 맑은 눈, 맑은 마음, 그렇게 순수로 순화되는 인간을 그는 색채로 그려낸다.
작가는 재활용 쓰레기장에 내놓은 종이박스를 보고, 소학교시절 공작시간에 골판지나 마분지를 갖고 상자를 만들던 기억이 떠올라, 버려진 박스를 작품의 소재로 재활용하면 어떨까 생각한다.
그래서 버려지고 폐지가 되거나 혹은 물에 젖어 불어 터지거나 사라질 그런 운명의 박스를 그는 하나하나 춤으로 재생시켰다. 그의 작품 속에 박스들은 모두 춤을 춘다. 이 작품은 경쾌하고 율동적이기도 하다. 색채도 원색을 사용했다. 그래서 탄생된 것이 김봉태의 <댄싱 박스(dancing box)>다.
최승희(崔承喜 1911~1967)는 경성(서울)에서 태어났으며 숙명여학교를 졸업하였다. 1926년 오빠 최승일(崔承一)을 따라 경성공회당(京城公會堂)에서 열린 현대무용가 이시이 바쿠[石井漠] 무용발표회를 구경한 것을 계기로 그의 연구생이 되어 일본으로 건너갔다. 1927년과 1928년 연이어 이시이 바쿠 무용단의 경성공연에 출연하여 유명해졌으며, 1929년 이시이 문하에서 벗어나 서울에 최승희 무용연구소를 차렸다. 1930년 제1회 무용발표회를 비롯해 4회의 신작발표회를 가졌으며, 그후 한성준(韓成俊)에게 고전무용을 배움으로써 창작무용의 뿌리를 조선 춤에 두게 되었다. 1931년 사회주의 문학운동가 안막(安漠: 본명 안필승)과 결혼, 1933년 이시이와 합류하여 1934년 일본청년회관에서 신작발표회를 열어 승무·칼춤·부채춤·가면춤 등 고전무용을 현대화하는 데 성공, 격찬을 받았다.
1936년 영화 《반도(半島)의 무희》에 출연, 4년 장기상영이라는 흥행기록을 남겼다. 이어 1937년 구미 각국에서 순회공연을 하여 '동양의 무희'라는 찬사를 받았고, 1940년 미국을 비롯한 남아메리카대륙까지 진출, 세계적 무용가가 되었다. 1942년 '전선위문공연'을 떠나 조선·만주·중국에서 130여 회에 달하는 공연을 가졌으며, 1944년 도쿄[東京]로 돌아와 24회의 연속 독무공연을 함으로써 세계 최초의 장기독무기록을 세우기도 하였다. 광복 후 위문공연을 하였다는 이유로 친일 무용가라는 비판을 받았고, 남편 안막을 따라 월북하였다.
1946년 평양에 최승희 무용연구소를 설립, 조선 춤을 체계화하고 무용극 창작에 힘썼다. 전쟁 중인 1950년 말에는 베이징[北京] 중앙희극원에서 무용반을 설립하여 학생들을 지도하였다. 1955년 인민배우가 되었으나, 1958년 안막이 숙청당하자 연구소도 국립무용연구소로 바뀌었다. 그 후 <조선민족무용 기본> <조선아동무용극 기본>등의 저서를 냈으며, 1967년 숙청당하였다. 신무용의 뿌리를 내린 그녀의 작품세계의 근원은 한국의 민속춤이었다. 관중을 사로잡는 눈빛과 동양의 신비한 매력이 담긴 춤사위로 세계 각국
의 칭송을 받았고, 일본과 중국 무용계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한편, 2006년 3월에 전 강원도민일보 논설실장 함광복 씨는 재미동포신문 신한민보 1938년 2월 3일자에서 최승희의 출생지가 강원도 홍천군 남면 제곡리라는 새로운 사실을 밝혔다.
안은미(安恩美, 1963~)는 현대 무용가다.
미국 영국 홍콩 등 세계무대에서 주목받고 있는 무용가인 안은미는 관습의 틀을 깨는 도발적이고 파격적인 춤으로 그녀의 작품은 늘 화제를 몰고다닌다.
안은미는 12세에 고전무용을 시작, 이화여대를 졸업한 뒤 88년 서울에서 자신의 이름을 건 무용단 창단공연을 가졌고 서울올림픽 개막식 리허설 디렉터로 활약했다.
92년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대학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뒤 98년에는 뉴욕 예술재단 상을 수상한 작품 `별이 빛나는 밤'으로 공연 비평에 관한한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뉴욕 타임즈로부터 “눈부신 상상력과 재치로 가득 찬,마술 같은 환상을 주는 무대”라는 평을 이끌어냈다.
한국에서는 지난 98년 6년 만에 서울에서 '무덤연작시리즈' 개인발표 무대를 가진 데 이어 99년에는 '무지개 다방', 2000년 3월에는 '빙빙-회전문' 등의 작품을 선보여 '재미있는 파격'이란 이색적인 반응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2002년 현재 대구시립무용단 예술감독을 역임했다.
안은미는 무용 외에도 영화, 패션쇼 등에서 활약하기도 한다. 지난 2000년 1월에 개봉한 영화 '인터뷰'에서 심은하의 무용장면을 연출하기도 했고, 7월 (주)쌈지의 구두브랜드 '니마'의 패션쇼를 연출, 색다른 무대를 선보이기도 했다.
2000년 8월 배우들의 시종일관 벗은 화면으로 화제를 일으켰던 여균동 감독의 영화 <미인>에서 단순히 벗은 '몸'이 아니라 아름답고 섬세한 '육체'를 보여주기 위해 '몸 연출'을 맡아 화제가 되기도 했다.
2002년엔 미국 뉴욕예술재단(NYFA)이 선정하는 '아티스트 펠로십스(Artist Fellowships)'상을 수상했다.
이용덕(1956~)은 ‘역상 조각’이라는 독창적 형식으로 조각의 새로운 장르를 개척해온 작가다.
<On the Threshold>(경계에 서서)에서는 음각 공간의 존재에 대해 작가가 탐색해온 개념의 깊이를 들여다 볼 수 있었고, 음각 형상에 함축된 의미를 드라마틱하게 테마화한 'I am Not Expensive(싱가폴 비엔날레 출품작, 2008)', 수많은 진주 빛 구슬로 신부의 형상을 담아낸 'Oscilliating Bride(2009)', 미지를 향해 거침없이 걸어가는 어린이의 모습을 담아낸 'Opening the Darkness(2009)' 등 기존 역상 조각의 연장선에 있는 작품을 선보이기도 했다.
안으로 움푹 파인 음각으로 볼록 튀어나온 양각의 효과를 내는 작가의 작품은 입체감과 동적인 효과를 동시에 드러내고 관객의 움직임에 따라 조각이 움직이는 듯한 착시를 일으키게 한다. 여러 차례 음과 양이 바뀌는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 작가의 작업 소재는 평범한 일상 속에서 포착된 인간의 모습이다.
작가는 이를 통해 과거의 시공간을 현재로 이동시키고 그 사이에 발생하는 정체성의 간극에 주목함으로써 현상과 본질 사이의 경계를 넘나들며 존재에 대한 질문을 제기한다. 멀리서 보면 또렷하게 존재하는 형상이지만 작품에 다가 갈수록 실체가 없는 부재의 조각임을 인지하게 하는 작가의 작품에는 유와 무의 융합을 내포하는 동양의 도교적 사상이 반영되어 있다.
이러한 무와 유, 음과 양 등의 상반된 개념이 공존하는 작품을 통해 선택의 기로에서 갈등하게 되는 경계의 지점을 드러내는 작가의 작품은 관객들로 하여금 존재의 본성을 생각하게 한다. 또, 시각적 착각과 사고의 혼란을 경험하게 하는 색다른 예술적 체험을 선사했다.
이용덕 작가는 서울대학교와 동 대학원 조소과를 졸업하고 베를린예술종합대학에서 조소를 전공했으며, 현재 서울대학교 조소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작가는 1996년 대한민국 미술대전에서 대상을 수상했으며, 그동안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 유수의 미술관과 비엔날레, 그리고 다양한 아트 페어에 참가하여 국제적인 명성을 구축해왔다.
조혜경(趙惠京)은 2005년 영국 스코틀랜드 서쪽의 외딴섬인 스타파에 있는 '핑갈의 동굴'을 찾았다. 이 여행길에서 크게 감동받은 조 씨는 우선 이때 촬영한 영상에, 1829년 멘델스존이 '핑갈의 동굴' 에 다녀와 작곡했다는 이 서곡을 깔아놓고, "스코틀랜드의 외딴 섬에 있는 '핑갈의 동굴'에서 너무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이때의 감명을 시각과 청각 이미지로 표현하고 다시 무용 퍼포먼스와 유화로 형상화하는 작업을 계속 해왔습니다."라고 속삭인다.
이 시청각 작품이 무용수의 눈을 통하고 몸에 흐르게 하면서 자연스러운 춤사위가 나오도록 한다. 이어 춤사위에 맞춰 재창조한 음악을 기호화하고 12개의 악기로 표현해내는 실험음악을 그녀 자신이 직접 지휘해, 무용극 퍼포먼스를 완성한다. 다시 어머니 자궁 같은 '핑갈의 동굴'에 숨은 리듬에서 재발견한 음악으로 영상, 오브제 설치작업을 하고, 유화 작품까지 만들어낸 당찬 여류작가다.
이렇게 조혜경이 재창조한 '핑갈의 동굴' 이야기 시리즈 작품은 전시를 통해 관람객이 각자 상상하는 과거와 현재의 세계, 자연과 인간과 역사와 연결돼 소통하는 매체로 작용을 했고, 전시기간에 선보인 '세 줄의 리듬에 대한 리서치 퍼포먼스'는 관람객의 다양한 몸짓을 유도하고, 작가의 생각을 몸으로 느끼도록 하는 본능을 유발시켰다. 그녀는 영국에서 공부하던 시절에 여행과 생활 체험에서 획득한 영감을 연작시리즈로 발표하고 있다.
조혜경은 성신여대 서양화과와 대학원에 이어 영국 에딘버러 미술대학 대학원을 졸업한 미모의 여류작가다. 1991년 첫 개인전을 연 이후 국내외에서 활발한 작품 활동을 벌이고 있고, 그룹전에도 참여했다.
이상 17인의 예술가가 서울대학교 미술관이 기획한 <Now Dance> 展에 무용과 연관된 작품이나 사진, 또는 영상물로 소개되고, 고인은 유작이나 사진을 통해 그 자취를 추적할 수 있도록 했고, 현재 활동 중인 작가는 작품을 출품해 <Now Dance> 展에 적극 호응했다.
이번 전시회를 통해 무용과 연극, 그리고 Performing Arts를 연결시키고, 예술계에 새로운 사조(思潮)를 개창한 인물들의 업적을 평가하고 존중했다.
그러나 앞장서 새로운 물길을 여는 예술가는 대중적인 것과는 거리가 있다.
대중은 보편타당하고 상식적이고 전통적인 작품을 대부분 선호한다. 그렇기에 신사조 개창자는 외롭고 고독하고 힘든 싸움을 계속해야 한다. 물론 자신과의 싸움이다. 그 싸움에서 이기거나 고통을 극복한 인물만이 그 찬란한 열매를 거둘 수가 있다. 연극 동지들의 정진(精進)을 기대한다.
서울대 관악캠퍼스 내의 서울대 미술관에 전시중인 <Now Dance> 展은 그러한 예술가들의 본보기다. <Now Dance> 展에 많은 동문 연극인들의 관람을 권한다.
7월22일 한국희곡창작워크숍 대표 극작가/연출가/평론가 박정기(朴精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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