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재집(晦齋集)》 해제(解題)
- 조선 성리학의 기틀을 닦은 회재의 철학사상 -
김교빈 호서대 문화기획학과 교수
1. 머리말
이 책은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선생의 문집을 번역한 것이다. 번역 대본은 한국문집총간 24집에 수록된 《회재집(晦齋集)》이며, 1631년(인조9) 옥산서원(玉山書院)에서 간행한 판본으로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이 책의 편차는 대본의 편차를 따랐으며, 권1부터 권6까지를 제1책으로 묶고 권7부터 부록까지를 제2책으로 하였다.
선생의 저술이 처음 간행된 것은 1574년(선조7)이었다. 그 뒤 많은 지식인들에게 선생의 저술이 읽혔지만 현대에 이르러서는 일부 선역본 이외에 제대로 된 번역본이 없어서 한문 해독이 가능한 전공자를 제외하고는 뜻이 있는 사람들도 쉽게 읽을 수가 없었다. 이번에 한국고전번역원에서 선생의 문집을 번역해 냄에 따라 후손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선생이 남긴 글을 쉽게 얻어 볼 수 있게 된 것을 매우 다행스럽게 생각하며, 아울러 이를 계기로 선생에 대한 학술 연구가 한층 더 활발해지기를 기대한다.
2. 시대 배경과 생애
1) 시대 배경
조선은 성리학을 건국이념으로 삼았지만 성종 무렵부터 사림파와 훈구파의 대립이 이어졌다. 사림파는 도(道)의 실현을 자신들의 사명으로 여기는 유가 지식인들이었고, 훈구파는 권력에 기대어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을 챙기는 기성 관료들이었다. 기대승(奇大升)은 〈논사록(論思錄)〉에서 사림파의 맥이 정몽주(鄭夢周) - 김종직(金宗直) - 김굉필(金宏弼) - 조광조(趙光祖)로 이어졌으며, 조광조와 이언적을 표창(表彰)한다면 옳고 그름이 분명해져서 사람들의 마음이 바로잡힐 것이라고 하였다.
사림파의 효시인 정몽주와 길재(吉再) 등은 조선 건국에 반대하고 벼슬도 거부하였지만, 조선 왕조가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사림파도 다시 벼슬에 나아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길재의 학맥을 이은 김숙자(金叔滋)는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벼슬을 그만두고 공부에 전념하면서 아들 김종직에게 사림파의 맥을 이어 주었다. 그 뒤 조선 중기에 이르면 성종과 중종이 사림파를 중용하였고, 특히 중종은 현량과(賢良科)를 설치하여 덕이 높은 사람들을 추천받아 벼슬을 주기도 하였다. 하지만 벼슬에 나아간 사림파들은 훈구 세력과 대립하면서 여러 차례 은거와 진출을 반복하였다. 그 대표적인 사건들이 연산군부터 명종조에 걸쳐 일어난 사대사화(四大士禍)이다.
그 첫 번째는 1498년(연산군4) 사초(史草)가 발단이 되어 김일손(金馹孫) 등 신진 사류가 유자광(柳子光) 등의 훈구파에게 화(禍)를 입은 무오사화(戊午士禍)였다. 이 사건으로 김종직은 무덤이 파헤쳐진 뒤 목이 잘리는 벌을 받았고, 김일손ㆍ정여창(鄭汝昌)ㆍ정희량(鄭希良)ㆍ김굉필(金宏弼) 등이 죽거나 귀양을 갔다. 두 번째는 1504년(연산군10)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尹氏)의 복위 문제를 놓고 일어난 갑자사화(甲子士禍)였다. 갑자사화는 임사홍(任士洪) 등의 새로운 훈구 세력들이 기존 훈구 세력을 몰아내면서 무오사화에서 살아남은 선비들을 함께 제거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윤필상(尹弼商)ㆍ성준(成俊)ㆍ김굉필 등이 사형을 당했고, 이미 죽은 정창손(鄭昌孫)ㆍ정여창ㆍ남효온(南孝溫) 등에게 무덤을 파헤치는 형벌을 가하였다.
세 번째는 1519년(중종14) 남곤(南袞), 홍경주(洪景舟) 등이 조광조 등 신진 사림을 몰아낸 기묘사화(己卯士禍)였다. 이 사건은 급진적으로 개혁을 단행한 사림파를 왕권의 위협으로 받아들인 중종이 훈구파와 함께 일으킨 것으로 조광조ㆍ김정(金淨)ㆍ기준(奇遵) 등이 사형에 처해졌고, 김안국(金安國)ㆍ김정국(金正國) 형제 등이 조정에서 내쫓겼다. 마지막으로는 1545년(명종 즉위년) 명종의 외척 윤원형(尹元衡) 형제 중심의 소윤(小尹)이 인종의 외척이었던 윤임(尹任) 중심의 대윤(大尹)을 몰아내면서 평소 밉보던 사림들까지 몰아낸 을사사화(乙巳士禍)였다. 이 사건으로 많은 사림이 귀양을 갔다. 이언적은 그 과정에서 추국(推鞫)에 참여하였다 하여 위사 공신(衛社功臣)에 오르고, 숭록대부(崇祿大夫)로 승차하였으며 여성군(驪城君)에 봉해졌지만, 그 뒤 문정왕후(文定王后)에 대한 비방을 담은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으로 20여 명의 사림과 함께 유배당하였다. 양재역벽서사건을 을사사화와 구분하여 정미사화(丁未士禍)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같은 사화의 연속은 사회제도의 붕괴로 이어졌다. 토지제의 경우 조선 왕조는 건국 초부터 지속적으로 토지조사 사업을 벌이면서 왕권 강화에 힘썼다. 하지만 조선 중기에 이르러 토지제가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관직이나 신분에 따라 왕으로부터 토지를 받아 국가를 대신하여 세금을 거두는 과전제(科田制)였지만, 과전이 힘 있는 양반들에게 세습되면서 제도 자체가 문란해지자 세조는 1466년(세조12)부터 벼슬에 있는 동안만 봉급 대신 세금을 거두어 쓰고 벼슬에서 물러나면 국가에 반납하는 직전제(職田制)로 바꾸었다. 그러나 세습 관료들은 정치적 혼란과 왕권의 약화를 틈타 직전제마저 무너뜨렸고, 경상ㆍ충청ㆍ전라 삼남(三南) 지역의 비옥한 토지뿐 아니라 서울 인근 토지까지 겸병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세수(稅收)의 감소를 가져와 국가 경제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일반 백성들의 부담으로 돌아갔다.
군사제도 또한 건국 초기 사병(私兵)을 혁파하여 왕권을 강화하였고, 세조 때에는 상비군으로 편성된 중앙의 오위제(五衛制)와 지방 군사제도로 진관(鎭管) 체제를 두었지만, 전쟁 없는 상황이 오래 지속되면서 병장기는 녹슬고 군대의 기강이 해이해졌음에도 백성들이 감당하는 부역이나 군역의 부담은 줄지 않았다. 여기에 특산물을 바치는 공물(貢物) 방납(防納)의 폐해도 백성들을 힘들게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사실 근대 이전 봉건사회의 국가 경제는 토지와 사람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사람을 기준으로 세금을 매기는 인두세나 토지 단위에 세금을 매기는 결부법(結負法)이 모두 그러하다. 하지만 왕권이 약해지고 양반 관료들의 부패가 심해지면서 백성들의 삶은 더욱 궁핍해져 갔고, 국가 경제의 근본인 백성들의 어려움은 국가 경제의 붕괴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을 부추긴 것이 앞에서 살핀 사대사화였다.
이 같은 흐름을 놓고 보면 이언적은 삶 전체가 사대사화와 밀접하게 얽혀 있다. 8세 때 무오사화가 일어났고, 14세 때 갑자사화가 있었으며, 벼슬에 있던 29세 때 기묘사화를 겪었지만 할아버지 상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화를 면할 수 있었고, 55세 때의 을사사화와 57세 때의 정미사화에서는 직접 피해를 입었다. 따라서 이러한 삶의 경험이 이언적의 사상과 학문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2) 이언적의 생애
이언적(李彦迪)은 1491년(성종22) 경주부(慶州府) 양좌촌(良佐村)에서 태어나 1553년(명종8) 유배지인 강계(江界)에서 63세의 나이로 죽은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성리학자이다. 자(字)는 복고(復古)이고 호(號)는 주희의 호인 회암(晦庵)에서 따다가 스스로 회재(晦齋)라 하였으니 주희에 대한 흠모를 짐작할 수 있다. 본래 이름은 적(迪)이었으나 신하들 가운데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어서 31세 때 중종이 언(彦) 자를 더하여 언적(彦迪)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언적은 본관이 여주(驪州)이며, 고려 때 향공 진사(鄕貢進士)를 지낸 이세정(李世貞)의 후예이다. 증조부 이숭례(李崇禮)가 경주에 정착하였고, 조부 이수회(李壽會)는 훈련원 참군(訓鍊院參軍)을 지냈으며, 아버지 이번(李蕃)은 경상도 도회(都會)에서 장원을 한 뒤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일찍 죽었다. 어머니 정경부인 손씨는 계천군(鷄川君) 손소(孫昭)의 둘째 딸인데, 경주 손씨는 외조부 손소가 이시애(李施愛)의 난에서 공을 세워 적개 공신(敵愾功臣) 2등에 오르고, 둘째 아들 우재(愚齋) 손중돈(孫仲暾)이 우참찬(右參贊)을 지내고 청백리에 오르면서 집안이 번성하기 시작하였다.
이언적은 어린 시절 다른 아이들이 옆에서 웃고 떠들어도 전혀 휩쓸리지 않았다고 한다. 10세 때 아버지를 여읜 뒤 외가로부터 학문적, 경제적 도움을 많이 받았으며, 특히 김종직의 제자였던 외삼촌 손중돈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18세 때 함양(咸陽)이 본관인 선무랑(宣務郞) 박숭부(朴崇阜)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들였고, 23세 때 소과(小科)에 합격하여 생원(生員)이 되었으며, 이때 나라와 왕실의 재앙이 모두 간신들의 세 치 혓바닥에서 시작된다는 〈이구복방가부(利口覆邦家賦)〉를 지었다. 24세 때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였는데, 시험관 김안국은 이언적의 답안지를 보고 ‘임금을 도울 재목〔王佐才〕’이라고 감탄하였다. 뒷날 김안국에게서도 학문적 도움을 많이 받았다.
이언적은 권지 교서관 부정자(權知校書館副正字)로 벼슬을 시작하여 이듬해 지방 국립학교 교사에 해당하는 경주 주학(州學) 교관(敎官)으로 자리를 옮겼고, 26세 때 서자 전인(全仁)이 태어났지만 출생 사실을 몰랐다가 나중에 유배지로 찾아와 알게 된다. 27세 되던 해 첫날 〈외천잠(畏天箴)〉, 〈양심잠(養心箴)〉, 〈경신잠(敬身箴)〉, 〈개과잠(改過箴)〉, 〈독지잠(篤志箴)〉을 지어 스스로를 경계하였고, 같은 해 〈서망재망기당무극태극설후(書忘齋忘機堂無極太極說後)〉를 지어 셋째 외숙 손숙돈(孫叔暾)과 조한보(曺漢輔) 사이에 오간 무극태극에 대한 논의를 비판하였다. 그리고 이 글을 시작으로 이듬해까지 조한보와 우리나라 최초의 철학 논쟁인 태극 논쟁을 벌였다.
31세 때 홍문관 박사를 지내면서 이윤(伊尹)이 탕(湯) 임금과 폭군 걸(桀) 사이를 다섯 번 오간 사실을 공자의 행적과 비교하면서 비판한 〈이윤오취탕론(伊尹五就湯論)〉을 지었다. 그 뒤 세자시강원 설서(世子侍講院說書),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을 거쳐 외직인 인동 현감(仁同縣監)으로 나갔고,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으로 내직에 돌아왔다가 병조 정랑(兵曹正郞)으로 경상도 어사가 되었으며, 이조 정랑(吏曹正郞),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 등 중앙정부의 요직을 두루 거쳐 40세 때는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이 되었다.
당시 조정 여론은 아들이 중종의 부마가 된 김안로(金安老)에게 세자를 가르치고 돌보는 일을 맡기자고 하였다. 하지만 이언적은 홀로 김안로가 소인임을 내세워 반대하다가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로 좌천되었으며, 얼마 안 가 탄핵을 받고 파직되어 고향 자옥산(紫玉山) 기슭에 독락당(獨樂堂)을 짓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그 무렵 김안로에게 뇌물을 주고 벼슬을 얻은 경주 사람이 있었는데, 김안로가 그에게 이 사실을 이언적이 알지 못하게 하라고 했다는 이야기는 이언적의 강직함이 어떠했는지를 알려 주는 좋은 이야기이다.
47세 때 권력을 휘두르던 김안로가 문정왕후를 폐하려다 발각되어 죽자 이듬해 중종이 이언적을 가장 먼저 불러들여 장악원 첨정(掌樂院僉正)에 임명하였다. 48세 때에는 청백리로 가자(加資)되고 병조 참지(兵曹參知)가 되었다가, 전주 부윤(全州府尹)으로 나갔다. 그 이듬해 왕의 뜻을 받들어 〈일강십목소(一綱十目疏)〉를 지어 올렸고, 50세 때는 예조 참판과 성균관 대사성, 사헌부 대사헌을 맡았으며, 그때까지 아들이 없어서 종제(從弟) 이통(李通)의 셋째 아들 이응인(李應仁)으로 후사를 이었다. 그 뒤로도 한성 판윤, 이조 판서, 예조 판서, 형조 판서, 의정부의 우참찬(右參贊)과 좌찬성(左贊成) 등의 요직을 두루 지냈다.
55세 되던 해 중종이 승하하고 인종이 왕위에 올랐지만 문정왕후의 위세에 눌려서 꿈을 펴지도 못한 채 이듬해 승하하고 배다른 형제인 명종이 즉위하였다. 그 과정에서 인종의 외숙인 윤임과 명종의 외숙인 윤원형 형제가 대립하였고, 명종이 왕위에 오르자 윤원형 형제가 인종의 외척과 사림을 함께 몰아내기 위하여 을사사화를 일으켰다. 을사사화 때 이언적은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맡고 있었기 때문에 충순당(忠順堂)에서 죄를 논하는 일에 참여하였다. 이언적은 “신하의 의리는 마땅히 임금 섬기는 일에 전념하는 것이니 돌아가신 임금에게 벼슬하면서 마음을 다해 섬겼던 사람들을 어찌 크게 죄줄 수 있겠는가.” 하며 반대하였지만, 결국은 추국(推鞫) 자리에 참여했다 하여 위사 공신(衛社功臣)에 봉해졌다. 이언적의 이러한 처신에 대한 평가가 뒷날 크게 둘로 갈라졌다. 이이(李珥)와 그 제자들은 윤원형 일파의 횡포에 강하게 맞섰던 권벌(權橃)과 달리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고 비난을 하였다. 하지만 유성룡(柳成龍)은 적극적으로 대응하면 더 큰 희생을 불러올 것을 염려하여 고육지책으로 그렇게 했을 뿐이며, 그런 점에서 권벌의 적극적인 대응보다 이언적의 소극적인 대응이 더 의미가 있다고 평하였다.
56세 때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있다가 이기와 윤원형 등의 참소로 관작을 삭탈당했고, 다음 해 을사사화가 마무리되면서 수렴청정으로 권력을 휘두르던 문정왕후와 그 측근들을 비방하는 글이 양재역 벽에 붙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 일에 연루되어 평안도 강계로 귀양을 갔다. 그리고 63세의 나이로 유배지에서 숨을 거두자 아들 이전인이 경주 향리로 모셔왔다.
하지만 유배 기간 동안 이언적의 사상을 가늠할 중요 저작들이 나온다. 59세 10월에 주희의 《대학장구》를 자신의 관점으로 고친 《대학장구보유》와 《속대학혹문》을 완성하였고, 60세 8월 조선조 예학의 선구가 되는 《봉선잡의(奉先雜儀)》를 완성하였으며, 10월에는 선현들이 인(仁)에 대해 말한 좋은 구절을 뽑아서 해설을 붙인 《구인록(求仁錄)》을 저술하였다. 또한 같은 해 나라를 다스리는 요점을 정리해서 임금에게 올릴 생각으로 〈진수팔규(進修八規)〉를 지었지만 임금에게 보이지 못하였고, 63세 되던 해 《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를 저술하다가 완성을 보지 못하고 별세하였다.
이언적이 죽고 나서 13년 뒤 아들 이전인이 자신의 상소문과 함께 〈진수팔규〉를 명종에게 올리자 글을 본 명종은 이언적을 내쳤던 잘못을 깨닫고 복권시켰으며, 그해 10월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행장을 지었다. 1567년(선조 즉위년) 선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명으로 선생이 남긴 글을 찾아 모으게 하였고, 이듬해 2월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로 추증하였으며, 1569년 선조가 문원(文元)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명종의 묘정(廟廷)에 배향하게 하였다.
또한 1572년 경주 지역 사림들이 이언적을 기리기 위하여 경주 부윤과 경상 감사의 도움을 얻어 그가 머물던 독락당 아래에 옥산서원(玉山書院)을 지었다. 처음에는 사당인 체인묘(體仁廟)를 세우고 경주 서악(西岳) 향현사(鄕賢祠)에서 선생의 위판(位版)을 모셔와 제향(祭享)을 받들었으며, 그 뒤 강당인 구인당(求仁堂)과 기숙사인 민구재(敏求齋)와 암수재(闇修齋), 문루(門樓)인 무변루(無邊樓)와 정문인 역락문(亦樂門)을 갖추었고, 이듬해인 1573년 선조로부터 현판 글씨를 받아 사액서원(賜額書院)이 되었다. 그리고 1610년(광해군2) 조선 초기 대표적 사림파 학자인 김굉필ㆍ정여창ㆍ조광조ㆍ이황과 함께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되었다.
3. 이언적의 학문과 사상
1) 태극 논쟁
이언적의 철학에서 중요한 부분 가운데 하나는 조한보와 벌였던 태극 논쟁이다. 이 논쟁은 무극태극 논쟁이라고도 불리는데, 두 사람의 견해 차이는 주돈이(周敦頤)의 《태극도설(太極圖說)》에 대한 이해의 차이이기도 하다. 그 경우 이언적은 정통 성리학의 입장에 서 있고, 조한보는 유학자이기는 하지만 노장 또는 불교적 관점에 기울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언적의 호인 회재(晦齋)가 주희의 호인 회암(晦庵)에서 따온 것과 달리 조한보의 호는 망기당(忘機堂)이었다. 망(忘)은 도덕이니 옳고 그름이니 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의 존재마저 잊어버린 《장자》의 ‘좌망(坐忘)’을 연상케 한다.
사실 《태극도설》은 중국에서도 논란이 많았던 저술이다. 하지만 주희는 《태극도설》을 성리학의 주요 텍스트로 삼았고, 태극을 만물의 본질로 자리매김하였다. 그 과정에서 주희는 《태극도설》의 해석과 관련한 여러 문제를 놓고 육구연(陸九淵)과 논쟁을 벌였다. 이 논쟁은 아호사(鵝湖寺)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아호 논쟁이라고도 하고 두 사람의 성을 따서 주륙 논쟁(朱陸論爭)이라고도 하는데, 네 차례의 논쟁 가운데 세 번째 논쟁이 《태극도설》에 관한 논쟁이었다. 논쟁의 주제는 《태극도설》을 주돈이가 지은 것인지,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에서 무극이라는 표현이 필요한지, ‘극(極)’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태극도설》이 어디에서 연원한 것인지를 따지는 것이었다.
이언적과 조한보의 논쟁은 이 같은 주륙 논쟁의 연장선에 있다. 하지만 이언적은 주희의 견해를 바탕으로 자신의 주장을 펴면서도 주희의 견해를 답습하는 데 머물지 않고 논쟁 과정을 통해 성리학의 한국적 틀을 다지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큰 틀에서 보면 논쟁의 초점은 첫째로 궁극의 진리란 어떠한 것이며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둘째로는 그 진리를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에 있었다.
논쟁에서 다룬 첫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언적은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을 무극과 태극으로 나누어 이해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실체가 지닌 두 측면으로 이해하였다. 그래서 태극이란 구체적인 사물 속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면서 동시에 개별 사물의 구체성을 넘어서서 초월적으로 존재한다는 양면성을 말하였다. 하지만 조한보는 진리의 구체성을 부정하고 현실을 떠난 초월성만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논리는 사물의 상대화를 통해 객관성을 부정하는 도가적인 경지이며, 생(生)과 멸(滅), 세간(世間)과 열반(涅槃)의 상대적 한정을 넘어선 불가의 논리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한보는 만물의 본질인 태극이 일상을 넘어서서 초월적인 무엇인가에 들어 있다고 보았고, 이언적은 태극이 초월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구체적인 현실을 떠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이 논의는 사실 도덕법칙에 관한 것이었다. 조한보는 도덕법칙이란 보편적인 것이며 가장 궁극의 진리이기 때문에 구체적인 사람 하나하나의 행동을 넘어서서 어딘가 초월적인 곳에 있다고 생각했고, 이언적은 비록 도덕법칙이 보편적이며 추상적인 것이지만 사람들의 행동 하나하나를 떠나서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그래서 이언적은 추상성만 있고 구체성이 없는 조한보의 주장을 ‘눈금 없는 저울’과 ‘치수 없는 자’에 견주면서 현실에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는 헛된 논리일 뿐이라고 비판하였다.
논쟁에서 다룬 두 번째 내용은 진리를 얻는 방법에 대한 것이었다. 이언적이 하늘의 도와 사람의 도의 조화 속에서 이루어지는 체득을 주장했다면 조한보는 하늘의 도를 강조하는 입장에서의 체득을 주장하였다. 이언적은 사람의 일〔人事〕에서 도(道)를 구하는 공부가 참된 학문〔實學〕이며 아래에서 배우는 것〔下學〕이 참된 힘씀〔實務〕이고, 사람이 할 일을 다해서 실천과 안목이 모두 갖추어짐으로써 생각과 실천이 하나 되는 것이 참된 쓰임〔實用〕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하늘의 도에 통달하는 상달 공부(上達工夫)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 사람의 일을 배우는 하학인사(下學人事)가 곧 상달 공부라고 한다. 하지만 조한보는 상달(上達) 한쪽으로만 치우친 존양 공부(存養工夫)만을 강조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언적은 경건성에 바탕을 둔 내적 수양과 아울러 구체적인 실천과 그 실천의 결과를 놓고 옳고 그름을 따져서 잘못을 바로잡아 가는 외적 수양을 강조하였다. 하지만 조한보는 현실을 넘어선 초월적인 진리의 경지에 내 마음을 머물게 하면서 마음의 참모습과 인간의 본성을 잘 보존하고 길러 나가야 한다고 한 것이다. 이 태극 논변에 대해 이황은 유학의 바른 모습을 지켜 낸 위도(衛道)의 공이 높다고 칭송하였다.
2) 《대학장구(大學章句)》 개정
이언적의 사상 가운데 또 하나 주목할 점은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와 《속대학혹문(續大學或問)》을 통해 주희가 편찬한 《대학장구》를 자신의 독창적인 견해로 새롭게 고친 것이다. 이 저술은 유교 공부론의 출발점인 격물치지(格物致知)가 개정의 중심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하겠다.
본래 《대학》은 《예기》의 한 편이었다가 송대에 높여지면서 사서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정호(程顥), 정이(程頤) 형제와 주희는 모두 《대학》의 순서가 잘못되었거나 빠진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여 개정본(改訂本)을 만들었다. 특히 주희는 순서가 뒤바뀌었다고 생각되는 부분의 순서를 다시 정하고, 빠졌다고 생각되는 격물치지에 대한 해설 부분에 정이의 학설을 바탕으로 새로 134자를 보충하여 격물보망장(格物補亡章)을 만들었다. 하지만 이언적은 《고본대학》이 빠진 부분은 없고 순서만 뒤바뀌었다고 보는 정이의 관점을 따랐다. 그래서 주희가 본말(本末)에 대한 해설이라고 보았던 청송장(聽訟章)을 정이의 생각과 같이 경(經) 1장(章)의 결론으로 삼았고, 경문(經文) 안에 있던 ‘그칠 데를 안 뒤에 정함이 있으니, 정해진 뒤에 능히 고요해지고, 고요해진 뒤에 능히 편안해지고, 편안해진 뒤에 능히 생각할 수 있고, 생각할 수 있게 된 뒤에 능히 얻게 된다.〔知止而后有定, 定而后能靜, 靜而后能安, 安而后能慮, 慮而后能得.〕’라는 문장과 ‘물건에는 근본과 말단이 있고 일에는 시작과 끝이 있으니 먼저 할 것과 나중 할 것을 안다면 도에 가까울 것이다.〔物有本末, 事有終始, 知所先後, 則近道矣.〕’라는 문장을 순서를 바꾸어 격물치지에 대한 설명으로 삼았다. 그렇게 해서 자신의 생각에 맞게 새로 개정한 순서대로 묶은 책이 《대학장구보유》이고, 주희가 편찬한 《대학혹문》의 형식을 따와서 스스로 중요한 문제에 대한 물음을 만들고 그 질문에 답하는 방식으로 자신이 《대학장구》를 개정한 이유와 근거를 밝힌 책이 《속대학혹문》이다. 《대학장구보유》와 《속대학혹문》에 나타난 이언적의 생각은 매우 독창적이다. 뒷날 정조는 이언적의 《대학장구보유》를 다시 펴내면서 서문에 ‘주희를 잘 배웠다’라고 평가하였다.
3) 격군(格君)과 민본(民本)의 경세론
이언적은 앞에서 본 것처럼 진리가 지극히 가깝고 지극히 구체적인〔至近至實〕 데에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희로애락의 감정이 나타나기 이전인 마음의 본모습을 세상의 큰 근본으로 보고 공경〔敬〕과 조심〔愼〕으로 마음을 보존하고 타고난 본성을 길러서 실천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마음이 온 세상의 큰 근본으로 서는 것은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니 공부를 통해 마음의 본모습을 기르고, 경건함〔敬〕을 통해 이 마음을 보존하며, 덕 있는 사람을 가까이 함으로써 이 마음을 유지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유가의 공부론이 중요한 까닭이다.
더구나 유가 공부론의 목적은 수기치인(修己治人)이다. 따라서 임금의 경우도 자신을 닦는 일이 우선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언적은 “제왕의 학문은 이치를 궁구하고 마음을 바로잡는 일일 뿐이다.〔帝王之學, 窮理正心而已矣.〕”라고 하였다. 비록 정치적으로 해야 할 일은 종류가 다양하고 살펴야 할 백성도 많지만 그 출발은 오직 임금의 바른 마음이라고 한 것이다. 그 마음이 바르면 잘 다스려지고 바르지 못하면 혼란스러워지기 때문에 임금의 마음은 치란(治亂)이 갈리는 중요한 지점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언적은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는 격군론(格君論)을 경세론의 출발로 삼았다.
이언적은 마음을 바로잡는 구체적인 방법으로 학문을 익히는 일과 언제나 경건함을 유지하는 일 두 가지를 들고 있다. 하지만 이 두 가지 공부는 서로 다른 일이 아니라 하나같이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는 것으로 귀결된다. 그리고 임금이 마음을 바로잡은 결과는 조정이 바로잡히고, 모든 벼슬아치들이 바로잡히고, 모든 백성들이 바로잡히고, 온 세상이 바로잡히는 것으로 나타난다고 하였다.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으려고 했던 이언적의 노력은 백성을 위한 것이었다.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라는 생각은 유교의 근본정신이다. 나를 닦아서 남에게 이르는 수기치인의 효과는 백성을 도덕적으로 바로잡고 그들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데 있었다. 그래서 이언적은, 백성의 마음이 있는 곳이 곧 하늘의 마음이라고 하였고, 임금의 마음 씀이 하늘과 합치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 ‘임금의 마음 씀이 하늘과 합치하는지 그렇지 못한지를 어떻게 징험할 수 있는가? 백성들의 마음에 징험해 보면 알 수 있다. 임금의 마음이 크게 공평하고 지극히 올발라서 좋아하고 싫어하고 취하고 버리는 것이 의리에 맞고 많은 사람들의 정서에 화합하면 반드시 하늘의 마음과 합치될 것’이라고 하였고, ‘하늘의 마음이 곧 백성들의 마음이니 백성들의 뜻을 얻으면 하늘의 뜻을 얻게 된다’라고 하였다.
4. 저술과 판본
1) 이언적의 저술과 판본
《회재집(晦齋集)》은 모두 6개의 판본이 있다. 그 가운데 초간본은 아들 이전인(李全仁)이 집에 보관하던 초고를 바탕으로 관련 자료를 더 모아서 원집(原集)과 습유(拾遺)로 나눈 다음 1565년(명종20) 무렵 이황에게 검토받아 두었던 것을, 1574년(선조7) 손자 이준(李浚)이 다시 유희춘(柳希春)의 교정을 받고, 경주 부윤 이제민(李齊閔)과 경상 감사 노진(盧禛)의 도움을 얻어 경주에서 목판본으로 간행한 것이다.
그 뒤 1600년 습유를 별집으로 편차한 판본이 다시 간행되었고, 1624년에는 별집을 원집에 포함시킨 세 번째 판본이 옥산서원에서 나왔다. 그리고 1631년 별집을 습유로 고치고 권4에 기존 간행본의 별집 1권을 붙였으며, 새로 권11~13을 편성하고 여기에 별집 권2~4를 각각 수록하면서 권11에 묘비명 1편과 부록에 〈회재이선생묘지(晦齋李先生墓誌)〉 등 4편을 덧붙여 모두 13권 5책으로 옥산서원에서 간행한 것이 네 번째 판본이다. 그 뒤로도 정조 때 간행된 보각본(補刻本)과 1926년 간행된 간본이 있다. 그 간본들을 정리하면 표와 같다.
간행연도 | 편차 및 내용 | 소장처 | |
1574 | ○ 퇴계 이황이 수교(讎校)한 후 행장(行狀)을 지어 붙인 정고본(定稿本) ○본집10권ㆍ세계도(世系圖)ㆍ연보(年譜)ㆍ부록(附錄)으로 구성 | 규장각, 성암고서 박물관 |
1600 | ○ 별집 4권을 증보하여 총 14권 5책으로 간행 | 옥산서원 | |
1624 | ○ 별집을 원집에 포함하여 개간 | |
1631 | ○ 별집을 습유(拾遺)로 고치고 이전 간행본 권4에 별집 1권을 붙였으며, 새로 권11~13을 편성하고 여기에 별집 권2~4를 각각 수록하여 13권 5책으로 간행 ○ 권11에 묘비명 1편과 부록에 〈회재이선생묘지(晦齋李先生墓誌)〉 등 4편을 덧붙임 | 규장각 |
정조 연간 | ○ 1794년까지의 연보가 추가된 보각본(補刻本) | 성균관대 도서관 |
1926 | ○ 1864년까지의 연보가 추가되고 권11에 묘갈명 2편을 덧붙였으며 세계도(世系圖)는 빠짐 | 국립중앙도서관, 성균관대 도서관 |
이 가운데 이 책의 번역에 쓰인 판본은 한국문집총간 24집에 들어 있는 《회재집(晦齋集)》으로, 1631년 옥산서원(玉山書院)에서 간행된 4간본이며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본이다. 이 간본에는 노수신(盧守愼)의 서문, 유희춘(柳希春)과 허엽(許曄)의 발문, 세계도(世系圖)와 연보, 그리고 노수신의 연보후서(年譜後敍)가 붙어 있다.
문집의 구성은 권1부터 권4까지가 시문(詩文)이고, 권5에는 부(賦)ㆍ잡저(雜著) 등이 실려 있다. 특히 잡저에 실린 〈서망재망기당무극태극설후(書忘齋忘機堂無極太極說後)〉와 망기당(忘機堂) 조한보(曺漢輔)에게 보낸 4편의 편지는 태극 논쟁의 전모를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권6에는 〈원조 오잠(元朝五箴)〉을 비롯하여 명(銘), 기(記), 〈인종대왕 행장(仁宗大王行狀)〉, 제문(祭文) 등이 실려 있고, 권7에는 〈일강십목소(一綱十目疏)〉가 있으며, 권8에는 〈진수팔규(進修八規)〉가 있다. 권9와 권10에는 상소문에 해당하는 장차(狀箚)가 실려 있고, 권11에는 이언적이 지은 〈대학장구보유서(大學章句補遺序)〉ㆍ〈중용구경연의서(中庸九經衍義序)〉ㆍ〈구인록서(求仁錄序)〉ㆍ〈봉선잡의서(奉先雜儀序)〉와 〈사벌국전(沙伐國傳)〉, 김안국(金安國)을 위한 제문을 비롯한 여러 제문과 묘비명(墓碑銘)이 있으며, 권12에는 〈홍문관상소〉가 있고, 권13은 습유(拾遺)로 임금에게 올린 사(辭), 장(狀), 차(箚), 계(啓)가 있다. 그리고 그 뒤에 유희춘과 허엽의 발문(跋文)과 세계도(世系圖), 연보(年譜)가 있으며, 연보 끝에는 노수신의 연보후서(年譜後敍)가 붙어 있다. 그리고 그 뒤에 이황이 쓴 행장(行狀), 기대승(奇大升)이 쓴 신도비명과 이항복(李恒福)이 쓴 묘지(墓誌), 허엽의 〈옥산서원기(玉山書院記)〉와 박승임(朴承任)의 〈강계부사묘기(江界府祠廟記)〉, 유성룡이 쓴 〈공서어찰답관학제생소후(恭書御札答館學諸生疏後)〉가 있다.
이언적의 저술 가운데 먼저 주목할 것은 무극태극(無極太極)에 관한 논변이다. 이 논변은 한국 유학 역사상 현재 남아 있는 최초의 논쟁으로 이언적이 27세 되던 1517년(중종12)부터 1518년까지 망기당 조한보와 벌인 것이다. 본래 셋째 외숙 망재(忘齋) 손숙돈(孫叔暾)과 조한보 사이에서 논쟁이 시작되었는데, 친구를 통해 조한보가 손숙돈에게 보낸 편지를 얻어 본 이언적이 두 사람 모두의 견해를 비판하는 논평을 쓰면서 이언적과 조한보의 논쟁으로 바뀌었다. 두 사람 사이에 오간 편지는 처음 이언적이 썼던 비평문 외에 서로에게 보낸 4통씩의 편지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조한보의 편지는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이언적은 이 논쟁을 통해 유가와 노장, 또는 육왕학의 차이를 분명히 하였으며, 그래서 이황은 ‘도를 지킨 공이 크다’라고 극찬하였다.
이 논쟁과 관련된 위의 글을 따로 묶어서 펴낸 책이 《태극문변》이다. 이 책의 발간 경위는 처음에 이언적의 글 5편을 손자 이준(李浚)이 이황에게 보이고 질정을 받았는데 이황이 크게 찬탄하였고, 그 후 이준이 다시 정구(鄭逑)에게 비평을 청하였다. 이를 본 정구가 주희와 육구연 형제 사이의 주륙 논쟁(朱陸論爭)과 함께 묶어 간행하면 주돈이(周敦頤) 이래 전개된 태극설의 정통을 밝히게 될 것이라고 권하여 간행하게 되었다. 《태극문변》은 주돈이의 《태극도설(太極圖說)》과 주희와 육구소(陸九韶), 육구연(陸九淵) 형제 사이에 오간 태극에 대한 논쟁을 담은 6편의 편지를 앞에 놓고 뒤에 이언적의 〈서망재망기당무극태극설후〉와 이로 인해 망기당에게 보낸 4편의 편지를 두었다. 책머리에 이정귀(李廷龜)의 서문이 있고 끝에는 김지남(金止男)과 장현광(張顯光)의 발문(跋文)이 붙어 있다. 초간본은 김지남의 주선으로 화산부에서 간행하였고 중간본은 옥산서원에서 펴냈으며, 초간본과 중간본의 오류를 바로잡아 회연서원(檜淵書院)에서 개간하였다.
다음으로 주목할 것은 왕의 뜻을 받들어 지어 올린 〈일강십목소〉이다. 이 글은 이언적이 49세 되던 1539년(중종34)에 쓴 것인데, 중종이 ‘옛날 진덕수(眞德秀)도 이보다 나을 것이 없다’라고 극찬하고 동궁과 외조(外朝)에 두루 보여 규범으로 삼게 하였으며, 이언적에게 겉옷감과 속옷감 한 벌을 상으로 내리고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삼았다. 〈일강십목소〉는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는 일을 근본으로 삼고 이를 바탕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세목을 밝힌 것이다. 따라서 근본으로서의 ‘일강’은 임금의 마음 씀이고 10가지 세목은 ‘집안을 엄히 단속할 것〔嚴家政〕’, ‘세자를 잘 기를 것〔養國本〕’, ‘조정을 바로잡을 것〔正朝廷〕’, ‘인재를 쓰고 버릴 때 신중할 것〔愼用舍〕’, ‘하늘의 도를 따를 것〔順天道〕’, ‘인심을 바로잡을 것〔正人心〕’, ‘언로를 넓힐 것〔廣言路〕’, ‘사치와 욕심을 경계할 것〔戒侈欲〕’, ‘군정을 가지런히 할 것〔修軍政〕’, ‘기미를 살필 것〔審幾微〕’이다.
다음으로 〈진수팔규〉는 학문을 할 때 전념해야 할 8개 항의 요점을 서술한 것으로 60세 때 유배지에서 쓴 글인데, 1566년(명종21) 아들 이전인이 임금에게 올려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이 글에는 이상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가장 먼저 임금의 품성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이언적의 생각이 잘 담겨 있다. 이언적은 당시 사회의 중심이 임금이고 임금의 중심은 마음이므로, 그 마음을 바로잡고 그 속에 담긴 본성을 바르게 함으로써, 도덕에 바탕을 둔 올바른 통치를 통해 사회 국가 전체의 도덕성을 회복하려 한 것이었다. 현실적으로 봉건 전제주의 아래에서는 최고 권력자가 임금일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는 일이 사회 개혁의 첫걸음이라는 생각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 같은 주장은 임금을 위한 것이 아니었으며 본질적으로 백성을 위한 주장이었다. 그 까닭은 임금이 바른 정치를 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백성들의 삶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언적은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는 ‘격군심(格君心)’이 감정이 움직이기 이전의 상태를 보존하는 중(中)의 문제와 감정이 움직였을 때 욕심이 끼어들지 않게 해서 절도에 맞도록 하는 화(和)의 문제에 있다고 보고, 구체적인 방법으로 ‘도리를 밝힐 것〔明道理〕’, ‘근본을 세울 것〔立大本〕’, ‘하늘의 덕을 몸으로 익힐 것〔體天德〕’, ‘지나간 성인을 본받을 것〔法往聖〕’, ‘총명을 넓힐 것〔廣聰明〕’, ‘어진 정치를 베풀 것〔施仁政〕’, ‘하늘의 마음을 따를 것〔順天心〕’, ‘중화를 이룰 것〔致中和〕’을 강조하였다.
그 밖에 문집에는 들어 있지 않지만 이언적의 사상을 잘 알 수 있는 중요한 저술을 살피면 다음과 같다. 먼저 《대학장구보유》와 《속대학혹문》은 서로 표리(表裏)가 되는 저술로, 《고본대학(古本大學)》의 체재를 바꾸어 새롭게 《대학장구(大學章句)》를 만든 주희의 견해를 따르지 않고 자신의 생각대로 차서를 정하고 그에 대한 견해를 밝힌 책이다. 따라서 이언적의 독창적인 생각과 자유로운 학문 태도를 엿볼 수 있다.
다음으로 《중용구경연의》는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에 관한 저술로 본집과 별집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용 9경’이란 《중용》 20장에 나오는 수신(修身)ㆍ존현(尊賢)ㆍ친친(親親)ㆍ경대신(敬大臣)ㆍ체군신(體群臣)ㆍ자서민(子庶民)ㆍ내백공(來百工)ㆍ유원인(柔遠人)ㆍ회제후(懷諸侯)의 아홉 항목으로 천하 국가를 다스리는 구체적인 방법을 말한다. 이언적은 송나라 진서산(眞西山)이 지은 《대학연의(大學衍義)》를 본떠 이 책을 지었다고 하였다. 《중용구경연의》가 매우 방대한 저술이어서 미완성에 그친 아쉬움이 있지만 이 저작을 통해 이언적의 경세 사상을 살필 수 있다.
다음으로 《구인록》은 송나라 성리학자 장식(張栻)의 《수사언인록(洙泗言仁錄)》을 본뜬 저술이다. 내편과 외편 각 2권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논어》와 《맹자》를 비롯하여 유가의 여러 경전에 나오는 인(仁)에 관한 견해들을 모아 놓았다. 이 책은 인을 치국평천하의 근본으로 파악한 이언적의 생각을 잘 담고 있는데, 내편은 인을 구하는 방법과 함께 인을 실천한 효과가 얼마나 큰지를 논하고 있고, 외편은 인의 체용(體用)과 그 요점에 대해 논하고 있다.
다음으로 《봉선잡의》는 조선 예학 발달의 선구가 되는 저술로, 이언적 집안의 제례 전범이었다. 이 책은 주자(朱子)의 《가례(家禮)》를 대본으로 하면서도 다른 여러 학자들의 견해와 당시 행해지는 범절 가운데 마땅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덧붙였고, 아울러 《예기》와 여러 선현의 글 가운데 보본추원(報本追遠)의 뜻을 잘 밝힌 것들을 합쳐서 완성하였다.
마지막으로 이언적 자신의 저술은 아니지만 그의 사상이 잘 담겨 있는 책으로 《관서문답록》이 있다. 이 책은 이언적이 강계에 귀양 가 있는 동안 곁에서 수발을 들었던 아들 이전인이 아버지에게서 배운 것을 묶어 대화체 형식으로 정리한 것이다. 이단상(李端相)이 발문(跋文)에서 이언적과 이전인의 관계를 공자와 그 아들 리(鯉)에 비유하였을 정도로 부자간의 돈독한 정이 느껴지는 책이다.
2) 번역의 의미와 번역본의 특징
이제까지 나온 비중 있는 이언적 문집 번역본은 두 가지가 있다. 그 첫째는 1962년 옥산문헌간행회(玉山文獻刊行會)에서 펴낸 《회재선생전서(晦齋先生全書)》이다. 하지만 전서(全書)라는 책 이름과 달리 문집의 일부만을 번역하였다. 책의 구성은 원문 아래에 의역(義譯), 통석(通釋), 적해(摘解)를 붙였다. ‘의역’은 문장 풀이이고, ‘통석’은 전체 의미를 약술한 것이며, ‘적해’는 어려운 어구나 전고를 밝힌 것이다. 전체 번역 양을 보면 시(詩)는 55퍼센트 정도를 선별 번역하였고, 부(賦), 잡저(雜著), 서(書), 서(序), 논(論), 잠명(箴銘), 제문(祭文), 행장(行狀), 소(疏), 연보(年譜), 〈회재선생행장(晦齋先生行狀)〉 등을 23퍼센트 정도 번역하였다.
두 번째 번역본은 1974년 묵민회갑기념사업회(默民回甲記念事業會)에서 펴낸 《국역 회재전서(國譯晦齋全書)》이다. 이 번역서는 《회재선생문집(晦齋先生文集)》과 《대학장구보유》ㆍ《속대학혹문(續大學或問)》ㆍ《중용구경연의》 중에서 철학과 경세에 관한 글을 뽑아 번역한 것이 특징이다. 문집에서 뽑아 번역한 것으로는 잠명 8편, 〈서망재망기당무극태극설후〉와 조한보에게 보낸 편지 4편, 임금에게 올린 〈일강십목소〉ㆍ〈진수팔규〉ㆍ〈홍문관상소〉 3편과 차자(箚子) 5편이 있다. 문집을 중심으로 볼 때 시부(詩賦)와 서간이 대부분 빠져 있고, 운문 번역이 없을 뿐 아니라 산문도 33퍼센트를 번역하는 데 그쳐서 문집 번역으로는 미흡한 면이 있다. 하지만 《대학장구보유》ㆍ《속대학혹문》ㆍ《중용구경연의》의 방대한 원문의 많은 부분을 번역한 점이 돋보인다.
이번에 나오는 이 책은 번역 부분을 2권으로 나누고 다시 원문을 교감하고 표점을 찍은 책 1권을 덧붙였다. 번역서 제1책은 한국문집총간에 실린 《회재집(晦齋集)》 권1부터 권6까지의 번역을 실었으며, 제2책에는 권7부터 권13까지의 내용과 그 뒤에 붙은 발(跋), 세계도(世系圖), 연보(年譜), 부록의 번역을 실었다.
이 책의 특징은 최초로 문집을 완역한 점이다. 하지만 아쉬운 점은 번역 저본이 문집이기 때문에 이언적의 다른 뛰어난 저술을 포괄하지 못한 점이다. 문집에 들어 있지 않은 이언적의 저술로는 《대학장구보유》와 《속대학혹문》, 《구인록》, 《봉선잡의》, 《중용구경연의》 등이 있다.
5. 이언적 철학의 사상사적 의미
이언적의 철학은 그 뿌리가 주자학이다. 후대 학자들 또한 이언적을 서경덕(徐敬德), 이황(李滉), 이이(李珥), 임성주(任聖周), 기정진(奇正鎭)과 함께 조선조 성리학의 6대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았다.
한국 성리학을 대표하는 인물이 이황과 이이이며 이들에게서 한국 성리학의 특성이 잘 드러나는 중요한 이론 틀이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누구나 인정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그 같은 논의의 지평을 연 선구자는 화담 서경덕과 회재 이언적이었다. 두 사람은 같은 시기에 태어나 독자적인 학문 세계를 개척하였다. 그 가운데 서경덕이 기를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하면서 이이에게 영향을 준 부분이 많았다면, 이언적은 이(理)를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하면서 이황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이이가 서경덕의 학문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이언적의 행적을 비판한 것과 이황이 서경덕의 학문을 전면 부정하면서 이언적의 학문을 적극 긍정한 것은 좋은 대조를 이룬다.
이언적의 사상 형성에 큰 획을 그은 일은 망기당 조한보와의 논쟁이다. 이 논쟁은 중국에서 주희와 육구연이 벌였던 아호 논쟁의 연장선에 있지만 아호 논쟁의 주된 흐름이 우주론적 논쟁이었던 것과 달리 출발은 우주론적이었지만 논쟁의 중심 주제와 귀결은 인간의 도덕성과 그에 따른 실천 문제였다. 따라서 우주론적인 중국 학자들의 논점을 인간론 중심의 한국적 성리학으로 바꾼 공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특징이 담겨 있기 때문에 선조 때 중국에서 온 사신들이 조선에도 공자와 맹자의 학문을 깊이 연구한 학자가 있느냐고 물었을 때 사신 접대를 맡았던 우리 학자들이 그들에게 이언적의 글을 가져다 보여 주었던 것이다.
이언적은 이 논쟁을 통해 불교나 노장사상의 견해를 바탕으로 성리학을 이해하는 태도를 배척함으로써 한국 성리학 내부에 주자학적 기초를 튼튼하게 세웠다. 이언적은 특히 이 논쟁을 통해 인간의 타고난 본성이 곧 도덕 원리라는 확신과 아울러 마땅히 그 본성을 현실에서 구현해 내야 한다는 주장을 한 것이다. 이황은 이 같은 이언적의 학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선생이 살아 계실 때 스스로 깊이 감추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선생이 도를 지니고 있음을 알지 못하였다. 내가 어리석어서 일찍이 벼슬에 나아가 선생을 우러러보고서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여 능히 이런 문제를 가지고 깊이 물어 깨달음을 얻지 못하였다. 10여 년 전부터 병이 들어 재야에 묻혀 있으면서 하잘것없는 것들을 살펴보는 가운데 의지할 데를 찾아서 물을 곳이 없음을 돌아본 뒤에야 억울하고 원통한 마음으로 선생의 사람됨을 흠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뒷날 정약용(丁若鏞) 또한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학문을 평가하면서 “회재와 퇴계의 학문을 날〔經〕로 하고 정치 경제를 씨〔緯〕로 하였다.”라고 평하였으니, 이언적의 학문이 이황을 거쳐 이익에게까지 영향을 주었음을 잘 알 수 있다.
2013년 10월 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