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철원 교수 / 서울신학대학교 신약학
Ⅰ. 최근 성서읽기의 현황
현대 성서읽기의 흐름을 살펴보고자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성서 텍스트의 통전성/총체성(wholeness)을 이해하는 것이다.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는 66권의 각기 다른 시대와
문화 속에서 생성된 문서들의 결합이기에 각 문서가 지닌 특수성을 감안할 때 분석적이면서 부분적인 읽기가 그 자체로 타당성을 갖는다. 이러한
경향은 역사적인 사실 탐구의 자리를 자연적으로 확보해줌으로써 성서의 각 문서가 서 있던 역사적이고 문화적이며 사회적인 특성을 발견하도록
연구자들을 인도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역사적 탐구의 획기적인 효용성은 정작 텍스트의 세계 속으로 독자를 이끄는데 역부족이라는 비판도 함께
제기되었다. 이것이 현대 성서읽기의 동향을 비판적으로 검토할 때 지적되는 중요한 하나의 요소이다. 우리가 오늘 함께 토론할 내용인
내러티브(narrative)에 대한 연구는 이러한 반성과 함께 고려되어야만 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이러한 현재의 추세에 대한 이해가 보다 더 선명해질 것이다. 우리 시대가 갖는 성서해석의 위기는 ‘저자의
죽음(death of author)’ 1) 을 선고하는 근대의 종언과 함께 시작되었다. 저자로부터 그리고 본래적 정황과 원래적 지시대상으로부터
자율성을 획득한 텍스트는 자체의 언어적이며 구조적인 완결성과 자체적인 지시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저자의 죽음이 선고된 이후 텍스트의 권위는,
모든 텍스트 읽기는 텍스트 속으로 가지고 들어가는 독자의 전제에 근거한다는 불트만(R. Bultmann)의 주장으로 전혀 예상치 못한 중대한
고비를 맞는다. 불트만의 제안은 “텍스트는 마치 고인이 된 사람들처럼 아무런 권리도 목적도 이해관계도 가지고 있지 않다. 텍스트는 독자들 혹은
해석자들이 어떤 방식을 선택하든지 그들이 선택한 대로 사용될 수 있다”는 실용주의 이론을 위한 자양분이 되었기 때문이다. 2) 이 시대에
텍스트는, 더 이상 그 자체로서의 의미를 상실한 채 독자들의 손에서 휘둘리는 떡 반죽 신세로 전락해버렸다.
저자의 권위 내지 텍스트의 의미 모두를 상실한 현 시대의 해석학은 데리다(J. Derrida)가 주장하듯이, 기호(들)의 바다를 부유하는
하나의 유희가 되어 버린듯하다. 3) 그렇지만 성서의 권위를 하나님의 영감이라는 변할 수 없는 토대로 받아들이는 기독교 공동체가 이런 논리에
결코 동의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의 대안은 무엇인가? 본 연구는 이러한 고민과 문제에 대응하여 기독교 공동체가 나아갈 미래적 전망을
모색하는 데 목적을 갖는다. 그리고 이 연구의 종착점에서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의 권위를 확증할 수 있는 해석학적 모델을 채택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Ⅱ. 내러티브 읽기로 가는 길목
성서의 본문은 현재 그것을 읽고 있는 독자들과 동떨어진 문화권에 살았던 사람들을 대상으로 기록된 문서이다. 그러므로 역사적 탐색은 이런
역사와 시간 그리고 언어와 문화의 단절을 주목하고 성서에 쓰인 단어들이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 의미했던 본래적인 뜻과 기능을 정확하게 분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러한 관심을 가지고 텍스트를 분석하는 방식을 역사비평(Historical Criticism)으로 총칭한다. 이것은 실제로
무엇이 발생했는지 혹은 성서의 텍스트를 기록한 저자가 그 본문을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에 관심을 갖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텍스트를 분석하는
연구자의 관점은 성서의 본문에서 이탈하여 주변부에 머물 가능성이 배가된다. 역사비평의 적극적인 적용은 권위 있는 문서인 성서의 지위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될 정도로 위용을 떨쳤다. 4) 이러한 역기능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탐구는 성서의 내용을 역사와 분리시키려는 오해를 극복하는 데
유익하며, 성서의 본문이 지니고 있는 본질적인 세계를 부정하지 않도록 막아주는 장벽의 역할을 수행해주는 동시에, 성서가 선포하고 있는 복음의
역사적 의미를 부정하지 않도록 한다는 점에서 공헌은 인정될 만하다. 5)
이와는 달리, 텍스트 자체만을 철저히 분석하여 그 의미를 탐구하는 방법이 등장하였는데, 신비평(New Criticism)이 바로 그것이다.
6) 의미는 그 단어들이 실제 어떤 방식으로 사용되었는지를 살펴봄으로써만 확립될 수 있다고 신비평주의자들은 주장한다. 그러나 저자로부터 자유를
선언한 신비평주의자들 역시 저자를 확인할 수 밖에 없었고, 텍스트에 대한 저자의 견제를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성서학에서 신비평은 편집비평(저자는
그의 작품 전체를 서술하면서 무엇을 의도하고 있었는가?)에서 내러티브 비평(저자와 상관없이 텍스트는 그 자체로 무엇을 의도하고 있는가?)으로
넘어가는 기반을 과도기적으로 마련해 주었다. 7)
텍스트 자체의 의미에 골몰했던 신비평은 텍스트의 구조와 수사학적 구조, 독자들의 읽기 능력에 대한 최상의 신뢰, 그리고 텍스트의 내러티브
구조에 숨겨진 소리 발굴이라는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성서의 각 문서들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색채를 파악하는 신문학비평(New Literary
Criticism)으로 그 중심축을 이동해 갔다. 신문학비평에는 구조주의, 수사학 비평, 독자반응비평 등으로 세분된다. 우선
구조주의(Structuralism)는 본문의 의미가 본문의 형식적 구조에 있다고 간주한다. 따라서 본문의 구조와 형태에 집중하며, 주로 본문의
표피구조(surface structure)의 의미를 지배하고 결정하는 심층구조(deep structure)를 연구한다. 8) 그러나 텍스트의
형식적인 특징에만 초점을 맞출 경우 정작 중요한 내용을 놓쳐버릴 위험이 따른다. 9) 또한 전체를 구성하는 개별 요소의 무게를 고려하지 않는
것, 즉 성서의 각 문서들을 기록한 저자들의 개성이 무시되는 것은 구조주의의 단점으로 지적된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등장한 후기
구조주의(Post Structuralism)는 독자 자신의 다양한 자각과 경험에 관계없이 의미를 발견하는 데 있어서 지극히 회의적이다. 그러므로
후기 구조주의는 독점적인 텍스트 해석에 대한 반동으로 보이며, 해석 활동에 대한 독자의 위치 즉, 사회, 역사, 신학의 위치가 갖는 영향을
탐색하는 등, 성서 텍스트의 다양한 층을 파악할 수 있게 하는 장점도 있다.
마일렌버그(J. Muilenburg)에 의해 성서학 분야에 처음으로 소개되었던 수사학 비평(Rhetorical Criticism)은
신문학비평의 범주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방법이다. 그는 본문 자체의 의도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되는 것이 바로 화자의 전환과 중심
단어들의 반복과 같은 수사학적 표식들을 찾는 일임을 강조했다. 10) 이러한 제안은 특히 케네디(G.A. Kennedy)가 강조한 고전 수사학의
이론을 통해서 신약성서의 수사학 비평 수립에 공헌했다. 11) 수사학 비평은 신약성서의 서신 연구에 괄목할 만하게 기여했고, 12) 내러티브
비평과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많은 비평가들은 텍스트 실증주의를 배격하고, 그 대신 독자의 역할을 검토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독자반응비평(Reader-response Criticism)으로 분류될 수 있다. 13) 이는 텍스트를 저자와 독자로부터 독립된 대상으로 보았던
구조주의와는 달리, 특정 본문의 의미를 산출하는 데 있어서 본문의 역할보다는 독자의 역할에 더 많은 강조를 둔다. 14) 독자-반응 비평에서
텍스트는 독자로 하여금 텍스트의 의미 구성에 참여하도록 초청하며 따라서 독자가 그 자리를 채워야만 할 공백이나 미결정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텍스트의 의미는 텍스트와 독자라는 두 지평 사이의 상호 작용의 산물이 된다. 15) 반면에 독자들에게 대부분의 주도권을 제공하는 경향도 있다.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텍스트는 정지한 채 가만히 있고 독자가 의미를 낳는 생산자가 된다. 이러한 입장을 견지하는 가장 적극적인 경우가 바로
‘저자의 죽음’을 선고하고 나서, 곧바로 ‘독서의 즐거움’을 선언하는 롤랑 바르트(R. Barthes)일 것이다. 16)
물론 독자반응비평과 같은 읽기 방식이 성서의 텍스트를 제대로 해명해낼 수 있을지 의구심을 갖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리겐의
알렉산드리아 학파에서 알레고리를 제안했듯이 현대인들에게 텍스트의 의미생산에 참여하도록 격려할 가능성을 반면교사로 지적할 수도 있을 법하다.
그렇지만 권위를 가진 문서로서의 성서의 문학적 세계는 알레고리보다는 오히려 역사적인 실존인물로서의 저자가 쓴 문학적인 세계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Ⅲ. 내러티브와 통전성의 문제
성서의 텍스트는 총체적인 구조와 뼈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내러티브가 우선적으로 강조하는 사항이다. 이와 같은 입장이 확보되지 않을 경우
역사적인 사실로서 성서가 지닌 내용에 치명적인 부실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역사적인 분석을 통한 검토는 당연히 요구되는 바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서의 본문이 간직하고 있는 통전성을 결코 간과할 수는 없는 일이다. 바로 이것이 내러티브의 특징들 가운데서 가장 강조될
요소이다.
본 논문의 연구자가 내러티브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분명하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의 문학적 세계를 정확히 읽어낼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식을 여기서 발견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성서해석의 최고의 목적을 성서의 본문이 드러내고자 하는 그 본의를 그대로 반복하는 것, 즉 성서에
기록된 내용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텍스트에 내러티브 비평이 제공하는 총체적인 독서는 이러한 목적에 가장 부합하는
방법이라고 확신한다. 일차적으로 성서의 세계는 구원의 세계이다. 그러므로 구원의 메시지를 바르게 찾아내기 위해서 가장 우선해야 할 과제는 역사
속에서 문학적인 저작으로 구성된 본문이 갖는 통일성이라고 본다. 즉 성서 각 문서의 저자들이 텍스트를 기록할 때 항상 주목한 것은 그들이 기록을
통해서 밝히고자 하는 일치된 메시지로서의 하나님의 구원이다. 17) 신약성서는 그 구원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확인되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18) 그러므로 독자가 구원이라는 이러한 망으로 짜인 텍스트의 세계를 총체적인 그물로 이해하거나 수용하지
않는다면 텍스트에 대한 바른 독서의 가능성은 그만큼 멀어지게 된다.
Ⅳ. 신약성서의 본문 해석과 내러티브 읽기의 적합성
신약성서는 크게 보면 다섯 부류로 구분된다. 공관복음서(마태, 마가, 누가)와 사도행전, 바울서신, 요한문헌, 묵시문학인 계시록 등이
그것이다. 여기서 특기할 만한 것은 신약성서의 많은 분량이 내러티브의 장르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19) 공관복음서와 사도행전 그리고 요한복음서는
모두 디에게시스(dih,ghsij) 장르인 내러티브이다. 신약성서의 분량을 측정해보면, 내러티브에 해당되는 문서들이 거의 70%에 달하는데,
이것은 매우 흥미롭다. 구약성서의 거의 대부분의 문서가 내러티브 장르에 해당하는 것과 함께 신약성서 역시 이러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면
내러티브로써 신약성서를 새롭게 읽어내야 하는 것은 현대 독자들의 책임이라고 지적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바울서신과 요한서신 그리고 계시록은 어떠한가? 최근의 신약성서 연구의 지평은 문학적인 세계에 대한 조밀한 분석을 시도하는 바,
서신이나 계시록의 본문 역시 내러티브가 지닌 문학적 특성으로 읽어낼 수 있음에 동의하는 추세로 나가고 있다. 서신의 상황적 특성(ad hoc)이
본문에서 산만한 구성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기대는 그야말로 기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우려는 서신의 본문을 분석할 때 곧 해소된다. 서신의
전개는 수사학적으로 체계적으로 구성되어 서신을 읽는 독자를 설득하기에 충분하다. 20) 서신의 전반부가 신학적이고 이론적인 접근이라면, 후반부는
그것의 적용으로써 권고 내지는 조언으로 채워져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문서들까지도 내러티브의 관점에서 읽을 수 있음을 조심스럽게 제안할
수 있다.
1) 내러티브(Narrative) 이해
내러티브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와 언급이 있지만, 내러티브 비평은 일반 문학이론에서는 거론되지 않고, 실제로는 성서 읽기에 적용되는
방법론이다. 내러티브 비평은 주로 성서의 내러티브 본문에 대한 신문학비평의 한 지류를 지칭한다. 내러티브 본문이란 사건 중심으로 기술된 담론
형식의 이야기를 말하는 것으로 흔히 내러티브라 부르는 장르를 가리킨다. 21) 내러티브란 본문의 내용인 이야기와 그것이 전달되는 담론이 합해진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내러티브 비평은 먼저 내러티브의 내용인 사건과 인물과 배경과 그것들의 상호 작용인 플롯으로 이루어진 이야기(의 세계)를
탐구하는 일과 이 이야기가 저자에 의해서 어떻게 독자들에게 전달되었는지에 대한 내러티브의 수사학을 다루는 작업을 포함한다. 22) 그래서
내러티브 비평은 신비평, 구조주의, 수사학 비평, 그리고 독자반응비평을 선택적으로 포함하면서도, 본문 자체가 독자로 하여금 본문이 의미하는 바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제한점임을 강조한다.
내러티브 비평은 우선 장르인식(genre recognition)에 대하여 강조한다. 내러티브 비평은 먼저 본문을 중심으로 저자와 독자와의
관계를 다루기 위해서 본문 안의 내포저자(implied author)와 내포독자(implied reader) 또는
화자/해설자(narrator)와 청자(narratee)의 관계가 무엇인지를 보다 세밀하게 탐구한다. 23) 이 중에서 특히 ‘본문 안의
내포저자’ 혹은 ‘화자/해설자’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 본문 자체의 의도 혹은 수사적 효과를 발견하고자 한다. 여기서 ‘내포저자’란 원저자가 본문
안에 만들어 둔 저자를 말하며, ‘화자/해설자’란 내포저자의 본문 안의 목소리, 즉 본문 안에서 이야기하는 사람(storyteller)을
지칭한다. 그러므로 독자가 내러티브 본문을 읽을 때 독자는 (역사적) 저자를 만나기보다는 바로 화자/해설자를 만나는 것이다. 24) 이 경우
독자는 철저히 본문 안에 내포독자 또는 청자의 입장에서 본문을 읽어야 한다. 25) 이러한 읽기가 바로 내러티브 비평이 의도하는 읽기이다.
이처럼 내러티브 비평은 저자의 의도를 가장 올바르게 파악할 수 있는 확실한 근거를 본문 안의 내포저자나 그 저자의 목소리인 해설자를 통하여
그(녀)의 안내를 받는 방법에서 찾는다. 결국 내러티브 읽기는 내포저자의 소리를 내고 있는 화자/해설자의 음성을 통해서 구성된 이야기의 강조점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과정으로, 내포독자의 입장에서 내포저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을 지향한다. 요약하면, 저자와 독자의 관계는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26) 결국, ‘원저자→본문→원독자’의 기본구조를 지닌 텍스트를 독자들이 대할 때, 우선 본문에는 ‘내포저자→내러티브→내포독자’라는
새로운 차원의 문학적 세계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그렇지만 내러티브 읽기는 한 걸음 더 나가서 내러티브가 문학적 구조를 형성할
때 ‘내레이터/화자/해설자→이야기→내레이티/청자’의 하부구조가 내러티브를 구성하면서 이야기를 만들어간다는 것에 동의한다. 즉, 내러티브 읽기는
본문 안에서 숨 쉬고 있는 이야기 세계를 집중하여 그 속의 숨결을 찾아내는 해석적 작업이라고 말할 수 있다.
2) 내러티브의 구조와 의미
내러티브 비평만을 전적으로 적용하여 제출된 논문이나 저서를 찾기란 쉽지 않다. 그 이유는 내러티브에 대한 이해가 매우 다양하기 때문이다.
또한 내러티브 비평에서 주로 다루어지는 요소들인 본문의 내포저자, 화자/해설자, 내포독자와 청자 등을 분석하는 방식은 내러티브가 실제로 바라는
이해를 저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러티브의 흐름 속에서 잔잔하게 배어 있는 줄거리(plot)를 찾아내려는 진지함이 최우선적으로
요구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내포저자, 내포독자, 화자/해설자와 청자’는 모두 내러티브에 이미 녹아들어 있기 때문이다. 필자의 견해로
내러티브 비평이 실제로 지향하는 바는 그러한 주체를 파악하기보다는 그 모두가 협력해서 형성해나가는 내러티브 세계가 말하고자하는 의미와 주제를
파악해내는 것이다. 내러티브 읽기가 궁극적으로 바라는 의미와 주제는 성서의 내러티브 본문이 말하는 그대로의 내용을 반복하는 것이라고 보면 가장
적당할 것이다.
① 플롯 이해와 ‘고리(chain)’ 읽기 내러티브는 분명한 플롯(줄거리)을 가지고 진행된다. 27) 그 줄거리는 어느 한 곳에서도
흐트러지거나 방해받지 않고(물론 아이러니와 갈등으로 방해받는 듯하지만, 예를 들어 사도행전에서 스데반의 순교로 이어진 예루살렘 교회에 불어 닥친
박해의 여파로 흩어진 그리스도인이 오히려 복음의 확장을 증진시킴) 진행되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내러티브 읽기가 강조하는 요소는 의도적인
곡절을 함축한 본문도 고리로 읽어가는 연결 방식의 독서를 통과하면 굽은 곳도 곧 펼쳐지게 된다는 것이다.
내러티브는 고리(chain)로 연결된 구조를 지닌 하나의 이야기다. 본문을 단(파)편적으로 읽어 온 습관적 태도는 내러티브로 구성된 성서의
이야기가 다층적인 갈등으로 구성된 하나의 완벽한 이야기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만들었다. 복음서 문학은 예수의 출현과 사역 그리고 죽음으로 이어지는
내러티브 구조에서 보다 명쾌하게 해석된다. 이런 측면에서 복음서는 예수의 이야기지 다른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실상은 그것을 탐색하기는 그리
쉽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서를 하나의 문학작품, 예를 들어, 소설이나 이야기로 읽어본다면 그것이 예수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보다 신속하고
명쾌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무리가 없을 수는 없겠지만, 내러티브의 줄거리가 전개되는 방향이 일정하다면 당연히 의미가 함축되어 있음은 명약관화할 것이다. 예를
들어, 누가복음서 10장 25절 이하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이어서 예수가 마리아와 마르다를 만나는 장면이 나오는데, 도저히 연결될 수 없을
걸로 예상할 수 있지만, 두 이야기가 고리로 연결된 내러티브의 지류임을 인지하고 읽는다면 율법사의 율법에 대한 이해도 마리아처럼 예수의 발아래
앉아 철저히 그분의 가르침을 학습할 때 온전해질 수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러한 연속적 읽기는 지금까지의 읽기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읽기로
특히 설교자가 활용하기에 매우 적합한 방식임에 틀림없다.
또 다른 사례로서 마가복음서 8장 22-26절을 들 수 있는데, 이것은 해석상 많은 난점을 갖고 있다. 치유자로서의 예수의 권위 뿐 아니라
메시아로서의 그의 능력이 반감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전적인 능력을 행사하는 예수가 시각 장애인 정도를 두 번이나 연거푸 안수해서 치료하는 것은
어딘지 하나님의 아들에게 적당해 보이지 않는다. 좀 더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이 묘사는 아예 없어도 무방한 본문이 아닌지 의심마저 든다. 그러나
아래의 교차대구 형식(chiasmus)에서 확인되듯이, 내러티브의 진행은 일관성이 있다. 28)
A1 광야에서(1:2-13) (y1) 첫 번째 연결 고리(1:14-15) B1 갈릴리에서(1:16-8:21) z1 맹인의
시력 회복(8:22-26) C 길에서(8:27-10:45) z2 맹인의 시력 회복(10:46-52) B2 예루살렘을
향하여(11:1-15:39) (y2) 두 번째 연결 고리(15:40-41) A2 무덤에서(15:42-16:8)
이러한 문학적 구조는 성서의 본문이 파편이라기보다는 작품으로 인식하도록 이끈다. 아우어바흐(E. Auerbach)는 성서의 내러티브도 일반
문학비평의 원칙들에 의해서 연구될 수 있다고 보며, 내러티브를 표현의 수단으로 사용하여, 성서의 저자들은 실재를 내러티브적으로 묘사하는데 적절한
표현방식을 선택했다고 말한다. 29) 즉 성서에 대한 내러티브 읽기는 본문을 해석하는데 역사적 정보나 지식은 부차적이라는 것이다. 성서의
문서들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배경이나 역사적 지식보다는 작품 자체라는 인식은 신약성서를 해석하는 데 새로운 통찰력을 제공해준다.
② 내러티브의 핵심주제 선택 신약성서의 여러 서신들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서신 기록에 대한 당시의 문학적 관례를 고려해야 한다는 수사학
비평의 조언이 정당한데, 이러한 지침은 내러티브 읽기에도 적용된다. 즉 하나의 내러티브를 통해서 이야기의 줄거리를 서술하는 저자의 문학적 장치가
무엇인지 파악해야 하는 것은 독자들에게 남겨진 몫이다. 복음서나 사도행전의 저자들도 자신들의 이야기를 구성하기 위해서 문학적 요소들을 활용한다.
이러한 요소들 가운데는 하나의 선언이나 구조화된 도식이 있을 수 있다.
하나의 선언이나 주장을 묘사하는 예를 들어보면, 누가복음서에서 마리아의 찬가(1:46-55)나 예수의 나사렛 회당에서의 취임 선포(눅
4:18-19) 등을 들 수 있다. 누가복음서의 예수는 황소의 이미지를 가진 모습으로 등장하여 세상의 많은 소외자들의 짐을 자신의 등에 실어
나르는 상징으로 이해되었다. 소외자의 중심부로의 복귀라는 신학적 강조점은 사태의 반전(反轉)과 역전(逆轉)이라는 전복적인 작업으로만 가능하다.
화자/해설자의 안내를 받아 마리아와 예수가 외치는 소리를 통해서 드러나는 이러한 요소는 사도행전으로 이어지면서 이방인의 구원이라는 하나님이
베푸시는 보편적인 구원사상으로 이어진다.
구조화된 도식의 사례로는 사도행전에서 돋보이는 신학적 지리의 개념이다. 여기서 누가는 그의 이야기를 구조화할 뿐만 아니라 문학적이고
신학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지리적 동기를 사용한다. 특히, 1장 8절의 위치는 내러티브의 방향을 정조준해 주면서 전체 내러티브를 이끌어가는
핵심구절의 역할을 수행한다. 모든 등장인물과 사건들은 예루살렘을 벗어나(8:1) 유대와 사마리아(8:5)와 땅 끝(8:27; 19:21;
23:11; 25:10; 27:24; 28:14)을 향한다. 그들의 여행의 목적은 1장 8절의 성취에 맞닿아 있다. 따라서 사도행전을 읽는
독자들은 이 구절이 제시하는 지리적 도식에 따라 사도행전 내러티브에서의 여행의 종착지를 짐작할 수 있는데, 그곳이 신학적 지리에 의한 땅 끝인
로마이다. 실제로 사도행전은 바울이 로마에 도착하는 것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있다. 비로소 바울이 사도행전의 내러티브 세계가 함축한 미션을
완수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거듭 강조할 사항은 누가의 지리적 관심이 땅 끝을 향한다고 할지라도 예루살렘에 그 중심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누가복음서가 강조하는
예수의 모습은 모든 사람을 품고자 선교하는 거룩한 행동이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자로서 하나님의 목적에 자신을 헌신한다. 이러한
모습은 모세와 견줄 수 있는 것으로 누가복음서에서 드러나는 예수는 ‘모세와 같은 예언자’임에 분명하다. 이러한 모습에 대한 확증은 베드로의
설교에서 더 확실해진다(행 3:22). 모세가 하나님의 뜻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포하면서 온갖 고난과 고통을 경험했듯이, 예수도 많은
사람들에게 거절당하는 아픔을 겪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의 계획대로 순종의 삶을 살아간다. 이러한 예수의 순종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삶 가운데서 그대로 재현된다. 부활한 예수의 명령이 있긴 하나, 이 공동체는 예수의 모범을 닮아서 그대로 실천해가는 공동체로 자리를 잡고 있다.
부활한 예수는 그를 따르던 12사도와 그 밖의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된 선교가 세계의 끝까지 이르러야 함을 명령한다(행 1:8).
이러한 선교 명령은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고 난 이후의 교회가 어떤 과정을 통해서 그 책임을 성취해갈 것인지에 대해서 분명히 언급한다.
누가복음서에서 두드러지는 예루살렘이라는 지역적 중심성을 인정하면서 나아가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 끝으로 향하라는 지시는 사도행전의
내러티브에서 그대로 실행되고 있어서, 1장 8절이야말로 신학적 프로그램으로 이해해야 한다. 30) 누가는 부활한 예수의 명령을 하나의 내러티브로
구성하면서, 선교의 이야기를 포함한 내러티브를 기록했던 것이다.
③ 내러티브의 전개와 핵심요소의 기능 위에서도 지적된 것과 같이, 줄거리를 이끌어가는 구절이나 문단은 내러티브에서 항상 존재한다.
이러한 요소는 내러티브의 바른 이해를 위하여 필수적으로 파악할 내용이다. 이와 더불어, 하나의 완벽한 문학적 구성으로 내러티브를 간주한다면,
이야기를 이끌고 가는 하나의 주제나 문학적 기능을 수행하는 요소를 집중적인 독서를 통해서 찾아내야만 한다. 이러한 주제나 요소들 가운데는 마가의
메시아 비밀이나 폭로라든지, 마태의 유대교와의 연속성을 강조하기 위한 성취인용이라든지, 요한의 새로움(새로운 질서, 새로운 성전, 새로운 예배
등)에 대한 강조에서 구체적으로 확인된다. 이와 같은 함축적인 주제는 각 문서의 독서를 위해서 실제로 요긴하다. 이러한 주제와 함께 내러티브를
이끌고 가는 하나의 핵심요소를 찾아내는 것은 내러티브 해석에서 중요한데, 사도행전에서 바울의 로마 시민권이 바로 이에 해당된다.
사도행전의 주제는 1장 8절에서 제시된 것처럼,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다. 즉 사도행전의 내러티브가 지향하는 것은 복음 전도자들이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할 수 있도록 상황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실제로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대다수의 등장인물은 대개 여행 중에 있다. 집에서
집으로, 도시에서 도시로 여행하며 복음을 선포한다. 여기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사도행전의 영웅 바울과 그의 행보이다. 바울은
사도행전에서(특히 후반부의 주인공으로) 가장 많은 조명을 받을 뿐 아니라, 당시 땅 끝으로 여겨졌던 로마에 가서 복음을 선포함으로써 사도행전의
목적을 달성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의 로마 시민권은 로마의 총독을 포함한 관리들 앞에서 바울이 재판을 받을 수 있게 만들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재판 내러티브에서 바울의 로마행을 전적으로 가능케 만드는 주된 동인이 된다. 31)
이렇게 바울의 로마 시민권은 본문을 해석하기 위한 주요 기능을 수행한다. 바울의 로마 시민권이 그의 재판 내러티브에서 그를 로마로
이동시키는 막중한 수단이지만(25:11; cf. 19:21; 23:11; 26:32; 27:24), 실제로는 사도행전 연구에서 많은 관심을 끌지
못했다. 우리가 사도행전을 해석하는 핵심적인 주제로 바울의 로마 시민권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한다면,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의 본래 목적에
접근하기는 힘들 것이다. 바울의 재판 과정에서 그의 로마 시민권은 총독을 포함한 제국의 관리들 앞에서 바울의 재판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바울의
로마행을 가능케 만드는 주된 동인(動因)이다. 32) 사도행전의 내러티브에서 복음이 땅 끝인 로마로 갈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바울의 로마
시민권의 활용으로 가능했던 황제 상소의 결과인 셈이다. 로마 시민권을 활용하여 바울이 황제 상소를 시도하는 것은 모든 면에서 “로마의 권력이
기독교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의 상황 안에서 항상 통제 받고 있음”을 보여준다. 33) 이처럼 내러티브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문학적 기능을 수행하는
하나의 핵심요소를 파악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④ 연속성(continuity)과 코-텍스트성(co-textuality) 내러티브 비평은 하나의 본문을 배추포기처럼 완벽하게 짜인
구조로써 전체적으로 ‘통’으로 읽는 것을 선호한다. 실제로 이야기의 줄거리를 갖춘 내러티브를 통으로 읽는다는 것은 당연하다. 만약 우리가 인기
있는 TV 드라마를 시청한다고 가정해보자. 성서의 독자들이 그렇듯이, 어느 시청자가 의도적으로 그 드라마를, 금주에는 시청하고, 다음 주에는
건너뛰는 방식으로 시청하겠는가? 결코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어떤 내용으로 전개될지 궁금해서 어쩔 줄 몰라 할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성서의 내러티브도 통으로 줄거리를 이해하는 방식으로 읽어가는 것이야말로 상식 중의 상식에 해당한다. 그러나 성서의 독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신통력을 너무 많이 신뢰한 결과 아무 곳이나 떡먹듯이 맘에 드는 곳을 읽어 가는데, 이것은 결정적인 실수이다. 이런 읽기는 본문이 갖고
있는 이야기로서의 완벽한 특성을 무너뜨리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그러므로 성서의 독자들은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내러티브의 연속적인 읽기를
실천해야만 한다.
코-텍스트는 내러티브의 연속적인 읽기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코-텍스트라는 용어는 누가 문서처럼 동일 저자가 하나의 의도를 가지고
연속적으로 기록한 텍스트들이 함께 의미를 산출해내는 것을 지칭한다. 즉, 사도행전은 누가복음서와 함께 읽어야 하고 누가복음서는 사도행전을 다
읽고 나서야 그 의미가 비로소 명백해 진다는 의미이다. 코-텍스트는 작은 단위의 이야기부터 더 확장된 내러티브까지 텍스트가 놓인 맥락에서 그
단서를 찾도록 한다. 자연적으로 코-텍스트는 어떤 작품에서 앞에 있는 요소에 관심을 갖도록 이끈다. 즉 독자가 현재의 본문 바로 앞에서 들었거나
읽은 것은 내러티브에서 그것의 의미를 파악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실제로 코-텍스트는 주어진 본문 이전뿐만 아니라 이후까지 더
광범위하게 관심을 확대한다.
하나의 본문을 벗어나 연속성을 갖는 다른 본문과의 관계성 속에서 본문의 의미를 발견한다는 차원에서, 누가복음서의 사건은 사도행전에서 언급될
이야기를 미리 암시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그 가운데서 특히 누가복음서 2장 25-35절에서 시므온은 구원이 어린 예수 안에서 이방을 비추는
빛으로 경험될 것을 예상한다. 그러나 누가복음서의 예수는 비유대인들과는 거의 관계를 맺지 않는다. 34) 누가복음서의 독자들은 이방선교가 어떻게
시작되고 합법화되며 하나님의 명령이 구체화되고 성령에 의해 인도되고 충만함을 입는지를 보기 위해서는 사도행전까지 기다려야만 한다. 35) 즉,
누가-행전의 내러티브를 전체적으로 읽어보면 모든 사람들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이 이 문서의 기록목적이라는 사실이 깊이 잠재되어 있다. 이 외에도
누가는 다양한 방식으로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예수의 사도와 제자들이 누가복음에서의 예수의 사역을 지속하고 있음을 나타내면서 문학적인 평행을 이루고
있다. 36) 이처럼, 코-텍스트적 읽기는 통일성을 가지고 있는 문서들 사이에 존재하는 문학적 평행 및 암시들을 기초로 성서를 연속성 속에서
해석해 가도록 독자들을 돕는다. 또한 누가 문서를 코-텍스트로 읽는 방식은 이 문서를 다른 복음서와 비교함으로써 본문 해석에 대한 오류에 빠질
수 있는 함정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게 한다.
⑤ 내러티브의 총체적인 이해와 인물묘사(characterization) 내러티브의 등장인물 연구와 관련해서 생각해 보아야 할 질문들이
있다. 즉, 독자와 등장인물 간의 간격은 어떻게 통제되는가? 어떤 장치가 인물을 심화시키고 개별화시키는가? 등장인물들은 예시적인가, 실제적인가?
등장인물들의 역할은 무엇이고, 독자는 그 역할을 어떻게 인식하는가? 등장인물들은 작품의 담론 혹은 수사학에 기여하는가? 37) 이처럼 인물에
대한 세부적인 검토는 텍스트 해석에서 건너뛸 수 없는 사항이다. 이와 함께, 복음서의 등장인물을 연구할 때 취급해야 할 사항은 인물구성 이론,
텍스트의 지표(textual indicator)와 독서과정(reading process)인데, 인물구성은 개성(individuality)을
성취하는 연속체(continuum)이기 때문이다. 38) 즉 인물을 어떻게 묘사하느냐에 따라서 내러티브의 전개는 독자의 예측을 불허할 정도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갈 수 있다. 내러티브를 구성하는 저자는 등장인물이 어떤지를 말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고 또 독자가 등장인물의 내면적
입장을 알 수 있게 한다. 39) 그러므로 내러티브에서의 등장인물은 플롯의 기능자들일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40)
따라서 인물묘사에 대한 분석은 그것의 기능을 포함해서 내러티브 전반에 미치는 총체적인 영향력까지를 대상으로 한 통합적인 연구가 된다. 41)
저자는 독자가 저자 자신의 이념적 프로그램을 공유하도록 설득하기 위하여 인물을 묘사한다. 저자는 등장인물에 관해 독자에게 유용한 정보의
양을 제공하거나 통제한다. 저자는 한 등장인물에 관한 자료의 정도를 통제할 뿐 아니라 정보가 제시되는 순서를 선택한다. 저자는 등장인물에 관해
독자에게 유용한 정보의 깊이와 명확성을 증가시킬 수 있다. 42) 이처럼 등장인물은 내러티브에서 중요한 기능을 수행할 뿐 아니라 이야기의 흐름을
주도할 정도의 역할도 수행할 수 있다는 점이 인정되어야 한다.
이러한 점을 이용해서 사도행전의 내러티브에 등장하는 조연급 인물들을 분석해 보면 매우 흥미로운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사도행전에는 다양한
모습을 띠면서 등장하는 조연급 인물들이 많다. 맛디아 같은 신출내기 사도는 보궐선거에서 선출됨과 동시에 무대에서 사라진다. 이러한 등장이 왜
필요할까 의구심마저 든다. 물론 신학적인 이유와 저자가 묘사하는 의도가 분명하더라도 말이다. 또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라든지, 가말리엘,
유두고 등으로 이어지는 여러 명의 조연급 배우들의 역할은 그리 무게를 두지 않아도 될 정도로 미약하다. 그런데 내러티브를 총괄하는 전체 줄거리를
주목할 때, 그들의 역할은 선명해진다. 그 가운데서 요한 마가 역시 조연이지만, 그의 역할은 실제로는 상당하다. 요한 마가의 등장(12:12,
25; 13:5, 13; 15:37)은 사도행전에서 결코 놓칠 수 없는 인물묘사이다. 그러나 내러티브가 연속적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놓쳐버리게 될
때 요한 마가의 역할이 갖는 특별한 강조점이 약화될 수 있다. 단적으로 요한 마가는 바울과 바나바의 연대와 협력을 깨뜨리기 때문이다. 사도행전의
내러티브에서 몇 번 등장해서 결국은 바울과 바나바의 연대와 협력을 깨고 마는 중대한 역할을 요한 마가가 주도하는 것을 포착하는 것은 의미 있다.
3) 선포를 위한 내러티브 읽기의 적용과 사례
이제, 내러티브 읽기 방식을 적용하여 신약성서의 본문들을 읽어보도록 하겠다. 우리는 내러티브의 코-텍스트적 성격, 그리고 줄거리 전체를
통제하는 핵심본문의 역할 및 줄거리를 가능케 하는 핵심요소, 그리고 인물묘사의 특징 등을 확인하면서 선별된 몇 개의 신약성서의 본문들을 읽어갈
것이다.
① 제1본문: 전체 줄거리를 통제하는 주제 문단으로서 누가복음서 4장 16-30절 읽기 예수의 취임연설로 불리는 누가복음서 4장
16-21절과 이어지는 구절들(22-30절)은 누가복음서에서 예수의 사역의 성격을 암시하고 통제하는 역할을 한다. 43) 즉 누가복음서 전체의
줄거리를 통제하는 주제 문단으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독자들은 누가복음서의 예수의 사역, 특별히 병을 고치고, 기적을 베풀고,
죄를 용서하는 사역의 목적과 성격을 본문에서 제시하고 있는 구체적인 사례들을 통해 예측하며 읽게 된다. 또한 연설 이후, 이방인들을 위해 일했던
구약성서의 선지자들에 대한 예수의 언급과 그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응은 예수의 사역의 범위와 그 결과 유대인들로부터 배척받게 될 예수의 운명을
예측하게 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누가가 이 문단을 구성하기 위해 구약성서의 인용구절(3회)을 주요 골격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독자들로 하여금, 예수의 출현과 그의 사역이 유대인들이 대망하던 구약성서의 메시야 기대와 무관하지 않음을 알게 해서, 독자들 스스로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는 것에 실패했던 유대인들과 같이 되지 않도록 그들의 독서 방향을 바르게 잡아주기 위해 의도된 것으로 보인다. 44)
첫째 인용: 이사야 42장→예수의 정체와 사역의 성격을 암시 둘째 인용: 열왕기상 17장→예수의 사역의 범위와 그의 운명을
암시 셋째 인용: 열왕기하 5장→예수의 사역의 범위와 그의 운명을 재차 암시
특히, 이방인 사역과 관련하여 예수와 유대인들과의 갈등은 두 차례에 걸친 구약의 인용과 함께 강조되고 있다. 따라서 독자들은 누가복음서에서
펼쳐질 예수의 사역과 그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응에 유의하며 독서해야 한다. 45)
② 제2본문: 작품 전체에서 설정된 인물묘사에 기초해서 사도행전 5장 34-40절 읽기 누가-행전에서 유대인들은 어떤 이미지로
묘사되는가? 누가는 유대인들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누가-행전 연구에서 매우 중요하고 핵심적인 것들 중 하나이다.
46) 따라서 독자들은 누가의 작품을 읽어가면서 누가가 유대인들을 어떤 논조와 맥락에서 묘사하고 있으며, 그러한 묘사가 본문 전체에 기여하는
기능을 파악해야 한다. 사도행전 5장 34-40절에는 가말리엘이라는 유대인 교법사이며 바리새인이자 바울의 스승이기도 했던 한 인물이 등장한다.
가말리엘은 본문 속에서 베드로와 요한을 도와 그들이 감옥에서 풀려나 예수의 복음을 전파할 수 있도록 돕는 듯 보인다. 따라서 성서 해석의 역사
속에서, 가말리엘은 초대교회의 복음전파에 기여한 유대인 지도자로 해석되어 왔고, 설교에서도 긍정적인 역할을 하는 모델로 소개되곤 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누가-행전에서 유대인 및 바리새인들에 대하여 일관성 있게 견지되는 누가의 묘사는 대체로 부정적이라는 데 독자들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또한 누가-행전에서 복음의 전파는 인간의 노력과 기여에 앞서 전적인 하나님의 계획과 의지에 따라 전개된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오히려
가말리엘이라는 인물은 초기 기독교 선교에 도움이 되었던 인물로 사도행전에서 소개된다기보다는, 하나님의 구원계획과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을 이해하지
못하는 무능한 율법학자요, 유대인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제1본문이 작품의 전체 줄거리를 통제하는 기능을 한다면, 제2본문은 전체 작품 속에서 일관성 있게 그려지는 인물묘사에 의해 그 해석이
통제되어야 함을 보여준다. 인물묘사와 관련된 읽기는 작품 전체의 논조를 파악하고, 작품 속에서 인물들이 어떻게 분류되고 있으며, 그렇게 분류된
인물들은 어떠한 이미지로 묘사되고 있는지를 독자들은 철저히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가말리엘과 같은 단편적인 사례지만 잘못된 해석으로
나아갈 수 있는 인물을 바르게 해석해 낼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의 본문들은 작품 전체의 인물묘사와의 연속성 및 논조와 줄거리에 의해 통제된 해석을 해야 하는 본문들이다: 요한복음서의 재판
내러티브에서 빌라도의 발언(요 18:28- 38), 12번째 사도로 뽑힌 맛디아(행 1:15-26),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행 5:1-11),
바울 선교에 있어서 요한 마가의 역할(행 12:12, 25; 13:5, 13; 15:37) 등.
③ 제3본문: 코-텍스트적 연관성 속에서 읽는 사도행전 3장 1-10절 이 본문은 유대교의 성전을 배경으로 그곳으로부터 배제된
장애인과 예수의 제자들인 베드로와 요한의 만남을 발단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를 다루는데, 여기서 핵심적인 내용은 예수의 이름으로 베풀어지는 치유와
회복 그리고 성전을 중심으로 한 종교적이고 사회적인 경계선의 파괴이다. 이 본문은 사실 사도행전 1, 2장의 내용과는 전적으로 다르며 전개
자체도 상당히 격정적이다. 더욱이 사도행전 내러티브의 거의 초반부에 속하므로 독자들은 이 본문 속에 함축된 종교적이고 사회적인 의미를 전체
주제와 관련하여 파악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된다. 그러나 사도행전을 누가복음서와의 연속성 속에서 읽게 된다면, 본문 속에 함축된 종교적이고
사회적인 요소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의 급진적인 성격도 간파할 수 있게 된다. 본문의 이해를 돕는 누가복음서의 본문은 18장
9-14절; 19장 45-48절 등이다.
첫째 본문(눅 18:9-14)을 통해서 독자들은 유대인들의 종교적 강자인 바리새인들의 종교적 열심에 대한 예수의 비판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여기서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경건생활을 사회적이고 종교적인 약자들과 자신들을 구별하여 그들 스스로를 높이는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에
대해 예수는 그들이 공동체의 가난한 사람들을 돌봐야 할 계약의 의무를 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뻔뻔하게 무시하는 것을 비판하고 바리새인들이
무시하고 경멸한 세리의 기도를 인정해 준다. 이러한 누가복음서의 사상은 사도행전에서 성전이라고 하는 유대교의 종교적 상징물을 비판하는 논조로
이어진다. 성전 공동체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장애인이 성전 미문 앞에 방치되어 있는 모습은 그러한 사상을 자연스럽게 반영한다.
둘째 본문(눅 19:45-48)은 예수의 성전정화 사건을 다루는 것으로, 여기서 예수는 다소 공격적이고 파괴적인 모습을 드러내며 성전의
온전한 회복을 향한 의지를 보여준다.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어야 하고 가난한 자들과 힘없는 자들의 필요를 돌아보아야 한다. 그러나 현재의 성전은
강도의 굴혈이 되어 있다. 따라서 성전을 정화하는 예수의 행동은 예루살렘 성전이 다시 회복되어야 하고 또한 회복될 것임을 암시한다. 47)
이러한 코-텍스트적 읽기를 통해 독자들은 성전 미문의 장애인을 향한 베드로와 요한의 치유 행동은 예수의 이런 상징적인 행동과 일치하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게 된다.
Ⅴ. 내러티브: 성서의 눈으로 성서를 읽는다.
성서는 해석을 필요로 하는 책이고 해석은 어쩔 수 없이 인간의 이성과 학문의 발전과 무관할 수 없는 시대적 산물이기에, 성서해석의 역사는
끊임없이 인간 이성과 대화하며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성서의 본문에 대한 최종판단의 근거가 될 수 있는 완전한 지식은 오직
하나님의 심중에만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중대한 차원의 의미를 인지하지 않는다면, 성서읽기는 가치중립적인 위기에 빠질 수밖에 없다.
성서의 배경이 되는 역사적 사실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성서의 연구자가 아무리 엄격한 비판적 고찰을 거친다 할지라도 여전히 해명하기 어려운 비밀과
함께 존재하고 있음을 깨달을 뿐이다. 우리의 독서행위는 언제나 이러한 경험들을 제공한다. 어떤 학문도 그 대상인 인간을 완전히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새로운 발견, 새로운 판단기준, 나아가 새로운 경향에 대해서 언제나 개방적인 태도와 자세를 취해야 마땅하다. 해석학적 차원에서
이러한 입장을 수용한 신문학비평의 여파는 현재 거부할 수 없는 성서연구의 대세가 되었다.
따라서 성서를 하나의 작품으로 이해한다면, 그 이야기를 구성하는 것은 당연히 등장인물들일 것이다. 만일 이 인물들을 이야기의 ‘영혼’이라고
한다면, 줄거리는 그들을 형성하는 ‘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8) 줄거리(plot)는 잘 짜인 사건들의 구조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작품을 제대로 분석하려면, 줄거리를 상호 연관된 사건들의 의미 있는 연결 고리(chain/ring)로서 해석해야만 할 것이다. 이러한
고리로 본문을 해석한다면 성서의 어떤 본문도 해석하지 못할 것이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 된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우리는 성서를 해석함에
있어서 파생되는 난제들을 문학적인 모색, 즉 내러티브의 이야기 세계를 통해서 극복해 나갈 수 있을 것이며, 이것은 신약성서 연구나 목회
현장에서의 설교 등에 적절히 활용될 수 있음을 인지하게 되었다.
내러티브 읽기는 문학 비평가들이 그러하듯, 본문 자체가 가지고 있는 구조적 완결성을 인정하면서 그 구조를 파악하면서 읽는다. 특히
내러티브의 세계에서 본문의 모든 내용들이 해석을 위한 단서 및 규제 요인이 됨을 인정하고 그들의 상호 연결고리를 이해하며 읽는 것을 지향한다.
이러한 읽기는 텍스트 자체가 텍스트의 의미를 규정하는 감독 역할을 하므로, 독자들로 하여금 텍스트 본래의 의미에서 떠나 사방을 향해서 널뛰는
행위를 방지해준다. 그러므로 내러티브 읽기는 책임 있는 독자의 읽기를 요구한다. 독자는 우선 자신이 어떤 읽기 방법을 선택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어떤 방법론을 선택해야 하는가라는 선택의 문제에 앞서, 그리스도인으로서 해석자의 정체성을 먼저 인식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기독교 공동체가 정경으로 인정한 성서를 읽는 그리스도인들이다. 따라서 우리의 해석은 교회의 해석전통에 따라 교회를 세우는 데 일조할 수
있어야 하며, 내러티브 역시 그 전통을 발전적으로 계승하는 데 협력할 때만 의미를 갖는다고 할 것이다.
Ⅵ. 설교자를 위한 참고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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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러티브의 구조와 세계>. 서울: 이레서원, 2001. 윤철원. <사도행전 다시 읽기: 성서의 눈으로 성서를 읽는다>.
서울: 한국성서학연구소, 2006. 김광모. <마가의 서사적 기독론>. 서울: 한들출판사, 2005. B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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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R. Barthes, “The Death of The Author,” 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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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Barton, Biblical Interpretation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88),
7. 3) J. Derrida, “Structure, Sign and Play in the Discourse of the Human
Sciences,” in R. Macksey and E. Donato, eds., The Languages of Criticism and the
Sciences of Man (Baltimore: Johns Hopkins Univ. Press, 1970), 247-265. 4)
P.R. Davies, Whose Bible Is It Anyway? JSOTSS 204(Sheffield: Sheffield Academic
Press, 1995). Contra 그렇지만 성서는 (교의학적 표현이긴 하나) 전적으로 인간적인 동시에 전적으로 신적인 문서로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성서가 교회의 책이 아니라면 도대체 누구에게 속한 것이란 말인가? 이미 성서의 용도와 효용성은 과거 어느 시점으로 종료되었단
말인가? 5) 카스퍼(W. Kasper)는 “역사비평은 일종의 현재의 비평이며, 지배적인 공동 인식(sensus communis)을
의심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이러한 선입견을 가지고 역사비평에 대해서 비판하는 것은 목적에 대한 불확실성과 의미의 불가능성을 혼동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즉 역사비평의 결론이 제공하는 유익을 인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W. Kasper, Die Methoden der Dogmatik
(Mnchen: Ch. Kaiser, 1967), 52. 6) 윔셋(W.K. Wimsatt)과 비어즐리(M. Beardsley) 등으로
대표되는 신비평가들은 언어적 실체로서 본문은 스스로 기능한다고 믿었다. W.K. Wimsatt Jr. and M. Beardsley, “The
Intentional Fallacy,” The Verbal Icons: Studies in the Meaning of Poetry
(Lexington: University of Kentucky Press, 1954), 4; W.K. Wimsatt Jr., “Genesis:
A Fallacy Revisited,” in On Literary Intention, ed., Molina (Edinburgh:
Edinburgh Univ. Press, 1976), 137-138. 7) S. Moore, Literary Criticism and
the Gospels: The Theoretical Challenge (New Haven, London: Yale Univ. Press,
1989), 4-13. 8) D. Patte, What is Structural Exegesis? (Philadelphia:
Fortress, 1976). 9) 루이스(C.S. Lewis)는 ‘성서를 문학으로 읽자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성서의 중심 내용에 집중하지
않으면서 성서를 읽는 것을 의미할 때가 있다. 이는 마칡아이네이드(Aeneid)를 읽으면서 로마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이 없는 것과 같다’고 형식
위주의 고찰을 비판한다. C.S. Lewis, Reflection on the psalms (London: Geoffrey Bles,
1958), 2-3. 10) J. Muilenburg, “Form Criticism and Beyond,” JBL 88(1969),
1-18.
11) 케네디가 구분한 고대 자료(연설과 서신 형식)에서 확인된 수사학의 세 유형은 법정(forensic),
심의(deliberative), 그리고 과시(epideictic)의 수사학이다. G.A. Kennedy, New Testament
Interpretation through Rhetorical Criticism (Chapel Hill: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 1984). 12) D. Horrell(윤철원 역), <바울읽기>(서울: 미스바, 2003),
84-90. 13) R. C. Holub, Reception Theory: A Critical Introduction (London:
Methuen, 1984); W. Iser, The Act of Reading: A Theory of Aesthetic Response
(Baltimore: Th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78); M. Sternberg, The Poetics
of Biblical Narrative, Ideological Literature and the Drama of Reading, Indiana
Studies in Biblical Literature (Bloomington: Indiana University Press, 1985); J.
P. Tompkins(ed.), Reader-Response Criticism: From Formalism to
Post-Structuralism (Baltimore: Th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80); E. V.
McKnight, “독자-반응비평”, in S. R. Haynes/S. L. McKenzie(김은규, 김수남 공역) <성서비평 방법론과 그
적용>(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7); 강성열, 오덕호, 정기철, “독자반응비평,” <설교자를 위한 성서해석학입문>(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2). 14) 이 방법은 야우스(H. Jauss)와 이저(W. Iser)가 소개한 독일의 수용 이론(reception
theory)과 피쉬(S. Fish)로 대표되는 미국의 실용주의(pragmatism)에 그 근저를 두고 발전하여 왔다. W. Iser, The
Implied Reader: Patterns of Communication in Prose Fiction from Bunyan to
Beckett (Baltimor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74); U. Eco, The Role of
the Reader: Explanation in the Semiotics of Texts, AS(London: Hutchinson, 1981);
S. Fish, Is There a Text in This Class? The Authority of Interpretive
Communities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80). 15) A. C.
Thiselton, The Two Horizons in Hermeneutics: The Theory and Practice of
Transforming Biblical Reading (London & New York: HarperCollins, 1992).
16) R. Barthes, “Death of the Author,” in The Rustle of Language (New York:
Hill and Wang, 1986).
17) 흔히 문학비평가들은 저자의 의도를 경시한다고 여겨져 왔다. 그러나 문학비평가들 역시 성서 텍스트에 저자의 의도가 담겨 있다고 보며,
그 의도는 저자의 경험이라기보다는 경험의 의미라고 본다. S. Moore(1989), 12; P. R. Ricoeur, A Ricoeur
Reader: Reflection and Imagination, ed., M. J. Valdes (New York/ London:
Harvester Wheatsheaf, 1991), 321. 따라서 내러티브 비평이 비록 텍스트의 구조와 내용을 따라가는 읽기라 할지라도
기본적인 저자의 의도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18) 성서를 일반 문학작품으로 다루었던 문학비평가 프라이조차도 성서를 문학
비평적으로 다루면서 메시아가 주인공인 작품으로 보고 있다. Northrop Frye, The Great Code: The Bible and
Literature (New York: Harcourt Brace Jovanovich, 1982). 19) W. W. Klein/C.
L. Blomberg, R. L. Hubbard, Jr.(류호영 역), <성경해석학>(서울: 생명의 말씀사, 1997)
503-527. 구약성서가 성서 전체의 75%를 차지하는데, 그 중에서 40%가 내러티브 장르로 구성되었다. 20) 미첼(M. M.
Mitchell)은 이러한 수사학적 방법으로 고린도전서를 분석해서, 그것이 체계적으로 구성된 문학적이고 권고적인 성격을 띤 서신이라는 것을
주장했다. M. M. Mitchell, Paul and the Rhetoric of Reconciliation: An Exegetical
Investigation of the Language and Composition of 1 Corinthians (Louisvill:
Westminster/John Knox Press, 1991). 21) 내러티브 비평은 채트만(S.Chatman)이 말하는 “수사학적
기법이 사용된 이야기(storyasdiscoursed)”라고 부르는 것에 관심을 기울인다. Seymour Chatman, Story and
Discourse: Narrative Structure in Fiction and Film (Ithaca, N.Y.: Cornell Univ.
Press, 1978), 147-151. 김경수 역, <영화와 소설의 서사 구조>(서울: 민음사, 1990). 22) M.A.
Powell(이종록 역), <서사비평이란 무엇인가?>(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1993). 23) 이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라. Fred W. Burnett, “Exposing the Anti-Jewish Ideology of Matthew’s Implied
Author: The Characterization of God as Father,” Semeia 59(1992), 155-191; W.
Iser, The Implied Reader: Patterns of Communication in Prose Fiction from Bunyun
to Beckett (Baltimore: Johns Hopkins Univ. Press, 1974); Rhoads, David 외(양재훈 역),
<이야기 마가?(서울: 이레서원, 2003), 109-150; 김광모, <마가의 서사적 기독론>(서울: 한들출판사, 2005),
99-108; 알랜 컬페퍼(권종선 역), <요한복음해부>(서울: 요단출판사, 2001). 24) Wayne Booth, The
Rhetoric of Fiction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61), 74-75. 최재석, 이
경우 역, <소설의 수사학>(서울: 한신문화사, 1987). 부스에 따르면, 우리가 저자를 그(녀)가 지은 텍스트에 대한 권위로
취급할 수 없는 주요 이유는 ‘여러 가지 서로 다른 저자 개념이 있다’는 사실에 있다. 우선 텍스트를 만들어낸 사람이 있다. 그 저자는 실재하는
역사적인 경험적 저자이다. 그 다음으로는 많은 이야기들을 구술하며, 많은 시 가운데 입을 열어 말하는 극화된 저자 즉, 내레이터가 있다. 실제
저자와 극화된 저자인 내레이터 사이에는 중간인물이 존재하는데, 그 저자는 내포저자이다. 그 저자는 문학작품의 일반적인 에토스(기풍, 정신)에
의해 내포되어 있다. “우리는 그 저자를 실제 사람에 대한 이상적이고 문학적인 창작된 버전이라고 추론한다. 그 저자는 그 자신의 선택들의
총합이다.” 부스의 주장은 텍스트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못지않게 내포저자도 그 텍스트의 어떤 함축이며 어떤 효과 혹은 어떤 수사학적 구성물이라는
것이다. 저자가 질서를 부여하는 마음이 있어서 그 마음이 지닌 가치관과 신념들이 텍스트를 주관한다는 것은 일종의 허구이며, 그 작품을 생산해 낸
실제 역사적 인물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내러티브의 바른 독서를 위해서는 내포저자와 같은 문학적 구조를 통해서 텍스트의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25) ‘내포독자’에 관하여는 킹스베리(J.D. Kingsbury)의 설명을 참고할 수 있다. J. D. Kingsbury, Matthew
As Story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6). 권종선 역, <이야기 마태복음>(서울: 요단,
2000). 26) 여기서 제시하는 표는 로만 야콥슨의 말-행동 이론(speech-act theory)에 근거하고 있다. 이외에 다음을
참고할 수 있다. J. Austin, How To Do Things With Words, 2d ed (Cambridge: Harvard
Univ. Press, 1975); Hugh C. White, ed., Speech Act Theory and Biblical
Criticism, Semeia 41(1988). 27) 물론 플롯은 매우 다양하게 정의되고 있다. 다양한 정의들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라. M. H. Abrams, A Glossary of Literary Terms, 3d, ed(New York: Holt,
Reinhart and Winston, Inc., 1971), 127; R. S. Crane, “The Concept of Plot,” in
Approaches to the Novel, ed. & rev., R. Scholes (San Francisco: Chandler
Publishing Co., 1966), 241; K. Egan, “What is a Plot?,” New Literary History
9(1978): 470; E. M. Forster, Aspects of the Novel (New York: Penguin Books,
1962), 87; F. Kermode, The Sense of an Ending: Studies in the Theory of Fiction
(New York and London: Oxford Univ. Press, 1967), 45; R. Scholes & R.
Kellogg, The Nature of Narrative (New York/ London: Oxford Univ. Press, 1966),
12, 127. 28) W. R. Telford, Mark (Sheffield: Sheffield Academic Press, 1995),
102-103. 29) E. Auerbach, Mimesis: The Representation of Reality in Western
Literature (Princeton: Princeton Univ., 1968). 김우창/유종호 역, <미메시스: 고대, 중세
편>(서울: 민음사, 2000); 김우창/유종호 역, <미메시스: 근대편>(서울: 민음사, 2000). 30) 윤철원,
<사도행전 다시 읽기: 성서의 눈으로 성서를 읽는다>(서울: 한국성서학연구소, 2006), 29- 30. 31) 윤철원,
“사도행전에서 바울의 시민권 문제,” <신약성서의 그레꼬-로마적 읽기>(서울: 한들출판사, 2000). 32) 사도행전에서
바울의 시민권은 바울의 신분과 관련해서 그 기능을 행사한다. 여기서 바울은 복음증거를 위한 선교사뿐만 아니라 로마제국의 죄수로 등장하는데, 그의
죄수로서의 신분이 로마로 복음을 전달하는 데 핵심요소로 작용하며, 시민권은 죄수 바울이 로마로 갈 수 있도록 하는 동인의 역할을 한다. Cf.
B. Rapske, The Book of Acts and Paul in Roman Custody, BAFCS 3(Grand Rapids:
Eerdmans, 1994). 33) D.R. Edwards, “Surviving the Web of Roman Power:
Religion and Politics in the Acts of the Apostles, Josephus, and Chariton's
Chaereas and Callirhoe,” in L. C. A. Alexander (ed.), Images of Empire, JSOTSS
22(Sheffield: JSOT Press, 1991), 188. 34) J. B. Green, The Gospel of Luke,
NICNT(Grand Rapids: Eerdmans, 1997), 10. 35) 이러한 이유 때문에 파슨스(M.C. Parsons)와
퍼보(R.I. Pervo)는 누가-행전을 저자의 통일성에 의해서만 동의할 뿐 내용의 연속성에 있어서는 동의를 하지 않았다. M. C.
Parsons & R. I. Pervo, Rethinking the Unity of Luke and Acts (Minneapolis:
Fortress, 1993). 36) W.L. Liefeld, Interpreting the Book of Acts (Grand
Rapids: Baker, 1995), 39; cf. A. J. Matill, Jr., “The Jesus-Paul Parallels and
the Purpose of Luke-Acts: H.H. Evans Reconsidered,” NovT 17(1975), 15-46.
37) John A. Darr, On Character Building: The Reader and the Rhetoric of
Characterization in Luke-Acts, Literary Current in Biblical Interpretation
Series (Louisville: Westminster/John Knox Press, 1992). 38) Fred W. Burnett,
“Characterization and Reader Construction of Characters in the Gospels,” Semeia
63(1993): 3. 39) Outi Lehtipuu, “Characterization and Persuasion: The Rich
Man and the Poor Man in Luke 16:19- 31,” in Characterization in the Gospels:
Reconceiving Narrative Criticism, eds., David Rhoads and Kari Syreeni, JSNTSS
184(1999): 75. 40) Outi Lehtipuu(1999), 76. 41) Robert Higbie, Character
and Structure in English Novel(Gaineville: University of Florida Press, 1984),
13-14. 42) Joel F. Williams, Other Followers of Jesus: Minor Characters as
Major Figures in Mark’s Gospel, JSNTSS 102(1994): 55-56. 43) J. B.
Green(1997), 207. 44) 다아(Darr)는 다음의 논문에서 독자와 텍스트 간의 상호관계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특히 텍스트의
문학기법으로서의 수사학은 독자들이 텍스트의 의도로부터 이탈하지 않도록 독자들의 읽기를 돕는다고 주장한다. J. A. Darr, “‘Watch
How You Listen’(Lk. 8:18): Jesus and Rhetoric of Perception in Luke-Acts,” in
The New Literary Criticism and the New Testament, ed., E. S. Malbon and E. V.
Mcknight, JSNTSS 109(1994): 87-107. 45) 다음의 본문들은 누가복음 4장 16-30절의 통제 하에 읽을 때
가장 적절한 해석을 찾을 수 있는 본문들이다: 누가복음 4장 33-37절; 5장 12-16, 17-26, 29-32절; 6장
6-11절 46) J. Jervell(윤철원 역), <사도행전 신학>(서울: 한들출판사, 2000); J. T. Sanders,
The Jews in Luke- Acts (Philadelphia: Fortress, 1987); J. B. Tyson, Images of
Judaism in Luke-Acts (Columbia: University of South Carolina Press,
1992). 47) 윤철원, <누가복음서 다시읽기: 내러티브의 구조와 세계>(서울: 이레서원, 2001), 402. 48)
Shimon Bar-Efrat, Narrative Art in the Bible (Sheffield: Sheffield Academic
Press, 1989).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