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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가 설교하게하라<월터 브루그만> 텍스트가 설교하게 하라The Word Militant
세계적인 구약신학자, 구약성경해석의 권위자로, 일생 성경을 붙들고 씨름해온 탁월한 설교자로 평가받는 월터 브르그만은 전문성과 대중성을 겸비한 사람이다. 그는 구약해석에 탁월한 통찰력과 학자와 설교가로서 '포스트모던시대에 기독교와 교회가 나갈 방향 곧 '탈기독교시대에 필요한 설교의 방향성'을 제시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을 위협으로만 인식해오던 교회에게 포스트모더니즘 담론을 적극적으로 수용, 기회로 삼을 수 있다고 역설한다. 윤리학과 조직신학분야에서 그 역할을 가장 활발히 수행해온 학자가 고 스탠리 그렌츠 교수였다면, 성서신학 분야에서는 월터 브루그만이다.
"오늘날은 기독교가 공적 영향력과 설득력을 잃어버린 시대이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마치 바벨론 포로기의 유배된 백성과 같이 상실의 시대를 산다. 이러한 시대에 설교자들은 상상력이 말라버린 낙심한 포로들에게 여호와 신앙으로 현실을 재해석하고 재구성하도록 설교하라는 소명을 받았다. 그러한 설교의 원동력은 '거대 담론(메타내러티브)'의 위협적인 힘이 아닌, '작고 소박한 이야기'들이 갖는 진실함이며, 그 형태는 '선포'보다는 '증언'이 필요하다." 특히 머리 보웬의 가족 치료 이론에 나오는 '삼각관계' 개념을 가져와서 텍스트, 설교자, 회중의 삼각관계를 이야기하는 2장은 압권이다. 또한 석의의 기본원리에 대해 말하고 있는 5장은 설교준비에 있어서 실제적인 도움을 준다. 그의 구약 해석 중에 복음주의 신앙을 가진 이들이 동의할 수 없는 내용이 많다. 하지만 브루그만이 부대끼는 분들이라도 신학의 목적이 결코 '피아식별'에 있지 않다.
혹자는 오스 기니스의 <소명>에 대해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10년마다 한 번씩 평생 읽을 책"이라 했다. 이 책이 "모든 설교자들이 10년마다 한 번씩 평생동안 읽어야 할 책"이라고 말한다.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대안적 사고를 가지고, 담대하게 일어나 모든 어려움과 위험을 감수하면서, 세상을 향해 대안적인 공동체를 제시할 때, 그곳은 세상은 다시 하늘의 신비를 누리며 노래하게 될 것이다.
이를 위해 설교자는 새로운 언어(예언자적 상상력, 시적인 언어)에 익숙해져야 하며, 성경이 말씀하는 대안적 사고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설교자를 통해서 통해 세상은 새 세상을 보고, 불의로 덮힌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선포인 설교를 통해 전복될 것이다.
01/ 19쪽 설교는 /어리석고 /위험하며 /자기를 노출시키는 행위다. - 설교 할 내용은 회중 가운데 존재하는 이념적 열정과 상반되고; 회중, 안팎에서 감시를 수행하는 기득권층, 설교자의 본인의 자의식과 상충되는 일종의 대안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02/ 21쪽 우리에게 밖으로부터 오는 말씀이 없으면 우리의 영이 시들어 버리기에 시드기야 왕처럼 두려움 반, 희망 반을 품은 채, 새로운 말씀을 향해 손을 뻗치게 된다(렘37:17). 그리고 주변의 대부분의 목소리가 중요한 말이 아니며, 그런 목소리가 우리의 닫힌 세계를 새로운 말씀을 향해 열어 줄 수 없다 03 / 25쪽 인간은 포로상태에 있는 것이 특징이다. 복음이란 포로상태의 인간에게 선포되는 특징적인 말씀이다. 설교자의 전형적인 과업은 이같은 인간의 집 없는 상태가 바로 하나님이 임하시는 곳이고, 그분이 임재하셔서 풍성한 집으로 변하게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즉 창조와 출애굽의 하나님, 성 금요일의 십자가 죽음과 일요일의 부활의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임하셔서 포로상태를 인간이 살 만한 거처로 변모시킨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산문이 아닌 시적인 언어로 상상한 새로운 세계를 제공하는 그 목소리에는 위로와 거슬림이 모두 들어 있고, 이는 복음의 메시지에 담겨있는 새로운 세계에 적응하는데 필요한 요소들이었습니다.
04/ 34쪽 포로 상태에 있는 이사야와 같은 복음전도자들은 창조적이고, 상상력이 풍부한 인물들이라서 예술적 수완으로 현실을 그려 낼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말씀('자기가 꾸면지지 않은 말')을 설명하는 방식 3가지 - 설교자와 설교의 권위의 근거는 무엇인가- 1. '소명의식'(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좋은 설교자는 무엇인가가 설교자의 삶 속에 침범하여 그들 자신이 만들지 않은 어떤 새로운 목적을 위해 그들의 에너지와 미래를 사용하라고 요구하는, 어떤 결정적인 경험과 확신이 있다. 좋은 설교는 하나님의 침범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이 침범으로 말미암아 자기 생각에서 벗어나게 된다. 예레미야의 소명(렘 1;18/ 4-19) 에스겔의 소명(1-3장), 이사야의 소명(40:9/ 6:1-13).
'설교의 소명'이라는 개념은 우리에게 낮익다. 그러나 미국 기독교의 경우 아주 관례화되고 제도화된 소명 - 일종의 연금을 보장해주는 제도적인 직업이 되었다(35쪽). ... 하지만 소명이란 제도적인 관례화와는 항상 긴장관계에 있는 하나님의 부르심이자,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는 하나님의 침범- 설교자를 위험하게 하고/ 어리석은 행동을 하게 하고/ 자기를 노출하게 하는 하나님의 침범이다.
2.소명은 '여호와의 회의(신들의 회의)'의 참여와 연관된다(예레미야 23:18) '누가 여호와의 회의에 참여하여 그 말을 알아 들었으며 누가 귀를 기울여 그 말을 들었느냐'(렘23:18) '이 선지자들은 내가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달음질하며, 내가 그들에게 이르지 아니하였어도 예언하였은즉 그들이 만일 나의 회의에 참여하였더라면 내 백성에게 내 말을 들려서 그들은 악한 길고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게하엿으리라' (렘23: 21-22)
3."주께서 말씀하시니라" 이라는 확신(38쪽) 설교가 설교자에서 나온 것이 아닌 ‘바깥 저 너머'에서 왔다는 확신이 있는가. 구약의 시인들(= 예언자들)은 자기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니며, 자기를 파송한 분(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설교자는 설교말씀에 대한 권위의식이 있어야 한다38쪽. 한편, 강압주의와 권위주의에 빠질 소지가 있으나, 민주적이고 심리학적인 문화적 관습에 순응할 수도 없다. 설교자와 청중(회중)은 기존의 생각을 중단하고, 우리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 즉 우리의 닫힌 세계 밖에서 오는 어떤 말씀을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 우리의 말이 아닌 그 말씀을 통해 세계(세상)을 새롭게 묘사되고 새롭게 진술할 때에 세상을 새롭게 볼 수 있게 된다. 05/ 40쪽 예레미야의 말(설교)과 여호와의 말씀의 차이 "베냐민 땅 아나돗의 제사장들 중 힐기야의 아들 예레미야의 말이라 하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가 다스린 지 삼십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였고”(렘1:1-2) - 성경을 여호와의 말씀과 동일시하는 단순한 성경주의(biblicism)에 빠지지 말라는 경고다. - 말(설교)와 말씀의 관계는 어떠한가. 어떻게 연결이 되는가?
"보라 내가 오늘 너를 여러 나라와 왕국 위에 세워 네가 그것들을 뽑고(uproot), 파괴하며(tear down), 파멸하고(destory), 넘어뜨리며(overthrow), 건설하고(build), 심게하였느니라(plant)”(렘1: 10).
예레미야는 심판과 희망/ 위로와 거슬림이라는 이중적인 임무수행의 6가지 방식 1. 예레미야와 같은 좋은 설교자란, 예레미야 처럼, 신앙의 전통(=Text 전통)에 깊이 뿌리 박고 있다. 신명기 텍스트가 예레미야에 영향을 주었다. 렘3: 1-5 = 신명기 24:1-4. 출애굽의 전통(렘21:5-7), 새 언약(렘31:31-34)은 옛 언약 곧 신명기 전통으로 부터, 시편의 텍스트 전통에서 유래했다.
2.뽑고(uproot) 파괴(tear down) 하는 일은 이스라엘의 멸망으로 귀결되는 하나님의 심판을 표현한다. 예레미야는 그 당시 예루살렘 체제의 거대한 이데올로기 세력에 대항하여 대안적인 현실관을 제공하는 대안적인 상상력을 통해 연출된 대안적인 텍스트에 근거하여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와같이 텍스트 전통과 담대한 시(詩)를 겸비한, 여호와 중심의 메시지 선포는 결국 전혀 다른 세계를 낳고, 이는 과거의 생각을 포기하고, 이제는 여호와의 권세로 주어지는 것을 순순히 받아들이라고 격려한다.
06/ 46쪽 텍스트에 근거한 설교는 이 세계를 하나님의 세계로 다시 묘사하고, 부인하지 않고 포기하는 방향으로, 절망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07/ 일반적으로 성경의 전통에 충실한 설교란, 특정 상황과 연관시켜 시적인 상상력을 발휘하고, 텍스트에 근거하여 여호와와 관련시켜 이 세계를 다시 묘사하는 것이다. 설교자와 회중에게 위탁된 텍스트는 실로 현실을 새롭게 해석, 곧 기존의 현실관을 뒤집는 해석이다. * 먼저 , 시드기야 왕처럼 하나님으로 부터 받은 말씀이 있는지 묻는 물음 * 그 말씀을 전하든지 전하지 않든지 고통이 따른다는 당사자의 의식 * 텍스트를 점거하는 하나님은 사용자에게 우호적인 분이 아니라는 인식이 있다. * 그리고 그 말씀을 전하고 듣고 행하는 곳 마다 설교자와 회중과 그 도시에 새로운 삶이 도래합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텍스트가 얼마나 전복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지 모르고 있다. 하지만 좋은 소식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텍스트가 그들이 있는 곳에서 그대로 연출되기를 상상하며 기대한다. 또 다른 좋은 소식은, 사람들이 텍스트를 다루는 시간에 그들의 모습을 잘 드러낸다. 그리고 텍스트를 잘 해석 할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찾아오게 된다. 회중은 시드기야 왕, 바로 그리고 니고데모처럼 두려움을 품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우리 가운데 '낮설고 새로운' 일이 일어나기를 희망하고 있다.
1장 설교는 이미지를 바꾸는 행위 * 복음적 설교가 처한 새로운 문화적 인식론적인 상황 1.절대적이었던 교회의 옛 표현 방식들이 불신으로 설교가 변해야 하는 상황이다. 가부장적, 위계적, 권위주의적, 독백적 방식에 대한 불신 곧 전통적 권위에 대한 불신의 상황 속에 있다 2.성경 텍스트에 대한 역사비평이 부적합하다. - 사회학적 비평, 문헌비평, 정경비평 등 사이에 긴장이 있다. 3.다원주의 공동체의 관점과 방향이 다양하므로, 진실하고 예의바른 대화를 통한 개방적인 판단을 하고, 어떤 문제에 제안, 변호를 하되 결론을 내리지 않아야 한다. 4.성경텍스트의 다양한 의미 유대교의 미드라쉬 해석법, 프로이드의 정신분석 이론과 꿈의 해석. 5.텍스트는 저자의 통제 하에 있지 않고, 스스로 증언하고 해석한다. 그 해석은 지금 여기에서 전유(專有)하는 것이다. 6.현재 우리 문화를 지배하는 ‘현실을 묘사하는 텍스트’는 데카르트와 로크, 홉스와 루소 등 자율적 개인주의– 계몽주에 뿌리를 둔다. “지식의 자율성은 행위와 윤리의 자율성을 낳았고, 개인이 잣대가 되었다. 그 결과 자기 탐닉과 자기 몰입 상태가 되었고 종교를 자기 만족과 소비주의로 끌고 갔고, 공동체를 고려하지 않고 개인의 행복과 즐거움만 끝없이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갔다”60쪽.
7.계몽주의 텍스트 전통이 현실의 패권를 잡고 있다. - 경제/ 계몽주의 텍스트가 만든 이데올로기 - 소비주의를 낳고, 많이 소유한 자가 행복하다. 다른 사람을 희생해도 소유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 정치/ 유럽의 우월성, 식민주에 뿌리를두고, 팍스 아메리카나 개념으로 나타난다. 사회적불평등/ 사회적 다윈주의(DArwinism)의 사상을 낳았다. 상상력/ “지배계급의 아이디어아 지배적인 아이디어가 된다”(K. 마르크스)
8.인간성 변혁의 길- 교훈적 사상, 과도한 확실성이 아닌, 예전의 텍스트와 그 해석을 뒤집는 대안적 텍스트와 다른 현실관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텍스트를 제시하는 방식은 완화하거나, 듣기 좋게 만들지도 않으며; 위협하는 방식, 거부반응을 일으키게 제시해서도 안된다. 대안을 제시하되 경계성(liminality)을 실천하는 것이다64쪽. 9.성경 텍스트는 계몽주의 텍스트와 같은 지배적 텍스트에 대한 대안적 대본을 제공한다.64쪽. 설교란 이 대안적 대본대로 상상하면서 세상이 어떤 모습이 될지를 탐구하는 작업이다. - 첫째, 오늘을 지배하는 텍스트는 인간의 주도권을 현실의 중심에 두지만, 복음은 거룩함이 그 자리에 있다고 증언하며, 현재 헤게모니를 쥔 텍스트에서 나오는 것은 자아지만, 복음에서 나오는 것은 이웃이다. 둘째, 설교자는 설교자 자신이 텍스트를 바탕으로 복음이 지배하는 세계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회중이 상상 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10. 대안적인 대본의 제안이란 크거나, 포괄적이거나, 보편적인 주장이 아니다66쪽. 대안적 상상력을 제공하는 구체적, 세부적(구체적), 국부적인 텍스트를 통해서 조금씩 이루어진다. 11. 설교란 상상의 행위다. 곧 어떤 이미지를 제공하여 인식과 경험, 신앙이 다른 방식으로 재조직 될 수 있도록 하는 행위다.
12.설교는 형이상학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회중이 정중으로 등장하는 드라마를 연출하는 것이다. 70쪽 - 설교자는 교회전통을 지배해온 형이상학의 사고방식을 '걸러내는' 작업을 해야 한다. 하나님이 위험에 천한 인물로 등장하고, 회중도 드라마에 등장인물로 본다. 13.드라마 접근법은 내러티브를 전형적인 양식으로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 이야기를 살아내는 것이 특징이다. - 현실이 처음 중간 끝을 지닌 구성이 있고, 한결같으면서 발전하고 변하며 큰 자유를 행사하는 등장인물이 있고, 계속되는 연극이다. 14. 설교는 그 동안 확신한 대본을 버리고, 자기의 인생을 상상의 차원에서 다르게 이야기해주는 다른 대본에 들어가도록 청중을 초대한다. 그래서 이 세계를, 계속 진행중인 세상과 열방, 이스라엘과 교회의 이야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활동에 비추어 상상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설교자의 과업은 이처럼 특별한 성경의 내러티브 대본을 밝히 보여주고, 이 내러티브를 받아들이면 어떤 식으로 인생을 다시 상상하고 다시 묘사하고 다시 살아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일입니다.
2장. 설교자, 텍스트 & 사람들(회중)- 삼각관계 79쪽
목사가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위험한 텍스트를 다루기 위한 전략 웨드윈 프르드맨 Edwin Friedman이 대중화 시킨 머리 보웬 Murray Bowen의 가족 치료인론은 ‘삼각관계이론’을 중심으로 삼는다. 한 가정에 형제가 많든, 다세대든 모든 가족 관계는 삼각관계라고 한다. ‘2대1’의 패턴이 끝없이 이어지는 관계망이다. 보웬은 가족 치료란 삼각관계를 해체하고 새롭고 건강한 과녜를 허용하는 것이라 한다.
기존의 삼각관계 - ‘텍스트와 목사 : 회중’의 삼각관계 회중이 외부인이 될 수 밖에 없다. Text는 우리보다 더 급진적이고, 더 공격적이고 더 위험하다. Text와 손잡는다는 것은 정직하지 않다. 신학과 윤리에 관한 논쟁, 해석석에 관한 논쟁 등을 목사와 회중 양편으로 나누면 승자나 패자의 발생하고, 텍스트는 사라진다. 역사비평이나 신조가 그 중심임 스콜라주의가 텍스트의 목소리와 위험성을 제거한다.
새로운 삼각관계 - ‘텍스트 : 목사와 회중’의 삼각관계 The Text의 권위를 인정하고 Text가 그 자체의 목소리를 내도록 허용- 힘과 자유, 즉 영감과 계시와 권위86를 갖고 있어야 한다. 그 위험한 Text와 나누는 대화 속에 들어가는 전제조건은 ‘신조의 틀을 씌우지 말라. (역사) 비평적 환원주의critical reductionisms를 적용하지 말라’는 것이다. <텍스트의 중요성> 성경을 가장 역동적으로 해석하는 자들의 눈으로 볼 때 성경은 위험하고 전복적이며 스캔들을 일으키는 책이다. 하나님은 우리 기대 이상으로 이상하고, 위험하고,... 실족시킬 만하다.(눅7:23). 그래서 설교 시 Text보다 어떤 아이디어, 대의, 경험들, 이데올로기, 다른 텍스트를 중심으로 설교하는 것을 선호하는 것이 더 많이 보인다. 그러나 적절한 텍스트가 없는 공동체는 결코 사명을 완수하는데 필요한 능력, 에너지, 용기를 가질 수 없다. 이런 공동체는 이데올로기에 의존하고 분쟁을 해결할 만한 공동의 광장이 없기 때문에 끝없는 싸움에 휘말릴 것이다.
Text는 그 나름의 (암묵적) 청중을 함축하고 있으며, 텍스트의 부응하고, 암묵적 목소리(부스)를 듣고 받아들이는 공동체가 되라고 요청한다. 월터 옹 Walter Ong '텍스트는 그 공동체를 창조한다‘ 이를 신학적 표현으로는, “성경 텍스트는 교회를 창조한다”. 텍스트는 자기를 초청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청중을 불러온다 Text는 /목소리를 내고/ 깨뜨리며/ 파괴하고/ 창조하는/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입니다. 복음을 서로 나누고 텍스트의 목소리가 이데올로기의 시녀 역할을 하지 않을 때, 설교자는 그 과정에서 좀 더 변두리로 물러나고, 덜 노출되며, 덜 취약한 상태에 있게 될 것입니다. 목사의 목소리는 참신하지도, 문제의 근원도 아니다. 생명을 주는 동시에 스캔들을 일으키는 장본인은 그 텍스트의 목소리다. ‘그 목소리’야 말로 '오직 성경' 라는 표어가 이루어진다. 삼각관계(보웬), 암묵적 청중(옹), 암묵적 목소리(부스)를 텍스트에 적용한 결과 1.Text를 역사비평과 폐쇄적 신조주의 보다 더 진지하게 여긴다. Text의 목소리, 형식, 억양이 살아난다. 2.우리가 가정한 자아에서 벗어나 새로운 존재가 되도록 불러낸다- 폐쇠된 모든 것을 깨뜨리는 거룩한 자유의 목소리, 자유로운 거룩함을 나타내는 목소리가 사람들이 생생하게 살아난다99쪽. 회중들도 불가능하게 여겼던 것을 경철할 수 있는 새로운 입장을 취하게 된다.
3장 고대의 말씀과 현대의 청취 101쪽 고대 선지자들의 말씀(목소리)는 새로운 것이 아닌 하나님의 성품과 뜻, 목적과 연관된 다음과 같은 오랜 전통에 근거한다. 1.이스라엘 찬가(찬송)- 시편 68편, 시편 146편. 누구를/ 무엇을 찬송하는가? * 여호와의 권능과 주권이 주변인을 - 고아, 과부, 고독한자들, 나그네- 위하여 동원되고 있으며, 하나님은 세상일에 능동적으로 관여하는 분이시다. * 창조의 기본 진리인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노래하는 찬송117쪽 <-> 교활한 세금과 담보대출 2. 내러티브- 출2:23/ 출3장-15장의 드라마. 이스라엘의 찬송에서 기리는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주고받는 언약관계의 내러티브(이야기)에서 구체적인 조치- 건강, 해방, 평화- 를 주시려 오신 분으로 등장한다. <-> 소비주의 3.계명(명령, 요구)- 선지자적 말씀은 동일한 여호와께서 율법을 보증하고 인가하는 역할을 하는 계명들을 지속적으로 제공하는 일을 한다(출22:21-22/ 25-27). 공동체 안에서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사이의 관계를 채권자-채무자라는 경제력으로 결정(왜곡되거나 영위)하지 말고, 형제(이웃) 관계임을 보여준다. <->
선지자들108쪽: 시내산의 하나님의 특이한 성품- 이스라엘의 특이한 언약윤리를 배우며 자란 인물들 위대한 선지자들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와 미가, 예레미야 등은 유월절 같은 규례와 찬송과 내러티브(드라마), 계명를 통하여 하나님이 약한 자, 힘없는 자의 울부짖음과 그 필요에 반응하는 분임을 배우고, 보고, 알았다! 선지자들이 비판적인 사회관(세계관)을 갖춘, 어린아이가 아닌 ‘성인’으로 현실 세계를 다르게 볼 수 있었다. 선지자들이 지녔던 분별력과 그들이 보고 알았던 그것을 - 상상력을 발휘하여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은 ‘선지자적 설교, 곧 정의로운 설교’를 하는데 필수적 요소다! 113쪽
선지자적 설교 = 분개(분노, 심판) + 희망(새로운 출발, 가능성)과 연민(고통, 슬픔, 십자가) * 청중에게 분노를 퍼붓지 않고, 그들의 반응을 불러 일으키려면 조용히 말할 수 있어야 한다.
4장 양자택일을 촉구하는 설교 119쪽 “설교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인 안에서 온전히 알게 된/ 하나님을 찬양하고 (계명에) 순종하는 가운데 /신학적 (언약) 윤리적으로 다른 민족들과 다르며 대안적인 정체성과 비전, 소명을 가진/ 바벨론의 대안은 환상에 불구하고, 여호와를 중심으로 하는 대안공동체를 불러내고 양육(형성, 유지, 발전)하는 기회다”122-123 오늘날 소비주의와 개인주의가 판치는 세상에서 이웃사랑에 대한 계명을 설교(이야기) 하는 것이란 곧 양자택일을 요구하는 것이며, 큰 용기가 필요하다. ... 정의로운 설교(=증인의 말)는 양자택일의 요구하고, 지금 우리는 모호한 상태에 있다고 솔직하게 말하고, 또한 다르게, 순종적으로, 자유로이, 희망을 품고, 기쁘게... 다시금 보류가 아닌, 양자택일의 선택할 수 있는 놀라운 기회가 있다고 이야기 하고 결단을 권유하는 것이다.
찬양과 순종의 대안공동체(=교회)를 불러내고, 양육하며, 형성시키는 증인의 말/= 설교는 공동체와 그 구성원들이 삶의 모든 영역에 걸쳐, 지배문화와 여호와 사이에게서의 양자택일의 결단을 내리도록 명료하게 설명하고, 신학의 뿌리와 윤리의 모습을 지닌 결단을 요구하는 말(utterance)에 있다.
찬양과 순종은 대안 공동체의 정체성의 핵심이다. 공동체의 표어는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이웃, 이웃, 이웃을 사랑하라"는 소리입니다. 이웃과 나누는 교제가 있기 전에는 여호와와 나누는 교통이 있을 수 없다. - 아브라함 : 하란에 머물 것인가, 떠나 갈 것인가? (창12장) - 모세를 통한 이스라엘 백성 ‘애굽에 머물 것인가, 떠날 것인가?(출4;1) - 엘리야: 여호와 하나님인가, 바알인가?(왕상18:21). - 여호수아: 세겜회의- 지배문화의 막강한 세력이냐, 여호와냐 곧, 가나안 신들이냐 여호와만을 섬길 것인가? (수24:25= 신명기의 토라). * 헤게모니를 잡은 편이냐, 여호와 편(아직 눈에 띄지 않고, 수중에 잡히는 것이 없고, 장차 나타나고, 형성과정에 있고, 저 너머에 있으므로 간단히 묘사하기 불가능한 편)이냐 중의 선택하는 것이다. 양자 택일의 주요 모델은 제2이사야의 본문이다(이사야 40장–55장ㅠ 제3이사야(5-66장)은 제2이사야의 양자택일을 구체화한 비유적 설명이다.47쪽
5장 세계를 다시 묘사하는 설교153쪽- 석의 *석의의 기본원리- 성경텍스트를 신학적 확실성으로 축소하지 말고, 회의주의로 끝나지 않고, ‘신앙과 이성’(역사비평과 이데올로기 비평)으로 대하라는 것이다. 3가지 방법(단계)로 가능하다. 1. Text에 대한 수사학적 분석 어떤 단어들이 어디에 있으며, 소리, 반복표현, 그 단어들이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기 위해 예술작용에 초점을 맞추면서 어떻게 작동하는지(수사적 비평 rhetoricql criticism)를 유심히 관찰한다. 그래서 Text 안에 있는 예술적 상상을 찾아낸다.
2. 언어분석 - 나는 학생들에게 단어 연구를 하되 수사적 분석에서 중요하다고 드러나는 특정단어들이 지닌 비중에 초점을 두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단어연구는 연관된 다른 텍스트를 찾아 봄으로써 텍스트가 고립되지 않고 상호텍스트 연관성(intertextuality)을 찾아본다.
3. 이데올로기(기득권) 분석 - 수사적 분석으로 텍스트 안에 있는 예술적 상상과 그 생성 작업을 간파하고; 단어 연구가 그 텍스트의 상호텍스트 관계를 밝히 뒤에는; '어떤 정치적 경제적 기득권이 이 텍스트 안에 작동하고 있는가(=사회학적 비평)라는 질문에 대해 생각한다. <사례연구. 예레미야 5:14-17절> 162-172쪽.
6장 성경 텍스트의 사회적 성격과 설교 173-206쪽 Text가 홀로 ‘저기’ 있는 것이 아니라 정경화 작업의 경우처럼 공동체가 성경텍스트를 형성, 전달, 해석하고, 텍스트의 의미를 생산하는 활동에 참여하고 함께 일한다는 것을 텍스트의 ‘사회적 성격’이라고 한다. 텍스트 가공작업 1.텍스트 형성- 텍스트가 현제의 정경으로 정책된 과정. 2.해석- 텍스트의 권위와 중요성을 주장하려고 애쓰는 모든 행위를 말한다. 형성과 수용하는 사이에 일얼난다. 신조, 주석, 신학, 오늘날의 학문과 교회의 선언 등을 호함하낟. 설교자의 해석 작업을 작업을 포함한다. 3.텍스트의 수용하고 경청하는 단계- 회중의 역할
공동체는 텍스트가 설교가 해석 행위로 정의될 때, 그 설교는 언제나 해석자가 그 해석을 수용하는 자들과 함께 어떤 텍스트를 소비하고 어느 세계를 생산하는 대담하고 위험한 행위다.
이렇게 해서 생산된 세계는 신앙으로 가능해진 세계지만 기득권을 통해 매개된 세계입니다. 그런즉 텍스트는 결코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까지 합니다. 텍스트가 하는 일은 대안행동을 허용하는 인식과 가치와 권력의 또 다른 세계를 창조하는 일이다.
해석하고 설교하는 목적은 믿을 만한 생활세계, 전유할 만한 생활 세계, 공동체가 권위를 얻고 차별성 있는 삶을 살게 해주는 생활 체계를 제시하는 데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텍스트 자체가 반응과 주장, 창조성을 발휘하므로 텍스트를 발휘하므로 텍스트를 해석하는 일 역시 반응과 주장, 창조성을 지닌 행위입니다.
텍스트의 사회학적 분류: 평형(Equulibrium)의 텍스트와 변혁(Transformation)의 텍스트 양자 모두 필요합니다. 이런 텍스트들이 진정한 효과를 발휘하려면 설교자가 반응하고 주장하는 능력은 물론이고 상상의 능력 또한 반드시 갖추고 있어야 하며, 경청하는 공동체를 현재 세계 저편에 있는 자유와 기쁨과 순종이 머무는 새로운 세계로 초대해야 한다.
설교자가 텍스트의 세계를 회중에게 전달의 4가지 전략 199쪽 1유형: 변혁을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변혁의 세계’를 제공한다. 2유형: 변혁을 갈망하는 사람에게 ‘평형의 세계’를 제공한다. 3유형: 현상유지를 원하고 변화를 원치 않는 사람들에게 ‘변혁의 세계’를 제공한다. 4유형: 평형상태를 갈망하는 사람들 즉 현 사회적 세계야 말로 하나님의 섭리에 따른 최상의 세계로 간주하는 사람들에게 ‘평형의 세계’를 제공한다. - 북아메리카의 회중 = 3) 4)유형에 속한다. 설교자는 회중이 당연시하는 세계에 도전하는 '저편'의 말씀, 곧 상상속의 말씀(Word)을 제시하라는 복음으로부터 요구를 받는다.
평형의 텍스트는 사람들이 질서감각을 품게하는데 필요하지만... 변혁의 텍스트는 사람들에게 현 상황 바깥에 다른 가능성이 있다는 희망을 품게 하는 데 필요하다.
7장 상처받은 자의 부르짖는 소리 207쪽 W. 부르그만은 시내산 계명전통(=토라전통)과 지혜전통의 ‘죄와 벌’, ‘행실과 결과(인과율)’의 양자 택일의 전략과 신학적 이해 곧 단순 윤리구조의 절대화를 반대한다. - 욥의 고난 이야기(욥1-2장) - 창조와 타락 이야기에 나오는 뱀(창2-3장) - 출애굽 이야기(출1-15장)에 나오는 바로, - 불평시(시7편) 등 4곳에 나오는 '대적'들에 관한 진술과 통한다. '죄'가 고통(고난) 당하는 자가 아닌 다른 누구(제삼자)에게 돌려진다. 고난 받는 자는 죄인이 아닌 희생자다<234쪽>. 위의 4가지를 보건데 구약의 하나님은 도덕적 제재만 가하는 분만이 아니다. 허무무의를 뛰어넘는 분(240), 하나님의 성품은 은혜롭고 용서를 베푸는 분이다. 그러므로 죄의 악순환, 곧 반역행위가 또 다른 반역행위를 낳는 그런 악순환이 깨어질 수 있다. 하나님은 날마다 '우리 체질을 아는' 분이고, 이런 지식을 가지고 부모처럼 우리를 긍휼히 여기는 분이다. 요나 선지자는 하나님이 엄격한 제재 시스템을 뛰어는 분임을 보여준다. 요나는 니느웨 백성이 벌받기를 바라고, 의로운 분노를 하며 은혜로운 하나님을 공격한다(욘4:2). 하나님은 통제를 뛰어 넘는 분이다. 오늘날의 야만성과 잔인함으로 채색되고, 죄와 죄책감으로 두려움과 자기 혐오에 쫓기는 세계에서 우리 방식대로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성품을 잘 고려하는 것이 좋다.
8장 삶이냐 죽음이냐: 특권적 지위를 잃은 설교243쪽 하나님과 관계없는 세계관 – 계몽주의로 말미암아 무신론이나 우상숭배(왜곡된 신)의 세계관을 믿고 용인하는 지적(知的) 사회환경의 풍토/상황이 됨으로 설교의 특권을 잃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설교 형식은 보편적 이론에 기초한 ‘선포’형식 보다 고대 이스라엘이 이와 비슷한 상황에서처럼 진리(진실)에 동의를 권유하는 ‘증언’ 형식을 취한다. 설교가 판사석에 증인석으로 자리가 바뀐 것이다.
증언의 본보기(사44:8/ 사40-55장- 제2이사야)/ 252쪽 “너희는 두려워하지말며 겁내지 말라. 내가 예로부터 너희에 듣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알리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나의 증인이라. 나 외에 신이 있겠느냐. 과연 반석은 없나니 다른 신이 있음을 내가 알지 못하노라”(사44:8) 1) 바베론 포로기의 상황 속에서 유대인들은 여호와의 증인으로 소명 받고 간주된다. 2) 증거의 내용은 여호와가 유일한 신, 반석임을 증언하라. 3) 위험한 증거, 위험한 상황 속에서 대안 진리를 말할 때 두려워하지 말라!
설교란 동의를 구하며 대안적인 진리를 증언하는 것이다 - ‘생명을 주는 기적들로 충만한 과거’(아브라함노부부 사51:1-2)과 ‘환경을 뛰어 넘는 약속으로 채색된 미래’(사54:10-14/ 55:12-13), ‘정의(신의)의 끈으로 묶인 이웃으로 둘러싸인 현재’(사42:1-4)를 제공하는 것이다. (257쪽)
복음적인 설교는 오늘을 지배하는 제국의 목소리가 아니다. 오히려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제국의 진리와 상충되는 대안 진리를 제공한다.
<나이키와 십자가> 나이키 로고가 아무 구두적인 표현이 없이 성공과 안녕을 알리는 세계의 상징이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다. 이처럼 나이키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십자가는 이웃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것을 보여주는 외로운 상징으로 남아 있습니다. 258.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는 벌떡 일어서서 이미 나이키에 탐닉하는 환경에서 진리를 말해야 합니다. 나이키 로고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십자가에 못박힌 분을 전파하는 일은 아주 위험하고 특권적 지위를 모두 잃어버리게 합니다. 이것은 또한 특권을 상실한 의사소통입니다. ...그러나 이런 설교에 삶과 죽음의 문제가 달려있습니다. 이 복음이 주장하는 바는 우리 미래에 중요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입니다.
9장 포로들에게 행하는 설교/ 261 1. 포로들은 과거를 돌아보며 오늘은 그와 같지 않고 장래에도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심히 슬퍼하고 분개해야한다. 2.포로상태는 사실상 고아와 같고, 오늘날 많은 이들도 스스로 그런 처지라고 느낀다. 3.포로들에게 가장 눈에 띠는 현실이자 최대 위협거리는 바로 절망입니다. 4.포로 상태는 곧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하는 일입니다. 5.포로 상태는 도덕의 부조화를 경험하는 일입니다. 6.포로 상태에서는 자기 자신에게 지나치게 몰두한 나머지 더 큰 현실을 다시 생각하고, 다시 상상하며, 다시 묘사할 수 없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
설교자가 포로들 사이에서 설교하려고 일어서서 맨 먼저 할 일은 그들의 반정체성에 관해 이야기하고 이를 함양시켜 주는 것입니다. 즉 절망스런 계절에 희망을 심어주고, 우리 사회에 팽배한 강압과 유혹 등 온갖 병리로부터 자유하라고 격려하는 일입니다.
설교자는 공공정책과 공공 도덕을 세우는 일에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라, 반정체성에 속하는 결의와 용기, 에너지와 자유 등을 주기 위해 부름을 받았습니다.
10장 현실을 달리 해석하는 설교289 1. 설교란 학교... 등과 같은 “지정된 장소에서 설교를 한다는 것은 설교자가 보수주의적 이든 자유주의적이든 우리가 용인하는 기존의 (무신론적) 확신에 정면 도전하고 해방하는 원시행위”다.
2. 파악하기 어려운 옛 텍스트(히브리성경) 규칙적이고, 정확하고, 대칭적인 라틴어나 역사비평과 다르다. 설교란 다중 주제(subject)이고, 파악하기 어려운 증언과 수사법의 언어양식의 성경텍스트와 성품의 성마른 하나님이 결코 자명하지 않고, 한없이 열려있고, 한없이 요구한다. 그래서 언제나 더 깊은 층으로 밀고 내려가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심층심리학에 가깝다. 그래서 그럴듯한 이데올로기, 현학적 이야기, 진보개혁운동 등 낯익은 영역으로 물러나기 일쑤다. 그러나, 이 하나님에 관한 설교는 우리를 뒤흔들고, 해방을 가져오고, 무신론의 닫힌 세계를 완전히 산산조각낸다.
3.설교란 '하부 해석판'(sub-version)이다. 299p. 설교는 결코 지배적인 해석판이 아닌, 언제나 하부해석판을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즉 지배적인 해석판 아래 사는 다른 하나의 현실 해석판이다. 설교 자체가 위험 천만한 행위다. 그 이유는 -성마르고, 파악하기 어려우며, 다중 주제(subject)를 위탁받았고. -지배적인 해석판 아래 낮게 비행하면서 파괴분자들에게 또 다른 해석판을 제공하는 전복행위이다.
지배적인 현실 해석판은 곧 폭력의 내러티브다: 성적인 학대와 인종 차별에서부터 '일탈자들'을 일괄적으로 수감하여 군인으로 만드는 정책에 이르기까지 아주 다양하다- 난폭 운전, TV 폭력. 이 모든 유형의 폭력 저변에는 큰 곤경과 자원부족에 시달리는 이웃에 대한 책임을 무시하는, 자유시장 이데올로기에 뿌리박은 경제 폭력이 있다. 이 현실 속에서 설교자는 폭력문화에 해독제 역할을 하는 상상 행위로 이를 전복시키되, 그 내력이 폭력행위로 점철되어 있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폭력의 3가지 차원과 3가지 대책> 첫째, 폭력의 뿌리는 시장 이데올로기의 원동력인 '희소성 신화'로 조장되는 물질의 빈곤에 있다. 대처 방법은 하나님의 관대함, 풍성함을 선언(광야의 만나 출16;17-18/ 오병이어의 기적 막6:30-44)으로 뒤집어 업고, 나눔을 실천하는 일을 한다. 복음을 신뢰하면 풍성한 떡이 생긴다! 둘째, 폭력의 뿌리는 상호관계가 붕괴에 있다. 즉 기본적인 사회관계가 단절로 서로 고립되어 절박하고 이성을 잃게 만들게 된다. 바로가 노예들을 대상으로 폭력을 휘두르자, 하나님은 폭력의 대안, 대책으로 언약과 언약공동체을 주셨다- ‘가진 자와 못가진 자를 한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묶어주는 비전, 구조 관습을 주셨다. 아래로부터의 폭력과 위로부터의 폭력을 조장하고 그 위에 번창하는 상호 단절된 세상에 대한 유일한 대안은 언약 공동체 밖에 없다. 셋째, 폭력의 뿌리는 침묵에 있다- 폭력의 침묵과 침묵의 폭력을 깨뜨리는 발언을 공인하고 합법화하며 추천하는 텍스트 자원을 보유하고 있다(출2;23-25/ 불편시편, 탄원시편, 분노와 미움과 분개시편).
<설교자의 텍스트, 곧 교회의 텍스트(성경) 속에 있는 폭력에 대한 대책> 작고, 우발적이며, 국부적인 성격을 갖는다. 첫째, 물질이 빈곤한 상황에서 떡을 제공한 일이 소박하게 묘사한다(바르실래가 요나단의 모반을 피해 왕궁에서 도망가던 때 다윗을 ‘팥과 녹두 등을 대접했다’고 상세하게 인간다움의 나눔으로 묘사한다. 삼하17:27-29/ 이사야58:6-7) 둘째, 서로 단절된 사회 상황에서 언약의 유대 관계를 단언하는 일은 하나님의 성품에 뿌리박고 있다(신10:17-19 ‘...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애굽 땅에서 나그네되었음이니라) 셋째, 침묵이 강요된 상황에서 발언을 정당화하는 것(맹인 거지 바디메오의 발언- 막10:46-49)
<지배적인 해석판> 떡은 나누지 말고 지켜야 한다. (언약) 공동체를 배려하지 않은 채 제각기 만인을 대상으로 싸운다. 침묵하면 현재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설교자는 사회 현실을 뒤집을 수 있는 대본과 부담, 기회를 갖고 있으며, 이로써 떡과 언약의 발언으로 인류에게 폭력에 대처하는 길을 제공합니다. 놀라운 사실! 설교자가 현실의 하부 해석판을 이야기할 때 이데올로기를 설파하듯 큰소리로 하지 않고 작고(국부적이고), 어렵고, 특별한 텍스트의 목소리로 말한다! 4. 포로상태⚫유별남(scandal of particularity) 설교 “설교는 대안적 상상을 도모하는 행위이며, 설교자는 선두에 서서 초병 역할을 해야하며, 그 목적은 죽음을 정상으로 여기는 관점에 대한 급진적 대안으로, 무로부터 기억과 희망과 믿음 이상의 것을 만들어 내는 일이다”308. 포로상태/ 신자의 공동상태는 포로상태와 비슷하다. 현재의 서양이 기독교 신앙에 대해 무척 적대적이며,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바벨론에서도 유대인의 인생관은 바벨론제국의 문젯거리었다. 유별남/ 이스라엘의 선택이 너무 두드러진다- “우리는 다르다“는 정체성을 상기시키고, 유지하라고 격려한다. 그 이유는 ‘유별나게’ 거룩한 분이 함께 하는 가운데 살고, 그분의 임재 안에서 살겠다고 계속 결단해야하는 ‘유별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안식일, 정결음식법(kosher), 할례 등. 제2 이사야는 내용과 상황에 있어서 유별남을 그 출발점을 삼는다! . “예수의 성육신이 너무 부각되고 성경에 근거한 신앙의 전반적인 특징이다. 그것이 너무 특별하고, 너무 특이하고, 너무 색다르다. - 우리는 예수와 함께 있으므로 ”다르다“-새 생명, 성찬의 떡과 포도주, 등. 설교란 유별남을 없애고 싶어하는 거대한 문화제국, 소비지향의 자본주의 앞에서 위험을 무릅쓰고309 유별남을 유지하는 일이다. 유별남은 삶에 대한 자유, 유대인다운 행동을 자유롭게 하고, 보살핌에 필요한 에너지, 하루를 사는 필요한 기쁨을 창조하고(309), 공공정책에 영향을 미쳐 공적을 삶을 재정리 하게한다. (1)이사야 41:21-29 ‘누가 참 하나님인가’ 시인의 법정- 여호와, 바벨론 신들, 유대인 포로공동체 - 재판의 결과: 유별난 상태로 남겠다는 결단와 유대인다움을 유지할 가능성. (2)이사야 41:8-13 가족(유별난 정체성)을 모아 놓고 목자처럼 말씀하시는 여호와. (3)이사야 52:7-10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4)이사야 52:10-11. “떠날지어다. 떠날지어다” - 바벨론을 떠나라. 지배적 현실해석판을 떠나라. 두려움과 불안이 넘치는 장소를 떠나라. 유대인다움과 순종, 기쁨과 자유가 잇는 고향으로 향하라. (5)떠남(departure)의 복음 318쪽 = 제2 이사야에서 원초적인 출애굽 이야기를 다시 들려주는 것뿐이다. ‘하나님이 통치하는 새로운 세계를 향하여 떠나는’320 출애굽(=‘떠남‘) 이야기는 역사보고서가 아닌 오히려 ’너희가 너희 자손에게 전하게‘ 하기위한 양식화된 예전(liturgy)이다.
(6) 전복자, 예수 제 2이사야의 시는 예수의 유별난 이야기를 바라보고 있다.
11장 진실을 말하는 설교 327쪽 -“네 이웃에게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제9계명). 1. ‘네’는 누구인가? 시민 개개인적인 차원 뿐아니라, 더 큰 사회적 차원으로 확대된다 – 왕(족) 다윗의 우리야, 이세벨의 나봇의 관계, 공적차원이나 기득권자들 곧 공공기관, 미디어를 통제하는 사람, 테크놀러지를 통제하는 자들. 제2 이사야에서는 바벨론에 포로인 유대인들을 말한다. 2. 이웃이란 ? 먼저, 단순한 거짓증거를 금하는 것이 아닌 언약공동체의 일원에게 거짓 증언을 말하고 한다. 더 나아가서, 제2 이사야는 여호와를 이웃으로 묘사한다338. 3.거짓이란 ? 왜곡하는 말, 허위진술- ‘독성있는 완곡어법’335, TV광고, 선전으로 거짓된 현실관을 만든다.
4.무엇을 증언하는가 ? 하나님/ 사법제도 맥락에서 말하는 법정의 용어다. 법정은 권력의 영향을 받지 않아야 한다. 제2이사야에서 포로상태의 유대인이 하나님의 증인(사44:8/ 43:10)이며, 증언은 구원과 해방 변혁(사43:11-19)이 그 내용이다. 예수님/ 신약성경에서는 교회가 예수에 관하여 거짓 증언이 아닌 진리를 말해야 하는 것이다340. 진리란 개념(아이디어, 공식, 사실)이 아닌 존재방식이며, 곧 나사렛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방식으로 세상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것이다342. 세상/ 세상은 다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나님은 파격적 새로운 일을 행하시는 분이다. 예수님의 고난은 우리의 구속을 위한 것이다 ‘신앙공동체는 '피고인석'에 앉아서 거짓 증언을 하지 말고 진실을 말하라는 요구를 받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설교자는 거짓교회의 진리를 세상에, 그리고 하나님의 진리를 교회에 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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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위 내용은 제가 <포스-선교동역사모임>에서 발제한 내용입니다. 내용이 참 좋네요 일독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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