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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 이이 栗谷 李珥 | |
1965년 김은호가 그린 이이 영정 | |
前 조선국 이조 판서 | |
임기 | 1582년 ~ 158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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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 | 조선 선조 이연 |
신상정보 | |
국적 | 조선 |
출생일 | 1536년 음력 12월 26일 (양력 1537년 1월 7일) |
출생지 | 조선 강원도 강릉부 죽헌동 오죽헌 몽룡실 |
사망일 | 1584년 2월 27일 (음력 1월 16일) (향년 49세) |
사망지 | 조선 한성부 대사동[1] 자택 |
본관 | 덕수 |
학력 | 아홉 차례의 과거 장원급제 |
경력 | 문관 겸 성리학자 |
정당 | 서인 세력 |
부모 | 이원수(부) 신사임당(모) 권씨 측실(서모) |
형제 | 누이 이매창, 형 이번, 형 이선, 동생 이우 |
배우자 | 정실 곡산 노씨 부인 측실 김씨 측실 이씨 |
자녀 | 이씨(서녀) |
친인척 | 할아버지 이천, 재종조부 이기, 이행, 종증조부 이의무, 친족척 이순신, 사돈 김장생[2], 서녀사위 김집 |
별명 | 자(字)는 숙헌(叔獻) 호(號)는 율곡(栗谷), 석담(石潭)[3], 우재(愚齋) 시호는 문성(文成) 별칭은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 |
종교 | 유교(성리학) → 불교 → 유교(성리학)[4] |
웹사이트 | 율곡학회 홈페이지 |
이이(李珥, 1537년 1월 7일(1536년 음력 12월 26일) ~ 1584년 2월 27일(음력 1월 16일))는 조선덕수이언적, 이황, 송시열, 박세채, 김집과 함께 문묘 종사와 종묘
유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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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차례의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16세 때 어머니 신사임당이준경동인, 서인병조판서로서 여진족 이탕개의정부영의정에 추증성혼, 송익필, 김장생 등과 함께 기호 지역이 기반인 서인문묘에 종사하는 문제를 놓고 인조반정 이후 50년간 논쟁의 대상이 되다가 숙종 때 경신환국으로 서인들이 집권한 후 문묘
율곡 이이는 1536년 강원도 강릉부 죽헌동에 있는 외가인 오죽헌(烏竹軒)에서, 덕수 이씨 통덕랑 사헌부감찰 이원수와 평산 신씨 신사임당경기도 파주
이이의 아버지 이원수는 사헌부 감찰, 수운 판관과 통덕랑을 지냈으며, 중종 때의 형제 정승인 경재 이기, 용재 이행의 5촌 조카였는데, 이기는 의정부영의정을, 이행은 의정부좌의정생육신 성담수, 성담년의 조카이고, 사육신 성삼문이원수는 통덕랑 사헌부감찰
벼슬이 낮았던 아버지 이원수는 승진하고자, 일부러 당숙이자 김종직의 문인이며 글을 잘 썼던 이기의 문하에 출입했으나, 부인인 신사임당신사임당이 남편 이원수에게 이기의 집에 출입하다가 화를 당할 것이라고 경고했는데, 과연 이기는 청렴했고 글도 잘 지었으며 벼슬이 의정부영의정까지 이르렀지만, 을사사화에 가담한데다 권력을 남용한 탓에 명종
어머니 신사임당신사임당조광조유교, 성리학을 가르치고, 공자, 맹자, 주자
이원수는 신사임당 외에도 권씨라는 첩을 한명 더 두었다. 서모 권씨는 주모 출신으로 술주정이 심하였는데, 신사임당
이이는 어려서 신동이라 불렸다. 그는 생후 1년도 안돼 말과 글을 깨우쳐서 주변을 놀라게 하였는데, 3세 때에 이미 글을 깨우쳤을 뿐만 아니라, 어머니 신사임당중국
이이는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5세 때에 어머니 신사임당신명화이원수
8세 때는 화석정
林亭秋已晩 / 騷客意無窮숲에는 가을이 저물어 가매 / 시인의 시정은 그지없어라.
기러기는 어디로 가는 것인가 / 저무는 구름 새로 소리 끊겨라.[5]
遠水連天碧 / 霜楓向日紅
물빛은 하늘에 닿아 푸르고 / 단풍은 햇빛 따라 불타올라라.
山吐孤輪月 / 江含萬里風
산에는 둥근 달이 솟아오르고 / 강에는 끝없는 바람 어려라.
塞鴻何處去 / 聲斷暮雲中
어머니 신사임당이 자주 병환에 눕자, 이이와 형제들은 지극정성으로 어머니 신사임당1551년(명종 6년)에 어머니 신사임당
그는 성주목사 노경린의 딸 곡산 노씨김장생의 아들 김집
스승 없이 조광조를 사숙하다가 그는 조광조의 문하생인 휴암 백인걸백인걸의 문하에서 우계 성혼성혼은 조광조의 다른 문하생인 성수침의 아들이자 성수침성혼의 아버지 성수침
나라의 어려움을 건질 만한 인물이라고 사림에 떠받드는 인물이기 이전에, 자신의 오랜 절친한 친구를 착실한 선비에 불과하다고 한 것은 비교적 냉혹한 평가였다. 그런데 선조성혼
1551년(명종 6년) 16살이 되던 해 이이는 수운판관인 아버지 이원수[6] 효성이 남달리 지극하였던 이이는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3년 동안 어머니의 무덤 옆에 묘막을 짓고 생활하며 어머니의 명복을 빌었다. 또 아버지가 병으로 누웠을 때는, 사당에 들어가 아버지의 병을 낫게 해 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다.
또한 어머니 신사임당[7] 온후하고 자상한 어머니였던 신사임당과는 달리 권씨 부인은 술을 무척 좋아해서 새벽부터 술을 몇 잔 마셔야 겨우 자리에서 일어나는 성격이었고, 조금만 비위에 거슬리는 일이 있어도 빈 독에 머리를 박고 엉엉 울어댄다든가 노끈으로 자살 소등을 벌이는 등 행패가 심하였다.[7] 자녀들이 당하는 고통은 말이 아니었다.[7] 참다못한 이이는 가출을 감행할 정도였다.[7]
어머니 신사임당금강산으로 들어가 승려가 되었고, 그가 뒤에 불교에 입문했다가 환속한 뒤에도 문제 삼지 않고 받아준 것은 스승 백인걸과 오랜 친구 성혼송응개 등의 동인(東人)들과 허목, 윤휴, 윤선도 등의 남인불교도라는 동인, 남인, 북인계열 유학자(儒學者)들의 사상공세는 1910년(융희 4년) 조선
조광조의 직계 제자였던 그의 스승 백인걸은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유생들과 청년들을 가르쳤고, 이이는 스승인 백인걸의 스승이자 자신의 사조(師祖)가 되는 정암 조광조
묘막에서 독서에 열중하던 이이는 불교 서적을 읽고 유교와 색다른 학문에 흥미를 느껴 3년상이 끝난 1554년(명종 9) 금강산 마가연(摩訶衍)에 들어가 자신의 아호이기도 한 석담(石潭)이라는 법명
불도를 닦았는데, 그가 수행하는 중 승려들 간에 생불이 출현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고 한다.[8] 그러나 승려생활 내내 인간이 왜 태어나고 왜 죽는가에 대한 그의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지 못했다. 결국 불교가 유교에 미치지 못한다고 확신하고 입산 1년 만에 마가연[9] 하지만 율곡 이이가 주기론을 말하고 아래의 연비어약 (鳶飛魚躍) 시를 남긴 것은 이미 불교에 대한 공부를 마쳤음을 말한다. 산에서 하산하며 그는 승려에게 이와 같은 시를 남기기도 했다.
연비어약 (鳶飛魚躍)연비어약상하동(鳶飛魚躍上下同) / 솔개 날고 물고기 뛰는 이치 위나 아래나 매 한가지
독립사양만목중(獨立斜陽萬木中) / 석양에 나무 빽빽한 수풀 속에 홀로 서 있었네
저반비색역비공(這般非色亦非空) / 이는 색도 아니요 또한 공도 아니라네
등한일소간신세(等閑一笑看身世) / 실없이 한번 웃고 내 신세 살피니
불교의 무념 무욕이 그의 기질과는 맞지 않다고 판단, 1555년승려로 있었다는 점은 후일 동인과 남인남인의 지도자 허목, 윤휴, 윤선도
백인걸의 문인이기도 한 이이는 이황1558년(명종 13) 23살의 이이는 당시 대학자인 58세의 퇴계 이황이황이황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서신을 통하여 경공부(敬工夫)나 격물(格物)·궁리(窮理)의 문제를 서로 서신을 주고받으며 교류하였다. 그러나 이황을 방문하여 담론하던 중 이와 기의 문제를 놓고 이황을 논파하려 드는 것을 목격한 이황의 문도들은 그를 이인(異人)으로 의아하게 보면서도 적개심을 품게 되었는데, 후일 조정에 출사한 이황
이이가 질문을 하면 이황은 친절한 답변을 보냈고, 불교
또한 친구 성혼과의 인연으로 대곡 성운, 남명 조식 등도 찾아가 그들과도 사물과 이기론, 주자
1564년(명종 19) 이이는 식년문과에 급제한 후 곧 호조좌랑이 되었다가 예조좌랑윤원형이 승려 보우를 궁중에 끌어들여 비행을 서슴지 않자 상소를 올려 보우를 제주도로 귀양을 보내고 윤원형
이후 이조좌랑을 거쳐 1567년 명종이 승하하고 선조가 즉위하였으나, 명종대의 외척인 좌의정 심통원[10]은 대왕대비의 친족이라는 이름으로 축출되지 않고 재상직에 있으면서 횡포를 일삼았다. 이때 이이는 다시 상소를 올려 심통원인순왕후는 곧 수렴청정을 거두었고, 심통원
그는 관료생활 중에도 꾸준히 이황, 조식, 성혼, 정철1568년(선조 1년) 천추사(千秋使)가 명나라로 갈 때 사신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연경에 동행한 뒤, 1569년 귀국 후, 홍문관홍문관성혼1569년 음력 9월에는 송강 정철
심의겸은 율곡 이이가 자신의 종조부 심통원심의겸심의겸의 인품에 탄복하여 을해당론 이후에도 심의겸을 구원해주려 노력했고, 심의겸은 이이를 서인
그는 허례와 허식을 비판하였다. 그러나 도덕과 윤리[11]
율곡의 이러한 사물이나 인간에 대한 정직한 자세는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켜 당시 동료는 물론 선배와 원로대신들로부터도 미움을 사 오국소인(誤國小人)이라고까지 지탄을 받았다.[11] 특히 원로대신들 중 허엽과 이준경[11]
이이의 솔직함과 냉정함에 화가 난 이준경은 이이의 스승 백인걸이준경이 백인걸을 찾아가 "자네가 추천한 이 아무개라는 인간이 왜 그 모양인가? [11]" 하고 드러내놓고 역정을 내기도 했다.
그러나 이 발언이 이이의 귀에 들어가면서 이이는 이준경을 상당히 부정적으로 생각했고, 이준경이기는 그가 공격했던 동고 이준경이준경
이이는 서경덕의 기중심의 설을 성리학자 답지 않게 도에 치우쳤다며 공박했고, 이황조식에 대해서는 '세상을 피하여 홀로 서서 뜻과 행실이 높고 깨끗하겠지만, 학문을 하면서 실제로 체득한 주장과 견해가 없고, 상소한 것을 보아도 나라와 백성을 위한 방책은 없다'며 정구, 정인홍, 김우옹서경덕과 조식, 이황의 문하생, 추종자들의 분노를 자아냈고, 허엽과 김효원, 송응개, 윤승훈, 허봉, 송응형
그러나 사심 없이 사물을 판단하려는 그의 자세는 선조를 매료시켰고, 선조
사림의 천거로 친구 성혼이 중망에 오르자 선조는 율곡을 불러 "사림에서는 이 난세를 치유할 수 있는 인물로 우계를 천거하는데 경의 생각은 어떤가?" 라고 그에게 성혼[11] 율곡과 우계는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자"는 동심일체의 교우관계를 지닌 사이였다. 하지만 선조[11] 나라의 어려움을 건질 만한 인물이라고 사림[11]
어느 땐가 선조가 "경은 짐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라고 묻자, 율곡은 "전하께서는 선한 의지를 가지고 계시니 학문에 힘쓰고 노력하면 현주賢主가 될 수 있습니다" 라고 답변했다.[11] 이러한 답변을 통하여 선조에게 현명한 임금이 되어 달라는 말을 한 것이다. 율곡은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고 진실되게 대답했다. 또 선조가 율곡에게 어떠한 사람을 등용해야 하는가를 묻자, 율곡은 "전하에게 충성을 다짐하는 사람은 되도록 피하고, 자기 일에 충성을 다짐하는 사람을 가까이 하십시오. 전하에게 충성을 다짐하는 사람은 전하를 배신할 가능성이 있지만, 자기 일에 충성을 다짐하는 사람은 전하를 결코 배신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라고 답변했다.[11] 그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 직무에 충실한 사람이, 사사로운 충심을 주장하는 자보다 더 믿을만 하다고 보았다.
서경덕, 조식, 이황선조임금은 우계와 더불어 당시 정승감으로 물망에 오르고 있던 사암 박순, 퇴계 이황, 그리고 스승 백인걸[11] 백인걸[11] 조광조[11] 이언적동인
1570년(선조 3년) 관직을 사퇴하고 황해남도1571년
1572년 이준경이준경이준경이 당쟁을 예견하는 글을 쓰자 그는 이준경이기가 이준경1575년 을해당론으로 동인, 서인
1572년 파주성혼의 주장에 이이가 반박 또는 보충설명을 하거나, 성혼성혼은 이황윤근수, 윤두수, 정철, 송익필 등이 그와 친해졌고 그는 자연스럽게 서인
그러나 1573년(선조 6년) 다시 선조의 부름을 받아 승정원병조참지에 임명되었다가, 그해 음력 3월 이이는 사간원 대사간경기도
이이는 평생 동안 대사간에만 9번이나 임명되었고, 선조의 신임은 계속되었다. 1581년 사헌부대사헌이 되었다가 곧 예문관제학에 임명되어 대사헌으로 예문관제학을 겸임하고, 동지중추부사를 거쳐 예문관대제학과 홍문관선조의 왕명을 받고 《인심도심설 (人心道心說)》을 지어 올렸으며, 같은 해 김시습
동인과 서인의 당쟁이 격화되자 그는 동인의 김효원, 서인의 심의겸과 정철동인들은 그가 일찍이 불교[12] 역시 동인동인들은 그의 재종조부 이기[13]가 장리(탐관오리)의 사위라서 관직에 제한을 받아야 했으나 이언적의 구제를 받고 출사했는데도 명종 때 을사사화[14]
이이는 동인, 서인이 모두 학문을 하는 사류(士類)이며, 그 분열은 시국관, 환경, 의견의 차이, 개인의 사상, 관점 차이에서 연유한 것이기 때문에, 당초 주자
그는 당쟁의 조절과 정쟁 중단을 촉구하였지만, 동인, 서인 붕당은 기존의 군자의 붕당과 소인의 붕당이 존재한다는 견해를 고수했고, 서인을 군자의 붕당, 동인서인의 입장에 서서 당쟁을 조절하려 하였고, 이는 동인정여립은 서인에서 탈당하여 동인[15] 그는 어느 붕당에나 군자, 소인이 있음을 거듭 반복하였다. 또한 자신을 비판한 동인1583년 자신을 면전에다가 나라를 말아먹은 소인, 간신으로 공격하는 송응개
그는 당쟁을 조절할 목적으로 심의겸과 김효원을 동시에 비판하고, 정인홍이건창의 당의통략에 의하면 정인홍이 그뒤 홀로 심의겸을 공격하면서 심의겸이 윤두수, 윤근수, 정철정인홍에게 정철은 기개가 있는 사람이라 심의겸이 시키는 데로 움직일 사람도 아니라고 반박하고, 내가 정철정철이 심의겸[16] 이때 윤승훈윤승훈에게 당나라의 한유와 유종원, 송나라 때의 사마광, 왕안석, 소식과 장돈 등이 사귈 때 정은 형제같았지만 속마음은 연나라, 월나라윤승훈의 반박을 불쾌하게 여긴 이이는 사석에서 "윤승훈동인[17]
이이는 조선
이는 율곡 이이가 당시 개혁적인 성격을 지녔음을 말해준다. 율곡 이이는 조세
또 1583년(선조 16) 병조판서에 임명되고, 병조판서로 시작된 그해 음력 2월음력 4월
봉사에는 공안(貢案)의 개혁, 군적을 고치고 지방의 군현을 합병하여 불필요한 공직자 수를 줄이고, 관찰사(도지사)의 임기를 보장하여, 관찰사로 하여금 지방을 제대로 다스릴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하는 요구였고, 서얼 제도를 폐지하며 신분에 관계없이 천민이나 노비국가
이이는 당색을 초월해서 인재를 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 의하면 동인과 서인서인들로부터도 동인
그는 양반에게도 똑같이 군역
1583년(선조 16년) 변방에서 이탕개의 난이 일어나자 당시 병조판서 율곡태종이언적의 서손자이자 이전인이언적의 서자 이전인
서얼 허교 주장 역시 유학자들에 의해 태종 이방원의 유지를 거스르는 행위라는 비난을 계속하였고, 동인에서는 그가 사사로운 원한으로 불교에 입문했던 점을 계속 들먹이며 그가 사회를 어지럽힐 생각으로 서얼
그의 서얼 허통은 신분제를 문란하게 만들 우려가 있다는 동인들의 공격을 받았고, 심지어는 같은 당인 서인동인인 류성룡과 정구가 그의 서얼 허통
또한 이이는 선조에게 10만 양병설을 주장하여 동인의 반감을 사기도 하였다.[18] 그는 일본의 전국시대는 종결될 것이며, 일본을 통일할 무사는 일본 내 세력 내 갈등 완화와 국내 관심사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한 목적으로 미구에 명나라나 조선동인에 의해 왕을 현혹하기 위한 발언으로 치부되었고, 서인
이이가 10만 양병설을 주장하던 당시, 조선의 총 병력수는 장부상으로는 30만 명이 넘었으나, 실제 전투 가능한 병력 숫자는 1,000명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19] 1581년
선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은 이이는 1582년 이조판서와 형조판서를 거쳐 병조판서에 임명되어 여진족의 반란을 진압하였고, 대제학을 역임하고 우찬성
이이의 십만양병설에 관해 의혹을 제기하고 있는 학자도 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십만양병설은 당시 조선의 사회적, 경제적 능력으로 보았을 때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사안이었으며, 그러한 한계를 분명히 파악하고 있던 실무적 유학자인 이이로서는 오히려 십만양병설을 주장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고 한다.
실제로 이이가 올렸던 상소문과 각종 글을 모은 문집을 살펴보면 당대 다른 중신들도 즐겨 쓰던 '양병'이란 글자는 나올지언정 '십만양병'에 관련된 내용은 일체 나오지 않는다고 하며, 오히려 군축을 해야 한다는 상소문이 십만양병설 대신 자리 잡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어 덧붙이기를, 십만양병설에 관련된 내용은 후대에 세워진, 율곡 이이를 기리는 비문에 처음으로 등장한다고 하며 이는 율곡 이이를 숭배하던 후대 조선 유학자들이 일종의 신성화를 노려 임의로 추가하였다고 한다.
정여립정여립을 "넓게 배우고 많이 기억하여 경전[20] 이이 역시 정여립의 재주를 총애하였다. 그러나 이이는 그의 과격성을 눈여겨보았고 때로는 그를 경계하게 된다.
훗날 정여립이 과거에 급제하고 이이의 문하를 다시 찾아갔을 때 그가 서인당을 왜 찾아왔는지 까닭을 묻자, 정여립은 "저는 서인[21]
한때 정여립의 재주를 아껴 총애했다던 이이는 죽기 석 달 전에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관직(이조판서직)의 사퇴의 상소를 선조[20] 이에 선조[20]"라고 답하였다고 한다.
이이와 선조가 정여립을 이처럼 평하고 배척하였던 데는 다른 사적인 문제도 있었을 터이지만, 이이는 당시의 상황을 어느 정도 정확하게 감지하고 있었던 것 같다. 즉 그 때는 동인과 서인간의 대립이 점차 양극화되기 시작한 때였고, 선조는 이를 제대로 극복하기 어려운 상황에 있었다. 이런 때에 재주와 출세 의식, 과격한 성격을 가진 정여립은 자칫 분란의 소지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이이와 선조는 경계했던 것이다.[20] 정여립이 뛰어난 재질과 대담한 용기를 가진 인물임을 한편으로 인정하면서도, 선조와 그 측신들은 정여립이 이이를 배척했다는 이유로 그를 향리로 추방하고, 결국 반역의 굴레를 씌워 죽음으로 내몰았던 것이다.[20]
정여립은 총명하고 논변을 잘하여 널리 이치를 탐구하는 데에만 힘썼으며, 특히 시경[21] 그는 이이의 문하만이 아니라 성혼성혼[21] 1570년(선조 2년) 식년 문과 을과에 급제한 정여립서인[21]
- 정여립 : 서인만이 이 나라 사대부입니까?
- 이이 : 동인들은 늘 반대만 하거든.
- 정여립 : 그래도 그렇지, 동인에도 반드시 인물이 있을 텐데 무조건 백안시하는 건 좋지 않은데요.
- 이이 : 뭐야?
- 정여립 : 사람이면 다 같은 사람이지 동인 서인 나뉘었다고 일부 선비들이 그들을 짐승으로 취급할 것 까지는 없잖습니까?
- 이이 : 내가 호랑이 새끼를 키웠나[21]
이이는 동인들의 공격으로 동인들에 대한 감정이 극도로 악화되어 있었다. 한편 다시 찾은 스승 이이가 아직도 공정하고 합리적으로 바라보리라 생각했던 정여립서인[21] 이런 이유로 정여립[21]
이이와 정여립 사이에 서인과 동인에 대한 인식 차이로 약간의 갈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두 사람 다 붕당에 얽매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인물들이다.[22] 이이는 평소 선조에게 붕당을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할 것을 건의한 바 있었고, 정여립은 이이 문하에 의외로 서인[22] 그런가 하면 정여립이 이이를 배반했다는 당시 서인[22] 오히려 이이는 정여립의 과격한 성격을 상기시켜 그가 이조전랑의 물망에 올랐을 때 반대하였다.[22]
1582년(선조 15년)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다가 형조판서를 거쳐 병조판서병조판서현기증을 느끼고 주저앉은 것을 놓고도 동인동인
그는 일단 당쟁의 조절을 위해서 서인의 영수인 심의겸을 비판하였고, 정인홍의 심의겸 탄핵 상소에도 동조하였음에도 1583년(선조 17년) 당쟁을 조장한다는 동인의 거듭된 탄핵으로 스스로 사직했다가, 같은 해 다시 판돈녕부사에 임명되고, 다시 이조판서동인의 당원 송응개송응개는 이이가 불교 승려가 환속해서 자기가 최고라고 우기며, 언제는 심의겸도 좋다, 언제는 김효원송응개동인서인
1583년(선조 16년) 정여립은 예조좌랑[23] 이이는 당시 이조판서[23] 이이는 자신의 문인이기도 했던 그의 과격성을 보고는 은근히 그를 경계했다. 그러나 이이는 병세가 악화되어 결국 관직 생활을 오래 계속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으며, 이이가 죽은 두달 후 정여립은 홍문관[24], 동인계 인사들과 가깝게 지내게 된다. 결국 정여립은 이이가 싫어했던 동인들과 가까이 했다는 비판을 받았으며, 결국 선조[24]
당색으로는 서인에 속했는데, 이 때문에 그는 동인과 서인성혼, 류성룡, 정구, 우성전, 송익필, 조헌 등의 지기들에게 당쟁을 조절하려다가 동인
병석에 누운 동안에도 동인의 공격은 계속되었다. 그는 경기도 파주군 주내면 율곡촌에서 요양하던 중 차도가 없음을 알고 한성으로 내려왔으며, 1584년(선조 19년) 음력 1월 16일 새벽 한성부
문인으로는 조헌, 김장생김장생은 그의 친구인 송익필의 문하와 성혼의 문하에서도 수학하였는데, 송익필이 노비로 환천 되면서 학문적 연원을 이이와 성혼1592년(선조 25) 4월 임진왜란이 터지자 선조는 어가를 타고 의주 파천
사후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춘추관 관상감사에 추증동인과 동인의 분파인 북인, 남인1591년(선조 24) 종계변무가 성사되자 그는 광국원종공신
1615년(광해군 7년)에 율곡의 애제자 김장생 등의 공의로 고향 파주에 그를 모신 사당 문성사문성사는 1649년(효종 즉위년) 효종왕이 사액을 내려 자운서원1631년(인조 8년) 경기도 파주시이항복(李恒福)이 글을 짓고 신익성(申翊聖)이 글씨를 썼으며, 김상용
우계 성혼과 구봉 송익필과는 이웃에 사는 절친한 친구였는데 인조 때 서인이 집권하면서 이이와 성혼을 문묘에 종사해야 한다는 여론이 나타났으며 1682년(숙종 8)에는 우계 성혼갑술환국문회서원
박정희는 그의 개혁안을 높이 평가하여 이순신, 세종대왕, 광개토대왕, 이황
이이의 사상과 학문은 사계 김장생(金長生)을 거쳐 김집, 안방준, 우암 송시열권상하한원진(韓元震) 등 서인 노론으로도 이어졌고, 우계 성혼의 문인들과 결속한 사계 김장생(金長生)과 김집의 또다른 문하생 일부, 윤황과 윤선거 등을 통해 서인 소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정묘호란으로 도망노비 발생 및 신분제도 해체가 가속화되자 이이의 문하생들은 봉건사회 해체 양상에 반발, 신진관료·지주 중심의 사회 운영을 합리화하며 송익필성균관 문묘 종사운동을 벌였고, 이이는 스님일 뿐이라는 근기남인계 허목, 윤휴, 윤선도1623년 인조반정 때까지만 해도 남인예송
그의 학문 즉 성리설의 특징은 논리적이다. 반면에 이황은 체험을 중시한 것이었다. 그는 학문에 대하여 실생활에 적용할 수 있는 학문을 참된 학문이라고 규정하였다. 아무리 훌륭하고 고결한 이론이라고 해도 현실에 적용이 불가능하다면 이는 헛된 공리공담이라는 것이 그의 사상이었다. 그러나 그의 후배인 서인
그는 자신이 살던 사회를 조선
《만언봉사》에서 그는 "때에 알맞게 한다"(時宜)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는 "정치에 있어서는 때를 아는 것이 소중하고 일에 있어서는 실질적인 것에 힘쓰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였고, "때에 알맞게 한다"(時宜)는 것은 시대의 변화, 환경의 변화에 따라 때에 따라 변통을 하고, 각종 제도와 법을 마련하거나 기존의 법, 제도를 정비해서 백성을 구제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인습에 안주하거나 집착하지 않고 변화된 시대나 생활에 맞춰서 현실에 맞도록 고치고 개정하는 것이 백성을 구제하는 것이라 보았다. 시대가 바뀌고 환경이 바뀌면 제도나 법이 맞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에, 현실에 맞지 않다면 그 시대 분위기, 환경에 맞게 제도를 개혁, 정비해야 되고 이러한 변통을 통해 경장을 할수 있다, 그리고 시대의 문제와 사회의 부조리, 백성들의 불편함을 해소, 구제할 수 있다고 제시하였다.
그는 자신이 살던 조선
그밖에도 그는 백성들의 사회교화 역시 경장의 하나라고 보고 서원향약(西原鄕約), 해주향약(海州鄕約), 사창계약속(社倉契約束) 등을 만들어 향약과 사창법을 실시하고 지방에 서원, 향교, 서당의 건립을 보급, 적극 장려하여 지방 인심 습속의 교화를 역설했다.
그는 이와 기는 하나라고 판단했다. 그의 사상은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로 대표되며 퇴계의 사단칠정(四端七情)설로서 이기호발설을 배격하였다. 그가 23세 때 지은 《천도책(天道策)》에 이미 그 바탕이 드러나 있다. 즉 율곡은 이황이 기(氣)와 이(理)는 서로 독립되어 있다는 데 이설(異說)을 제기하여 우주의 본체는 이기이원(理氣二元)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은 인정하나 이와 기는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분리되거나 선후(先後)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따라서 이와 기는 최초부터 동시에 존재하며 영원무궁하게 떨어질 수 없는 것이어서 이는 조리(條理), 즉 당연의 법칙으로 우주의 체(體)요 기는 그 조리를 구체화하는 활동이니 우주의 용(用)이라 주장하였다.
즉 이황의 설은 호발설이고 이이는 일도설이었다. 하지만 이황의 칠정설인 기발이승설만을 취한 것이다. 반면에 그의 사단설인 이발기수(理發氣隨)설을 비판하였다. 또한 그것은 이황과 사단칠정설논쟁을 벌인 기대승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또한 서경덕에 대해서도 기중심의 설로서 독창적이지만 문제가 있다며 비판한다. 그의 설은 기가 운동하고 이는 그 원인이 된다는 설에 근거한 것이다. 그는 자기의 주장을 발전시키면서 이 주장이 주자동호문답(東湖問答)》, 《성학집요(聖學輯要)》,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 《시무육조소(時務六條疏)》 등은 모두 임금의 도리와 시무를 논한 명저로 그의 정치에 대한 태도는 유학자의 이상인 요순
이 밖에 정치적 부패의 타개와 백성의 구제에 대한 방책에 관해서는 한층 구체적인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만언봉사(萬言封事)》에서 율곡은 부패의 시정책 7개항을 제시하였는데 특히 그 중 십만양병설대동법의 실시와 사창
그는 기존의 유교나 성리학유교와 성리학신사임당의 영향을 받았는데, 이는 딸들에게도 유교와 성리학
이이는 그의 저작 자경문(自警文)에서 독서에 대한 생각을 규정하였다.
새벽에 일어나면 아침나절 할 일을 생각하고, 아침밥을 먹고 나면 낮 동안 할 일을 생각하고, 잠자리에 들 때면 내일 할 일을 생각한다. 아무 일이 없으면 마음을 내려놓고 일이 있으면 반드시 생각을 하여 일 처리에 마땅한 방도를 얻어야 할 것이다. 그런 뒤에 독서를 한다. 독서란 옳고 그름을 분변(分辨)하여 일을 행하는 데 실천하는 것이다. 만약 일을 살피지 않고 오뚝 앉아 독서만 한다면, 무용한 학문이 된다.[25]
또한 격몽요결[25]'라고 하여 독서를 세상, 사물의 이치와 진리를 깨우치는 가장 기본적인 단계로 해석하였다.
이이는 학문적으로는 김종직 학파의 직계로서, 친구인 성혼과 함께 백인걸성혼은 백인걸 외에도 성수침에게도 사사했는데, 백인걸과 성수침은 조광조노수신 역시 이연경의 문인으로, 이연경 역시 조광조
그는 관료생활 중에도 스승인 백인걸을 자주 찾았는데, 이이가 백인걸과 함께 정암 조광조와 퇴계 이황의 인물평을 논하면서 정암과 퇴계의 우열을 놓고 평을 했는데, 이때 이이는 스승인 백인걸에게 조광조백인걸은 조광조
조광조는 다시 김종직의 문하생의 한사람인 김굉필성혼의 문하생들 중의 한명인 사계 김장생의 문하에서 송시열과 송준길 등이 배출되었고, 이이와 성혼은 후일 서인
이항복김장생정몽주기호학파김장생, 중봉 조헌, 수몽 정엽, 묵재 이귀
율곡이 대학자이면서 뛰어난 정치가로 평가 받을 수 있었던 점에는 몇 가지 요인이 있다.
첫째, 신사임당
둘째, 퇴계 이황
셋째, 선조문정왕후가 사망하고 외척인 윤원형사림동인과 서인
넷째, 학문적 지식이 있었던 친구들과 교류했다는 점이다. 평생의 친구인 성혼, 송익필, 정철파주
이준경이 당쟁의 화를 예언했을 때, 그는 뒤에 후회하고 신념을 바꾸기는 했으나 이준경유성룡 등이 이준경을 옹호했는데 이는 후일 이인좌의 난 당시 경상북도
당쟁의 조절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으나 서인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은 그가 동인[26]'며, '이 일로 조정이 혼란에 빠져 수습할 수 없게 되었으니, 그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26]'고 비판했다.
지나치게 왕에게 의존적이었다는 비판도 있다. 이이는 지나치게 왕에게 의존하는 태도를 보였는데, 그것 역시 잘못이다. 그는 선조를 착한 개혁군주로 만들어 조선[27] 그러나 심리적으로 건강하지 않은 인물에게 성인(聖人)이 되라고 요구하는 것은 의미없는 일이다. 물론 의지박약으로 큰 뜻을 세우지 못하는 왕에게 큰 뜻을 품으라고 설득하는 것도 마찬가지다.[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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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평공(康平公) 이명신(李明晨)의 5대손이며, 중종 때의 재상 이기, 이행 형제의 재종손[28]이자 통덕랑 사헌부감찰을 지내고 사후 증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된 이원수(李元秀)와 정경부인 신사임당
1579년의 곽사원의 제방송사가 정언지 등에 의해 1589년참판 정언지[35] 그 과정에서 의혹이 있는 송익필 일가의 뒤를 이이가 봐주었다는 것이다.
토목 공사를 둘러싼 부정 사건에 송익필의 조카 사위(송익필의 형 송한필의 사위)가 관련되었고, 그 동안 이이가 이 사건을 극력으로 돌보아주었다[35]는 의혹이 있다.
그런데 우성전이 문제가 되었을 때도 동인우성전[36] 우성전
동인동인우성전에게도 한 가지 흠이 있었는데, 기생[36] 심지어 우성전[36]
상중에 기생이 우성전의 집에 출입하는 것을 보고 해괴하게 여긴 인물은 동인 이발[36] 이발은 사헌부장령으로 있던 정인홍대북(大北)의 영수가 되는 정인홍[36] 그는 예에 어긋난 이러한 일을 두고 볼 수 없다면서 앞장서서 우성전[36]
정인홍이 우성전을 탄핵한 것은 이처럼 동인인 이발의 토로에 의한 것이었는데, 동인[36]
훗날의 남인 학자 이중환은 자신의 저서 택리지에서 그가 (동인[26] 는 의혹을 제기하였다.
19세에 어머니 신사임당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충격을 받은 그는 금강산에 들어가 1년간 승려불교 승려
인조 즉위 초부터 시종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허목과 고산 윤선도, 백호 윤휴[37]
율우의 문묘종사 논쟁이 벌어지자 허목율곡 이이의 문묘 종사를 바낻한 명목은 그의 학문이 유교가 아닌 불교[37]
학문에는 차례가 있고 공(功)에는 순서가 있다. 율곡은 한갓 큰 것을 이기려는 굉장한 논의를 갖고서 자신이 (싸움에서) 이기기만을 힘썼다. 그는 '먼저 중요한 길을 찾아 문정(門庭)을 훤히 연 뒤에라야 정해진 방향이 없이 널리 배울 수가 있다'라고 하였다. 이는 도(道)를 보는 것을 먼저 하고 학문을 뒤로 돌린 것으로 학문 방법을 거꾸로 한 것이다. 이는 불교의 돈오법(頓悟法)이지 공자의 가르침이 아니다.[37]
허목은 이이가 당쟁을 조절하는 것처럼 행세했지만 '율곡은 한갓 큰 것을 이기려는 굉장한 논의를 갖고서 자신이 (싸움에서) 이기기만을 힘썼다.[37]'며 이를 부인하였다.
백호 윤휴
율곡 이이가 성학집요(聖學輯要) 서문에서 말하기를 '먼저 요로(要路)를 찾아서 문정(門庭)을 확실히 연 후에 정해진 방향 없이 널리 배우라'고 했는데, 이 말은 크게 잘못되었다. ...(이하 중략)... 율곡의 말처럼 한다면 근본을 세움이 확실하지 못하고 방향이 정해지기도 전에 요로와 문정을 얻게 되는 것이니 이 무슨 말인가? ...(이하 중략)... 이는 불가(佛家)의 거꾸로 배우는 방법이지 공자의 가르침이 절대 아니다.[37]
허목과 윤휴율곡 이이[37] 남인 중에서 율곡과 우계의 문묘 종사를 반대한 핵심 인물들은 미수 허목과 고산 윤선도, 백호 윤휴[37] 어린 시절 한때의 방황을 이들은 이해하지 않았다.[37] 허목, 윤휴 등이 이율곡을 학자가 아니라 불교 승려라고 몰고가자 분노한 송시열
성격은 솔직하였으며, 그는 위선과 가식을 극도로 혐오하여 꾸며서 말하기를 거절하였다.
그러나 도덕과 윤리와 예절이라는 이름으로 가장된 위선과 형식, 겉치례가 팽배한 사회에서 율곡의 이러한 사물의 본질에 입각한 정직한 자세는 통용되기 어려웠다.[11] 율곡의 이러한 사물이나 인간에 대한 정직한 자세는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켜 당시 동료는 물론 선배와 원로대신들로부터도 미움을 사 오국소인誤國小人이라고까지 지탄을 받았다.[11]
주로 이황과 서경덕의 문인이었던 동인과 남인, 북인은 그가 18세에 불교에 입문했다가 환속한 점과, 그의 할아버지가 윤원형의 동료인 이기
성삼문의 백이 숙제 비판 역시 그르다며 백이 숙제도 옳고 주 무왕 역시 옳다는 양시론 역시, 대중을 현혹하고 혹세무민하려 한다는 이유로 동인과 남인
문묘에 배향되어 있으며, 갑술환국경기도 파주시에는 그의 위패와 영정이 봉안돼 있는 서원인 자운서원과 여생을 보낸 누각 화석정문회서원파주 이이 유적(坡州 李珥 遺跡)이 2013년 2월 21일 대한민국의 사적
율곡 이이가 썼다고 예언서로 전해지는 '칠언고결','옥룡자청학동비결','오백론사비기' 등이 있다.[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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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이름을 가진 주석에 제공한 텍스트가 없습니다이양숙, 덕수 이씨,그륜델 ,독일어 번역, 출판
1:《 율곡선생 행장기 Ein Stern im fernen Osten der koreanische Gelehrte Yul-Gok》 《Gründel, 2004 독일》
ISBN 3-00-013843-9
2:《 격몽요결 Wegweiser für die unwissende Jugend von Gelehrte Yul-Gok》《Gründel,2005 독일》 ISBN 3-00-0115576 {{isbn}}의 변수 오류: 유효하지 않은 ISBN-7
3:《 율곡선생 의 금강산 시 Lyrische Reise in das Diamanten-Gebirge Koreas, Geum Gang san Shi》 《Gründel, 2007독일》 ISBN 3-00-0174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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