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개교한 <섬학교>는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섬들을 걸으며 사유하고, 소통하며 배우는 학교입니다. 섬학교의 섬 여행은 다리나 제방 등으로 육지와 연결되지 않고 온전히 바다 위에 있는 섬들만을 답사합니다. 크든 작든 섬에서의 이동 수단은 가급적 두 발에 의존합니다. 섬 여행은 가급적 월 1회 떠나며, 작은 섬은 걸어서 일주, 큰 섬의 경우 섬의 가장 걷기 좋은 길 걷기를 기본으로 합니다.
섬에 남아있는 문화유적, 유배지, 당산, 어부림, 마을 숲, 당집, 사찰, 설화의 무대 등도 답사합니다. 해상 경관이 좋은 섬은 어선을 이용해 해상 일주도 하며, 마을 안길을 산책하기도 합니다. 또 답사 간 사람들끼리만 어울리다 오면 별 의미가 없습니다. 섬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섬과 소통합니다. 섬의 토속 음식 맛보기, 섬 노인들로부터 특산물 구매하기 등으로 섬에 조금이라도 보탬을 주고 오도록 합니다.
▲ 금오도 '비렁길'...영혼을 맑게 씻어준다. ⓒ섬학교
강제윤 교장선생님은 1988년 계간 <문학과 비평> 겨울호로 등단했습니다. 서남해의 아름다운 섬 보길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뭍으로 이주해 살다 성인이 된 뒤 다시 고향 섬으로 돌아가 10여 년을 살았습니다. 보길도 시절에는 보길도의 숲과 하천, 고산 윤선도 유적지를 파괴하고 대형 댐을 건설하려는 토목세력에 맞서 33일간 단식으로 섬을 지켜내기도 했습니다.
2005년 보길도를 떠난 뒤에는 한국의 모든 유인도(500여 개)를 걸어서 순례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6년째 섬들을 걷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200여 개의 섬을 걸었고 여전히 섬을 걷고 있습니다. 프레시안에 <섬을 걷다>, 한겨레에 <섬에서 만나다>를 연재했으며, <섬을 걷다> <그 별이 나에게 길을 물었다> <보길도에서 온 편지> <숨어사는 즐거움> <올레, 사랑을 만나다>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 않는 나라> <자발적 가난의 행복> 등의 저서가 있습니다.
▲ 일찍이 신석기시대부터 둥지를 틀고 살아왔다. ⓒ여수시
교장선생님으로부터 답사지인 여수 <금오도>와 <향일암>에 대한 설명을 들어봅니다.
<황금(金) 자라(鰲)의 섬, 금오도>
사람은 무한하지 않으나 유한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순간인줄 알면서도 영원처럼 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또한 삶이겠지요. 사람은 무한과 유한 사이를 끊임없이 길항합니다. 무한과 유한, 그 경계에서 꽃처럼 피었다 지기를 거듭합니다. 꽃입니다. 이제 다시 꽃 시절입니다. 저 어둡고 긴 겨울의 장막을 뚫고 피어오른 꽃들. 오늘 낭창하게 흐드러진 꽃의 무게에 겨워 섬의 나무들은 꽃 몸살을 앓지만 덕분에 산과 들은 불 밝힌 꽃등으로 환합니다. 저 꽃 시절도 순간이겠지요. 하지만 꽃은 순간이 곧 영원입니다. 영원은 순간을 통해서만 그 실체를 드러냅니다.
황금(金) 자라(鰲)의 섬. 다도해 해상국립공원 금오도(金鰲島)는 불과 1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호환(虎患) 때문에 주민들이 당제를 올렸을 정도로 골이 깊고 산세가 장엄합니다. 사람과 선녀의 애절한 사랑이 깃든 옥녀봉과 신랑봉처럼 금오도의 산은 골골이 신화와 전설의 무대이기도 합니다. 최근에는 여수시에서 그 산 골짜기와 절벽에 걷기 길을 만들고 <비렁길>이라 이름 지었습니다. '비렁'은 '벼랑'의 전라도 여수 말입니다.
그 비렁길에서 끝없이 펼쳐지는 다도해 풍경은 가히 선경이라 이를 만합니다. 금오도 함구미 선착장에서 장지까지 18.5km. 비렁길은 가는 내내 청옥 빛의 바다와 기암괴석으로 인해 숨이 막힐 지경입니다. 길은 하늘로 이어진 듯도 하고 바다로 이어진 듯도 합니다. 가히 금오도의 하늘길이고 바닷길입니다. 산길이지만 비렁길은 잘 정비되어 어린아이라도 능히 걸을 수 있을 정도로 평탄합니다. 금오도는 그 생김이 금빛 자라와 같다 해서 금오도(金鰲島)란 이름을 얻었다 합니다. 옛날에는 국영 사슴 목장이었고 임금의 관을 만드는데 사용되는 소나무인 황장목을 길러내는 황장봉산이기도 했습니다.
여수시에서는 2012년 세계 해양엑스포를 유치하면서 여수관내의 섬들을 연결하는 다리박물관 사업을 계획한 바 있습니다. 그래서 이미 19개나 되는 여수의 섬들이 육지와 연결되고 있거나 연결중입니다. 다리가 생긴 섬들은 육지와 교통이 편리해졌지만 대신 섬의 정체성을 잃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금오도 주민들은 육지가 되는 것을 거부하고 금오도를 섬으로 남겨놓았습니다. 초창기에는 섬 주민들 대다수가 연육교 공사에 찬성했지만 섬의 정체성을 잃고 몰락한 타 지역의 사례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끝내 섬으로 남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참으로 고맙고 아름답고 현명한 선택입니다.
꽃비 내리는 봄날, 금오도 우실마을 할머니들은 방풍밭에 나와 방풍나물을 뜯습니다. 금오도의 밭이란 밭은 방풍과 취나물, 머위나물, 나물들 천국입니다. 방풍을 뜯던 할머니 한 분, 지나가는 나그네에게 말을 건넵니다. "천지가 만지가 꽃이요." 그렇습니다. 천지가 꽃이고 만지가 꽃입니다! 할머니가 방풍나물 하나를 건네줍니다. "좀 잡숴 보시오. 우리는 잘 모르지만, 텔레비전서 좋다 안 합디야." 오늘 이 방풍밭에서는 할머니 세 분이 일하십니다. 한 할머니는 밭주인이고 두 할머니는 품앗이를 나왔습니다. 미나리과에 속하는 방풍(防風)은 원래 해변 모래밭이나 바위틈에서 자라는 식물입니다. 예부터 맛과 향이 좋아 잎은 나물로, 그 뿌리는 차와 약재로 애용되어 왔습니다. 아이들 머리가 좋아진다 해서 태교 음식에 쓰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중풍이나 산후풍 예방에 약효가 뛰어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름도 방풍이지요.
금오도는 여수에서 방풍나물 재배가 가장 많은 지역입니다. 금오도에 방풍 재배가 본격화된 것은 불과 오륙 년 전. 방풍이 값비싸고 약효가 뛰어난 나물이라는 방송을 본 어떤 이가 해변에 자생하는 방풍 씨앗을 받아다 재배를 시작했고, 그것이 급기야 금오도 전체로 퍼져 나갔다 합니다. 밭주인 할머니는 풍에도 좋지만, 당뇨에도 좋다고 방풍 자랑에 입이 마릅니다. 당뇨가 있는 할머니는 직접 효과를 봤다는군요. "입이 마르드만 방풍 즙을 내먹으니 입 마른 게 없어져 부러."
▲ 춥고 긴 겨울의 장막을 뚫고 피어오른 대자연의 길 ⓒ여수시
금오도는 섬인데도 어업보다는 농사가 많습니다. 전에는 고구마가 주 작물이었는데 방풍 재배가 시작된 뒤로는 고구마를 거의 심지 않습니다. "고구마 숭거 봐야 일 년에 몇 십만 원 왔다 갔다 한디, 방풍은 한철에 2년 고구마 농사한 것보다 나서 부러." 점심시간. 밭주인 할머니의 며느리가 도시락 세 개를 싸왔습니다. 고등어조림과 김치, 도시락에는 계란 후라이도 하나씩 올라가 있습니다. "어서 오씨오. 같이 한술 뜹시다." 할머니들이 밥을 같이 먹자고 하십니다. 나그네도 염치 불고하고 수저를 듭니다. 다디단 들밥. 점심시간은 모처럼 휴식시간이기도 합니다. 부동산 투기바람이 머나먼 섬까지도 들쑤시고 다닙니다. 서울 사람들이 땅만 나왔다 하면 사재기에 여념이 없다 합니다. "빈 밭이 나기가 바쁘게 사 불어. 빈 집도 나기가 바쁘게 사 불어. 서울 사람들이 사 불어. 다 사 불어."
방풍밭은 언덕에 있고 이 언덕에서는 금오도의 중심인 우실마을이 한눈에 다 보입니다. 할머니들은 밥을 먹으면서도 동네 돌아가는 일을 훤히 내려다보고 일일이 참견하십니다. 마치 중계방송 같습니다. 눈도 좋으시지. "두 마리는 밭매네." "저게 뭐 짐승이야. 한 마리 두 마리 하게. 한 사람 두 사람이지." 우체국 뒷밭에서 일하는 사람을 보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저 차는 야물게 한 차 실었다." "돈 벌었다 하고 들고 달린다." 방풍나물을 가득 실은 트럭이 배 시간에 맞추기 위해 속도 내는 것을 보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오리들이 와서 숭어 잡아 자치네. 숭어 덤불이 왔어." 숭어 떼가 몰려든 바닷가로 물오리들이 날아가 숭어를 잡아챕니다. 숭어가 보이기야 하겠습니까. 이즈음에 해변으로 몰려드는 것이 숭어라는 것을 짐작으로 아시는 게지요.
"안 아프고 살다 가야지." "팍 죽으면 좋게. 서서히 죽는디야." "그래도 죽으면 좋지. 묵고 놀게. 사람 한나 못 친단가. 아이가 아이가 곡소리만 하면 됐지." "장사 지내는 건 자식들이 와서 하고 우린 먹어주기만 하면 되지." 노인당에는 구순이 넘은 할머니들이 네 분이나 계십니다. "문길 어메가 구십여섯. 검바구 함씨가 문길 어미 담이고." "젤로 나이 많은 함씨나 하나 죽으면 좋겠네."
▲ "자식들 대학 공부시키고 그래 봤자 누가 부모 모실라고 한당가."ⓒ섬학교
고령의 할머니들을 위해 일흔 넘은 '젊은' 할머니들이 날마다 가서 밥을 해 드린답니다. 그래서 하시는 푸념이지요. 자식들이 모시지 않으니 고령의 할머니들은 날마다 노인당에 나와 밥을 드시는 것이 편하지만, 당신들 또한 봉양받을 나이에 꼬박꼬박 밥을 해 드려야 하는 일이 여간 고되지 않습니다. "자식들 대학 공부시키고 그래 봤자 누가 부모 모실라고 한당가." "자식 많은 사람들이 더 못 모시데. 저 며느리가 모시겠지, 저 며느리가 모시겠지 하고 미루다가." "판판이 보면 자식 많은 사람들이 다 요양원으로 가 부리데." "그래야 싸울 일 없지." "함씨도 요양원 갈 일만 남았다." "나는 죽어도 안 가."
밭주인 할머니가 눙을 칩니다. "여기 함씨들 다 영감 없는 사람들이요. 어디 중신 한번 서보소." "문디 소리도 다 하네." 두 할머니가 동시에 밭주인 할머니를 향해 돌팔매질하는 시늉을 합니다. 휴식이 끝나고 할머니들은 다시 밭으로 들어갑니다. 그때 한 할머니 문득 '은총'을 받으셨는지,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한 말씀. "날도 좋은데 하늘로 딱 올라가 버렸으면 좋겠어." 꽃비는 내리지, 하늘은 푸르지, 봄볕은 따뜻하지. 승천이라도 할 수 있을 듯이 기분 좋은 봄날입니다.
함구미마을, 방파제 주변에는 여행객이 떼로 몰려 웅성거립니다. 무슨 구경거리라도 생긴 걸까.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 보니 할머니 한 분이 맨손으로 물고기를 잡고 있습니다. 썰물 때, 물이 빠지자 방파제 안에는 작은 물웅덩이가 생겼습니다. 때를 놓쳐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물고기들이 웅덩이에 갇혔습니다. 어린 숭어 떼. 돌로 쌓은 방파제 석축 사이에는 그물이 쳐져 있습니다. 물고기들은 함정에 빠진 것이지요.
독 안에 든 물고기들, 할머니는 양동이를 들고 그저 주워 담기만 하면 됩니다. 할머니 손길을 피해 달아나는 숭어들. 힘껏 내달려봐야 물 빠진 갯벌일 뿐이지요. 할머니를 따라 나온 손녀아이도 맨손으로 숭어를 잡습니다. 옛날에 섬이나 바닷가에서 흔했던 원시 어로인 돌살, 돌 그물과 비슷한 어법입니다. 물고기가 귀해진 요즘은 좀체 보기 드문 풍경이지요. 오늘 뭍에서 온 여행객들은 어업 박물관이 살아 움직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섬 여행이 가져다준 행운입니다.
<'기도빨' 센 향일암과 관음신앙>
해마다 새해 첫 일출의 장엄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드는 도량. 향일암은 대한불교 조계종 제19교구본사 화엄사 말사입니다. 다리로 연결되어 이미 뭍이 된 여수 돌산도 금오산 자락에 있습니다. 향일암은 가파른 절벽 위에 서 있고 그 아래는 가없는 바다가 펼처져 있습니다. 암자는 고통의 바다를 건네주는 자비의 배[苦海慈舟]입니다. 그 바다의 섬들 또한 그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중생의 간절한 염원을 담고 떠 있습니다. 향일암 왼쪽 바다에는 중생(衆生)의 서원(誓願)에 해수관음보살이 감응했다는 감응도, 정면에는 부처가 머물렀다는 세존도, 오른쪽 바다에는 아미타불이 나투었다는 미타도가 있습니다.
1984년 2월 29일 전라남도문화재자료 제40호로 지정된 향일암은 <여수군지>와 <여산지>에 따르면 659년(백제 의자왕 19) 원효대사가 원통암(圓通庵)이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다 하고 또 950년(고려 광종 9) 윤필(允弼)거사가 이곳에 수도하면서 원통암을 금오암(金鰲庵)이라 개칭하였다고도 합니다. 조선시대 1713년(숙종 39)에 돌산 주민들이 논과 밭 52두락을 헌납한 지 3년 뒤인 1715년에 인묵대사(仁默大師)가 지금의 자리로 암자를 옮기고 <향일암>이라 했다 합니다. 1986년 대웅전과 관음전·용왕전·삼성각·종각·요사채·종무실을 새로 지었는데 2009년 12월 20일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로 대웅전과 종각·종무실이 전소되고 말았습니다. 지금은 다시 복원했지요.
▲ 도량 안은 소원을 이루게 해달라는 기원으로 가득하다.ⓒ향일암
향일암은 한국 불교의 4대 해수관음 기도처로 유명합니다. 남해 보리암, 석모도 보문사, 낙산 홍련암과 함께 소위 '기도빨'과 '영빨'이 세기로 유명한 곳이지요. 나한 기도처로 유명한 운문사 사리암까지 포함해서 소위 기도빨을 잘 받는다는 암자들의 특징은 대부분 바위산이나 바위 위에 있다는 점입니다. 바위에서 나오는 에너지 덕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런 때문인지 이런 기도처들에 가면 도량 안은 온통 소원을 이루게 해달라는 기원으로 가득합니다.
천정에는 빈틈없이 연등이 달리고 기도객들은 불상 아래서 수도 없이 절을 합니다. 시주를 하면 도량에서 기도를 대신해 주기도 합니다. 사람들의 기원은 대체로 가족건강과 사업 번창, 학업 성취 등의 소망이 가장 많습니다. 돈을 많이 벌게 해주고, 자녀들 좋은 대학 가게 해주고, 가족들 건강히 오래 살게 해달라는 소망들. 소망은 이 시대 사람들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가치가 무엇인지 확연히 보여주는 증표입니다. 돈과 학벌과 건강. 연등에 걸린 신도들의 소원을 이루어 달라고 스님들은 조석으로 기도를 대리합니다.
기도란 무엇일까요? 내 안에 신이 있고 내 안에 불성이 있다면 기도란 내 안의 부처와 신에게 기원하는 것이 아닐까요. 내가 본래 부처이니 기도하는 것도 나이고 소망을 이루어 주는 것도 나입니다. 그러므로 기도처에서의 기도는 소망을 이루기 전에 자기 스스로를 인간 정신의 높은 곳으로 이끄는 고귀한 행위입니다. 정신의 고양을 통해 스스로 신과 불보살의 경지에 이른 다음에야 나는 나의 기도를 이루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기도를 누군가 대신 해준다면 그것도 기도라 할 수 있을까요? 절이든 성당이든 교회든 어느 기도처에 가나 문득 그런 의문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향일암에 이르는 길은 가파릅니다. 향일암의 해수관음보살을 친견하려면 험한 산길을 오르는 수고를 해야 합니다. 대게 영험하다는 기도처들은 높은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산중턱이나 언덕의 끝자리에 있습니다. 그런 기도처의 창설자들은 적어도 인간 심리의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는 통찰력을 지녔던 것이 분명합니다. 기도가 자기 정화 의식의 정수란 사실을 그들은 이미 눈치 챈 것이겠지요.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땀 흘리며 높은 곳으로 오르는 동안 몸은 가벼워지고 마음의 찌꺼기들은 걸러집니다. 몸과 정신은 자연스럽게 정화되고 고양됩니다. 그러므로 마침내 기도처에 도달한 순간 기도객들은 이미 기도의 반은 성취하게 됩니다. 기도가 시작되기도 전에 영험이 먼저 나타나는 것이지요. 그러니 바위의 에너지가 아니더라도 영빨이 세고 기도빨이 센 것은 그 때문일 듯합니다.
오랜 세월 해수관음에 대한 이 땅 사람들의 신심은 투철했습니다. 관음신앙은 미륵신앙, 지장신앙, 정토신앙 등과 함께 불교의 대표적 타력신앙입니다. 관음신앙은 한국, 일본, 중국, 티베트 등에서 특히 활발합니다. 티베트에서는 달라이 라마를 관음보살의 현신으로 여깁니다. 티베트의 포탈라궁은 관음보살이 상주한다는 보타낙가산을 조형화한 것이지요.
관음보살은 범어(산스크리트어)로는 '아바로키테스바라'. 한자로 번역한 것이 관음, 광세음, 관세음, 또는 관자재, 관세자재 보살입니다. 관음보살은 세상의 음성을 관찰하여 중생들을 '괴로움에서 건져주고'[悲] 중생들에게 '즐거움을 주는'[慈] 자비(慈悲)의 화신이라 합니다. 하지만 이 견뎌야만 하는 땅, 사바[忍土]세계 어디에 자비의 화신은 계시는 것일까요. 뭍 중생들의 바람과는 달리 언제나 소망은 끝이 없고 성취는 기약 없습니다. 그렇게 수도 없이 많은 생이 오고 갔을 것입니다.
▲ 푸른 5월...여수 금오도와 안도를 거쳐 향일암으로 ⓒ섬학교
섬학교 제3강 여수 <금오도>와 <향일암>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5월 5일(토)>
06:30 서울 출발(6시 20분까지 서울 강남 압구정 지하철역 6번 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
주차장에서 <섬학교> 버스 탑승바랍니다.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11:00 여수 도착 11:00-12:00 돌산대교와 돌산도 버스 투어 12:00 돌산도 신기항 출항 12:25 금오도 여천항 도착 12:40-13:40 점심식사(우학리 <여남식당> 해물정식 : 다양한 해산물과 해초음식) 13:40 첫째날 금오도 비렁길 걷기(8.5km) 우학리 내외진→ 학동 마을길→ 직포출발→ 촛대바위→ 굴등전망대→ 두포마을
→ 안도 두멍안(마을해변길)→ 버스 출발(10시20분) -> 여천 선착장 11:00 연천 선착장 출항 11:25 여수 돌산 신기항 12:00-13:00 향일암 탐방 13:30 점심식사(여수 <봉정식당> 서대회무침에 쌔미탕, 쏨팽이탕, 볼락매운탕 중에서 당일 맛있는 생선탕으로...) 14:30 서울 향발
[학습자료]
[금오도 개요] 전남 여수시 남면 금오도는 금오열도의 중심 섬이다. 면적 26.99㎢, 해안선 64.5㎞. 여수 남서쪽에 있으며, 북쪽에 돌산도, 북서쪽에 개도, 남쪽에 소리도가 있다. 한국에서 21번째로 큰 섬이며, 돌산도·화태도·월호도·대두라도·소두라도·나발도·횡간도 등과 함께 금오열도를 이룬다. 우학리·두모리(斗母里)·유송리(柳松里)·심장리(深張里) 등 4개의 법정 리가 있다. 행정리는 14개, 자연부락은 33개다. 1970년대 2만여 명에 달하던 인구는 계속 감소하여 현재 831가구 1582명(2012년)에 불과하다. 유송리 여천(汝泉)마을 동쪽 바닷가에서 조개더미 유적이 발견되어 금오도에도 신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사실이 증명됐다. 조개더미 유적에서는 토기류 14점이 출토됐다.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금오도에 대한 기록들은 대부분 바닷길과 왜구의 침입, 소나무를 기르던 봉산(封山) 등에 관한 내용이다. 조선시대 금오도는 황장봉산(黃腸封山)이었다. 금오도에 대한 정보들은 1885년 봉산이 해제되기 전까지 금오도에 사람이 살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봉산이 해제되고 나서야 당시 관의 포수였던 박씨가 아들 삼형제를 데리고 섬에 들어가 두포에 정착하면서 본격적인 주민정착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1995년에는 금오도 개척 100년 기념비가 세워지기도 했다. 하지만 필자가 찾아보니 <조선왕조실록> 영조 8권, 1년(1725 을사/청 옹정(雍正) 3년) 11월 26일(경신) 5번째 기사에는 왕의 명령으로 금오도에 경작이 이루어졌다는 내용이 나온다. "금오도(金鰲島)에 백성이 들어가 경작하도록 명하였으니, 종부시 제조(宗簿寺提調)의 계청(啓請)에 따른 것이다." <영조 1년(1725년)> 1885년 개척설은 고종 26년 기사에 금오도가 몇 해 전에 개척한 곳이라고 나오는 데서 비롯된 것이 아닌 가 싶다. "순천부(順天府) 금오도(金鰲島)는 몇 해 전에 새로 개척한 곳인데..."<고종 26년(1889년)> 하지만 <조선왕조실록> 영조1년 기사에 따른다면 금오도가 1885년 이전에도 사람들의 거주가 다시 시작됐을 가능성이 크다. 새로운 연구가 필요할 듯하다. 금오도는 1396년까지는 군천면에 소속되었고, 1479년에는 전라좌수영의 관할 하에 있다가 1896년에 돌산군 금오면에 편입되었다. 1914년에는 여수군에 소속되었고, 1917년 금오면이 남면으로 개칭되었다. 1949년에 여천군에 편입되었고, 1998년에 여천군과 여수시가 통합되어 현재는 여수시 소속이다. 1981년 돌산도·안도와 함께 다도해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금오도 지구에 속한다. 최고점은 북쪽에 있는 대부산(382m)이며, 그밖에도 남쪽에 망산(344m), 동쪽의
▲ 걷는 길은 골골이 신화와 전설의 무대이기도 하다.ⓒ여수시
옥녀봉(261m)등 산이 많다. 1월 평균기온 1.1℃ 내외, 8월 평균기온 25.8℃ 내외, 연강수량 1,180㎜ 정도이다.
[안도] 금오도가 육지가 되는 연륙교 건설을 포기하고 2009년 다리를 놓아 연결한 금오도 남쪽 끝의 이웃 섬이다. 255가구 481(2012년)명의 주민이 산다. 섬이 기러기 모양과 같다고 하여 기러기 '안(雁)'자를 써 안호(雁號)라 하다가, 1910년 안도(安島)로 개칭되었다고 한다. 바로 곁에는 솔개 모양의 섬 소리도(鳶島)가 있다. 금오도 또한 자라처럼 생겼다 해서 생긴 이름이고 보면 이 부근의 섬들은 동물의 형상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 특징이다. 통영의 섬들 이름이 불교에서 유래한 것과 대비된다. 안도는 또 금오도와 소리도 사이에 들어있는 섬이라 해서 안섬이라고도 부른다. 안도리 마을 앞바다는 인공의 호수 같다. 바다에서 들어가는 입구는 좁은데 마을 앞으로 가면서 넓어지는 S자 모양의 특이한 지형이다. 천혜의 대피항이다. 섬사람들은 이 포구를 두멍안이라 부른다. 하늘에서 안도리 마을을 보면 한반도 모양으로 생겼다 해서 화제가 되어 언론에 소개되기도 했었다. 안도는 신라 말 장보고 선단을 따라 당나라에 불법을 구하러 갔던 일본인 승려 엔닌(圓仁)이 일본 귀국 길에 들렀던 섬으로 기록되어 있다.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에 따르면 그는 장보고 휘하 김진(金眞)의 배를 타고 가다 안도에 들렀다. 엔닌이 거친 해로는 장보고 선단의 항해 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300년경 정씨(鄭氏) 내외가 제일 먼저 정착하였다고 전해진다. 안도리 마을에는 정씨 내외의 위패를 모신 제당도 있다. 1880년에 대화재가 났는데 가옥 100여호(일설에는 300여 호라고도 함)중 1채만 남고 전소 돼버려 주민들 대부분은 금오도로 이주해 가버렸고 이후 다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1992∼93년에는 6000년 전쯤으로 추정되는 조개더미 유적이 발굴됐다. 발굴에서는 다량의 유구와 500여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질그릇 조각들과 돌도끼, 대패날, 숫돌, 돌톱 등이 발견됐고 2007년 안도대교 공사를 하면서 조가비 팔찌를 찬 인골 2구가 발굴되기도 했다. 안도는 현대사의 비극인 양민학살의 현장 중 하나이기도 하다. 1948년 10월19일 여순사건의 와중에 진압군 김종원 대위가 안도 이야포로 상륙해 좌익 색출을 명목으로 마을 청년 12명을 학살했다. 일제 패망 후 도주한 일본인으로부터 물려받은 정치망 어장을 안도마을 공동체에 빼앗긴 이웃 섬의 한 주민의 무고로 진압군이 들어와 학살의 만행을 저질렀다 한다. 또 한국전쟁 때는 350여명의 피난민이 배를 타고 이야포로 들어와 주민들의 환대를 받았는데 미군 제트기 4대가 피난선을 폭격했고 국군복을 입은 자들이 피난선에 기름을 붓고 불을 질러 피난선이 침몰하고 피난민 150여명도 몰살을 당했다 한다. 분단의 비극과 양민 학살의 만행은 남쪽 끝의 작은 섬도 비껴가지 못했으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안도 마을 뒤에는 신성한 당산이 있는데 지금은 당산공원이 되어버렸다. 상록수 거목이 울창한 당산 숲은 잘 보존되어 있으나 체육 기구를 들여놓는 과정에서 당집은 어이없이 허물어지고 말았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또한 당산 앞에는 인도교 공사가 한창이다. 마을을 거치지 않고 안도대교에서 바로 당산까지 이르는 다리를 놓는 공사인데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막가파식 개발이다. 안도대교에서 당산까지는 도로를 따라 걸어도 20분이면 충분하다. 다리가 과연 누구를 위한 다리인지 의심스러운 대목이다.
[금오도의 황장봉산] <조선왕조실록> 세종 30년 기사에 금오도는 봉산으로 지정되어 벌채를 금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금오도가 황장봉산으로 지정된 것은 한 참 후의 일인 듯하다. 영조 30년(1754년) 기사에 비로소 금오도(金鰲島)는 황장목(黃腸木)을 봉(封)한 곳이라는 기록이 나온다. 조선왕조는 궁궐의 재목이나 왕의 관(棺)을 짜거나 전선(戰船)을 만들 재료인 소나무를 기르고 가꾸던 산을 봉산으로 묶어서 벌채를 금했다. 또 왕이나 왕비의 능묘를 보호하고 포의(胞衣. 태아를 싸고 있는 막과 태반)를 묻기 위하여 정해진 태봉봉산(胎封封山), 황장목만을 생산하기 위한 황장봉산(黃腸封山), 위패를 만드는데 쓸 밤나무재목을 생산하기 위한 율목봉산(栗木封山) 등을 따로 두기도 했다. 금오도 같은 황장봉산은 왕의 관을 짜는 데 쓸 황장재를 생산하기 위한 목적으로 벌목을 금한 산이다. 황장이란 소나무
▲ 청옥 빛의 바다와 기암괴석이 마음을 사로잡는다. ⓒ섬학교
가 오래되어 줄기의 속이 성숙해지면서 붉은색을 띠게 되어 재질(材質)이 좋아진 것을 말한다. 병균에 대한 저항력이 강하며, 대단히 아름답다.
[금오도란 이름의 유래] 섬에 삼림이 울창하여 검게 보였기 때문에 거무섬이라 부르던 것을 비슷한 한자로 표기하면서 금오도(金鰲島)가 되었다고도 하고 금빛의 거북을 닮아서 지어진 이름이라고 하기도 한다. 금오도는 한때 거마도(巨磨島)라고도 하였는데 옛 지도 <청구도(靑邱圖)>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는 거마도로 표기되어 있다.
[두모리 고인돌군] 금오도 두모리에 청동기 시대 대표적인 돌무덤인 지석묘 7기가 있다. 여수 지역의 고인돌은 남방식 고인돌이 변화한 것으로, 넓고 판판한 1매의 상석을 지석이 받치고 있는 형태를 띤다.
[여천마을 조개더미] 금오도 유송리 여천마을에서 신석기시대 조개더미가 발견되었다. 조개더미란, 선사시대의 인류가 버린 조개껍질이 쌓여 이루어진 퇴적층이다 여천마을 조개더미는 동서 30m, 남북 15m 정도다. 빗살무늬토기, 점줄무늬토기, 겹아가리토기 등 토기류 14점이 출토되었다.
[용두] 지형이 용머리처럼 생겼다고 해서 용두바위라고 한다.
[송고] 마을 전체가 송림(松林)으로 우거져 '솔고지'라 부르다가 송고(松高)라 했다 한다. 1879년경 소라면 달천 살던 김해김씨(金海金氏) 김양단이 조정의 명으로 금오도에 사슴사냥을 나왔다가 이곳을 발견하고 가족과 함께 이주해와 처음 정착하게 되었으며, 이후 밀양박씨(密陽朴氏), 나주김씨(慶州金氏) 등이 이주(移住)해와 마을이 형성되었다 한다.
[송고 당제] 1903년 송고마을 사람이 호랑이에게 잡아먹힌 뒤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당제가 열리기 시작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당제는 매년 정월 대보름에 열린다. 당제는 상당과 하당, 선창가 세 곳에서 거행된다.
[내외진] 마을포구의 바깥쪽을 '밧진개', 안쪽을 '안진개'라 하는데 두 지명에서 한자씩 따서 내외진(內外軫)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1860년 금오도 옆의 섬 안도에서 화재(庚申大火災라고 함)가 발생했을 때 그곳에 살던 함양여씨(咸陽呂氏) 여웅섭(呂雄俠)이 당시 봉(封山)으로 주민 거주가 금지되었던 이곳에 몰래 숨어들어와 정착했다. 이후 안도에서 김해김씨(金海金氏) 김재화와 돌산도(突山島)에서 밀양박시(密陽朴氏) 박흥언이 이주해왔다. 이후 1885년 봉산(封山)이 해제 되면서 죽산안씨(竹山安氏) 안무서와 성주배씨(星州裵氏) 배윤영등이 이주해와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대유(大柳)] 개척 당시 마을 어귀에 버드나무 숲이 우거져 있어 '버들개'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는데, 그후 마을이 커지면서 '큰버들개'와 '작은버들개'로 분리되었다 한다. 지금도 섬사람들은 대유가 아니라 '큰버들개'라고 부르고 있다. 1869년경 돌산(突山)에서 살던 천안전씨(天安全氏) 전덕순이 마을 앞의 작은 섬 수항도(首項島)에 가족을 데려와 살다가 버들개 마을로 몰래 숨어 들어와 정착을 시작했다 한다. 이후 1872년경 돌산에서 성주배씨(成州裵氏) 배근오가 이주해 왔고 동학 혁명에 가담했다가 피신처를 찾아 숨어 들어오는 사람들이 생기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소유(小柳)] 처음에는 대유(大柳)와 함께 '버들개'로 불리다가 '큰버들개'와 '작은버들개'로 분리되었다. 지금도 주민들은 '작은버들개'라고 부른다. 1838년경 돌산도 봉양에서 살던 밀양박씨(密陽朴氏) 박주언이 정착했고 이후 성주배씨(成州裵氏), 곡성마씨(谷城馬氏) 등이 이주해와 마을이 형성되었다 한다.
[두포] 금오도가 봉산(封山)이었을 당시 사슴 수렵차 내려오는 관포수들이 처음 도착한 포구라 하여 '첫개'(初浦)라 부르다 두포(斗浦)로 바뀌었다 한다. 관의 도포수(都砲手)였던 박치안(朴致安)이 1885년 처음 입주했고 같은 해 금오도 조정에서 권농관이 파견되어 지금의
▲ 길은 하늘로 이어진 듯도 하고 바다로 이어진 듯도 하다.ⓒ섬학교
두모리 1367번지에 관사를 짓고 살았고 1889년 6월 최순익(崔順益)이 초대 금오도 둔장(屯長)으로 임명받아 두포에 들어오면서 본격적인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두포는 금오도 개척의 중심지였다 한다.
[모하] 원래 목화가 잘 되되던 곳이라 '목화동'이라 했는데 후일 모하(母賀)로 바뀌었다. 마을 북쪽에 '누에머리', '석문동', 동쪽에 '사장골', '연화동'이 있다. 1885년 고흥군 외나로도 창포에 살던 김녕김씨(金寧金氏) 김승백이 금오도(金鰲島)에 입주(入住)가 가능하다는 말을 듣고 일가를 인솔하고 건너왔으나 해변가에는 이미 다른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있어 내를 따라 깊숙히 들어와 처음 정착했다 한다. 이후 전주이씨(全州李氏), 밀양박씨(密陽朴氏) 등이 이주해 오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한다.
[미포] 망산(望山)의 끝이 이 마을에 있어서 '망끄미'라고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지관(地官)이 우학리(牛鶴里)를 소라 했을 때 이 마을의 해안이 소의 꼬리에 해당된다 한 뒤 미포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지금도 사람들은 '망끄미'라고 부른다. 1850년경 화정면 사도에 살던 인동장씨(仁同張氏) 장성옥, 성철(成哲) 형제가 고기잡이를 하다 폭풍을 만나 이곳에 표류한 뒤 식솔들을 모두 이끌고 들어와 정착했다 한다. 그후 1860년 안도(安島)에 대화재가 발생하면서 김해김씨(金海金氏), 밀양박씨(密陽朴氏), 진주강씨(晋州姜氏)등 이재민들이 이주해와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심포] 금오도의 남서편 깊이 자리한 까닭에 포구가 깊다하여 '깊은 개'라 부르다 한자로 표기하면서 심포(深浦)가 되었다. 1850년경 전주이씨(全州李氏) 이풍년이 역적으로 몰려 도망 다니다 형과 함께 처음으로 이곳에 숨어 들어와 살았다 한다. 이후 1860년 안도(安島) 대화재시(大火災時) 때 김해김씨(金海金氏) 김영협(永俠)과 초계최씨(初系崔氏) 최윤경(允京)등 이재민이 이주해 오면서 본격적인 마을이 형성되었다 한다.
[여천] 마을 뒷편 대목산의 줄기가 내려오면서 두 개의 작은 봉우리 2개를 이루었는데 그 형상이 여자의 젖가슴처럼 생겼고 계곡물이 유난히 맑아 여천(女泉)으로 불리다 후일 여천(汝泉)으로 바뀌었다 한다. 1886년 돌산도에 살던 4형제중 막내인 전주이씨(全州李氏) 이영주가 아버지 사망후 이곳에 들어와 처음 정착했으며 이후 김해김씨(金海金氏), 전주이씨(全州李氏)등이 이주해와 마을이 형성되었다 한다.
[우실] 마을의 산세가 소가 누워있는 형상이라 마을은 소의 집이 되는 모양새다. 거기서 우실(牛室)이란 이름이 생겼다 한다. 1868년 화양면에 거주하던 전주이씨(全州李氏) 이화숙이 생계가 어렵게 되자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다니다 금오도의 건바위 끝 해안변에 내려 몰래 밭을 일구고 처음 정착했으며 이후 김해김씨(金海金氏), 밀양박씨(密陽朴氏)등이 이주해와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장지] 마을 전체가 남향이고 뒷산이 북풍을 막아주고 있어 처음에는 양지(陽地)마을이라 불렀다. 이후 마을 해변이 긴 자갈밭이 있어 '진작지'로 불리다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장지(張芝)마을이라 했다. 사람들은 지금도 '진작지'라 부르기도 한다. 1800년경 김해김씨(金海金氏) 양반이 부근 섬 안도(安島)에 유배(流配)되어 살다가 돌아가지 못하고 장지마을에 건너와 정착하였다고 전해지는데 현재 후손들은 없다. 1860년 안도에서 살던 김해김씨(金海金氏) 김세도가 안도 대 화재 이후 몰래 숨어 들어와 정착 했고 이어 경주임씨(慶州林氏), 전주이씨(前奏李氏)등이 이주해 오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한다.
[직포] 마을 동쪽 옥녀봉 살던 선녀인 옥녀(玉女)가 인근 모하(母賀), 두포(斗浦)마을에서 목화와 누에고치를 가져와 이곳에서 베를 짰다는 전설이 있다. 그로 인해 베틀에서 날실의 틈을 고르게 해주는 도구인 보디(보대)에서 이름을 따 '보대'라 불렀고 한자로 옮기는 과정에서 직포(織浦)란 이름으로 바뀌었다 한다. 지금도 주민들은 '보대'라 부르고 있다. 1835년 화정면 개도에서 살던 천안김씨(天安全氏) 김인준과 밀양박씨(密陽朴氏) 박운구가 몰래 숨어 들어와 처음 정착했다 한다. 현재 마을의 노송 30여 그루는 그들이 정착 당시 방풍림으로 심었던 것이라 전해진다.
[학동] 마을 동쪽 산의 모양이 학을 닮았다 해서 원학이라 부르다가 광복이후 학동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마을 서쪽에 '큰 멀리개'와 '작은 멀리개'가 있다. 1878년경 화양면 장등(長燈)에 살던 김녕김씨(金寧金氏) 김화봉 형제가 도피 차 들어왔다가 아주 숨어살게 됐다고 전한다. 이후 1880년경 삼산면 손죽도에 살던 김해김씨(金海金氏) 김유원(有元)이 들어오고 이어서 창원황씨(昌原黃氏), 밀양박씨(密陽朴氏), 경주최씨(慶州崔氏)등이 이주해와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 영원은 순간을 통해서만 그 실체를 드러낸다.ⓒ섬학교
[함구미] 마을 서쪽 대대산(大代山) 줄기 끝 부분이 용(龍)의 머리와 같이 생겼다 하여 용두(龍頭)라 불렀고 해안절벽이 아홉 골짜기의 절경을 이룬다 해서 함구미(含九味)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1885년 금오도에 민간인 입주(入住)가 허용되자 화정면 개도(蓋島)에서 살던 김해김씨(金海金氏) 김익지 부부가 배를 타고 건너와 처음 정착 했으며 이후 성주배씨(星州裵氏), 남평문씨(南平文氏), 전주이씨(全州李氏), 나주나씨(羅州羅氏) 등이 들어와 숯을 굽고 땅을 일구어 살며 마을이 형성되었다 한다. 교장 | 강제윤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가벼운 등산복/배낭/등산화/일부 풀숲 구간에선 필히 긴 바지^^), 스틱, 물통, 윈드자켓, 우비(+접이식 우산),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 차단제, 헤드랜턴(또는 손전등), 세면도구, 세수수건, 멀미약,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승선용 신분증을 꼭 지참하세요.
여수 <금오도>와 <향일암> 답사 참가비는 왕복 교통비, 숙박비, 4회 식사비, 강의비, 여행보험료, 운영비 등 포함 23만원입니다. 이 답사는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변경될 수 있으며, 기상 악화로 섬 체류가 연장되는 경우 추가비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참가 신청과 문의는 인문학습원 섬학교 www.huschool.com 문의는 전화 050-5609-5609 이메일 master@huschool.com으로 해주세요.
강제윤 교장선생님은 <섬학교를 열며>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우리는 모두 바다로부터 왔습니다. 지구 최초의 생명이 바다에서 잉태됐듯이 우리 또한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바다에서 생명활동을 시작합니다. 생명의 원천인 바다. 바다를 보면 막혔던 숨통이 트이고 평온함이 드는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어머니 바다, 그래서 프랑스어 '어머니[mère]'에는 '바다[mer]'가 들어 있고 한자의 '바다[海]'에는 '어머니[母]'가 들어있습니다. 원초적 기억이 언어를 통해 우리의 기원을 암시해 줍니다. 어머니의 품처럼 너른 바다. 우리가 섬으로 가고 싶어 하는 것도 실상은 바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 아닐런지요.
바다나 강, 호수 등의 물로 둘러싸인 육지의 일부를 섬이라 합니다. 한국에는 4,400여개의 섬이 있습니다. 그중 사람이 사는 유인도는 500여개, 나머지는 무인도입니다. 한국은 '섬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섬은 미지의 세계입니다. 방송 매체 등을 통해 섬들이 소개되고 몇몇 섬들이 피서지나 관광지로 유명세를 타면서 섬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지만 소수에 불과합니다. 여전히 대부분의 섬들은 척박함과 절해고도의 고독과 유배지, 그도 아니면 현실도피적인 낭만의 이미지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섬은 여전히 먼 곳으로만 느껴집니다. 수만 리 먼 나라들을 자유롭게 오가면서도 바로 우리 곁의 섬들을 멀게만 느끼는 것은 왜일까요. 단지 물리적 거리 때문이 아닙니다. 심리적 거리감이 더 큰 요인입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 이어져온 육지 중심의 사고에 기인한 바 큽니다. 불과 이삼십 년 전까지만 해도 육지 사람들은 섬사람들을 '섬놈'이라 부르면서 멸시하곤 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의 뿌리는 조선왕조의 폐쇄적인 해양정책에 잇닿아 있습니다. 본래 우리의 인식은 육지 중심의 편협한 틀에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옛날 이 땅의 사람들은 바다를 이용해 세계와 소통했습니다. 세계로 향하는 통로로 기능했던 바다가 단절의 바다로 전락한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입니다. 고려와는 달리 조선은 명나라의 해금(海禁)정책을 추종해 적극적인 '공도(空島)'정책을 폈습니다. 섬과 바다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 바다와 섬은 육지보다 더욱 활력 넘치는 삶의 터전인 동시에 문명교류의 중심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수백 년 동안 섬에 사람이 살지 못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계속되면서 바다와 섬은 점차 잊혀지고 버림받은 공간이 됐습니다. 사람의 거주가 시작된 이후에도 섬은 유배지로 이용되면서 고립이 심화됐습니다.
해양왕국이었던 백제나 장보고의 청해진이 바다와 섬을 기반으로 세계와 소통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1976년 거문도의 장촌마을 해변에서는 한(漢)나라 때의 화폐인 오수전이 다량 출토되었습니다. 외딴 섬처럼 보이는 거문도가 실상은 고대부터 국제해상교류의 중간 기착지였다는 증거입니다. 지난 2000년에는 흑산도의 읍동마을에서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이어진 국제해양도시의 흔적들이 확인된 바 있습니다. 고려시대 예성강 입구에 있던 벽란도는 개경에 출입하는 외국인들이 통관 절차를 밟던 국제무역항이었습니다. 고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우리는 바다와 섬을 통해 일본과 중국은 물론 동남아, 인도, 아라비아까지 소통했습니다. 이 땅이 세계를 향해 열려 있을 때 언제나 그 중심에는 바다와 섬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땅이 좁은 것은 알면서도 우리의 바다가 얼마나 넓은 줄은 잘 모릅니다. 오랫동안 좁은 땅에 갇혀 살면서 몸도 마음도, 시야도 폐쇄적으로 변해버린 까닭입니다. 섬에서는 우리가 얼마나 넓은 바다의 주인공인가를 금방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섬에서 바라보면 대륙 또한 바다에 둘려 쌓인 큰 섬에 지나지 않습니다. 육지 중심의 사고를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충분히 크고 드넓습니다. 섬은 한없이 넓은 바다를 향해 무한히 열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섬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개방성과 열린 사고를 되찾기 위한 최적의 사유공간입니다. 물론 섬은 숙명적으로 외롭습니다. 하지만 섬사람들에게는 외로움이나 슬픔마저도 흥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해학과 가락이 있습니다. 섬에서는 슬픔도 가락을 타면 흥이 됩니다.
오랜 세월 섬들은 제각각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이어 왔습니다. 곁에 있는 섬도 같은 섬은 없습니다. 하지만 외래문물의 유입으로 많은 섬들이 원형질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멀지 않은 시간에 이 나라 많은 섬들이 사라질 것을 예감합니다. 이미 많은 섬들이 육지와 연결되었거나 연결되고 있습니다. 다리가 놓이면 섬은 더 이상 섬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배를 타고 섬으로 가는 마지막 세대가 될지도 모릅니다. 끝내는 소멸해 버릴 섬들, 섬의 풍경들. 더 늦기 전에 섬으로 가야 할 이유입니다.
몇 년째 걷기 열풍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움직이는 존재'[動物]인 사람이 걷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걷기에 대한 열망은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본능의 회복운동입니다. 걷기는 길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된 바 큽니다. 길의 본뜻은 무엇일까요. 한자 '길道(도)'자는 辵(착)과 首(수)로 이루어진 회의문자(會意文字)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신영복 선생님은 "辵(착)은 머리카락 휘날리며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이며 首(수)는 사람의 생각을 의미하니 길(道)이란 곧 사람이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이라고 풀이한 바 있습니다. 저는 그 뜻을 길이란 통로인 동시에 사유의 길이고, 사유를 통해 자신과 소통하고 세계와 소통하는 길이란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러한 길의 정신을 구현하기에 섬보다 더 좋은 곳은 없을 것입니다.
섬은 어느 곳보다 걷기 좋은 공간입니다. 아직까지 '섬길'의 주인은 사람입니다. 많은 걷기 길들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섬은 부러 돈 들여 걷기 길을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섬들은 그 자체로 최상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섬에서는 사람이 안심하고 걸으며 사유할 수 있습니다. 섬길을 걷는 일은 분명 이 시대의 정신을 비옥하게 하는 소중한 토양이 될 것입니다. 섬으로 가야 할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