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경제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생생한 200여년의 민중사! 1800년대 에도시대 말기에서부터 시작하여 메이지, 다이쇼, 쇼와시대를 꿰뚫는 도도한 흐름을 탄광 노동자와 피차별 부락민, 농민을 중심으로 한 민중의 삶을 때로는 정겹고, 때로는 사실적인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는 정치 중심의 역사, 경제 중심의 역사, 사건 중심의 역사를 뛰어넘어 사람들의 숨결을 느끼는 생생함이라 할 수 있다. 때문에 그로 인해 우리가 알고 있는 일본 역사에 대한 지식만으로는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일본과의 ‘평화적 연대’에 대한 새로운 모티브를 찾을 수 있다. 또한 더 나아가 주로 굴종과 순종하는 백성들로 인식되는 일본인들에 대한 시각에서 저항과 자존의 일본인들이 있다는 사실도 순식간에 깨닫게 된다. 대략 250년의 에도시대(1603∼1867년) 동안 무려 3,000여회의 ‘백성일규(百姓一揆, 농민반란)’가 있었다는 사실과 메이지, 다이쇼 시대의 수많은 ‘새로운’ 백성일규(노동쟁의와 하층민 반란), 그리고 패전 이후의 쇼와시대에 있었던 폭발적인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은 일본인의 자존감을 뒷받침하는 역사적 증거들이다. 즉 천황에 순종하는 착한 백성들만이 일본인의 모든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중에서 탄광 노동자들의 존재는 특별하다. 일본 근대 부국강병의 중심축으로 작동했던 탄광 산업은 일본 내에서도 특히 착취와 강제 노역, 인권 유린 등 억압이 극심했던 분야이다. 탄광 노동자들은 주로 일본 내 하층민이었던 피차별 부락민(일본 내 천민 계층인 백정 등을 일컫는 말. 오늘날에도 약 300만 명이 존재하며 차별당하고 있음)과 땅 한 평 없는 소작농 등 하층 농민, 그리고 조선인(중국인 일부) 노동자들로 구성된다. 심지어 탄광에 따라서는 조선인 노동자가 거의 절반에 이른 곳도 있었다. 이러한 구성은 다이쇼, 전쟁 전의 쇼와시대 동안 정서적인 연대의식을 형성하게 되며, 일본 노동운동사에서는 ‘삼각동맹’(피차별 부락민, 농민, 조선인 노동자)으로 불리게 된다. 또한 이러한 투쟁들은 일본과 조선을 넘나들며 여러 가지 영향을 주고받는다. 즉 1918년 일본에서는 ‘도야마의 여자 폭동’이라는 쌀 소동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 소동은 전국으로 확대되어 탄광지역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후쿠오카현에 있는 미네치 탄광의 쌀 소동인데, 이속에서 대중적 각성과 자각이 일어나 1922년 피차별 부락민들의 조직인 수평사(水平社)가 결성되고, 그 이듬해 1923년 조선에서는 천민계층들이 모여 조선형평사(衡平社)를 결성하게 된다. 1931년 지쿠호오 탄광쟁의 이후 1932년에는 압제와 저임금으로 유명한 아소오계 탄광에서 아소오 쟁의가 발생한다. 조선인 광부들의 조직적인 쟁의로는 일본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고 3·1운동을 경험했던 광부들이 있어 놀랄만한 이론과 전술로 700여명이 3주간 동안 싸운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군국주의가 극심했던 시기에는 조선인 노동자들의 광범위한 도망이 발생하는데 그 수가 무려 20만명이 넘었고 일본의 군수생산에 직접적 타격이 되었다. 이렇듯 일제 강점기에 강제 연행된 조선인 노동자들의 존재가 오늘날 왜 그렇게 중요한지를 한눈에 알 수 있는 것이다. 한국과 일본의 아래로부터의 평화 연대는 일본의 우경화를 저지하고, 아시아의 평화 연대를 강화하는 강력한 기반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강제 연행된 조선인 노동자의 존재가 바로 그러한 평화 연대의 매개물로 작용하기를 기원한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 때문에 강제 동원과 관련한 일본인들의 자발적 시민 모임과 운동이 존재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이 책의 저자인 오오노 세츠코(大野節子. 81세) 여사도 지쿠호오 지역에 살면서 탄광 산업의 영락(榮落)과 함께 해왔다. 그 속에서 탄광쟁이들의 삶과 눈물, 탄광 지역의 쓸쓸한 몰락과 해체, 남아 있는 사람들의 살기위한 노력, 어린 학생들을 위한 교육적 모색 속에서 자연스럽게 ‘그림연극’(가미시바이)라는 형식으로 이 그림을 그리고, 아이들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게 되었다. 지쿠호오 지역에는 아직도 조선인 노동자 출신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다.
서문
저자의 머리말. 패전 뒤 내지(內地)로 복원병과 귀환자자 속속 돌아 왔다. 그러나 간신히 고향으로 돌아온 안도와 기쁨도 잠시뿐, 고향도 전쟁으로 인해 황폐되고 피폐해 있었다. 당장 닥쳐오는 식량난과 주택난으로 “붉은 굴뚝을 목표로 찾아가면 흰 쌀밥을 먹을 수 있다”라면서 곤궁한 농촌에서부터 산탄지인 지쿠호오를 향해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백 미터를 넘는 보타야마는 자본력의 풍요를 상징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 노동자들은 연줄을 대어 지원했다. 헐한 임금이기는 하나 근근이 가족을 부양할 수 있다며 아버지나 남편들은 캄캄한 갱내로 내려갔다. 사고나 부상도 많았지만 일에 익숙해져 가던 1949년. 이때까지 탄광업계에 대하여 『국토부흥』의 명목으로 실시되어 온 우대책은 도지 라인(Dodge line)으로 말미암아 ‘죽마의 다리’를 자른다라는 명목 아래 폐지되었다. 이 정책으로 인해 경제는 디플레이션이라는 강렬한 펀치를 맞았다. 그러나 전전(戰前)부터 방대한 광구(鑛區)를 갖고 있었던 중앙 자본이나 지방 대규모 탄광은 높은 이윤을 올리고 있었다. 그것은 제철, 전력, 조선과의 연계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고탄가’라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석탄 수요는 지속되었고 시장을 강력히 지배하였기 때문이었다. 조선전쟁(1950∼53년 한국전쟁)의 특수로 인한 호황으로 자본력이 약한 중소 탄광도 한숨을 돌릴 수 있었지만, 진무 이래 호경기로 들뜨기는 한자 부수 ‘실사변(絲)’의 섬유 업계와 ‘쇠금변(金)’의 금속 업계였으며 석탄의 영광은 채 10년도 이어지지 못했다. 1953년 이후 중소 탄광은 저탄(貯炭)의 산더미를 안은 채 해체되고 폐산(閉山)이 눈사태처럼 한꺼번에 퍼져 갔다. 직접 정면으로 피해를 받은 것은 임금을 못 받게 된, 4만 명을 넘는 노동자와 그 가족. 석탄 합리화의 강행으로 지쿠호오 산탄지는 심각한 생활 불안을 품고 가정도 지역도 붕괴되어 간다. 1959년에는 참담한 폐・폐산(閉・廢山) 지대의 아이들을 구원하는 ‘검은 날개 운동’이 전국으로 펼쳐졌다. 나라의 석탄 철수 정책에 의해 지쿠호오의 ‘어삼가(御三家)’의 하나로서 자본과 광구(鑛區)를 과시해 온 ‘아소오산업 요시쿠마광업소’도 아소오 산하 각 광업소의 빚을 일단 모두 떠맡았으나, 부채는 나중에 정부가 대신 갚아 주기로 하여서 막대한 ‘폐산교부금’으로 오히려 이익을 얻고, 1969년 5월 31일에 60년간의 석탄 조업의 막을 내렸다. 1970년대 전반에는 지쿠호오의 신식 탄광도 연달아 모습을 감추고 상당량의 석탄자원이 매장된 채 끝장이 났다. 탄광의 폐산은 지자체와 철거지 땅에 남아 사는 주민에게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산탄지 진흥계획’과 ‘동화대책조치법’ 등이 입법화되었으나 탄광 이직자에게는 거의 아무런 혜택도 주지 않았다. 그뿐일까. 석탄산업의 과잉노동과 저영양의 나쁜 영향은 남자들의 육체 노령화를 가져다주었으며 간경변과 뇌졸중, 규폐 등으로 인한 장기 입원이 빈번했고 불귀의 객이 된 사람도 많았다. 지역이 과소 상태에 매몰될 것을 우려해 활성화를 도모한 것은 주부를 중심으로 하는 여자들이었다. 엥겔 계수가 60%인데도 불구하고 아이를 몇이나 키우며 생활을 지탱해 온 체험은 ‘다 같은 탄광장이’로 일했던 재일의 1세와 2세들마저 끌어들여 지역 재생으로 유대를 드높여 갔다. 이전에 케이센히가시 초등학교에는 1,500명의 아이들이 다니고 있었다. 폐산 뒤 1976년에는 83명으로 격감, 학교의 존속조차 위태로워 보였다. “유일한 문화의 등불을 꺼서는 안 된다”고 사친회(PTA)와 지역주민이 연계하여 의회를 움직이게 하고, 아소오계 토지회사와 교섭도 하면서 싸운 끝에 이겨서 학교가 그대로 남기로 결정되었다. 폐산 뒤 2·3년은 임원의 전출·교체가 빈번하여 안정되지 않고 교육 조건도 최악으로 나빠졌다. 1971년에는 제가 사친회(PTA) 회장으로 선출되어 군내 최소수가 된 소규모 학교를 운영하는 데 애를 써야 했다. ‘카깃코(열쇠아동)’라는 유행어가 생겨났듯이 경제 상태의 악화와 함께 혼자 집에서 텔레비전만 보고 시간을 보내는 아이가 늘어나 모자 간의 대화가 없어졌다. 우선 ‘어머니와 아이의 독서회’를 매주 토요일에 열었다. 또 교원들과 연계하여 빈 학교에 런치 룸을 꾸린다든가, 지역이 한 덩어리가 되어 사친회와 함께 우애 바자회나 운동회를 개최한다든가, 이런 모든 활동을 통해 학교가 교류의 장으로서 활용되도록 노력했다. 그림연극 ‘야마에 살았던 사람들’은 이런 환경에서 태어난 것이다. 현재 말쑥한 초등학교로 새로 세워진 건물 옆에 ‘이곳에 빛을’이란 금자가 새겨진 기념비가 서 있다. 책을 편 모양의 비 오른편에는 당시 다카시마 교장의 기운찬 글씨가 보인다. 또 왼편에 큰 해바라기 밑에서 소년, 소녀가 책을 읽는 모습이 보이는데 이것은 제가 그린 일러스트가 새겨진 것이다. ‘이곳에 빛을’이란 글 속에는 ‘아이들에게 밝고 자유로운 교육의 빛을, 지역에는 활력 있는 생활을’이라는 바람이 담겨 있다. 사친회 회장으로 있던 10년 사이에 마이너스 유산이 갖가지 후유증을 가져오기는 했지만, 징용된 재일 1세와의 교류, 탄광 희생자 공양 활동 등 석탄 산업이 남긴 문제들과 마주 대하면서 인근 아시아나라 사람들과의 평화·우호를 추진하는 사업의 원점이 되었다. 끝으로 ‘새 교과서’가 나오고 좁은 민족주의가 일고 있는 상황에 은밀히 가려서 보관돼 있던 그림연극이 아힘나운동본부의 뜨거운 지원으로 햇빛을 보게 된 것은 더없는 기쁨이다. 이때까지 20여 년의 활동을 돌이켜 보면, ‘강제연행을 생각하는 모임’, ‘사람교류회’, ‘덕향추모비 공양’ 등, 모든 일이 재일 한국·조선인의 협력・참여 아래 진행돼 왔다. 이번 출판으로 다음 시대로 계속 전해 가기 위한 용기와 힘을 주신데 대하여 열렬한 감사를 드린다. 오오노 세츠코(大野節子)
저자소개
오오노 세츠코 여사는 1926년 2월 28일 일본 후쿠오카 현에서 태어났으며, 1944년 3월 1일 구만주국 봉천(현 요령성 심양) 성립(省立) 나니와고등여학교를 졸업했다. 재만기간은 13년. 1946년 10월 ‘후루다오’로부터 부모, 남동생 둘과 함께, 총 5명이 귀국했다. 1957년 12월 요시쿠마 탄광 사택에 입주했다. 현재 ‘강제 연행을 생각하는 모임’ 대표로 있다.
목차
머리말_오오노 세츠코 추천사_이누카이 미쓰히로 추천사_주문홍
1장 지쿠호오 이야기(ちくほう物語) 2장 야마에 살았던 사람들(ヤマに生きた人たち) 3장 한일 병합과 지쿠호오(日韓倂合と筑豊) 4장 연락선에 실려 온 사람들(連絡船で運ばれた人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