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경계를 넘어서!
“우~와! 멋지네. 내려다보이는 저 풍경 좀 봐. 뉴질랜드 카오리 숲이 반지 제왕 세상 같잖아. 태곳적 운치가 확 느껴지는데. 한쪽엔 울창한 산, 다른 편엔 태평양~”
등산 배낭을 멘 민재가 바라다 보이는 풍경에 취해서 큰 소리로 외쳤다.
세계 최초로 에베레스트에 등정한 에드먼드 할러리 경이 즐겨 찾았다는 베델스 비치 등산코스, 70km에 이르는 힐러리 트레일의 일부 구간에 섰다.
민재가 발 디디고 선 베델스 비치 해안 절벽에서 바라본 남태평양 태즈메이니아가 시원하게 쫙 펼쳐졌다.
평소 택시 운전으로 하체 힘이 약했던 터라, 이렇게 주말에라도 한 번씩 등산을 하며 지내왔다. 사실 지난 한주도 고단했지만, 지금은 힘이 충전되었다.
민재가 배낭을 나무 아래 내려놓고 태평양을 향해 기지개를 켰다. 두 팔을 높이 들었다. 호연지기를 꿈꾸며 외쳤다.
"야~호!"
청아한 목소리가 태평양으로 퍼졌다. 자신의 목소리를 들으며 민재가 서 있는 자리에서 빙그르르 돌았다. 세상을 다 받아들이기라도 하듯.
세상이 온통 자신에게로 안기는듯했다. 태즈메이니아 태평양과 자신이 하나가 되었다.
한 바퀴 더 돌았다. 세 바퀴째였다. 민재 발이 순간 퍽 꺾였다. 꺾임과 동시에 상체가 앞으로 구부러지면서 그대로 넘어졌다.
바다 절벽 쪽으로 예상치도 못하게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순식간이었다.
"워~흐!"
민재가 외마디 고함을 지르며 엉겁결에 절벽을 날았다. 아래는 새파란 태즈메이니아 태평양 바닷물이었다. 수직 낙하로 30~40m를 날았다.
쇼생크 탈출에서 주인공이 바다 절벽 아래로 떨어지듯 그랬다. 충격이 컸다.
"풍덩!:
베델스 비치로 트래킹 나선 다른 사람들이 이 상황을 목격하고, 즉시 응급 구조처 111에 긴급히 구조를 요청했다.
마침 베델스 비치 해안을 순찰하던 해상 안전 보트가 전속력으로 민재가 떨어진 곳으로 질주했다. 인근 지역에서 대기하던 해상순찰 비상 헬기도 떴다.
안전보트 해상 요원이 바다 물에 뛰어들었다. 건져 올린 민재를 해변가로 옮겼다. 바로 비상 인공호흡에 들어갔다. 흉부 압박 지압에 심혈을 기울였다.
"꾸~역~“
“주~룩~"
입으로 바닷물을 토해냈다. 바닷물 외에도 평생 쌓인 스트레스 기운도 쏟아냈다.
말 못 하고 가슴에 삭여둔 이민 생활의 한도 녹아서 나왔다. 몇 차례 계속한 뒤 헬기에 실었다.
"투카~“
“투크~!"
헬기 프로펠러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해졌다. 헬기가 곧바로 태즈메이니아 바다 위를 날았다. 오클랜드 웨스트 쪽이었다.
오클랜드 센트럴 중심부에 위치한 국립 병원 옥상으로 향했다. 오클랜드 병원 응급실이 부산해졌다.
간호사와 응급구조대원의 소리를 어렴풋이 들으며 민재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얼마나 깊은 잠에 빠져들었던가. 어렴풋이 민재가 눈을 떴다. 병원이 아닌 작은 방이었다. 누추했다.
"아~우~ 무슨 잠을 이리도 오래 잤나? 깜깜하네. 새벽인가? 밤중인가?“
민재가 벽을 더듬어 스위치를 켰다. 옆에 있는 책상 앞으로 갔다. 책상 위에 펼쳐진 다이어리에는 택시 예약 잡(job)이 적혀있었다.
12월 3일. 화. 새벽 05:00. Danny. 써니눅에서 국제선 공항까지. 평소 택시 운전하듯 일어섰다.
뉴질랜드에서 12월이면 한국과 계절이 반대인 여름철이었다.
벽시계가 째깍거렸다. 작은 바늘은 4를 지나고, 큰 바늘은 30을 넘어갔다. 그럼 지금이 새벽 04:30 분이란 말인가? 민재가 벌떡 일어났다.
예전 습관대로 바로 세수를 했다. 이어 옷을 걸쳐 입고 밖으로 나갔다.
#153 번.오클랜드 택시. 흰색 포드 팰컨 40,00cc 대형 고급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바로 택시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오클랜드 지도책을 꺼내 손님 집 써니눅 주소를 찾았다. 15년 동안 오클랜드 택시를 운전한 관성이 그대로 작동됐다.
그러다, 민재가 순간 뭘 깨달은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도대체 지금 상황이 어찌 된 거지? 분명 에드먼드 힐러리 트레일, 베델스비치에서 바닷물에 떨어졌는데... 해안 순회 요원에 의해 해안가로 옮겨졌고.
인공호흡으로 겨우 숨을 토해냈고~ 헬기에 실려 오클랜드 병원에 내린 뒤~ 그다음은?‘
여기까지 생각할 때였다. 뒤에서 큰 트럭이 육중한 클락션을 울렸다. 택시를 비켜주지 않으면 못 지나갈 좁은 도로였다.
민재가 재빨리 기어를 파킹에서 드라이브로 바꾸고 움직였다.
내친김에 바로 손님 집 방향으로 향했다. 손님 집 앞에 바로 도착했다. 마침 밖에서 기다리던 손님,대니(Dann)를 맞이했다.
곧바로 공항으로 향했다. 오클랜드 하버 브리지를 지났다. 새벽이라 도로가 뻥 뚫려서 최대속력으로 달렸다.
국제선에 손님을 내려놓고 되돌아 나왔다. 그때 택시 콜(call)이 울렸다. 공항 근처 맹가레에서 오클랜드 쉐라톤 호텔로 가는 잡이었다.
'근데 뭐야? 숨 돌릴 여유도 없이 좋은 잡이 계속 이어지네!‘
민재가 자기도 모르게 혼잣말을 했다. 손님이 공항에 내리자마자, 바로 장거리 손님을 태우러 호텔로 달려갔다. 기다리던 손님이 바로 택시에 올라탔다.
강한 맹가레 바닷바람에 차체가 휘청거렸다. 맹가레 브리지를 지나 오클랜드 센트럴 쪽으로 신나게 달렸다.
오로지 운전에만 집중했다. 행동이 먼저, 생각은 나중에나 할 일이었다.
오클랜드 쉐라톤 호텔에 손님을 내려놓았다.
'이제 좀 쉬었다가 할까?'
생각이 드는 순간 백인 손님이 뒷 도어를 열고 탔다.
"파넬 플리즈"
또 붙었네. 파넬로 향했다. 계속 이어지는 손님으로 쉴 사이기 없었다. 파넬 로즈가든 근처에서 손님이 내렸다.
민재가 바로 택시 모뎀을 껐다. 그대로 있다가는 또 잡이 울릴 것 같아서였다.
'이젠 좀 쉬고서 하자. 손님이 붙는 오늘은 유난히 계속 이어지니. 일부러라도 끊어야 한다. 택시도 쉬고 운전자도 좀 쉴 시간이다.‘
민재가 택시를 몰고 쉴 곳, 로즈가든 안쪽으로 들어가 한국전쟁 참전 용사 비 앞에 멈췄다. 바빠서 미처 기록 못한 운행일지, 로그북을 꺼냈다.
출발지와 도착지 그리고 요금을 기입했다. 어제 적힌 로그북을 넘겨보다 민재가 깜짝 놀랐다.
‘2001년 12월 2일. 월요일이라고? 2021년 12월 2일이 아니고???’
예약 잡을 적어둔 다이어리를 꺼내 펼쳐 대조해봤다. 역시 2001년 12월 3일
월요일로 적혀있었다.
‘그럼 무려 20년 전 이잖아? 이게 도대체 어찌된 거지?’
민재가 멘붕에 빠진 듯한 얼굴로 멍하니 택시 창밖 로즈가든을 바라다봤다.
‘그럼, 그동안 말로만 듣던 회귀라도 했단 말인가? 20년을 타임머신타고?’
‘내가????’
충격에 한참을 택시 안에 앉아 있다가 내렸다. 한국전쟁 참전 용사 비 앞으로 걸어갔다.
‘그렇다면 오늘이 회귀한 첫날? 그런데 내가 왜 여기에 있나? ‘
어려운 이웃을 위해 몸 바친 분들. 한국 전쟁 때 뉴질랜드 젊은이들이 가평전투에 참전용사로 참전해 전사했다. 고마운 분들 앞에서 무슨 소릴 하나?
그 넋을 기리기 위해 만든 기념비가 눈에 육중하게 들어왔다.
한국 가평에서 공수한 화강암 바위를 가다듬어 만든 비석이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민재가 손을 뻗어 비석에 대고 묵념을 드렸다. 세월은 가고 사람은 남는다? 거대한 화강암 비문을 보니 다시 사는 인생 목표가 분명해졌다. 염원했다.
‘다시 사는 생애, 뜻있고 감사히 살 수 있기를~ 뉴질랜드 참전 용사들이시여, 함께해 주소서! 제가 뉴질랜드에서 보답하는 역할도 하게 힘을 실어주소서!’
뜨거운 기운이 가슴 깊은 곳까지 빨려 들어왔다. 나중에 큰일을 결정해야 할 때, 어려운 일이 발생 시 큰 힘이 되어줄 것 같은 믿음이 생겼다.
뉴질랜드 보호수인 포후투카와(크리스마스트리) 나무들이 느티나무처럼 둘러싸인 공원이 비밀의 화원 같았다.
로즈가든 카페에 가서 브런치를 시켰다. 큰 머그잔에 가득한 라떼 잔을 손으로 감싸며 마셨다. 속이 따뜻해졌다. 샌드위치를 먹으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
지난 생애가 파노라마처럼 흘러갔다. 어떻게 살아온 20년 뉴질랜드 이민 생활이었던가. 파란만장한 세월이 켜켜이 쌓여있었다.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여의고 고학으로 고군분투 했다. 새로운 생을 펼쳐보고자 과감하게 뉴질랜드로 왔다. 천신만고 끝에 영주권을 땄다.
가정도 꾸렸다. 아내, 아들, 딸 4식구의 가장이 되었다. 적성에도 맞아 택시 운전을 15년 하고, 버스운전을 5년가량 하며 생활에 안정을 찾을 무렵이었다.
사고는 순간이었다. 이젠 혼자다.
그것도 20년 전인 27살의 나이로 회귀하다니. 그럼 이제부턴 어떻게 산다?
그동안 20년은 낯설고 물선 땅 뉴질랜드에서 오로지 해야 할 일만 하고 살아온 생활이 아닌가.
‘20년간의 정보와 안목으로 다시 살 게 된 이번 생엔, 하고 싶은 일도 하고, 할 수 있는 일도 하며 살자.’
주머니를 뒤졌다. 조금 전 손님이 팁으로 준 $5 뉴질랜드 지폐가 손에 잡혔다. 살아있는 분으로 지폐 초상에 실린 탐험가 에드먼드 힐러리경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현재는 2001년 12월. 몇 년을 더 사시다가 운명하실 분과 동시대를 살고 있다는 게 꿈만 같았다. 그분의 탐험정신과 봉사정신이 민재 가슴에 스며들었다.
그분이 에베레스트 등정에 함께한 세르파 텐진의 나라 네팔에서 봉사할 때였다. 그곳에 그를 만나러 오다 비행기 사고로 아내와 딸이 운명했다.
가족을 잃은 역경을 이겨내며 그가 한 이야기가 민재 가슴을 울렸다.
‘모험은 나처럼 평범한 모든 이에게 가능하다. 뛰어난 사람만 인생을 잘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진정 무언가를 원한다면 온 마음을 다해라.’
민재 전생에서는 그분이 운명하실 때, 택시를 운전하다 말고 파넬 성공회 성당 장례식에 참석했던 적이 있다. 민재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번 생에서는 살아계신 그분을 내 택시 손님으로 꼭 모시고 싶다.’
민재는 그 이후로 어려운 일이 생기면 $5뉴질랜드 지폐를 꺼내 그 분 초상을 보았다. 에베레스트 산 앞에서 환하게 웃으시는 모습을 뵈면 선택과 집중이 명확히 분별되었다.
$5뉴질랜드 지폐 냄새만 맡아도 거친 마음도 진정되었다.
인생이란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님을 절실히 느꼈다. 관계 속에 살아가는 존재라는 믿음이 가슴에 새겨졌다. 다시금 마음을 가다듬었다.
‘택시 운전만으로도 크고 넓게 살아갈 방편들이 보이니까, 그대로 쭉 나가자.
나를 세우는 과정을 소중히 받아들이자. 나답게 살자. 선택과 집중을 잘하자.‘
민재가 하나씩 헤아려봤다. 현재 가진 여건과 능력이 뭐가 있더라.
185cm 키. 해병대 나온 깡과 끈기. 유창한 영어. 일본어. 중국어. 대학 시절 신춘문예 당선한 글 솜씨. 전문 목수 실력. 부동산과 집을 보는 안목.
택시 운전 15년에 터득한 택시 비즈니스와 경영능력. 버스운전 5년 하며 배운 버스 매니징 능력. 참전용사의 기운. 몸에 체득한 장미 향. 에드먼드 힐러리 지폐에서 느껴지는 기운.
카페에서 나와 다시 로즈가든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로즈가든 안쪽에는 200여 종의 장미꽃들이 온 세상의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유난히 짙은 장미꽃 앞에서 코 대고 장미향에 쑥 빠졌다. 장미꽃 세상으로 들어갔다. 향기가 온몸과 마음에 그대로 쑥 스며들었다.
나중에 사람 보는 능력치가 각성하는 계기도 되었으니. 좋은 사람을 보면 장미 향기가 났고. 믿고 맡기고 함께 할 사람을 분별하게 되었다.
민재 마음에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선택과 집중! 뉴질랜드는 이제 민재 편이었다. 두 손을 불끈 쥐었다.
‘거침없이 나아가자. 펼쳐진 길로 과감하게. 뉴질랜드 이민 경계를 넘어서!’*
1화 끝 (5,693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