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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막다른 골목에서 나는 기적처럼 희망을 건져냈다”
잘난 것 하나 없고 부족함 투성이인 제가 누군가에게 저를 이야기하는 자체가 어색하고 부끄럽기 짝이 없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암이라는 지독한 병마와 치열하게 싸우고 있을 수많은 분들에게 아주 조금이나마 희망이 될 수 있다면 하는 마음으로 몇 자 적을까합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길고 암담하게만 느껴지던 세월이었습니다. 오직 암흑만이 존재하는 끝도 없는 긴 터널을 천신만고 끝에 빠져나온 느낌이랄까요! 아마도 이 고통은 겪어본 사람이 아니고는 느낄 수가 없는 그런 것이리라 단언합니다. 다행스럽게도 다른 분들에 비해 투병생활은 짧았지만 여전히 진행형이라는 조심스럽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람마다 상황이 다 다르겠지만 암과 싸우고 있는 모든 분들의 심정은 다 같으리라 생각합니다. 부디 미약하나마 도움이 되시길 바라며 저의 경험담을 있는대로 적어보겠습니다. 참고로 저는 올해(2008년) 일흔 한 살입니다. 글의 편안한 전개를 위해서 경어를 생략하오니 너그러이 이해바랍니다.
1.청천벽력 같은 사형선고-당신의 병명은 “암”입니다
2006년 정월 초하루, 온 가족이 모여 세배며 덕담이며 기쁨이 묻어나는 전 국민의 축제를 즐기고 있던 날 나는 뜻하지 않은 불청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 놈은 바로 소화불량이란 놈이었다. 남원의 한적한 농촌마을(소설가 故 최명희님의 생가가 있는 혼불 마을)이 집인 나는 수십 년 세월을 논밭일로 살아왔기에 웬만한 청년들보다 더 건강하고 체력도 좋았던 터라 평소 음식도 가리는 것 없이 잘 먹고 소화도 아주 잘되는 체질이다. 그런데 이번엔 느낌이 썩 좋질 않았다. 평소 같으면 그 정도로 병원을 찾지 않았겠지만 남원시내에 있는 내과엘 갔다. 단순 소화불량이라며 약을 처방해준다. 당연히 그런 줄 알았고 역시나 의사의 진단도 소화불량이란다. 집에 와서 약을 먹고 좀 지나면 괜찮겠지 했는데 이게 아니다. 다음 날, 이번엔 남원에선 꽤나 유명한 그래서 늘 붐비고 오래 기다려야 하는 000내과를 찾았다. 차례가 되어 진찰을 하시더니 보호자랑 같이 왔느냐고 묻는다. 이 무슨 엉뚱한 소리!! 보호자는 큰 병 있을 때 찾는 거 아니던가! 난 그저 소화가 안돼서 왔을 뿐인데... 속으로 ‘이 양반 낯 술을 드셨나??’했다. 그런 내 표정을 읽었을 텐데 또 다시 보호자를 찾는다. 이 불안감은 뭐란 말인가! 아내는 직장에 갔고 아이들은 멀리 살아서 00시내에 사는 장조카에게 전화를 했더니 고맙게도 내 일 인양 금새 달려왔다. 보호자를 확인하더니 초음파 검사를 해보자고 한다. 검사 하고나서 설명하시는데 담도 쪽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고 소견서를 써 줄 테니 00으로 가라고 한다. 아는 분께 부탁을 해 둘 테니 가서 정밀검사를 해보란다. 집에 왔다가 다음 날 가기로 했다. 잠 잘 자기로 소문난 나인데 잠이 오질 않는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이 무슨 말도 안되는 상황이란 말인가! 내일 정밀검사를 해보면 별 일 아닐거란 위안도 해보지만 콩닥거리는 가슴이 진정되질 않는다. 그렇게 밤잠을 설쳐버렸다.
이튿날, 아내를 동행하고 병원엘 갔다. 아들딸들이 오고 정밀검사를 했다. 설지나 일주일도 안됐는데 너무도 낯선 상황에 나 자신도 그저 황당하기만 할 따름이다. 잠시 후 의사선생님은 아들들을 불러 CT며 MRI촬영 결과를 설명하는 듯 하다. 검사결과가 나왔을 텐데 나에게만은 아무런 말이 없다. 법정에 서서 형 집행을 기다리는 죄인마냥 가슴이 터질 지경이다. 한참 후... 담도에 돌이 박혔는데 수술하면 된다고 황달이 너무 심해서 일단 담즙을 빼내야 한다고 한다. 물론, 나를 안심시키기 위한 사탕발림이었다. 마취를 하고 코 속으로 호스를 삽입하고 네 시간에 걸쳐 시술을 했다. 의사선생님은 땀에 젖었고 나는 서서히 마취에서 깨어가면서 악몽을 꾸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할 뿐인데 나는 이것이 끝이기를 빌고 또 빌었다. 그러나, 마음 한 켠에선 다들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솟아올랐다. 15년 전에 000병원 내과과장으로 있던 집안 조카에게 들은 적이 있는데 담도암은 아직 우리나라 의학기술이 부족해서 수술도 거의 못하고 100명중에 1명 정도 할 수 있다고, 수술을 하더라도 벽을 등에 지고 살아야만 한다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암이 아니라고는 하는데 암일것만 같다. 암담하고 인생을 다 산 것만 같았다. 15년이 흘렀고 의술도 발달됐다고는 하지만 1% 확률이 그 사이 50%, 100%가 되진 않았을 것 아닌가! 내 경험상 암이 맞다며 가족들에게 솔직히 얘기해달라고 했다. 오랜 망설임 끝에 암이긴 한데 옛날하고 달라서 수술하면 된다고 안심시켰다. 설마 했는데.. 둔기로 얻어맞은 것처럼 머릿속이 멍해져왔다. 불과 며칠 사이 소화불량으로 시작된 그 끝이 암이었다니 악몽을 꾸는 듯 괴롭고 가슴이 막혀왔다. 70평생을 살면서 남을 도왔으면 도왔지 해 안 끼치고 정말 바르게 살아왔는데 그 끝이 이것이었단 말인가! 차라리 그냥 이대로 숨이 멎으면 고통스럽진 않을 것 같았다.
2.더 깊은 절망 속으로 -당신의 여명은 길어야 1년입니다.
아내와 아이들과 상의를 했고 애초부터 더 큰 병원으로 가서 수술을 하자고 합의를 했다. 집안 조카가 있는 000병원을 뜻하는 것 이었다. 조카에게 전화를 했더니 지체하지 말고 당장 오란다. 다음 날 엠블런스를 타고 친절한 안내를 받으며 000병원에 도착했다. 고맙게도 미리 준비를 하고 있던 터라 바로 진찰을 받을 수 있었고 담당 의사의 입에선 “다행히 전이가 안 되어서 수술을 할 수가 있습니다. 걱정 마세요!” 하는 것이었다. 수술도 못하면 끝장이라 생각했는데 너무도 고마울 수가 없었다.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양봉일로 바쁜 내게 병원은 그저 한가한 사람들이나 누워있는 사치였는데 참 신세가 우습게 됐다. 수술할 수 있단 말에 고마움을 느끼고 있으니 말이다. 정말 환장할 노릇이다.
수술환자도 밀려있고 내 나이도 있어 수술은 금방 되는 것이 아니었다. 각종 검사며 기관지 치료를 하고도 여러 날이 지나 수술날짜를 잡을 수 있었다. 발병한 지 근 한 달 만에 수술을 할 수 있었다. 여덟 시간에 걸친 징글징글한 수술, 그리고 깨어났다. 잠깐의 잠을 청한 것 같은데 수술부위가 아프고 내 몸이 말이 아니다. 내 맘대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아내에게 난 완전히 어린아이가 돼버렸다. 내일일도 알 수 없으면서 엿장수 맘대로 ‘나중에 다 나으면 이 은혜 다 갚을께’ 하고 마음속으로만 다짐을 해봤다. 수술이 잘 됐다고 한다. 수술부위의 통증이 심하고 힘들어서 겨우겨우 치료를 받으면서도 운동을 열심히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수술이 잘 됐다는 건 순전히 거짓말이었다. 전이가 안된 줄 알고 희망을 가지고 수술을 시작했는데 막상 개복을 하고보니 간에 전이가 됐더란다.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원래는 담도 두 줄 중 암세포가 있는 한 줄을 제거하고 한 줄만 제 기능을 해줘도 될 거라 생각했는데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고.. 간에 전이된 암세포를 제거하다가 결국은 다 하지 못하고 덮었다고 한다. 재수술은 불가능하며 제일 안쪽 수술부위의 조직을 떼내 검사를 하게 되는데 양성이면 다행이지만 악성으로 나온다면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것이었다. 조마조마해 하며 지나간 일주일 후 검사 결과가 나왔는데 악성이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아들에게 의사선생 왈 “아버님은 항암치료와 방사선 치료를 병행한다고 해도 길어야 1년 그렇지 않으면 6개월 남짓 사실 수 있으십니다” 했었단다. 그날 밤, 두 아들은 찜질방에서 자고 온다고 나가서는 근처 포장마차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며 사람들도 많은데 창피한 줄도 모르고 둘이 많이도 울었다고 한다.
3.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살려면 철저히 바보가 되십시오
항암치료와 방사선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해서 집하고 가까운 000병원으로 가기로 했다. 아내랑 큰아들이랑 내려오는 차속에서 나는 내 몸에 흡혈귀처럼 붙어 내 목줄을 죄고 있는 암세포의 존재도 모르는 체 수술이 잘되어 다행이라며 웃으면서 내려왔다. 그런 내 모습에 두 사람은 얼마나 남모를 눈물을 가슴으로 흘렸을까! 00에 사는 셋째 아들네에 있기로 했다. 일단 몸이 약해져 있으니 기력을 회복한 뒤에 항암치료를 해야 한다기에 잘 먹고 운동도 열심히 했다. 형님 그리고 세 동생들, 며느리들, 사위들, 조카들 등 많은 사람들이 몸에 좋다는 것들을 해 나르기 바빴다. 그때의 고마움은 두고두고 잊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사람 사는 냄새 물씬 나는 좋은 세상을 어쩌면 머지않아 등질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너무도 두렵고 살고 싶었다.
발병하고 두 달이 되어갔다. 4월 4일부터 항암치료를 받으라고 해서 그 날을 기다리며 지냈다. 그런데 이상한 기운이 감지되는 것을 느꼈다. 아내도 그렇고 아이들도 그렇고 날짜가 다가오는데 항암치료에 대한 얘기를 일절 안하는 것이다. 나 몰래 뭔가를 속닥이는 것 같기도 하고.. 막연한 불안함을 느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와 아들딸, 그리고 며느리, 사위 온 가족이 다모여 나에게 깜짝 놀랄 제안을 했다. 항암치료는 너무 힘들고 고생스러우며 간이나 담도에는 항암치료가 별로 효과가 없다하니 다른 치료방법을 택하자는 것이었다. 백방으로 수소문 한 결과 ‘민속한의원’이라는 아주 유명한 한의원이 있는데 아는 분도 그 곳에서 새 생명을 찾았다며 거길 가보자는 것이었다. 미리 가봤는데 많은 환자 분들이 입원치료 하고 있고 또 많은 분들이 나았으며 죽을 사람도 살리는 곳으로 유명하다 했다. 불안했다. 솔직히 많이 불안했다. 수술도 잘됐고 항암. 방사선 치료만 잘 받으면 된다고 했는데 왜 바꾸자는 것일까! 이 아이들이 정말 뭘 알고나 그러는 것일까! 내가 아는 우리 아이들은 절대 나를 버릴 사람들이 아닌데... 그럼 내 몸에 내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비밀이 있단 말인가! 순간에 별 생각이 다 들었다. 난 꼭 살아야 하니까 그냥 병원에서 하란대로 하자고 우기고 싶었지만 그 많은 가족들의 눈길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반신반의하는 심정으로 따르기로 했다. 4월 초 민속한의원을 찾아갔다. 초봄의 기운이 물씬 느껴졌고 내 몸은 시들어 가는데 산에 들에 새싹들은 파릇파릇 돋아나고 있었다. ‘빌어먹을 놈의 암세포 같으니라고 ..’ 나 혼자 안타까운 맘에 되 뇌였다.
그 곳에서 원장님을 뵐 수 있었다. 진맥을 해보시더니 소음인이라며 식이요법을 병행하라며 내게 맞는 식단 팜플렛을 주셨다. 수술 후 찍었던 사진들을 자세히 살펴보시더니 그동안 나만 몰랐던 사실들을 털어 놓으시며 내게 말씀하셨다. “아버님! 살고 싶으시죠? 지금부터 제 말 잘 들으세요! 지금 상태가 많이 안 좋거든요. 지금부터가 아주 중요해요. 제가 하란대로 하실 수 있으시죠? 그럼 지금부터는 철저히 바보가 되세요! 왜 바보들한테는 암환자가 없는 줄 아세요? 마음을 비우고 아주 편안 맘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대한 욕심들 다 버리시고 그동안 힘들게 했던 사람들 있다면 다 용서하세요! 어깨의 무거운 짐 다 내려 놓으시고 세상과 단절 시키세요! 사람들도 만나지 말고 문병도 못 오게 하세요! 그래야 사실 수 있어요 이 암이란 놈은요 이기려고 하면 더 덤벼요. 잘 구슬려서 다스리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입니다”
알듯 모를 듯 그땐 그랬다. 내 몸이 좋은 상태가 아니기에 수술을 집도했던 최고권위의 병원 말을 안 듣고 이런 방식을 택한다는 것이 못미덥고 불안하고 그랬다. 내가 정말 잘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지금 생사의 기로에 서 있는 것이다. 고민스러웠다.
4.희망을 넘어 기적을 만들다-민속한의원 원장님 하란대로만!!
고민스럽고 두려웠지만 기왕 선택했으니 한 번 해보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나를 위한 가족들의 최상의 배려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죽을 때 죽을망정 해볼 건 다 해보고 죽자는 마음이었다고나 할까! 일단 원장님께서 하란대로 하기로 했다. 경제적인 문제도 있고 집도 못 잊어서 입원은 힘들고 집에서 치료를 하기로 했다. 입원해서 맘 놓고 있는 것만은 못하겠지만 우리 집도 시골인지라 물 좋고 산 좋고 공기도 좋아 안성맞춤일거란 생각도 들었다. 집에 와 보니 내 전 재산이나 다름없던 벌통들이 몇 통 안 남았다. 이미 상의해서 알고는 있었지만 그나마 몇 통도 내가 부탁해서 남겨놓은 것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내게 남은 마지막 잎새 같은 것이었다. 희망을 놓고 싶지 않았다. 마음이 아프긴 했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누굴 원망하겠는가! 건강해져서 다시 예전처럼 벌통수를 늘리리라 마음먹었다.
집에 온 날부터 탕약과 쑥뜸, 죽염, 마늘, 청국장 등 시키는 대로 열심히 먹었고 내가 직접 생산한 무공해 꿀과 프로폴리스를 병행해서 복용했다. 탕약과 마늘 복용을 조금씩 늘려갔고 특히 마늘은 독성이 있어서 구워서 죽염을 찍어서도 먹었고 다량을 먹기에 좀 버거워 마늘을 살짝 삶아서 꿀에 섞고 청국장과 같이 먹으니 마치 빵의 앙꼬처럼 먹기도 좋았고 질리지도 않았다. 죽염은 음식을 먹을 때 항상 같이 먹었지만 아예 장을 담글때 메주와 죽염 20병을 섞었고 고추장도 마찬가지로 10병을 섞어서 담궜다. 모든 음식의 간은 죽염으로만 맞췄다. 또, 아내와 아이들과 상의해서 일명 “건강회복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매일 매일 그대로 실천을 했다. 혹시 궁금해 하실 분들을 위해 잠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必 生 건강회복 프로그램 -
* 건강을 회복하는 최고의 비결은 밝고 긍정적인 마음입니다.
* 좋은 것만 바라보시고 좋은 것만 생각하시고 마음속의 모든 욕심 또한 다 버리시고 모두 다 용서하세요!!
* 운동 꼭~ 열심히 하세요!!
시 간 실천사항 및 식단 비 고
기상 후 프로폴리스 복용
5:00 탕약 복용 후 운동
6:30 녹 즙
8:00 아침식사 후 운동
9:30 약차마시기. 쑥뜸
11:00 청국장/마늘/간식/약차마시기
12:30 점심식사
13:00 탕약 복용 후 운동
14:30 약차마시기
16:00 청국장/마늘/간식/약차마시기
17:00 도라지 물
18:30 저녁식사 후 운동
20:30 약차마시기
21:00 탕약 복용
취침 전 프로폴리스 복용
몇 달을 열심히 실천했다. 약이 떨어질 때면 민속한의원에서 약이 왔고 그 외 보조식품과 아울러 열심히 먹고 운동했다. 아내는 회사를 다녔는데 나를 위해 퇴직을 하고 내 병간호에만 매달렸다. 또한 들에서 요즘은 그리 흔하지 않은 돌나물(돋나물)을 캐다가 솔잎과 섞어 즙을 만들어 주었다. 5개월간을 그리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끔찍한 세월이었다. 나도 애썼지만 내 아내가 참 애썼다. 너무 고맙다.
민속한의원을 이용한 지 5개월쯤 지났을 무렵 가족들은 방사선과에서 사진을 찍어보자고 했다. CT를 찍고 결과를 보시는 의사선생님 표정이 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한 표정이다. 좋아진 것 같다며 MRI 촬영을 해보잔다. 기다려서 찍고 또 결과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도 길게만 느껴진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결과가 나왔단 말에 잔뜩 긴장하고 들어갔다. 000병원에서 수술 후 찍었던 사진과 번갈아 가면서 보시더니 깜짝 놀라신다. “암세포가 안보이네요. 이런 경우는 저도 본 적이 없어요. 저도 믿을 수가 없네요. 이건 기적이네요” 1년 살기도 힘들다던 내 몸속에서 암세포가 사라졌단다. 절대 안 죽고 날 괴롭힐 것만 같았던 암세포가 안 보인단다. 내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다시 물어도 똑같은 대답이었다. 그제서야 그동안 꾹꾹 참았던 한 맺힌 눈물이 솟아났다. 너무 기뻐서 나도 울고 아내도 울고 아들도 울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칠흑같은 어둠 속 같았던 그 세월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두어 달 후에 다시 한 번 사진 찍어보고 싶다는 의사선생님의 기분 좋은 말을 뒤로하고 나왔다.
그로부터 한 달 후, 000병원에 외래진료를 받기 위해 채혈을 했고 일주일 뒤 담당교수님을 만났다. 챠트를 보시고 나를 보시더니 반가운 얼굴로 “그간 어느 병원 다니셨어요?” 하신다. 혹 또 나쁜 말이 나오면 어쩔까 하는 걱정으로 바라보았고 그간의 상황을 말씀드렸다. 표정이 약간 놀라는 듯 굳어지는 듯하다. 그 분말 안 듣고 한방치료를 한 데 대한 불쾌함도 섞여있었을 것이다. 이해할 것도 같다. 처음 한방치료를 시작할 때 나 자신도 그랬으니까! 아주 많이 좋아졌다고 하신다. 배의 수술자국을 보시더니 왜 이렇게 피부가 검냐길래 쑥뜸을 해서 그렇다고 했다. 그나저나 많이 좋아져서 기쁘다고 하신다. 좀 미안한 마음이 생기긴 했다. 3개월 후 다시 외래진료를 갔더니 처음으로 환하게 웃으시며 거의 완치됐으니 앞으론 6개월에 한 번씩만 오라 하신다. 그렇게 기분 좋을 수가 없었다. 그 후로 6개월마다 외래진료를 하고 있고 그때마다 이상 없다는 기분 좋은 소견을 듣고 있다.
5.맺음말-당신도 암을 지배할 수 있습니다! 최고의 백신은 “희망”입니다!
암 진단을 받은 지 3년이 되어간다. 짧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내겐 참으로 긴 시간이었던 것 같다. 감사하게도 나의 ‘마지막 잎새’였던 벌통들은 어느새 예전상태로 늘어났다. 나는 여전히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살고 있다. 암은 완치가 없다고 하지 않던가! 그만큼 사후 관리가 중요하단 얘기일 것이다. 다 나았다고 사후관리에 소홀하다가 재발 또는 단시간에 사망하는 분들을 여러 명 봤다. 너무도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지금도 어김없이 ‘건강회복 프로그램’을 철저히 지키려고 노력하며 산다. 식이요법도 꾸준히 하고 있다. 앞으로도 그리할 것이다. 나 자신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 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 마누라등살에 어렵게 다시 찾은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 것 같다. 귀찮을 만도 하건만 정성스레 잊지 않고 챙겨주는 마음이 고맙기만 하다.
1년이면 12만 명이 새로이 암 진단을 받는다고 한다. 그래서, 요즘은 암을 만성질환이라고도 한다는데 그건 이 고통을 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일 것이다. 어차피 생긴 질병이라면 약해지지 말고 독하게 이겨갔으면 좋겠다. 겪어보니 “암은 죽여 없애는 게 아니고 잘 구슬려서 다스려야 하는 질병이라고 하신 민속한의원 원장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내 몸에 암세포가 침투해 있다는 사실이 미치도록 괴롭고 싫겠지만 어차피 내 몸에 들어왔으니 한 집 식구라는 마음으로 더불어 살면 암세포는 더 이상 나를 공격하지 않는다” 던 TV에서 봤던 어떤 분의 말씀도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님을 알 듯 하다. 내 경험으로 자신하건데 암을 이겨낼 수 있는 최고의 백신은 ‘희망’과 ‘긍정’이라고 생각한다. 희망과 긍정의 마음으로 자신을 더욱 사랑한다면 머지않아 수 많은 분들이 내가 그랬듯 “기적”을 만들어 갈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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