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애향가)
바라보면 가이없는 천리 평야에
비단 위에 무늬처럼 고운 솔뫼들
진위 안성 두 강물이 하나로 흘러
서해 물결 굽이치는 평택 내고향
아름다운 산과 바다야 정든 고향아
하느님이 내려주신 만세의 낙터
어렸을 때 배워서 지워지지 않고 지금도 노래할 수 있는 평택애향가 1절이다. 2절도 있었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또한 궁금한 것은 이 노래가 지금도 불려지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런데 난 지금도 이 노래에 곡조를 붙여서 노래할 수 있다. 그렇게 노래하노라면 옛날 어린 시절 꿈이 되살아 나는 것만 같다. 하느님까지 연루시킨 좀은 촌스러운 노래인데 여기 하느님은 이스라엘을 선택한 야훼 하느님이 아니고 우리 민족의 단군 하눌님인 것 같다.
지금 이 노래를 불러보면 그 시절 내 고향은 정말 아름다운 고장으로 떠오른다. 넓은 벌판에 쌀을 생산하여 돈이 되는 벼들이 가득하고 밭엔 보리와 콩, 김장이 자랐다. 솔밭은 소나무들로 가득차고, 아산만 갯벌엔 조수가 드나들고 행이나물이 우거지고 또한 게와 조개가 살고. 사람들은 이들을 잡아서 반찬에 보태었다. 4월이 되면 지천으로 잡히는 숭어를 먹게되고 아이들은 아카시아꽃을 따서 먹고 송화를 따러 솔밭으로 갔다.
나는 그때 삼십리나 떨어진 읍내로 중학 3년간이나 힘들게 자전거통학을 하면서 꿈은 서울에 가서 대학을 다니고 출세하는 것이 꿈이었고 성공하면 고향에 와서 크게 자랑을 하고 싶었었다. 그렇게 할 때 고향은 날 따뜻하게 맞이하여 성공을 위해 노심초사한 사실에 대해 크게 위로와 치사를 해줄 것만 같았다. 지금 와 생각하면 유치 단순한 꿈이었고 그렇게 하지도 못 했다. 그러나 그 유치하지만 아름다운 꿈을 위해 난 열심히 공부했고 고등학교 때부터 서울로 진학할 수 있었다.
돌이켜 보면 평택은 별로 볼 것 없고 그저 쌀과 배가 많이 나던 평범한 고장이다. 그러나 옛날로 볼 때는 들이 넓어서 쌀생산력이 높으니 남쪽 옆 동네인 충청도 아산을 우습게 알았다고도 한다.
내게 있어 잊을 수 없는 고향이지만 어른이 되어 한 가지 불만은 평택엔 볼만한 산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솔밭은 있되 비산비야의 구릉에 존재한다. 산이 없으니 볼만한 맑은 강도 없다. 평야 사이를 구불구불 흘러가는 안성천이 있는데 그 물은 흐리터분하였으나 지금은 그나마 평택호(아산호)로 막혀 버렸다.
비산비야의 솔밭을 '비단위의 무늬처럼'이라고 노랫말에서 표현하였는데 금수강산을 뜻함이다. 물론 비산비야의 솔밭은 금수강산의 주요성분을 이루는 아름다운 풍경이다. 그러나 높은 산이 주는 험준함이나 의연한 기상을 따라가지 못하는 약점이 있다.
그렇다면 지금 난 평택과 어떤 끈을 가지고 있는가? 사실은 별로 옛고향과 현재의 내 삶은 별 연관이 없다는 것이 나의 솔직한 고백이다. 물론 부모님이 물려주신 땅떼기가 조금 평택과 인근 충남아산에 내 소유로 있기는 하지만 그 땅에 정착할 일은 없을 것 같다. 이제 타지로만 떠도는 나에겐 평택은 낯선 곳이 되고 말았다. 서글픈 일이다. 고향에 살며 고향을 늘 보며 고향의 일에 간섭하며 사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나처럼 타향에 와서 기를 못펴고 죽어지내는 사람은 어쩌면 답답한 존재일 게다. 그래서 틈만 나면 마음은 고향하늘을 헤매이는가?
그런데 산없는 동네에 대해서 반응하는 내 자신에 대해 재미있는 사실 하나를 발견하였다. 지난 2006년 1월 나는 싱가폴 여행을 하마부인과 같이 할 기회가 있엇다. 그곳도 평택처럼 산이라곤 없는 평평한 동네였다. 몇일을 묵으면서 산도 없다고 푸념하였는데 한 이틀 지나고 나니 산에 갈 일이 없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푹 쉬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강원도 속초나 원주에 쉬러 갔다면 틀림없이 산에 갈 궁리를 했을 터였다.
그러나 원천적으로 산에 가는 것이 봉쇄된 곳에서는 산도 하나의 선택사항이고 산 없이도 잘 먹고 잘 놀 수 있음을 싱가폴 여행에서 깨닫게 되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니 평택 시골의 고향집에 가끔 들렀을 때 왠지 모르게 매우 편한 휴식감을 느낀 적이 많았던 것만 같다. 산에 욕심내되 산이 없어서 오히려 편하다는 이 역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나 산악회 회원, 산 좋아하는 것 맞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