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일. 나는 인터넷이 거의 안 되고, 프린터와 스캐너가 없고, 조용히 일을 정리할 장조조차 없는 이탈리아 산살보에서 출항을 위해 반드시 해야만 되는 일들을 하고 있다. 시차가 뭔지도 모르는 리나(18개월)는 새벽 2시마다 깨어 온 방을 휘젓고 다니고, 나는 불면과 인고의 길고긴 밤을 보내고 있다. 자기 전에 동영상 몇 개 업로드 걸어 놓으면 30분마다 전송 실패를 알린다. 다시 보내고, 또 보내고, 밤새 다섯 번쯤 다시 보내야 겨우 짧은 영상 몇 개가 올라간다. 이탈리아가 이렇다면 한국까지 나머지 국가는 얼마나 절망적일지 보지 않아도 알 일이다. 그래도 이곳에서 출항 전 자료라도 많이 보내 놓자. 잠은 항해하면서 슬카지 용여하자.
오전 10시 마리나로 가니 파파로코(까를로 부친)가 기다리고 있다. 짐을 좀 옮겨 놓고 오후에 다시 온다고 하니 파파로코는 11시에 선주 까를로가 온다고 좀 기다리란다. 그럼 차라리 내가 일을 좀 보고 12시에 만나자고 하니, 잠시 후 오늘은 까를로가 회의 때문에 바빠서 못 온다며 자기도 11시에 나가야 한단다. 뭐 어쩌라는 건지. 파파로코는 늘 말끝마다 한국은 정확하지. 이탈리아는 제멋대로야! 라며 한탄하는데 정작 본인이 진짜 이탈리아인이다. 나는 그러면 출입구와 배의 키를 달라고 한다. 30분 후 간신히 까를로와 통화를 한 파파로코는 키를 넘겨준다. 그러나 너는 사무실과 배만 오갈 수 있어. 다른 곳에 가면 승인문제가 생길 수 있다. 라며 주의를 준다. 맞아 아직은 서류가 마리나스베바 관리실로 넘어가지 않았으니까.
마리나 인근의 쇼핑몰에서 잠깐 점심 먹는 사이, 선박 보험처리를 위한 이탈리아어와 영어로 된 서류가 20페이지 넘게 메일로 왔다. 번역하여 읽어보고 사인해야 한다. 출력을 못하니 이것을 한 쪽 한 쪽 JPG 파일로 만들어 아래 한글로 읽어서 전자서명 한 뒤, P.D.F. 파일로 만들어 다시 답장 메일을 보낸다. 물론 이건 배에서 마리나스베바 인터넷을 사용할 때만 겨우 가능하다. 숙소에서도 안 되고, 거리에서도 안 된다. 물 없이 고구마 다섯 개쯤 우겨넣는 심정. 나는 돌에 새기는 심정으로 한 땀 한 땀 서류를 만든다. 슬그머니 부아가 올라온다. 뭔 놈의 나라가...
쇼핑몰 같은 곳에서 무료 인터넷 된다고 잠시 유튜브를 보거나 영상통화를 하다보면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데이터 로밍을 사용하고 있다. 이탈리아 인터넷 시스템 전체가 내 로밍 데이터를 노린다. 절대로 안 된다. 나는 최대한 데이터를 아껴야 한다. 이 데이터는 항해용이다. 데이터를 다 사용하면 내비게이션도 사용할 수 없다. 이런 건 참 피곤한 일이다. 한국에서는 진짜 상상하기 어렵다. 그래서 선주 까를로에게 산살보에서 제일 빠른 인터넷이 되는 카페가 어디냐고 물었다. 언제나 친절한 까를로는 한 카페를 알려줬다. 오늘 급한 서류를 만들러 일부러 운전해서 갔다. 커피와 빵, 아기를 위한 우유까지 사고, 와이파이 비밀번호를 물으니 여종업원이 토끼 눈으로 되묻는다. 무슨 와이파이? 우리 카페는 와이파이 없어. 시간은 이미 3시. 라모나가 퇴근하기 까지 1시간 남았다.
젠장 젠장! 이탈리아. 이탈리아 녀석들. 급한 마음에 혀를 데어가며 커피를 마시고 빵은 포장해서 돌아오는 길에 데카트론에 들러 저녁식사를 준비할 휴대용 가스버너와 부탄통 10개를 샀는데, 아뿔싸, 종업원이 같은 비용을 두 번 결재했다. 즉시 차를 돌려 데카트론 가서 상황을 말하니, 문자만 그렇게 온 것이고, 실제로는 돈이 결재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핸드폰을 들이대며, 뭔 소리냐? 이렇게 두 번 돈이 나가지 않았느냐? 열심히 설명해도 이 아이는 전혀 요지부동이다. 바쁜 것은 나니까, 그럼 내일까지 내 계좌에 돈이 다시 들어오지 않으면 내가 다시 올게. 그러자 이탈리아 종업원은 우리 데카트론은 세계적인 회사야. 절대로 그냥 돈을 먹지 않아. 내일이면 반드시 돈이 재 입금 될 것이야. 물론 데카트론은 그렇겠지. 그러나 너는 전혀 글로벌 하지 않다. 라고 나는 속으로 말하고 일단 급한 일부터 처리하러 배로 왔다.
컴퓨터를 켜고 일을 시작하려니 예쁜 우리 딸이 안아달라고 난리다. 간신히 아내에게 인계하고 다시 일에 빠지려는 순간. 배에 수돗물이 나오지 않는다고 아내가 난리다. 청수탱크 레벨게이지를 점검하려고 물을 다 빼놓은 것 같은데, 그런 저녁식사는 어떻게 준비한다? 그래? 그럼 폰툰에서 재료 손질하고 설거지 하지 뭐. 선주와 딜러에게 상황 문자를 하고, 뿔난 아내를 달래놓고, 다시 일에 집중하려는 순간. 선주와 딜러에게 동시에 이렇게 해봐라, 저렇게 해봐라, 동영상을 찍어 보내라 문자 퍼레이드다. 도무지 집중이 안 되는 상황에 나는 집중을 해야만 한다. 보험 가입 서류에 함부로 사인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고구마가 열 개로 늘었다.
어찌어찌 서류를 보내고 나니 오후 5시 30분. 나로서는 초인적인 집중력을 발휘한 거다.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이제부터는 차에 실린 짐들을 배로 옮겨야 한다. 이미 어두워진 마리나. 이탈리아에서는 해가 더 일찍 지는 것 같다. 관리 사무실에서 빌린 밀차 하나를 끌고 짐을 나른다. 어쩐지 처량하다. 꿈을 이루기 위해선 이런 초라한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이미 알고 있지만 그래도 슬그머니 처량하다. 왔다갔다 4번을 하고, 급히 쌀을 씻어 압력 밭 솥에 넣고 휴대용 가스버너에 불을 켠다. 밥은 금방 지어졌다. 다시 물을 끓여 라면 두 개를 넣고, 기세 좋게 계란도 두 개 풀어 넣는다. 오늘은 사치해도 좋다. 고생한 나를 위로한다. 문득 하늘을 보니 라면 끓이는 수증기 끝에 닿은 달이 무척 좋다. 불 켜진 마리나스베바의 야경이 아름답다. 마음이 훈훈해 진다. 그래 이 불편한 이탈리아에서 이탈리아 인들도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는데…
오늘 배에서 사용할 집기들을 일부 사서 처음으로 배에서 라면 밥을 해 먹었다. 갓 지은 밥에 라면. 약간의 김치. 하루 종일의 스트레스가 사라진다. 역시 나는 촌놈이고 밥 심이다. 뭐든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모든 절차가 잘 진행된다면 나는 2월 12~13일 출항 예정이다. 매일 억지로 열 개의 고구마를 우겨 넣어야만 해도, 어쨌든 내일은 고향까지 하루가 더 당겨지는 날이다.
첫댓글 읽고있는 내가 다 고구마 물없이 열개는 먹은듯 합니다
무사히 오셔서 물김치 많이 드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