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책은]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안개 속을 거닐고 있는가? 별거 아니다.
일곱 블록을 가득 채우는 안개라도 담으면 물 한 컵 분량밖에 안 된다!
“절망을 희망으로 바꾼 신인식 목사의 열정적 삶!”
4세 때 사고로 시력을 잃었으나 소명을 이루기 위해 거침없이 질주하고 있는 신인식 목사의 열정적 삶을 담은 책이다. 저자의 삶은 하나의 드라마다. 11세 때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 시각장애에도 불구하고 신문배달, 전화교환원, 학교 숙직, 댄스홀 드럼 연주 등 아르바이트를 공부와 병행했다.
저자는 장애인들이 편견과 냉대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다가 그들을 도우면서 복음을 전하겠다는 꿈을 꾸게 되었다. 시각장애인의 알권리를 충족시키기 위해 고등학교 졸업 후 『사랑의 메아리』라는 테이프 잡지를 창간했고 1994년에 세계 최초의 무형(無形) 도서관인 ‘종달새전화도서관’을 개관했다. 특허까지 받은 종달새전화도서관은 전국 57개의 일간지와 웹 사이트 정보를 전화로 들을 수 있도록 서비스 하고 있다.
“내가 꿈을 향해 질주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사랑’이다”
고난을 이겨낼 때 사랑은 보석처럼 단단해진다.
저자가 좋아하는 속담은 “열 번 찍어 안 넘어 가는 나무 없다”이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선교회 일을 하면서 자금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지만 음악회를 열어 난관을 극복하는 등 남들은 불가능하다며 말리는 일에도 열 번, 백 번이 될 때까지 찍어서 나무를 넘어뜨렸다. 종달새전화도서관 또한 매달 엄청난 유지비가 필요하지만 순수하게 후원금으로 운영하고 있다. 자녀들을 유학 보낼 수 없는 형편이었는데도 믿음으로 보냈고, 자녀들 스스로 학비를 벌어서 공부할 만큼 자립적이고 용감한 청년들로 성장시켰다.
약하고 소외된 자들을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며 아낌없는 사랑을 전하는 저자는 남부러울 것 없는 ‘행복 부자’, ‘감사 부자’다. 고난의 비바람이 몰아칠 때마다 절망 대신 하나님이 세워 두신 계획에 편안히 몸을 싣고 기도를 드린다. 저자는 시각장애인이 된 것이 살아가기에는 불편하지만 자신의 삶 전체를 놓고 봤을 때 오히려 ‘복’이었다는 고백까지 한다.
『꿈꾸는 자의 무한도전』은 결핵으로 시한부 판정을 받았으나 기적적으로 치유 받은 이야기, 10년간의 기도로 최고의 아내를 얻은 이야기, 하나님이 모세를 키우신 방법으로 두 자녀를 양육한 이야기, 시각장애인이면서 이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이야기 등 고난을 이겨낸 뒤 얻은 값진 열매들을 소개하고 있다. 한 사람이 한계를 극복할 때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이 바뀐다는 것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이 책은 고단한 삶에 지쳐 있는 사람들에게 큰 힘과 용기를 준다.
[지은이_신인식 목사]
경남 의령군 가난한 시골집에서 태어나 4세 때 사고로 시력을 잃었다. 숱한 고난이 파도처럼 밀려왔지만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았고 꿈이 있었기에 절망 가운데 있지 않았다. 스스로 장애인이라는 한계를 정하지 않고 초등학생 때부터 신문배달, 전화교환원, 학교 숙직, 댄스홀 드럼 연주 등 일과 공부를 병행했다.
중학교 3학년 때 장애인 부모를 둔 자녀들이 심한 열등감을 겪으며 가정이 무너지는 것을 안타까워하다가 장애인을 도우며 복음도 전하겠다는 꿈을 꾸게 되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1978년에 한국맹인서비스센터를 설립해 장애인 자녀를 돌보는 일을 시작으로 시각장애인의 알권리를 충족시키기 위해 테이프 잡지, 『사랑의 메아리』를 창간했다. 1994년에 세계 최초의 무형(無形) 도서관인 ‘종달새전화도서관’을 개관, 시각장애인들이 불편 없이 정보에 접근하도록 했다. 종달새전화도서관 개관 초기, 국내 일간지 2종과 주간지 4종을 날마다 녹음해 전화로 들을 수 있도록 서비스해 오다가 기술의 발달로 현재는 전국 57개의 일간지를 전화로 들을 수 있고 전화를 이용한 웹 서핑 서비스도 하고 있다. 특허까지 받은 이 시스템은 매일 5,000여 명 이상의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다.
10년간의 기도로 최고의 아내를 얻었으며 슬하에 남매를 두고 있다. 두 자녀 모두 중학생 때 미국으로 건너가 스스로 학비를 벌어 공부하는 자립적이고 용기 있는 청년들로 성장했다. 둘 다 UCLA 졸업 후 아들은 통역장교로 복무하면서 서울대학교 대학원에, 딸은 한동대학교 로스쿨에 재학 중이다.
어떤 상황에서건 웃음을 잃지 않고 주변에 긍정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저자는 성악가 뺨치는 노래 실력을 갖고 있으며 피아노, 드럼, 트럼펫 등 각종 악기도 멋지게 연주할 수 있다.
서울장로교신학대학교 졸업 후 미국 페이스신학교(Faith Theological Seminary)에서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명지대학교에서 사회복지학 석사 학위와 대구대학교 재활과학대학에서 이학박사(직업재활 전공) 학위도 취득했다. 현재 종달새전화도서관 관장과 한국시각장애인기독교연합회 회장으로 섬기고 있다.
종달새전화도서관 02-2022-4800
[본문 맛보기]
한마디로 저는 수준급 코미디언입니다. 그 정도로 웃긴 편이라고 합니다. 저를 만나는 사람들은 늘 제 유쾌함에 반해 금세 따라 웃습니다. 예를 들면 장애인용 지팡이를 짚고 버스에서 내릴 때 큰 소리로 외칩니다. “여러분!” 그러면 온갖 이목이 제게 집중되지요. 뭔가 팔려고 그러는가 보다 합니다. 그러면 저는 “여러분! 저 요번에 내립니다!” 그러고는 아카데미 시상식장의 레드 카펫을 밟는 영화배우처럼 우아하게 버스 계단을 내려옵니다. 버스는 웃음 폭탄이라도 맞은 것처럼 들썩거립니다. 제가 다 내려가도록 문은 닫히지 않고, 모두 저를 응원하며 지켜봅니다. 따뜻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고 손을 흔들고 파이팅을 해 줍니다. 물론 불쌍하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미친 거 아니냐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제 귀는 좋은 말만 듣습니다.
오늘 저와 함께하는 여러분에게 이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 고난을 즐기면 행복이 보입니다!” 좀 맥 빠진 표정을 지으실지도 모르겠네요. 고난 끝에 오는 건 피로뿐이라고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호흡을 좀 길게 하고 시야를 넓게 하고 스스로를 믿는 마음으로 견딘다면 고난은 분명 행복을 여는 열쇠로 변합니다.
--<책을 펴내며> 중에서
고등학교 2학년이 되어서는 마음이 급해졌다. 벌이가 좋던 전화교환원 일은 까마득한 추억이 되어 버렸고 숙직 일도 끝났고 댄스홀에서의 드럼 아르바이트도 지속적인 일감은 아니었다. 뭘 해서 돈을 벌어야 하나 궁리하느라 잠을 설친 어느 아침에 교무실에 갔다. 일찍 출근하신 선생님은 그날도 신문을 보고 계셨다. ‘바로 이거다. 신문 배달을 하면 되겠다’ 싶었다. 그날 오후 신문사를 찾아갔다.
모 일간지 대구지국이었다. 더듬더듬 문을 열고 들어가 옷깃이 스친 사람에게 책임자를 만나게 해 달라고 하니 무슨 일인가 물었다. 신문 배달을 하고 싶어서 왔다고 했다.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게 느껴졌다. “그런데 혹시……. 장님 아닌가? 이거 보이나?” 내 얼굴 앞으로 손을 갖다 대고 흔들었다. "보이지 않습니다.” 그는 혀를 차며 말했다. “하이고, 살다 살다 별일을 다 보네. 앞도 못 보면서 배달 일을 한다고? 차림새를 보니 동냥 온 것 같지는 않은데, 그냥 돌아가라.(중략) 아침부터 재수 없게 장님이 들어와서 헛소리를 하다니. 당장 나가!” 사람들이 수군수군하는 소리가 들렸다.
다음 날 또 갔다. 누군가 또 등을 떠밀었다. 나가지 않겠다고 버둥거리니 또 한 사람이 와서 양팔을 잡아끌었다. 밖으로 나와 택시를 잡아서 나를 밀어 넣었다. (중략) 그 다음 날부터 수업이 끝나면 거기 가서 앉아 있었다. 책임자를 만나게 해 달라고 했지만 아무도 대답을 안 했다. 그래도 갔다.
일주일을 찾아간 후에야 윗분이 계신 방에 갈 수 있었다. “월급은 안 받을 테니 신문 배달만 좀 하게 해 주십시오!” 아무 대답이 없었다. “소원입니다. 신문 배달만 좀 하게 해 주세요!”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게 왜 그렇게 소원이냐?” “저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 드리고 싶습니다.”(중략)
그렇게 시작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시각장애인 신문배달원이 된 것이다. 150집이 내 담당이었다. 집집마다 신문을 돌리려면 8~10km 정도의 거리를 걸어야 했다. 나를 가르쳐 주기로 한 지국의 총무 아저씨는 담배를 길게 한 대 태우시더니 한숨을 쉬었다. (중략)
길을 알려 준 그날 밤에 가서 복습했다. 이틀 사이 같은 길을 네 번 다닌 셈이다. 3일째 되는 날 혼자 배달하겠다고 선언했다. 뵈는 게 없으니 겁도 없느냐는 비난이 쏟아졌지만 나는 할 수 있다고 되풀이해서 말했다. 맡겨 보시라고, 자신 있다고 말했다. 배달 실수하면 그걸로 끝이라고, 다음에 절대로 기웃거리지 말라고 하셨다. 그러겠다고 웃었지만 속으로는 굳은 결심으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렇게 혼자서 신문 배달을 나갔다. 마지막 집 신문까지 무사히 넣고 휘파람을 불며 돌아서는데 누군가 내 손목을 잡았다. 총무 아저씨였다. 불안해서 내 뒤를 따라온 것이다. 수고했다며 어깨를 두드려 주셨다. 한 집도 안 틀렸다며, 3시간 10분 만에 배달 완료면 초짜치고는 신기록이라고 축하해 주셨다.
--3장 마음의 눈으로 세상을 더 크게 본다 <시각장애인 신문배달부> 중에서
어렵사리 만든 경비 400달러를 들고 갔는데 일주일이 지나니 집사람에게서 연락이 왔다. 어렵게 입을 열고 하는 말은 돈이 없다는 것이었다. 홀몸도 아닌데 생활비를 주고 오지 못한 나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웠다. (중략) 가져갔던 400달러를 반으로 나누어 어머니와 아내에게 부치고 나니 빈털터리가 되었다. 뭘 먹고 지내야 하는지 막연했지만 불안을 애써 참았다. 나는 언제 어디서든 혼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기도를 시작했다. “하나님, 국제 거지 만드시려고 미국까지 보내셨습니까? 돈 한 푼 없이 미국에서 어떻게 생활합니까?” 막무가내의 뜨거운 기도를 했다. 하룻밤 자고 난 오후에 김길홍 목사가 함께 심방을 가자고 했다. 그 집에 가서 앉자마자 집주인은 이렇게 말했다. “전도사님에 대해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16년 전에 오른팔을 다쳐서 팔을 올릴 수 없습니다. 좋다는 약도 먹어 보고 용하다는 침도 맞아 보고 안마도 받아 보고 안수까지 받아 봤는데 낫지를 않습니다. 전도사님이 치료를 좀 해 주십시오.”
하나님이 만나게 하셨다는 것을 알았다. 온 마음을 다해 기도를 올린 후 그 팔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한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주무르고 침을 놓았다. 그런데 그 팔이 서서히 올라갔다. 16년 동안 꼼짝도 않던 팔이 마치 나를 기다리기라도 했던 것처럼 멀쩡해졌다. (중략) 너무나 고맙다며 내게 그 자리에서 500달러를 주셨고, 그걸로 먹고사는 일을 해결할 수 있었다. 국제 거지를 면한 것은 물론이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계획하고 이루심을 어리석은 내가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에서 지낸 6개월 동안 다양한 경험을 했다. 교포 분께서 한미재단을 만드는 데 도움을 드리는 와중에도 일감이 몰려왔다. 틈틈이 일을 하면서 1만 달러를 모을 수 있었다. 돈도 돈이지만 내가 피아노 치고 노래 부르고 설교를 하면 다들 너무나 큰 감동을 받는다니 그게 더 기뻤다. 거기서 함께 지내자는 말씀들을 많이 하셨다. 살기에 편하고 장애인 정책이 잘 되어 있으니 한국에 돌아가서 식구들을 다 데리고 들어오라는 말씀들도 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반대였다. 내가 살 곳이 어딘지,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확인했다. 살기도 편하고 돈 벌기도 편한 미국이지만 여기에서 장애인들이 대접받는 것을 보니 우리나라 장애인들 생각이 더 났다. 편견과 냉대 속에서 번듯한 기회조차 없이 살아가는 대한민국의 장애인들을 위해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다.
--4장 또 다른 큰 걸음이 시작되다 <마음으로 세상을 볼 때 더 감격스럽다> 중에서
나는 하나님이 세워 두신 계획에 편안히 몸을 싣기로 했다. 언제든 걱정 대신 기도를 드려 온 나인데 결혼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그해 10월, 서울 강서구에서 김택수 목사님 부흥회에 전도사로 참석하게 되었는데 담임 교역자 여동생 분에 대한 말씀을 듣게 되었다. 믿음이 아주 깊은 전도사인데 결혼에는 관심도 없고 언제나 소녀같이 살고 있는 사람이라고, 나와 어울릴 것 같다고들 하셨다. 내 마음도 공연히 소년처럼 설레며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복음성가를 부르는 내 모습을 그녀의 부모님께서 보셨다고 했다. 깊은 감동을 받으셨고, 젊은 사람 같지 않게 진중하고 믿음이 간다는 말씀을 내게 하셨다고 했다. 더욱 기대가 되었다.
10월 마지막 날 드디어 그녀를 소개받았다. 강남 고속버스터미널 근처의 백화점에서였다. 다른 분과 함께한 자리였는데 소녀처럼 발랄한 음성과 친절하고 명랑한 분위기에 반해 버렸다. 가슴이 너무 뛰어서 무슨 얘기를 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바로 그 다음 날부터 우리는 매일 만났다. (중략) 살아온 이야기, 미래에 대한 꿈과 계획, 서로의 추억들을 나누면서 사랑에 빠져들었다. 늦게 만난 만큼 더 간절한 마음이었다. 우리는 만나던 순간 서로가 운명임을 직감했고, 일주일 만에 약식의 약혼식을 올리고 45일 만에 초스피드 결혼을 하게 되었다.
--5장 가족이 있어 무엇이든 가능하다 <10년간의 기도로 얻은 최고의 아내> 중에서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낯선 주위 환경은 모두가 장벽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에 걸려 넘어질 수 있고 다칠 수 있다. 그래서 시각장애인용 지팡이를 짚어 가면서 천천히 걸어가지만 내가 걷고 있는 바닥이 벼랑 끝인지 물길 앞인지 알 수가 없다. 걸음걸음이 불안으로의 도전이지만 언제나 그걸 견디고 이겨 내야만 한다. 그래야 원하는 곳에 도착한다. 하지만 가끔씩 만만치 않은 장벽도 만나게 되는데 그럴 때 그게 진짜 장벽이라고 받아들이고 주저앉으면 바로 그 자리가 자신의 한계가 되어 버린다. 그게 장벽일 리 없다고 넘고 또 넘는 노력을 한다면 바로 그 자리가 도약대가 된다.(중략)
신학대 졸업반이 되었다. 전도사를 결정하는 시간이 되었는데 나는 당연히 내게 그 자격이 있다고 믿었다. (중략) 그런데 예상 밖으로 전도사가 될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왜 그런가 알아보니 시각장애인이라면 활동의 제약이 있어서 제대로 전도사의 일을 할 수 없을 거라는 이유였다. 모두 반대한 것은 아니지만 반대한 몇 사람들이 있다고 했다.
큰 쇼크를 받았다. 다른 곳도 아닌 교회에서 나를 믿어 주지 않다니, 늘 나를 봐 오던 사람들이 나의 능력을 의심하다니 믿을 수 없었다. 힘들었다. 하나님 역시 모두의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이시지만 그분이 계심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곳이 바로 교회 아닌가. 그런데 바로 그곳에서 볼 수 없는 사람은 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다니 절망스러웠다. 아니, 잠시 절망했다.
기도를 시작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기도뿐이었다. “하나님, 저를 대체 얼마나 크게 쓰시려고 이런 상처를 주십니까. 어떤 계획을 하고 계시기에 이런 경험을 하게 하십니까. 기다리고 또 기다리겠습니다.” 오래지 않아 기도는 응답을 받았다. 모든 일에는 정해진 때가 있다는 걸 알았다. 내가 안달복달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신다. 순서대로 알아서 해 주신다. 다음번에 나는 드디어 전도사가 되었고 기다린 만큼 더 열심히 일할 수 있었다.
--6장 꿈을 향한 무한도전은 끝나지 않았다 <도전이 편견을 한 겹 한 겹 벗겨 낸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