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지용의 시구가 생각났습니다.
'유리창'이라는 시를 아는 분들은 대개 기억하실 구절이에요.
"물 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
아들을 일찍 떠나 보낸 정지용이 어느 날 밤
유리창 밖 별을 올려다보다 쓴 시였다고 기억합니다.
시인이 말한 '물 먹은 별'을 이해할 만 했는데
'보석처럼 박힌다'는 말은 정말 가슴에 와 박히는 통증이 그대로 전해지는 듯 했어요.
저는 어린 아들을 먼저 보낸 시인의 통증만큼은 아니겠지만
이제 하늘로 떠나신 정선생님을 생각하니 마음에 차오르는 뭉클함이 그 구절을 떠올리게 했어요.
저도 좀 놀랐는데
정 선생님에 대해 기억하는 장면이 그다지 많진 않았는데도 이럴 수 있다는 게
그 이유가 실감나서 새삼 자각하게 되는 점이 있었습니다.
정 선생님을 자주 뵌 건 아니었어요. 만남은 손으로 꼽지요. 그런데도
한 번 한 번의 만남이 각인될 만한 인상을 강렬하게 주신 분이었어요.
가장 각인된 기억은 물먹은 별 같은 눈으로 양평 집에서 저희를 배웅하시던 눈빛과 표정이었습니다.
그때가 처음 뵌 날이었을까요?
정 선생님은 알트루사를 좋아하셨어요. 저희도 좋아하셨어요.
그날 저희는 사진을 찍지 않았는지 카페에서 아직 그날 사진을 찾지 못했는데요
기억에 한 열 명 정도가 찾아뵈었던 것 같아요.
명사의 집을 찾으며 긴장을 했었는데
기다란 식탁에 폼나는 식사를 준비하시고는 편안하고 진솔하게 이야기 나누었던 걸 기억합니다.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마지막에 헤어지면서 선생님은
물먹은 별 같은 눈으로 헤아지기 아쉬운 표정과 인자함으로 저희를 바라보고 인사하셨어요.
저에게는 뜻밖의 표정이어서 내내 기억에 담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진짜 저희를 좋아하시는 것 같았거든요.
청강문화산업대학에 문선생님과 함께 동행한 적도 있지만
문선생님이 가실 수 없을 때 몇 사람만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개인으로 만나 이야기 하시든 많은 이들 앞에서 강연을 하시든
말투와 어조와 농담하는 태도가 똑 같은 것도 재밌는데
자기만의 방식으로 솔직하고 예리하게 단호함이 배인 어조로 말씀하시는 매력이 있으셨어요.
그때도 놀랐어요.
내세울 것도 없는 저희 몇 사람을 알트루사에서 온 이들이라고
명사들을 대하는 태도와 다를 바 없이 진실하고 성의 있게 챙기셨거든요.
선생님은 알트루사를, 모람들을 왜 좋아하셨을까요?
신년이사회가 열렸던 홍대앞 밥집에서는
이화여고 교장을 지내시던 때 학생이었던 모람과 같은 이사로 마주 앉아 인사하고 대화 나누는데도
여전히 같은 어조로 격의 없이 수평적인 관계임을 강조하시며 이야기 나눈 기억이 납니다.
알트루사 와서 문 선생님을 뵙고도 신기했는데 정 선생님도 신기했어요.
두 분이 생각이 다를 때
속도감 있고 분명하고도 단호하게 서로 주고 받으시는 대화를 지켜보는 것도 전 꽤 재밌었습니다.
이번에 드라이브와 카페에서 정 선생님 흔적을 찾다가 좀더 분명히 알게 됐어요.
정 선생님은 알트루사에서 펼치는 운동의 소중함을 알아보신 분이셨어요.
정신건강사회운동의 가치를 알아보고 응원하신 흔치 않은 왕언니셨어요.
독자적인 신생 사회운동의 가치를 알아보는 아직은 적은 수의 동지셨어요.
그걸 깨닫게 되니 얼마나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더라고요.
제 마음에 물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히는 이유를 알겠더라고요.
이번에 크게 실감했습니다.
단 몇 차례의 만남도 이렇게 사람 마음에 큰 자국을 남길 수 있다는 점을요.
살면서 단지 몇 번만 만난다 하더라도
어떤 마음으로 만나는지에 따라서
얼마나 진실되고 성의를 갖는지에 따라서
만남의 횟수와 상관없이 깊은 영향을 남길 수 있다는 사실을요.
사람을 어떻게 대하고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또 깨닫게 하시더군요.
계간『니』12호에서는 문 선생님이 정 선생님을 인터뷰하신 글이 있습니다.
문 선생님 글을 모은 『 눈치보는한국여자 』를 발간할 때는 정 선생님이 쓰신 추천사도 있어요.
함께 나누고 싶어 옮겨옵니다.
추천사
청강문화산업대학 이사장 정 희 경
인간들이 어울려 사는 사회에 언제인들 문제가 없었겠습니까. 그리고 늘상, 전혀 생소한 사회변화에서 섬뜻 섬뜻 느끼게 되는 당혹감이나 민망스러움도 어느 시대인들 없었겠습니까. 나의 그다지 짧지만은 않은 삶속에서 주워 올린 생각입니다. 그래서 어느 시대에도 지각있는 지성인들은 늘 그러한 문제들을 해결코자 모진 애를 써 온 게 아니겠습니까. 그 분야가 학문이었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이었든 각자의 무대에서 열심히 문제해결과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기 위해서 노력했겠지요.
여기 우리네 사회를 정신건강의 안목으로 진솔하게 들여다 보고 개선방안을 몸소 실천하는 여성지도자가 계십니다. 한국 알트루사 회장 문은희 박사입니다.
그분은 요란스럽지도 시끄럽지도 않고 (형학적이지도 않으나) 어수선하지도 않으며, 차분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이 나라 사회와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력으로 글을 쓰고 일을 하는 분입니다. 문은희 박사는 개인의 건강하고 성숙한 마음들이 건강하고 성숙한 사회를 만드는 터전이 된다고 믿고 있는 듯 합니다. 그분의 학문으로만이 아닌, 심신을 온전히 개인과 사회의 정신건강을 위하여 헌신하는 모습이 내게 늘 감동이 되어 왔습니다.
인간이 따라잡기 힘든 속도로 변화하고 있는 세계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심각한 마음의 병들을 얻게 하는 요즈음, 문은희 선생의 “인간의 마음”에 보는 짧은 글들이 세미한 맑은 물줄기되어 흙탕물을 진정시키는 역할을 할 것으로 믿습니다. 미사여구로가 아니라 정확하고 사려깊은 표현으로 쓰여진 글들은 정신 건강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분들에겐 필독서로 마음에 상처입은 사람에게는 잔잔한 위안이 될 것으로 믿어져 감히 일독을 추천합니다.
.........................................
하늘에서도 정신건강사회운동을 응원하는 동지로 거기서 함께 사실 것 같습니다.
선생님같이
물 먹은 별과 같은 눈과 마음으로 선생님을 보내며 마음에 담습니다.
선생님의 응원을 마음에 담고 더 재미나고 뿌듯하게 문 선생님과 모람들과 함께 하고 싶네요.
-한문순
첫댓글 문선생님 글 덕분에 정선생님에 대해 좀 더 알게 되었네요. 감사합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