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 역사 이야기
아들아..너는 지금으로 부터 2천년 전 쯤에 한반도 남부에 자리잡고 있었던 나라..
가야(伽倻)를 아느냐?
가야란 나라는 오래도록 잊혀졌고..역사에 남은 기록이 많지 않아 아직도 미지의 나라라
할 수 있지.
가야라 하니..하나의 나라 같지만, 그렇진 않아.
가야란 이름을 가진 나라는 최소한 6개국이었고, 10개국 이상이라는 것도 분명해
보이는구나.
대가야의 고분군(고령 지산동 고분군)
우리나라의 옛 사서인 일연스님이 저술한 삼국유사에 전하는 것은, 김수로..
그가 건국한 금관가야 중심의 건국신화인데..여기서 6가야의 이름이 나온단다.
김해의 금관가야(金官伽倻), 함안의 아라가야(阿羅伽倻), 고령의 대가야(大伽倻),
고성의 소가야(小伽倻), 성주의 성산가야(星山伽倻), 상주 함창 또는 우리가 사는
진주에 비정되는 고령가야(古寧伽倻)가 나오지.
하지만 그게 가야의 전부가 아니란걸 아들아 너도 알 것이다.
넌 이미 창녕의 가야 고분군을 봤다. 그곳은 비화가야가 있었다 한다.
합천엔 가야의 일원인 다라(多羅)라는 나라가 있었다고 해.
가야는 하나의 통일된 나라를 이루진 못했지만, 여러 나라가 가야란 이름으로 하나로
뭉친 것이니..가야연맹이라고들 하지.
비화가야의 흔적(창녕 교동고분군)
지금 가야의 영역으로 지금의 서부 경남지역과 낙동강 유역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새로 밝혀진 것은 지리산과 덕유산을 넘어 일부 전라도 지역까지도 가야의 영역이었다
하는구나. 가야는 고구려, 백제, 신라와 더불어 4, 5백년을 존속해온 나라였단다.
물론 가야가 그중에서 가장 먼저 역사 속으로 사라져갔지. 하지만 가야가 없는 시간은
그중에서 약 1백년 정도란다.
그럼에도 우리는 역사를 배울때 고구려, 백제, 신라만을 들어 삼국시대(三國時代)라
하는 것은..가야가 하나의 통일국가를 이루지 못했고, 나머지 다른 삼국과는 달리
율령반포나 관제정비 처럼..고대국가의 틀을 완전히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다른 삼국과
같이 동일 선상에서 보지 않기 때문이다.
아들아..하지만 가야는 분명 실재했던 나라란다.
비록 다른 삼국처럼 강력한 나라로 성장하여 크게 뻗어가진 못했지만, 분명한 것은
가야는 백제와 신라 사이에서 독립성을 지키면서 이어져 왔고, 다른 삼국과 비교해도
전혀 뒤지지 않는 높은 문화의 힘을 가진 나라였다는 사실이다.
철(鐵)과 철을 다루는 기술은 고대 국가의 국력의 원천이 되는 것이지.
가야는 풍부한 철과 뛰어난 제철기술을 가진 선진적인 나라였으며, 또 활발하게 대외
활동을 하였던 나라로 나름 강한 국력을 가지고 신라와도 맞섰고, 활발한 해외무역을
했던 강하고 부유한 나라였지.
또 가야사람들이 왜국으로 건너가 일본에 선진문물을 전하기도 하고,
왜(倭)에 진출하여 그 나름의 영역을 새로 개척하기도 했을거야.
옛 대가야의 왕도였던 고령(高靈)에 가면 고천원(高天原)공원이라고 있는데..
고천원은 일본왕실의 본향이라고 알려져 있는 곳이야. 물론, 확실한 것은 아닌지라..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이것 또한 가야와 왜의 밀접한 관련이 있는 역사의 한 단면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지.
금관가야 시조 수로왕릉(김해)
아들아..옛 가야연맹은 여러 수많은 나라가 모여 있고, 그중에서도 강한 나라가 연맹의
중심이 되어 가야를 이끌었는데..김해의 금관가야, 함안의 아라가야, 고령의 대가야가
강국의 반열에 들었고, 초기엔 김수로왕(金首露)를 시조로 하는 금관가야가..
후기엔 이진아시왕을 시조로 하는 대가야가 맹주가 되어 가야를 이끌었단다.
초기와 후기 가야연맹을 가르는 중대한 사건이 있단다.
그것은 아들아..아마도 너는 상상하기 힘들거야.
바로 서기 400년 고구려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의 남정(南征)때문이었지.
고구려의 라이벌..백제의 아신왕이 고구려를 견제하려고 고구려의 우호국이었던 신라를
가야, 왜와 더불어 공격해 신라가 큰 위기에 처했단다. 그렇게 위기에 처한 신라는
고구려에 구원을 청하였고, 광개토태왕은 무려 5만 보기군을 보내 신라를 구했는데..
온 몸을 찰갑으로 감싼 개마기병을 앞세우고 화살도 튕겨내며 돌격해 오는 고구려군은
그야말로..공포의 존재였을거야.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지나가지..고구려 기마병이 한반도 최남단까지 진출했다는 것을.
상상도 못했을걸?
하여튼 그 광개토태왕의 고구려군에게 가장 큰 피해를 본 나라가 바로 가야였단다.
아라가야의 갑주(함안박물관)
대가야 기마병 동상
그렇게 저 북쪽에서 온 고구려군은 한반도의 최남단까지 진출해 종발성에 이르렀는데..
이 종발성의 위치를 부산일대 또는 김해의 분산성(盆山城)이라고들 보고 있단다.
특히 종발성이 만약 김해 분산성이라면..그것은 금관가야의 왕도를 내려다보는
뒷산을 고구려 대군이 점령했다는 말이 되지. 한마디로 금관가야는 거의 멸망 직전까지
갔다고 봐야 할거야.
그렇게 초기 가야연맹의 맹주인 금관가야가 힘을 잃고, 그 자리를 후기 가야연맹의
맹주인 대가야가 대신하게 되었지.
백제와 신라 사이에 끼인 가야는 두 강국 사이에서 더이상 성장하지 못하고,
백제와 신라 두 나라에 흡수되어 역사에서 사라져 가게 돼.
특히 가야의 영역 대부분은 신라가 점령하게 되는데..신라의 전성기를 연 진흥왕때
이루어지게 되지. 먼저 금관가야가 결국 신라에 나라를 들어 바치며 멸망하였고,
후에 대가야는 백제와 연합해 신라에 맞섰지만..옥천의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와
더불어 신라와 전투하다가 크게 패하면서 나라의 힘을 잃고 10년이 못되어 신라의
침공을 받고 멸망하게 돼. 그것이 가야의 최후였단다.
아들아..가야에 대한 역사는 아직도 너무 많은 것이 잊혀지고 흔적이 희미한 미지의
영역이란다. 하지만..일부 남아있는 단편적인 역사서 속의 가야에 대한 기록과
가야 고분군 그리고 환두대도, 갑주와 같은 무기류, 금동관 그리고 여러 수준높은
장신구들..또 예술성 높은 가야의 토기들이 남아 가야인들의 문화수준을 알 수 있단다.
그뿐만이 아니지..가야인의 음식과 의복, 순장 풍습같은 생활상도 들여다 볼 수 있는
유물도 있단다.
가야인의 유골도 몇 있는데..그걸 분석해 보니 가야에는 여자 무사도 있었단다.
2천년 전에도 여군이 있었다는 증거지.
그리고 이땅에 남아있는 김해 김씨와 허씨, 인천 이씨가 바로 금관가야의 피를 이어받은
사람들이고, 가야금이란 악기도 바로 가야의 것, 대가야 출신 악성 우륵이 만든 것이지.
그렇게 우린 알게 모르게 가야의 유산을 쉽게 접하고 살았던 것이란다.
직성자:방랑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