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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델"(Bethell) "배설"(裵說)
이 이름은 고등학교때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리 깊이는 알지 못했다.
이분의 묘를 찾기 전에 먼저 이분에 대해 조금 알아보려고 한다.
"베델"(Bethell)은 1872년 11월 3일 영국 "사우스웨스트잉글랜드"(South West England)지역의 항구도시인
"브리스틀"(Bristol) "비숍스턴"(Bishopston)에서 아버지 "토마스 핸콕 베델"(Thomas Hancoc Bethell)과
어머니 "마서 제인 홀름"(Martha Jane Hollom)사이에서 태어났다.
형제로는 누나 1명과 남동생 2명이 있었다.
대한제국에서 활동할 당시 한국 이름은 "배설"(裵說)이다.
일본으로 건너갈 때까지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브리스틀 비숍스턴"에서 보냈다.
"브리스틀" 최고 명문인 "머천트 벤처러스 학교"(Merchant Venturers School)에서 수학했다.
이 학교는 1909년 "브리스틀 대학교"(University of Bristol)에 통합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학교 졸업 후 17세인 1888년 일본 "고베"(神戶)로 와서 아버지와 동업한 아저씨의 무역회사에서 근무하였다.
점차 현지 생활에 익숙해지자 독립하여 1899년 큰동생 "허버트"와 "베델 브라더스"라는 무역상을 경영했다.
사업은 일본인이 좋아하는 영국 물품을 수입하거나 일본의 골동품, 죽공예품, 병풍 등을 영국에 수출하는 업종이었다.
"요코하마"(橫濱)를 자주 왕래하면서 의욕적으로 사업 확장을 모색하였으나,
경험 부족 등으로 일본인으로부터 여러 차례 피소를 당하기도 했다.
난관을 극복하고 1904년까지 16년 동안 "고베"에 살면서 무역업에 종사하여 상당한 부를 축적하였다.
1900년 "마리 모드 게일"(Mary Maude Gale)을 만나 이듬해 "고베"(神戶)에서 결혼했다.
천성이 외향적이고 활달하여 운동과 음악을 좋아했다.
체계적인 음악 교육은 받지 않았으나 타고난 재능을 지녀 청중들 앞에서 코믹송 노래를 즐겨 불렀다.
체스도 잘 두는 등 다양한 능력을 가졌다.
"고베"의 "레가타"(요트)와 체육클럽(Kobe Regatta & Athletic Club (KR&AC)의 사무국장 재임 때인
1901년 6월에는 새로운 보트하우스를 낙성하고 대대적인 레가타 대회를 개최할 만큼 적극적이었다.
자신이 요트나 수영대회 등에 직접 참가하여 수상하기도 했다.
1901년 7월경에는 "오사카" 근처 항구인 "사카이"(堺)에 "러그"(rug)공장을 차렸다.
"러그"는 마루나 방바닥에 까는 거칠게 짠 직물이나 무릎을 덮는 담요 등을 말한다.
중계무역에서 벗어나 직접 생산한 물건을 영국으로 수출하려는 의도였다.
"재팬 크로니클"(The Japan Chronicle)은 이 공장에서 생산된 제품이 터키에서 생산된
최고품과 외견상 차이가 없을 정도라고 평가하였다. 그럼에도 러그 사업은 실패했다.
흩어져 있는 여러 공장을 한 곳에 옮기려 하였으나, 일본인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쳤다.
조합원들 가운데 일부는 이들 형제를 사카이에서 추방해야 한다는 험악한 분위기였다.
언론도 이에 가세하여 악의적인 기사를 게재하는데 앞장섰다.
더 이상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공장 문을 닫았다.
러그 사업 실패 후 재기를 모색하려는 와중에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발발했다.
"러일전쟁"은 전쟁 결과에 따라 동북아 국제 질서가 요동치는 생생한 현장이자 최전선이었다.
이에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제국주의 열강은 전쟁 상황을 취재하기 위하여 경쟁적으로 일본과 한국에 기자들을 파견하였다.
"베델"(Bethel)이 한국과 인연을 맺은 시기는 이때부터이다.
1904년 3월 10일, "베델"(Bethel)은 영국 "데일리 크로니클"(Daily Chronocle)의 특별통신원 자격으로 한국에 들어왔다.
서울 도착 직후부터 2월에 먼저 파견된 특별통신원 "토마스 클라크 코웬"(Thomas Clark Cowen)을 도와 전황을 자세히 취재하였다.
그러나 취재 내용이 제대로 보도되지는 않았다.
영국 국내는 물론 한국에서도 일본군 동향과 관련하여 엄격한 언론 통제와 검열 지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본사 간부진은 "영일동맹"으로 인하여 일본에 우호적인 관점에서 보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베델"(Bethel)은 1904년 4월 14일 "덕수궁 화재사건"이 발생하자
이를 심층적으로 취재하여 "한국 황궁의 화재"라는 기사를 작성하였다.
"데일리 크로니클"은 이 기사를 4월 16일자 제5면 톱으로 보도하였고,
제8면에는 고종(高宗)의 초상과 서울 풍경을 스케치한 그림을 게재하였다.
신문기자로서 첫 번째 특종이었다.
그러나 얼마 후 "코웬"과 함께 특별통신원에서 해고되고 만다.
특별통신원에서 해고되자 곧바로 "대한매일신보" 창간 착수에 들어갔다.
국제적인 관심사로 부각된 한국에는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영자 신문"이 전혀 없었다.
주한 일본공사관은 신문 발간에 필요한 자금 지원을 약속하였다.
"양기탁"(梁起鐸) 등도 일제 만행과 한국의 실상을 국제 사회에 알리는 신문 창간을 원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약속은 일본의 배신으로 지켜지지 않았다.
이에 일제 침략상을 고발하는 "국한문혼용, 순한글, 영문판 등 3개 신문 발행에 나섰다.
"코웬" , "양기탁" 등과 신문 창간 준비에 착수하여 1904년 6월 29일 견본판을 만들었으며 7월 18일 창간호를 발행하였다.
전체 6면 중 영문판 4면, 한글판 2면이었다.
영문판 제작은 미국인 "호머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가 도와 주었다.
헐버트는 "코리아 리뷰(Korea Review)를 발행하는 한편
1903년에 영국 "더 타임스"(The Times) 한국 주재 통신원으로 활약하며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던 인물이었다.
1905년 3월 자금난에 직면하자 신문을 휴간하고 인쇄 기계 구입을 위하여 일본으로 건너간다.
5개월 후인 8월 11일부터 신문 발행을 재개하였다.
이 때 영문판 "코리아 데일리 뉴스"(Korea Daily News)와 국한문 혼용판 "대한매일신보"를 분리하여 각 4면으로 발행하였다.
1907년 5월 23일 한글판을 발행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자금은 고종(高宗)이 하사한 특별자금이 중요한 재원이었다.
국한문혼용판과 한글판 "대한매일신보" 제작은 "양기탁", "박은식"(朴殷植), "신채호"(申采浩) 등이 맡았다.
영문판 발간은 그를 비롯한 외국인들이 담당하였는데, 주로 한국인들이 제공하는 국내 소식 등 정보에 의존하여 신속하게 보도했다.
신문의 경영과 편집에서 그가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고, 그를 도와 총무 "양기탁"도 편집과 업무 양면을 관장하였다.
"양기탁"은 재직 기간이 길었기 때문에 신문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이었다.
항일 신문을 만든 요인은 한국인의 성원과 열망에서 비롯되었다.
목적은 일제의 한국에 대한 무자비한 침략과 이에 맞선 한국인 저항을 국제 사회에 널리 알림으로
일제에 대한 국제 여론을 불리하게 조성하려는 의도였다.
이와 더불어 한국인의 항일의식을 고조함으로 항일투쟁을 크게 고취하는데 있었다.
"대한매일신보"는 1904년 7월 창간 직후부터 일본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비판하면서 일본공사관과 대립각을 세웠다.
일제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에 대하여 처음에는 부당성을 비판하는 수준이었다.
독자 투고란을 활용하여 일제의 침략 상황을 열거하는 가운데 점차 적극적인 비판 기사를 보도하였다.
그러자 "재팬 메일"과 "고베 헤럴드"는 8월부터 "코리아 데일리 뉴스"가
유해한 기사를 게재하여 한일 양국에 악감정을 조장한다고 주장하며 비난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대한매일신보"는 일제 침략 정책을 직접 반대하는 명확한 입장을 밝히는 등 대립각을 세웠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부터 일제의 부당한 침략 사건을 예로 제시하며 맹공을 퍼부었다.
아울러 일본 외교관의 안하무인으로 한국인을 멸시하는 태도도 비판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한국인의 배일감정이 고조된 궁극적인 원인은 토지를 약탈하려는 "황무지 개간권" 요구임을 강조하는 기사를 연속적으로 보도했다.
1905년 11월 17일 일제의 군사적인 압박 속에서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었다.
"장지연"(張志淵)은 "황성신문" 11월 20일자에 "이날을 목 놓아 크게 통곡하노라"(是日也放聲大哭)라는 명문을 게재하고
일제의 강압에 굴복하여 서명한 "을사오적"을 개나 돼지만도 못한 자들이라고 맹비난했다.
일제는 곧바로 "장지연" 체포와 동시에 " 황성신문"을 정간시켰다.
을사늑약 불법성에 관한 후속기사는 "베델"을 중심으로 "대한매일신보사"가 맡았다.
"대한매일신보"는 1905년 11월 21일 "황성의무"라는 논설로 "장지연"의 용기를 극찬했다.
“실로 대한 전국 사회신민의 대표가 되어 광명정직한 의리를 세계에 발현(發顯)하리로다.
오호라 황성 기자의 붓은 가히 해와 달과 더불어 그 빛을 서로 다투리로다.”고 하면서 격려도 아끼지 않았다.
"사장피착"(社長被捉) 기사에서는 "장지연"의 구속과 " 황성 신문" 정간 소식을 널리 알렸다.
다음날 기사에서는 러일전쟁 이후 일제가 국권을 탈취하고 가옥과 토지를 강탈할 뿐만 아니라
인명을 참살하고 재정을 고갈시키며 교육을 날로 쇠퇴하도록 만든다며 비판의 수위를 높였다.
나아가 "황성신문" 복간과 "장지연"의 불법적인 구류를 지적하는 한편 석방을 촉구하는 글을 지속적으로 보도하였다.
"반일 논조"(反日 論調)는 일제 침략에 비례하여 더욱 강도를 더해갔다.
11월 27일자 호외에는 한쪽 면에 "한일신조약청체전말"(韓日新條約請締顚末)을 한문으로 번역하고
다른 한 면은 영문으로 "시일야방성대곡"을 번역하여 불법적인 을사늑약임을 다시 강조했다.
한편 고종(高宗)은 일제의 한국침략 부당성을 세계 여론에 호소하고자 밀서를 각국에 보냈다.
영국 "트리뷴"(The Tribune)신문사 기자 "더글라스 스토리"(Douglas Story)에게도 마침내 "옥새"(玉璽)가 찍힌 밀서가 전달되었다.
“고종은 을사늑약을 조인하거나 동의하지 않았고, 일제의 한국 내정 간섭은 부당하며,
한국 황제는 세계 열강이 5년 이내 집단보호통치(신탁통치)를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스토리"는 엄중한 경계망을 벗어나 중국 산둥성(山東省) "즈푸"(芝罘)에 도착하였다.
"트리뷴"은 이것을 1906년 2월 8일자 "한국의 호소, 트리뷴에 보낸
황제의 성명서, 일본의 강요, 열강국의 간섭요청"이라는 제목으로 게재하였다.
"밀서 사건"은 로이터 통신을 통해 일본과 중국 신문에 다시 인용, 전제됨으로 새로운 화제로 대두되었다.
1907년 2월 28일자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 데일리 뉴스"가 논설란에 "트리뷴" 기사를 보도했다.
1907년 2월에는 “나라빚 청산을 통한 독립국가 건설”을 위한 국채보상운동이 전개되었다.
신문사 측은 국채보상운동을 추진하는 중심 기관임을 자처하고 나섰다.
"대한매일신보사" 사세(社勢)도 이러한 가운데 급속하게 신장되는 계기를 맞았다.
5월에는 새로운 한글판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는 등 민중 계몽에 노력하였다.
발행 부수는 1만 부에 달할 정도로 대단한 호응을 받았다.
"베델"(Bethel)은 "의병운동"에도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1907년 8월 군대해산을 계기로 "의병운동"이 확대되었다.
해산 군인의 가담으로 의진(義陳)이 강화되어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각지에서 전개되는 의병전쟁에 대한 상세한 보도는 한국인들에게 항일 의식을 한층 격발시키는 요인이었다.
의진(義陳)의 무력 항쟁을 보도하면서 일본군이 자행한 무자비한 보복과 무고한 민간인에 대한 잔인한 학살 행위를 폭로, 비판했다.
"베델"(Bethel)은 침략에 대한 저항은 너무나 정당할 뿐만 아니라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려는 한국인의 숭고한 의지임을 거듭 밝혔다.
1907년 경천사지 10층석탑을 일본의 궁내대신인 "다나카 미츠아키"(田中光顯)가
일본군 200명을 동원해서 톱으로 잘라서 일본으로 훔쳐간다.
"다나카"는 도쿄에 있는 자신의 집 마당에 경천사지 10층 석탑을 갖다 놨다.
이것을 알게된 "베델"은 격분하게 된다.
일본인들을 도둑놈이라고 원색적인 비난과 함께
"대한매일신보"에 거의 매일 같이 이 사건을 비난 보도를 한 것이다.
이 기사를 보고 미국인 "헐버트 박사"는 미국, 영국, 프랑스 등 각국에 이 내용을 알린다.
그렇게 되니 국제 여론이 너무나도 안좋게 흘러갔다.
어쩔수 없이 일본은 1918년 경천사지 10층 석탑을 조선에 돌려준다.
이렇게 돌려 받은 경천사지 10층 석탑은 1960년
경복궁에 전시를 했다가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 놓았다.
경천사 탑은 경복궁뜰에 쌓여 있다가 후에 복원을 하였다.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진 경천사 10층 석탑.
대부분의 석탑은 층의 수가 홀수인 반면 이탑은 짝수이기 때문에 특이하다.
"국채보상운동"과 관련된 각종 미담 사례는 자발적, 경쟁적인 의연금 모금으로 이어졌다.
시세 변화에 부응한 여성들도 조직적인 모금활동을 위한 감찬회(感贊會)를 개최하거나 패물폐지부인회 등 여러 단체를 조직하였다.
여성 단체의 경쟁적인 참여는 가정 부인이나 여학생 등에게 사회구성원으로의 자각과 아울러
치열한 생존경쟁 시대를 절감케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또한 여성 교육을 통한국민 국가 건설을 위한 대안도 제시하였다.
신여성의 사회 활동이나 교육 활동에 대한 대한매일신보사의 다양한 기사는 "베델"의 여성관과 무관하지 않았다.
신문에 대한 높은 신뢰도는 한국인들 항일의식 고취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쳤다.
그는 계몽운동에 대한 신속한 보도야말로 소통과 교류를 위한 소중한 밑거름으로 인식했다.
사립학교 설립운동과 야학운동 등은 식민지 노예교육에 반대하는 교육구국운동으로 전개되었다.
그는 문무쌍전에 입각한 근대교육을 한국 사회가 궁극적으로 나아갈 올바른 방향임을 거듭 강조했다.
일제는 "헤이그특사 사건"으로 고종(高宗)이 강제 퇴위 당하였을 때
"대한매일신보"가 한국인들을 선동했기 때문에 유혈 충돌로 많은 사상자가 났다는 억지 주장을 펼쳤다.
"베델"(Bethel)은 당시 유력한 배후 인물로 지목되어 감시와 압박을 받았다.
동료들과 함께 서울을 중심으로 전개된 양위반대운동을 자세하고 현장감 있게 알렸다.
당황한 일제는 "베델"(Bethel)을 추방시키기 위해 은밀하게 공작을 세웠다.
일제는 "베델"을 한국 침략의 가장 큰 장애물로 생각하여 그를 추방하는 동시에
발행하는 신문을 폐간시켜야 한다고 영국 정부에 끈질기게 요구하였다.
외교 교섭은 1904년부터 1909년 사망할 때까지 집요하게 계속되었다.
영국은 일본의 요구와 독자적인 판단에 따라 두 번이나 재판에 회부하는 등 "베델"의 반일 활동에 제동을 걸었다.
을사늑약 체결 후 은밀히 대책을 마련하던 일제는 1907년 1월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 데일리 뉴스"의
고종(高宗)의 밀서사진 게재를 빌미로 하여 마침내 4월에 본격적인 문제 제기에 나섰다.
일제는 4월 11일 각서를 주일 영국대사관에 전달함으로써 본격적인 외교 공세를 시작하였다.
첫 번째 재판은 1907년 10월 14~15일 이틀 동안 주한 영국총영사관에서 열려 근신형 6개월을 판결했다.
1년이 지난 1908년 6월 15~18일 주한영국총영사관에서 제2차 재판이 열렸다.
재판 진행을 위하여 상하이(上海) 고등법원 판사와 검사가 서울에 왔다.
베델의 유죄입증 증거물로 제시된 논설은 1908년 4월 17일자 미국인 외교고문 "스티븐스" 암살을 찬양한 기사와
8월 29자 "일백 매특발(메테르니)이가 능히 이탈리아를 압제치 못함"이라는 기사, 5월 16일자 "학계의 꽃" 등이었다.
재판 결과 금고 3주를 선고받았다.
또한 복역 후 6개월 근신 서약, 보증금 350파운드 납부도 선고받았다.
서울에는 영국인을 구금할 시설이 없었으므로 영국 군함에 타고 "상하이"에 가서 복역할 수밖에 없었다.
"베델" 도착 소식에 "상하이" 한인들은 면회를 신청하였으나 모두 거절되었다.
그가 구금되어 있는 동안 통감부는 "대한매일신보"와 관련자들에 대한 새로운 탄압 계획을 꾸몄다.
7월 12일 "대한매일신보사" 총무 "양기탁"을 국채보상 의연금 횡령 혐의로 구속하였다.
신문의 실무를 총괄하던 "양기탁"을 구속함으로써 신문 제작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려는 의도였다.
이 사건은 경성재판소가 "양기탁"에게 무죄판결을 내림으로 70여 일만에 종결되었다.
통감부는 "양기탁"을 구속하면서 실상은 "베델"이 국채보상금을 횡령했다는 혐의를 두었다.
이 사건으로 그는 심리적인 부담과 아울러 명예도 크게 손상되었다.
7월 11일 "상하이"에서 3주일의 금고형을 마치고 풀려나 17일 서울로 돌아왔다.
일본 언론이 허위 기사로 집중 공격하자 신문을 통해 결백을 주장하는 한편 법적 대응에 나섰다.
영국계 신문에 대해서는 명예훼손으로 고소하여, 12월 9~10일 상하이 영국고등법원에서 열린 재판에서 승소하였다.
1909년 1월 30일 발행이 중단되었던 "코리아 데일리 뉴스"를 속간하였다.
그러던 중 "베델"은 5월 1일 심장마비로 갑자기 사망하였다.
많은 한국인들이 애도하는 가운데 한강변에 위치한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혔다.
“나는 죽을지라도 신보는 영생케 하여 한국 민족을 구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알프레드 만함"(Alfred Marnham, 萬咸)은 1908년 5월 27일부터
"대한매일신보"의 발행 겸 편집인이 되었다가 "베델" 사후 소유권을 갖게 되었으나,
일제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1910년 5월 21일 "대한매일신보"의 소유권을 통감부에게 넘겼다.
한편 1910년 4월부터 기념비 건립을 위한 모금이 자연스럽게 시작되었다.
모금을 알리는 광고조차도 전혀 없었으나,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교포들이 89환 60전을 "대한매일신문사"로 보내오고,
하와이에 거주하는 한범태도 10전을 "황성신문"에 보내는 등 성금 기탁이 이어졌다.
양기탁, 신채호, 장도빈 등 동료는 물론 무수한 독자들도 1~2전씩을 흔쾌히 기부했다.
"베델"(Bethell, Ernest Thomas : 배설(裵說)의 묘.
사망한 지 1년 뒤인 1910년 6월 비석이 완성되었다.
앞면에는 "대한매일신보사장 대영국인 배설의 묘"라 쓰고 뒷면에는 "장지연"이 지은 비문을 새겼다.
그러나 일제는 한국 강점 후 뒷면의 비문(碑文)을 깎아 없애는 만행을 저질렀다.
단군기원 4243년 6월 대한국인 공립.
고양산인 장지연 찬.
금성후인 정대유 서.
패서산인 양기탁 영전.
자운거사 박용규 감제.
*좌측 하단에 남아있는 비석을 만든 분들.
비석 앞면 상단에 있는 뜻을 알 수없는 "문장"(紋章)
옆에 따로 세운 "裵說墓碑文"
* 배설 묘비문(장지연)
아! 여기 대한매일신보 사장 배설 공의 묘가 있도다.
그는 열혈을 뿜고 주머귀를 휘둘러서 2천만 민중의 의기를 고무하며
목숨과 운명을 걸어놓고 싸우기를 여섯 해 동안이나 하다가 마침내 한을 품고 돌아갔으니,
이것이 곧 공의 공다운 점이고 또한 뜻 있는 사람들이 공을 위하여 비를 세우는 까닭이로다.
공은 서기 1872년에 영국에서 탄생하여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이 가난하여 상업에 종사하더니
나이 열일곱에 일본에 건너와서 누거만(累巨万)의 재산을 모았으나 얼마후에 실패에 부딪쳐 울적한 마음을 금치못하다가
마침 일로전쟁이 터지게되매 서울에 와서 신문사를 창설하였으니 때는 정히 광무 8년 7월 이러라.
가재(家財)를 털어 사용(社用)에 충당하며 용왕매진(勇往邁進)하여
감히 기휘(忌諱)에 부딪치는 말을 직필(直筆)하매 이럼으로써 책책(嘖嘖)한 명성이 널리 세상에 떨치게 되었더라.
그러다가 필경 남의 모략에 걸려 상해 감옥에 구금되었고 수십일 후에 석방되었으나
이로 인하여 통분한 나머지 병에 걸리게 되어 드디어 다음 해에 영서(永逝)하고 말았으니
때는 곧 1909년 5월 1일이요 나이 겨우 37세라 양화진에 장사지내니라.
임종 직전에 유언하기를 “나는 죽지만 신문은 영속시키어 한국동포를 구호하기 바란다”하였으니 애닯기 그지 없도다.
유족으로는 아들 하나이 있어 겨우 여덟살 이엿다. 내 일찌기 상해에서 그를 만나 날이 새도록 함께 통음(痛飮)할 적에
비분강개하여 그 뜻이 매우 격렬하더니 이제 공의 묘를 위하여 글을 쓰게 되매 허망한 느낌을 이기지 못하겠도다.
이제 명(銘)하여 가로되 드높도다 그 기개여 귀하도다 그 마음씨여. 아! 이 조각돌은 후세를 비추어 꺼지지 않을지로다.
장지연 찬
단기 4243년 6월
단기 4297년 4월
대한민국전 언론인 단체 개건
김응현서.
해방 이후 전국 언론인들이 성금을 모아 1964년 4월 "신문의 날"에 작은 기념비를 세웠다.
대한민국 정부는 1950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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