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에 울산지역에 왔던 많은 선교사들 가운데, 실제로 울산의 교회를 맡아서 직접 목회를 한 최초의 선교사이자, 목회자인 분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분은 바로 Gelson. engel, 즉 왕길지 선교사입니다. 이 분은 우리 울산의 최초교회인 병영교회의 당회장을 맡아서 사역을 했으며, 언양제일교회, 월평교회, 송정 교회 등을 비롯해서 울산 지역과 그 외에도 부산, 경남 (동부) 지역에 여러 교회들을 설립한 분입니다. 또한 사역의 후반기에는 평양신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신학교육과 성경 번역, 찬송가 편찬 등 실로 다양한 분야에 큰 업적을 남긴 위대한 선교사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뛰어난 선교사를 우리나라에 보내주신 것이 실로 큰 축복이 아닐 수 없었는데, 그의 발자취를 살펴보면서 하나님의 손길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1. 왕길지 그는 누구인가? (그의 성장 배경과 신학적 배경)
우리가 복음을 받아서 신앙생활을 하게 될 때, 복음을 전해준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는가 하는 것이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왕길지 선교사는 1868년에 아버지였던 다니엘 엥겔과 어머니 사이에서 4남매의 장남으로 독일 뷔템베르크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니 비록 호주에서 파송 받았지만, 원래 그는 독일인이었습니다.) 그의 어린 시절은 매우 가난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의 아버지도 34세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으며, 그의 막내 동생은 태어나서 한 달만에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이런 가정적인 분위기로 인해서 일찍 신앙에 대해 눈을 뜨게 된지 모르겠습니다. 또한 그가 태어나고 자란 비템베르크는 독일 경건주의 운동의 거점 도시였기에, 왕길지 역시 그런 경건주의적 신앙의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후에 왕길지는 경건주의적 선교단체인 바젤선교회에 가담해서, 인도에서 6년간을 선교사로 일하다가, 호주 감리교회 목사의 딸인 클라라 바스(Clara Bath)양과 결혼하면서 호주로 이민을 가게 됩니다.
2. 그는 한국에 어떻게 오게 되었는가?
당시 호주 빅토리아 장로 연합교회에서는 멕케이선교사 후임으로 파송한 아담슨 선교사가, 기존의 먼저 와있던 여선교사들과 마찰을 일으켜서 갈등의 골이 매우 깊어져 있었는데, 심지어 이 문제가 선교사역 전체에도 큰 지장을 주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그 일을 잘 처리할 사람을 찾고 있었습니다. 마침 그때 왕길지 선교사가 호주에 와있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는 연결이 호주 빅토리아장로교회의 청년연합회의 이름으로 파송을 받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의 파송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아담슨과 여선교사들의 갈등에 대해서는 지난주에 알려드렸습니다만, 어쨌든 왕길지 선교사의 내한으로 인해서 이 문제도 잘 해결되기에 이릅니다. 그리하여 이후로 호주 선교부는 새로운 출발과 쇄신을 기하게 됩니다.
그의 가족 형편을 살펴본다면, 왕길지 선교사가 처음에 우리나라에 들어올 당시 (1900년 10월 29)에, 아내와 세 아이, 겔슨, 하버트, 도라를 데리고 일본을 경유하여 우리나라 부산에 들어왔는데, 그 뒤에 아내 클라라 버스가 1906년에 세상을 떠나자, 엥겔은 먼저 와있었던 호주 여선교사들 가운데 아내의 친구였던 부라운 선교사와 재혼하게 됩니다.
3. 그의 선교사역
1900년대 당시는 아직 목사 없는 교회가 절대 다수였기 때문에, 당시 선교사들에게는 지역 교회들을 순회하며 목회하고 전도하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사역의 형태였습니다. 왕길지 선교사도 예외는 아니어서, 정기적인 순회사역을 통해서 세례와 성찬, 그리고 여러 목회적, 행정적 활동을 하였는데, 당시에 먼저 와서 활동하고 있었던 아담슨(손안로) 선교사는 주로 경남지역의 서부지방을 담당했고, 왕길지 선교사는 부산을 비롯하여 울산, 기장, 서창, 언양 등 경남의 동부지방을 주로 담당하였습니다.
이렇게 순회하며 지역 교회들을 돌보는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일은 개 교회의 적절한 말씀의 봉사자를 선택하여 ‘조사’로, 혹은 ‘영수’로 교회를 섬길 수 있도록 교육하고 격려하는 일이었습니다. 왕길지 선교사를 도와서 울산의 병영교회를 비롯한 여러 교회를 섬기고 사역했던 조사중에서는 나중에 장로가 되고 목사가 되었던 심취명목사가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후에 병영교회 제 5대 담임목회자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4. 울산에서의 그의 활동
왕길지 선교사의 울산지역에서의 활동에 대해서는 그의 일기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는 부산의 부산진교회의 초대 목사로 재직하면서, 울산 지역을 포함한 이 동부 경남지역을 여러 차례 순회전도여행을 한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특히 이 경남지방에서의 사역 초기인 1901년과 1903년 사이에는, 적어도 세 차례 이상의 울산 방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1901년 4월 11(수)에 울산과 병영 도착. 그리하여 4월 17일까지 머물었고, 그 뒤에 같은 해 5월 24(금)에 병영 도착. 5월 27일(월)까지 머물다가 장기(지금의 포항 근처)로 떠났다가, 돌아오는 길에 경주를 지나 언양에 들러서 점심을 먹었는데, 이때 말이 난동을 부린 사실을 간단하게나마 언급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때의 이 말의 난동사건과 언양제일교회(구, 수남교회. 언양지방 최초 교회) 설립일화가 연결되는 점이 있어서, 매우 흥미를 유발시키고 있습니다. 그 뒤에 1902년 3월 20일 부활주일 예배를 병영에서 또한 드린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후 1년 뒤인 1903년 12월 11일(금)에 다시 울산을 방문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왕길지 선교사는 이처럼 울산을 비롯한 경남지방에서의 사역을 1905년까지 하다가, 1906년부터는 주로 신학교 사역과 교육사역에 중점을 두고 일한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1916년에는 아예 평양으로 옮겨가서, 전적으로 남은 생애동안 신학교 사역과 성경 번역 사역에만 헌신하게 됩니다.
다양한 은사와 음악적 소질, 특히 탁월한 언어적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왕길지 선교사는 그의 모든 열정을 아낌없이 우리나라를 위해 불태우다가, 70세가 되던 1938년에 은퇴하여 호주 멜버른으로 가서, 그 이듬해인 1939년 5월 24일에 영원한 고향 천국으로 영광스럽게 돌아가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