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의 초기 선교사 <7>
예원배 (芮元培) 선교사
1. 출생과 준비
울산지역 초기 선교사님들 가운데, 라이트 선교사(한국명: 예원배 또는 예알배)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예원배 (Albert C. Wright, 1880-1971)선교사님은, 조용하고도 사려 깊은 성격, 자상한 인품을 가진 분으로써, 우리나라가 일제에 의해 고통을 겪던 가장 힘든 시기에 무려 30년 동안이나 우리 민족과 함께 해준 고마운 선교사님이십니다. 우리 한국인을 아주 극진하게 사랑했던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뉴질랜드 오타고(Otago)에서 1880년 3월 3일 출생했습니다. 그는 오타고 대학(Otago University)을 졸업한 그는 신학교육을 받기로 작정하고 더니든(Dunedin)에 있는 녹스 신학교(Knox College)에 진학하였습니다. 신학교육을 마친 그는 노회로부터 강도사 인허를 받고 선교사로 헌신하기로 작정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뉴질랜드 장로교회는 해외선교에 대한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일찍 선교에 헌신했던 라이트는, 선교 열기가 뜨거웠던 호주로 이주하였습니다. 호주로 이거한 그는 1912년 9월 9일 목사안수를 받은 후 그는 1912년 9월 25일 한국 선교사로 파송되었습니다. 호주는 특히 1910년대를 즈음하여, 데이비스의 순교도 있었지만, 극동 지역선교담당자였던 프랭크 페이튼 목사의 한국 선교의 시급함을 주장한 선교 보고서와 그로 인해 세워진 전진정책 덕분에, 한국, 즉 조선(그중에서도 경남지역)을 최우선적인 선교전략 국가로 정해두고 있었습니다. 마침 그때 부름 받은 선교사가 예원배 선교사였던 것입니다. 참고로 그가 내한할 때, 함께 입국한 선교사들 중에는 켈리 목사 부부와 나피어 양 등도 있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는 현실적으로는 우리나라가 가장 힘들고 어려운 상황을 맞이했을 때, 참으로 고난의 시기를 지나고 있었지만, 오히려 하나님은 그러한 현실을 통해서, 복음 전파가 되도록 역사해주시고, 주의 신실한 선교사들을 보내어 주신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가장 귀한 복음의 선물을, 가장 어려운 시기에 우리나라에 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방식은 하나님이 즐겨 역사 속에서 행하시는 방식인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고난이 너무 많다고 해도, 결코 실망할 필요가 없는 이유도, 바로 이렇게 역사해주시는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8:28)
2. 한국에서의 사역
1) 1기- 마산을 중심으로
1912년 10월에 내한하여, 1942년 한국에서 떠나기까지 30년간의 예원배 선교사의 가장 중요한 사역은 교회를 순회하고 지역 교회를 돕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먼저, 마산에서 활동하였고, 그 다음에는 진주, 그리고 나중에는 부산지방에서 사역하였습니다. 그동안에 그는 늘 지역교회를 순회하였고 이 지역 교회 지도자 양성을 위해서도 크게 봉사하였는데, 마산에서는 1912~1924년까지 사역하셨습니다. 처음에는 대중교통 수단이 당시만 해도 특별한 것이 없어서 말을 타거나, 아니면 주로 걸어 다녔는데, 마침 자동차를 구할 수 있게 되어, 마산지방에서 자동차를 가진 첫 번째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이듬해인 1913년에는 먼저 내한해서 선교를 하고 있던 니븐 여선교사를 만나서 결혼을 하였습니다.
예원배 선교사님의 사랑과 온유한 품성을 보여주는 예화가 하나 있는데, 어느 날 예원배 선교사님이 지역 교회를 돌아보고, 마산 제비산에 있는 거처로 돌아가던 중에, 할머니 한분이 힘겹게 길을 가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예원배 선교사님은 차를 세우고 할머니를 타시게 해서는 짐까지 모시다드리겠다고 하고서는, 물어물어 그 할머니의 집에 겨우 도착을 했다고 합니다. 노쇠한 할머니가 길안내도 잘 못 하셨을 텐데, 더군다난 외국인으로서 한국 지리를 잘 모르는 입장에서 얼마나 고생을 했겠습니까! 그런데 막상 도착해서 할머니가 내리도록 자동차 문을 열어드리자, 할머니가 대뜸 하시는 말씀이, “내 신 어디 갔노?” 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이 할머니가 자동차를 처음 타보니, 신을 거기에다 벗어두고 맨발로 타셨던 것입니다. 할 수 없이 예원배 선교사님은 다시 차를 몰고 그 먼 길을 다시 갔고, 차를 탔던 신작로 길섶에 있던 흰 고무신을 찾아와서 그 할머니에게 전해주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결코 쉽지 않은 행동이었지만, 그분의 온화한 성품을 잘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2) 2기-진주를 중심으로
진주에서는 1924-1928년까지 사역을 하셨습니다. 이때, 부인인 니븐 선교사가 먼저 세상을 떠나는 사별의 아픔을 겪게 됩니다.
3) 3기-부산을 중심으로
부산에서는 1928~1942년까지 사역하셨는데, 주로 (30년간) 농촌을 중심으로 전도하셨고, 때로는 나병환자 수용소교회, 부산진교회, 동래읍교회 등에서도 협동목사로 봉사했습니다. 특히 부산 해운대 교회를 설립하여(1935년) 초대 당회장으로 봉사하였는데, 그의 사역과 인품을 사모하여, 해운대교회는 예원배 선교사의 기념교회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는 대한예수교장로회 경남노회가 예목사의 선교 25년을 기념하여 설립하기로 결정하여 세웠던 것입니다.
특히 이 기간 동안에, 우리 울산지역의 여러 교회들도 순회 사역을 하였습니다. 예를 들어서, 병영교회, 은편교회, 반원교회, 장검교회, 전읍교회, 천진교회, 보은교회, 동부교회, 남창교회 등을 순회하며 목회 사역을 펼치셨는데. 병영교회에는 1924년에 왕길지 선교사 후임으로, 순회선교사로 부임하여 사역하셨는데, 1933년에는 박종원 조사를 파송하여 호계 교회를 세우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1940년에 사임할 때까지 계속해서 병영교회 순회선교사로 있었습니다. 우리 울산뿐 아니라, 부산의 구포교회, 대연교회, 해운대 교회의 설립과 지원에 크게 기여하였고, 함안의 칠원교회, 밀양의 마산교회, 김해의 소덕교회(현 공항제일교회), 대지교회를 비롯한 경남의 70개 이상의 교회에 순회 당회장으로 일하며, 교회와 기도처를 돌보고, 많은 사람에게 학습과 세례를 베풀었다고 하니, 실로 놀랍고도 풍성한 선교와 목회의 열매를 거두었던 것입니다. 그것도 거의 독신으로 오랜 세월을 지나는 가운데, 그의 온 땀과 정성, 애정을 오직 우리 민족의 구원과 복음 전파에 쏟으신 것입니다. (나중에 예원배 선교사는 예순이 넘어서야 재혼을 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원배 선교사님의 이런 헌신과 사랑이 있었기에, 우리 울산과 경남 지방의 수많은 영혼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고, 천국을 알게 된 것이 아닐까요? 참으로 한 사람의 <헌신>이라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아, 주여! 우리에게도 이런 헌신의 마음이 있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살려내는 한 알의 밀알이 되게 하옵소서! 예원배 선교사님처럼 그렇게... 이런 기도를 감히 드려 보는 것입니다.
4) 4기- 신사참배로 인한 박해
일제의 약탈과 광분이 점점 도를 더해가면서, 그들의 신사참배강요를 반대하고 한국교회를 적극 지원했던 예원배 선교사는 결국 1942년 일제에 의해 추방당을 당하게 됩니다. 그가 설립한 해운대 교회도, 설립 이듬해인 1938년 6월 제41회 경남노회가 이곳서 모여 일제하의 기념비적 신사참배 거부결의를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일제의 핍박이 극에 달하자, 많은 선교사들이 귀국했어도 끝까지 남아있던 이 예원배 목사 부부도, 결국 다른 3명의 선교사와 함께, 강제 연금 및 출국을 당하고 맙니다. 30년간의 한국 선교 사역은 그렇게 끝을 맺고 말았던 것입니다.
3. 귀국과 말년
1942년 11월에, 강제로 본국으로 돌아가게 된 예원배 선교사는, 그 후에도 본국의 여러 교회들에서 남은 인생의 열정을 사역으로 불태우다가, 1971년 7월 7일에 91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게 됩니다. 그의 장례식에서는 한국에서 함께 일한 조지 앤더슨 선교사가, 아래와 같이 추모의 조사(弔詞)를 바쳤습니다.
나는 그처럼 쉬운 한국어로 한국인과 편안하게 대화하는 사람을 본 일이 없다. 설교에서도 쉬운 말로 복음을 전했다. 그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끝임 없는 순행은 실로 놀라울 정도였다. 그의 지역 교회순회는 그가 한국을 떠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가 작은 교회를 방문하는 경우, 그는 교인 한 사람 한 泳殆“ 일일이 관심을 보이곤 했다. 그가 하는 모든 일은 남을 섬기는 것이었다. 한국인들은 항상 그를 ‘사랑의 사람'이라고 불렀다."
해운대 교회 강달원 장로(88)님도 말씀하기를, "예원배 선교사님은 매우 겸손한 분이셨다"면서 "기도할 때 한국말이 서툴러 '거룩하신 하나님'을 말이 잘 안되니까 '껄룩 껄룩하신 하나님 감사하옵나이다' 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기억이 난다."고 지난날을 회고하고 있습니다.
그의 인품이 얼마나 훌륭하고 아름다웠는지, 경남 지역에서는 지금도 거의 사랑의 성자로, 전설처럼 남아있는 분이 바로 이분이십니다. 그 당시 예원배 선교사님에게 세례를 받았거나 교육을 받았던 신자들을, 그 사실을 늘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감사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실로 예수님의 인격의 향기를 몸으로 실천한 참된 주님의 일군이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은 진리 자체로만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그 진리를 실천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인격을 통해서 더욱더 강력하고도 멀리 전파된다고 하신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마5: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예원배 선교사님의 아름다운 인격과 성품이 오랫동안 우리 민족과 특히 경남과 울산의 여러 교회들에게, 역사 속에서 그 빛을 발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그 성품으로, 이웃에게 복음을 전해 줄 수 있는 자들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램이 더욱 절실해지는 이유는, 기독인들이 요즘처럼 사회로부터 따가운 시선과 많은 비판을 받고 있는 시대가 과거에 또 있었을까 싶은 현실이기에, 더욱더 간절해지는 것 같습니다. 주여!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예원배선교사님의 인격과 성품을 본받게 하옵소서! 이런 은혜가 꼭 임하시길 기도하면서 오늘 시간을 마치겠습니다. 이석배목사였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